철갑옷 두르고 바다 지켜내
단단한 목재로 박치기도 우수
2007년 04월 19일 | 글 | 편집부ㆍ |
 
임진왜란의 역사를 읽다보면 제대로 저항 한번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육군의 무기력함에 심한 분노와 좌절감을 느낀다. 그래도 우리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살려준 싸움은 이순신 장군이 이끈 해군의 승리일 것이다. 승전보의 한가운데는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전술과 함께 거북선을 비롯한 우리 전투함의 활약이 있었다.

거북선을 덮은 튼튼한 철판과 날카로운 가시 앞에 왜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임진왜란 때 거북선의 활약은 대단했다. 수백척의 일본 전함 속을 종횡무진 휘젓고 다니면서 도망가는 배는 천자총통이나 황자총통을 비롯한 대포로 망가트리고 가까이 어른거리는 배는 용머리로 화염을 내뿜어 태워버린다. 하지만 거북선의 진짜 모양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너무 부족해 조상의 위대한 발명품을 명확히 재현하지는 못 하고 있다.

거북선의 생김새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기록은 선조 25년(1592) 5월 1일자 실록에 실렸다. ‘이순신은 전투 장비를 크게 정비하면서 자의로 거북선을 만들었다. 이 제도는 배 위에 판목을 깔아 거북 등처럼 만들고 그 위에는 우리 군사가 겨우 통행할 수 있을 만큼 십자로 좁은 길을 내고 나머지는 모두 칼·송곳 같은 것을 줄지어 꽂았다. 그리고 앞은 용의 머리를 만들어 입은 대포 구멍으로 활용했으며 뒤에는 거북의 꼬리를 만들어 꼬리 밑에 총 구멍을 설치했다. 좌우에도 총 구멍이 각각 여섯 개가 있었으며, 군사는 모두 그 밑에 숨어 있도록 했다. 싸울 때는 거적이나 풀로 덮어 송곳과 칼날이 드러나지 않게 했는데, 적이 뛰어오르면 송곳과 칼에 찔리게 된다’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고슴도치 지혜를 빌린 것이다.

거북선이 탄생된 이유는 전투환경의 변화다. 임란 당시 주력군선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사부와 노군은 판옥 안에 있고 포를 쏘는 포수는 옥상에 있어 전투시 포의 명중률을 높이고 기동을 원활히 하려 했다. 그러나 선체가 커서 속력이 느리고 개방된 위치에서 포를 쏘던 포수들이 적탄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전투시 적진을 혼란케 만든 후 판옥선의 우수한 화력을 이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거북선을 만들었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장점인 노 요원과 포 요원을 구분하고 그들 모두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덮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속력을 보완키 위해 선체를 작게 만들었다.

거북선의 갑판이 둘이라는 점과 포가 판옥선과 같이 상갑판에 위치했다는 것은 정조 때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도 언급돼 있다. 통영 거북선을 설명하는 부분에 “거북선의 난간을 따라 마루를 깔고 마루 주위에 방패를 꽂고, 그 위에 또 난간을 설치했다. ... 현측 난간 좌우에 각각 포혈 10개 복판(덮개) 좌우에 각각 포혈 10개와 복판 좌우에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는 것은 거북선의 갑판이 중갑판과 상갑판으로 분리돼 있음을 의미한다.

영조 때 균세사로 연해지방을 감찰하고 돌아온 박문수는 “이충무공의 기록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 거북선의 복판 좌우에 6문의 포문이 있다”고 하고 임란당시 거북선은 주갑판에 노군과 사수(활쏘는 사람)가 위치하고 포수는 상갑판에 위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증언에 따르면 거북선은 3층 구조로 1층은 수군의 침실과 군량 무기 창고로 이용됐으며, 2층은 노군과 사부가, 3층은 포요원이 위치해 전투시 포와 활 그리고 기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던 군선이었다.

튼튼한 몸체로 시원하게 한 방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거북선 내부.
거북선은 ‘박치기’에서도 힘을 발휘했다. 선조 29년(1596) 11월 7일 기록에 따르면 “거북선은 사면을 판옥으로 꾸미고 형상은 거북 같으며 쇠못을 옆과 양머리에 꽂았는데, 부딪치는 왜선은 모두 부서진다”고 했다. 박치기 한방으로 상대를 메트 위에 시원하게 눕히는 프로레슬러 김일 선수의 모습이다. 조금은 무지막지한 수법 같지만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이고 속시원한 공격이었다. 박살난 일본 배에서 아우성쳤을 일본병사를 생각하면 땅위에서 당한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반쯤이라도 풀리는 듯하다.

박치기에 이기는 데는 우선 들이받는 배의 강인한 구조와 함께 단단한 뱃몸이 필요하다. 우리 배가 강한 이유는 무엇보다 배의 겉판이나 밑판을 만든 나무의 강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배는 다른 나라의 배와는 달리 등뼈라고 할 수 있는 용골이 없고, 밑이 편평한 사각통 모양의 평저선 형태다. 구조가 이렇다보니 배의 강도가 약할 것은 당연하다. 이런 단점을 보강하기 위해서는 두꺼운 판자를 쓸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싸움배에 관한 기록과 당시 숲의 구성을 볼 때 거북선의 뱃몸은 대부분 소나무로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소나무는 여름에 만들어진 단단한 세포가 나이테 속에 많이 포함돼 있어, 배의 겉판을 만드는 나무 종류 중에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단하다.

배 자체만으로도 튼튼한데, 박치기에 알맞도록 주요 부위는 더 강한 나무로 보강했다. 조선시대 싸움배의 앞부분은 진목, 즉 참나무로 만들었다. 참나무는 1cm3에 5백kg의 압축강도를 견딜 만큼 단단하고 질기다. 또한 이보다 더 단단한, 참나무의 다른 종류인 가시나무도 적극 이용됐다. 정종 18년(1794) 호남 위유사 서용보는 임금께 올린 글에서 ‘가서목(가시나무)은 강하고 질긴 좋은 재목으로서 군용으로 수요가 크다’고 했다.

이처럼 크기도 클 뿐더러 참나무를 비롯한 단단한 나무로 주요부위를 보강한 우리 배로, 일본 배를 향해 ‘돌진 앞으로!’를 감행하면 다음 상황은 볼 것도 없다. 꼭 정면 박치기가 아니라 옆면으로 부딪쳐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우리 배를 만들 때 배의 너비 방향을 고정하고 튼튼히 할 목적으로 장쇠라는 가로 버팀목을 쓰는데, 이 역시 참나무나 가시나무다. 기본적으로 조선재료의 우수성 때문에 임진왜란의 해전에는 일본 배가 맥을 추지 못했다. 여기에 이순신 장군의 꾀가 더해져 육지는 불타도 바다는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박상진의 ‘박치기 명수 거북선의 비밀’, 장학근의 ‘우리 역사 속의 군함’ 기사 발췌 및 편집>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