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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닝 티와 경쾌한 새소리로 아침을 시작했다. 건너편 롯지 창문으로 트레킹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분주하다. 이들은 이제 트레킹 초반이니 힘이 넘칠 것이다. 나는 어제 제법 많이 걸은 탓인지 온 몸이 욱신거렸다. 아침 먹고 7시에 출발했다. 길은 완만한 오르막 바위길이다. 계곡 바닥에서 200여 미터 위로 올라와 있어 계곡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계단식 밭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 히말라야 중산간 지대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고개에서 뒤를 돌아보니 돌출된 절벽 위에 자갓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길은 이제 내리막길이다. 중간 중간에 집이 하나 둘씩 흩어져 있다. 돼지들은 키우는 집도 있다. 돼지 한 마리가 우리가 지나가자 잽싸게 머리를 내민다. 이 녀석도 지나가는 트레커를 보는 낙으로 사는가 보다. 얼마 후 멀리 계곡 아래로 샹제(syanje, 1136m)가 보인다. 아치형 현수교가 있는 샹제에는 8시에 도착했다. 현수교를 지나 동쪽 사면으로 넘어오니 또 오르막이다. 20분을 올라 오르막 꼭대기에 있는 롯지 앞에서 쉬었다. 멋진 폭포 줄기가 건너편 절벽에서 큰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 수량이 엄청나다. 그곳부터 마을이 계속 이어지고 넓은 경작지가 펼져져 있다. 노란 벼는 아직 수확 전이다. 논 사이로 난 평탄한 길을 아침 햇살을 받으며 가노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집 앞에 옥수수 다발을 묶어 저장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스쳐가는 마을도 세련된 것이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돌아 와 당시의 기록을 보니 역시 지금과 다른 분위기다. 그동안 이곳도 발전이 된 것이다. 가장 획기적인 것은 건너편 산허리로 찻길이 나고 있는 상황이다. 설마 안나푸르나 트레킹 루트에 찻길이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터라 충격이 컸다. 오르막과 내리막의 좁은 절벽길과 여러 번 강을 건너야하는 길이라 결코 찻길이 날 수 없다고 호언장담했기 때문이다.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을 마치고 다시 칠불사로 돌아 왔을 때 같이 정진하던 영탄스님이 히말라야 트레킹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이야기 도중 "혹시 트레킹 길도 앞으로 차가 다닐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하고 물었다. "절대로, 영원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내 경험 상 도저히 차가 다닐 길이 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내 생각은 순진한 것이기도 하고 단순한 것이기도 했다. 나는 반드시 수백 년 된 주 트레일에 찻길을 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7년 후 저렇게 건너편으로 길을 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건 마치 졸다가 뒷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다. 그렇지,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자세히 보니 포커레인 하나가 작업중이다. 길을 내자니 나무를 배고 산허리를 깎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그 결과 해마다 몬순이면 산사태로 길이 무너질 것은 뻔하다. 오래 다져진 길이나 산도 무너지는데 새로 팠으니 오죽할 것인가. 몬순이 끝나면 복구작업을 할 것이고 그러면 다음 몬순 때까지는 통행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같으면 해마다 반복되는 이런 일을 지겹다고 하겠지만 네팔에서는 수백 년 동안 반복해오던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그런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에서 찻길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곳은 찻길이 강 건너로 나 있으니 견딜 만하지만 베니-좀솜 구간은 트레일이 찻길에 묻혀 버려 걸을 맛이 나지 않는다. 작년 무스탕 트레킹 때 좀솜에서 까그베니 가는 깔리 간다키 강바닥길에서 자주 오토바이를 만났을 때 기분은 '영 아니올시다'였다. 트레킹을 마치고 좀솜에서 마르파로 산책 가는 길에서도 오가는 오토바이의 소음과 길을 비켜주어야 하는 짜증나는 일을 겪었다. 앞으로 안나푸르나 일주 트레킹은 좀솜에서 운행을 마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안나푸르나 지역에는 약 10만 명의 주민들이 420개의 거주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주요 종족으로는 구릉족(Gurung), 마가르족(Magar), 보티아족(Bhotia), 타깔리족(Thakali), 마낭기족(Manangis)이다. ACAP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1226종의 식물, 102종의 포유류, 474종의 새, 39종의 파충류, 22종의 양서류가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도로건설에 대하여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주민들은 도로가 완성되면 그들의 마을이 다질링이나 캐시미르 또는 스위스처럼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한다는데 과연 그럴지는 두고 볼 일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꿈도 야무지시군요."다. 내가 보기엔 풍광이 좋은 동네는 트레킹이 어려운 노약자들도 올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동네는 그나마 지나가던 일반 트레커들도 그냥 차로 통과할 것이다. 그런데 트레킹을 하지 않고 단지 전망을 즐기기 위해 단체 여행자들이 낭떠러지가 있는 위험한 비포장길을 통해 이곳에 올 것 같지는 않다. 여기가 아니더라도 포카라 사랑코트나 담푸스, 카트만두 나가르코트가 훨씬 더 접근이 쉽고 시설도 좋다. 혹 그렇게 올 사람들은 지금도 비행기를 타고 좀솜으로 온다. 좀솜 이전 마을은 히말라야 풍광을 즐길 만한 곳이 없다. 마르샹디 지역도 마낭 정도는 와야 히말라야 설산을 잘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 안나푸르나 지역의 도로건설은 관광산업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제 트레커들은 안나푸르나 대신 차가 없는 쿰부와 랑탕으로 방향을 돌릴 것은 자명하다. 트레킹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차가 다니지 않고 오직 두발로 다니는 일)가 상실된 곳을 더 이상 찾을 이유가 없다. 나도 다음에 나르-푸가온 트레킹과 틸리초 종단 트레킹을 위해 이곳을 찾을 기회가 있으면 좀솜을 종착지로 삼을 생각이다. 좀솜 아래로 찻길이 나면 좋은 점이 하나 있기는 하다. 좀솜에서 날씨가 나빠 비행기가 뜨지 못할 경우 차량으로 포카라까지 이동할 수 있다. 그러나 좀솜의 롯지 주인 입장에서는 손님을 계속 붙잡아두지 못하는 결과가 되므로 결국 수입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바훈단다(Bahundanda, 1311m)로 오르는 급경사 언덕이 나타났다. 서양 단체 트레킹 팀이 자주 지나간다. 캠핑 장비를 갖춘 팀도 있다. 지그재그로 힘들게 오르다 중간에서 쉬었다. 계단식 논이 가지런한 평화로운 중산간 지방의 모습이 보인다. 점점 많은 트레커들이 토롱 라를 향하고 있다.
마을에는 롯지와 식당, 가게들이 많지만 깔끔한 분위기는 아니다. 그것은 이곳이 트레커들이 묵어 가는 곳이 아니라 점심이나 먹고 그냥 통과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을 중앙 광장에 큰 보리수 나무가 있다. 그곳에서 계곡쪽(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마운틴뷰(Mountain View)> 호텔이 나오는데 날씨가 좋으면 그곳에서 마나슬루와 람중히말의 멋진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롯지 식당에서 TV를 보니 문명사회로 돌아 온 것이 실감난다. 이집 꼬맹이 여자 아이가 맹랑하다. 남아 있는 풍선이 하나 있어 주었더니 점심 먹고 출발할 때 우리들에게 잘가라고 악수를 청한다. 상당히 사교적이다. 길은 바훈단다 중앙 광장 바로 아래로 나 있다. 황토 언덕 사이를 뚫어 만든 내리막길이라 어렵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오르막의 힘든 코스는 없다. 그냥 슬슬 소풍가듯 가면 내려가면 된다. 아래로 내려오니 특이한 모습의 동산이 앞에 단독으로 우뚝 서 있다. 그 꼭대기까지 계단식 밭이 만들어져 있다.
다리 아래에는 넓은 캠프장이 있는데 제법 인원이 많은 서양의 단체 트레킹 팀이 캠프를 차려 놓고 있다. 나디라는 지명이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전에는 짐작조차 못했지만 지금은 낯이 익다. 그렇다. 마나슬루 바로 아래의 산이 나디출리(7871m)이고 나디콜라는 그 산의 남쪽 빙하에서 발원한 물이 흘러 내려와 만든 계곡인 것이다.
오후 1시 30분. 오늘 우리의 목적지는 바훈단다지만 이 상태로 2시간 이상을 더 걷는 것은 무리인 것 같아 일정을 중지하고 가장 가까운 마을인 나디에서 묵기로 했다. 우리가 묵을 숙소는 까말라(Kamala) 호텔. 이 집 큰딸의 이름을 딴 롯지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나무계단을 올라가 이 층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니 어제보다는 훨씬 아늑했다. 나무로 지은 집이라 걸을 때마다 삐거덕거린다. 이층에는 방이 네 개인데 나무 판자로 막은 벽으로 옆방 사람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렸다. (붓다아이, <2000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day 1) 롯지촌 아래 캠프사이트가 있는 하이커스 롯지 뒷마당에 캠프가 설치될 동안 샤워를 했다. 이곳도 따뜻한 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날씨가 따뜻하니 찬물도 시원한 느낌이 든다. 트레킹을 시작한 후 처음 하는 샤워다. 트레킹 끝나기 하루 전 날에야 샤워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모두들 샤워를 하고 젖은 옷을 캠프 앞에 설치되어 있는 긴 빨래줄에 널으니 캠프가 빨래터 풍경으로 변했다.
2005년 가을 ABC트레킹을 위해 산 보명화 보살님의 등산화 밑창도 이번에 헤지기 시작하여 수리를 위해 보낼 예정이라고 하여 나중에 같이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기까지 여섯 달이 걸린다고 한다. 보명화 보살님은 이번까지 세 번의 트레킹밖에 하지 않았는데도 밑창이 헤진 것은 트레킹을 위해 몇 달 전부터 매 주 관악산을 등반한 하드트레이닝의 결과다. 얼마나 열심히 체력단련에 힘썼는지 알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었다는 소감이다. 빨래를 널고 느긋하게 오후 차를 마시고 있으니 마을 부녀회에서 찾아왔다. 저녁 파티 때 공연을 하겠다고 해서 그러시라고 했다. 공연비는 기부금 형식이라 정해지지 않고 기부자의 뜻에 따른다고 한다. 트레커들이 오면 롯지 주인만 수입을 올릴 뿐 마을은 직접적인 수입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 공연을 통해 마을기금을 모으고 있다. 이러 공연은 캠핑트레킹 단체팀이 아니면 요청할 수도 없으니 마을 사람들에게도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나디의 경우 안나푸르나 서키트를 시작하는 캠핑팀과 마나슬루 서키트를 마친 캠핑팀이 통상 머무는 길목이라 입지조건이 좋다. 저녁을 먹고 7시부터 파티가 시작되었다. 먼저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타시가 한 말씀 한다. 짐작컨대 그동안 수고했다는 말일 것이다. 트레커 대표로는 내가 영어로 짧게 하고 타시가 통역했다. "여러분이 없었으면 이 멋진 마나슬루 서키트 트레킹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고 많았다. 그리고 우리 모두 여러분들에게 감사하게 생각한다." 대충 이런 내용이다. 이제 팁을 나누어 줄 차례다. 팁을 위해 카트만두에서 루삐를 많이 바꾸어 왔다. 절집에는 '평등공양 차등보시'라는 원칙이 있다. 공양물(음식과 물품)은 지위를 막론하고 똑 같이 배분하고 보시(현금)는 지위에 따라 배분되는 액수가 다르다. 높은 직책을 가진 사람이 더 받는 것은 오히려 공평한 일이다. 그 원칙에 의해 포터들과 키친보이들에게는 1000루삐씩 주었다. 주방장 노르지와 세르파 보조인 겔루에게는 30불, 밍마 세르파에게는 40불, 가이드 타시에게는 50불 주었다. 모두들 만족한 표정이다. 쫑파티는 공연단의 가무로 시작되었다. 원래 오기로 했던 부녀회는 다른 곳으로 가고 대신 교사와 30여 명의 중고등학생들이 왔다. 대표로 몇 명의 아이들이 나머지 학생들의 장고 반주와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이 페이지의 배경음악으로 일부 실었다). 기부금으로 2000루삐를 주었고 따로 1000루삐를 백산스님과 혜명화 보살이 만들어 주었다. 3000루삐면 50불 정도의 돈이다. 그냥 학교를 방문했어도 기꺼이 그 정도는 기부했을 것이다. 학생들의 단독 공연 후 모두 함께 춤을 추는 뒷풀이가 시작되었다. 포터들은 수줍어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춤을 추지 않고 손뼉장단만 맞춘다. 세르파들과 주방팀이 가장 활기차다. 트레커들도 마나슬루 트레킹 회향을 자축하며 같이 어울려 춤을 추었다. 봄날처럼 따뜻한 밤 하늘로 노래와 풍악소리가 울려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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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에 나와서도 꼭 한식을 고집하는 노인네들이 아니라면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특히 히말라야에 들어와서는 더 그렇다. 식성이 까다로와 잘 먹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밉다. 트레킹 때는 더 밉다. 에너지 부족으로 당사자가 고생하게 되니 옆에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하더라도 운행에 '민폐'를 끼칠 수 있다. 7시 15분 출발. 롯지 바로 아래에 있는 카니를 지나니 바로 현수교가 나온다. 빔탕 이후 처음으로 강을 건넜다. 대나무와 무성한 잡목 숲으로 이어진 산허리길이다. 얼마 후 언덕에 오르니 멀리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의 주 트레일이 지나는 마을 다라빠니(Dharapan)가 보였다. 그 아래 보이는 마을은 톤제(Thoje, 2015m)다. 톤제 아래로 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현수교가 보인다. 그곳까지 가려면 한참 내려가야 한다. 출발한지 1시간 지난 8시 20분 경 출렁다리 앞에 도착했다. 힘룽히말과 체오히말에서 발울한 두드콜라의 최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아주 길다. 안나푸르나 지역은 강폭이 넓어 다리가 항상 길다. 이곳에 비하면 마나슬루 지역의 다리는 높고 짧다. 다리를 건너다 중간쯤 되는 지점 난간이 뻥 뚫려 있어 무심코 지나가다 깜짝 놀랐다. 톤제 마을 입구의 카니는 티베트 초르텐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지금까지의 마을과는 다른 전형적인 안나푸르나 트레킹 롯지 마을의 깔끔한 모습이다. 마당에는 백일홍이 한창이고 길가 담장에는 장작을 많이 쌓아두었다. 지나가던 한 집 마당에는 어미 염소가 풀을 먹고 있는데 새끼는 그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정겨운 모습이 보인다. 톤제에서 다시 강을 건넜다. 이번은 마르샹디 강이다. 강을 건너 조금 오르니 바로 다라빠니가 나온다. 안나푸르나 주 트레일로 접어든 것이다. 띨제에서 1시간 30분 걸렸다. 속도가 빠른 팀이라면 빔탕에서 다라빠니까지 당일 바로 올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지나친 속도는 트레킹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골목을 빠져 나와 안나푸르나 주 트레일과 만났다. 7년 만이다. 입구에는 마낭과 라르케로 가는 안내판이 있다. '주의!(Notice)'라는 말을 세 번이나 써 놓아 처음에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는 사람이 빔탕 쪽으로 가려면 따로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말을 써 놓은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다. 빔탕까지는 안나푸르나 보존지역에 해당하므로 마나슬루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사람은 따로 안나푸르나 지역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안나푸르나 허가서만 있으면 빔탕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삼거리에 체크포스트가 있다. 우리는 이미 카트만두에서 ACAP허가를 받았다. 타시가 체크하러 간 사이 잠시 그 앞에서 쉬었다. 몇몇 사람은 허가서를 카고백에 깊이 넣어 둔 상태라 보여줄 수 없었지만 단체로 움직이는데 빼 먹을 일이 있겠느냐고 말해 그냥 넘어갔다. 세 가지나 되는 트레킹 허가서는 나눠주지 말고 처음부터 타시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았다. 조금 내려가니 우리가 내려 온 두드콜라 계곡이 왼편으로 보였다. V자 계곡 아래 꼭지점에 하얀 설봉이 조금 보인다. 마나슬루는 아닐 것이고 라르키아 피크 근처 쯤이나 될 것이다. 지난 16일 동안 저 산군 건너편에서 빙 돌아 깊고 깊은 계곡과 눈덮인 높은 고개, 그리고 다시 골짜기를 지나왔다. 언제 다시 또 그 길을 걷게 될런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이다. 아래에서 서양 노인네 단체팀이 올라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의 길은 역시 넓다. 그리고 전체 규모가 크다. 마르샹디 강도 마나슬루 지역의 부리 간다키 강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골짜기도 깊다. 마을도 자주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조랑말 행렬은 일상적인 풍경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티베트와의 무역로였다는 관록이 길에 나타나 있다.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은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넓고 깊은 장대한 계곡과 5416m의 설산 고개, 그리고 티베트 고원 풍의 황량한 들판과 넓고 바람이 거센 깔리 간다키 강, 수백 년간 티베트와의 교역으로 다져진 마을, 저지대의 힌두 문화와 계단식 논밭.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이다. 이런 생태계와 풍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트레킹 코스는 네팔에서 이곳 말고는 없다. 경작지를 찾아 강 양쪽으로 마을이 있으니 계속 이쪽 저쪽으로 건너갔다 건너와야 한다. 7년 만에 만난 길이라 그런지 영 낯설다. 그 때는 히말라야 트레킹이 처음이었으니 제대로 주변을 감상할 정신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은 마나슬루 '깡촌' 마을을 본 직후여서 더 그럴 것이다. ABC, 쿰부, 랑탕 트레킹은 이런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지만 최근 방문한 곳이 공교롭게도 네팔에서도 오지인 무스탕과 마나슬루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다리빠니에서 다시 현수교를 건너 왼편으로 넘어간 후 카르테(Karte)에 도착했다. 새로 신축중인 롯지가 몇 채 보인다. 이곳에 도나(Dona) 빙하호수로 가는 길이 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다라빠니의 안내판도 그렇고 이 안내판도 7년 전에는 본 기억이 없다. 도나 호수로 가려면 이곳 동쪽 도나콜라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마헨드라왕 자연보호재단(KMTNC)의 홈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트레킹 초심자는 이런 코스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 그러나 네팔 3대 메이저 트레킹 코스를 마치고 캠핑이 필요한 코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 이런 코스도 '땡기기' 시작한다. 안나푸르나 서키트를 캠핑트레킹으로 할 경우 이곳에서 도나 호수를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곳에 다녀오면 자연스럽게 고소적응이 된다. 그리고 다시 틸리초 호수를 다녀오면 더 좋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금을 더 많이 모아야 한다. 카르테를 지나가는데 한 롯지 식당 입구에 "맛있는 김치 있어요"라고 쓰여 있는 나무판이 놓여 있다. 금년부터 인천-카트만두 직항 정기노선이 생기면서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점점 더 많이 방문하고 있다는 증거다. 롯지촌을 벗어나니 바로 강을 건너는 현수교가 나와 다시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왔다. 10시 경에 나타난 작은 마을 코또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롯지 식당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조금 이르긴 해도 다음 마을인 딸(Tal)까지 가려면 여기서 1시간 이상 더 가야 한다. 이미 주방팀이 먼저 도착하여 음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얼마 후 바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11시 15분에 다시 출발했다. 계속 트레커들이 올라오고 있다. 중년 이상의 트레커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최근의 경향이다. 골이 깊은 안나푸르나 서키트 길은 초반 계곡길에 폭포가 많다. 마나슬루도 폭포가 많지만 이곳도 그에 못지 않다. 규모도 엄청 나 처음 보는 사람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카르테 아래의 폭포는 지그재그 다단계형의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쏟아지는 물의 양도 굉장하다. 골짜기 풍경이 웅장하다. 다시 현수교를 건너 강바닥으로 내려섰다. 원래는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지만 건기에는 강바닥을 이용할 수 있으니 힘을 덜 수 있다. 위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길이다. 잠시 후 오르막을 오르고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가 강바닥 길을 걷는다. 그러나 곧 오르막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안다. 계곡은 항상 이런 식이어서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절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도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다. 롯지가 중간에 많아 언제든지 쉬어 갈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아주 많아 하루 서너 시간 운행으로 만족할 때의 일이다. 그런 식의 운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소한 오후 두세 시까지 운행하게 되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힘들다. 거기에 4000m 가까이 가면 고소의 영향으로 한 걸음이 천근같다. 그러므로 트레킹을 가기 전 근력과 지구력 강화훈련을 차분히 해 두어야 덜 고생한다. 절벽길에 올라 코너를 도니 멀리 딸(Tal, 1707m)이 보인다. 이 절벽길도 바닥의 흙과 축대를 보니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상계에서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12시 25분 도착한 딸 마을도 그동안 많이 변했다. 좋게 보면 세련되었고 아쉬운 마음으로 보면 자본주의화 되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가치관은 인심을 각박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런 도시 문명을 벗어나 히말라야에 왔는데 다시 이곳에서 그런 분위기를 접하는 일은 썩 기분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곳은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코스에 있는 마을 중 유일한 강변마을이며 가장 목가적인 분위기를 지닌 마을이다. 주변의 산이 높고 계곡이 넓다. '딸'이란 '호수'를 뜻하는 네팔말이다. 한때 이곳은 호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아래쪽으로 침식작용이 일어나 물이 많이 빠지자 넓은 터가 생겼고 그곳에 마을이 들어섰다. 안나푸르나 서키트를 한다면 이곳에서 하루 묵는 일정을 고려할 만하다. 네팔 행정구역에서 이곳 딸까지 마낭지역이다. 이 아래부터는 람중지역이다. 안나푸르나 산군의 동쪽지역은 크게 람중(Ramjung) 지역과 마낭(Manang) 지역으로 나눈다. 딸 이전의 마을은 람중 지역이다. 람중 지역은 낮은 지대여서 산에 계단식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마낭 지역은 험한 산악 지대여서 계단식 논을 잘 볼 수 없다. 쉽게 티베트 풍의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람중 지역은 힌두문화권이고 마낭 지역은 불교문화권이다. 딸은 마낭 지역의 가장 남쪽 마을이다. 마을은 제법 큰 편이다. 롯지와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ACAP 체크포스트도 있다. 큰 마을답게 우체국도 있고 보건소도 있다. 그러나 약품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이곳 사정이다. 마을을 벗어나니 길이 왼편 산기슭으로 급하게 오른다. 작년 몬순 때 홍수로 마을이 고립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물길이 바뀌어 원래의 길을 덮쳤고 그 물길이 고착되어 원래의 길은 물 속에 잠겨 버렸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도도한 물길을 이 낙후된 지역에서 인위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차라리 새로 길을 내는 것이 더 쉽다.
산중턱에서 보니 멀리 앞쪽으로 원래의 길이 보인다. 카니에서 강바닥으로 내려오는 길을 강물이 막고 있다. 카니 아래로 보이는 현수교가 바로 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산중턱에 있는 가랑(Gharang)이라는 마을을 지나 다라빠니로 가는 길이다. 산기슭길을 한참 지나 입구에 도착하니 마오바디들이 책걸상을 갖다놓고 통행세를 받고 있다. 우리는 이미 마나슬루 지역에서 냈기 때문에 그냥 통과했다. 그곳에서 보이는 가야할 길이 가물가물하다.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정신없이 올라가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트레킹이다. 그래서 체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험한 히말아야 트레킹 길도 산악자전거를 타기 위해 오는 친구들도 있다. 서양인 친구나 앞에 오고 뒤에 네팔인 친구가 따라 온다. 짐을 진 포터는 뒤에 따라 올 것이다. 어쩌면 이들보다 앞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디스커버리 채널인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인가에서 본 적이 있다. 대단한 친구들이다. (나도 일주일만 더 젊었으면 산악자전거를 탔을텐데... 아깝다, 일주일!) 멋지고 웅장한 폭포를 향해 강 아래쪽으로 내려 갔다. 긴 폭포가 아주 인상깊다. 폭포를 지나면 곧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 오른편 기슭으로 오르니 참제(Chemhe)가 나왔다. 막 오후 3시를 지나고 있다. 마을 중간에 있는 큰 롯지 3층짜리 목조 건물인 라사(Lahsa) 호텔에 짐을 풀었다. 우리 방은 3층에 있는 방이다. 방은 갈수록 좋아졌다. 복도를 돌아가니 화장실 겸 샤워장도 있다. 미지근한 물에 땀을 씻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물을 데우기 때문에 이 시간까지 미지근한 물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다. 옷가지를 빨아 발코니 빨랫줄에 널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 잘 마를 것 같았다. 빨래집게가 줄에 몇 개 있었다. 빨랫줄은 준비했는데 빨래집게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빨래집게도 다음부터는 꼭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숙소에는 빨래집게가 없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현지에서는 요긴하게 쓰인다. 여기서 한국사람들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을 못했다. 3층에 올라가니 안쪽 방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반가웠지만 짐을 풀고 씻는 것이 급선무라 나중에 확인을 하기로 했다. 내가 씻고 나서 덕문스님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한 청년이 왔다. 양평에 산다는 남기범(23세)이라는 친구였다. 세 사람이 같이 왔는데 스님도 한 분 있다고 한다. 그 친구가 가고 잠시 후 선일이라는 스님이 왔다. 초면이었다. 그러나 내가 덕문스님과 같이 왔다고 하니 깜짝 놀란다. 알고 보니 덕문스님과는 수계도반이며 여러 철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번 여름에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정진했다고. 잠시 후 덕문스님과 반가운 해후를 했다. 덕문스님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라 무척 반가워 한다. 또 한 사람은 서울에서 온 이정숙양(여, 29). 세 사람은 각기 따로 인도를 여행하고 네팔로 들어와 포카라에 있는 인드라 호텔에서 만났으며 호텔 분위기가 트레킹을 하는 분위기여서 덩달아 트레킹에 나섰다고 한다. 파카 등 장비도 포카라에서 빌렸다는데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준비한 우리보다 엉성했다. 신발도 운동화를 신고 있다. (붓다아이, <2000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day 3) 원래는 이곳 참제에서 오늘 운행을 마칠 생각이었다. 시간상으로도 적당하다. 그런데 점심 때 밍마가 참제에는 캠프사이트가 좋지 않다고 자갓으로 가자고 한다. 사실은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도 자갓까지 하루 일정으로 나와 있지만 일정을 짤 때 지도상으로 너무 멀어보여 참제로 정한 것이다. 캠프사이트가 좋지 �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어 밍마의 의견을 따라 자갓까지 가기로 했다. 조금 더 걷겠지만 그만큼 내일 일정은 단축될 것이라고 피곤해 하는 동포들을 위로했다.
자갓(Jagat) 에 도착한 시각은 4시 20분. 참제에서 1시간 20분 걸렸고 중간에 두 번 쉬었다. 폭포도 지나고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오르기를 몇 번 반복했다. 연 3일간의 강행군으로 다들 많이 지쳤다. 체력이 좋은 젊은 사람이라면 5:30~6시간 걸린다고 레이놀즈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8시간(-점심시간 1시간 15분) 걸렸으니 어지간히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자갓은 톨게이트(toll gate)라는 뜻이라고 이미 마나슬루 지역의 자갓을 지날 때 이야기 했다. 즉 이곳은 티베트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던 곳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 주민들은 티베트계인 보티아(Bhotia)족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지던 소금무역은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고 국경을 폐쇄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대신 1975년 안나푸르나가 일반 트레커들에게 개방되면서 관광업이 주 산업이 되었다. 아담한 롯지 정원에 스테프들이 캠프를 치고 있다. 바나나 나무도 보이고 꽃이 만발해 있다. 이곳 고도가 1314m이니 이제 따뜻한 중산간 지역으로 내려왔다. 라르키아 라와는 고도차가 4000m 가까이 되는 곳이다. 오늘은 뜨거운 샤워를 할 수 있으려니 기대를 했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탓인지 따뜻한 물은 잠시 나오더니 아예 찬물까지도 잘 나오지 않아 여성동포들은 주방에서 데워 준 물로 간단하게 �었다. 나는 오늘도 물수건의 신세를 졌다. 모처럼 분위기 있는 정원 식탁에서 바나나를 사 먹었다. 저녁은 여행사에서 서비스로 준비한 특식이란다. 한국식으로 요리하기 위해 두 분이 주방을 다녀왔다. 무진행 보살님이 요리법을 설명하고 영어가 전공인 보명화 보살님이 통역했다.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생애 최고로 맛있게 먹은 음식"이라고 찬탄했다. 어쩌면 '말짱 도루묵'의 일화와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동안 '배가 고팠다'는 반증일 것이다. 저녁을 잘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힘든 트레킹이 거의 끝나는 시기여서 그런지 동포들의 얼굴이 한결 여유롭고 좋아보인다. 내일이면 실질적인 트레킹은 끝나기 때문에 내일 묵을 나디에서 쫑파티를 준비하라고 타시에게 150불 주었다. 포근한 밤이다. |
trek 16. 띨제 - 자갓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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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차탐사대] 다딩베시 점심시간 (0) | 2010.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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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7. 자갓 - 나디 (0) | 2008.02.18 |
trek 15. 빔탕 - 띨제 (0) | 2008.02.12 |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 - 빔탕 (0) | 2008.02.01 |
trek 13. 삼도 - 다람살라 (0) | 2008.02.01 |
어제보다 훨씬 포근한 아침이다. 밖으로 나오니 살얼음이 얼어 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쌀쌀하다. 어제 안개로 보지 못한 주변 경치를 보기 위해 모레인 제방으로 올라갔다. 티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설산의 모습이 뚜렸하다. 내려다 보니 넓은 빔탕의 전체 모습이 잘 보인다. 일출이 시작되었다. 남동쪽에 있는 마나슬루로 해가 비친다. 이곳에서 보는 마나슬루는 지금까지 보던 모습과 전혀 다르다. 두 개의 뾰족한 봉우리를 보고 마나슬루임을 짐작할 뿐이다. 가이드북과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가 아니었다면 마나슬루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쪽으로는 힘룽히말과 체오히말 봉우리에도 해가 비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햇빛이 산의 측면을 비추기 때문에 붉게 타오르는 장엄한 모습은 볼 수 없다. 모레인 제방 아래에는 에메랄드빛의 작은 빙하 호수가 하나 있지만 특별히 가까이 가서 볼 만한 호수는 아니다. 아래에서 무진행 보살님이 아침 산책 중이길래 사진을 찍어 줄테니 올라 오시라고 했다. 20여 미터만 오르면 아주 다른 풍광을 즐길 수 있으니 숨이 차더라도 구경할 수 있을 때 구경하는 것이 좋다.
빔탕은 빔타코티(Bimtakhoti)라고도 하며 '모래의 평원'이라는 뜻이다. 빙하 모레인 제방과 산 경사지 사이의 넓은 분지인데 모레인 땅이라 경작은 불가능하다. 옛날에 이곳은 라르키아 라 동쪽의 바북과 더불어 티베트와의 중요한 교역장소였다. 1950년에 틸먼이 처음 방문했고 1956년에는 스넬그로브가 방문하고 각각 기록을 남겼다. 빔타코티에는 조(zo)와 양들이 라르키아 고개 또는 톤제(Thonje)에서 빈번하게 오가고 있다. 10여 마리 이상의 조 무리의 목에 달린 종소리는 끊이지 않고 우리의 캠프를 지나 짧은 초지를 향하곤 했다. 모두 둔중한 소리의 종을 달고 있는데 무리의 리더는 밝은 진홍색 야크털 장식 술과 함께 작은 종을 달고 있다. 이곳 창고 담당자는 우리에게 짧은 교역시즌 동안 그는 3000마리 이상의 조가 싣고 온 짐의 무게를 잰다고 했다. 이곳에서 쌀과 소금의 교환비율은 16:25인데 라르키아 라를 넘어가면 소금 25를 사기 위한 쌀은 12면 충분하다. (H. W. Tilman, 빔탕은 라르키아 라 동쪽에 있는 바북처럼 단지 여름철 교역장소로 쓰이고 있다. 티베트에서 야크 등에 실려 바북을 거쳐 이곳으로 물건은 소금과 모직물이 오고 네팔에서는 쌀과 곡물, 면제품 옷, 담배, 성냥 그리고 다른 유용한 물건이 온다. 이곳에서 무역을 통한 이익을 얻기 위해 티베트 국경을 넘어 오거나 갸숨도(Gyasumdo) 또는 누프리에서 온 티베트인들을 만날 수 있다. (David. Snellgrove, 틸먼이나 스넬그로브도 언급하고 있듯 이곳은 경작지로는 쓸 수 없는 땅이다. 풀이 조금 나 있기는 해도 조금만 파면 마사토 같은 빙하 모래가 나와 작물의 재배가 불가능하다. 냇물도 가까이 흐르는 좋은 조건이지만 모래땅이라 농사를 짓지 못하니 사람이 살지 않는다. 티베트와의 교역이 뜸해진 지금은 서너 채의 롯지만 트레커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침 식사 때 타시가 와서 어제의 일을 정식으로 사과했다. 자기의 가이드 생활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아주 좋은 지적이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더 훌륭한 가이드가 되기를 축원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당하게 넘어가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지적을 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7시 20분 출발했다. 내리막길이긴 하지만 앞으로 3일 동안의 일정은 매일 8시간 이상 운행을 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처음부터 중간에 하루를 더 늘이면 편하기는 하나 너무 늘어지는 감이 있다. 2주간의 트레킹으로 피곤하기는 해도 이럴 땐 오히려 조금 졸라매야 긴장감으로 잘 견딘다. 일단 고소로부터 자유로우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길은 개울물 곁을 지나 빙하를 건너기 위해 언덕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빙하 제방 7부 능선길을 빙 돌아 간다.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길이다. 앞쪽으로는 마나슬루 서쪽에 있는 캄풍히말(Kangpung Himal)에서 제일 높은 풍기(Phungi, 6538m)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오늘이 설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 내내 눈을 맞추며 걸었다. 언덕을 넘으니 강을 가로질러 다리가 하나 있다. 빙하지대이기는 해도 얼음이 없는 골재채취장 같은 곳을 흐르는 작은 개울 수준의 강이다. 이 강의 이름은 두드콜라이며 이곳이 최상류에 해당한다. '두드'란 '우유'라는 뜻의 네팔말이다. 강물의 빛깔이 우유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쿰부에도 고쿄의 고줌파 빙하에서 시작하여 루클라 아래로 이어지는 강 이름도 두드코시다. 코시는 콜라와 같은 뜻(작은 강)이다. 다리를 건너 빙하 제방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 다시 작은 다리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까지 길이 무너져 있어 보울더 바위 사이를 타고 가느라 조금 성가셨다. 나중에 보니 위쪽으로 새로운 길이 나 있다. 이 다리는 난간도 없다. 다리 위로 서리가 내려 미끄럽다고 타시가 모래를 집어 뿌려주었다. 이곳은 물살이 제법 세다. 북쪽으로 힘룽히말과 체오히말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여기가 마지막이다. 강물은 빙하 모래층 아래에서 갑자기 꽐꽐 솟아 나오고 있다. 다리를 건너 빙하의 서쪽 제방 꼭대기로 올라가 잠시 쉬었다. 첫 번째 휴식시간이다. 출발한지 1시간 되었다. 이제 빙하지대는 끝났다. 그곳부터는 내리막길인데 갑자기 우람한 나무들이 있는 숲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이렇게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나무에는 이끼와 실 같은 지의류가 많이 붙어 있어 이제 수목한계선으로 내려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도 보인다. 레이놀즈의 책에는 이 길가에 (ABC 트레킹 코스의 데우랄리 못미처 나오는 힌쿠 동굴 같은 모양의) 동굴이 있다고 나와 있지만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숲속에서 가끔 툭 터진 곳으로 나오면 캄풍히말이 반겨주었다. 기온도 많이 올라갔다. 즐거운 숲 길이다. 큰 전나무가 탄 모습이 보인다. 먼 산에는 산불로 고사목이 되어 불에 탄 전봇대처럼 흉물스럽게 서 있다. 그 너머로 마나슬루 서쪽면의 빙하가 보인다. 쿰부에도 남체바자르에서 텡보체 가는 도중에 이런 산불 흔적이 있다. 히말라야에서 산불이 나면 대책이 없다. 이 험한 산에 올라가 불을 끌 방법이 도저히 없다. 헬기로 불을 끄는 시스템은 먹고 살 만한 나라나 가능하다. 1994년 9월 하순에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이런 산불에 탄 수많은 고목나무들을 본 적이 있다. 미국은 산불이 나도 끄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낙뢰 등 자연적으로 발생한 현상을 자연의 순환현상으로 보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관련기사) 계곡에 들어서니 숲길이지만 평지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르막과 내리막을 계속 반복한다. 8시 30분, 울창한 숲 속에서 휴식. 그리고 잠시 계곡 위로 난 전망이 좋은 양지녁 오솔길을 걸었다. 마나슬루 정상의 둥근 빙하가 왼편으로 보인다. 1950년 5월 23일, 마낭에서 안나푸르나에 접근할 수 있는 계곡과 빙하를 탐사하기 전 틸먼 탐사대는 이곳 두드콜라 위쪽 마나슬루와 그 주변 봉(체오히말과 힘룽히말)을 먼저 탐사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그리고 빔탕으로 가는 도중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에서 마나슬루를 똑똑하게 보고 감동을 받는다. 이 전망대에서 우리는 어두운 숲에서부터 그 너머 마나슬루에서 흘러 나온 둥근 빙하까지 바라보았다. 오른쪽으로 하늘을 찌르는 두 개의 바위탑과 얼음은 우리에게 경이로움을 주었다. 마나슬루는 거친 모양을 거의 감추고 조용하고 영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낮은 스노우콜(snow col)로부터 마나슬루의 긴 북쪽 능선은 가볍게 25000피트를 오르고 1000피트를 내려간 후 눈의 고원에 날카롭게 솟아 있다. 그리고 잘 받쳐져 있는 받침대 위에 정상의 피라미드가 서 있다. (H. W. Tilman, 위의 책, p.820) 계곡은 이제 많이 넓어졌다. 산사태의 흔적으로 강물 속에 큰 나무가 넘어져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10시 15분, 롯지가 하나 있는 넓은 캠프사이트가 나왔다. 마나슬루 지역에서의 롯지는 주방과 캠프사이트만 제공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롯지 문은 잠겨 있다. 주인이 있다면 이곳에서 점심을 지어 먹고 갈 수도 있지만 문이 잠겨 있으니 주방팀은 이곳을 그냥 통과했다. 강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등 굳이 번거로운 이곳을 주방팀이 택할 까닭이 없다. 왼편으로 터진 계곡 사이로 탐스러운 설산이 보인다. 이곳은 하루 묵고 싶은 평화로운 풍경이 있는 곳이다. 지도에는 이런 카르카가 몇 개 표시되어 있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통해 숲으로 다시 들어가다가 얼마 후 길은 계곡 바닥으로 내려갔다. 우기 때 생긴 산사태로 길이 끊어져 바닥에 새로 만든 험한 길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가로로 쓰러져 있고 그 아래로 길이 난 곳도 있다. 강으로 쓸려 내려온 흙과 돌더미 사이를 헤치고 오르내리는 길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위쪽에 있는 바위가 언제 또 무너질 지 모르는 일이라 긴장이 되었다. 레이놀즈의 책에도 언급되어 있으니 이 산사태는 적어도 10년 전에 일어난 것이다. 물건을 실은 말이 이런 길을 통해 빔탕까지 다니고 있다. 이 길은 오늘 일정에서 가장 난코스라고 할 수 있다.
집 뒤마당에 넓은 캠프사이트가 있다. 바람은 불지만 햇볕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계곡 사이 푸른 숲 위로 설산의 봉우리가 깨끗하게 보인다. 점심을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머리를 감으니 개운하다. 이 집의 꼬맹이가 호기심을 보이며 우리 주변과 주방을 차례로 들락거린다. 점심 먹고 1시에 출발했다. 길은 완연한 저지대 숲길이다. 가끔 계곡 바닥으로 내려가기도 하면서 오르막 언덕을 우회하여 오르내린다. 물건을 싣고 오르는 조랑말 무리도 만났다. 카르체 이후부터는 경작지와 흩어져 있는 집들이 자주 나온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시작된 것이다. 경작지가 있는 곳은 짐승의 출입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아 놓았다. 염소와 양이 떼지어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길가 밭에서 감자를 캐고 있는 있는 아낙네들과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새로 롯지를 만들고 있는 곳도 있다. 이곳도 이제 트레커들이 많이 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마니월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초우따라가 있는 고개에서 한숨 돌린 후 가족이 메밀 수확을 하는 곳을 지나자 곧 오늘의 목적지 띨제(Tilje)가 멀리서 보였다. 오른쪽 산비탈로 계단식 밭이 보이고 전깃줄도 보이는 큰 마을이다. 마니월과 텅빈 학교를 지나 마을 입구에 있는 카니를 통과했다. 여자 아이 둘이 검은 소를 몰고 와 소를 밭으로 내 쫓은 후 우리를 따라 마을로 돌아왔다. 오후 3시 40분, 띨제에 도착했다. 띨제는 구릉족이 사는 이 근처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틸먼이나 스넬그로브 시대에는 이 두드콜라 계곡의 유일한 마을이었다. 캠프장이 있는 집 마당에는 백일홍과 다알리아가 한창이다. 꽃 구경도 오랜만이다. 뎅에서 보고 처음이니 8일만이다. 오늘은 하루만에 풍경이 이렇게 달라졌다. 주방팀은 차 준비를 하고 다른 스태프들은 텐트를 치느라 바쁘다. 어제부터 긴 운행으로 조금 지치긴 했지만 다시 아이들이 놀고 닭이 활개짓하는 마을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해진 한편 섭섭하기도 하다. 트레킹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오늘 아침까지 눈이 시리도록 보았던 설산은 더 이상 가까이에서 볼 수 없다. 그저 가끔 먼 산 계곡 사이에서 바라 볼 수 있을 뿐이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피로를 풀고 저녁 먹기 전 등산화를 수선(끈 교체)했다. 지금까지 별 탈없이 버텨준 것이 고맙다. 내일은 마나슬루 지역을 벗어나 안난푸르나 라운딩 코스로 접어드는 일정이다. 7년 만에 그 길을 다시 가는데 그동안 어떻게 변해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
trek 15. 빔탕 - 띨제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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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7. 자갓 - 나디 (0) | 2008.02.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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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6. 띨제 - 자갓 (0) | 2008.02.12 |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 - 빔탕 (0) | 2008.02.01 |
trek 13. 삼도 - 다람살라 (0) | 2008.02.01 |
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0) | 2008.02.01 |
3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감 탓인지, 아니면 황홀한 달밤을 본 탓인지 잠을 푹 자지 못했다. 텐트 안은 0도로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텐트 안이 영하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물통의 물에 살얼음이 어는 경우는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낭속에서 모닝콜을 기다렸다. 짐은 대부분 어제밤 미리 싸두었다. 잠시 후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더니 빠상이 어김없이 "띨레리~"하며 차를 가지고 왔다. 오늘 아침 세숫물은 생략이다. 뜨거운 홍차로 속을 덥힌 후 짐을 챙겨 식당텐트로 갔다. 밖으로 나오니 아주 춥다. 영하 10도는 될 것 같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다행히 모두 어제보다 컨디션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식욕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인지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있다. 오늘 긴 일정을 생각한다면 잘 먹어야 한다고 독려했다.
그러나 이 옷에도 결점이 있으니 그것은 부피와 무게가 다른 고소내의에 비해 부담이 된다는 점이다. 원정대처럼 고산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들은 몰라도 15일 트레킹 중 이삼일 정도만 고산에 머무는 코스에는 굳이 무게와 부피에 대한 부담이 큰 이런 장비까지 가져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4000m 이상에서 제법 오래 머무는 쿰부 서키트 트레킹 때는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옷을 2년 전부터 토굴에서 입고 있다. 겨울이 되면 내가 거주하는 방안은 기온이 10도 내외에 머물고 있다. 그동안 난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난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땅이 거칠어 다니기 불편하다고 모든 땅에 부드러운 가죽을 깔 수 없다. 너의 발만 가죽으로 싸면 온 세상을 가죽으로 싼 것과 마찬가지다." 이말은 원래 현상계는 자기의 마음 상태에 따라 보이므로 모순되어 보이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치는 비유의 말씀이다. 그 말에 힌트를 얻어 나도 넓은 공간의 난방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난방이 필요한 내 몸을 직접 따뜻하게 하는 옷에 신경쓰기로 했다. 보온 기능이 뛰어난 등산복은 그 목적에 제격이다. 토굴에서 브린제 내의와 폴라텍 파워스트레치 상하의는 기본이다. 등산양말을 신고 상의는 우모복을 하나 더 걸친다. 목에는 네팔의 특산물 파슈미나 목도리를 두른다. 그리고 빵모자로 마무리 하니 천하가 태평하다.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은 추운 산골살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아무리 방이 춥다해도 히말라야 4천 고지의 페리체 롯지보다 따뜻하니 견딜만하다. 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고 샤워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매일 짐을 싸지 않아도 되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침낭에 들어가지 않는 잠자리는 편안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집에 머무는 것이 제일 편하다. 돈도 들지 않는다. 짐을 챙기느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공항까지 끙끙대며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아도 된다. 고소도 없고 두통이나 식욕부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춥고 힘든 히말라야를 가고 싶어 할까? 사람마다 각자 이유가 있을 것이나 인간사를 관통하는 다음의 한 마디 말은 트레킹에도 당연히 해당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
텐트에서 나오자마자 세르파들과 포터들이 텐트를 철수시키기 시작한다. 어둡고 추운 새벽에 철수작업을 하느라 고생이 많다. 장갑도 없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정말 그들은 아무리 임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이지만 레이놀즈의 말대로 '인간트럭'이 아닌 '전문노동자'로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 짐을 지고 고산을 오르는 일만큼은 지구상에서 네팔사람을 따라 갈 종족이 없다.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를 터전으로 살고 있으니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몇 달 전 우연히 디스커 버리채널에서 방영한 <에베레스트, 한계를 넘어서(Everest, Beyond the limit)>를 보았다. 2006년 봄 뉴질랜드인 러셀 브라이스가 지휘하는 상업등반대의 에베레스트 등정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다. 6부작이라는데 다 보지는 못하고 점심시간에 어쩌다 나오면 보았다. 내용은 등반 도중 악천후로 동상을 입어 두 다리를 잃었지만 의족을 달고 나선 사람, 암수술을 받고도 참가한 사람, 오토바이 사고로 온 몸의 뼈를 쇠로 이어붙이 사람, 무산소 등정을 시도하는 천식환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승리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편에서는 등반대원 중 한 명이, 하산 때 죽어가는 등반가를 발견하지만 구하지 못하고 그냥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그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그 사람을 그대로 두고 지나가는 등반가들이 비정하다는 여론이 있지만 그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든 8000m 고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오르는 길 가에는 그렇게 죽은 사람의 시신이 많이 있다고 한다, 7년 전쯤 <산>지에서 그런 시신이 방치되어 있는 비인간적인 모습의 사진을 보고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프로에서 내가 받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의지의 군상들이 벌이는 인간한계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다. 캠프 2인지 3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곳에 캠프를 차리고 대장이 세르파 6명에서 2km의 로프를 주고 정상까지 로프를 설치하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 지난 후 무전이 날아온다. "대장님, 모두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웃음이 나왔다. 정상에 한 번 올라가보겠다고 아래에서 고소 등으로 갖은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세르파들은 이웃집 마실 가듯이 가볍게 정상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무거운 로프와 산소통을 매고. 원정대원들이 할 일은 그들이 깔아 둔 로프를 잡고 오르는 일이다(물론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히말라야 세르파들의 강인함과 위대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진정한 등반은 알파인 스타일의 단독 등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히말라야 14좌를 처음으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메스너는 1975년 가셔브룸 1봉을 등정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루트로 등정을 한다. 게다가 산소용구, 고소포터, 중간캠프, 고정로프를 쓰지 않는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로 올라간다. 그는 알프스의 4000m 급 산을 오르는 방식으로 8000m 급 고봉을 사흘 만에 올랐다. 이런 등반방식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몇 배나 더 어렵고, 죽음을 무릅쓴 도전이기에 메스너의 성공이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로부터 8000m 고봉에 대한 도전 방식이 바뀌게 된다. 메스너는 8000m 급 고봉 14개를 처음으로 모두 오른 사람이다. 게다가 그것도 쉽게 오른 것이 아니라 알파인 방식으로 올랐고, 또 한 시즌에 8000m 이상의 고봉 3개를 등정하는 해트트릭도 한 사람으로 20세기 최고의 등반가라고 한다. (향기로운 책글방 1163호,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마운틴북스)>에서 인용 ) 등반의 세계에는 등정주의(登頂主義)와 등로주의(登路主義)가 있다. 등정주의는 루트에 무관하게 정상 등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등로주의란 보다 어렵고 험난한 루트를 택해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다. 세계적인 등반가들은 당연히 등로주의를 추구해왔고, 한국 산악인들 역시 등정주의에서 점차 등로주의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원정대와 트레킹 팀의 포터 일을 해온 그는 1990년 뉴질랜드 팀의 세르파로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2007년 5월 17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 따져보니 17년 동안 매 년 한 번씩 오른 셈이다. 만일 그가 원정대처럼 스폰서의 후원을 받아 마음먹고 오른다면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가장 빠른 기간 내에 마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는 항상 알파인스타일로 오른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원정대가 정상에 잘 오르도록 로프를 깔고 대원들을 안내하기 위해 고용한 세르파이기 때문이다. 네팔에는 그와 같은 세르파들이 부지기수다. 압빠 세르파는 2006년 미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가족(아내와 네 자녀)이 모두 유타주의 드래퍼(Draper)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현지 등산점에서 일하고 강의도 하며 필요하면 에베레스트를 안내하는 세르파 일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신기록은 계속 진행중이다. 말을 하다보니 잘 알지 못하는 등반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는데,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세르파와 포터가 없으면 히말라야 등반도 없고 트레킹도 없다. 그러니 항상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자." * * *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4시에 출발했다. 오늘 구간이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제일 힘든 구간이다. 그리고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몇 안되는 최고의 풍광을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다람살라에서 라르키아 라까지 763m 올라간 후 그곳에서 빔탕까지 1493m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트레킹이든 고개를 넘는 구간은 다 비슷한 상황이니 특별할 것은 없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야크와 말이 넘을 수 없는 촐라패스보다는 쉬울 것이다. 촐라패스와 고쿄 사이에는 초오유에서 내려오는 고줌파 빙하를 횡단하여 건너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 토롱페디 하이캠프(4800m)에서 토롱 라까지 616m 올라갔다가 묵티나트까지 1616m 내려간다. 쿰부 트레킹에서 촐라패스를 넘자면 닥락에서 고개까지 720m 올랐다가 종라까지 570m 내려간다. 랑탕에서 헬람부로 넘어가는 고개인 로우레비나 패스는 5000m 이하라 조금 수월한 편이지만 그곳도 4321m의 고사인꾼드에서 383m 오른 후 고개 넘어 로우레비나 페디까지 1060m를 내려가는 일정이다. 고개를 안 넘으면 모를까(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넘으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고개를 넘지 않는 4000m 이하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아무래도 설산의 멋진 풍광을 멀리서 보기 때문에 웅장한 느낌이 떨어진다. 예외가 있다면 ABC 트레킹처럼 장엄한 안나푸르나 남벽의 일출을 코앞에서 보는 경우인데, 그 경우 역시 막다른 골목으로 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하산길은 큰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길은 바로 오르막이다. 어두운 새벽에 반딧불 같은 헤드렌턴 불빛이 날아다니고 있다. 타시가 앞장서고 내가 제일 뒤에서 불을 밝혔다. 이번에 오면서 강력한 헤드랜턴을 하나 마련했다. 지금까지 쓰던 프랑스의 페츨(petzl) 헤드랜턴은 작년 무스탕 벽화 감상 때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좀 더 강력한 후레시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뒤진 끝에 독일제 헤드랜턴 루시도를 발견했다.
평소에는 2단 정도면 족하다. 그러나 오늘 같은 달이 진 후의 어두운 새벽에는 뒤에서 서치라이트로 비춰주면 앞에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내가 살 때인 2006년 8월에는 74,000원 했는데 최근 새 모델이 나오면서 값이 많이 올라 108,000원이나 한다. 그래도 등산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사 둘만하다). 트레커들은 각자 헤드랜턴이 있으니 알아서 잘 가지만 얼마 후 따라 온 포터들은 어두운 길을 불도 없이 추월해 간다. 포터들에게도 오늘 새벽은 헤드랜턴이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별로 가져오지도 않고 여행사에서도 지급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네팔의 현실이다. 한참 비춰주며 따라갔다. 속도가 빠른 포터들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늘부터 보명화 보살님의 배낭은 타시가 맡고 무진행 보살님의 배낭은 밍마가 맡았다. 이 두 분의 컨디션이 제일 좋지 않다. 고소와 식욕부진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뒤에서 보니 계속 발걸음이 늦어진다. '쉬면서 오르기' 주법을 따라하도록 내가 앞장을 섰는데 얼마나 잘 따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출발한지 1시간 지나자 서서히 여명이 밝아온다. 왼편으로 빙하호수가 보였다. 타시가 돌맹이를 던지니 호수 위에서 팅겨 나간다. 꽁꽁 얼어 있다. 6시 40분, 일출이 시작되어 해가 서쪽 산 꼭대기를 비추기 시작했다. 이미 만년설 지대로 들어와 주변에 눈이 쌓여 있다. 오르막이라 30분 이상 계속 운행하기 어려워 틈나는 대로 쉬면서 운행했다. 제법 많이 쌓인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얼어 있고 러셀이 잘 되어 있어 체력이 문제지 운행하기에는 어렵지는 않다. 햇볕 속으로 들어오니 일단 추위는 가셨다. 오전 7시, 돌집이 있는 대피소에 도착했다. 키친보이 푸르바가 점심을 가지고 동행하고 있다. 배는 고프지 않고 오직 목이 말라 보온병에 담아 온 레몬 티 한 잔씩 마셨다. 5000m 가까운 고도의 눈길에서 3시간 운행을 한 탓에 모두들 지쳐 양지녁에 돌 위에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다. 아직 정신이 말짱한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도 두통이 조금 있지만 참을 만하다. 앞으로 두 시간만 가면 고개가 나올 거라고 격려를 했다. 고소를 느끼는 사람은 다이아목스를 먹고 두통이 있는 사람은 두통약을 먹었다. 그곳에서부터 라르키아 라까지는 예상보다 40분 늘어난 2시간 40분 걸렸다. 2시간 40분이라고 하니 가벼운 운행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4000m 이하라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00m 고도에서 두 시간 이상 오르막을 오르는 일은 평지의 10시간처럼 느껴진다. 예전 기록을 보니 2000년 토롱페디 하이캠프에서 토롱 라까지 2시간 30분 걸렸다. 그 때도 무척 힘들었다. 2002년 쿰부의 촐라패스는 출발하여 고개까지 점심시간 포함하여 무려 7시간 15분 걸렸다. 제일 춥고 힘들었다. 2004년 랑탕 헬람부에서는 3641m의 로우레비나 페디에서 4700m의 로우레비나 패스까지 4시간 50분 걸려 올라갔는데 그 때는 중간 모레인 지대에서 간식을 먹고 오르는 등 그리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다(그래도 현장에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라르키아 라로 가는 길은 낮은 언덕을 계속해서 넘는 일이다. 이정표로 언덕에 세워 놓은 말뚝을 보고 저곳에 가면 고개가 보이려나 하는 기대를 갖는데 막상 올라가면 또 다른 말뚝이 멀리서 "나 잡아 봐라~" 하며 서 있다.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시야가 너무 탁 터진 것도 걷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기운을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그만큼 풍광이 좋다. 끝없이 이어진 넓은 설원과 주변 설산의 풍경은 과연 밥(Bob)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라르키아 라에 대한 그의 글은 이번 마나슬루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는 히말라야의 많은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라르키야 라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장엄한 고개 중 하나이다. 아마 가장 장엄할 것이다. 우리 너머로 고개는 빙하로 가파르게 내려가고 있고 빙하 위로는 거칠 것 없는 수 천 미터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대부분 7000m미터 급(힘룽 히말 등)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마나슬루와 안나푸르나도 있다. 안나푸르나는 앞으로 계속 보게 될 것이다. (Bob Rosenbaum, Bob's explores the Manaslu and Nar-Phu region, 2004) 눈표범의 발자국을 본 것은 뜻밖이었다. 눈표범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영광이 없겠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는 눈표범을 직접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BBC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위장막을 치고 몇 주씩 기다려서 겨우 찍었다. 우리에게 이런 행운이 온 것은 눈이 내린 덕분이다. 그런데 이 높은 곳까지 어슬렁거리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결론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이곳에도 산양 등이 서식한다는 말이다. 추위는 가셨다. 바람이 불지 않아 이제는 오히려 더워 고소모자를 넓은 챙의 운행모자로 바꾸어 썼다. 장갑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아윈드 스토퍼도 벗었다. 폴라텍 파워스트레치 차림만으로도 충분한 날씨다. 그리고 안면마스크도 벗으려다 설면에 반사되어 오는 복사열이 엄청 뜨거워 그대로 착용했다. TV에서 원정대들의 얼굴(특히 코)이 시커멓게 탄 것이 이 복사열에 의한 화상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뜨겁길래 저 정도일까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니 실감이 난다. 설원에서는 설맹의 위험도 크다. 설맹이란 눈에서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각막이나 결막에 일어나는 염증으로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선글라스를 껴도 눈이 부실 정도다. 도대체 눈에 반사되는 햇빛이 얼마나 강한지 궁금해서 선그라스를 슬쩍 내려보았다. 그랬더니 어마어마하게 밝은 빛이 들어오는데 마치 예리한 칼이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타시가 선글라스가 없는 포터들을 위해 일찍 넘자고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말 마세요. 얼마나 두통이 심한지 빨리 고개를 넘어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죽자사자 걸었습니다."
갑자기 라르키아 피크 상단부에서 연기가 나더니 구름으로 변한다. 눈사태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처음에는 아주 약한 연기처럼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구름이 몰려 내려오는 모습으로 변한다. 사실은 모두 눈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사태를 보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운행중이었다 해도 길과 산 사이에 낮은 계곡이 완충지대로 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그래도 눈 바람은 피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열흘 전 내린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오늘 오전 10시, 햇볕에 녹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쓸려 내려온 것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중 눈사태 위험이 있는 곳은 ABC와 다울라기리 트레킹인데 그 구간을 통과할 때는 반드시 햇볕에 눈이 녹기 전인 오전 일찍 지나가야 한다. 이번 트레킹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마모트에 산양에 눈표범 발자국에 눈사태까지. 마나슬루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티의 발자국까지 보았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2004년 이곳에서 밥은 예티의 발자국을 보았다고 한다. 사진이 없으니 증명할 수는 없으나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20여 분 쉰 후 모두 아이젠을 착용하고 15분 거리의 두 번째 고개로 갔다. 이 두 고개 사이는 거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나누는 것은 편의상 붙인 것이고 실제로는 라르키아 라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이라고 해야 한다. 전망은 빔탕 방향인 동쪽이 좋다. 서쪽 고개는 북쪽의 산비탈이 전망을 비스듬하게 가로막고 있다.
일단 동쪽과 서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조금 쉬다가 10시 35분 하산을 시작했다. 그래도 두 고개에서 머문 시간이 1시간 가까이 된다. 급경사 내리막길이라고 하지만 오르막길 보다는 쉽다. 잠시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오더니 말 그대로 고꾸라지는 듯한 비탈길이 나왔다. 눈도 이제 많이 녹은 상태라 발이 빠진다. 아이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차라리 눈길이 낫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미끄러운 모래길이라 운행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동쪽 경치는 고개보다 내려오는 도중이 더 좋다. 고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오른쪽 체오체오히말(Cheo Himal, 6912m)까지 파노라마로 보인다. 아래쪽으로는 빙하지대와 파란 빙하호수도 보인다. 가파른 비탈길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니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여유는 없지만 잠시 서서 쉴 때마다 마음껏 풍광을 즐겼다. 길은 지그재그로 끝없이 내려가고 있다. 이제는 눈이 질퍽하여 가끔 미끄러지기도 한다. 멀리 앞에 가던 보명화 보살님이 미끄럼을 타며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잘못하면 빙하 계곡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까이 가 보니 정말로 그랬다. 얼마 전 통화를 할 기회가 있어 그 때 왜 미끄럼을 탔느냐고 물어보았다(네팔에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 역시 깜박했다). 대답은 일부러 미끄럼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도 힘들어서"였으며 곧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는 내리막길도 힘든 법이다. 12시 15분, 눈밭이 끝나고 모레인지대가 시작되었다. 앞에 가던 타시는 쏜살같이 내려가 이미 모레인 아래에 앉아 있다. 힘이 드니 슬며시 짜증이 났다. 고개에 오를 때에도 먼저 가 버려 따라가던 사람들의 기운이 빠졌다. 각자 자기의 속도로 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웬만하면 속도를 비슷하게 해야 뒤에 따라가는 사람의 힘이 덜 빠진다. 하물며 가이드라는 작자가 손님들은 내팽개치고 혼자 휭하니 가 버리다니. 제일 먼저 내려가 인상을 잔뜩 쓰며 앉아 있는 타시를 불렀다. "타시, 당신은 트레커입니까, 가이드입니까?" 일단 알아들었을 것이라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어떤 식으로 가이드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2004년 랑탕 헬람부 트레킹 때 삼툭도 오늘과 비슷한 일로 나에게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까다로워 그런 것이 아니다. 짐만 나르는 포터라면 상관없지만 가이드는 항상 고객을 밀착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임금도 더 많이 주는 것 아니겠는가.
풍광은 좋다. 그러나 갈 길이 멀고 몸은 지쳤다. 이곳에서 늦은 점심을 펼쳤지만 모두 식욕이 없어 삶은 계란만 먹는둥 마는둥 한다. 보온병에 담아 온 레몬티도 다 마시고 없다. 물통의 물도 달랑거리고 있다. 타시가 밍마를 먼저 보내 주방팀에게 누룽지와 물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어떨지 묻는다. 여기서 빔탕까지 얼마 걸리느냐고 물으니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가깝다고!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렸다가 누룽지를 먹고 힘을 내어 내려가도 될 것 같다. 밍마가 임무를 지니고 내려갔다. 동포들은 모두 편안한 자세로 쉬었다. 실제로는 쓰러진 모습이다. 에너지 고갈인 상태인데다 아직 고소의 영향권에 있어서 제정신이 아니다. 조금 쉬다가 문득 기왕이면 내려가다가 만나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오후 1시 경 모두 깨워 출발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한 결정이었다. 네팔리들이 말하는 시간은 항상 자기들 기준으로 말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느긋했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다면 1100m 하강을 한 시간에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적어도 두 시간 이상 걸린다. 길은 한결 수월했다. 키치케 히말은 여전히 앞에서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작은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체오 히말과 빙하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이제부터는 빙하 모레인 언덕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빙하가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서 쉬는데 모두 물이 떨어져 목이 말랐다. 각자 지니고 온 1리터의 물이 모자랐다. 대부분 고개에 올랐을 때 이미 3분의 2를 마셨다. 목은 타는데 물이 없으니 난감하다. 그제서야 이 지점에서 쉴즈부부 팀이 정화제 아이오다인을 이용해 냇물을 마셨다는 대목이 기억났다. 약 2시간 후 우리는 포터들이 자기들의 점심을 짓고 있는 작은 평지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우리는 배낭을 풀고 1시간 가량 쉬었다. 우리는 고산병과 싸우고 다이아목스를 먹느라 물을 많이 먹은 탓에 모두 물이 떨어졌다. 톰이 아이오다인 정제를 찾아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근처 개울물을 물통에 채우고 아이오다인을 넣었다. 빌도 중화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계속 내려가는 도중에 맛있는 물을 마실 수 있었다. (Tom & Louisa Shields,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정화제를 사용한 적이 없다. 롯지트레킹 때는 끓인 물을 사먹을 수 있으니 굳이 물값을 아끼느라 정화제를 쓸 일이 없었다. 타시에게 물병을 주며 냇물을 좀 떠오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계곡의 물을 몇 번 먹은 적이 있고 별 탈이 없었다. 이곳은 빙하에 가까운 물이나 지류 계곡이라 그런지 물이 맑다. 랑탕의 랑시샤 카르카에서는 맑은 물이었어도 석회냄새가 진하게 났다. 다행히 이곳은 물맛이 좋다. 모두들 한 모금식 마셔 목을 축였다. 그 때 물은 잘 먹었지만 돌아와 레이놀즈의 글 <트레킹 중 건강문제(On-Trek Health Matters)>를 보다가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경련, 설사, 탈수를 일으키는 불결한 기생충인 편모충은 빙하에서도 살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그런 모험을 하지 않고 정화제 아이오다인을 준비할 생각이다. 길은 점점 넓어졌다. 몇 군데 넓은 초지도 지났다. 운무가 점점 올라와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오후 2시 40분, 주방팀인 빠상과 푸르바가 기다리고 있는 풀밭에 도착했다. 어찌나 반가운지 저절로 "만세~"하는 소리가 나왔다. 멀리 모레인 언덕 아래 끝으로 빔탕이 보였다. 그곳까지는 아직 한참 더 가야 한다. 중국제 보온병에 누룽지를 끓여 담아오고 감자를 삶아와 맛있게 먹었다. 무진행 보살님은 아직도 식욕이 없어 누룽지는 별로 먹지 않고 숭늉만 마신다. 모두들 지쳐 있지만 이제 목적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한결 느긋한 표정이다. 가장 어려운 코스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수고한 빠상과 푸르바에게 팁으로 100루삐씩 주었다. 안주어도 당연히 제공하는 서비스지만 기분이 좋으면 가끔 특별팁을 주는 것도 좋다. 아주 넓은 초지가 있는 빔탕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20분. 소박한 롯지가 몇 개 보인다. 긴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새벽 4시에 다람살라를 출발했으니 11시간 20분 걸렸다. 웬만한 사람은 9시간 걸린다는데 노약자가 대부분인 우리팀의 +2시간 20분은 그런대로 양호한 성적이다. 이미 텐트는 다 쳐 놓았다. 넓은 초지는 오늘도 우리팀의 독무대다. 타시에 의하면 우리를 추월했던 포터들은 대부분 오전 10시 30분 경에 도착했다고 하니 얼마나 빨리 고개를 넘었는지 알 만하다. 한 포터는 오전 8시에 도착했다고 해서 혀를 내둘렀다. 사고도 있었다. 한 친구가 눈길에서 넘어져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무릎에 약간의 타박상만 입어 절뚝거리는 정도다. 이 친구는 다람살라에서도 감기로 고생해서 약을 타갔다. 무진행 보살님이 가지고 온 한방파스를 붙여주고 진통제를 주었다. 여분의 파스를 주어 내일 또 붙이라고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나머지 4일간의 일정을 마칠 때까지 문제가 없었다. 라르키아 라를 넘었으니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어려운 구간은 이제 다 마쳤다. 내일부터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라르키아 라를 넘은 기념으로 맥주 두 병(한 병에 270루삐)을 사서 건배를 했다. 3700고지라 밤이 되니 쌀쌀했지만 오랜만에 고소에서 벗어나 편안한 잠을 잤다. 감기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 - 빔탕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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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6. 띨제 - 자갓 (0) | 2008.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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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5. 빔탕 - 띨제 (0) | 2008.02.12 |
trek 13. 삼도 - 다람살라 (0) | 2008.02.01 |
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0) | 2008.02.01 |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0) | 2008.02.01 |
어제 밤 마을에서 밤새도록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아침 6시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쇳소리는 아니고 무슨 통나무 같은 것을 마루바닥에 두드리는 소리다. 어제 보았던 의식이 없는 노인을 위한 푸닥거리일지도 모르겠다. 의사가 없는 이곳에서 병자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텐트 안 기온은 0도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까지는 콧물이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는 코 속이 너무 건조하다. 코피가 묻어 나오는 것은 낮은 기압으로 실핏줄이 터져서 그렇다고 한다. 차고 건조한 기후도 한 몫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고산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며 몸은 현재 부지런히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칼스텐의 여행기를 보니 삼도에서 히말출리의 일출이 훌륭하다고 쓰여 있는데 우리는 놓쳤다. 팡푸치 뒤로 떠오르는 해가 눈이 부시기 때문에 아예 일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칼스텐의 여행기를 프린터해 와 매일 반복해서 보는 데도 놓칠 정도니 과연 고산은 고산인 모양이다. 고산에 오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고소에 걸리면 더 그렇다. 그래서 고소에 걸린 사람을 혼자 내 버려 두는 일은 절대 안되는 일이다. 오늘은 짧은 일정이지만 600m를 올라가야 하니 가벼운 소풍길은 아니다. 그러나 오전에 운행을 마칠 수 있는 거리라 시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가면 된다. 이 구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도 어렵다는 말은 없고 오히려 찍은 사진이 멋있어 기대가 되었다. 어제 밤에 다시 본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는 이 구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 짧고 아주 쉬운 구간은 라르키아 고개로 가는 도중 대강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경사진 초지로, 다음날 고개를 넘기 위한 완벽한 베이스캠프를 제공한다. 그곳은 풍광이 장엄한 곳이지만 해가 지면 아주 춥기도 하고 고도도 아주 높아서 고산병이 올 수 있다. 길은 전 구간이 좋다. 오직 한 두 계류를 건널 때 바위에 얼음이 언 상태에서 신중하게 건너야 한다. 메마른 산사태 지역은 노출되어 있어 주의해야 한다. 길을 걸으며 융단이 깔린 듯한 산의 풍경을 즐기고 물을 많이 마셔라. (Kev Reynolds, 7시 40분 출발. 아직 해가 비치지 않는 아침이라 고소장갑을 꼈어도 손이 시리다. 어제 티베트 국경으로 가던 갈림길까지 다시 가야 한다. 마을에서 내려와 돌담으로 막아둔 경작지를 따라 가다가 마니월과 카니를 통과하여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넜다. 곧 갈림길에 도착했다. 햇볕 아래에 들어오니 추의는 한결 가셨다. 강바닥 넓은 모레인 지대를 지나 오르막을 오른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바위산이 위협적이다. 언덕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우람한 팡푸치 아래 더욱 작아 보이는 삼도 마을에는 오늘 아침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다. 출발한지 1시간 지나자 길은 산허리길로 바뀌었다. 짧은 산사태 구간을 지나니 다시 오르막이 나온다. 어쨋든 오늘부터 내일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까지 내리막은 없다. 그것이 차라리 낫다. 저지대 계곡을 지날 때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면 오히려 더 피곤하다. 길을 가는데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장대가 중간중간에 서 있다. 지금은 길을 잃을 염려가 없지만 눈이 내릴 경우를 대비한 이정표다. 이 장대는 라르키아 라를 다 넘을 때까지 계속 서 있다. 오르막을 지나니 잠깐 평지가 나온다. 평지는 땅바닥에 풀이 융단처럼 깔려 있다. 이런 모습은 쿰부의 페리체 근처와 비슷하다. 멀리 마나슬루 노스(6416m)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 아래로 빙하가 내려오고 있다. 9시 15분 첫 번째 휴식. 해가 어느정도 올라온 탓에 뒤쪽의 팡푸치가 잘 보인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 잠간 동안의 운행에도 모두 힘들어 한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니 운행이 쉽지 않다. 그러나 풍광은 좋다. 무진행 보살님이 힘들어 하자 밍마가 배낭을 대신 지겠다고 해서 넘겨주었다. 힘들 때는 단 1kg도 엄천난 무게로 다가온다. 마나슬루 노스가 점점 더 크게 보이고 빙하도 전체가 다 보인다. 산허리길에는 작은 계류도 자주 나온다. 불모지 같은데 어디서 이런 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고도는 이미 4000m를 넘어섰다. 길은 완만한 산허리 비탈길이 대부분이라 고도가 높아 숨이 찬 것을 제외하면 운행이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 근처에 있다는 바북(Babuk=Larkya Bazar)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에는 삼도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오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ㅈ;민 오는 도중 전혀 그럴 만한 곳이 없었다. 바북은 10시 15분, 출발한지 2시간 35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남형 씨가 계곡 아래쪽을 가리켜 내려다 보니 무너진 돌집들이 넓은 초지에 흩어져 있다. 바로 바북이었다. 바북은 티베트와 정기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던 시장이다. 1956년 9월 8일, 여섯 달 동안의 돌포와 무스탕과 마낭 지역을 여행을 마친 스넬그로브 일행(스넬그로브, 네팔인 대학생, 가이드 빠상, 포터 6 등 모두 9명+빔탕에서 고용한 짐 운반용 조 몇 마리)은 빔탕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는다. 그는 라르키아 라가 지금까지 넘었던 고개 중 제일 쉬운 고개였다고 한다. 빔탕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는 것은 토롱 라를 묵티나트에서 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넬그로브는 이미 묵티나트에서 토롱 라를 넘어 마낭으로 왔다. 돌포 지역에서 많은 5천 미터급 고개를 넘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스텔그로브에게 여행의 마지막 고개인 라르키아 라를 넘는 일은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몬순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비를 흠뻑 맞으며 라르키아를 넘은 그들은 유목민 텐트를 발견하고 그 옆에 캠프를 친다. 비는 다음날 아침에도 오락가락했다. 아침에 그들은 조금 더 내려가 바북(인도측량국 조사에는 Larkya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20여 채의 돌 오두막집과 몇 채의 천막이 쳐져 있었다. 바북은 7월부터 10월까지 티베트와 네팔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계절시장이다. 우리가 잠시 머물 때 가장 피크를 이루었다. 티베트에서는 소금, 모직, 버터가 오고 네팔에서는 쌀과 곡물이 왔다. 또 세르파 무역상들도 몇 명 있는데 그들은 조(야크와 소의 교배종)를 팔기 위해서 (쿰부에서 낭파라를 넘어 티베트쪽으로 해서 넘어)왔다. 그들은 큰 항아리에 창(티베트 술)과 버터차를 가지고 와 빠상과 세르파말로 즐겁게 소식을 교환했다. (David L. Snellgrove, <Himalaya Pilgrimage>, p. 243) 그곳에서 조금 오르자 마나슬루 북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구름이 신비한 모습으로 휘감겨 있다. 이곳이 마나슬루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다. 나중에 빔탕에서도 마나슬루 북서면이 조금 보이기는 하지만 꼭대기만 조금 보이는 데다 너무 이상한 모습이라 마나슬루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우리와 동행하고 있는 밍마 세르파와 겔루 세르파는 반팔 차림이다. 무스탕의 로바나 쿰부의 세르파들은 모두 거친 히말라야를 터전으로 살고 있는 강인한 티베트 사람들이다. 밍마 세르파는 나중에 라르키아 라에서도 반팔차림이었다. 그 때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찍은 사진을 보고 알았다. 밍마 세르파는 2006년 2차 무스탕 트레킹 팀의 주방장이었다, 캠핑 트레킹의 주방팀은 포터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면서도 보수는 더 적다. 그 이유는 포터들처럼 따로 식량을 가져와 밥을 지어 먹지 않고 트레커, 가이드, 세르파들과 같은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키친보이를 하며 요리를 익히면 테이블 세팅을 담당하는 '부주방장'을 거쳐 주방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주방장을 거쳐야 세르파로 승진이 가능하다. 세르파가 되려면 반드시 주방부터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영어공부가 필수다. 키친보이 때는 영어를 몰라도 되지만 테이블 세팅을 담당하는 키친보이는 트레커들과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므로 영어를 할 줄 모르면 시키지 않는다. 요리를 익히고 트레커들과 가까이 접촉하고 세르파들과 함께 움직이며 노하우를 익힌 다음에 비로소 관리자급인 세르파 대열에 오른다. 그것이 주방팀이 단지 요리만 하지 않고 캠프에 도착하면 세르파들을 도와 텐트를 설치하는 까닭이다. 레이놀즈의 책에는 이들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히말라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캠핑 트레킹을 부드럽게 진행하는 스태프들의 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유용하다. 본국의 트레킹 회사를 대표하는 리더에게 전체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과 스태프들을 지휘를 하는 사람은 서다(Sirdar)이다. 서다는 현지 트레킹 여행사에서 고용하며 현지 여행사는 본국 여행사 또는 모험적인 여행사에서 고용한다. 서다는 주방요원들과 포터들의 '우두머리'를 뽑으며 트레킹 중 필요에 따라 인원을 고용하고 해고한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곳이라면 리더와 상의하여 캠프사이트를 고르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트레킹의 리듬을 지휘할 것이다. 트레킹에서 서다 바로 아래는 주방장이다. 보통 이 자리는 장래 서다가 될 목표를 가진 '고참' 세르파가 맡는다. 그는 보조요원으로 몇 명의 '키친보이'들을 둔다. 그리고 이 주방요원들이 트레킹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한다. 그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긴 하루를 마친 후 코를 골고 있을 때까지 남은 일을 한다. 그 다음은 세르파들이다. 그는 에베레스트 산 아래 있는 솔루 쿰부에서 태어난 고산족인 세르파족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문자 s로 표기하는 세르파들은 일반적으로 잡일을 한다. 그들은 가이드, 텐트설치, 캠프철거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지나치게 아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고객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들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우정을 즐겨라. 왜냐하면 그들과의 인간적 교류는 전체 여행에서 가장 좋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짐을 나르는 남자 또는 어떤 경우 여자 포터들을 단지 인간트럭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 당신의 휴가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노동전문가로 생각해야 한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리고 비록 당신이 그의 고향이나 가족에 대한 질문을 할만큼 충분한 네팔어를 모른다하더라도 감사의 미소와 "나마스테" 한 마디는 유대감을 줄 것이다. 그리고 트레킹을 마치고 당신은 그들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팁을 줄 기회를 갖는다(팁은 모든 스태프들에게 주며 그룹의 리더가 그 일을 한다). (Kev Reynolds, 앞의 책, pp> 26-27) 고참 세르파의 필수품 중 하나가 피켈(Pickel)이다. 피켈은 눈, 얼음 위에서 사용하는 괭이, 도끼, 지팡이의 세가지 기능을 갖춘 장비다. 매일 화장실 구덩이를 팔 때 필요하며 높은 고개를 넘을 때 얼어 있는 구간이 있으면 세르파는 전체 트레킹 팀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얼음을 파 계단을 만든다. 세르파는 한 팀에 두어 명씩 있다. 우리팀은 가이드 타시가 앞장서고 밍마 세르파는 제일 뒤에 오는 사람을 수행하고 있다. 보통은 사진을 찍는 내가 제일 뒤에 쳐진다. 제일 앞에 가더라도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멈추면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이 모두 통과한다. 제일 뒤에 오던 밍마는 걸음을 멈추고 내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린다. 어떤 때는 내가 밍마 세르파를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앞 사람을 추월해 밍마를 넘겨주곤 한다.
실제로 전형적인 고산의 풍경이 있는 다람살라는 삼도에서 가는 도중의 풍광도 좋고 다람살라 풍광도 좋아 대만족이었다. 삼도에서 이곳까지 빠른 사람은 두 시간 30분, 웬만한 사람은 3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는 3시간 35분 걸렸다.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문제는 동포들의 상태가 지쳐 있다는 점이다. 보명화 보살님이 힘든지 오는 도중 동생이 배낭을 받아들었다. 무진행 보살님은 이틀 전 저녁 삼도에서 먹은 야크고기에 또 걸려 어제부터 음식을 잘 먹지 못해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다. 야채와 야크고기를 섞어 볶은 '야크볶음'을 먹고 다시 비위가 상한 것이다. 2002년 쿰부 트레킹 초반에 타미에서 야크 고기가 든 모모를 먹고 걸려 트레킹 내내 식욕부진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이 보살님은 야크와 전생에 원수가 졌는가 보다. 이 글을 쓰면서 당시 녹음(2002.11.22)을 들어보니 새삼스럽다. 나는 머리가 약간 띵하긴 해도 힘든 상태는 아니다. 나머지 사람들 중 몇 명은 두통 등 고소증상이 있다. 남형 씨는 어제 호기있게 찬물로 머리를 감은 것이 좋지 않았다. 어제는 컨디션이 좋아 머리를 감았지만 고산에서는 아무리 머리가 간지럽다 하더라도 머리를 감지 않아야 한다. 그렇긴 해도 천천히 오르는 이런 스케줄에 사라들이 헤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산원정대는 물론 트레킹 역시 대부분 5000m 이상을 오르는 일이라 고산병은 누구나 피할 수 없다. 무리한 운행을 하지 않고 천천히 오르는 것이 나의 트레킹 스타일이지만 그래도 고산병은 피할 수 없는 일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출국과 입국의 일정이 제한되어 있는 단체 패키지 팀의 경우 종종 무리한 일정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준비를 소홀히 한 사람들은 패키지를 따라갔다가 혼이 나곤 한다. 모든 것을 여행사에서 알아서 잘 해주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직장인들처럼 휴가기간이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를 떠날 때까지 2-3일 여유를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산에 들어가기 전 고산병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것은 장비 준비와 체력훈련 과 함께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일이다. 2004년 1월에 마나슬루 트레킹을 했던 한국의 한 팀은 사마가온을 출발, 삼도에서 점심 먹고 이곳 다람살라까지 하루만에 올라갔다. 3530m에서 4450m까지 920m를 하루에 올랐으니 무리한 일정이었다. 랑탕의 컁진(3900m)에서 키모슝리(4984m)까지는 1000m 이상 오르는 일이지만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꼭대기에 오른 후 바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또 그곳을 오르고 안오르는 것은 선택사항이므로 힘들면 도중에 그냥 내려온다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다람살라는 내려오는 고개가 아니라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5213m의 라르키아 라까지 763m를 더 올라가야 한다. 3500m 이상의 고산에서 이틀 동안 무려 1685m를 올리는 일이다. 이 팀은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 눈보라를 만나 조난의 위험에 처했다. 악전고투 끝에 천우신조로 모두 무사히 넘어왔지만 자칫 대형사고를 당할 뻔했다. 물론 이들이 고생한 것은 예상치 못했던 악천후 탓이 가장 크지만 고산병 때문에 몸이 지친 것도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도 다른 모든 팀처럼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을 가졌다. 그러나 다음날 삼도에서 멈추어야 하는 일을 간과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을 갖지 말고 삼도까지 오는 것이 고소적응에 더 낫다. 전문여행사들의 일정은 모두 사마가온에서 삼도까지만 운행한다. 아니면 일정을 조금 변경해 전날 시얄라(3500m)에서 운행을 멈추고 다음 날은 사마가온을 통과하여 삼도까지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소적응일을 가진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오랜 경험을 토대로 짠 일정이다. '무리한 운행을 하지 않는 것'은 고산트레킹의 필수다. 내 생각으로는 한국의 이 팀은 마나슬루 트레킹 팀 중 삼도를 그냥 통과한 유일한 팀이 아닐까 생각된다. 12시 10분에 점심이 나왔다. 밀가루 빵과 소세지 그리고 야채가 나왔다. 모두들 입맛이 없어 먹는둥 마는둥 한다. 차라리 라면이 낫겠다 싶어 라면을 다시 끓여달라고 하니 라면과 누릉지가 든 음식가방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포터들도 각자 속도가 달라 일찍 온 포터도 있고 늦게 오는 포터도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텐트는 모두 도착해 설치하고 있는데 내 텐트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짐도 몇 개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제일 심한 사람은 보명화 보살님이다. 어제까지 말짱하던 양반이 갑자기 헤메고 있다. 이번 트레킹을 위해 하드트레이닝을 했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단다. 작년 무스탕 트레킹 때 체력이 딸려 혼난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단련을 했다. 출발 전 가끔 전화로 "무스탕에서 체력도 안되는 사람들 때문에 제가 고생 좀 했지요."라고 놀리면 "어디 이번에는 누가 더 잘 가나 한 번 볼겁니다."라며 자신 만만하게 대답하곤 했다. 그만큼 열심히 관악산 등반으로 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보람이 없다. 잠시 후 음식가방이 도착해 주방에서 라면을 끓여왔다. 그러나 정작 먹고싶다던 사람은 국물 한모금 먹고는 더 이상 먹지 못하고 텐트로 들어가더니 곧 다시 나와 토하기 시작한다. 동생 남형 씨가 등을 두드려 준다. 그 장면을 보니 문득 <남매는 단 둘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4일 전 사마가온에서 동생이 고소로 고생할 때 누나가 걱정했고, 오늘은 누나가 고소로 고생하니 동생이 걱정하고 있다. 구토까지 하여 걱정이 되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몇 시간 고도에 적응되면 괜찮아지리라는 기대를 했다. 일단 모두 다이아목스를 복용했다. 두통이 심한 사람은 두통약을 먹었다. 늦은 오후까지 두고보다가 그래도 좋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주방에 이야기 하여 여성동포들에게는 뜨거운 세숫물을 갖다주라고 했다. 이럴 땐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고 물을 많이 마시며 누워 쉬는게 보약이다. 나도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시원하게 씻고 싶었다. 칼스텐은 이곳에서 시원하게 흐르는 계류에 몸을 씻고 햇볕에 몸을 뎁히며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이 대목은 잊지 않고 기억에 잘 담아두었다. 그의 여행기는 간결하면서도 감성이 풍부하여 재미가 있다. 경작지를 지나 다람살라를 향해 천천히 오르니 마을은 점점 작아졌다. 나는 가끔 뒤로 돌아서서 마을에서 가졌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했다. 마을은 이제 아주 작아져 그 옆의 거대한 팡푸체와 비교가 되었다. 길은 숨어 있는 마나슬루 산괴로부터 내려온 모레인 위로 나 있다. 산괴 위로는 솟아 있는 바위벽은 너무 가팔라 눈조차 '오직' 능선과 정상에만 있다. 붉은 관목, 마니월 그리고 초르텐들이 풍경을 더욱 장엄하게 만들고 있다. 올라갈수록 더 많은 봉우리들이 나타났다. 가장 인상적인 봉우리는 처음 나타난 라르키야 피크로서 마나슬루의 두 봉우리를 압도한다. 아침 내내 풍경이 매혹적이다. 왼편에는 거대한 산들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작고' 메마른 언덕들이 있다. 캠프사이트에서 보는 풍광이 장엄하다. 다람살라까지 삼도에서 3시간 걸렸다. 짧은 운행은 고소적응과 오후의 '게으른 휴식'에 충분한 시간을 준다. 나는 계류에서 발을 �었다. 이미 얼어붙는 추위를 느끼고 있었으나 나는 계속해서 면도와 함께 '온몸�기'를 했다. 물가에 있는 얼음조각들이 나의 자부심을 증가시켰다. 햇볕은 뜨거�지만 산들바람은 그 뜨거움을 아주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햇볕 아래에서 몸을 다시 덥히자 멀리 아래에서 농무가 올라왔다. 기온은 빠르게 떨어졌다. 가장 편안한 곳은 뜨거운 물병이 발치에 있는 침낭이다. 내 몸은 잘 조절되어 있다. 밤에 춥지 않았다. 그리고 한시간 동안 글쓰기를 한 후 손가락을 만져보니 아주 차가워 놀랐다. 글 쓰는 동안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멍든 손은 이제 다 나았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바로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잠이 들기까지 보통 3분 걸리는데 오늘은 더 걸렸다. 아마 고도 때문이리라. 그날 밤 우리는 거의 유럽 최고봉 높이에서 잤다.(칼스텐 네벨, <2000 마나슬루 트레킹> day 15) 나도 칼스텐처럼 계류에서 세수도 하고 발도 씻고 가능하면 상반신이라도 냉수마찰을 하리라 생각했다. 햇볕에 뎁혀진 텐트 안은 따뜻했다. 그런데 런닝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자 사정없이 몰아치는 찬 바람에 도저히 씻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잘못해서 감기가 도지면 큰 일이다. 그래서 칼스텐은 젊은 친구여서 그런 모험이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하고 객기를 참았다. 대신 물수건으로 간단하게 몸을 닦았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일 갈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갔다. 조금만 올랐는데 숨이 턱에 찬다. 내일은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므로 지금 이곳을 오르지 않으면 풍광을 감상할 기회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오를 생각이 없으니 "잘 다녀오세요."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 있듯이 높은 언덕에 올라 전체 풍광을 조망하는 맛은 상쾌하다. 삼도 쪽의 팡푸치가 깨끗하게 보인다. 트레커들은 캠프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스태프들은 땡볕 아래에서 오늘도 열심히 카드를 치고 있다. 생각같아서는 맞은 편 오두막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고 싶다. 그곳에 오르면 남쪽으로 마나슬루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라르키아 라가 보인다고 한다. 동쪽의 팡푸치는 여기서도 잘 보이니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빤히 보이는 그곳까지 두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몸이 자신 없다고 더 이상 오르기를 거부한다. 돌아와 생각하면 "기왕에 간 거 거기까지 올라갔다 왔으면 좋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지만 실제로 그곳에서는 힘든 상태라 오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현실과 상상의 차이다. 오늘 이곳에는 우리 팀만 있어 한가하다. 어제는 우리팀만 뺀 나머지 팀들이 모두 올라왔으니 무척 붐볐을 것이다. 우리 팀만 9동의 텐트를 치는데 30명의 트레커들이 왔다면 얼마나 복잡했을지는 안보고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마 텐트 칠 자리도 잡기 힘들었을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한가한 풍경이 제일 좋다. 결과론이지만 삼도에서 하루 더 머문 것이 아주 잘 된 일이 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연무가 몰려와 천지사방이 어두워졌다. 기온은 급강하한다. "띨레리"의 소리를 듣고 모두 식당텐트에 모여 차를 마시며 내일의 일정을 살펴본다. 보명화 보살님은 아직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가 되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따로 누릉지를 끓이라고 하고 남형 씨에게 가 보라고 했다. 다행히 잠시 후 조금 회복된 모습으로 나타나 한숨을 돌렸다.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내일은 이번 트레킹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이제는 왔던 길로 돌아가는 일이 더 힘들기 때문에 웬만하면 넘는 것이 좋다. 5213m의 고개를 넘는 일이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여행기를 보면 한국팀들은 모두 죽을 고생을 하면서 넘었지만 서양팀들은 모두 어렵지 않게 넘고 있다. 2000년 라르키아 라를 넘은 칼스텐은 "평범한 운행일"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역시 2000년 11월 이곳을 지나간 쉴즈 부부 일행은 오전 5시에 출발하여 9시 고개에 도착하여 1시간 동안 놀다가 내려갔다고 한다. 2004년의 밥이나 2005년 중늙은이 남자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의 글에도 특별히 어렵다는 말이 없다. 쉴즈부부팀이 4시간 걸렸다니 우리는 5시간이면 충분히 고개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도 그들처럼 4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5시에 출발하려고 생각했다. 그런 일정을 타시에게 말하니 적어도 4시에는 출발하자고 한다. 그 이유는 포터들이 선글라스가 없어 설사면에 햇빛의 반사가 심해지기 전에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정을 조정해 내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4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모두 미리 아이젠을 잘 챙겨 배낭에 넣어두라고 말했다. 스패츠는 현재 눈이 굳은 상태라 굳이 착용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타시가 말해서 그대로 카고백에 두었다. 라르키아 라를 넘은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어주며 별로 힘들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고소만 아니면 라라키아 라를 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진행 보살님은 제일 연장자이기는 하지만 5년 전 5420m의 촐라패스를 넘은 경험이 있으니 걱정이 덜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5000m를 넘어본 사람이 없다. 두 사람은 아예 히말라야 자체가 초행이다. 그러나 선행자들의 "평범하다"는 기록이 모든 근심을 잠재웠다. 더구나 몇 달 전 봄에는 비록 고생은 많이 했지만 한국의 74세의 할머니가 눈밭에 빠져가며 넘었다는 사실은 은연 중 자극이 되어 분발심을 일으켰다. 문제는 식욕부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체력이다. 한 밤 중 화장실을 가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오니 안개는 다 사라지고 적막강산에 밝은 달빛이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9월 보름이다. 4450m의 고지에서 보는 보름달은 너무나 황홀하다. 내 생애 이렇게 높은 곳에서 다시 또 보름달을 볼 기회가 있을까? 얼마나 밝은지 달이 아니라 해의 사촌동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어제 밤 삼도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보명화 보살님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아, 달이 너무 밝아. 문글라스(moon glass)가 필요 해!" 오늘 밤은 더욱 문글라스가 필요한 밤이다. |
trek 13. 삼도 - 다람살라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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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5. 빔탕 - 띨제 (0) | 2008.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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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 - 빔탕 (0) | 2008.02.01 |
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0) | 2008.02.01 |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0) | 2008.02.01 |
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 (0) | 2008.02.01 |
캠프장이 초지에 있는 탓에 어젯밤 야크와 말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녀석들끼리 알력이 있는지 "푸르르~" 콧김을 불며 투닥거리는 소리가 자주 난다. 설마 텐트로 밀고 들어오지는 않을테지만 뛰어다닐 때마다 땅이 울리니 깊은 잠을 자지 못하겠다. 밤 12시에 녀석들의 소란에 잠이 깨어 텐트 안 온도를 보니 영상 1도다. 곧 다시 잠이 들었다.
우리는 원래 삼도에서 바로 다람살라로 가는 일정이었지만 오는 도중 일정이 변경되면서 하루 더 여유가 생겼다. 삼도에서 바로 다람살라로 가는 일정을 택하면 여행이 하루가 단축된다. 만일 그 하루를 내려가는 일정에 보탠다면 하산길 운행은 한결 여유가 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은 안나푸르나 라운딩길과 겹치는 길이라 복잡하다. 또 히말라야 설산을 벗어난 중산간 지방은 특별한 매력이 없다. 전체 일정을 하루 단축할 경우를 택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앞 장(trek.1)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어제 도착했을 때 삼도에 말이 많이 보이길래 저녁 식사 때 타시에게 말을 한 번 알아보라고 했다. 기왕에 가는 소풍길이니 말을 타고 가는 조랑말 여행(pony trekking)도 나쁘지 않다. 말들도 무스탕에서 보던 말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건장하다. 말 이야기에 제일 얼굴이 밝아지는 사람은 보명화 보살이었다. 무스탕에서 말타는 데 재미를 붙인데다 지금 몸이 약간 지친 상태라 기대가 큰 모습이다. 말을 타보지 않은 사람들은 '과연 내가 말을 잘 탈 수 있을까?'하는 표정이다. 오늘 아침 타시가 보고하는데 말 한 필당 하루 4000루삐를 달라고 해서 조랑말 여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4000루삐면 우리 돈 6만원이다. 무스탕 지역이 1100루삐이니 비싸도 많이 비싸다. 이 지방 마을발전위원회(VDC)에서 정한 정찰가격이므로 흥정의 여지가 없다. 그것을 어기면 벌칙이 내려지기 때문에 주민들도 어기지 못한다. 그 가격은 여기서 문제가 생긴 트레커들의 후송을 위해 말을 빌릴 때 가격이다. 2002년 쿰부의 텡보체(3860m) 아래 계곡 마을인 푼기텡가(3250m)의 롯지 앞에는 "텡보체까지 말을 타고 가는데 편도 50달러"라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 코스의 가격 비한다면 하루종일 66불은 비싼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상시도 아닌 지금 그 정도 돈을 들여서까지 말을 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옵션이라 자기들 호주머니에서 지불해야 하는동포들도 실망스럽지만 동의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라운딩 코스를 돌 수 있어서 멋진 설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말을 탔더라면 갔던 길로 돌아오는 단조로운 일정이되었을 것이다. 짐을 싸지 않아도 되는 날은 여유가 있다. 아침밥은 라면에 밥을 말아 먹었다. 8시경 출발. 주방에서 점심으로는 도시락을 준비해 키친보이 푸르바가 보온병과 함께 들고 따라나섰다. 다람살라로 가는 다른 팀들은 캠프를 철수하고 있다.아직은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팡푸치에 햇살이 가려 춥다. 그늘을 걷다가 손이 제법 시려 얇은 장갑을 끼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오늘은 고소장갑을 끼고 출발하는 것이 좋았다. 삼도에서 티베트로 가는 고개는 네 개 있다. 동북쪽 팡푸치 옆 계곡으로 가는 길은 마을 동쪽 계곡을 따라 가고 나머지 세 길은 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우리는 라운딩 코스가 있는 북쪽 계곡을 택했는데 마나슬루를 볼 수 있는 동북쪽 계곡 왕복도 괜찮을 것 같다. 두 코스 중 하나만 갈 수 있으니 선택은 알아서 할 일이다. 야크들이 풀을 뜯고 있는 산비탈 길을 지나 부리 간다키 강바닥으로 내려가니 넓은 경작지가 있다. 어제 뒷동산에서 보았던 풍경의 직접 대면이다. 마니월을 지나고 강을 건너 조금 올랐다. 곧 오른쪽으로 길이 하나 갈라진다. 티베트로 가는 길이다. 다람살라는 직진길이다. 앞에 가던 다른 팀의 포터들과 트레커들은 직진을 한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올랐다. 언덕에 올라 가쁜 숨을 고르며 돌아보니 멀리 삼도 마을이 햇살 아래 아침 연기를 뿜고 있다. 계속 북진하여 9시 경 돌무지가 있는 산비탈 초지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뒤돌아보니 계곡이 아득하고 히말출리와 보우다까지 잘 보인다. 햇볕이 따뜻한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이미 4000m를 넘은 터라 사방이 고산 불모지의 황량한 풍경이다. 인적이라고는 오직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이 다니고 있는 길과 중간 중간 초지에 허물어져 있는 돌집 뿐이다. 멀리 뒤쪽으로 전개되어 있는 설산과 아래쪽 계곡의 물 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이런 풍경은 태고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롯지 트레킹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쿰부 트레킹에서는 촐라패스 넘는 길과 추쿵에서 임자체 베이스캠프 가는 길, 랑탕에서는 컁진에서 랑시샤 카르카 가는 길, 그리고 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는 틸리초 호수 가는 길에서나 이런 맛을 볼 수 있다.
갑자기 방울 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돌아보니 두 사나이가 말을 타고 오고 있다. 티베트로 가는 중이다. 인사를 나누며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우리도 저렇게 타고 갈 수 있는데....우리를 보자 신이 난 듯한 두 사나이는 말을 재촉해 빠르게 달려 나간다. 우리는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갔다. 10시 30분,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고 그곳에서 20분 더 오르다 안온한 분위기의 초지가 있는 모레인 지대 멈추었다. 점심을 먹기위해서다. 오늘 티베트 국경까지 가지는 않고 점심 먹고 돌아오는 일정이다. 국경까지 걸어서 가는 것은 하루 종일 걸리기 때문에 무리다. 소풍은 가벼운 것이 좋다. 꿀을 곁들인 티베트빵과 삶은 달걀과 야크치즈가 점심으로 나왔다. 차는 홍차를 가지고 왔다. 점심을 마치고 황량한 풍광을 즐기다가 11시 30분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은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건너편 삼도 마을 뒤쪽 산허리길로 가기로 했다.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것은 싱겁다. 강바닥으로 내려가니 따로 길은 없다. 일단 강을 건너야 하는데 좁은 강폭이지만 신발을 벗지 않으면 안되었다. 빙하수 상류의 물이 얼마나 찰지 생각만해도 오싹하다. 무스탕에서 두 번 건넌 경험이 있다. 그 때는 비교적 하류쪽인데도 발이 어는 듯햇다. 이곳은 최상류, 빙하에서 바로 내려오는 물이다. '과연 이 차가운 물을 신발 벗고 건널만한 가치가 있을까, 차라리 되돌아 갈까?' 갈등하고 있는데 이리저리 건널 곳을 찾던 타시가 한 곳에서 신발을 벗고 한 번 건너보더니 돌아와 우리에게 업히라고 한다. 자기가 업어 건네 주겠단다. 혼자 스틱 짚고 건너기도 쉽지 않은 물길을 업히라고 하니 의구심이 들었지만 타시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래서 모두 타시의 도움을 받아 물을 건넜다. 타시는 그 찬물을 여덟 번 왕복했다. 처음 테스트로 한 번, 우리 여섯,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진행 보살님의 배낭과 스틱을 가지고 나왔다. 쉽지 않은 일이다. 타시보다는 우리가 업혀본지 하도 오래되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자세가 엉성한 것이 타시에게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타시는 왼손은 우리를 잡고 오른손은 지팡이로 균형을 잡고 건넜다. 물살은 세고 찬데 바닥은 고르지 않으니 균형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 뻔하다. 덩치와 키가 작은 편인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인데 180cm의 키에 80kg의 체중을 지닌 남형 씨를 업고 건널 때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키가 큰 편인 혜명화 보살은 업힌 채 균형을 잘 잡지 못해 신발이 거의 물에 닿아 빠질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행여 물에 빠진다면 낭패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등산화가 젖으면 문제가 커진다.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 젖은 등산화는 치명적이다. 다행히 비틀거리면서도 무사히 물을 건넜다. 과연 타시는 무스탕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로바(Loba, 무스탕 사람)다웠다. 수고한 타시에게 특별 보너스로 10불을 주었다. 강은 건넜지만 능선으로 오르는 길도 만만치 않다. 위쪽으로 보이는 산허리길이 까마득하게 높아 보인다. 거기까지 길이 없으니 무성한 관목을 헤치고 가야 한다. 중간에 잠시 평탄한 초지가 나오더니 다시 오르막이다. 강은 점점 멀어지고 티베트쪽 설산이 솟아났다. 설산이 참 예쁘다. 그 앞에 있는 모레인 지대는 마치 큰 성처럼 보인다. 1시가 되어 산 중턱 길에 들어섰다. 넓은 야크방목지이고 티베트 국경 가는 길 중 하나라 길이 잘 나 있다. 아무리 탁 터진 민둥산이라도 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운행할 때 천지차이다. 햇볕 아래 넓은 초지에서 편안하게 쉬었다. 그 때 타시가 산중턱을 가리킨다. 히말라야 타르(Himalayan Tahr, 산양) 무리다. 세어보니 모두 일곱 마리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산양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녀석들은 우리가 고함을 지르며 아는 체 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며 풀을 뜯고 있다. 거리가 멀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히말라야 사향노루(Musk Deer)는 사슴과에 속하지만 뿔은 없다. 숫컷은 위턱에 송곳니가 아래로 내려와 있다. 다른 사슴들과는달리 사향노루는 히말라야 고산의 맹주는 눈표범이다. 고양이과에 속하는 눈표범은 험난한 산악 지대에서 조용히 살아가기 때문에 현지인들도 좀처럼 보기가 힘든 환상의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생태 부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1970년 미국의 동물학자 조지 섈러에 의하여 야생 상태의 사진이 처음으로 촬영되어 주목을 받았다. 눈표범은 아주 희귀한 동물이라 직접 보는 것만 해도 영광(?)으로 여길 정도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킬리만자로는 그 산봉우리가 늘 눈에 덮여 있는데, 표고 1만 9천 7백 10피트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서쪽 꼭대기는 마사이어로 '느가이예 느가이' 즉 '신의 집'이라 불린다. 이 꼭대기 가까이에 말라빠지고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길이 없다." 작가는 왜 표범이 눈덮인 산 정성까지 올라와 얼어 죽었을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표범이 눈표범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곳이 그들의 서식지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굶으면 단연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다. 물론 작가는 생태학적인 면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 표범의 죽음을 조명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영감을 얻은 한 작가(양인자)가 가사를 썼고 음악가인 그 남편(김희갑)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가수 조용필이 불러 많은 인기를 얻었다. 대부분의 날을 혼자 독립생활을 하는 눈표범은 현재 전세계에 약 600마리 정도만 서식하고 있는 희귀동물로 모피가 매우 비싸게 팔리는 까닭에 밀렵이 성행했다. 또 아시아에서는 눈표범의 뼈가 호랑이 뼈와 쌍벽을 이루는 귀한 약재로 취급되어 왔기 때문에 뼈를 노리는 밀렵꾼에 의하여 사냥되기도 하고, 티베트 유목민들에게는 가축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여 제거되기도 한다. 그들의 먹잇감인 야생 초식 동물이 감소하는 것도 개체 수 감소의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세계자연보호연합(IUCN)의 적색자료목록(Red Date Book)에서는 ‘EN’(절멸 우려종)으로, 워싱턴 협약(CITES: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에서는 부속서의 I(멸종 위험이 높은 종)로 지정되어 국제거래가 금지되어 있다.
우리가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 진 것은 오직 마을 출입문에 들어섰을 때였다. 주광장에서 우리는 한 농부가 큰 눈표범 가죽을 등에 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가죽은 검은 점이 있는 하얀색이고 길이는 9피트였다. 그 사람은 구식 보병총으로 조금 전 표범을 쏘았다. 그리고 가죽 일부분을 벗기고 속에 짚을 채웠다. 그는 지금 뉴곰빠로 가는 중이었다. 스님들은 그것을 악마의 방어책으로 곰빠에 매달아 둘 것이 틀림없다. (Pessisel,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p. 191) 눈표범을 야생상태에서 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2004년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planet earth diary>를 보면 눈표범을 영상에 담기 위해 2004년 라닥 히말라야와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돌아다니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결국 세계 최초로 눈표범 촬영에 성공한다. 우리는 이틀 후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 눈밭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눈표범 발자국을 보았다. 그것만 해도 만나기 어려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넓은 초지는 곧 산허리길로 바뀌었다. 산허리길이란 중간 중간 골이 있기 때문에 빙빙 돌아야 한다. 오후 3시에 오른편으로 다람살라로 향한 계곡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멀리 앞쪽으로 높은 제방 같은 언덕 위의 캠프장이 보인다. 거기까지도 한참 더 가야할 것 같다. 실제로는 20분밖에 안걸렸지만 점심 후부터 거의 4시간 가까이 운행중이라 마지막 20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마을 위 언덕에 도착하여 내려다 보니 어제 이맘 때 울굿불굿하던 텐트들은 모두 사라지고 캠프장이 텅 비어 있다. 우리팀 텐트 뒤쪽으로 오늘 새로 온 팀의 노란 텐트 두 동이 보인다. 두 사람이 온 모양이다(나중에 부부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식당텐트와 화장실텐트 등 있을건 다 있다. 자세히 보니 마을 입구 롯지 옆에도 텐트가 살짝 보인다. 무척 한산한 분위기다. 주방에서 내 온 뜨거운 차를 마시며 잠시 쉬다가 나머지 오후는 마을 방문으로 보냈다. 어제는 못느꼈는데 오늘 보니 집집마다 하얀 룽다가 펄럭이고 있다. 오늘은 주민들이 많이 보인다. 아이들은 어른들 곁에서 놀고 있거나 혼자 밭에서 놀고 있다. 골목길 응달은 아직 덜 녹은 눈이 남아 있어 진창이다. 마을은 아무리 봐도 인도나 네팔의 빈민촌을 연상시킨다. 집집마다 쌀아 둔 건초더미가 더욱 그런 느낌을 부추키고 있다. 무스탕 마을과 비교가 되어 내 눈이 너무 높아진 모양이다. 작년까지 여섯 번 트레킹을 하면서 이렇게 현지인들이 사는 곳을 몇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있다면 오직 작년 무스탕 트레킬 때 뿐이었다. 안나푸르나 지역, 랑탕 지역 그리고 쿰부 지역에서는 항상 롯지 촌에서 머물렀다. 어쩌다 현지인들이 사는 집을 지나치긴 했지만 주변 분위기는 롯지와 티하우스가 장악하고 있다. 롯지촌은 새로 생긴 마을이다. 피상(Pisang)도 트레커들이 머무르는 로우(Lower)피상은 롯지촌이고 그 위쪽 산비탈에 있는 어퍼(Upper)피상이 현지 주민들이 사는 올드빌리지다. 마낭(Manang)은 그나마 현지인들의 집과 롯지촌이 같이 있어 티베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 비하면 마낭은 그야말로 대도시격이다. 그만큼 이곳이 오지임을 실감한다. 척박한 환경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얼굴을 찡그린 사람을 보기 힘든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인간인 이상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을 수 없다.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불교에서는 탐진치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가장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것이다. 탐냄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고 성냄은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혐오·불쾌 등의 감정이다. 어리석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무명(無明)과 같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강한 집착에 의해 바른 도리를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이나 분별을 일으켜 온갖 번뇌의 근원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삼독심의 발로가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의 기준을 '돈'으로 삼는 현대문명사회에서는 더욱 삼독심이 치성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이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현재문명의 때가 덜 묻은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골목길을 돌아나오는데 한 집에서 두 여인네가 늙은 노인을 담요에 싸서 방으로 들어간다. 잠깐 보았지만 노인은 임종이 다가온 듯 의식이 거의 없다. 생로병사는 예외가 없는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행여 고칠 수 있는 병도 의료시설이 없어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저어했다. 맞은 편 담장에서 그 광경을 보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목을 콜록거리며 뭔가를 달라고 한다. 느낌으로는 감기약을 달라는 것 같다. 약품가방을 가지고 왔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함부러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타시와 같이 왔으면 통역이 되어 필요한 약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초코바만 하나 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종합감기약 정도는 부작용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감기약을 주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어 식당텐트로 가 저녁이 나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시가 들어왔다. 어제 주문한 대로 마을 촌장을 모시고 왔느냐 물으니 자기가 알아 온 마을 사정을 이야기 한다. 삼도는 아래의 사마가온과 함께 하나의 VDC(마을발전위원회)에 속하는데 사마가온에는 4개의 워드(Ward), 삼도에는 3개의 워드로 또 나누어져 있다. 워드란 구역을 뜻하는 말로 우리의 통이나 반의 개념과 비슷할 것이다. 보통은 한 마을이 한 워드가 되는데(무스탕은 7개 VDC에 33개 마을이 있다) 불과 30여 채의 집이 있는 삼도에 3개 워드가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각 워드의 대표 3인에게 나누어 줄테니 그 사람들을 불러달라고 하니 타시가 다시 고개를 젖는다. 한 사람에게 주면 혼자 다 가지기 때문에 개인별로 달라는 것이 대중의 뜻이라고 한다. 순박한 사람들이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이지만 마을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 이미 밖에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와 있다. 마을 잔치라도 하는 듯 아이 어른 할 것없이 다 모였다. 우선 타시를 통하여 항생제 사용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한 후 뒤쪽 둔덕에 서 있는 남형 씨에게 어른이 몇 명이나 되어 보이는가 물어보았다. 30명 쯤 된다고 한다. 450정이니 15정씩 나누어 주려는데 다시 남형씨가 다시 정정한다. "아니, 더 오는데요. 50명은 되겠습니다." 그래서 9정씩 주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족 수가 많은 집이 유리하다. 한 사람씩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약을 받는 사람마다 만병통치약을 받는 표정이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캡슐을 열고 쓴 분말을 입에 털어 넣는 사람도 있다. 곰빠의 스님도 대열에 동참했다. 이곳에서 이렇게 약을 단체로 배급받은 일은 드물다고 한다. 타시가 정확을 기하려고 종이에 동그라미를 치고 찢어 마을 사람에게 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종이를 나에게 내밀고 약을 탔다. 약을 주며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손 바닥에 체크를 하면 모를까 종이를 주면 나중에 버리고 다시 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누가 누구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래도 순박한 사람들이라 이중으로 약을 타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오늘 도착한 세 명의 독일 팀도 가까이 와서 구경한다. 거기서 이런 행사를 벌였다면 우리도 구경하러 갔을 것이다. 불구경과 사람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다. 한 사나이가 와서 남형 씨에게 물어본다. 뭘 주느냐.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다. 의사가 왔나. 아니다. 대충 옆에서 들은 내용이다. 곧 한 통이 바닥났다. 남은 통에 있는 것을 더 가져와 덜어 타시에게 나누어주라고 했다. 조금 전 마을 골목길에서 만났던 사나이가 나에게 한 아낙에게 업혀 있는 아이를 보여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다. 아이를 보니 오른쪽 볼이 퉁퉁 부어있다. 잇몸이나 입 안에 염증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의사가 아닌 내가 알 리 없다. 제법 아플 것 같은데 이력이 났는지 꼬맹이는 울지도 않고 멀뚱멀뚱 나를 쳐다본다. "왜 이런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약도 없다. 가능하면 빨리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말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병원에 가는 것을 몰라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를 치료할 병원은 여기서 최소한 5일 걸리는 아루갓바자르에도 있을 것 같지 않고 카트만두까지 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못가는 것 아니겠는가! 이럴 때는 내가 의사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환자의 증상은 알고 약을 줄 수는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약상자를 뒤져보았다. 작은 통에 들어 있는 어린이용 소염진통제가 있다. 이거라도 혹 도움이 될지 모르니 하루에 두 알씩 먹이라고 통 채로 다 주었다. 보름치 쯤 된다. 계속 먹이지는 말고 한 사흘만 먹여보라고 해야 했는데 깜박 잊었다. 설마 보름 내내 다 먹이지는 않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곳 아이들은 대체로 야생마처럼 체력이 강하니 잘 견디어 냈으리라 생각한다. |
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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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 - 빔탕 (0) | 2008.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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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3. 삼도 - 다람살라 (0) | 2008.02.01 |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0) | 2008.02.01 |
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 (0) | 2008.02.01 |
trek 9. 영혼의 산 마나슬루를 만나다 (0) | 2007.12.29 |
오늘은 모두 상태가 좋다. 하루 쉬었더니 컨디션이 좋아진 모양이다. 오늘 일정도 3시간 짜리라 부담이 없다. 8km 거리에 평지길이 대부분이고 고도는 170m만 오르니 룰루랄라 일정이다. 나는 아직 콧물이 나오고 코를 풀면 피가 섞여 나오기는 해도 전체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다. 어제 저녁 식사 후 다시 단체로 다이아목스를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끝이 저릿저릿하는 증상은 다이아목스가 몸에서 잘 분해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단체 트레킹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팀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열심히 체력도 단련해 두어야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혼자 아니면 두 사람이 움직였던 첫 네 번의 트레킹까지는 다이아목스를 먹지 않았다. 돌아갈 날을 여유 있게 잡았기에 여차하면 운행을 중지하고 증상이 개선될 때까지 푹 쉬었다 갈 수 있었다. 다이아목스를 준비한 것은 2005년 가을 5명이 한 팀이 되어 떠났던 ABC트레킹 때부터였다. 이 때는 출입국 시간에 제약이 있어 여유가 많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증상의 조짐이 보이면 약을 먹었다. ABC는 고산병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덜하긴 해도 마지막 이틀은 3000m 이상에서 1000m를 올리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있다. ABC에서 1박하며 멋진 안나푸르나의 일출을 잘 보고 왔지만 우려했던 대로 세 명이 고산병 증세를 보여 다이아목스의 도움을 받았다. 다이아목스는 카트만두나 포카라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다. 다시 멋진 일출을 구경하고 배낭을 매는데 근처에 사는 한 꼬마가 일찍부터 구경을 왔다. 몽골리안 계통의 모습으로 옷만 빼면 영락없는내 어린 시절 모습이다. 추운 날씨인데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내가 "타시뗄레" 하자 공손히 합장하며 "타시뗄레' 한다. 마침 카메라 가방에 넣어 둔 어린이 양말이 있어 선물로 한 컬레 주었다. 7시 20분 출발. 마을을 벗어나자 마나슬루가 전신을 보여주며 반긴다. 어제보다 이른 시간이라 구름이 거의 없는 깨끗한 모습이다. 오늘은 바람이 서에서 동으로 불어 '연기'의 방향이 어제와 반대방향이다. 마나슬루 빙하에서 흐르는 계류를 건너 다시 관목숲 지대로 들어갔다. 마나슬루는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너무 멋진 마나슬루의 모습에 취해 길을 가면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8시 경, 어제 빙하에서 내려오며 보았던 서양팀 캠프 옆을 지났다. 이들도 막 곧 출발할 모양이다. 제복을 입은 포터들이 부지런히 짐을 싸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일 것이다.
내려오는 한 무리의 소떼들을 지나 해가 비치는 초지에 도착했다. 마나슬루는 이제 앞 산에 가려 꼭대기만 조금 보인다. 대신 남쪽 사마가온 쪽으로 거대한 히말출리가 나타났다. 북쪽으로는 브이자 계곡 사이로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설산이 보인다. 계곡 아래쪽 강 건너로 한 무리의 야크 떼가 내려오고 있다. 그쪽 위 역시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는 6천미터 급 산들의 연봉이다. 설산 아래에 줄을 지어 내려오는 야크 떼의 모습은 영화 <히말라야>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풍경이다. 그곳부터는 길은 넓은 초지와 완만한 산비탈 경작지를 반복한다. 햇볕은 이제 계곡 바닥까지 비추어 따뜻했다. 사마가온에서 삼도 가는 이 구간은 마나슬루 트레킹 중 아주 인상적인 구간 중 하나였다. 왼편의 마나슬루를 비롯하여 뒤돌아보면 웅장한 모습을 보이는 히말출리의 주변 풍경은 장엄하다. 거기에 더욱 나의 가슴속 깊이 울림을 준 것은 따뜻한 햇살 아래 넓은 초지와 산비탈 경작지 옆길, 그리고 간혹 나타나는 가는 개울물이었다. 그 길은 그 옛날 내 어린시절 봄날의 산골 모습이다.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향수를 느끼게 하는 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보고 듣고 먹고 즐기며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친교를 하는 여행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 자신의 깊은 내면을 일별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40대 이상의 사람에게는 네팔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서 오래 전 우리의 유년시절, 곤궁했던 상황은 제거하고 아련한 추억은 한결 여유롭게 되새길 수 있는 그런 시간여행의 즐거움이 있다.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매기의 추억> 이라는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예전 소싯적에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매기'를 민물고기인 '메기'로 생각하여 '왜 물고기와 같이 앉아서 놀지?'라는 의문을 품곤 했다. 매기가 사람 이름인 줄은 한참 후에 알았다. 존슨(G. W. Johnson, 1839~1917)이라는 한 청년은 20세 때인 1859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해밀턴(Hamilton)에 처음 교사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그리고 곧 17세의 제자 마가렛 클라크(Margaret Clark)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자주 마가렛의 집 근처 개울가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매기(Maggie)는 존슨이 부른 애칭이다. 5년 후인 1864년에 존슨은 서정시집 <Maple Leaves>를 냈는데 거기에 수록된 시 중 하나가 '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이다. 그들은 그해 10월 결혼한다. 그러나 매기는 질병으로 다음해인 1865년 5월,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영국 출생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음악가인 버터필드(J.C. Butterfield)는 1866년 이 시에 곡을 붙였다(두 사람이 친구사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곡이 오늘날 전세계인이 널리 부르는 애창곡 중 하나인 <매기의 추억>이다. 현재 우리가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대부분의 번안곡이 그렇듯 원래의 가사를 많이 줄여 단순하게 만든 것이다. 큰 계곡 두 개가 합수되는 지점의 언덕에서 두 번째 휴식시간을 가졌다. 멀리 삼도 마을을 알리는 초르텐 하나가 조그맣게 보인다. 삼도에 다 왔다는 말에 모두 기뻐한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려면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계곡으로 내려가 다리를 건너 오르막을 오르니 카니가 나왔다. 멀리서 볼 때는 언덕에 오르면 바로 초르텐이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언덕에 올라선 후에도 마니월을 지나 초르텐까지 한참 걸었다. 그래보았자 15분 정도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른 후라 제법 먼 느낌이 들었다. 10시 40분 히말출리를 마주 바라보며 서 있는 삼도의 큰 초르텐에 도착했다. 다른 팀 포터들이 그 옆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초르텐 내부에는 나무판자에 아름다운 불화가 그려져 있는데 칠이 많이 벗겨져 있다. 나무가 귀한 무스탕에서는 천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방벽은 흙으로 고르고 불화를 그렸다. 이곳은 나무가 흔해 나무판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그렸다. 비바람의 풍화작용으로 현재 두 지역 모두 낡아 있다는 점은 같다.
그들은 네 명의 트레커에 여섯 명의 스태프들만 대동하고 마나슬루 트레킹을 했다. 음식은 현지식 아니면 트레커들이 돌아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은 사람들이 아닌 중늙은이들이다. 모험적인 서양 사람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나는 체력도 안되지만 설사 된다 하더라도 네팔의 경제에 일조를 한다는 마음으로 그런 스타일은 피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 하는 롯지 트레킹의 경우라도 반드시 가이드와 포터를 고용한다. 롯지 근처 캠프사이트에는 어제 온 다른 팀의 텐트가 몇 동 있다. 이들은 여기서 고소적응일을 가진 모양이다. 마을 앞은 넓은 경작지가 있어 추수가 끝난 이맘 때 쯤에는 모두 캠프장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을과 제일 가까운 산기슭 바로 아래 제일 넓은 마당에 캠프를 쳤다. 마당에 펼쳐놓은 깔개에 앉아 점심을 기다렸다. 햇볕은 쨍쨍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 추위를 느꼈다. 사마에서 올라오는 트레킹 팀들이 계속 하나 둘 도착하더니 금새 넓은 캠프사이트가 울긋불긋한 텐트의 베이스캠프촌 모습이 되었다. 우리를 보더니 마을 아이들이 구경삼아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캠프가 마을 바로 앞에 있어서 아이들이 놀러오기 제일 좋다. 이번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좋은 참고가 된 안드레스의 여행기에서 아이들게 풍선을 선물로 주었다는 대목을 읽고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하고 나도 50여 개 준비했다. 내가 풍선이 든 봉지를 꺼내자 아이들이 모두 내게 몰려왔다. 그래도 먼저 달라는 아우성은 없다. 모여 있는 동포들을 보고 여기 저기서 아이들이 달려왔다. 안드레스는 여기 아이들이 풍선을 푸(phu)라고 한다는데 밸룬이라는 말을 쓰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영어를 배운 모양이다. 풍선을 받은 녀석들도 손짓을 하며 멀리 있는 다른 아이들을 부른다. "야, 여기서 풍선 주니 빨랑 와!" 티베트어는 모르지만 척 하면 삼척이다. 너댓명 아이들이 순식간에 10명으로 불었다. 그리고 계속 달려온다. 간난쟁이를 업고 온 녀석들은 영문도 모르고 흔들리며 업혀 온 동생에게도 주라고 몸을 틀어 보인다. 당연히 주어야 한다. 풍선을 받은 녀석들은 즉시 불어제끼며 희희낙락한다.
아이에게 풍선을 건네주다가 아이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고름이 잡혀 있다. 놀다가 상처가 났고 그쪽으로 침투한 세균을 맞아 지금 백혈구의 치열한 소탕작전이 전개되는 중이다. 고름은 양측 전사자들의 시신이다. 처음 상처가 났을 때 요드팅크만 발라주었어도 이런 상태까지 오지 않았을텐데 약품이 귀한 이곳에서는 그저 수수방관 한다. 무스탕에 관해 쓴 페셀의 책에는 이들에게도 페니실린 대용으로 쓰는 약품이 있다고 한다. 무스탕 사람들은 정초에 문설주에 벽사용으로 야크 버터를 덩어리로 붙여 놓는데 그들은 이 묵은 버터를 상처 치료에 쓴다고 한다. 버터가 오래 되면 그 속에 푸른곰팡이인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 생긴다. 페니실린은 모르지만 살면서 얻은 경험일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여행을 떠날 때 어른들이 떠나는 사람의 머리에 버터를 찍어주며 장도를 축원하는 풍습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동안 가지고 다녔던 약을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주기로 했다. 오는 도중 머무른 곳에서는 마땅히 줄 만한 마을이 없었다. 사마가온은 제일 큰 마을이라 양이 부족하다. 보건소가 있으면 보건소장에게 주면 될텐데 그런 곳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삼도는 제일 위쪽 마을이라 약품을 구하기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저녁식사 시간 때 타시에게 내일 마을 촌장을 불러달라고 했다. 촌장에게 항생제 한 통(500캡슐)을 주고 마을에서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3일분(9캡슐) 씩 나누어 주라고 할 생각이다. 이번에 항생제 세 통과 관절염약을 가지고 왔다. 항생제 중 한 통은 무스탕 남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삼툭에게 주었다. 한 통은 삼도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나머지 한 통은 운행 중 필요한 스태프들과 현지인들에게 주고 남은 것은 타시에게 주었다. 카트만두 삼툭의 집이 남걀 사람들의 베이스 캠프라면 포카라 타시의 집은 남돌 사람들의 베이스 캠프다. 원래 무스탕에 가지고 갈 예정인 약이었으니 두 마을을 대표하는 두 사람에게 주었다. 관절염 약은 무거운 짐을 지는 스태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항생제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다음 트레킹 때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주방요원 빠상은 며칠 간의 항생제 복용으로 이제 발이 다 나아 불편없이 잘 걸어 다니고 있다.
계곡이 열려 있는 남쪽으로 히말출리의 장대한 모습이 보인다. 왼편으로는 삼도를 대표하는 산인 팡푸치(Pang Puchi, 6338m)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옆 계곡을 따라 티베트로 가는 길이 보인다. 오른편으로는 라르키라 라로 가는 길이 산허리를 따라 크게 원호를 그리며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무진행 보살님은 여기서 내려가고 나는 위쪽으로 계속 이어진 타르초를 따라 더 올라갔다. 타르초가 시작되는 곳의 고도가 4000m이고 이곳 언덕 꼭대기 높이가 4600m라고 하니 가파르긴 하나 두 시간 정도만 오르면 이를 수 있는 고도다. 고소적응에도 좋고 그곳에서 보는 풍광은 더욱 좋을 것이다.
언덕을 내려와서는 마을로 들어가 어슬렁거렸다. 골목 그늘진 곳은 아직도 눈이 녹지 않고 있다. 지붕 위에는 건초더미가 어수선하다. 보리를 터는 아낙도 있고 아들과 함께 하릴없이 해바라기를 하는 사내도 있다. 마당에는 야크와 말이 서성거리고 있다. 곰빠는 마을 가운데 하얀 칠을 한 건물이다. 모두 무스탕의 간결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와 대조가 된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동북쪽 계곡 탐사를 마치고 내려오고 있다. 삼도에 대해서는 2004년 <프로젝트 히말라야>의 마나슬루 트레킹 팀의 일원이었던 밥(Bob)의 여행기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멋진 풍광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라는 단순한 감상문보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인문사회학적 접근은 그곳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한다. 마나슬루로 떠나기 전 나는 그의 글을 번역하고 자세히 읽어 도움을 얻었다. 우리는 삼도로 올라갔다. 짧은 운행이다. 발 아래 전인미답의 눈이 밟히는 뽀드득 소리가 감미롭다. 삼도에 도착하자 우리는 마을 가에 있는 길 옆 주막에서 이미 로빈과 주디가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엘 역시 롯지 주인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잠시 주방에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롯지 바로 옆에 텐트를 쳤다. 뒤돌아보니 사마가온과 단순하고 장엄한 풍경이 보인다. 조엘은 그의 친구 클린트 로저스(Clint Rogers)가 삼도에서 여러 달 째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칼 버클리(Cal Berkeley)의 재정지원을 받아 삼도의 경제와 풍속을 연구하고 있다(그의 경험에 관해서는 아래를 보라). 나는 카트만두에서 클린트를 한 번 아주 잠깐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 캘리포니아 친구로부터 '속 이야기'(inside story)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야크를 잡아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최근 마을 야크 한 마리가 다쳤다. 야크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짐승의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도축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불교도로서 그들은 그런 일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도가 아닌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마을의 한 집에서 머물고 있는 클린트는 그의 대학원 공부가 야크 목을 찢는데 필요한 기술과는 거의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탁을 거절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저녁 식사 시간 때까지 볼 수 없었다. 그가 반갑게 우리에게 왔을 때 그가 가져온 것은 야크도 아니고 주 음식인 참파도 아니었다. 클린트는 현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주었다. 삼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티베트인이다. 그리고 중국과의 조약의 한 부분으로 그들은 티베트와 자기네 마을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또 비불교도 촌장들이 이끄는 사마가온 사람들과 가축의 방목과 경작지 재배에 관해 계속 다투어왔으며 종종 돌맹이를 던지는 싸움도 했다. 저녁 식사 전 앨리스와 나는 삼도 마을로 산책을 갔다.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금 올라간 곳에 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왔던 길에 있는 마나슬루의 풍경과 그 아래 능선들, 우리 앞 빙하 위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정말 멋있다. 우리는 기쁨에 넘쳐 서로 껴안았다. 땅거미 질 무렵 돌아오는 길은 조금 낮았다. 오래된 잿빛 돌집들 사이에 있는 좁고 가는 길은 진창과 야크똥으로 차 있다. 클린트와 저녁을 같이 하기 위해 텐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 두 가지를 피하기는 어려웠다.(Bob Rosenbaum, <Bob's explores the Manaslu and Nar-Phu region 2004>) 이런 오지의 작은 마을조차 연구를 하는 서양인들의 학문적 접근이 놀랍다. 우선은 이 연구를 하고자 하는 학자가 있어야 한다. 이런 오지에 현지인들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몇 달씩 머문다는 일은 보통의 열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의 연구를 위한 경제적 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 서양은 그런 제도가 잘 되어 있다. 어제 사마가온에서 저녁 먹을 때 다음날 일정을 브리핑하면서 밥의 여행기에 나오는 삼도에 관한 이야기도 같이 했다. 그리고 팀 리더로서 열흘 동안의 여행으로 사람들의 많이 지쳐 있어 뭔가 영양보충이 필요할 것 같아 의견을 물어보았다. 동네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닭이 가장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그러자 혜명화 보살이 남형 씨를 보고 말했다. |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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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3. 삼도 - 다람살라 (0) | 2008.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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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0) | 2008.02.01 |
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 (0) | 2008.02.01 |
trek 9. 영혼의 산 마나슬루를 만나다 (0) | 2007.12.29 |
trek 8. 고산 트레킹이 시작되는 누프리 계곡 (0) | 2007.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