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곳… 神의 언어를 듣다
카트만두 북쪽 170㎞ 거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눈 덮인 웅장한 풍광에 경탄


랑탕히말은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제1의 트래킹(tracking) 코스로, 엄청난 규모의 숲과 동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코스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문 등반가들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 8000m급 고봉을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대신 입구까지 도로가 연결되는 등 인공적 요소도 많다. 114달러만 주면 경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즘 세상에 험한 길을 스스로 걷고자 선택하는 이들로선 그런 인공적 요소가 달갑지는 않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170㎞ 거리(절반 이상이 비포장 험로라서 자동차로 9시간 걸린다)에 있는 랑탕히말은 1949년 영국인 탐험대가 답사하기 전까지 지도상에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이곳을 탐험했던 영국인 틸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카트만두에서 새벽에 떠나 둔체(해발 1950m)를 지난 뒤 저녁 무렵 계곡 입구인 샤부르벤시(1460m)에 도착, 숙박을 한 뒤 트래킹은 시작된다. 1월 10일 충주시 청소년수련원 주최로 구성된 히말라야 오지학교탐사대(대장 김영식 충주 칠금중학교 교사)와 함께 찾았다. 교사와 화가, 시인, 농민 등으로 구성된 팀이다. 우리는 트래킹과 함께 학교를 방문해 네팔의 교육문화를 체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0일간 20명의 대원은 랑탕히말의 핵심 구간 60㎞를 도보로 답사했다.

선인장~전나무 숲까지 다양한 식물

전반부는 출발지인 샤부르벤시에서 림체(2440m)-랑탕마을(3300m)-캉진곰파(3800m)-캉진리(4550m)에 이르는 계곡 트래킹 코스. 되짚어 나오는 구간까지 30㎞에 불과한 거리지만 3일간 고도를 3000m 이상 올려야 하기 때문에 고소 적응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물길을 거슬러 계곡 상류로 올라가는 동안 북쪽으로 이름 없는(?) 4000m급 봉우리들이 있고 그 뒤로 랑탕Ⅱ(6561m), 랑탕리룽(7234m) 등 험준한 봉우리가 만년설로 단장한 채 우뚝 솟아 있다.

아열대 기후에 속한 이곳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선인장부터 침엽수인 전나무 숲까지 시시각각 식물군이 변한다. 트래킹 중 만나는 인종도 다양하다. 카트만두 부근에선 네왈리족, 둔체에선 타망족,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리와 많이 닮은 티베트족, 고산 등반의 길잡이로 잘 알려진 셰르파족의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네팔은 크게 36부족, 세분하면 7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다민족 국가다. 힌두교를 국교로 삼고 있으면서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 다양한 문화를 선보인다.

해발 2500m를 넘어서면 고산증(high altitude sickness)이 트래커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대부분 가벼운 두통으로 끝나지만 극심한 구토와 복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도를 1000m 올린 뒤엔 한나절 정도 쉬면서 적응기를 가지면 대부분 문제가 해소된다. 체온을 잘 관리하고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것이 도움이 된다.
캉진곰파(‘곰파’는 절을 의미한다)에 이르는 계곡에 과거 영화로웠던 티베트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판에 불경이나 문양을 새겨 탑으로 쌓은 마니차가 길 한가운데 중앙분리대처럼 길게 이어진다. 네팔인은 마니차를 만나면 반드시 왼쪽으로 지나간다. 돌아올 때 반대편을 거치면 불경을 한 번 읽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언제 새겨진 것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마니차의 행렬은 우리의 팔만대장경에 비견할 정도로 길다. 길 가는 동안에도 스스로를 깨우치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트래커들은 계곡을 오른다.

캉진곰파에서 트래커들은 각자의 일정과 고소 적응능력에 따라 3가지 코스를 택할 수 있다. 마을 뒤편 빙하를 감상하는 것이 손쉽고 해발 4550m 캉진리 산에 올라 랑탕히말의 웅장한 풍광을 감상할 수도 있다. 한나절 정도 투자하여 설산이 양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랑시사 마을의 커르커(야크 방목장)까지 다녀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반군들도 관광객은 건드리지 않아

랑탕히말 트래킹 코스는 후반부가 극적이다. 랑탕계곡의 오르막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대나무가 많은 뱀부마을(1960m)에서 남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택해 코사인 쿤드(호수)에 이르는 구간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잿빛 털을 가진 네팔원숭이 무리가 노니는 아열대숲을 지나 겨울에도 푸른 대나무 숲을 만난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무렵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갑작스럽게, 신비로운 툴루샤부르 마을(2210m)이 나타난다. 40~60도 경사의 산비탈을 해부라도 하듯 겹겹이 다락밭으로 만든 사면을 지나면 칼 같은 능선 위에 마을이 있다. 지금은 싸구려 페인트로 칠한 롯지들이 볼썽사납게 섞여 있지만 과거 티베트불교의 중심지답게 고색창연한 문양의 창틀로 가득한 고가(古家)가 트래커의 숨결에 평온을 불어넣는다.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히말라야 고봉의 옆구리로 붉게 스미는 저녁노을과 까마득한 계곡의 전망을 보여주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정화된다.

툴루샤부르에 이르면 최근 네팔 정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공산반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카트만두의 신문들은 이틀이 멀다하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교전 소식을 전한다. 가끔 별도의 입장료(?)를 요구하는 것 외에 반군은 절대로 관광객을 건드리지 않는다. 관광객이 줄면 그만큼 네팔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심 그들을 만나길 기대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반군 때문에 최근 네팔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현저히 줄고 있다. 경제난의 여파로 석유와 설탕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카트만두 시내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 행렬을 자주 볼 수 있다. 2001년, 당시 국왕과 친형 가족을 몰살시키고 정권을 잡은 현 갸넨드라 국왕은 국민의 존경도, 정치권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잡은 권력조차 카트만두를 벗어나 트래킹 코스에 오르면 한낱 부질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툴루샤부르에서 싱곰파(3350m)에 이르는 구간은 3시간30분 정도의 짧은 코스. 그 중 1.5㎞ 구간은 아득한 감동을 연출한다. 100~300년생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난 숲길을 걷다가 지친 듯 멈추어보자. 섬광처럼 한 줄 가슴을 스치고 지나는 시 구절이 없다면 더 올라가도 소용이 없다. 마침 눈까지 내려 마음 저 안쪽에 남아 있던 흉터마저 가려주었다.

고사인쿤드(4380m)는 힌두교 성지. 해발 4300m 지점에 고사인쿤드를 비롯해 번뇌의 숫자와 일치하는 108개의 호수가 있다.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를 불교의 상징으로 알고 있지만 힌두교에선 부처를 수많은 힌두의 신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으니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싱곰파에서 고사인쿤드까지는 하루 트래킹 코스. 맑은 날 안나푸르나(8091m), 마나슬루(8163m), 거네스(7429m) 등 히말라야의 고산준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지만 1월 중순엔 무릎까지 차오르는 폭설이 발목을 잡았다. 남녀의 성기인 링거와 요니를 모신 사당만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결국 중간 기착지인 라우레미나야크(3930m)를 조금 지나 4000m 지역까지 갔다가 철수해야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눈보라 속에서 들려온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다시 싱곰파로 돌아온 일행은 ‘부정 탄 사람’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바빴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신은 모든 것을 용서한 듯 아침 하산길에는 더없이 맑은 풍경을 허락했다. 네팔 트래킹 정보(www.nepaltour.pe.kr)

글·사진= 장창락 자유기고가

 

 

 

 

 

 

 

 

 

 

 

 

일  정  표

일수

날 짜

교 통

세  부  일  정

숙  박

비  고

1

1/8

전세버스

항공

*충주수련원 - 인천공항

*인천공항 - 방콕

공항체류

 

2

1/9

전세버스

*방콕 - 카투만두도착 - 호텔

호텔숙박

(현지식사)

문화탐방

3

1/10

전세버스

*카투만두 근교의 공립학교 방문

(1일체험수업활동 및 학용품, 의류전달)

*랑탕히말 탐사준비(장비,식량 준비 및 점검)

호텔숙박

현지학교체험활동

4

1/11

전세버스

*랑탕히말 출발(07:00)

카투만두 - 둔체 -샤브르베시(약11시간소요)

롯지숙박

 

5

1/12

도보

*샤브르베시 - 랜드슬라이드 - 밤부(2030m) - 라마호텔(2390m)

롯지숙박

트래킹

6

1/13

도보

*라마호텔 -고라타벨라(3,020m) - 랑탕(3,500m)

*랑탕-히말라야의 오래된 옛마을(따망족마을)

*히말라야 고봉들을 조망

롯지숙박

계단식 논 및 농가의 지리적 탐사

7

1/14

체류

*학교탐방 및 1일봉사활동 및 문방구, 의복전달

*전통치즈만들기체험활동 

롯지숙박

학교탐방/

치즈만들기

8

1/15

도보

*랑탕- 캉친곰파(3,850m)

*티벳불교사원 및 야크치즈공장 탐방활동

롯지숙박

 

9

1/16

도보

*캉친곰파 -랑시샤카르카(4,160m) -캉친곰파

*랑탕계곡 종착지까지 왕복트래킹(7시간소요)

*빙하체험

롯지숙박

빙하체험활동

10

1/17

도보

*캉친곰파 - 랑탕 -고라타벨라 - 라마호텔 - 밤부

롯지숙박

 

11

1/18

도보

*밤부-툴루샤브르(2,500m)-선셋언덕(3,200m)-심곰파(3340m)

*네팔전통농가와 안나푸르나 및 랑탕연봉을 볼 수 있음.

롯지숙박

네팔농가(주거문화체험)

12

1/19

도보

*신곰파-찰랑파티(3750)-라우리비나야크(4000)-고사인쿤드(4400)

*흰두 사바신의 전설이 얽힌 산상호수 탐방

롯지숙박

흰두문화

탐방

13

1/20

도보

*고사인쿤드-수자르패스(4640)-신곰파

롯지숙박

 

14

1/21

도보/버스

*신곰파 - 둔체 -카투만두

호텔숙박

 

15

1/22

 

*카투만두 왕궁, 불교사원 등 문화탐방

호텔숙박

문화탐방

16

1/23

항공

*카투만두-방콕(방콕관광)

호텔숙박

 

17

1/24

항공/버스

*방콕 - 인천 -충주

 

 

 

1/22 카투만두-방콕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10시 40분 우리는 카투만두 공항으로 향했다. 그 동안 우리의 수족이 되어 우리를 도와 준 핀조, 파샹, 덴지가 공항까지 따라 나왔다. 열흘 이상 그들과 함께한 우리도 정이 들었나 보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특급 통역사와 섭외를 맡으며 우리와 끝까지 동행하고 자신의 집에서 멋진 티벳 정식을 제공한 핀조, 트레킹 동안 새벽부터 어두운 밤까지 식사를 책임 맡은 투박하고 순진하며 웃음을 잃지 않던 썬그라스의 사나이 덴지, 트레킹의 길잡이로서 앞장서서 우리를 이끌어 주었고, 어눌하나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려 했고(결국 올챙이 송을 마스터 했음) 처녀 선생님(정확히 기억은 안 되지만 오00 선생님이지 아마!?)의 간택을 받으려(?) 노력했던 순진하나 집요해 보이는 사나이 파샹에게 늦게나마 고마운 마음을 전해고 싶다. 오후 늦게 도착한 방콕은 그들 말대로라면 최적의 건기라고 하지만 우리에겐 습한 기운이 느껴지고 모기가 돌아다니는 후덥지근한 한국의 여름을 생각나게 했다. 한대에서 열대로 왔구나. 깊은 잠이 필요하다.



1/23 방콕 시내 관광

  

    

  전날 만난 방콕의 한국 가이드는 인상은 썩 호감이 가지 않지만 태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달변의 사나이였다. 태국에 관한 일반 사항을 아주 잘 설명해 주었다. 반면 왕궁 가이드는 태국 현지인이었는데 가이드 치고는 한국말이 너무 서툴러 자세히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리고 버스에 타고 있는 현지 가이드도 한국어가 서툴러서인지 제 할 일만 열심히 하는 것 같다. 태국의 관광 정책상 현지 가이드를 꼭 고용하도록 되어 있고, 왕궁 가이드도 따로 현지인을 고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반드시 몇 개의 관광 상품 판매점을 들리도록 되어 있어 불편하고 마음에 맞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다. 보석상, 수공예품, 면세점 등을 들리도록 해 놓았는데 특히 면세 코너에서는 상점 구조가 반드시 풀코스를 돌아야만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일본과 비슷하다. 상술을 배운 모양이다. 왕궁, 에머랄드 사원, 수상 관광 등은 방콕 관광의 기본 코스이다. 이미 전에 똑 같은 코스를 보았기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왕궁과 에머랄드 사원, 새벽 사원의 규모는 이 나라가 불교의 왕국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관광객의 구성원을 보고 매상이 오르지 않을 것을 느낀 한국인 관광 가이드는 표정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전에 다녀간 우리의 관광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졸속 상혼의 관행 때문이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이제 그들도 한국인이 합리적으로 소비하는 집단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인정해야할 것이다.




1/24 인천-충주 “귀향”

  밤새 비행기에서 불편한 잠을 자고 우리는 24일 아침에 인천 공항에 도착하였다. 겨울 날씨라 밖이 차갑다. 18일부터 우리는 한대에서 열대로, 다시 아열대로 기후를 변동해서 이동했고, 저지에서 고지로 다시 고지에서 저지로 내려왔다. 전후좌우만 아니라 상하고저를 흔들어 놓아서 그런지 몸 상태가 어지럽다. 그래도 용케 견디는 인간의 적응력은 대단하다. 이 여행을 위하여 오랜 기간 동안의 준비와 트레킹 끝까지 살신성인한 김영식 대장과 박연수 부대장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대부분이 아마추어인 우리를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챙겨준 베테랑 박원래씨와 나정흠씨 에게도 사의를 표한다. 남에게 행여 피해를 끼칠까 말없이 후배들을 격려해 주신 최창원 선생님과 안희상 선배님 부부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단체는 역시 어렵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왜 필요한지를 다시 배웠다. 귀향길에 金 詩人은 말했다. 사람은 묘하게도 한 번 떠났으면 그냥 거기서 살지 왜 떠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지 모르겠다고. 어찌되었건 그와 나는 다시 돌아왔다. 만감이 교차하는데 찰랑파티의 새벽 풍경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맴도는 까닭은 왜일까?

 

1/19 찰랑파티-둔체 “ 랑탕히말의 풍경 소리에 잠이 깨다”

 

오늘 새벽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풍경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뜻 모를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밖에는 가는 눈 바람이 부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이 모두 남의 덕이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식사 한 끼 돌아다닐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며 내 몸 전체가 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이 내게 부여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오만방자하고 얼마나 무지몽매한 인간이었던가?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나만 알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이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바람에 흔들리는 새벽 풍경 소리는 들리는 듯 끊기고 끊기는 듯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그 소리는 ‘야! 이놈아 잠만 자빠져 자지 말고 너의 내면을 살펴라’라는 소리로 들렸다.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벅찬 가슴에 두 눈엔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50여년 가까운 세월이 일순 스쳐 갔다. 아주 빠르게. 나는 침낭을 빠져나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여명의 히말라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있었다. 어슴프레함 속에서 그냥 그렇게.... 밖으로 나오다 보니 유리창만으로 한기를 가린 다이닝 룸에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포터들이 추위에 그냥 잠들어 있었다. 나는 따뜻한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었다. 그들이 안쓰럽게 보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구석 주방에서는 키친 보이들이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고, 두 명은 석유곤로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아침 차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나를 따스하고 반갑게 포옹했다. ‘순수’라는 말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햇살이 나오기 직전의 히말라야와 바람에 휘날리는 솟대의 만장을 바라보았다. 장창락 기자가 나왔다. 사진을 찍으러 나온 모양이다. 역시 기자로서의 프로 정신이구나. 괜스레 눈물이 다시 나왔다. ‘이 선생님 왜 그래요?’ 별로 할 말이 없었고, 장기자는 그런 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롯지로 돌아온 나는 어제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고 정성스레 우리를 돌보아 준 롯지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고별사를 써서 같이 낭독해 보았다. 언제나 우리 옆에는 유능한 통역사 핀조가 있다. 부끄럽지만 고별사를 게재해 본다.

 

“고별사”

먼저 선배님들과 김하돈 시인님이 계시는데 글이라고 써서 발표하게 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느낌이 있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고향에 마음씨 착한 아내와 사려 깊고 총명한 두 아들이 있고, 아침에 일어나면 열심히 일할 직장이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뜻 모를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나왔습니다. 먼저 2박을 하는 동안 우리를 따뜻하게 보호해 준 집주인과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한 빠삐용 같은 두꺼운 안경에 무뚝뚝해 보이나 사려 깊은 안주인, 영롱한 맑은 눈에 티 없이 예쁜 딸, 난로를 덥히며 말없이 우리를 추위로부터 감싸준 집주인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용하고 자연 그대로인 이곳에 이방인이 와서 버릇없이 소란스럽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고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한 사회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교사, 신문기자, 시인, 화가, 농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집주인님이 보시기에 비싼 술을 마구 마시고 돈을 마구 쓰는 것 같지만, 우리는 각자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이 여행을 위해 나름대로 돈을 아끼고 몇 년 동안 모아서 이 귀중한 여행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자연과 세상에 대한 사고방식이 당신들과 다르지만 가슴이 따뜻하고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찌되었건 당신들의 문화와 생각을 무시하고 우리들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즐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오늘 새벽 나는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풍경 소리에 잠이 깼고 그 소리가 “이놈아! 삶을 정직하게, 감사하며 똑바로 살아라” 라는 소리로 들렸고 뜻 모를 눈물이 마구 솟구쳤습니다. 사람은 오만하고 방자하지만 자연은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자연이 사람을 야단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남ㆍ남아시아의 쓰나미로 그것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지금 떠나지만 정직하고, 따뜻하고 사려 깊은 여러분의 깊은 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 다음에 언제 당신들을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히말라야의 신이 언제나 당신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도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돈네밧.


아침 준비와 짐 꾸리는 소리로 사방이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눈 덮인 히말라야를 햇살이 어느새 감싸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둔체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둔체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매우 급했다. 눈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고산 지대에서 기온이 고도마다 다름을 눈으로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가끔 만나는 이곳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그들은 야크가 풀을 잘 뜯는 것으로 만족하며 욕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채워도 채워도 더 채울려고 하는 한없는 욕심을 가진 여느 나라 사람들 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오후에는 둔체 장거리를 구경했다. 우리가 그네들을 신기하게 보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신기한 모양이다. 재기 차는 녀석들, 구슬치기하는 녀석들 아이들은 어디서나 늘 즐겁구나. 이 곳은 경비가 삼엄하다. 반군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관대하다. 그들의 커다란 수입원이 되는 까닭이다. 둔체 주변의 음식점에서 만두도 사 먹어 보았다. 우리네 만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작은 술집에서 네팔 위스키도 마셔본다. 집 주인은 33살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6명이나 된다. 그러나 두 내외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나와 박종익 선생은 네팔 촌 동네에서 머리를 직접 깎는 체험을 했다. 우리 돈으로 500원 쯤 받는다. 아주 어릴적 꾀죄죄한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을 했던 그 기분이다.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이발사는 자기 밑에서 이발을 배우는 초보자 앞에서 자랑스럽게, 그리고 아주 정성스레 머리를 다듬어 준다. 머리를 감겨 주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매우 좋았다.

 

 

 

*1/17 툴루샤브르-신콤파-찰랑파티   

 

  트레킹의 피크를 향하여 우리는 또 걷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고산지대에서 비를 맞으면 체온 저하가 우려된다. 각자 준비한 우산과 우비를 쓰고 출발한다. 나는 비닐을 이용하여 즉석 우비를 만들어 입었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다. 숨이 차다. 200-300m정도 올라가자 비는 진눈개비에서 눈으로 변했다. 사실 겨울은 여기에서 건기에 해당된다. 비교적 비나 눈을 만나기 어려운 기후 환경인데, 드물게 많은 눈이 내린다. 히말라야에서 눈을 맞으며 걸으니 색다르고 눈구름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경치도 장관이다. 수 백 년은 묵은 듯한 고목들도 장관이다. 포터들에게 물으니 덤(dum tree)나무라고 했다. 침엽수도 아닌 것이 활엽수도 아닌 것이 아열대의 고산 나무 같이 보였다. 오늘 점심은 찐 감자로 해결했다. 이곳의 감자는 알이 작다. 그러나 감자는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식량자원이다. 굵은 설탕이나 으깬 고추에 찍어 먹으면 맛도 좋은 아주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3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이곳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추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도 상 아열대 기후대에 속하여 대륙성 기후의 추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혹독한 겨울 날씨와는 전혀 다르다. 단지 고도가 높아지면서 추워지지만 해가 나오는 낮은 그리 춥지 않다. 밤낮의 일교차가 아주 큰 편이다. 엄청난 원시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나무와 덤 나무가 혼합된 이곳은 어마어마한 원시림 지대이다. 교통이 아주 불편하여 이 거대한 목재를 운반할 길이 없다. 또한 주변에 연료도 비교적 풍부하고 사는 사람의 숫자도 적고, 이곳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공경심이 원시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것 같다. 14시경에 찰랑파티에 도착한 우리는 눈도 내리고 내일의 코샤인쿤드의 절정을 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네팔 당구도 즐기면서.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다. 저녁에는 최광옥 선생님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우리의 요리사 덴지가 만든 즉석 케익과 촛불, 그리고 퉁바의 원초적 술 맛이 운치를 더한다. 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깊은 히말라야 고산에서 더없이 경건하고 아름다운 밤이 깊어간다.


1/18 찰랑파티 “코샤인쿤드를 허락하지 않은 히말라야의 신”

 

히말라야의 대 파노라마를 보면서 트레킹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던 우리의 계획을 히말라야의 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술도 마음껏 마시고 희희낙락한 내가 죄인 이었나보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새벽에 잠을 깨어보니 밤새 눈이 많이 쌓였다. 계속 내리는 눈 때문에 우리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 1그룹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라우레비나와역을 지나 이번 트레킹의 최대 하이라이트이고 힌두교의 발상지인 코샤인쿤드까지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오고(코샤인쿤드가 4400m의 고지라서 그곳에서 숙박하는 것은 무리라고 김영식 대장은 말함) 2그룹은 주변 경치가 가장 좋은 라우레비나와역까지만 가서 히말라야 파노라마를 감상하기로 했다. 평소와는 달리 아침 6시 30분 여명에 일찍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 시점부터 눈은 폭설로 변해가고 있었다. 1진은 박연수 부대장과 트레킹 가이드 파샹이 지휘하고, 2진은 김영식 대장이 지휘하기로 했다. 눈보라를 무릅쓰고 출발했다. 약간 어두운 상태였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다. 내 생애에 이렇게 눈보라가 심한 것은 처음이다. 1시간 반 쯤 갔을 때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어찌 히말라야의 폭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연수 부대장, 파샹, 최창원, 최광옥, 임성주, 김하돈, 그리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 전원은 롯지로 되돌아가고 7명은 아루레비아역까지 간 다음에 상황을 보아 판단하기로 했다.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어졌다. 이미 발목을 훨씬 넘고 있었다. 등산화도 약간 젖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2시간 정도를 더 간 다음에야 우리는 라우레비아역에 도착하였다. 16세의 소녀와 그 동생이 롯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따끈한 차를 건넸다. 해맑은 웃음이었다. 부모님은 둔체에 계신다고 했다. 4000m의 고지에서 폭설을 피해 만난 롯지의 난로불은 우리를 감동시켰다. 어찌 인간이 대자연에 감히 도전한다고 말하겠는가? 눈보라를 막는 작은 롯지와 장작불, 그리고 어린 소녀의 정성에 우리는 한파를 녹일 수 있었고, 이내 그들의 작고 순수한 마음에 추위에 얼었던 내 마음도 모두 녹아내리고 있었다. 1시간 정도 몸을 녹인 우리는 철수를 결정했다. 더 기다린다는 것이 무모할 수 있다. 이미 눈보라에 길은 없어졌다. 가이드 파샹이 길을 내고 우리는 뒤를 따르며 13시가 조금 넘어서 롯지로 되돌아 왔다. 기다리던 김 대장은 너무 걱정을 한 것 같다. 히말라야 베테랑인 김 대장은 이 눈발 속에서 강행을 선택한 우리를 나무라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자체가 좋았던 모양이나 내심 불편한 심기를 들어냈다. 김 대장의 말로는 상황이 순식간에 돌변하는 히말라야에서 눈이 오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점심으로 먹은 김치 볶음밥이 정말로 꿀맛이었다. 오후에도 눈이 그치지 않아 일부는 잠을 자고 일부는 네팔 당구를 하면서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안희상 선배님과 럭시를 한 잔 하고 주변의 치즈 공장을 보러 갔다. 직원이 여러 명 있었다. 예의 그 순수한 얼굴로 우리를 기꺼이 반겨주었다. 이곳은 야크 젖으로만 옛날 방식대로 만든다고 했다. 치즈를 약간 사서 먹어보았다. 냄새가 약간 고약하나 고소한 맛이었다. 그들 역시 눈이 오는 오늘은 장작불 난로 가에서 쉬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순박한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고 장작불은 너무도 따스했다. 치즈 공장 사장은 아주 정확한 사람이었다. 속이지도 더 주지도 않고 저울이 말하는 대로 친절하면서도 결코 과장하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만 적용하는 산속의 멋쟁이였다.

  오후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이 글을 정리하고 있다. 지금 눈은 그쳤지만 여기 랑탕히말의 롯지 주변은 온통 눈 세상이다. 이제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 히말라야의 신이 멋진 파노라마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내게 인생에서 가장 멋진 눈 세상을 보여주었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건방져 있을 뿐이다. 이제 내일은 둔체로 철수하고 모래는 카투만두로 가야 한다. 어렵지만 아쉽다. 내일 철수 길도 만만치 않을 것만 같다. 박원래씨가 저녁을 먹으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 퉁바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일 날씨가 좋기만 기다릴 뿐이다. 어찌 하늘의 일을 사람이 시시비비 할 것인가. 그런데 2층에서 이광승씨가 몹시 아프다고 손가락 사혈을 하라고 연락이 왔다. 고소 증세가 아주 심한 것 같았다. 달리 방업도 없고 손가락을 땄다. 손에 열이 아주 심하게 났다. 손가락을 땄는데 가는 핏줄기가 솟구쳤다. 이날 밤이 이광승씨에게는 사상 최대의 고통스러운 밤이었던 것 같다. 밤새 토하고 토했지만 무엇이 나오겠는가? 옆의 주덕 동창들이 간호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자고 나니 그 다음날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다행이었다. 아마도 광승씨는 히말라야의 고통스러운 그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16 라마호텔-랜드슬라이드-툴로샤브르 “한국인은 잠이 없는 민족(?)”

 

기분 좋게 아침 체조를 하고 힘차게 출발했다. 흐린 듯 살짝 끼어 있는 안개가 묘한 흥취를 자아낸다. 깊은 계곡이 아열대림과 어울려 또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마 엄청난 산사태가 있는 지역이라서 지명도 랜드슬라이드(landslide)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지리 용어에서도 산사태나 경사진 지역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토양 이동 현상을 랜드슬라이드라고 한다. 우리는 오는 도중에 엄청난 산사태 지역을 통과하게 된다. 산사태는 계곡을 막아서 일시적으로 호수를 만든다.(지형학에서 산사태나 화산 폭발 등으로 만들어진 호수를 언지호라고 한다) 그리고 이 호수는 어느 정도 물이차면 당연히 자연의 법칙대로 둑을 넘게 되고 최고 정점에 도달하면 호수가 붕괴되고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면서 계곡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호수 하류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자연의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랜드슬라이드에서는 삶은 감자와 수제비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일본인 트레커를 만났다. 김치를 한 쪽 주자 아주 맛이 좋다고 좋아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점심 식사를 막 하려는 순간 우리의 김대장이 오주희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가 가장 나중에 보았느냐는 등 확인을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오는 도중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길을 잘 못 든 것 같다. 파샹이 감자 삶은 것을 몇 개 배낭에 넣고 찾으러 오던 길을 되돌아 나섰다. 우리의 예상대로 오 선생님은 두 갈래 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한참을 가다가 일행이 보이지 않자 되돌아오다가 파샹을 만나 우리와 합류했다. 잠시였지만 오 선생님은 별 생각이 다 들더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오지에서 왜 일행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아마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점심 후 약 1시간은 엄청난 급경사를 걸어서 올라갔고 계단식 경작지를 통과하며 고생 끝에 툴로샤브르에 도착하였다. 롯지도 꽤 많고 사람들도 많이 사는 비교적 큰 곳이었다. 모처럼 여유 있는 오후를 보냈다. 오후 3시경에 도착하여 옥상에서 옥수수 티밥과 짜야(홍차에 야크 젖을 넣고 끓인 차)를 먹으며 설산을 감상하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상점에는 이 집 주인아주머니가 손수 만들었다는 많은 수제품의 뜨개질 제품이 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다. 모처럼 아내와 아들이 생각났다. 돌아갈 고향이 있음은 또 감사해야하는 대목이다. 참 잔 손이 많이 간 제품이었다. 저녁에는 장창락 기자가 금연 약속을 어긴 탓에 특별 안주를 제공하여 2차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네팔 위스키에 어느 정도 취한 우리는 기장으로 담근 퉁바라는 술을 한 잔 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옆에서는 주덕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고 야단이다. 30년 만에 만났다나? 술이 약간 얼큰해지자 이제 9일째 끊은 담배 생각이 슬그머니 났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금연이 가능할 것 같이 생각되었다.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일이 최광옥 선생님의 생일이라 내가 친구로서 닭을 한 마리 사겠다” 그리고 나는 슬그머니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맛이 좋았는데 머리가 핑 도는구나. 약속을 합리적으로 깼다고 생각한 나는 스스로 내 꾀에 속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얘이! 미련한 놈! 스스로 자책한다) 또 롯지의 밤이 깊어간다. 우리가 밤 12시 정도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자 다음날 주인이 “한국 사람은 자신의 롯지에 처음 받아보는데 한국 민족은 잠을 잘 안자는 민족 같다”고 했다. 전기가 없는 이곳에서 해가 넘어가면 잠을 잘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러니 밤 12시까지 안 자고 이야기하고 노는 우리를 보고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내가 핀조에게 ‘이곳은 특별한 밤 문화가 없어 연년생 아이들이 참 많은 것 같다’고 하자 핀조가 한참을 웃는다. 비교적 힘든 하루였다.  

 

*1/15 캉친콤파-랑탕-리마호텔 “고향에 가지 못하는 영혼들”

   오늘은 캉친콤파를 출발하여 랑탕의 학교 방문을 마치고 라마호텔까지 가는 긴 여정이다. 역시 다시 보아야 보이는 걸까 랑탕까지 내려오는 길에 올라갈 때는 힘이 들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던 티벳 영혼들을 나는 다시 보았다. 길가에는 수많은 티벳 묘지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지형적으로 이곳은 티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물과 목초를 찾아 야크와 양을 몰고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들도 언젠가 이곳에서 야크를 치며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다. 자식을 낳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끝내 고향으로 갈 수 없었고 이곳에 그 후손들이 살게 되었다. 어찌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으리오. 죽은 그들의 묘지는 돌로 만들었고 그 돌에는 티벳 언어로 새긴 불경(마니석-경문을 새긴 돌)의 글귀들이 선명하고 부처님의 모습도 돌에 새겨 놓았다. 산길에서 마니석 옆을 지날 때에는 그 왼쪽으로 걷는 것이 정도라고 한다. 고향을 그리는 그들의 마음은 바람에 휘날리는 만장과 고향을 향한 솟대로나마 망향의 한을 달래고 있었다. 원래 공립학교 방문 시 우리 일행은 학생들을 위하여 간단한 연극을 하기로 했었다. 제목은 “금도끼 은도끼의 나무꾼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배역을 정할 때 만장일치로 나를 나뿐 나무꾼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핀조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는 여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문화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올챙이 송으로 바꾼 것인데 어찌하여 내가 만장일치로 나뿐 나무꾼에 선정되었을까? 사실 나는 나뿐 나무꾼보다 훨씬 더 못한 사람일지 모른다. 사람들의 순간적 안목에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온 마을이 무척 소란하다.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어른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 아이의 학용품이며 옷가지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난리가 났다. 15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로 구성된 이 학교의 열악함을 무엇으로 말하랴. 화가 난 그 학교의 선생님은 학용품을 마구 뿌렸다. 멀리서 온 이방인의 배려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가 못마땅하고 창피하다는 듯 보였다. 그 선생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찌되었건 아이들은 여전히 순수했고 우리 선생님들의 올챙이 송을 잘 따라했다. 그리고 우리의 태권도 챔피언 최창원 선생님의 시범이 있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먼 곳까지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이기 위해 도복을 준비하고 맨발로 시범을 보인 58세 이 노 교사에게 어찌 박수를 보내지 않으리오. 마당에서는 아이들과 우리의 레쌈삐리리 노래와 함께 어울림의 한 판 춤이 이어졌다.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상 랑탕에서 라마까지는 정말로 멋진 랑탕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데 우리는 올라갈 때 계곡의 진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수 백길 깊은 계곡과 아열대 원시림이 어우러진 이곳은 세월의 깊이와 자연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진정한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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