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오라 / 우리도 언젠가는 가련한 낙엽이 되리라 / 가까이 오라, 벌써 밤이 되었다 / 바람이 몸에 스민다 / 시몬! 너는 좋으냐 / 낙엽 밟는 발자국 소리가.”
프랑스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레미 드 구르몽의 시 ‘낙엽’의 한 구절이다. 가을철 날씨가 추워지면 무성했던 나뭇잎이 하나 둘씩 떨어진다. 떨어진 나뭇잎이 바닥에 뒹굴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보이면 우리네 마음도 덩달아 쓸쓸해진다. 그런데 당신은 아는가. 떨어지는 낙엽에도 순서가 있다는 것을?
나무가 낙엽을 떨어뜨리려면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나무에서 가장 많은 영양분을 가진 곳은 뿌리도 줄기도 아닌 잎이다. 잎은 엽록소가 있어 햇빛을 받으면 광합성 작용해서 에너지를 만든다. 꽃과 열매를 맺고 겨울철을 이겨내는 에너지가 모두 잎에서 나온다는 얘기다.
따라서 영양분이 많은 잎을 그대로 버린다면 나무로선 엄청난 에너지 손실이다. 이를 막기 위해 나무는 식물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질소(N), 칼륨(K), 인(P) 같은 주요 양분의 50%를 낙엽이 지기 직전 잎에서 줄기로 옮겨온다. 나무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기 위한 잎의 양분 분석을 7~8월에 실시하는 것도 이 시기가 잎이 가장 성숙하며 다른 기관으로 양분의 이동변화가 가장 적기 때문이다.
잎에서 줄기로 양분을 이동시키면 낙엽이 질 준비가 끝난 것일까. 아직은 아니다. 나무는 추운 겨울 강한 바람에 대한 손상을 최대한 막고자 이른 봄부터 잎과 가지를 잇는 잎자루에 ‘보호층’과 ‘떨켜층’을 만든다. 떨켜층은 잎이 나무에서 분리되는 부분으로 얇고 약한 세포벽이 좁을 띠를 이루고 있다. 보호층은 잎이 지기 전 엽흔(잎의 흔적)을 만들어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해 준다. 이제 낙엽을 떨어뜨릴 준비가 끝났다.
그렇다면 낙엽이 지는 순서는 어떻게 정해지는 것일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성장호르몬 분비가 일찍 끝나는 곳부터 낙엽이 진다. 성장호르몬이란 옥신이나 지베렐린, 사이토키닌 같이 식물의 성장이나 결실, 노화를 촉진하는 호르몬을 일컫는다. 이들은 식물의 어린 기관(종자, 열매, 잎)과 뿌리 같은 신체 말단에서 만들어져서 가장 늦게까지 분비된다.
덕분에 봄철에 가장 먼저 핀 나뭇잎이 가장 늦게까지 붙어있고, 가장 나중에 핀 나뭇잎이 가장 먼저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지난 봄철 나무에서 잎이 어떻게 났는지 생각해 보자. 겨우내 앙상했던 나무는 가지와 줄기 끝부터 잎이 나기 시작한다. 차츰 위에서 아래로, 바깥에서 안쪽으로 나뭇잎이 자라나 여름철 잎이 무성한 나무로 변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반대로 줄기의 안쪽부터 낙엽이 지기 시작해 나중에는 나무 꼭대기에만 잎이 남는다. 지금 한창 낙엽이 지고 있는 주변 나무들을 살펴보라. 안쪽이나 아래쪽부터 낙엽이 지기 시작해 꼭대기 나뭇잎이 가장 나중에 떨어진다. 물론 주변 건물이나 높이별 바람의 세기에 따라 이 같은 원칙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사시사철 푸르른 상록수는 낙엽이 지지 않는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상록수도 낙엽이 진다. 단 다른 나무처럼 봄에 잎이 돋아났다가 가을에 모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매년 조금씩 떨어진다. 그래서 상록수는 1살짜리 잎만 있는 낙엽수와 달리 2~3살짜리 잎도 달려있다.
그리고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이 1살짜리 잎과 2~3살짜리 잎을 구분할 수 있다. 어떻게 구분할까? 잠깐 소나무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솔잎은 소나무의 어느 부위에 달려있는가? 솔잎은 소나무 가지의 중간 부분에는 거의 없고 끝부분에 집중적으로 나 있다. 소나무를 비롯한 대부분의 상록수가 가지의 끝에만 새 잎이 돋아나기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소나무와 잣나무속 나무들은 1년에 한마디씩만 자라는 고정생장을 한다. 즉 줄기에 붙은 가지와 가지 사이의 마디 하나가 나무의 나이 한 살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가지 끝에서 줄기까지 5마디라면 가장 끝에 있는 첫 번째 마디에 붙은 잎은 1살이고, 두 번째와 세 번째 마디에 붙은 잎은 각각 2살과 3살이다. 이런 식으로 줄기의 끝부터 밑둥까지 마디 수를 더하면 나무를 잘라 나이테를 보지 않고도 나무의 나이를 셈할 수 있다. 결국 침엽수의 잎도 가지나 줄기의 끝부분에서 나기 시작해 나무의 안쪽과 아래쪽부터 낙엽이 지는 것이니 활엽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시인 윤동주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며 가을의 스산함을 노래했지만 낙엽이 지는 것을 슬퍼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낙엽이 져야 이듬해 봄 나무는 새싹을 기약할 수 있다. 만약 연한 잎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에도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부분적으로 동상에 걸릴 것이다. 낙엽은 오랜 세월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나무가 선택한 생존전략이다.
<출처 : KISTI의 과학향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