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아주 먼 옛날에 한 점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팽창, 냉각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에 처음으로 제안된 우주 팽창론은 그 뒤 여러 유형으로 발전했는데, 오늘날 우주론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폭발이론은 1940년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했다. 1948년 대폭발 이론을 제기하여 현재 우주론이 등장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러시아의 과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 1904­1968)였다.

팽창우주론의 등장

1916년에 발표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우주론 분야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둔 초창기 우주론은 현재의 팽창 우주와는 다른 정적인 우주론이었다. 우선 상대성 이론을 주창한 장본인인 아인슈타인은 우주론에서 물리적이며 정적인 우주론을 선호해서 자신이 발견한 장 방정식에 우주상수를 추가해서 우주를 정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아인슈타인과 연결을 가지고 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는 아인슈타인의 물리적인 우주와는 다른, 물질이 없고 가상적인 또다른 우주 모형을 제한했다. 드 지터의 모형은 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선호되었지만, 그의 우주 모형 역시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것이었다.

1920년대를 통해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서 정적인 우주론과는 다른 팽창우주론이 제안되었다. 1922년 러시아의 지구물리학자이며 기상학자인 프리드만(Alexandr Alexandrovich Friedmann, 1888­1925)은 아인슈타인과 드 지터가 제안했던 정적인 우주론과는 다른 새로운 팽창우주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했다. 하지만 프리드만의 이론은 주창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계속적인 발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25년 프리드만은 기상 관측용 대형 기구를 타고 자유 비행을 하다가 혹한을 겪은 뒤 페렴에 걸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프리드만과는 독립적으로 1927년 벨기에의 가톨릭 신부이며 천체물리학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Abb Georges Edouard Lematre, 1894­1966)는 2년 뒤에 나타나게 되는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1953)의 속도-거리 관계와 유사한 적색편이와 거리와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보다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의 새로운 팽창우주론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선구자적인 작업은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한편 1929년 미국의 허블은 윌슨 산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은하들 사이의 거리와 적색편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이 팽창우주론을 지지하는 중요한 천문학적 증거들을 발표했다. 허블 자신은 자신이 얻은 데이터를 팽창우주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1930년 에딩턴과 드 지터 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천문학자들은 정적 우주론이 새로운 천체 관측 결과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신 새로운 우주론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작업이 '재발견' 되었다. 이리하여 1930년을 기점으로 해서 천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적인 우주론에서 팽창우주론으로의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의 등장

팽창우주론은 1940년대 중반 이후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과 정상 상태 우주론(Steady-state cosmology)이 등장하고 이 두 이론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더욱 세련된 형태로 발전했다. 대폭발 이론에서는 초기 우주에서 중성자 포획에 의해 원소가 형성되는 과정을 우주의 팽창 과정과 연결했다. 대폭발 이론은 러시아 출신의 미국 과학자인 가모브에 의해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가모브는 1904년 3월 4일 러시아 영화 '전함 포템킨'의 배경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한 가모브는 팽창우주론의 창시자였던 프리드만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접했다. 이 때 가모브는 프리드만과 함께 상대론적 우주론을 연구하려고 했으나, 프리드만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양자론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928년 대학을 졸업한 가모브는 괴팅겐으로 가서 높은 에너지 장벽을 낮은 운동에너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양자투과 개념을 기초로 하는 핵붕괴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 그 뒤 그는 닐스 보어가 있는 코펜하겐 이론 물리학 연구소와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원자핵에 관한 '액체 방울' 모형을 제안하여, 핵분열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별 내부의 열핵 반응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구 소련을 떠난 가모브는 1934년부터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1936년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와 함께 베타 붕괴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 뒤 가모브는 별의 진화와 열핵 반응에 대해 연구했는데, 별의 진화에 대한 가모브의 연구는 이후 대폭발 이론에 관한 연구로 이어졌다.

전쟁 중 많은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동원되었고, 이에 따라 별의 진화 및 열핵 반응에 관한 연구는 핵무기 개발과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연구들은 순수 우주론 연구로 이어졌다. 1948년 조지 가모브, 그의 제자 랠프 알퍼(Ralph Asher Alpher) 그리고 한스 베테(Hans Bethe)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자핵들은 특정한 온도와 밀도의 평형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원초적 물질이 팽창하고 냉각되는 연속적인 형성과정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가모브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할 때 자신의 이름이 감마와 유사하고 자신의 제자 이름은 알파와 유사한 것을 보고, 베타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한스 베테에게 자신들의 논문에 공동 저자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베테는 대폭발 이론의 창안에 직접적인 관여는 하지 않았지만, 가모브는 자신의 논문의 저자들의 이름에 알파-베타-감마가 포함되게 하기 위해 베타에 해당하는 베테를 공동 저자로 초빙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폭발 이론을 창안한 논문은 알퍼-베테-가모브 이론, 즉 알파-베타-감마 이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원소 형성 과정과 우주 팽창에 관한 논의는 서로 연결을 맺으면서 발전해 나갔다.

케임브리지의 정상상태 우주론

한편 194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천문학자들은 가모브의 팽창우주론과는 전혀 다른 정상 상태 팽창우주론을 제기했다. 이 또다른 우주론은 허먼 본디(Hermann Bondi), 토머스 골드(Thomas Gold)가 제안해서 프레드 호일(Fred Hoyle)에 의해 대폭발 이론의 대안으로써 제기된 우주 모형이었다. 이리하여 1950년대를 통해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천문학계에서는 대폭발 이론과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서로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했다.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소위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perfect cosmological principle)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원리에 의하면 물리 법칙들은 우주 구조에 독립적일 수 없으며, 반대로 우주 구조는 물리 법칙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물리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주가 안정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또한 우주는 모든 곳에서 균일해야 하며 거시적 규모에서 변화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우주는 항상 팽창하되 지속적으로 새로운 물질이 탄생해서 일정한 평균 밀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18세기 영국의 지질학자 제임스 허튼은 지구는 정상 상태이며 지질학적 현상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작은 정도나마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질학적 과정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지질학적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 theory)을 제창했다.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이 허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일종의 '우주론적인 동일과정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학철학적 근거로 본다면 대폭발설은 격변론(Catastrophe theory)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폭발 우주론의 발전

대폭발 이론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가모브, 알퍼, 로버트 허먼(Robert C. Herman), 제임스 폴린(James W. Follin)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하지만 1953년 이후 대폭발 이론에 관한 논의는 학계에서 급격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대폭발 이론에 대한 논의가 쇠퇴하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우선 당시 핵물리학의 지식으로는 중성자 포획에 의해 가벼운 원소들이 형성되는 비율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인 우주배경 복사의 존재는 1948년에 처음으로 예언됐으며, 1956년까지 최소한 7회에 걸쳐 그 존재에 대한 예언이 반복되었지만, 당시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논의는 천문학이나 물리학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폭발 이론은 가모브라는 물리학자 자신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1950년대에 대폭발 이론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에 들어와서 가모브 자신이 대폭발 이론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1956년 콜로라도 대학으로 옮긴 뒤에는 학문적으로 아주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가모브는 엄청난 술고래였는데, 종종 이 주벽 때문에 학회에서 눈꼴사나운 상황을 연출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결국 그의 이런 특이한 행동이 물리학 공동체에서 자신의 위치를 몰락시키는 데 기여했고, 대폭발 이론의 창시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대폭발 이론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가모브와 함께 연구하던 알퍼와 허먼 역시 1950년대 중반 이후 기업체 연구소에 자리를 잡으면서 천체 물리학이나 핵물리학 분야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알퍼는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회사의 연구소에서, 그리고 허먼은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 회사의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우주론 분야보다는 유체역학이나 고체물리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폭발 이론에 형성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우주론 분야에서 멀어지면서 대폭발 이론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1960년대에 대폭발 이론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을 때 이 우주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창시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정상상태 우주론과 철학적 논쟁

본디, 골드, 호일 등에 의해서 1948년 제창된 정상상태 우주론 역시 만들어진 지 10년 동안은 내용상 크게 변하지 않는 상태로 발전되었다. 1950년대에 정상상태 우주론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은 대폭발 이론을 창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1951년 정상상태 우주론의 새로운 버전을 제안한 맥크리아(William Hunter McCrea)였다. 그는 호일의 이론을 에너지 보존 법칙과 일반 상대성 이론에 더욱 부합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맥크리아는 연속적인 물질의 창조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을 서로 부합되게 만들기 위해 음의 우주압력(negative cosmic pressure) 혹은 음의 에너지 우주 스트레스(negative- energy cosmic stress)의 존재를 제안하기도 했다.

1959년 본디와 라이틀턴(Raymond Arth Lyttleton)은 이러한 음의 스트레스에 대한 물리적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에 초과 전하의 형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기적 우주(Electrical Universe)를 제안했다. 즉 물질이 생성됨에 따라 아주 작은 양의 우주 초과 전하(universal charge excess)가 형성되어 이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우주의 팽창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기적 우주론은 곧이어 실시된 실험실 상의 정밀한 실험에 의해 반박되어 1960년 이후에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정상상태 우주론 역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한편 1960년을 전후해서 우주론을 둘러싼 과학철학적 논쟁도 나타났다. 1961년 옥스퍼드의 철학자 하레(W.H. Harr)는 완전한 우주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상상태 우주론이 지닌 과학적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하레는 본디와 골드가 제안한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와 같은 균일성 가정에 기초를 둔 연역적 방법을 불명확한 일반화 방법(the method of indefinite generalization)이라고 불렀다. 하레의 목적은 우주 생성론에 관련된 모든 이론들은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반증이론으로 유명했던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의 과학철학 역시 우주론적 논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1934년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라는 이름으로 독일어로 출판된 포퍼의 책은 1959년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라는 이름으로 영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영미 철학계에 급속도로 소개가 되었다. 포퍼의 이론에서는 반증가능성의 유무 여부가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중요한 구획기준이 된다. 정상상태 우주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우주론이 다른 우주론에 비해 우주에서 반박가능한 관찰 증거를 제시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포퍼의 프로그램을 환영하였다.

포퍼 자신은 1950년대에 우주론과 관련된 철학적 논쟁에는 끼여들지 않았다. 포퍼는 본래 프리드만과 드메트르의 우주론에 대해 배우면서 대폭발 이론에 매료됐었다. 하지만 시간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많은 보조 가설 때문에 반박 불가능한 이 대폭발 이론을 싫어했다. 포퍼는 대폭발 이론보다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지만,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 자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헬륨 문제, 우주 배경복사, 대폭발 이론의 부상

1961년 브란스(Carl Brans)와 디키(Robert Henry Dicke, 1916­1997)는 일반상대성 이론보다는 마흐의 법칙의 관점에 더욱 충실한 새로운 중력이론을 시도했다. 헝가리 물리학자 롤란드 폰 외트뵈슈(Roland von Etvs, 1848­1919)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1888년에서 1922년까지 행한 정밀한 실험을 통해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비를 108의 비율까지 정확하게 측정했다. 브란스와 디키는 이 비율에 대한 측정을 1011 이하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무엇보다도 브란스와 디키는 여기서 중력 상수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한 폴 디랙의 주장을 다시 부활시켰다. 1937년 디랙(P.A.M. Dirac, 1902­1984)은 우주의 질량, 중력 상수, 우주의 허블 나이 등의 세 기본 우주 상수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 거대 수 가설(Large Number Hypophesis)에 바탕을 둔 우주론을 언급하면서 중력상수를 비롯한 물리의 기초상수들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주장했었다. 브란스와 디키는 디랙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중력 상수가 우주가 팽창하면서 1년에 1,000억분의 2의 비율로 아주 조금씩 작아진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브란스와 디키의 이론은 일종의 대폭발 이론이었지만, 르메트르와 가모브의 이론과는 다른 전통에 속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브란스와 디키는 1961년의 논문에서 가모브, 앨퍼, 허먼 등이 행했던 과거의 연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란스와 디키의 이 비정통 이론은 태초의 우주에서 발생하는 복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줌으로써 대폭발 이론이 부상되는 것과 간접적인 연결을 맺고 있었다.

한편 우주 속의 헬륨의 분포에 대한 논의는 정상상태 팽창우주론과 대폭발 이론 사이에서 대폭발 이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64년 호일과 테일러(R.J. Taylor)는 은하에 존재하는 헬륨의 비율이 정상적인 별에서 생성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다는 것에 주목했다. 즉 무거운 원소들은 전체 원소들의 질량의 약 2 % 정도 되기 때문에 별의 내부에서 핵반응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헬륨의 경우는 우주상에 정상적인 별에서 생성되었다고 하기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호일과 테일러는 헬륨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아주 극적인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우주가 고온, 고압 단계를 거쳤거나 혹은 아주 거대한 물체가 지금까지 생각되던 천체 물리학적 진화 과정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가정해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상상태 우주론을 지지했던 호일은 거대한 물체의 존재를 선호했고, 테일러는 고온, 고압의 초기 단계를 선호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가모브의 대폭발 이론을 입증하는 우주 배경 복사가 발견되면서 대폭발 이론이 정상 상태 우주론을 누르고 우주론 분야에서 지배적인 학설로 부상되었다.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이론적인 차원의 논의는 1948년부터 몇 번 있었지만, 1950년대를 통해서 우주 배경 복사를 찾으려는 연구 프로그램은 사실상 중단되었었다. 우주 배경 복사는 우주론과는 직접적으로는 연관 없이 발전했던 전파천문학 분야에서 발견되었다. 1965년 미국 뉴저지 주 벨 전화 연구소에 있는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극히 예민한 잡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이크로파 탐지 시험을 하던 중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밤낮과 계절이 상관없이 관측되는 복사선을 발견했다.

1964년 여름과 1965년 2월 프린스턴 대학의 디키는 뉴저지 주 크로포드 힐에 있는 벨 전화 연구소에서 이미 우주배경복사와 관련된 측정을 하는 것을 모른 채로 자신의 동료들인 제임스 피블스(James Peebles), 피터 롤(Peter Roll), 윌킨슨(Wilkinson) 등에게 우주배경복사를 측정해보라고 제안했었다. 1965년 3월 초에 제출한 논문에서 디키와 피블은 뚜렷한 실험적 증거가 없이 단지 정성적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이 프린스턴 연구팀이 실험적 결과를 얻기 전에 그들은 자신들이 찾으려는 복사에 관한 증거를 프린스턴 연구소 근처에 있는 벨 전화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당시에 디키는 우주배경복사를 확인할 이론은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얻지 못한 상태였고, 펜지어스는 이론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로 실험 결과만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린스턴 연구팀의 이론적 해석 도움으로 벨전화연구소의 연구팀이 발견한 복사선은 초기의 우주 팽창 과정에서 생겨나서 우주의 팽창과 함께 변화되어 현재의 마이크로파로 지구에서 관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디키, 피블즈, 롤, 윌킨슨 등이 펜지어스와 윌슨의 측정을 대폭발 이론에 입각해서 해석함으로써, 벨전화연구소에서 아무 생각없이 발견한 우주 배경 복사는 가모브의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1981년 앨런 구스(Alan H. Guth)는 초기 표준 팽창 우주론이 지니는 문제점으로 보완하기 위해서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라는 새로운 우주 모형을 발표했다. 구스가 표준 팽창우주론의 문제점으로서는 첫째, 당시의 표준 우주론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우주 내의 여러 지역들이 거의 동일하며, 특히 동시에 같은 온도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우주가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것처럼 균일하기 위해서는 우주 초창기의 허블 상수가 무지무지하게 정확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스는 표준 우주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은 우주가 초창기에 팽창할 때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해서 1028제곱이나 그 이상으로 과냉각되었다는 것을 가정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스의 이 시니리오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우주는 초기 대폭발이 있을 때 아주 극적인 사건을 겪은 뒤에 오늘과 같이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학대중화와 가모브

가모브는 물리학 연구를 벗어나 생물 과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1954년 그는 유전정보의 암호화 이론을 전개하여 DNA 분자의 정보가 단백질을 형성하는 20종류의 아미노산 서열로 번역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즉 그는 세 쌍의 염기 서열이 결합하여 20개의 염기 삼중쌍(triplet)을 형성하고 이것이 20 종류의 아미노산과 1대 1로 대응됨을 처음으로 밝혔던 것이다.

가모브는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책을 무려 20여권이나 출판하여 과학 대중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가 집필한 최초의 대중과학서는 1937년에 나온 『이상한 나라의 톰킨스씨』(Mr. Tomkins in Wonderland)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톰킨스는 그가 집필하는 대중과학 책의 주인공으로 계속 등장하여 나중에는 아예 톰킨스 시리즈로까지 출판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하나, 둘, 셋 ... 무한』(One, Two, Three ... Infinity, 1947)『우주의 창조』(The Creation of the Universe, 1952),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A Planet Called Earth, 1963), 『태양이라고 불리는 별』(A Star Called Sun, 1964) 등과 같은 많은 대중 과학책을 집필하여 복잡한 과학 개념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소개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과학 대중화에 대한 공로로 1956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수여하는 칼링거 상(Kalinga Prize)을 수상하기도 한 가모브는 1968년 8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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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Helge Kragh, Cosmology and Controversy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1996).
[10] 조지 가모브,『조지 가모브 자서전』 (사이언스북스,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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