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 내에 있는 각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는 1925년 비정상 제만 효과와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그 뒤 아주 근본적인 원리로 발전해서 물리학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배타원리는 금속의 전자론과 같은 고체물리학부터 초대칭 이론과 같은 고에너지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이 배타원리는 '물리학의 양심'(Das Gewissen der Physik)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파울리라는 물리학자와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다.

파울리와 상대성 이론

1900년 4월 25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난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는 어릴 때부터 보기 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12세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완전히 이해했으며, 14세에 오일러의 저작을 읽었고, 18세에는 난해하기로 정평이 있었던 푸앵카레의 천체역학에 탐닉하기까지 했다. 1918년 10월 파울리가 뮌헨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당시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해한 학문 분야로 알려져 있었던 일반상대론을 상당한 수준까지 연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파울리는 대학 초년생으로서 상급학생들이나 신청하는 좀머펠트의 고급세미나에 참가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했다. 당시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은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헤르만 바일이 수학적으로 제안한 이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는데, 파울리 역시 바일이 연속체 가설을 바탕으로 관찰할 수도 없는 전자 내부의 구조를 가정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바일의 통일장 이론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했다.

파울리의 대학 스승인 좀머펠트는 당시 수리과학 백과사전의 물리학 분야 편집인이었는데, 그때 그는 상대론 분야의 집필인을 물색하고 있었다. 물론 상대론의 주창자인 아인슈타인이 가장 적격자였으나, 아인슈타인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기 때문에 다른 인물을 구해야만 했었다. 자신의 세미나에서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이론을 통렬히 비판하는 파울리를 본 좀머펠트는 선뜻 이 중요한 집필을 21세의 어린 파울리에게 맡겼다. 아인슈타인이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말하기를, "이 완숙되고 훌륭하게 집필된 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자가 21세의 한 청년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개념 발전에 관한 심리학적 이해, 수학적 추론의 정확성, 깊은 물리학적 통찰력, 개괄적이고도 체계적인 서술능력, 참고문헌에 대한 인식, 주제 처리에 있어서의 완전성, 비판의 정확성 등등, 무엇을 먼저 치하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놀랍다."라고 평했다.

파울리와 고전양자론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상대성이론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파울리는 그 뒤 상대론에 비해 비교적 많은 경험적 자료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또한 당시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양자론 분야로 곧 관심 분야를 옮겼다. 파울리는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만으로도 이미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교육법에서는 대학에 들어온 뒤 최소한 6학기 이상을 등록해야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1921년 여름에 와서야 최우수 성적(summa cum laude)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수소 분자 이온에 대한 양자론적 설명에 관한 것이었다. 수소 분자 이온은 삼체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법을 얻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파울리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수소 분자 이온이 갖는 다양한 전자 궤도의 안정성 문제를 다루었다.

박사 학위를 한 뒤 1921/22년 겨울 학기에 파울리는 수학의 메카인 괴팅겐으로 가서 막스 보른의 조교가 되었다. 당시 보른은 천체 역학에서 사용하는 건드림이론(Strungstheorie)을 이용해서 헬륨 문제와 같이 삼체 문제를 포함한 역학 체계에 대한 다전자 체계의 고전 양자론을 일반적으로 전개하려는 야심찬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파울리는 보른을 도와 세차운동에 의해 생기는 '고유 겹침'(intrinsic degeneracy)을 다루는 다체 문제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파울리는 보른이 물리적 내용보다는 지나치게 수학적 형식주의에 매달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울리와 보른 사이의 협력 작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6개월 뒤 파울리는 함부르크로 가서 파울리와 같은 좀머펠트의 문하생이었던 빌헬름 렌츠(Wilhelm Lenz)의 조교가 되었다. 1922년 6월 파울리는 괴팅겐에서 닐스 보어를 처음으로 만나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해 가을 그는 코펜하겐으로 가서 1년간 머물면서 닐스 보어와 진지한 학문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파울리는 닐스 보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에너지 보존법칙이나 대응원리와 같은 몇몇 부분에서는 닐스 보어에게도 강한 비판을 가했다. 무엇보다도 파울리는 당시의 고전양자론을 구성하고 있던 많은 개념들이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척 커다란 불만을 느꼈다. 예를 들어, 그는 당시로서는 풀리지 않던 양자현상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개념적 도구였던 보어의 대응원리도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원리 자체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새로운 양자론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이라는 것에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다. 많은 과학자들은 미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새로운 양자이론은 그 극한에 있어서 거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기존의 고전역학과 일치한다는 이 대응원리를 이용해서 그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던 새로운 양자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아내는 데 많이 이용하곤 했었다. 이런 대응원리조차도 파울리는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양자론의 형성에 있어서 철저한 개념적인 혁명을 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다.

파울리는 자신이 생각할 때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출판하지 않았다. 그의 유고를 보면 그가 논문으로 출판을 해도 손색이 없었을 수많은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논문을 출판하기 전에 '물리학의 양심'이라고 불렀던 파울리에게 논문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파울리의 친구들은 그가 논문을 출판해도 좋다고 하면 자신의 논문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믿었다. 그는 수많은 논문들이 출판도 되기 전에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물론 그가 비판을 했을 경우에도 살아남는 논문은 있었지만, 그것은 스핀 이론과 양-밀스 이론과 같이 아주 독창적인 몇몇 논문에서만 예외적으로 나타났다.

이상제만 효과와 란데의 모형

1920년 초부터 이상제만효과를 다루는 분광학 분야에서도 기존의 고전역학적 모형에서 벗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1896년 제만(Pieter Zeeman)이 자기장 내에서의 스펙트럼선의 분리현상을 발견한 이래 분광학적 기술이 계속 향상되어, 1920년경에는 수많은 관측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가장 설명하기 힘들었던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자기장에서 궤도각운동량과 오늘날 우리가 스핀각운동량이라고 부르는 양과의 커플링에 의해서 스펙트럼선이 복잡하게 갈라지는 현상인 이상제만효과였다. 1920년 초부터 이상제만효과를 연구하던 란데(Alfred Land)는 당시의 실험적 사실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하기 위해 일종의 벡터 모형을 제안했다. 그러나 란데의 이 모형에서는 고전역학적인 각운동량의 두 곱이 양자론적으로는 다른 식으로 나타나서 모형을 취급하는 방식 자체가 기존의 고전역학으로부터 일탈하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전자의 스핀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전이었고, 과학자들은 이 스핀에 해당하는 양을 원자핵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궤도전자의 상대론적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원자 중핵의 각운동량으로 표현했다. 이에 따라 원자의 각운동량은 중핵 각운동량 R, 궤도 각운동량 K, 전체 각운동량 J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 R, K, J는 현재의 S+1/2, L+1/2, J+1/2에 해당한다. K=1/2, 3/2, 5/2, 7/2 ... 등을 배열할 수 있고, 이는 s, p, d, f ...를 나타낸다. 또한 R=1/2, 2/2, 3/2, 4/2 ... 등을 배열할 수 있고, 이는 홑겹 상태, 겹 상태, 3중 상태, 4중 상태 등을 나타낸다. 이때 1/2 정수가 양자수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정상파 모형에 기초를 둔 보어-좀머펠트 고전 양자론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 또한 란데의 g-인자 계산에서도 문제점이 나타났다. 약한 외부 자기장의 경우 3 R2-K2 에는 란데의 g -인자는 로 표시되어, 분모의 1/4이라는 수가 기 존의 벡터 모형에서 벗어났다. 반대로 강한 자기장의 경우에는 로 중핵 각운동량의 자기에너지 하에 궤도 각운동량의 2배가 되는 인수가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했다.

( 여기서 m=mK+mR, mk=Kcos(KH), mR=Rcos(RH)이다.) 궤도 각운동량과 스핀 각운동량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이 현상은 1926년 토머스(L. H. Thomas)가 전자의 회전에 따른 상대론적 효과를 보정하면서 부분적으로 해결되었고, 1928년 디랙이 완성한 상대론적 전자론에 의해 완전히 설명되었는 데 당시로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외에도 원자에 전자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늘려나가면서 원자계의 상태를 계산하면 보어의 원자 구성원리의 기본이 되었던 에렌페스트의 단열 원리가 붕괴되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수를 바탕으로 분광학적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1/2 정수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엄청나게 헤매고 있었다. 1924년 2월 21일 파울리는 보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독일의 원자 물리학자들은 현재 두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그 한 부류는 먼저 1/2 정수를 양자수로 사용해서 어떤 문제를 풀다가 그것이 경험과 맞지 않으면 다시 정수 양자수로 계산합니다. 반면에 또 다른 부류는 먼저 정수로 계산하다가 그것이 경험과 맞지 않으면, 다시 1/2 정수로 계산합니다. 이 두 부류의 원자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에서 어떠한 선험적 논증도 얻어질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론 물리학은 내 취향과는 결코 맞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은 고체의 열전도에 관한 일로나 돌아가렵니다." 10개월 뒤 비정상 제만 효과로 다시 돌아온 파울리는 마침내 자신의 생애 최대의 업적인 배타원리를 창안하게 된다.

배타원리의 출현

당시 이상제만 효과에 관련되어 나타났던 수많은 문제점은 훗날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스핀 이론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1925년 파울리는 배타원리를 창안하여 고전양자론 내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즉 고전역학적 개념을 철저히 거부한 파울리는 비정상제만효과를 란데의 벡터 모형으로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전역학적인 모형을 이용한 설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주양자수, 방위양자수, 자기양자수 외에 제4의 양자수를 가정함으로써 소위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제창하게 된다. 각 전자는 원자 내에서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이 배타원리를 바탕으로 파울리는 고전역학적인 개념을 부분적으로 함유하고 있었던 보어의 고전양자론의 문제점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양자상태 개념에 입각해서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파울리가 1925년 초의 배타원리에 관한 논문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핀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제4 양자수를 기계적이며 고전역학적인 모형으로 설명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한 예로, 1925년초 크로니히(R. Del Kronig)의라는 한 젊은 물리학자가 파울리가 제안한 제4의 양자수를 전자의 스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내용을 파울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때 파울리는 크로니히의 견해가 기계적이고 고전역학적인 해석이며, 따라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런 바람에 크로니히 자신은 그만 스핀가설에 관한 주장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크로니히는 중대한 발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핀 발견의 영광은 에렌페스트 밑에서 공부하던 윌렌벡(George Eugene Uhlenbeck)과 하우트스미트(Samuel Abraham Goudsmit)에게 돌아가 버렸다. 우리가 흔히 파울리의 스핀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것은 토머스가 스핀 각운동량의 상대론적 효과를 가정해서 분광학적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뒤인 1927년 5월 자기 전자에 대한 양자역학을 다룬 파울리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한편 1926년 엔리코 페르미는 이상 기체 상태 방정식에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적용하여 새로운 통계 법칙을 유도했다. 이어 1927년 디랙은 분자 집단에 대한 문제를 풀 때 대칭 고유함수를 포함하는 상태함수는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반면에 반대칭 고유함수를 포함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새로운 통계역학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따르는 입자들은 페르미-디랙의 통계라는 새로운 통계역학적 방식에 의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파울리의 행렬역학

파울리는 물리 법칙은 항상 원칙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찰 가능한 양을 중시하는 경향은 이미 그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비판할 때부터 엿보이기 시작했다. 파울리의 이런 철학적 관점은 그의 친구였던 하이젠베르크가 행렬 역학을 창안할 때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5년 행렬역학과 관련된 하이젠베르크의 최초 논문에는 원리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의 관계들로만 새로운 양자역학을 정립하겠다는 주장이 담겨있는데, 바로 이것은 그의 친구 파울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가 행렬역학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데 파울리는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파울리 자신은 하이젠베르크가 창안한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보른에 의해 행렬 역학이라고 하는 수학적 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 등이 행렬역학을 완성하고 있던 상당기간 동안 이 과정에서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행렬역학의 유효성이 점차로 여러 곳에서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파울리도 행렬역학의 실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어 역시 행렬역학의 발전에 대해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만약 행렬 역학이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성공적으로 유도하면 이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교과서에서는 수소 문제를 뒤이어 나타나는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이용해서 풀고 있으며, 이 문제를 행렬역학에 의해 푸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행렬역학의 창시자들 역시 행렬역학을 이용해 수소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뒤늦게 행렬 역학의 발전 대열에 합류한 파울리 수소 문제를 행렬역학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행렬역학이 원자의 분광학적 현상과 부합되는 올바른 이론이라는 것을 닐스 보어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파울리와 뉴트리노

1914년 채드윅이 베타 붕괴할 때 전자가 연속적인 에너지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한 이래로 과학자들은 전자가 일정한 에너지를 갖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엘리스(C. D. Ellis)는 베타 붕괴를 할 때 이런 연속적인 에너지 스펙트럼을 갖는 이유는 핵내부에서 전자의 에너지가 감마선으로 변환되면서 다양한 에너지 분포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마이트너(L. Meiter)는 핵내부에서 전자는 띄엄띄엄 에너지를 갖지만 핵외곽에서 다른 전자에 에너지를 방출해서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타 붕괴에 의해 나오는 전자의 에너지 스펙트럼이 내부에서 진행되는 1차적인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나타나는 2차적인 것이지를 확인하려면 베타 붕괴 때 나오는 전자를 흡수하여 생기는 절대 열 에너지를 측정하면 되었다. 만약 1차 과정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열량계에서 측정된 열 에너지는 베타 스펙트럼의 평균값이 될 것이며, 2차 과정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측정된 열 에너지는 베타 스펙트럼의 상한가가 될 것이다. 1927년 엘리스(C. D. Ellis)와 우스터(W. A. Wooster)는 라듐 E에서 생성되는 열 에너지를 측정한 결과 이것이 베타 스펙트럼의 평균값과 같음을 보였다. 이어 1930년 마이트너와 네른스트의 공동연구자였던 오르토만(W. Orthomann)은 좀더 개량된 실험 장치를 사용해서 엘리스와 우스터가 측정한 값을 더욱 정확히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 나아가 마이트너는 이 논문에서 베타 붕괴를 할 때에 엘리스가 가정한 연속적인 감마 스펙트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였다.

이에 따라 연속적인 베타 스펙트럼을 해석하는 두 가지 이론적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 하나는 베타 붕괴 때에 에너지 보존 법칙을 파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1차 단일 과정에서도 에너지 보존법칙의 유효함을 인정하고 대신 새로운 중성 입자가 방출된다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보어는 자신이 1924년에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기할 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에너지 보존법칙을 파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파울리는 새로운 중성 입자를 가정함으로써 에너지 보존법칙을 유지했다. 1930년 12월 파울리는 튀빙겐에서 열리는 물리학회에 바로 이 새로운 중성 입자를 가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방사성 신사 숙녀 여러분'(Liebe Radioaktive Damen und Herren)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서 파울리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유지하기 위해 스핀이 1/2이고 빛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중성입자를 가정했다. 파울리는 이 입자를 '중성자'(Neutron)이라고 불렀는데, 이 입자의 질량은 전자의 크기 정도로 양성자 질량의 1 % 이내가 된다고 생각했다.

1932년 채드윅은 양성자와 질량이 비슷한 새로운 중성 입자를 발견했다. 이리하여 파울리가 예언한 중성자는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입자와 구별하기 위해 1934년 페르미는 이탈리아 이름인 뉴트리노(Nutrino)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했다. 파울리가 에언한 이 중성미자는 1956년 로스 앨러머스의 코원(Clyde L. Cowan)과 라이니스(Frederick Reines)에 의해 마침내 실험적으로 발견되었다. 1956년 6월 15일 파울리는 코원과 라이니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우리는 양성자 역 배타 붕괴를 관찰하여 분열된 조각으로부터 뉴트리노를 분명히 관측했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주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관찰된 단면적은 예측된 값인 6·10-44 cm과 잘 일치합니다." 이 편지는 파울리의 놀라운 통찰력에 대한 찬사와 함께 그에게 확실한 학문적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파울리와 양자역학의 해석

파울리는 1931년 결혼에 실패한 뒤 심한 좌절에 빠졌다. 1931년 겨울 그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파울리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찾아갔다. 이 만남은 훗날 둘 사이의 과학적 접촉으로 이어졌다. 파울리는 측정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양자역학적 과정을 관찰자의 주관적이고 심리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양자역학이 지니는 비결정론적 성격을 종교에서 연금술적 상징들이 표출되는 집단 무의식을 다룬 칼 융의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켰다. 즉 관찰자의 주관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치 소우주인 인간이 정신적으로 만다라(mandala)에 들어가서 우주 생성에 개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적 대상에 관찰자의 측정행위가 영향을 미치는 전체성을 논함에 있어서 보어는 관찰을 원자계와 측정 도구와의 상호작용으로 보았다. 하지만 파울리는 측정도구를 관찰자의 감각기관이 확장된 것으로 보면서, 관찰을 원자계와 관찰자의 의식과의 상호작용으로 간주했다. 파울리는 물질과 정신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했던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견해와는 달리 실재는 물리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는 전체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즉 물질(matter)과 정신(psyche)은 실제에 대한 상보적 표현이며,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파울리의 이런 생각은 연금술적 전통과 불교적 세계관과 깊은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만년에 정신과 물질의 문제에 몰두한 파울리는 1958년 12월 15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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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본성이 파동인지 아니면 입자인지에 대한 논쟁은 과학계에서 이미 오래된 해묵은 논쟁에 속한다. 운동의 3법칙과 보편중력을 바탕으로 과학혁명을 완성한 뉴턴은 빛의 입자성을 제기했고, 뉴턴이 지녔던 엄청난 권위와 영향력 때문에 18세기를 지나는 동안 오일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빛이 입자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와서 회절과 간섭 현상이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다시 빛은 파동의 성질을 지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진공 중에서 빛이 전파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에테르라는 가상의 물질을 제안하기도 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도입하여 고전역학과 전자기학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를 극복했고 이 과정에서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했다. 또한 그는 광양자 가설을 제기함으로써 19세기 초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빛의 입자성을 다시금 부활시켰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가설을 제기함으로써 양자론의 발전에 커다란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빛에 대한 현대적 해석인 파동-입자 이중성의 개념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막스 플랑크의 작용양자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1900년에 나타난 막스 플랑크가 지녔던 빛에 대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형성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단순한 계승 발전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광양자의 존재 문제와 양자 불연속 개념의 접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두 인물 사이에 커다란 입장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1900년 막스 플랑크에 의해서 제안된 흑체 복사 이론은 고전물리학과 대별되는 새로운 양자론의 탄생을 알리는 출발점이었지만,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플랑크 자신에게 이 변혁은 원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따라서 막스 플랑크의 논문에서 에너지가 플랑크 상수와 빛의 진동수의 정수배로 표시되는 것은 사실 1, 2, 3, 4라는 식의 정수배 뿐만이 아니라 1.5, 2.5, 3.5 등의 구간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1906년 이후에 나타난 플랑크의 저작을 보면 플랑크가 바로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 흔적을 알 수 있다.

플랑크가 사용한 자신의 논문에서 사용한 방법으로 훗날의 보즈-아인슈타인 통계에 해당하는 통계적 방법은 사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애매한 것이었다. 즉 미국의 깁스(J. W. Gibbs, 1839­1903)가 다루었던 에너지 등분배 법칙(equipartition law)은 1902년 이후에나 분명하게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식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너지 등분배 법칙이 분명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플랑크가 사용했던 통계적 방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점에서 플랑크는 새로운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연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보수적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광양자 가설의 출현

보수적인 개혁 뒤에 마침내 아주 혁명적인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다. 1905년과 1906년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빛을 입자로 보는 광양자 가설을 제기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1902년과 1904년 사이에 미국의 깁스와는 별도로 이와 유사한 통계역학 논의를 전개했었다. 이 때 그는 이미 에너지 등분배 법칙, 열역학적 상태 분포, 열에 대한 분자론적 이론 등에 대한 통계역학의 핵심적인 내용들을 독자적으로 전개했다. 이런 통계역학적 논의는 1905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으로 이어졌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에너지 등분배 법칙에 대한 분명한 입장에 바탕을 가지고 논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논문에 나타난 그의 주장은 빛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입장에서 플랑크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와는 달리 처음부터 빛을 반사하는 벽을 가진 상자 속에 있는 입자로 보고 광전 효과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즉 아인슈타인의 논문은 후일 고전적인 입자에 적용되는 맥스웰-볼츠만 통계와 빛과 같은 양자역학적인 입자에 적용되는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로 분명히 구분될 수 있는 통계역학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볼츠만 통계와 구분이 애매했던 플랑크의 통계학적 논의와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 것이었다. 또한 플랑크가 사용한 정수 배라는 의미는 구간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따라서 반드시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가정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는 분명히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나올 당시 그의 주장은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볼 때는 매우 과격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견 과학자들이었던 로렌츠나 플랑크가 아인슈타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빛의 회절과 간섭 현상을 설명하는 데 문제가 있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909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1905년에 광양자 가설과 상대성이론과 함께 논의했던 브라운 운동에 대한 논의를 이용해서 빛의 이중적인 성격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관한 논문에 브라운 운동에 대한 논의가 결부되어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고체 비열과 양자 불연속 개념

적어도 1907년까지 진행되었던 광양자의 존재 및 양자 불연속에 관한 논의는 주로 열 복사 분야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따라서 양자 불연속 개념을 수용 여부도 여전히 몇몇 제한된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광양자 가설이 과학자 공동체에서 보다 광범위하게 수용되는 데에는 열 복사 이외의 분야로 관심 영역이 확대되는 것이 동시에 수반되었다. 1907년에 발표한 비열에 관한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고체 비열의 문제를 자신의 양자가설을 이용해서 설명하려는 시도를 했다.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자신이 이미 분자 통계 이론에서 분명하게 인식했던 에너지 등분배 법칙을 이용해서 플랑크 공진자(Resonator)의 평균 에너지를 유도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이 새로운 비열 이론에 의하면, 19세기에 등장한 고체 비열 이론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고체의 비열은 절대 온도 0도 근처에서 지수적으로 0으로 접근한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비열에 관한 이론은 정작 물리학자들에게는 그리 많은 주목을 받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1880년대 말부터 물리화학 분야에서 활동하던 화학자 발터 네른스트(Walther Nernst, 1864­1941)가 이 논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당시 네른스트는 고체나 유체 상태의 대단히 순수한 응집 물질 사이의 열역학적 상호작용에서 헬름홀츠 자유 에너지와 전체 에너지 사이의 차이가 아주 적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이런 경험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1906년 네른스트는 절대 온도 0도 근처에서는 엔트로피의 변화가 없다고 하는, 요즈음 흔히들 네른스트의 열역학 제3법칙이라고 부르는 가설을 제안했다. 이 열역학 제 3법칙 때문에 유한한 회수의 열역학적 과정으로는 절대 온도 0도에 도달할 수 없으며, 절대온도가 0도에 가까워짐에 따라서 비열이나 열팽창률 등도 0에 가까워지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비열 이론은 네른스트가 가정했던 열역학 제3법칙의 결과와 절대온도 0도 근처에서 비열이 0으로 수렴한다는 점에서 서로 보완 관계에 있었다. 네른스트와 그의 학생들은 극저온에서의 비열을 측정하는 방법을 개선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즉 네른스트의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넓은 온도 구간 사이의 평균 비열 값 뿐만이 아니라, 극저온의 아주 작은 구간의 온도에서 비열을 정확하게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1907년 아인슈타인이 이미 고체 비열 이론에 양자론을 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자들은 광학적 측정값으로부터 고체 결정격자의 진동수를 유도하려는 것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1909년 괴팅겐 대학의 마델룽(Erwin Madelung, 1881­1972)은 거대 결정체의 탄성과 적외선 영역의 잔류복사(Reststrahl)의 크기 사이에 이론적인 연관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즉 그는 전자기 산란이론에서 제안된 적외선 영역의 고유 진동수가 바로 고체 결정의 탄성 횡파 진동수라고 주장하면서 적외선 열복사에서 얻은 실험 결과와 탄성률, 압축률과 같은 고체의 성질을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마델룽의 작업과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1910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에 있는 서더랜드(William Sutherland, 1859­1911)는 마델룽의 작업과 유사한 논의를 전개하였다. 서더랜드의 작업은 아인슈타인으로 하여금 고체의 비열과 탄성과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네른스트는 자신의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극저온의 비열에 관한 실험을 계속 진행시켰고, 이에 따라 점차로 그들은 정성적으로는 실험 결과가 아인슈타인의 비열 이론과 일치하지만 정량적인 면에서 약간 벗어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비열 이론을 다양한 식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네른스트는 비열에 관한 작업을 통해 아인슈타인을 많은 과학자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많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양자 문제에 관련된 국제 학술회의를 개최하여 양자론을 둘러싼 과학자 공동체 내의 의견 수렴 과정에도 깊이 개입했다. 네른스트는 1911년 10월 29일부터 11월 3일까지 열린 '제1차 솔베이 회의'를 소집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당시 이 회의에는 양자가설에 관련된 권위 있는 과학자들이 대부분 참가해서 양자가설의 수용여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고, 결국 이 회의는 중진 과학자들이 양자론을 수용하게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체 비열에 관한 양자론적으로 완전한 이론은 1912년 당시 스위스에서 활동하던 네덜란드 태생의 과학자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와 괴팅겐 대학의 사강사들이었던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과 카르만(Theodore von Krmn, 1881­1963)에 의해서 얻어졌다. 보른과 카르만은 고체를 수많은 결정격자로 보고 아주 복잡한 수학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접근한 반면에, 드베이어는 고체를 연속적인 탄성매질로 간주하여 분자 격자의 스펙트럼 내의 고유 진동수의 상대 밀도가 연속 탄성매질의 통상적인 탄성 고유진동수와 같다고 보고 문제를 보다 간편하게 접근했다. 이런 간편한 계산 방법에 힘입어서 드베이어는 보른과 카르만보다 11일 먼저 고체의 비열이 아주 낮은 온도에서 절대온도의 3제곱에 비례한다는 결론을 얻어내었다.

드베이어의 방법은 비록 완전한 형태의 계산은 아니었지만 보른과 카르만의 방법에 비해서 훨씬 간편했고, 더욱이 드베이어의 우선권이 인정되어 오늘날 고체 물리 교과서에서 고체 비열 이론을 언급할 때 드베이어의 이름이 남게 되었다. 하지만 보른은 자신의 결정격자 이론을 더욱 일반적으로 발전시켜서, p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결정의 탄성 스펙트럼이 아래쪽의 3개의 '음향 진동' (Akustische Schwingungen)과 위쪽의 3(p-1)개의 '광학 진동'(Optische Schwingungen)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혔고, 이후 결정 격자 이론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체계화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의 위기와 부활

1911년 아인슈타인은 광양자 가설을 부분적으로 유보하고 빛에 대한 파동론적인 해석을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1911년 5월 13일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친구인 미셸 베소(Michele Besso)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 광양자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지에 대해서 나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나는 내 두뇌가 거기에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잘 알기 때문에 더 이상 광양자의 실재를 구축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저 이런 개념의 응용 범위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가능하면 면밀하게 그 결과들을 살펴보고 있다 ". 즉 아인슈타인 스스로도 1911년경에는 광양자의 실재 여부에 대해서는 더이상 옹호하기 힘든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아인슈타인은 골치 덩어리였던 양자론보다는 중력에 대한 문제에 온 힘을 기울이게 되었고, 이에 따라 광양자 가설에 대한 그의 논의는 잠시 수면 아래로 잠기게 된다. 1916년 새로운 중력 이론인 일반상대성이론의 대업을 완성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상대성이론에 몰두하느라고 등한시한 양자론에 관한 논의를 다시 재개했다. 1916년 이후에 아인슈타인은 1911년에 자신이 가졌던 광양자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딛고 일어서서 다시금 광양자 가설을 과거보다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1917 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결론 부분에서 광양자의 존재의 필요성을 다시금 거론했다.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에서 자연복사와 유도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광양자가 에너지 hν 뿐만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향하는 hν/c(여기서 c는 빛의 속도; h는 플랑크 상수; ν는 진동수를 나타낸다.)에 해당하는 운동량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즉, 들뜬 분자에 빛이 가해질 때, 그 분자는 광양자를 방출하게 되는데, 이때 운동량 보존법칙에 의해서 분자에는 hν/c에 해당하는 반발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제 광양자는 에너지의 형태로만 불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운동량의 형태로도 불연속적인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이 논문에서 실토했던 문제점은 빛이 모든 방향으로 향하는 구면파 형태로 방출되지 않고 마치 바늘과 같이 어느 특정한 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된다면 분자나 원자는 운동량 보존법칙에 따라 빛을 방출할 때마다 무질서하게 반발해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분자나 원자는 움직이지 않고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현재 상태의 양자론으로는 빛이 어느 방향으로 방출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우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인슈타인은 이 '우연'에 의해서 복사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이 자신의 이론이 지닌 최대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26년 양자 충돌 이론을 연구하던 막스 보른은 바로 아인슈타인의 이 논문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양자역학에 관한 통계적 해석을 전개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물리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 내에서 존재하는 극복되어야 할 약점으로 본 것을 보른은 실험적 사실에 바탕한 이론적 실재로 보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제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양자론에 내재하고 있는 약점 내지 불완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평생 수많은 노력을 경주했고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는 통일장 이론을 향한 그의 노력도 이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우선 1923년 아인슈타인은 상대론적인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상위 결정된(berbestimmten) 미분방정식 체계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는 연속체 가설과 결정론적 기술이 유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비결정론적 성격도 상위 결정된 미분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아인슈타인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보어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논쟁

보어는 1913년에 발표한 자신의 원자모형에서 아인슈타인이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에서 제시했던 생각을 사용했지만, 그는 광양자 가설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광양자 가설에 대한 보어의 회의적 태도로 말미암아 1924년부터 1925년 사이에 보어와 아인슈타인을 필두로 한 여러 과학자들 사이에는 광양자의 존재 여부를 놓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1924년 초 보어는 가상 진동자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미시세계에서의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법칙의 파기를 내세우며, 파동론에 입각한 복사이론을 부활하려고 시도했다. 가상 진동자(virtual oscillator) 개념이란 원자들이 가상적인 복사장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가상적인 진동자들과 서로 교통(交通)하는 일련의 가상적인 진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로 1924년 유럽에서 박사연구원으로 활동하던 미국의 과학자 슬레이터(John C. Slater)가 처음으로 제안했던 개념이었다. 보어는 이 가설에다가 미시세계에서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법칙을 파기하는 자신의 생각을 결합시켰고, 마침내 보어(Niels Bohr, 1885 ­1937), 클라머스(Hendrik A. Kramers, 1881­1957), 슬레이터(John Clarke Slater, 1900­1976) 세 사람은 공동으로 새로운 복사이론을 발표했던 것이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광전효과를 비롯한 많은 문제를 설명하는 데에는 좋은 개념적 도구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빛의 간섭이나 회절 현상을 설명할 때에는 파동론에 의해서 정의되는 진동수나 파장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보어가 보기에는 1922/23년에 컴프턴(Arthur Holly Compton, 1892­1962)과 드베이어에 의해서 발표된 전자에 대한 X-선 산란 실험, 즉 컴프턴 산란 실험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확증하는 결정적 실험은 되지 못했다.

보어의 이런 새로운 파동론적인 주장과 아인슈타인의 기존의 광양자 가설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베를린의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서 일하던 발터 보테(Walther Bothe, 1891­1957)와 한스 가이거(Hans Geiger, 1882­1945)는 그들이 그 이전에 사용하던 전기계수 장치를 개량해서 창안해낸 동시계수법을 이용해서 엄밀한 결정적 실험을 실시했다. 동시계수법이란 두개 이상의 계수 장치 모두에 동시에 입력 신호가 들어갔을 때에만 계수기의 출력 신호가 나타나게 만든 장치인데, 이것을 이용하면 광양자와 전자와의 충돌 현상이 단일 사건인지 아니면, 여러 요인에 의한 복합적인 사건인지를 알 수 있었다. 1925년 4월에 얻어낸 보테와 가이거의 실험결과는 아인슈타인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은 1924년에 있었던 보어의 반동적인 쿠데타를 1925년 보테와 가이거가 실험적으로 반박하고, 곧 이어서 미국의 컴프턴이 사이먼(A.W. Simon)과 함께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컴프턴 효과에 관한 실험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과학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게 된다.

보즈-아인슈타인 통계

아인슈타인은 1924년 인도의 과학자 보즈(Satyendra Nath Bose, 1894­1974)가 발표한 통계역학적 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서 결국 오늘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라고 불리는 양자역학에서 사용되는 주요한 통계 법칙 가운데 하나를 발전시켰다.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는 빛과 같은 물질을 다룰 때 적용되는 양자통계의 하나로서 전자 등을 다룰 때 적용되는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양자 현상을 다룰 때 사용하는 두 개의 전형적인 통계역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1924년에 나타난 드 브로이의 물질파 이론과 1926년부터 슈뢰딩거가 발전시킨 파동역학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은 연속체적인 물리기술이었던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이것이 물리법칙에서 인과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연속체적인 장 이론을 찾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의 생각과 연결될 수 있었다. 결국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플랑크의 지지 속에서 1927년 베를린 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반면에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 막스 보른, 닐스 보어 등이 전개한 비결정론에 바탕한 양자역학적 해석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회의를 나타냈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시킬 수 있는 보다 완벽한 통일장 이론이 등장하게 되면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죽을 때까지 믿고 있었다. 이런 믿음과 연관해서 아인슈타인은 만년에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에서 죽을 때까지 '빛이란 과연 무엇일까?'하는 물음에 몰두하곤 했던 것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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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Roger H. Stuewer, The Compton effect (New York: Science History Publication, 1975).
올해는 현대물리학의 시작을 알리게 되는 양자론이 탄생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과학 분야에서 20세기는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가 작용양자 개념을 바탕으로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양자물리학을 제창하면서 시작되었다. 1900년 12월 14일 독일 베를린 대학의 이론물리학 교수였던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플랑크 상수라는 특정한 상수와 진동수의 곱의 정수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는데, 바로 이것이 새로운 20세기 현대물리학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의 젊은 시절

막스 플랑크는 1858년 4월 23일 북부 독일의 항구 도시인 킬에서 태어났다. 1874년 그는 뮌헨의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학창시절 그의 석차는 상위권이었으나 한번도 수석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즉, 어학, 수학, 역사, 음악 등 모든 과목을 고루 잘했으며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나, 특출한 재능이나 적성을 타고나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목사, 학자, 법률가 집안의 출신답게 책임감이 강하고 보수적이었으며, 어느 의미에서는 대기만성형의 인물이었다.

1874/75 겨울 학기부터 플랑크는 뮌헨대학 철학부에 등록했다. 당시 플랑크의 지도교수였던 필립 폰 욜리(Philipp von Jolly)는 플랑크에게 열역학의 기본 원리들이 모두 발견되어서 이론 물리학은 이제 거의 완성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에 아마도 더 이상 연구할 것이 없을 것이니 다른 전공을 택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플랑크는 그에게 설득되지는 않았다.

1878년부터 그는 대학을 옮겨 베를린의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와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 밑에서 배웠고, 1879년 6월 '열역학의 제2법칙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최우수 성적(summa cum laude)으로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1880년 6월 뮌헨 대학에서 교수자격 논문을 통과해서 그 곳에서 사강사로 생활하다가, 1885년에는 고향인 킬 대학 수리물리학 부교수, 1889년에는 키르히호프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부교수가 되었다가 마침내 1892년 베를린 대학 정교수로 자리잡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플랑크는 자기 생애의 최대의 업적인 흑체 복사 이론을 완성하게 된다.

초기 흑체복사에 대한 연구

흑체복사 이론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59년 말에서 1860년 초에 이르는 겨울에 키르히호프는 흑체 복사강도의 분포는 벽의 물질이나 빈구멍(cavity)의 모양이나 크기와는 상관이 없고 오직 온도와 빛의 파장에만 관계된다는 소위 '키르히호프의 복사 법칙'을 발견했다. 하지만 당시의 실험이나 이론 물리학 수준으로는 다양한 온도와 파장에 걸쳐 키르히호프가 정의한 열복사의 강도를 정확하게 기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이론적인 차원에서 당시에 열복사 문제는 맥스웰의 전자기학과는 별개로 취급되어 발전하고 있었다. 1888년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7)가 전자파의 존재를 발견한 뒤에야 많은 사람들은 가시광선이나 열복사에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열복사를 실험적으로 비교적 정확히 측정할 수 있게 된 것도 1886년에 와서야 가능했다.

1884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은 1879년 요셉 슈테판(Josef Stefan, 1835-1893)이 실험적으로 발견한 온도에 따른 열복사의 관계를 당시 하나의 가설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적용해 설명했다.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이들의 주장은 훗날 슈테판-볼츠만 법칙으로 문헌에 나타나게 된다. 한편 1886년 미국 천문학자인 랭글리(S. P. Langley, 1834­1906)는 적외선의 강도를 잴 수 있는 볼로미터(bolometer)를 개발해서 흑체 구리에서 발생하는 에너지와 태양에서 발생하는 에너지를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흑체 복사에 대한 정량적인 실험을 하고 그 관계를 나타내는 구체적인 그래프를 얻어냈다. 그는 차가운 행성의 표면에서 태양 복사선이 흡수되고 발사하는 것을 결정하기 위해 이 실험을 했지만, 이 실험을 통해 적외선 영역의 정량적인 흑체 복사 법칙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볼로미터를 이용한 랭글리의 실험은 여러 면에서 정성적이고 상당히 엉성한 것이었지만, 곧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론적, 실험적 차원에서 더욱 정교한 정량적 수준으로 발전했다.

1887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마이켈슨(Wladimir Michelson, 1860­1927)은 슈테판-볼츠만 법칙을 자신의 이론과 결합시켜 랭글리의 실험적 곡선에 대한 정성적인 설명을 부여했다. 하지만 마이켈슨의 설명은 정량적으로는 매우 불만족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해 취히리 공대의 베버(H. F. Weber, 1843­1912)는 자신의 새로운 실험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식을 제안하게 된다. 5년 뒤인 1893년 베를린 대학 사강사로 있었던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은 슈테판-볼츠만의 법칙을 보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유도하는 한편, 흑체복사의 강도가 최대에 도달할 때의 파장과 온도의 곱이 일정하다는 소위 빈의 '변이법칙'(Verschiebungsgesetz)을 발견했다. 이 때 빈이 실험적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 바로 베버의 결과였던 것이다.

제국물리기술연구소-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베를린 대학의 연결

흑체복사와 연관된 체계적인 실험이 발전하게 되는 데에는 독일에서 국가의 산업발전에 필요한 표준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된 제국물리기술연구소(PTR: 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의 과학자들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이 연구소는 1887년 독일 전기산업의 개척자인 베르너 폰 지멘스(Werner von Siemens, 1816­1892)의 개인적인 노력으로 독일제국의 연구소 형태로 설립되었는데,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Technische Hochschule Charlottenburg)의 근처에 세워졌다. 이 두 연구소와 베를린 대학 등 세 기관의 연구 성과가 합쳐져 이루어낸 것이 바로 막스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이었다.

19세기말 PTR와 샤를로텐부르크 공과대학에서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던 실험물리학자들인 빌헬름 빈(Wilhelm Wien), 오토 룸머(Otto Lummer, 1860­1925), 페르디난트 쿨를바움(Ferdinand Kurlbaum), 하인리히 루벤스(Heinrich Rubens) 등이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비롯한 좋은 제도적 조건 속에서 연구활동을 했다. 당시 급성장하던 독일 조명산업에서는 필라멘트에서 방출되는 스펙트럼의 가시영역과 가시영역 밖의 전자기적 에너지 분포를 비롯한 복사현상에 대한 보다 넓은 이해를 원했는데 PTR의 유능한 실험물리학자들은 독일 조명산업계의 이러한 현실적 요구에 제도적으로 부응하기 위해 복사현상에 대한 면밀한 실험을 행했던 것이다. 바로 이들의 실험 결과는 플랑크로 하여금 새로운 복사 관계식을 찾게 만든 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한편 1895년 정교한 실험 장비로 빈의 변이 법칙에 대한 결정적 실험적 결과를 얻어낸 하노바 공대의 조교 프리드리히 파센(Friedrich Paschen, 1865­1947)은 그 이듬해 에너지 자신의 실험 결과를 확장해서 라는 키르히호프 법칙에서 예측한 함수를 얻어냈다.

그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 이 법칙에서 α의 값이 5에서 6 사이의 값, 평균적으로 약 5.6 정도라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같은 해 빈은 파센의 법칙이 슈테판-볼츠만의 법칙과 양립할 수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복사식에서 α의 값은 5.0이 되어야 이론적으로도 모순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뒤 1899년까지 계속된 더욱 정밀한 실험을 통해 빈의 복사법칙은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 실험적으로 확인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한편 실험적인 차원 뿐만이 아니라 이론적인 차원에서도 빈의 법칙이 일반적인 형태로 유도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과제로 남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독일에서 제도상으로 보나 학문적으로 보나 최초의 이론물리학자로 인정되고 있는 막스 플랑크가 도전했던 문제였다. 플랑크는 빌헬름 빈이 변이 법칙을 실험적으로 발견한 1893년부터 흑체 복사 문제를 이론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897년에서 1899년에 걸친 5개의 연속적인 논문을 통해 비가역적 복사 과정에 대한 철저한 이론적 유도를 모색하는 연구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이런 오랜 노력 끝에 막스 플랑크는 1899년 5월 18일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 회의에서 발표한 최종 논문에서 전자기학 및 열역학 제2법칙 기초 아래 빈의 법칙을 일반적인 형태로 유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플랑크의 이론적 논문은 몇몇 특별한 가설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이론에서 빈의 복사식이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많기는 했지만, 흑체 복사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해명하려는 플랑크의 연구 프로그램은 대체로 성공적인 것이었다.

플랑크의 흑체복사 이론의 등장

1899년 11월까지 플랑크가 빈의 법칙을 유도했던 이론에서 지녔던 유일한 불완전한 점은 그가 진동자 엔트로피로 정의했던 복사 에너지 함수가 유일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문제점을 제거하기 위해 계속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것을 이론적으로 철저하게 증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00년 초 플랑크는 이 문제점을 해결했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해 가을이 되면서 다시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발견하게 된다. 이리하여 그는 1900년 10월 빈의 복사 법칙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그 때까지 있었던 모든 실험적 사실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복사식을 제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9년 11월 이후 플랑크가 흑체 복사 현상에 있어서 빈의 법칙이 유일한 법칙이라는 것이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과 동기에 대해서는 그것을 정확하게 말하기가 무척 힘든 역사적 과제이다. 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당시 베를린에 밀집해 있었던 3개의 연구소에서 나왔던 실험적 결과가 그의 판단에 미친 영향이다. 우선 1899년 2월부터 PTR의 오토 룸머와 베를린 대학의 부교수였던 에른스트 프링스하임(Ernst Pringsheim, 1859­1917)은 흑체 복사에 대한 더욱 면밀한 실험을 한 결과 높은 온도의 긴 파장에서 빈의 복사 법칙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뒤 계속된 실험에서 그들은 1900년 10월 12 ㎛에서 18 ㎛에 이르는 긴 파장의 영역에서 빈의 복사 법칙에 의해 계산된 값보다 관찰된 값이 약간 더 크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룸머와 프링스하임의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PTR의 교수였던 막스 티센(Max Thiesen, 1849­1936)은 1900년 2월 2일 독일 물리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빈의 법칙과는 다른 새로운 복사식을 제안하기도 했다. 베를린에서 있었던 바로 이런 분위기가 막스 플랑크로 하여금 새로운 복사식을 찾도록 만드는 하나의 실험적 제한 요소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엔트로피 법칙과 전자기학을 바탕으로 해서 흑체 복사 현상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던 플랑크의 이론적 관심을 들 수 있다. 우선 플랑크는 자신이 개발한 복사 법칙에 대한 열역학 법칙으로부터 기 존의 빈의 법칙이 라고 기술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주위에 있던 실험물리학자들이 얻은 빈의 법칙에서 벗어난 실험 값을 염두에 두고 플랑크는 이 식에 약간의 변형을 가하여 라고 바꾸었다 . 엔트로피와 에너지, 온도의 관계를 나타내는 관계와 기존의 빈의 법칙을 이용하면 이 식으로부터 새로운 복사식인 형태의 식을 얻게 된다.

플랑크는 이 식을 1900년 10월 19일 독일 물리학회에서 발표했는데, 같은 날 루벤스와 쿠를바움은 플랑크의 이 식을 언급하면서 자신들이 긴 파장의 영역에서 빈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분명한 실험적 결과를 얻었다고 발표했다. 또한 그들은 이 논문에서 빈의 법칙이 높은 온도와 긴 파장 영역에서 고전전자기학에 바탕을 둔 레일리의 법칙과도 상반됨도 이 때 함께 지적했다. 막스 플랑크가 변형을 가해 얻은 새로운 복사식과 관련된 엔트로피와 에너지 관계식을 에너지 U로 두 번 적분하면 형태의 식이 되는데, 바로

이 식이 확률 분포를 나타내는 조합식을 스터링 근사식(Stirling's approximation)을 이용해 표현한 다음 로그를 취한 값과 유사하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N개의 공명자(Resonator)에 단위 에너지 ε를 지닌 P개의 에너지 요소로 배열한다고 할 때 경우의 수는 로 표현된다 . N과 P가 클 경우 이 식은 가 되는데 여기에 스터링 근사식을 적용 하고 에 U를 대입하면, 위의 엔트 로피

관계식과 유사한 형태가 나오게 된다. 바로 여기서 플랑크의 새로운 복사식은 훗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형태의 통계와 연관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는 자신의 새로운 복사이론을 볼츠만의 통계역학과 연결시키면서 각 공명자의 에너지에 공명자 진동수의 정수배를 배당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00년 12월 14일 막스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에너지 양자가 진동수에 비례한다는 ε=hν라는 새로운 양자 가설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h는 6.55×10-27 erg·sec로서 복사법칙을 지배하는 보편상수의 의미가 부여되었다.

플랑크와 불연속성의 문제

막스 플랑크는 자신이 얻은 새로운 복사법칙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찾은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가정하고 있었던 원자론적인 엔트로피 법칙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당시로서는 아주 곤란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다. 즉 플랑크가 얻어낸 복사식은 당시의 물리학의 분위기에서는 동시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연속적인 전자기학과 불연속적인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모두 받아들일 때에만 보다 일관적으로 설명이 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플랑크는 그 이전까지 열역학 제2법칙을 논의할 때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새로운 복사식에 대한 체계적인 설명을 찾는 과정에서 할 수 없이 마지못해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플랑크가 이 때 자신의 새로운 복사식을 재해석하는 데 사용했던 통계적 방법은 이미 1877년 볼츠만이 제기했던 논의였다. 물론 당시 볼츠만의 통계적 논의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맥스웰-볼츠만 통계와 1924년 이후 등장하는 보즈-아인슈타인 통계와 구별하기 매우 힘든 형태의 논의였다. 따라서 플랑크는 자신의 방법이 우리가 알고 있는 맥스웰-볼츠만의 통계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통계라는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로 자신의 '혁명적'인 논문을 집필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플랑크의 작용 양자에 관한 논의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에너지 불연속 개념은 그리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당시에 플랑크 자신에게 있어서는 볼츠만의 통계역학과 고전 전자기학을 동시에 만족하는 통일되고 체계적인 자연법칙을 유도하는 것이 양자 불연속 개념보다도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플랑크가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정수 배로 변화한다는 중대한 가정을 처음으로 자신의 논문에서 쓰고는 있었지만, 그 자신은 빛이 바로 입자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심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양자 불연속 개념의 확립

1900년부터 1908년에 이르기까지 양자불연속 개념은 빈-플랑크 복사식이 실험적으로 입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특별한 미봉가설로 간주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당시의 과학자들은 에너지 불연속 개념과 같은 혁명적인 개념의 사용에 대해서 그리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는 플랑크 자신도 1906년까지도 자신의 이론에 함축되어 있는 양자불연속성 개념에 대해서 확신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08년 당대에 가장 권위가 있었던 물리학자였던 로렌츠는 로마의 제 4차 수학자 회의에서 행해진 일련의 강연에서 이전의 그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고전전자기학적인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레일리-진즈 법칙을 이론적으로 유도했다. 이 때 로렌츠는 빈-플랑크 식과 레일리-진즈의 복사식을 비교하면서 레일리-진즈의 이론이 빈-플랑크의 이론보다 훨씬 더 우수하다고 주장했는데, 이 사건이 과학자들이 양자불연속 개념을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변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로렌츠의 이런 주장은 당시의 과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미 빈-플랑크 법칙이 실험적으로 잘 맞고 반면에 레일리-진즈 법칙이 실험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빈, 오토 룸머, 프링스하임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은 로렌츠의 이 예기치 못했던 주장에 대해 격렬한 항의를 하게 된다. 이런 거센 항의가 있은 뒤 로렌츠는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였고, 이 시기를 전후해서 플랑크는 처음으로 자신의 양자불연속 개념을 분명하게 주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의 새로운 복사 이론

1908년 빌헬름 빈, 오토 룸머, 프링스하임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이 로렌츠의 주장에 대해서 거센 반발을 한 뒤 빈-플랑크의 복사법칙이 실험적 사실과 부합된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지만, 이것으로 빛이 입자라는 견해가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로렌츠가 레일리-진즈의 공식을 옹호했을 때 이것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했던 실험물리학자들인 오토 룸머와 프링스하임도 빈-플랑크 복사식을 실험적 사실로 받아들인 것이었지 빛의 입자론 자체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열복사 이론의 당사자였던 막스 플랑크 역시 1908년 이후에도 양자 가설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1910년 플랑크는 자신의 열복사 이론이 지닌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열복사 이론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이론 속에 나타나는 플랑크 상수를 될 수 있으면 아주 보수적으로, 말하자면 절대적으로 꼭 필요한 경우에만 기존 고전 물리학 체계 내에서 변화를 주는 식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1911년 플랑크는 전자기적인 공진자 표현 방식과 부합되는 자신의 새로운 복사론을 제안했는데, 이것을 1901년에 발표한 열복사 이론과 대비시켜 플랑크의 '두 번째 복사이론'이라고 부른다.

그의 새로운 복사이론에 의하면, 빛이 물질에 흡수될 때에는 연속적으로 변화하며, 반면에 빛이 물질에서 방출할 때에는 불연속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우스꽝스러운 설명이지만 플랑크로서는 수많은 고민을 한 끝에 얻은 결론이었다. 이것은 마치 사과나무에 걸려있는 사과를 흔들면 어느 높이에 이르러서 사과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현상과 유사한 것이었다. 물론 이때 사과가 갖는 운동에너지는 연속적인 에너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떨어지는 순간의 공진 주파수에 비례하는 불연속적인 에너지를 갖게 된다. 하지만 나뭇가지를 흔들 때, 즉 물질이 빛 에너지를 흡수할 때에는 연속적으로 흡수한다고 생각해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 플랑크의 생애를 통해 자주 등장하는 스타일처럼 보수와 진보가 함께 어우러진 에너지 불연속성에 대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막스 플랑크와 물리학의 혁명

막스 플랑크가 자신의 생애에서 보여주었던 양자 불연속성 개념에 대한 태도는 매우 복잡하다. 우선 작용 양자에 대한 개념을 제창해서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열었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이런 변혁이 혁명으로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즉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분야에서 나타난 혁명적 변화는 정작 창시자였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혁명이었다. 플랑크는 아주 보수적인 인물로서 본래 고전 물리학을 거부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과 관련이 있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던 인물이었다. 또한 고전 양자론의 시작을 알렸던 그는 고전 양자론의 발전과정에서 나온 마지막 산물인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비결정론에 대해서도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지난 세기말에 이룩한 플랑크의 혁명은 여러 가지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플랑크의 이 혁명은 물리학이 너무 완벽하게 완성되어 더 이상 할 일이 없을 것 같은 상태에서 나타났다는 것이다. 만약 플랑크가 뮌헨대학 시절 지도교수에게 설득되었다면 그는 새로운 혁명적 이론을

제기한 이론물리학자로 역사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더 이상 새롭게 할 일이 없는 것 같은 답답한 상황이 바로 혁명이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플랑크는 혁명적 이론을 제안한 다른 많은 과학자들과는 달리 그리 천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도 흥미롭다. 20세기 초 물리학 내의 혁명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실하게 일했던 대기만성형의 평범한 과학자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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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John L. Heilbron, The Dilemmas of an Upright Man, Max Planck as Spokesman for German Scienc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6). 존 L. 하 일브론(정명식, 김영식 옮김), 『막스 플랑크, 한 양심적 과학자의 딜레마』 (민음사, 1992).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과 그의 괴팅겐 학파는 양자역학을 비롯한 현대물리학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우선 막스 보른은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은 말할 것도 없고 상대론, 결정격자 이론, 광학, 충돌 현상에 관한 양자 이론, 양자역학의 수리화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1920년대에 그가 형성시킨 괴팅겐 학파는 괴팅겐 물리학의 황금 시대를 낳으면서 20세기 현대물리학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노벨상 수상자 가운데 오토 슈테른(Otto Stern, 1888­1969),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 ­1976),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 등은 그의 조교였으며, 막스 델브뤽(Max Delbrck, 1906­1981), 마리아 괴페르트-마이어(Maria Gppert- Mayer, 1906­1972)는 그가 지도하던 박사과정 학생들이었다. 노벨상 수상자 이외에도 프리드리히 훈트(Friedrich Hund, 1896­), 파스쿠알 요르단(Pascual Jordan, 1902­1980), 앨재서(Walther Elssser, 1904­1991), 오펜하이머(J. Robert Oppenheimer, 1904­1967), 빅토르 바이스코프(Victor Weisskopf) 등 20세기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많은 물리학자들이 그의 밑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괴팅겐 수학 전통과 상대론

막스 보른은 1882년 12월 11일 지금은 폴란드 영토이나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브레스라우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구스타프 보른(Gustav Born)은 해부학 교수였으며, 그의 어머니 마가레트 보른(Margarete Born)은 슈레지엔 지방의 산업 자본가의 딸이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강한 학문적 분위기를 갖춘 교양 있는 집안에서 자란 그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 1900년부터 자신의 고향인 브레스라우에서 대학공부를 시작했던 그는 그후 하이델베르크, 취리히 등을 옮겨다니며 공부하다가 마침내 1904년부터는 당시 세계 수학의 메카였던 괴팅겐에서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괴팅겐에는 펠릭스 클라인 (Felix Klein, 1849­1925),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 등 당대의 쟁쟁한 수학자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수학이외에도 수학을 물리학, 천문학, 지구과학 및 공학에 응용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당시 괴팅겐 수학자들은 이제 물리학은 너무 어려워져 물리학의 발전을 물리학자들에게만 맡길 수가 없으며, 수학자들이 적극적으로 물리학을 배워 이 분야의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3년부터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카를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 1873­1916), 그스타프 헤어글로츠(Gustav Herglotz, 1881 ­1953), 에밀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 좀머펠트(Arnold Sommer- feld, 1868­1951) 등과 함께 로렌츠와 푸앵카레에 의해 발전된 전자론을 공부해서 새로운 전자론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역학과 전자기학을 통일하는 새로운 전자론을 수학적인 방법으로 찾고 있었는데, 민크프스키가 4차원 시공세계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힐베르트가 아인슈타인보다 조금 먼저 변분법(calculus of variations)을 이용해서 일반상대성 이론에서 등장하는 장 방정식을 얻어낸 것도 이런 연구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른은 처음에는 수학을 공부하였으나 박사학위를 받은 뒤로는 그 연구 분야를 바꾸어 본격적으로 이론 물리학을 연구했다. 막스 보른 역시 전자론으로 박사학위를 하고 싶었지만, 클라인의 요구 때문에 탄성체의 안정성 문제를 변분법으로 해결하는 것으로 박사 논문을 완성해야만 했다. 박사 학위를 마친 뒤인 1907년 4월 보른은 물리학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케임브리지로 가서 J. J. 톰슨, 조지프 라모(Joseph Larmor, 1857­1942) 등으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하지만 실험에 대한 무지와 기술적 지식의 부족 때문에 그의 케임브리지의 교육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1907년 8월 대륙으로 건너온 보른은 마침내 수학을 포기하고 물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정한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 고향인 브레스라우의 오토 룸머(Otto Lummer, 1860­1925)와 에른스트 프링스하임(Ernst Pringsheim, 1859­1917)의 실험실에서 조수로 일하면서 흑체 복사에 관한 실험을 했지만, 이것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실험 물리학 분야에서 실패를 한 뒤 그는 상대론적 전자론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다시 괴팅겐의 민코프스키와 연결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괴팅겐으로 돌아온 보른은 민코프스키와 활발한 협동 작업을 통해 이제 막 제안된 민크프스키의 4차원 시공 세계를 보다 확장하는 연구를 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괴팅겐으로 돌아오자 얼마 안되어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는 바람에 민코프스키와 보른 사이의 기대되었던 협동 작업은 무산되고 말았다.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 보른은 괴팅겐에서 상대론적 강체 이론에 바탕을 둔 전자론에 관한 자신의 교수자격 논문을 완성했다. 이 논문은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논의였다. 이 때부터 보른은 될 수 있으면 경험적, 실험적 자료가 많은 물리학적 문제를 선택하여 수학적으로 아주 엄밀하고 일반적인 해를 구한다고 하는 수학적이고도 형식주의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는 자칫하면 물리개념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는 반면, 만약 문제 자체가 정확하게 설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계획의 진전이 대단히 크다고 하는 장점도 있었다.

1909년 보른은 상대론적 강체 개념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전자론을 제안했다. 보른의 이 논문에 대해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 1880­1933)는 보른의 이 정의는 물체가 한 축을 중심으로 회전을 할 경우에는 곧바로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했다. 상대론에 의하면 강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골자로 하는 이 지적은 곧바로 학자들 사이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1911년 뮌헨에 있던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가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모든 강체는 무한히 많은 자유도를 갖기 때문에 강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이 논쟁은 막스 보른의 패배로 종식되었다. 이 당시 라우에가 집필한 상대성 이론에 대한 책은 많은 사람들에게 교과서적으로 활용되었고 이 때부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분명한 형태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해되었던 것이다.

고체 비열 및 결정 격자 이론

상대성 이론 분야에서 학문적 패배를 맛 본 보른은 1912년부터 자신의 연구 영역을 상대론 분야에서 고체 비열 분야로 바꾸었다. 보른이 이렇게 연구 분야를 바꾼 이유는 상대론 분야가 자신의 역량에 비해 너무 어렵고 통상적인 물리학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특히 관찰 자료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보른은 이후에도 수많은 관찰 자료가 존재하는 분야를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다루는 학문적 스타일을 유지하게 되는데, 고체 비열 및 광학 분야는 보른의 이런 성격에 가장 부합되는 분야였다.

1907년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의 복사 법칙을 고체 비열에 대한 연구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이론에서는 온도가 절대온도 0도에 가까워지면 고체의 비열이 0으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물리화학자였던 네른스트(Walther Nernst, 1864­1941)는 절대 온도 0도 근처의 저온에서 고체의 비열을 실험적으로 측정한 뒤 이 경험값을 만족하는 고체 비열식을 얻어냈다. 고체 비열에 대한 완전한 설명은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 보른, 카르만(Theodore von Krmn, 1881­1963) 등에 의해서 얻어졌다. 1912년 괴팅겐 대학에서 함께 사강사로 있던 보른과 카르만은 결정격자 가정을 바탕으로 해서 고체 비열을 유도하는 완전한 식을 유도하려고 시도했다. 1912년 3월 20일 보른과 카르만이 자신들이 완성한 논문을 저널에 기고하기 약 열흘 전에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는 베른에서 열린 스위스 물리학회에서 내용상 이와 유사한 발표를 했다. 이 강연에서 드베이어는 낮은 온도에서 에너지가 절대온도의 4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을 간단한 형태로 보여주었다. 보른과 카르만이 고체를 결정격자로 본 반면에 드베이어는 분자 격자의 스펙트럼 내에 있는 고유 진동수의 상대적 밀도를 연속적인 탄성 매질의 탄성 진동수의 분포와 같다고 보고 문제를 해결했다. 따라서 드베이어의 방법이 훨씬 간편한 것이었다. 하지만 기술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보른과 카르만의 방법이 더 일반적인 것이었다. 아무튼 드베이어는 발견의 우선권을 인정받았고, 이에 따라 현재 고체 물리 교과서에는 드베이어의 방법이 일반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드베이어에게 고체 비열에 관한 발견의 우선권을 놓쳤지만 보른은 공간 격자의 진동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로 자신의 이론을 확장시켜나갔다. 이리하여 1915년 보른은 p개의 원자로 이루어진 결정의 탄성 스펙트럼이 3개의 음향 진동과 3(p-1)개의 광학 진동으로 나누어진다는 것을 분명하게 유도했다. 보른은 고체 비열에 대한 자신의 논문을 완료한 뒤 결정의 모든 성질을 격자 구조와 전자기력에 의해서 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커다란 연구 계획을 수립하여 자신이 양자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1922년까지 이 분야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시기에 보른은 결정 격자에 관한 연구뿐만이 아니라 액정의 광학적 성질을 비롯한 고체, 액체, 기체의 광학적 성질에 관한 논의를 아주 꼼꼼하고 일반적인 수학적 방법으로 전개했다. 이 시기에 보른이 다루었던 주제는 훗날 『광학』이라는 책에서 논의되어 현재까지 많은 물리학자들에 의해 애용되는 고전적 저작이 되었다.

막스 보른과 고전 양자론

1918년 초부터 막스 보른은 보어와 좀머펠트의 고전 양자론과 연관된 연구를 진행했다. 우선 그는 수소, 산소, 질소와 같은 분자에서 발생하는 레일리 산란을 논의하면서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이용했다. 1918년 말 보른은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이용해서 염화나트륨의 압축률을 계산하다가 고리 모형의 보어-좀머펠트가 지니는 문제점을 발견했다. 이후 보른은 전자들이 평면상에만 자리잡고 있던 기존의 고리 모습의 원자 모형을 폐기하고 3차원 공간에 퍼져 있는 공간적인 모형을 제안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보른은 고체 결정 상태에 대한 자신의 책에 주력하는 한편 고전 양자론도 서서히 다루기 시작했다. 이미 1921년 보른은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천체 역학에서 사용하는 건드림이론(Strungstheorie)을 이용해서 비조화진동을 가진 역학 체계에 대한 고전 양자론을 전개했다.

1921년 막스 보른은 자신의 친구이며 실험물리학자였던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와 함께 괴팅겐 대학 물리학과 교수가 되었다. 1920년대 괴팅겐 물리학의 황금 시대는 바로 이 두 물리학자들에 의해 펼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보른은 될 수 있으면 많은 경험적 자료가 있는 분야를 일반적이고 체계적인 수학적 방법론으로 연구하는 학문적 스타일을 지닌 학자였다. 프랑크는 당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양자론과 연관된 수많은 실험자료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이 자료는 막스 보른이 일반적인 양자역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이외에도 힐베르트 역시 양자론에 관한 강의를 통해 양자역학의 수리적 공리화를 비롯해서 양자역학을 체계화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22년 6월 12일에서 22일까지 보어는 괴팅겐에서 양자론과 관련된 최근의 성과에 대해서 의미 있는 강연을 하였다. 훗날 보어 축제(Bohrfest)라고 이름이 붙어진 이 강연에는 보른, 프랑크, 훈트, 요르단, 하이젠베르크, 파울리, 렌츠, 란데, 게를라흐, 좀머펠트 등 훗날 양자역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많은 과학자들이 참가했다. 보어 축제 이후 보른은 고체 결정 격자 이론보다는 양자론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괴팅겐에서 보른은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노르트하임(Lothar Nordheim) 등 우수한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푸앵카레와 보린(Petrus Theodor Bohlin, 1860­1939) 등에 의해서 개발된 천체 역학적 이론을 이용해서 보어의 원자론을 다전자 체계로 확장하는 프로그램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파울리와는 세차운동에 의해 생기는 '고유 겹침'(intrinsic de- generacy)을, 하이젠베르크와는 전자들의 질량이 서로 같아 위상 관계가 생기는 '우연한 겹침'(accidental degeneracy)을, 노르트하임과는 수소 분자 등에서 장미꽃 형태의 괘도로 나타나는 '경계 겹침'(limiting degeneracy)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다전자 체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겹침 현상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했던 이들의 연구 결과 헬륨이나 수소 분자의 에너지 값이 보어 원자론에 의해서 예측된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결과적으로 고전양자론의 한계를 결정적으로 밝히게 되었다. 그 뒤 보른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고전양자론이 아닌 새로운 역학체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새로운 양자역학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렬역학의 전개 과정

1924년부터 보른은 기존의 고전양자론을 포기하고 일반적 모습을 갖춘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를 찾아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보른은 양자 현상에서는 정상상태 사이의 에너지 차이가 진동 주파수에 비례하는 것에 주목했다. 보른은 이 관계가 차분 방정식에서 쓰는 방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느끼고, 고전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몇몇 미분 방정식들을 차분 방정식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새로운 양자역학의 체계를 찾아나갔다. 즉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나오기 이전에 보른은 차분 역학(difference mechanics)이라는 새로운 양자역학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른은 이 차분 역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비주기적 과정(non-periodic process), 즉 충돌현상에 관한 양자론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보른이 추진하던 이 차분 역학은 발전 속도가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새로운 양자역학의 돌파구를 마련해준 사람이 바로 괴팅겐 대학에서 보른의 사강사로 있었던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1925년 7월 파울리와 보어와의 대화를 통해 새로운 역학체계인 행렬역학의 기본적인 개념틀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이 역사적인 논문에서 그가 사용한 상징적인 곱셈이 수학적으로는 행렬의 곱셈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이 바로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서 성장했던 막스 보른이었다. 즉,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을 살펴본 뒤, 하이젠베르크가 사용한 상징적 곱셈이 바로 자신이 대학시절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었던 일종의 행렬곱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상징적 곱셈이 행렬 곱셈이라는 예감을 느낀 뒤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발전시키고 양자역학을 체계화하기 위해 공동연구자를 찾았다. 보른이 처음으로 접촉했던 사람은 보른의 조교였으며, 당시에 배타원리를 찾아내 승승장구하고 있었던 파울리였다. 하지만 파울리는 보른이 하이젠베르크의 독창적 생각을 수학으로 망쳐버린다고 하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임에 따라 자신의 밑에서 박사학위를 한 요르단에게 이 행렬역학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자는 제안을 했다. 이리하여 보른과 요르단은 하이젠베르크의 생각을 행렬역학으로 발전시키는 논문을 공동으로 발표하게 된다. 보른은 자연법칙은 수학적으로 불변량에 의해 표현된다는 것에 대해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이젠베르크가 발견한 상징적 곱셈이 행렬 교환식으로 구성된 2차 형식(quadratic form)의 불변량(invariance)에 의해서 표현된다는 것을 발견한 뒤 매우 기뻐했다. 더 나아가 1926년 초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은 서로 힘을 합쳐서 소위 '3인 논문'(Drei-Mnner-Arbeit)을 출판했는데, 이 논문의 출현과 함께 1926년 초 뒤늦게 행렬역학의 가치를 인정한 파울리가 수소의 발머계열식을 행렬역학적인 방법으로 성공적으로 풀어냄으로써 행렬역학은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다.

'3인논문'에서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더욱 깊게 고찰하여, 힐베르트 공간(Hilbert Space), 선형변환에 있어서의 주축변환, 에르미트 행렬 등과 같은 수학적 개념을 행렬역학에 도입했다. 또한 자신이 양자론 분야에서 발전시킨 근사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양자역학에 대한 체계적인 근사 이론을 발전시켰다. 보른이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양자역학의 수학적 표현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괴팅겐에서 힐베르트와 클라인 등으로부터 선형 대수와 관련된 수학을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이었다. 더 나아가 보른은 1925년 겨울 미국에서 강연을 하는 동안 미국의 위너(Nobert Wiener, 1894­1964)와 함께 연산자 역학(Operator Mechanics)이라는 새로운 수학적 방법론도 발전시켰다. 이렇듯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에는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서 성장했던 보른의 역할이 컸다.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

행렬역학이 완성되고 있는 동안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을 완성시켰다. 새로운 파동역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함수의 제곱이 실제 전자의 밀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이런 연속체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프랑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여러 실험을 통해서 양자비약을 실험적 사실로 믿고 있었던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충돌과정을 설명하는 데 이용하면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통계적이고 비인과적으로 해석했다. 즉,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의 제곱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른 입자들과 서로 충돌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한 상태, 즉 확률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양자론의 논의 과정에서는 '우연'이 어쩔 수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아인슈타인에 의해서 감지되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던 적이 있었다. 이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빛이 모든 방향으로 향하는 구면파 형태로 방출되지 않고 마치 바늘과 같이 어느 특정한 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즉 아인슈타인은 현재 상태의 양자론으로는 빛이 어느 방향으로 방출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우연'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볼 수 밖에 없고, 바로 이 '우연'에 의해서 복사 방향이 결정된다는 것이 자신의 이론이 지닌 최대의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1926년 양자 충돌 이론을 연구하던 막스 보른은 바로 아인슈타인이 약점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던 이 논문을 근거로 해서 자신의 양자역학에 관한 통계적 해석을 전개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물리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이론 내에서 존재하는 극복되어야 할 약점으로 본 것을 보른은 실험적 사실에 바탕한 이론적 실재로 보면서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제창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른의 이 통계적 해석은 충돌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또한 에너지에 국한된 지극히 수학적인 것이었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개념에까지 확대되는 해석은 아니었다. 즉 오늘날 물리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논의인, 전자의 위치 내지 운동량을 발견할 확률이라는 개념은 실상은 파울리가 처음 제안했던 것이다. 보른의 통계적 해석이 나오자 이것을 상당히 의미 있는 발견이라고 생각했던 파울리는 1926년 10월 19일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에서 보른보다도 분명한 형태로 양자역학에 대한 통계적 해석을 구체화시켰다. 더욱이 이 편지에서 파울리는 '우리는 운동량이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위치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운동량과 위치의 눈을 동시에 뜨면 틀리게 된다'고 말했는데, 바로 이 내용에 불확정성 원리의 핵심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편지를 받은 뒤 얼마 안되어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했다. 보른의 제자였던 요르단은 양자역학의 통계적 성격을 브라운 운동에 의해 나타나는 어쩔 수 없는 측정 오차의 한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 나타나는 불확실성은 이보다 더욱 근본적이라는 것이 하이젠베르크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곧이어 등장하는 보어의 상보성 원리는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해석인 코펜하게 해석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리하여 보른에 의해 시작된 비결정론적 세계관은 양자역학의 핵심적 해석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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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닐스 보어(Niels Bohr, 1871∼1937)가 제안한 새로운 원자론은 현대물리학의 한 축을 이루는 양자역학 출현에 커다란 역할을 했을 뿐만이 아니라 원소의 주기율표에 대한 현대적인 이해를 하는 데 초석이 된 이론이었다. 이 보어의 원자론은 고전전자기학적 논의와 새로운 양자론적 논의가 서로 혼합된 것으로서 훗날 양자 상태 개념과 파울리의 배타원리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무엇보다도 원자의 분광학적 현상을 설명하는 데 더 없이 좋은 도구가 되었다. 1923년부터 보어와 좀머펠트에 의해 발전된 고전양자론은 위기를 맞이하고 그 뒤 1925년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1926년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에 의해 대체될 때까지 보어의 원자론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과도기적 이론이었던 것이다.

19세기말부터 과학자들은 원자의 구조와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을 설명하기 위한 다양한 모형을 개발했다. 1903년 5월 도쿄 대학에서 열린 도쿄수학물리학회에서 나가오카 한타로(長岡半太郞, 1865∼1950)는 소위 토성 원자 모형을 발표했다. 하지만 양전하가 중앙에 있고 그 주위를 전자들이 고리 모양으로 돌고 있는 이 토성 원자 모형은 역학적 불안정성 때문에 나오자마자 심한 비판에 부딪혀 폐기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말부터 다양한 형태의 원자 모형을 고안해나가고 있었던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이 토성 원자 모형이 지니는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와는 다른 새로운 원자 모형을 찾아나갔다. 우선 그는 양전하가 원자 전체에 걸쳐 있고, 전자들이 양전하 안과 밖으로 돌아다니며 돌고 있는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이 모형을 흔히들 건포도 모형이라고 부르는데 톰슨이 받아들였던 여러 모형들 가운데 하나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톰슨의 원자 모형은 토성 원자 모형에 비해 역학적인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톰슨은 자신의 이 원자 모형으로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 등 화학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1911년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 ∼1937)는 섬광계수기를 이용한 알파 입자 산란 실험을 통해서 톰슨의 모형과는 다른 소위 러더퍼드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러더퍼드 원자 모형은 나카오카 한타로의 토성 원자 모형을 다시 부활시킨 것으로 이 모형이 지니고 있던 가장 커다란 문제점인 역학적인 불안정성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하는 보어는 러더퍼드 모형이 지니는 이 역학적인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안했다기보다는 오히려 톰슨의 원자 모형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아이러니컬하게도 러더퍼드 원자 모형을 옹호하는 개념을 발전시키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정상 상태 개념과 양자화된 궤도를 가정하는 보어의 원자 모형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보어의 원자 모형과 초기 반응

닐스 보어는 수소의 스펙트럼에 관한 놀라운 주기적 법칙인 발머 계열에 관한 식이 나타난 해인 1885년 10월 7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1903년 코펜하겐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보어는 1907년 물의 표면장력에 관한 논문으로 덴마크 왕립 과학 및 인문 아카데미에서 금메달을 받는 등 학창 시절부터 물리학 분야에서 탁월성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코펜하겐 대학에서 보어는 당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금속내의 전자이론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시작했고, 이것을 확대해서 1911년 자신의 박사논문을 완성했다. 이 연구에서 보어는 당시 맥스웰과 로렌츠에 의해서 대표되었던 고전 전자기학만으로는 금속 내의 전자이론이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그 해 보어는 전자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는 J. J. 톰슨과 물리학에 대해서 토론해 보기 위해서 박사 연구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로 갔다. 케임브리지에서 톰슨은 보어를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다. 하지만 그의 서투른 영어 실력과 톰슨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보어는 톰슨과 함께 연구를 하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할 수 없이 맨체스터에 있던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1913년 보어는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의 새로운 원자모형과 플랑크,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그리고 선스펙트럼에 관한 발머 계열식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원자모형을 제안하게 됐던 것이다.

톰슨의 원자모형에 대한 보어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원자모형은 기본적으로 톰슨의 연구계획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톰슨은 멘델리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주기율표에 의해서 표현되는 화학원소의 주기적 성질에 관한 설명을 찾고 있었는데, 보어의 원자모형도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추구되었던 것이다. 톰슨의 열광적인 숭배자였던 보어는 화학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관한 설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13년 초에 우연히 발머계열에 관한 식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매우 형식적이고도 실용적인 입장에서 원자 내의 전자들은 양자화된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궤도만을 허용한다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자신의 원자모형을 제안했던 것이다.

1912년 7월 6일 보어가 러더퍼드에게 보낸 소위 '러더퍼드 비망록'(Rutherford- Memorandum)을 살펴보면 이때부터 보어는 막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이 제안한 복사 메커니즘을 다양한 화학 원소에 관한 실험적 사실과 연결시킬 수 있는 가설을 선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보어는 전자의 복사 에너지를 전자의 회전 주기와 연결시키는 식을 찾기 시작했다. 애초에 보어는 무한히 먼 곳에서 전자가 날아와 원자의 주위 궤도에 포획되면서 빛 에너지가 방출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착상으로 보어는 전자의 운동에너지가 복사에너지의 1/2이 되는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던 것이다.

1913년 내내 출판된 "원자 및 분자들의 구성에 관해서"라는 삼부작의 성격의 논문은 보어의 원자 모형의 역사적 발전에 내포된 다양한 단계들을 드러내고 있다. 우선 맨 처음 논문인 제 1부에는 우리가 현재 물리학 개론 교과서에서 보고 있는 형태의 논의가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보어는 발머 계열식을 이용하는 방법 뿐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방식으로 복사에너지와 운동에너지와의 관계에 대한 연관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우선 첫 번째 방법은 1912년에 러더퍼드 비망록에서 논의했던 방법에 의해서 자신의 결과를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보어가 제안한 양자화된 궤도에 대한 논의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어가 고전적인 방법에 의해 자신의 결론을 합리화하려고 했던 시도였다. 즉 발머 계열식을 이용한 방법은 양자화된 궤도를 이용한 현대적인 방법에 의한 합리화였다면, 러더퍼드 비망록 방법은 고전적인 전자기학에 입각한 합리화였던 것이다. 토머스 쿤(Thomas S. Kuhn, 1922∼1996)은 보어가 초기 자신의 원자 모형을 창안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고전과 현대를 무의식적으로 오간 것을 보고, 마치 과학혁명기에 케플러가 전통과 혁신 사이를 오간 것과 같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 번째 방법을 보면 전통과 혁신을 오가는 보어의 태도가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보어는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양자화 조건에 의해 계산한 값이 양자수를 무한대로 크게 할 때 고전적인 양으로 계산한 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였다. 이 방법은 훗날 보어의 대응이론이라는 형태로 일반화되는데, 양자화 조건을 이용한 결과를 항상 그 극한에서 고전적인 양과 비교했다는 점에서 보어의 보수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쿤이 말한 전통과 혁신 사이의 갈등 국면도 잘 보여주고 있다.

2부와 3부는 나중에 출판이 되었지만 사실상 먼저 쓰여진 원고였다. 이 부분에서 보어는 원소와 분자들의 주기율 체계를 다룬 톰슨의 연구 프로그램과 유사한 테마를 다루었는데, 이 부분의 논의는 의심할 여지없이 모형에 의한 설명을 강조했던 케임브리지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1부는 매우 정량적으로 쓰여진 데 반해서 2부와 3부는 정성적으로 쓰여진 것이었다. 따라서 모형에 의한 설명을 바탕으로 해서 정성적인 형태로 쓰여진 이 부분은 훗날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되며 결과적으로 보어에 의해 시작된 고전 양자론의 위기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처럼 실제 내용상으로 볼 때 초기의 보어의 원자모형은 상당히 엉성한 것이었고, 따라서 정량적이라기보다는 정성적인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 이런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 마델룽(Erwin Madelung, 1881∼1972), 보른(Max Born, 1882∼1970)과 같은 당시 대륙의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이 보어의 원자모형에 대해서 깊은 회의를 나타냈었다. 보어의 동생이며 1913년 가을 괴팅겐에 머물고 있었던 하랄 보어(Harald Bohr, 1887∼1951)는 자신의 형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사람들은 형의 논문에 대해 많은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 --- 힐베르트는 제외하고라도 --- 보른, 마델룽과 같은 젊은 과학자들은 그것을 객관적 사실로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그 가정이 너무 '대담하고' '환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머펠트 역시 1913년 9월 4일 보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도 몇 년 전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왔지만 현재로서는 보어의 시도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좀머펠트의 일반화된 양자조건

이렇게 초기에 맞은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원자 모형이 수용되는 데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전쟁이 터지자 많은 과학자들이 전쟁터로 나가게 되어 정상적인 과학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이 와중에 많은 약점을 내포하고 있던 보어의 원자 모형은 자신의 체계를 정비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게 되었던 것이다. 보어의 원자 모형이 재정비되는 데에는 처음에는 보어의 원자 모형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던 좀머펠트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좀머펠트는 나이가 많아 전쟁에 동원되지 않았고, 대학에 남아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15년과 1916년 사이에 좀머펠트는 보어의 원자론에 타원궤도와 자신의 새로운 양자조건을 도입하여 수소원자의 미세구조를 해명하고, 수소 스펙트럼 문제를 거의 환상적일 정도로 정확히 풀어내었다. 보어의 원자이론은 이런 다음에야 비로소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보어-좀머펠트 모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되게 된다.

좀머펠트가 새로운 양자 조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 전에 보어의 이론을 확장하는 양자 조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두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 논문들이 독일에서 유통될 수 없었다. 우선 1915년 4월 4일 일본 도호쿠 대학의 물리 연구소의 이시와라 준(石原純)은 도쿄 수리물리학회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좀머펠트 양자조건과 유사한 논의를 전개했다. 이보다 앞선 1915년 3월 런던의 킹스 칼리지의 윌리엄 윌슨(William Wilson, 1875∼1965) 역시 좀머펠트와 유사한 양자 조건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었다. 이들 논문들은 서로 독립적으로 발표되었고, 전쟁으로 인해서 서로 교류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이 세 논의 가운데 좀머펠트의 논의가 가장 체계적이고 확실하게 발전되어 새로운 양자 조건을 보어-좀머펠트 양자 조건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914년 제임스 프랑크(James Franck, 1882∼1952)와 구스타프 헤르츠(Gustav Hertz, 1887∼1975)는 전자를 수은 증기의 원자에 충돌시키는 실험을 했다. 이 실험에서 프랑크와 헤르츠는 수은 원자가 4.9 eV 만큼의 에너지를 단계적으로 흡수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소위 프랑크-헤르츠의 실험은 보어의 원자 모형을 확증하는 실험으로 많은 교과서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1914년 당시 프랑크와 헤르츠는 보어의 정상 상태에 대한 개념을 알지 못한 채로 이 실험을 했다. 즉 프랑크와 헤르츠의 실험은 전자와 원자의 충돌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것으로 보어의 학문적 네트워크와는 다른 연구 전통 내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19년 프랑크와 헤르츠는 보어의 원자 모형에 대한 논의를 접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의 실험이 바로 보어의 원자 모형을 확증하는 실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튼 1925년 프랑크와 헤르츠는 보어의 원자 모형을 실험적으로 확증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공간 모형과 보어의 두 번째 원자론

1914년 모즐리(H.G.J. Moseley, 1887∼1915)는 원자번호를 질량이 아닌 하전량에 의해서 재정의하면서 러더퍼드와 보어의 새로운 원자 모형을 이용했다. 모즐리의 분광학적 논의가 확산되면서 러더퍼드와 보어의 원자 모형도 함께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모즐리는 X-선 분광학을 다루면서 주로 원자 내의 가장 안쪽의 전자들에 의해 발생하는 K-고리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모즐리의 논의는 곧 발터 코셀(Walther Kossel, 1888∼1956)에 의해 그 다음의 전자 고리인 L-고리에 관한 논의로 확장되면서 보어의 고리 모양의 원자 모형은 점차로 발전되어 갔다. 더 나아가 코셀은 K-이중상태(doublet)와 L-이중상태의 차이가 서로 같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발견했는데, 코셀이 경험적으로 발견한 이 동등성은 곧 좀머펠트에 의해 이론적으로 설명되었다. 좀머펠트는 X-선의 진동수를 계산할 때 상대론적 보정을 고려해서 이 양이 서로 같음을 이론적으로 보일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좀머펠트는 각 전자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는 '타원연합체'(Ellipsenverein) 방식의 원자 모형을 제안했다.

전쟁 중 좀머펠트에 의해 보어의 원자 모형이 일반화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좀머펠트가 제안한 일반화된 양자 조건과 상대론적 논의를 이용해서 원자구조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하지만 믿음이 커가면서 문제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머펠트가 보어의 원자이론을 일반화하여 X-선 스펙트럼 분야에서 혁혁한 성공을 이루어 내자, 많은 과학자들이 보어-좀머펠트 모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어-좀머펠트 고리 모형이 지니는 새로운 문제점도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애초에 보어와 좀머펠트가 제안한 원자 모형은 2차원 평면 위해서 도는 고리 모형이었고, 아직 3차원적 모형은 고려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보어-좀머펠트 모형을 적용하는 과정에서 3차원적 모형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1918년 막스 보른은 보어-좀머펠트의 원자 이론을 이용하여 염화나트륨(NaCl)의 압축률을 엄밀하게 계산했다. 이 때 보른은 계산과정에서 전자의 궤도가 평면상에만 위치하였던 보어-좀머펠트의 고리모형에 의한 압축률 계산이 실험치와 1/2씩 틀리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양이 정확하게 계산되기 위해서는 현대적인 스핀 개념과 스핀간의 커플링에 대한 고려가 필요한데, 그것은 양자역학이 완성된 1920년대 후반 이후에나 도입된 개념들이었다. 당시 보른은 보어-좀머펠트 모형이 지니고 있던 심각한 모순점을 지적했던 것이다. 그 뒤 보른은 전자들이 평면상에만 자리잡고 있던 기존의 고리 모습의 원자모형을 폐기하고 3차원 공간에 퍼져 있는 공간적인 모형을 제기했다. 이런 시도를 구체화해서 1918년 보른은 루이스의 원자가 가설과 유사한 것으로 코셀이 1916년에 제안한 원자가 가설을 결합해서 8개의 전자가 외각에 위치하고 있는 소위 '주사위형 원자모형'을 발표했다.

보른과 함께 3차원적 공간 모형을 개발했던 알프레트 란데(Alfred Land, 1888∼1975)는 보른의 3차원적 공간 모형을 더욱 발전시켜서 좀머펠트의 타원연합체 모형과 유사한 '다면체연합'(Polyederverband) 전자 궤도 모형이라는 동역학적인 모형을 제안했다. 보른과 란데가 제안한 연구 프로그램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1919년 1월 괴팅겐에 있던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 드베이어(Peter Debye, 1884∼1966) 등이 보른의 주사위형 원자 모형에 호감을 보였으며, 1919년 3월 17일 좀머펠트는 란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은 팬케이크와 같은 보어의 고리 모형보다는 란데의 주사위형 원자 모형을 더욱 좋아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좀머펠트는 란데가 제안한 공간 모형을 이용해서 자신이 그 동안 X-선 분광학에서 풀지 못했던 다양한 계산을 해보기도 했다.

1920년 이후에는 보어 자신도 자신이 초기에 제안했던 고리 원자모형의 한계를 인정했고, 이에 따라 3차원적인 전자배치를 가지게 되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발전시키게 된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보어는 자신이 1913년에 출판한 3부작의 2부와 3부의 논의를 더욱 확장시켜서 소위 보어의 '두 번째 원자론'을 전개했다. 이 두 번째 원자론에서는 보어는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와 단열원리(Adiabatic Principle)를 더욱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보다 심화된 원자 모형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대응원리는 1920년을 전후하여 보어가 자신의 초기 원자론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스펙트럼의 진동수 뿐만 아니라 그 강도에 대한 논의까지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제안했던 것이다. 미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새로운 양자이론은 그 극한에 있어서 거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기존의 고전역학과 일치한다는 이 원리는 보어의 1913년 논문에서 이미 그 맹아가 보였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보어는 1913년 논문에서 자신이 사용한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으며, 당시에 이것을 일반적인 논의로 확대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1920년 이후 보어가 세련된 형태로 제한한 이 대응원리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그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던 새로운 양자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아내는 데 좋은 도구가 되었다.

아무튼 1920년 보어가 전개한 두 번째 원자론은 고전양자론의 절정에 달하는 것으로 많은 과학자들이 이를 받아들였으며, 란데가 제안한 다면체연합(Polyederverband) 전자 궤도 모형도 보어의 이 두 번째 원자모형에 의해 흡수되게 된다. 이로써 1922년 말에 이르게 되면 보어-좀머펠트 고전 양자론은 원자 구조를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신뢰성 있는 이론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하나의 이론이 절정기에 도달했다는 것은 곧 쇠퇴가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1923년 초부터 보어-좀머펠트 모형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인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헬륨 문제와 고전양자론의 위기

우선 보어-좀머펠트의 고전 양자론은 헬륨 문제를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즉 보어의 원자론은 수소 원자 스펙트럼 문제는 아주 성공적으로 설명했으나, 이것이 그 다음으로 간단한 원소인 중성 헬륨 원자도 잘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1913년 보어의 초기 원자모형이 나올 당시 보어 자신도 중성 헬륨에 대한 논의를 했었지만, 그때에는 아직 그것을 확인할 실험적 결과가 충분하게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1920년경에 이르면 제임스 프랑크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헬륨원자의 이온화에너지를 비롯한 많은 실험적 결과들이 얻어졌다. 1920년대 초에 이러한 실험적 결과가 보어-좀머펠트의 고전양자론에 의한 이론적 결과와 부합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철저한 검토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이런 연구 프로그램은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속에서 성장한 막스 보른에 의해서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보어의 원자론이 그 다음으로 간단한 원소인 중성 헬륨 원자도 잘 설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920년대 초에 보른은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58), 파스쿠알 요르단(Pascual Jordan, 1902∼1980) 등과 같은 자신의 공동연구자와 함께 푸앵카레의 천체역학을 이용해서 이 어려운 삼체문제를 꼼꼼하고 일반적인 해법으로 풀어나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결과는 보어의 이론에 대해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다전자 원자 혹은 분자의 특성을 설명을 하는 데에는 보어의 원자론이 불충분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차원에서 제기되면서 1923년 초부터 고전양자론 내에 위기가 닥쳐오게 된다.

고전양자론 내의 위기가 오기 직전인 1922년 보어는 자신이 예언한 원소인 하프늄(Hf)의 발견 소식을 스톡홀름에서 전해 듣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보어와 함께 고전 양자론을 발전시키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던 좀머펠트는 수상의 기회를 놓치고 노벨상 수상자의 대열에서 빠지게 되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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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 뢴트겐에 의해 X-선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이 발견되고 뒤이어 베크렐에 의해 원자핵에서 나오는 자연 방사선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핵과학은 20세기초 30년 동안 하나의 새로운 학문 분야로 자리잡았다. 핵에서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와 핵변환에 대한 연구는 원자구조에 대한 인식을 넓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1930년대 말에는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으로 우리는 핵에너지를 실생활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핵물리학 분야는 또한 전기적 계수기, 이온화상자, 섬광계수기, 구름상자 등과 같은 다양한 새로운 실험 장치가 등장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알파입자의 산란을 비롯한 여러 충돌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새로운 양자역학의 유효성이 분명하게 확인되게 되었다.

자연방사선의 발견

자연 방사선은 1896년 초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Henri Becquerel, 1852∼1908)에 의해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그 해 2월 24일에 베크렐은 프랑스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실상 베크렐의 집안은 3대째 명문 공과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니크를 나와서 우수 연구소인 자연사 박물관에서 일했던 명문 과학자 집안이었는데, 그들은 대대로 분광학을 비롯해서 우라늄 화합물을 포함한 여러 물질들의 형광 현상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베크렐이 자연 방사성을 발견한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5월까지 계속된 연이은 발표로 베크렐은 투과성, 감광성, 이온화 성질 등 자연 방사선의 여러 성질들을 규명했지만, 그의 이러한 발견은 뢴트겐 광선과는 달리 많은 과학자들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이 새로운 광선에 주목했던 소수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폴란드에서 파리로 유학을 와서 젊은 과학자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 1859∼1906)와 이제 막 결혼을 한 뒤, 박사학위 논문 주제를 찾고 있었던 마리 퀴리(Marie Curie, 1867∼1934), 즉 마리아 스쿠오도프스카(Maria Skłodowska)였다. 퀴리 부인은 기존의 화학적 분석방법 외에 남편이 자신의 전문 연구 영역인 물성에 관한 연구 경험을 활용해서 만들어 준 검전기를 이용하는 새로운 분석방법을 사용해서 우라늄보다 강력한 방사성 물질을 찾아나갔다. 엄청난 양의 피치블렌드를 처리하는 고된 작업 끝에 마침내 1898년 퀴리 부부는 구스타브 베몽(Gustave Bmont)과 함께 비스무트와 유사한 폴로늄과, 바륨과 유사한 라듐이라고 하는 새로운 방사선 물질을 추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퀴리 부부 연구팀이 폴로늄과 라듐을 발견하면서 방사선에 관한 연구는 과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작업은 단순히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발견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러더퍼드의 방사선 연구

방사선 분야가 주요 관심 분야로 부상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이 방사선에 대해서 연구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뉴질랜드 태생으로 영국에서 공부한 뒤 1898년부터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McGill)대학에서 연구하고 있던 영연방 과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였다.

뉴질랜드의 넬슨 지방 근처에서 태어난 러더퍼드는 1887년 중등학교인 넬슨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 역사, 언어, 심지어는 축구에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 뒤 그는 크리스트처치의 캔터베리 칼리지에 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수학과 물리학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1892년 학사를, 그리고 이듬해인 1893년에는 석사를 했다. 뉴질랜드에서 러더퍼드는 독일의 과학자 헤르츠가 발견한 전자기파를 탐지하는 데 성공하는 등 실험 물리학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1895년 러더퍼드는 런던 국제 박람회 장학생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으로 건너 온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당대의 최고의 물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J. J. 톰슨(J. J. Thomson)과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는 처음에는 헤르츠의 전자파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우수한 논문을 기고해서 국제적인 학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95년 12월 뢴트겐이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을 발견하자 러더퍼드는 톰슨과 함께 이 광선이 하전입자를 발생시키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시작했다. 1896년 베크렐이 우라늄 방사선을 발견하자 러더퍼드는 곧 이 우라늄 방사선도 공기를 이온화시키는 것을 알아내었다. 1898년 맥길대학의 물리학 교수가 된 러더퍼드는 이곳에서 핵과학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화학자 슈미트(G. C. Schmidt)와 마리 퀴리는 서로 독자적으로 우라늄 이외에 토륨도 방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을 알아냈다. 러더퍼드는 이 토륨을 실험 대상으로 하고 방사성 물질이 일으키는 이온화를 측정하는 전기적 장치를 이용해 방사성에 관련된 실험을 했다. 이 전기적 실험 장치를 활용해서 러더퍼드는 1898년 방사선이 한 가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두가지 성질을 지닌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후 러더퍼드는 1902년까지 방사능 물질에서 방출되는 방사선이 얇은 물질막에 의해서 아주 쉽게 흡수되는 알파선, 음극선과 유사하고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베타선, 그리고 투과력이 매우 강하며 센 자장에 의해서도 휘어지지 않는 감마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구분은 퀴리부부를 비롯한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수용함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알파선이 헬륨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추측은 알파선의 입자적 성격이 확인된 뒤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계속 제기되었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1908년 경 러더퍼드와 한스 가이거(Hans Geiger, 1882∼1945)가 전기적 방법과 황화아연 결정을 이용한 섬광계수법을 각각 고안해서 이 두 방법 모두에 의해서 알파입자를 정확히 셀 수 있게 되고, 분광학적 방법에 의해 알파선이 헬륨이라는 것이 판명된 뒤에야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같은 해인 1908년 러더퍼드는 원소의 분열에 관한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이 아닌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현대판 연금술 핵이 변환되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개발된 민감한 전위계 역시 핵과학이 출현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01년 베를린의 돌레잘렉(F. Dolesalek)은 대단히 민감한 상한전위계(quadrant electrometer)를 개발했다. 당시까지 사용하던 톰슨의 상한전위계는 단지 0.1 볼트까지 측정할 수 있었다. 돌레잘렉은 전위계의 내부 커패시턴스를 크게 줄임으로써 전위계를 0.0001 볼트까지 측정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 민감한 전위계의 출현으로 러더퍼드와 프레드릭 소디(Frederick Soddy, 1877∼1956)는 원소의 핵변환과 관련된 현상을 측정할 수 있었다.

1902년 초 러더퍼드와 프레드릭 소디는 토륨의 방사성 활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회복되는 현상을 목격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토륨이 방사선을 내면서 더욱 강한 방사성을 지닌 토륨X로 변환된다고 하는 과감한 가설을 내세웠다. 즉 원소가 방사선을 방출하면서 새로운 원소로 변환한다는 것이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에서도 피에르 퀴리 팀이 이와 비슷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피에르 퀴리의 강한 실증주의적인 경향 때문에 원소 자체가 변환한다는 지극히 가설적인 생각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으며, 물질변환이 아니라 주로 방사성 원소가 방출하는 에너지에 대한 측정에 연구를 집중하고 있었다. 방사성 원소가 변환된다는 것이 확인되고, 이에 따라 생성되는 많은 방사성 물질이 연구되면서,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고 여겼었다. 당시에는 원소를 구분하는 것이 원자량의 차이에 의해서 정해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혼란은 1913년 방사성 원소와 그의 주기율 법칙과의 관계를 연구하던 소디가 핵의 전하량은 같지만, 원자량이 서로 다른 소위 '동위원소'라는 개념을 제기하고, 뒤이어 모즐리(Henry Gwyn Jeffreys Moseley, 1887∼1915)가 X-선 분광학을 바탕으로 해서 원자번호를 원자량이 아닌 핵의 전하량에 의해서 재정의하면서 점차로 해소되었다.

섬광계수기 방법의 발전

1903년 황화아연에 라듐에서 나오는 광선을 쏠 때 섬광이 나오는 현상이 발견되어 1930년대까지의 핵물리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실험 장치가 개발될 수 있었다. 1903년 3월 19일 윌리엄 크룩스(William Crookes)는 인광을 내는 황화아연 결정판에 라듐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부딪히게 하면 섬광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고 보고했다. 이 섬광 현상을 이용하여 라듐 방사선의 충돌 현상을 현미경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독일 볼펜뷔텔의 율리우스 엘스터(Julius Elster)와 한스 가이텔(Hans Geitel)은 거의 독립적으로 토륨 수산화물 주위의 대기 방사선이 황화아연 결정판에 부딪히면서 인광을 내는 것을 발견했다.

방사선이 알파 입자, 베타 입자, 감마선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한 과학자들은 황화아연 결정판을 이용해서 알파 입자의 본성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07년 러더퍼드는 캐나다에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섬광계수기를 이용한 알파 입자 산란 실험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908년 베를린 대학 물리연구소의 에리히 레게너(Erich Regener)는 섬광계수법을 이용해서 전하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했다. 이 실험은 황화아연판을 이용해서 알파 입자의 수를 세는 데 성공한 최초의 실험이었다. 1908년 2월 22일 베를린 오토 한(Otto Hahn, 1879∼1968)은 러더퍼드에게 레게너의 논문에 대해서 알려주었는데, 맨체스터에 있던 러더퍼드도 가이거와 함께 이미 이와 유사한 실험에 착수해 있었다.

섬광계수법에 의한 실험은 무척 지겨운 작업이었다. 우선 이 실험은 한 밤중에 암실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또한 관찰자는 암실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15분 뒤에 측정을 해야만 했으며, 섬광을 세는 것은 곧 눈을 피곤하게 만들기 때문에 러더퍼드와 가이거도 한 번에 2분 이상 작업할 수가 없었다. 알파 입자 산란 실험과 원소의 인공핵변환 실험과 같이 러더퍼드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은 바로 이런 힘겨운 작업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었다. 특히 러더퍼드의 공동연구원이었던 가이거는 이런 섬광계수법에 의한 실험 관찰에서 그야말로 천부적 재능을 지닌 학자였다.

한스 가이거는 1908년 러더퍼드와 함께 섬광계수법과 아울러 전기적 측정 방법을 동시에 개발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실험 장치를 개발해서 핵물리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학자였다. 1912년 독일에 건너가 제국물리기술연구소(Physikalisch- Technische Reichsanstalt)에 새로 설립된 라듐연구소 소장이 된 가이거는 이듬해인 1913년 알파 입자뿐만이 아니라 베타 입자를 잴 수 있는 '점단 계수기'(point counter)를 개발했으며, 1924년에는 보테(Walther Bothe, 1891∼1957)와 함께 베타입자와 감마선까지도 잴 수 있는 동시계수기를 발명하여 광양자의 존재를 확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28년 가이거는 발터 뮐러(Walther Mller)와 함께 아주 민감한 계수기인 소위 가이거-뮐러 계수기를 발명함으로써 1930년대 우주선 연구의 길을 열어 놓게 된다.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

한편 1909년 영국의 맨체스터에 있던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하던 한스 가이거와 어니스트 마스던(Ernest Marsden)은 황화아연 결정판을 이용한 섬광계수법을 이용해서 금속 판막에 알파입자를 충돌시킬 때 직각 이상의 각도로 확산 반사되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들의 실험으로 곧바로 원자구조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과학자였던 J. J. 톰슨은 이미 원자구껍질에 양전하가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고, 이곳을 음의 전하를 띤 전자가 움직이고 있다는 원자모형을 제기했었다. 1910년 캐번디시 연구소에 있던 크라우서의(J. A. Crowther)는 원자에 베타입자를 충돌시키는 산란실험을 실시해서 톰슨의 모형을 입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러더퍼드는 가이거와 마스던의 확산반사 실험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한편, 크라우서의 베타산란 실험도 비판적으로 점검했다. 이리하여 1911년 러더퍼드는 맨체스터 연구팀이 해낸 알파입자에 의한 실험의 결과를 종합하여, 원자의 중심의 아주 작은 영역에 양의 전하를 지닌 원자핵과 그 주위를 도는 전자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시했다.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은 1913년 가이어와 마스던이 했던 보다 정밀한 알파입자 산란 실험에 의해서 확증되었고, 더 나아가 보어의 원자모형에서 채택되어 이론 물리학 분야에서도 강력한 후원자를 얻었다. 결국 보어의 원자모형이 수용되는 과정은 러더퍼드의 원자모형의 수용과 한 배를 타게 되었던 것이다.

러더퍼드와 인공 원소 변환

1914년 마스던은 섬광계수기로 알파입자의 운동을 연구하는 실험을 하던 중, 대단히 빠르고 알파입자보다 멀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수소입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는 이것이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라듐C와 같은 방사성 물질에서 나오는 것으로 추정했다. 전쟁기간 중 러더퍼드는 틈틈이 마스던의 이 실험을 면밀하게 검토했는데, 1919년 그는 마스던이 관찰한 수소 입자가 방사성 물질에서 직접 나온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원소변환이 일어나 생긴 것이라고 하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게 된다. 즉, 라듐C에서 나온 알파입자가 공기중의 질소와 충돌해서 산소의 동위원소가 생기고 여기서 빠른 속도의 수소가 생겼다는 것이다. 핵변환은 이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1919년 톰슨이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을 하면서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 소장직을 사임하자 러더퍼드는 맨체스터에서 케임브리지로 옮겨와 톰슨의 뒤를 이어 이 연구소의 소장으로 취임했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는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 패트릭 블랙킷(Patrick M. S. Blackett, 1897 ∼1974) 등 우수한 젊은 과학자들을 끌어들여 캐번디시 연구소를 핵물리학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러더퍼드는 원소의 인공변환 실험을 계기로 소위 '러더퍼드의 핵자 위성 모형'을 발전시켰다. 즉 원자핵 속에서는 몇몇 작은 원자핵들이 서로 위성 운동과 유사한 복잡한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빠른 알파입자로 가벼운 원소의 핵에 매우 가깝게 접근시킬 때 이들 입자들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힘이 역제곱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것이 핵내부의 복합적인 구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외에도 그는 핵 내부에 전자가 양성자와 결합하여 중성을 나타낸다는 가설을 내어놓았는데, 이런 주장은 1932년 제임스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함으로써 비로소 완전한 모습을 띠게 된다. 양자역학이 발전함에 따라 핵자와 알파입자와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힘의 관계가 역제곱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핵자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니라, 고전역학에서 벗어나는 양자역학적 효과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으나, 러더퍼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양자역학과 핵물리학

러더퍼드의 주장과는 달리 핵의 붕괴현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 양자역학의 유용성은 점차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정되기 시작했다. 1928년 러시아의 젊은 과학자 가모프(George Gamow)는 핵 내부에서 빠져나오는 알파입자의 에너지가 핵자 내의 포텐셜 장벽에 비해서 상당히 낮은 것에 주목했다. 그는 이런 현상을 높은 에너지 장벽을 낮은 운동에너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양자투과효과로 해석함으로써 핵붕괴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로널드 거니(Ronald Gurney)와 에드워드 콘든(Edward Uhler Condon, 1902∼1974)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발표했다. 이들의 작업은 과학자들로 하여금 핵현상을 설명하는 데 새로운 양자역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핵 붕괴를 일으키는데는 반드시 커다한 에너지의 입자만이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실험물리학자들에게 인식시켜주어 핵물리학의 실험 방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926년부터 양자역학이 충돌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광범위하게 이용됐음에도 불구하고 러더퍼드는 이 새로운 시도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알파 입자 산란을 비롯해서 충돌 현상에서 양자역학의 유효성이 입증되는 데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의 도움이 컸다. 1928년부터 케임브리지의 모트(Nevill Francis Mott, 1905∼1996)는 미국 칼텍의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의 견해에 따라 충돌현상에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적용하여 알파 입자 및 전자의 산란 현상을 면밀하게 양자역학적으로 기술해나갔다. 1929년 모트는 보스-아인슈타인 통계를 이용해서 계산한 양자역학적 알파 입자의 산란값과 러더퍼드가 계산한 고전적인 산란값 사이에는 45°일 때 최대값 2의 비율로 차이가 나는 것을 계산했다. 모트의 계산 결과는 곧 러더퍼드의 밑에서 연구하던 캐번디시 연구원들이었던 블랙킷과 채드윅의 실험에 의해서 1930년 마침내 확증되었다. 이때 블랙킷은 자신이 1920년대를 통해서 계속 개량을 해오던 구름 상자의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확인했으며, 채드윅은 러더퍼드와 함께 측정을 계속해오던 섬광계수기 방법에 의해 이것을 입증했다. 러더퍼드가 말년에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핵물리학 분야에서의 양자역학의 유효성은 러더퍼드가 아닌 러더퍼드의 제자들에 의해 성공적으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러더퍼드는 물리학 현상을 설명하는 데 아주 간결하게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양자역학적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이 설명이 자신이 1911년 제안했던 원자 모형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매우 복잡한 내용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러더퍼드는 핵물리학 실험을 함에 있어서도 전자공학적 발전에 힘입은 전기적 계수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매우 지겹고 어렵지만 단순한 형태로 측정할 수 있는 섬광계수법을 선호했다. 복잡한 핵물리학 현상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도 러더퍼드는 항상 원자 현상에 대한 분명하고 단순한 설명을 추구했다. 이것은 1934년 엔리코 페르미가 중성자를 이용해서 인공적으로 다양한 핵변환을 일으키는 실험에 성공했을 때 복잡한 이론 물리학에서 벗어나 사실을 간단하게 설명하게 된 것을 축하한 태도에서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러더퍼드의 학문적 연구는 크게 1897년부터 1907년까지 캐나다 맥길 대학에서 주로 연구했던 방사선 및 핵변환 연구, 1907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 맨체스터 대학에서 수행했던 원자물리학 연구, 그리고 1919년 이후 죽을 때까지 소장직을 유지했던 케임브리지 캐번디시 연구소에서의 핵물리학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연구를 통해서 러더퍼드는 20세기 초 원자물리학과 핵물리학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러더퍼드는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오랜 동안 캐번디시 소장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것 뿐만이 아니라 물리학 연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면서 20세기 초 영국 과학계를 대변했다. 1921년부터 러더퍼드는 런던의 왕립연구소 자연철학 교수로 있으면서 대중들에게 다양한 강의를 하여 많은 반향을 받았다. 1925년부터 1930년까지는 왕립학회 회장직을 역임했으며, 그 다음에는 영국 과학산업연구부(Department of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의 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아 영국의 과학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대영제국에 대한 이런 공로로 그는 1914년 기사작위를 받았으며, 1931년에는 넬슨의 러더퍼드 남작(Baron Rutherford of Nelson)이 되어 귀족의 지위에도 올랐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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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의 생애 최대 업적은 1915년에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완성한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물리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개념인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의를 확장시켜 가속도의 경우도 다룰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등속도를 가속도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은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시키는 이론에서 중력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얻어내려는 아인슈타인의 의도는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무척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1907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이에 상응하는 기준좌표계의 가속운동이 완전히 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등가 원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후 아인슈타인은 등속도 운동만이 아니라 가속운동에도 적용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머나먼 학문적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1907년의 이 논문에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는 한편, 아직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고 초보적인 형태이지만 중력장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주장과 중력장 속에서 빛이 휘는 현상에 대한 논의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뒤 약 3년 반 동안 중력에 관한 논의를 더이상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주로 광양자 가설에 대한 논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광양자 가설은 광전효과를 설명하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회절과 간섭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광양자 가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중견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9년을 전후한 시기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몰두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잠시 중단되게 되었다.

오랜 침묵 끝에 1911년 6월 아인슈타인은 프라하에서 중력에 관한 논의를 재개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빛에 적색 편이가 생긴다는 것과 강한 중력장 부근에서 빛이 속도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1907년보다 훨씬 정확한 형태로 전개했다. 즉 여기서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전제가 되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빛의 속도가 강한 중력장 속에서 달라지기 때문에 호이헨스의 원리에 따라 강한 중력장 주변을 지날 때 빛이 휘게 되는 소위 중력 렌즈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해 2월 아인슈타인은 역시 프라하에서 가변적인 빛의 속도를 바탕으로 해서 뉴턴의 중력이론과 푸아송 방정식에 상응하는 정역학적인 중력장 이론을 제안했다. 여기서 그는 로렌츠 변환이 중력을 취급하는 데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중력장 방정식은 비선형 방정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12년을 전후해서 아인슈타인은 가속운동을 하는 물체가 경험하는 관성력은 전체 우주 우주의 다른 물체들의 양과 분포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소위 '마흐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마흐(Ernst Mach, 1838∼1916)는 원심력은 물체의 절대 회전의 결과라는 뉴턴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거대한 질량에 대한 상대적 회전이 원심력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우주론을 전개할 때 이 마흐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에 가서 마흐의 원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열정은 점차로 식게 된다. 만년에 가서 아인슈타인은 관성이라는 것은 국소적인 측지 방정식(geodesic equation)에 내재되어 있으며, 우주 다른 곳의 물질의 존재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바뀐 것처럼 훗날 과학자들 사이에는 거대 규모의 우주적 전체론과 국소적 작용 원리(local-action principle) 사이에서 어떤 것을 더욱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등장하게 된다.

1912년 8월 연방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였으며 당시에는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로스만(Marcel Grossmann)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로스만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시간-공간 구조와 연결시켰다. 즉 그들은 스칼라 함수로 표현되는 뉴턴의 퍼텐셜을 포기하고 대신 텐서로 표현되는 새로운 중력 방정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로스만과의 공동작업에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1915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얻은 리만 기학학에 입각한 장 방정식에 아주 근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상대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때 아인슈타인은 리만 기하학이 뉴턴의 중력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유도해내지 못하자, 리만 기학학이 지니는 물리적 의미를 부정하면서 그 이론을 포기했다.

1913년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의 협동 작업에서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얻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집필한 에이브러험 페이스(Abraham Pais)는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중력 장 방정식을 유도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텐서 방정식을 유일하게 결정하는 데에 필수적인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좌표 조건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10개의 텐서 방정식을 풀 때,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과 연관이 있는 비앙키 일치식(Bianchi identities) 때문에 10개의 자유도가 6개로 주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텐서 방정식의 자유도를 다시 10개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조화 좌표 조건'(harmonic coordinate condition)과 같은 특정한 좌표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자기학에서 벡터 퍼텐셜에 의해서 맥스웰 방정식을 표현할 때 '연속 방정식'(equation of continuity) 때문에 4개의 자유도를 가진 전자기 방정식이 자유도 1개를 상실하게 되는데, 이때 이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로렌츠 게이지라는 것을 선택해서 다시 4개의 자유도를 만드는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페이스는 1915년의 아인슈타인 논문에서는 1913년 논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조화 좌표 조건'에 관한 논의가 분명하게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1913년 당시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리만 기하학에 의한 중력장 방정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현재 아인슈타인의 전집을 편집하고 있는 스태철(J. Stachel)과 특히 존 노튼(John Norton)은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지 못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정적인 중력장의 개념이 물리적으로 그릇된 추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튼은 이런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공동 작업을 했을 시기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식을 손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사실 역사적인 설명을 할 때, 왜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왜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명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어내지 못했는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이 당시에 중력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상당히 헤맨 것만은 분명하다. 20대 젊은 시절의 참신한 기지로 얻어낸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많은 실수와 오랜 방황의 끝에 힘겹게 얻어내었던 것이다.

1914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이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기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찾던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계속 찾아나갔다. 1915년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1913년 자신이 버렸던 리만 기하학의 방법론을 다시 채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자신의 '등가원리', 에너지 보존 법칙, 물리적 인과성, 뉴턴의 중력 방정식으로의 근사적 접근 등을 만족하도록 확장하는 물리적 추론과 리만 기하학과 텐서 미적분학과 같은 수학적 방법의 도움으로 자신의 완전한 장 방정식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괴팅겐식 전개과정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1826∼1866)은 1853년에 행한 교수자격 강연에서 나중에 리만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리만의 사후인 1867년 출판되었는데,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논문은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인 1919년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1885∼1955)에 의해서 재 출판되게 된다. 하지만 괴팅겐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인 불변이론으로 간주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했다. 이것은 물리적 추론을 우선으로 했던 아인슈타인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최후의 장 방정식을 얻기 5일 전인 11월 20일 괴팅겐 대학의 수학자인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도 변분법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아인슈타인과 동일한 중력 장 방정식의 최종적인 식을 얻어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그해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아인슈타인이 괴팅겐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강연을 했었고, 이것에 자극을 받아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아인슈타인도 그때까지는 풀지 못했던 일반 상대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 성과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는 전혀 다른 관점과 연구 전통 속에서 전자론과 중력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었다.

우선 괴팅겐 수학자들은 최소작용의 법칙에 바탕을 둔 변분법의 원리와 사영기하학에 바탕을 둔 변환군론에 이미 보편적인 물리법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도 괴팅겐의 수학교수였던 리만이 발전시킨 비유크리드 기하학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었던 이론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전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개념보다는 수학적 측면을 더욱 중시하는 연구 성향을 보였다.

또한 괴팅겐 학파는 비유크리드 기하학과 군론의 일종인 불변이론 분야에서 이룩한 그들의 수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항상 중력과 전자기력을 동시에 다루었다. 이미 1908년에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물질과 에테르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했던 로렌츠의 주장을 비판한 에밀 콘(Emil Cohn)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역학의 문제와 전자기학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상대론적인 비선형 장방정식을 시도했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광양자 가설과 연관되어 발전해서 파동이론에서 필수불가결한 에테르의 개념은 철저하게 거부되었지만,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광양자 가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발전했으며, 오히려 연속체론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하게 되면서 물질과 에테르와의 구분을 비판했던 콘의 입장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909년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자, 민코프스키가 맡았던 물리학 분야의 연구는 힐베르트가 떠맡게 되었다. 민코프스키의 연구 프로그램을 떠맡은 힐베르트는 중력과 전자기력을 새로운 비선형 전자기 방정식에 의해서 통일하려고 했던 미(Gustav Mie)의 이론에 주목하였고, 이 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장 방정식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미의 물질이론은 괴팅겐 출신인 헤르만 바일이 고안한 게이지 변환(gauge transformation)과 괴팅겐 학자들이 선호했던 연속체론과 결합되면서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일하려는 바일의 통일장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괴팅겐을 방문해서 민코프스키와 교류를 가졌으며,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가 추구하던 중력 이론을 발전시킨 필란드의 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m)의 논의도 아인슈타인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913년에 발표된 노르드스트룀의 중력이론에 의하면, 중력 현상을 다룰 때에도 특수 상대성이론은 일반적인 유효성을 지녔으며, 중력장 속에서 중력 작용은 항상 빛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가속운동에 관한 상대론에서 바탕으로 했던 등가원리는 부정되었고,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도 빛은 휘지 않고 직진하며, 중력 퍼텐셜은 텐서량이 아닌 스칼라 양으로 주어졌다. 이 노르드스트롬의 중력이론이 당시에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쌍벽을 이루는 중력이론으로서 어느 이론이 경험적 사실과 부합되느냐가 과학자들의 관심거리였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검증과 수용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의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의 적색 편이와 굴절 현상은 아직 관측되고 있지 않았다.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20세기초의 전자기학 분야에서 에테르 이론이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며, 심지어는 냉소적이기까지 했었다. 더욱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의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올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 과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왕립 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에 1918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에딩턴은 영국 왕립 천문학자로서 영국 천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다이슨(Frank Watson Dyson)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다이슨은 상대성이론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에딩턴으로부터 상대성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1919년 일식 때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검증하기 위해 관측대를 파견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했던 인물이 바로 다이슨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 소위 '아인슈타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일식 관측대가 조직되게 되었고, 그 해 5월 29일 두 팀의 일식 관측대들은 아인슈타인 효과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사진들을 얻어내었다. 관측대가 얻은 관측 결과는 실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실하게 입증하기에는 너무 오차가 커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11월 6일 긴급 소집한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 천문학회 합동 회의에서는 관측 결과를 검토한 끝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확증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영국 천문학을 대표하는 다이슨과 특히 에딩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써 당시에 대립하고 있었던 노르드스트룀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승리한 것으로 결판이 났으며, 이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과학계의 영웅이 되었다. 더구나 11월 7일에는 런던 {타임스}지가 이 내용을 '과학의 혁명/새로운 우주론/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따라 과학계에서만 알려졌던 아인슈타인은 일약 대중적인 유명 인사가 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19년 11월 7일 20세기를 통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될 아인슈타인의 신화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력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전자기 현상과 중력 현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통일장 이론을 계속 갈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과 전자기 현상을 통일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8년 괴팅겐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바일은 이 통일장 이론에서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도 평생 이 문제에 매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는 통일장 이론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던 것은 그가 광양자 가설의 통계적 성격을 극복하려고 했던 노력과 연결을 가지고 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광양자의 방출이 통계적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양자론에 내재하고 있는 커다란 약점으로서 아직 광양자에 관한 논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아인슈타인은 1923년 상대론적인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상위 결정된(berbestimmten) 미분방정식 체계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는 연속체 가설과 결정론적 기술이 유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비결정론적 성격도 상위 결정된 미분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아인슈타인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1933년 나치가 등장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그해 3월 28일 베를린 아카데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활동보다는 과학 정책이나 평화 운동 등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 부시 등과 함께 나치가 원자탄을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에게 보냈다. 이 건의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39년 10월 핵문제를 자문할 기관인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결국은 맨해튼 계획이라는 미국의 원자탄 개발 계획이 추진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자탄이 개발된 뒤에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러셀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할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폭개발을 결정했을 때에도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태인이었던 아인슈타인 역시 시온주의를 지지했지만, 1952년 이스라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은 거절했다.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데 서명한 편지를 버틀런드 러셀에게 보낸 뒤 1주일 후인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 15분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REFERENCES

[1] A. Einstein, Jahrbuch der Radioaktivitt und Elektronik 4, 411 (1907).
[2] A. Einstein, Annalen der Physik 35, 898 (1911).
[3] A. Einstein, Annalen der Physik 38, 355 (1912).
[4] A. Einstein and M. Grossmann, Zeitschrift fr Mathematik und Physik 62, 225 (1913).
[5] A. Einstein, Annalen der Physik 49, 769 (1916).
[6] A. Einstein, "Bietet die Feldtheorie Mglichkeiten fr die Lsung des Quantenproblems?," Sitzungsberichte der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1923), pp. 359-364.
[7]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 The Science and the Life of Albert Einstein (Clarendon Press, Oxford, 1982).
[8] John Norton,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and Biological Sciences 14, 253 (1983).
[9] John Earman and Clark Glymour,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and Biological Sciences 11, 49 (1980).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10년을 전후해서 물리학계에서는 자연에 존재하는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둘러싸고 두 물리학자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 이후 여기에 참가했던 두 물리학자들은 과학계에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논쟁에 참가했던 두 논객 중 한 사람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으나, 다른 한 사람은 전자의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정신적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승리의 주인공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버트 밀리컨(Robert A. Millikan)이었으며, 패배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인물이 바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물리학자인 펠릭스 에렌하프트(Felix Ehrenhaft)였다.

밀리컨과 에렌하프트 논쟁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다. 우선 밀리컨의 유적실험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아주 잘 알려진 실험인데 어떻게 해서 중견 실험과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커다란 이견이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물론 실제로 밀리컨의 유적실험을 해본 사람들은 밀리컨의 실험이 생각한 것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분수에 해당하는 전하량을 가진 것으로 가정하는 소위 쿼크 가설이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은 농담삼아 혹시 에렌하프트가 당시에 이 쿼크의 전하량을 측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밀리컨의 교육 과정

1868년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난 밀리컨은 1886년 오버린 칼리지에 입학했다. 하지만 밀리컨 자신은 처음에 물리학에 그다지 커다란 흥미를 갖지 못했다. 2학년 말에 밀리컨이 그리스어를 잘 하는 것을 본 한 교수가 밀리컨에게 자신이 물리학 개론을 가르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밀리컨은 처음으로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91년 오버린 칼리지를 졸업한 밀리컨은 그곳에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예비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쳤다. 1893년 컬럼비아 대학에 유일한 물리학과 대학원생이자 장학생으로 입학한 밀리컨은 그곳에서 마이클 푸핀(Michael I. Pupin)에게 주로 물리학에 필요한 수학적 테크닉을 배웠다. 1894년 시카고에서 마이컬슨을 만난 밀리컨은 그곳에서 여름 동안 실험 테크닉을 배웠고, 마이컬슨이 정해준 학위 제목으로 189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1895년 5월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밀리컨은 당시 물리학계를 뒤흔들었던 뢴트겐의 X-선 발견, 앙리 베크렐의 방사선 발견 등 물리학계의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파리에서 밀리컨은 푸앵카레의 강의를 들었으며, 베를린에서는 막스 플랑크의 강의를 수강했고, 괴팅겐에서는 네른스트와 함께 연구를 했다. 1896년 마이컬슨의 초청으로 시카고 대학 물리학과 조교가 된 밀리컨은 처음에는 이곳에서 주로 물리학 커리큘럼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다양한 교재와 실험 매뉴얼을 집필했다. 1907년 주로 교육 분야에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 덕분에 부교수로 승진한 밀리컨은 1908년부터는 교육용 교재 집필보다는 순수한 기초 연구에 매진해서 마침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 유적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밀리컨이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게 된 데에는 시카고 대학에서 마이컬슨이 이룩한 기초 상수에 대한 정확한 측정(precision measurement)의 전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밀리컨은 1921년 시카고 대학에서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옮길 때까지 마이컬슨의 뒤를 이어 이곳 시카고 대학의 라이어슨 연구소(Ryerson Laboratory)를 미국 물리학의 중심지로 이끌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의 이런 물리학 연구전통은 밀리컨의 후임인 컴프턴(Arthur H. Compton)에 의해서 계속 이어졌다.

초기의 전자 전하량 측정 실험

밀리컨이 전자의 전하량을 측정하기 이전에 이미 몇몇 물리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자의 전하량을 측정했었다. 1903년 J. J. 톰슨의 학생이었던 H. A. 윌슨은 과거 톰슨이 사용했던 수증기를 이용한 안개상자 방법을 개량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윌슨이 사용했던 방법은 갑작스런 팽창에 의해 이온화된 안개상자에 생성되는 구름이 중력의 영향 아래 하강하는 비율을 측정한 뒤, 이와 유사한 구름에 방향이 반대인 전장을 가해서 구름 방울의 하강 속도 비율을 비교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윌슨은 전자의 하전량으로 2.0×10-10(esu)에서 4.4×10-10에 걸치는 11개의 값을 측정해서 평균 3.1×10-10의 값을 얻었는데, 같은 해 J. J. 톰슨도 유사한 방법을 사용해서 3.4×10-10의 값을 얻었다.

1903년 당시 윌슨이 측정한 전하량 값은 상당히 편차가 심했고, 밀리컨은 이것이 X-선 관에 의한 이온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07년부터 밀리컨은 그의 학생 베거먼(Louis Begeman)과 함께 X-선 대신 라듐을 이온화 장치로 사용해서 윌슨의 방법을 개량했다. 이 방법을 이용해서 1908년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으로 3.66에서 4.37에 걸친 값을 얻었는데, 그 평균은 4.06×10-10이었다. 1909년에 들어와서도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하기 위한 자신의 실험 방법을 계속 개량해나갔다. 우선 윌슨의 실험 장치와 그 동안 그와 베거먼이 사용한 실험 장치에서는 물방울을 관찰하는 동안 물방울이 기화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추구되었다. 또한 그 동안의 실험 장치들에서는 중력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전기장을 함께 가했을 때 떨어지는 물방울의 질량이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었는데, 이 점을 보완하는 것도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는 극복해야만 할 과제였다. 밀리컨은 실험 조건을 다양화하기 위해 물 이외에 알코올을 동시에 실험에 활용해보았다. 물과 알코올 방울 하강 실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강속도, 반경, 밀도, 유체의 점성도와 관련된 스톡스 법칙의 유효성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물로 포화된 공기와 알코올로 포화된 공기 중에서 점성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이었다. 또한 정전기장 내에서 단일하게 하전된 방울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실험의 정확도를 유지하는 데 무척 중요한 요소였다.

1909년 가을에 물방울과 알코올 방울로 실험을 한 밀리컨은 기본 하전량의 2배에서 6배에 해당하는 전하량을 측정했는데, 이때 그가 얻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 값은 4.65×10-10이었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을 그 동안 다른 방법으로 얻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 측정값과 비교해보았다. 1906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 이론에서 실험치로부터 이론적으로 얻어낸 값은 4.69×10-10이었으며, 1908년 러더퍼드가 전기적 방법으로 알파입자의 하전량을 측정해서 얻은 값은 4.65×10-10이었다. 또한 1908년 섬광계수기 방법으로 레게너(Erich Regener)가 얻은 값은 4.79×10-10이었으며, 베거먼이 윌슨의 방법으로 밀리컨과 같은 연구소에서 얻은 값은 4.67×10-10이었다. 이런 일련의 값을 종합하여 밀리컨이 얻은 평균값은 4.69×10-10이었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이 다른 사람들이 얻은 값과 오차의 한계 내에서 일치하는 것에 고무되어 물질의 원자론적 견해에 대해 보다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기본적인 하전량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에렌하프트의 반론

밀리컨이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하는 실험을 계속 개량하고 있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곧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존재 유무를 놓고 밀리컨과 평생 동안 논쟁을 하게 되는 펠릭스 에렌하프트였다. 에렌하프트는 밀리컨에 비해 11살 아래의 젊은 과학자였지만, 적어도 과학적 연구 경력과 명성에 있어서는 밀리컨에 비해 훨씬 앞선 인물이었다. 187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에렌하프트는 빈의 대학과 공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903년부터 빈대학에서 조교와 사강사로 지내면서 그는 펠릭스 엑스너(Felix Exner), 프리드리히 하젠외를(Friedrich Hasenhrl), 슈테판 마이어(Stefan Meyer), 에곤 폰 슈와이들러(Egon von Schweidler), 에른스트 레흐너(Ernst Lechner) 등 빈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저명한 과학자들과 교류를 가졌다.

1909년 에렌하프트는 밀리컨과 유사한 방법으로 전자의 '기본양자'를 측정해서 4.6×10-10의 값을 얻었다. 하지만 밀리컨이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해서 이를 발표한 것을 본 에렌하프트은 1910년 4월 갑자기 자신이 전자의 하전량보다 더 작은 전하량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1910년 5월 12일 에렌하프트는 빈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전자 이하의 하전입자'(subelectron)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자연계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하전량은 1× 10-10(esu) 혹은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금 입자의 전체 하전량이 5×10-11에서 1.75×10-10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에렌하프트와 그의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자의 절반, 50분의 1, 100분의 1, 심지어는 1000분의 1의 양까지 발견했다. 에렌하프트가 이렇게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이면에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던 반원자론적 분위기가 부분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경험비판론이라는 상대주의적 지식관을 주장했던 마흐는 죽을 때까지 원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에렌하프트가 그의 생애 동안 논쟁을 벌인 것은 단지 전자의 기본 하전량 문제 뿐만이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 에렌하프트는 자신이 자기단극자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번 학계에서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결국 에렌하프트의 생애는 복잡한 물리 현상의 해석과 연관된 미해결의 논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2년 빈대학의 부교수가 된 에렌하프트는 1920년 정교수가 되어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 뒤 그는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미국으로 잠시 망명했고, 전쟁이 끝난 뒤 빈 대학으로 돌아와 교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1952년 사망했다.

밀리컨의 유적 실험

에렌하프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하전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 개선해나갔다. 이미 밀리컨은 1909년 가을부터 1910년 봄 사이에 물이나 알코올 이외에 기름방울에 의한 하전량 측정 실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동차 엔진오일로 사용되는 기름은 상대적으로 휘발성이 낮기 때문에 기름 방울이 오르내리는 것을 30분에서 4시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측정할 수 있었다. 물 이외에 기름 방울을 선택한 것은 밀리컨이 기본전하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다.

한편 밀리컨은 기름 방울의 지름이 기체 분자의 평균 행정 거리의 크기에 가까워질 경우에는 기존에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던 스톡스 법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밀리컨은 기존의 스톡스의 법칙에 커닝엄의 이론을 이용해서 교정을 한 소위 스톡스-커닝엄(Stokes-Cunningham) 법칙을 채용했다. 이 새로운 법칙에서는 기체 분자의 행정거리를 방울의 반경으로 나눈 항이 1차 교정 항으로 추가되었다. 이외에도 전하의 하전량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는 공기의 점성도(coefficient of viscosity)를 아주 정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많은 오차 요소를 제거해나간 끝에 마침내 1913년 6월 2일 밀리컨은 4년에 걸친 그의 실험의 결과를 『피지컬 리뷰』에 발표했다. 당시에 그가 발표했던 기본하전량은 4.774 ± .009 × 10-10(esu)였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을 페랭(Jean Baptiste Perrin) 등이 브라운 운동을 이용해서 얻은 값, 플랑크의 열복사 이론에서 얻은 값, 레게너가 방사선 방법으로 얻은 값과 비교해서 이들의 평균값이 기름 방울 방법에 의해 얻은 값의 오차의 한계 내에 있음을 보였다. 더 나아가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전하량이 정확하게 측정됨으로써 분자의 기체상수, 플랑크 상수, 볼츠만 상수 물리학에 기본이 되는 여러 기초 상수들도 새롭게 계산될 수 있었다.

밀리컨과 광전 효과 실험

유적 실험이 마무리되는 동안 밀리컨은 그 동안 자신이 미루어 놓았던 광전 효과에 관한 실험에 새롭게 착수하였다.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은 밀리컨이 이미 1906년부터 하던 실험이었는데, 당시에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도 알지 못했으며, 실험 자체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12년 이제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을 알게된 밀리컨은 광전 효과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당시까지 입사선의 진동수와 광전자의 속도와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오히려 1914년 독일의 람사우어(Carl Ramsauer)가 측정한 실험에 의하면 입자 진동수에 따르는 광전자의 최대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고, 속도 분포도 입사광의 파장과는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밀리컨은 우선 고압 수정-수은 램프를 이용해서 자외선을 만들고 그것을 나트륨과 리튬과 같은 알칼리 금속에 가했다. 또한 그는 입사된 복사선의 영역에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산화구리망으로 된 패러데이 상자(Faraday cage)를 채용하고 금속을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서 광전류의 세기를 높여나갔다. 1915년까지의 주의 깊은 실험을 통해서 밀리컨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분명하게 입증해낼 수 있었다. 그는 입사광의 진동수와 차단 퍼텐셜 사이에 선형적 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그래프를 통해 보여주었으며, 이 선의 기울기가 플랑크 상수를 전자의 하전량과 나눈 값이라는 것도 확인함으로써 플랑크 상수를 아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나타내는 다양한 모습을 다각도로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자체는 믿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빛의 파동론을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배제한 채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방정식만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밀리컨과 칼텍

1917년 미국과 독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자 밀리컨은 국립연구회의(National Research Council)의 부의장 겸 연구책임자를 맡아 미국에서 국방 과학에 대한 연구를 지휘했다. 국립연구회의는 제1차세계대전 중에 조지 헤일(George E. Hale)이 국방연구를 도울 목적으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해서 만든 국립과학아카데미 소속의 민간단체였는데, 전쟁 중 밀리컨은 음파를 사용해서 잠수함의 위치를 발견하는 잠수함 탐지기 개발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밀리컨은 헤일의 초청으로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즉 칼텍으로 자리를 옮겨 짧은 시간 내에 이 대학을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소수정예의 공과대학으로 육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칼텍은 1917년 이름이 바뀌기까지 '스룹공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한해에 약 10여명의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건물 한 채 뿐인 작은 학교였다. 천체물리학자 조지 헤일은 이 허름한 지방 대학에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적극 유치해 이 학교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변화시켰다. 카네기재단의 기금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천문대였던 윌슨산 천문대를 설립한 바 있었던 헤일은 윌슨산 천문대와 협동적 연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룹공과대학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위해 물리학, 화학, 천문학 사이의 협동적 연구를 추구한 헤일은 MIT에 있던 노이즈와 시카고에 있던 로버트 밀리컨을 캘리포니아로 불러오려고 노력했다.

노이즈의 경우는 MIT 대학 내에서 불화가 있어 칼텍으로 왔기 때문에 헤일은 노이즈를 비교적 쉽게 초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적 실험과 광전효과 실험으로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밀리컨을 칼텍으로 초빙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헤일은 밀리컨을 데려오기 위해 미국 교수 임용사상 보기 드문 아주 방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 밀리컨에게 대학 운영위원회(Executive Council)의 의장직과 노먼브리지물리학연구소(Norman Bridge Laboratory of Physics) 소장직을 맡겼으며, 당시 다른 대학 최고급 교수의 두배에 해당하는 초특급 봉급도 주었다. 1921년 가을 밀리컨은 마침내 시카고 대학에서 칼텍으로 옮겨오게 된다. 칼텍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밀리컨은 1923년 전자의 기본 하전량 및 광전 효과에 대한 실험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 새롭게 출발한 칼텍에 커다란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자신도 미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밀리컨은 직책상 대학운영위원회 의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의 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우선 그는 대학의 재정 확충과 기금 확보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남캘리포니아 유지 약 100명으로 구성되는 '칼텍 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 후원회의 역할은 1년에 약 1천 달러씩 10년 동안 후원해주면 대학에서는 그 보상으로 대학의 강연을 포함한 각종 행사들에 그 사람들을 초청해 주는 것이었다. 이 후원회는 불과 1년만에 정원을 다 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이 낸 매년 10만 달러의 기금은 약 2백만 달러의 증여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다.

칼텍으로 옮겨온 뒤 밀리컨은 우수한 박사과정 학생과 박사후연구원들을 자기 주변에 모아 빠른 시일 내에 칼텍을 미국 내의 대표적인 연구중심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저온에서 금속 전자의 방출에 대한 연구를 했던 아이링(Carl F. Eyring)과 낮은 원자번호 원소들의 자외선 스펙트럼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해서 곧이어 등장하는 전자 스핀 개념으로 설명되는 다양한 실험적 정보를 얻어냈던 바원(Ira S. Bowen) 등은 모두 대학원생 시절에 밀리컨과 함께 연구를 했던 과학자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밀리컨은 칼텍에서 '우주선'(cosmic ray)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우선 '우주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밀리컨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1925년 여름 밀리컨은 캘리포니아의 산중에 있는 뮤어호수(Muir Lake)와 애로우헤드호수(Lake Arrowhead)에서 깊이에 따른 이온화의 변화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이온화상자를 이용해 이 두 호수에서의 이온화강도를 측정한 밀리컨은 두 호수에서 깊이에 상관없이 이온화강도가 거의 같음을 발견했다. 이것으로 그는 대기를 이온화시키는 복사선이 지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오는 '우주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계속된 실험에서 밀리컨은 '우주선'이 감마선보다도 더욱 강력한 에너지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런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고 믿게 된 밀리컨은 우주선인 광자가 지구와 충돌해서 수소, 헬륨, 산소, 규소 등의 원소가 형성되었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원자들이 빛에서 생성되었다는 밀리컨의 주장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당시 과학계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는 밀리컨의 주장은 1932년 아서 컴프턴이 우주선이 하전입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우주선의 위도효과(lattitude effect)를 발견함으로써 마침내 반박되었다.

컴프턴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위도효과를 확인했지만, 밀리컨 자신은 이 위도효과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역시 1920년대 말부터 1932년까지 위도효과를 확인하려는 실험을 했었지만, 그 자신은 이런 효과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밀리컨이 위도효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밀리컨 자신이 우주선이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 뿐만이 아니라 밀리컨이 있었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근교가 위치상 위도효과를 발견하기에는 좋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 이후에는 다시 엄청난 성공의 소식도 들려왔다. 밀리컨 자신은 위도효과에 관련한 우주선 연구에서 실패했지만, 칼텍에서 밀리컨과 함께 연구하던 앤더슨(Carl Anderson)은 이 우주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1932년 양전자(positron)를 발견해 칼텍 출신 학생으로는 최초로 193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밀리컨은 과학 발전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더욱 중요시하는 보수적 유형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과 같은 혁명적 이론이 출현하는 것을 과학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실험 장치를 개선하고 물리량을 될 수 있으면 정확하게 측정하는 과정이 곧 과학 발전에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밀리컨이 지닌 이런 과학관은 그가 행한 다양한 대중 강연과 과학사 관련 저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밀리컨은 칼텍을 학문적 목적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전쟁 중에 이미 많은 행정적인 업무를 젊은 보직 교수들에게 인계하기 시작한 밀리컨은 1946년 대학교수직과 대학 운영위원회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밀리컨은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와 같은 대중적인 주제로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연을 계속하다가 1953년 칼텍이 위치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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