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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마을, 병산서원, 하회마을, 봉화 토향고택, 영주 부석사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생활공동체인 마을을 형성하여 왔다.
소중한 삶의 터전을 일구어온 마을에는 수 많은 이야기와 문화, 역사가 남아 있다.
그중에서도 '외내'라고도 불리는 군자마을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 광산김씨 김효로가 정착하면서 그 후손들로 형성된 마을이다. 
낙동강은 도산에 와서 절경을 이루는데 세칭 도산구곡이라 하며, 그 중 제1곡인 운암곡이 곧 군자마을이다. 군자마을은 문화재로 지정된  20여 채의 고택과 함께 광산김씨 후손들이 지켜온 소중한 문화유산을 직접 볼 수 있는 곳으로 예부터 행실이 바르고 학문이 깊은 군자다운 인물을 많이 배출했다. 군자마을이라는 이름은 일찌기 이 마을에 들른 한강 정구(寒岡 鄭逑) 선생이 입향조 김효로의 친손들과 외손들인 일곱형제들(김부필,김부의,김부인,김부신,김부륜,금응협,금응훈)을 가리켜 ‘한 마을에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감탄한 데서 유래했다.이제 군자마을은 옛 선조들의 이야기와 문화, 역사를 전승하고 도산구곡의 관문인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하면서 가장 한국적인 문화를 간직한 공간이다.  

병산서원은 고려 중기부터 안동 풍산에 있던 교육기관인 풍악서당(風岳書堂)에서 비롯되었다. 지방 유림의 자제들이 모여 공부하던 곳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의 행차가 풍산을 지날 무렵, 풍악서당의 유생들이 난리 중에서도 학문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왕이 크게 감동하여 많은 서책과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유생들을 더욱 학문에 열중하도록 격려하였다.

200년이 지나면서 서당 가까이에 가호가 많이 들어서고 길이 생기며, 차츰 시끄러워지면서 유림들이 모여 서당을 옮길 곳을 물색하는 중에 서애 류성룡 선생께서 부친상을 당하시고 하회에 와 계실 때 그 일을 선생에게 문의하니, 서애 선생께서 병산이 가장 적당할 것이라고 권하게 되었고 유림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1575년(선조 8) 서당을 병산으로 옮기고 ‘병산서원’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1614년(광해 6)에 우복 정경세, 창석 이준, 동리 김윤안, 정봉 안담수 등 문인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판을 봉안 하였다.

선생의 위판은 1620년(광해12) 합향하는 과정에서 여강서원(주향 퇴계 이황)으로 옮겼다가 1629년(인조 7)에 다시 병산에 복향하였다. 당시 서애 선생의 위판을 여강서원과 병산서원에 봉안하는 문제를 두고 “일읍양원병향(一邑兩院竝享)”과 “일읍봉안(一邑奉安)”등 의견이 있었으나 주자의 예에 따라 한 고을 두 서원에 병향해도 무방하다 하여 두 서원에 병향하게 되었다.

1662년(현종 3)에 선생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柳袗, 1582-1635)공의 위패를 종향하였다.

병산서원은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고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렸을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중 하나이다. (書院 27개, 祠 20개)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와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로서 지금은 각시,중,양반,선비, 초랭이,이매,부네,백정,할미 9개의 탈들만 전해지며, 3개의 탈이 분실되었다.

하회탈은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먼저 그 소중함을 알아주지 않던 중에 류한상 전 안동문화원장이 하회탈을 맥타카드(Arther Joseph Mactaggart)교수에게 소개하여, 1954년 그 가치를 인정하여 해외 학계에 발표함으로써 하회탈이 세계제일의 가면으로 극찬을 받았으며, 그 후에 국내 학계에서도 활발히 연구하여 국보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하여 겉으로만 보지 말고 깊이 연구하여, 그 소중함을 알아야 함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잃어버린 탈(총각탈, 떡다리탈, 별채탈)을 저명한 조각가와 화가 및 미술사 관련 전문가들로 하여금 복원을 추진하기도 하였으나, 운보 김기창 화백과 그 일행이 하회탈을 면밀히 감상해 보고서 하회탈의 오묘한 이치와 조형적 탁월성에 놀라 자기들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하다.라고 하였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하회탈의 작가는 허도령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허도령에게는 사랑하는 처녀가 있었는데, 허도령이 신의 계시를 받고 탈의 조각을 위하여 홀로 외딴 집으로 가기 전에 탈을 완성하기까지는 절대로 찾아오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말하였으나, 오래 기다리던 처녀가 사모하는 정을 가누지 못하고 허도령이 혼자 있는 집을 찾아가서 차마 문을 열지는 못하고 문구멍을 뚫어서 안을 들어다 보는 중 허도령은 이를 보자 부정을 타서 죽었다고 한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신의 계시란 강렬한 예술적 영감을 의미하며 부정을 타서 죽었다.란 심혈을 다하여 작업 중에 있던 허도령이 영감이 흩어지게 되자 쇼크에 의한 사망으로 생각되며, 이처럼 목숨바쳐 이룩한 작품이기에 오늘날 세계 제일의 가면으로 되어 있다.

양반탈은 위로 향하면 웃는 얼굴, 밑을 향하면 성낸 얼굴로 표정변화가 일어나도록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너털웃음을 웃을 때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성을 낼 때는 얼굴을 아래로 하는 인체공학을 연구하여 조각되어 있으므로 광대의 몸짓과 자연스럽게 일치되도록 한 점도 두드러진다.

각시탈은 한쪽 눈이 가늘다. 이는 각시 광대가 얼굴을 살짝 돌리면 상대에게 눈을 흘기는 교태(윙크)가 되도록 하였다. 다른 탈 들도 제각각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기 때문에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의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은 재료가 오리나무로서 표면에 옻칠을 2겹 3겹으로 칠하여 정교한 색을 내었고, 격식과 세련됨을 갖추었으며, 부락에서는 별도로 동사(洞舍)를 세워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특히 각시 탈은 성황신을 대신한다고 믿어 별신굿을 할 때 외에는 볼 수 없었고, 부득이 꺼내볼 때는 반드시 제사를 지내야 하는 금기(禁忌)나 제약(制約)이 있었으므로 오늘날까지 전하여질 수 있었다.

토향고택은 입향 후 11대 째 후손들이 대대로 태어나 살아온 곳으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 가장 조화롭게 어우러진 명품고택이다.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1524~1590)의 현손이자 봉화 바래미마을 의성김씨 입향조인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 1641~1707)의 넷째 아들 김여병(金汝鈵)을 11대조로 모시고 있으며, 다섯 칸 규모의 솟을 대문과 사방 일곱 칸의 비교적 규모가 큰 전형적인 영남 사대부가의 ㅁ자형 가옥입니다.
 뒷산의 소나무를 병풍 삼아 자리한 토향고택의 안채는 김성구 선생이 입향하기 전에 지어진 건물로 350여 년 이상으로 추정되며, 사랑채는 1876년 숭혜전 참봉ㆍ통훈대부를 지내고 현 봉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조양학교(1909년)를 설립한 암운(巖雲) 김인식(金仁植, 1855~1910)이 중수하였습니다.

 ‘토향’은 김인식의 손자 김중욱(金重旭, 1924~1967)의 호이다. 김중욱은 일제 때 징집되어 만주에서 행군 도중 탈출하여 중국 쑤저우(蘇州), 항저우(杭州) 등지에서 항일 운동을 하다 해방 후 귀국했으며, 이후 중앙고보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예산담당관을 지냈다.
또한, 대대로 고택에 내려오던 많은 책자와 자료들은 몇몇 책자를 제외하고는 역사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기증하여, 현재 과천정부청사의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관되어 있다.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
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 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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