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춘 곳… 神의 언어를 듣다
카트만두 북쪽 170㎞ 거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눈 덮인 웅장한 풍광에 경탄


랑탕히말은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제1의 트래킹(tracking) 코스로, 엄청난 규모의 숲과 동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코스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문 등반가들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 8000m급 고봉을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대신 입구까지 도로가 연결되는 등 인공적 요소도 많다. 114달러만 주면 경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즘 세상에 험한 길을 스스로 걷고자 선택하는 이들로선 그런 인공적 요소가 달갑지는 않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170㎞ 거리(절반 이상이 비포장 험로라서 자동차로 9시간 걸린다)에 있는 랑탕히말은 1949년 영국인 탐험대가 답사하기 전까지 지도상에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이곳을 탐험했던 영국인 틸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카트만두에서 새벽에 떠나 둔체(해발 1950m)를 지난 뒤 저녁 무렵 계곡 입구인 샤부르벤시(1460m)에 도착, 숙박을 한 뒤 트래킹은 시작된다. 1월 10일 충주시 청소년수련원 주최로 구성된 히말라야 오지학교탐사대(대장 김영식 충주 칠금중학교 교사)와 함께 찾았다. 교사와 화가, 시인, 농민 등으로 구성된 팀이다. 우리는 트래킹과 함께 학교를 방문해 네팔의 교육문화를 체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0일간 20명의 대원은 랑탕히말의 핵심 구간 60㎞를 도보로 답사했다.

선인장~전나무 숲까지 다양한 식물

전반부는 출발지인 샤부르벤시에서 림체(2440m)-랑탕마을(3300m)-캉진곰파(3800m)-캉진리(4550m)에 이르는 계곡 트래킹 코스. 되짚어 나오는 구간까지 30㎞에 불과한 거리지만 3일간 고도를 3000m 이상 올려야 하기 때문에 고소 적응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물길을 거슬러 계곡 상류로 올라가는 동안 북쪽으로 이름 없는(?) 4000m급 봉우리들이 있고 그 뒤로 랑탕Ⅱ(6561m), 랑탕리룽(7234m) 등 험준한 봉우리가 만년설로 단장한 채 우뚝 솟아 있다.

아열대 기후에 속한 이곳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선인장부터 침엽수인 전나무 숲까지 시시각각 식물군이 변한다. 트래킹 중 만나는 인종도 다양하다. 카트만두 부근에선 네왈리족, 둔체에선 타망족,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리와 많이 닮은 티베트족, 고산 등반의 길잡이로 잘 알려진 셰르파족의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네팔은 크게 36부족, 세분하면 7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다민족 국가다. 힌두교를 국교로 삼고 있으면서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 다양한 문화를 선보인다.

해발 2500m를 넘어서면 고산증(high altitude sickness)이 트래커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대부분 가벼운 두통으로 끝나지만 극심한 구토와 복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도를 1000m 올린 뒤엔 한나절 정도 쉬면서 적응기를 가지면 대부분 문제가 해소된다. 체온을 잘 관리하고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것이 도움이 된다.
캉진곰파(‘곰파’는 절을 의미한다)에 이르는 계곡에 과거 영화로웠던 티베트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판에 불경이나 문양을 새겨 탑으로 쌓은 마니차가 길 한가운데 중앙분리대처럼 길게 이어진다. 네팔인은 마니차를 만나면 반드시 왼쪽으로 지나간다. 돌아올 때 반대편을 거치면 불경을 한 번 읽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언제 새겨진 것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마니차의 행렬은 우리의 팔만대장경에 비견할 정도로 길다. 길 가는 동안에도 스스로를 깨우치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트래커들은 계곡을 오른다.

캉진곰파에서 트래커들은 각자의 일정과 고소 적응능력에 따라 3가지 코스를 택할 수 있다. 마을 뒤편 빙하를 감상하는 것이 손쉽고 해발 4550m 캉진리 산에 올라 랑탕히말의 웅장한 풍광을 감상할 수도 있다. 한나절 정도 투자하여 설산이 양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랑시사 마을의 커르커(야크 방목장)까지 다녀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반군들도 관광객은 건드리지 않아

랑탕히말 트래킹 코스는 후반부가 극적이다. 랑탕계곡의 오르막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대나무가 많은 뱀부마을(1960m)에서 남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택해 코사인 쿤드(호수)에 이르는 구간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잿빛 털을 가진 네팔원숭이 무리가 노니는 아열대숲을 지나 겨울에도 푸른 대나무 숲을 만난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무렵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갑작스럽게, 신비로운 툴루샤부르 마을(2210m)이 나타난다. 40~60도 경사의 산비탈을 해부라도 하듯 겹겹이 다락밭으로 만든 사면을 지나면 칼 같은 능선 위에 마을이 있다. 지금은 싸구려 페인트로 칠한 롯지들이 볼썽사납게 섞여 있지만 과거 티베트불교의 중심지답게 고색창연한 문양의 창틀로 가득한 고가(古家)가 트래커의 숨결에 평온을 불어넣는다.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히말라야 고봉의 옆구리로 붉게 스미는 저녁노을과 까마득한 계곡의 전망을 보여주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정화된다.

툴루샤부르에 이르면 최근 네팔 정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공산반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카트만두의 신문들은 이틀이 멀다하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교전 소식을 전한다. 가끔 별도의 입장료(?)를 요구하는 것 외에 반군은 절대로 관광객을 건드리지 않는다. 관광객이 줄면 그만큼 네팔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심 그들을 만나길 기대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반군 때문에 최근 네팔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현저히 줄고 있다. 경제난의 여파로 석유와 설탕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카트만두 시내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 행렬을 자주 볼 수 있다. 2001년, 당시 국왕과 친형 가족을 몰살시키고 정권을 잡은 현 갸넨드라 국왕은 국민의 존경도, 정치권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잡은 권력조차 카트만두를 벗어나 트래킹 코스에 오르면 한낱 부질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툴루샤부르에서 싱곰파(3350m)에 이르는 구간은 3시간30분 정도의 짧은 코스. 그 중 1.5㎞ 구간은 아득한 감동을 연출한다. 100~300년생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난 숲길을 걷다가 지친 듯 멈추어보자. 섬광처럼 한 줄 가슴을 스치고 지나는 시 구절이 없다면 더 올라가도 소용이 없다. 마침 눈까지 내려 마음 저 안쪽에 남아 있던 흉터마저 가려주었다.

고사인쿤드(4380m)는 힌두교 성지. 해발 4300m 지점에 고사인쿤드를 비롯해 번뇌의 숫자와 일치하는 108개의 호수가 있다.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를 불교의 상징으로 알고 있지만 힌두교에선 부처를 수많은 힌두의 신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으니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싱곰파에서 고사인쿤드까지는 하루 트래킹 코스. 맑은 날 안나푸르나(8091m), 마나슬루(8163m), 거네스(7429m) 등 히말라야의 고산준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지만 1월 중순엔 무릎까지 차오르는 폭설이 발목을 잡았다. 남녀의 성기인 링거와 요니를 모신 사당만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결국 중간 기착지인 라우레미나야크(3930m)를 조금 지나 4000m 지역까지 갔다가 철수해야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눈보라 속에서 들려온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다시 싱곰파로 돌아온 일행은 ‘부정 탄 사람’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바빴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신은 모든 것을 용서한 듯 아침 하산길에는 더없이 맑은 풍경을 허락했다. 네팔 트래킹 정보(www.nepaltour.pe.kr)

글·사진= 장창락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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