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생애와 과학

 

뉴턴 (Isaac Newton, 1642-1727)은 율리우스력으로는 1642년 12월 25일, 신력으로는 1643년 1월 4일 영국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뉴턴의 어머니는 생후 2년 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할머니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이리하여 뉴턴은 그의 의붓아버지가 죽어서 어머니가 다시 그에게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어린 시절의 이런 모성 결핍이 그의 심리적 성장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즉,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그가 보인 심리적 불안감과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가 보여주었던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격렬한 반응 등은 어린 시절의 모성 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헨리 모어

1661년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이때를 즈음해서 그는 과학혁명 과정에서 근간이 되는 다양한 생각에 접하게 되었다. 우선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과 기계적 철학, 가상디의 원자론, 보일의 화학을 공부했으며,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 헨리 모어 (Henry More, 1614-1687)를 통해 연금술사와 마술사들이 주로 믿었던 신비주의 사상인 헤르메티시즘 도 접했다. 뉴턴이 평생 연금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원격작용에 의한 힘인 보편중력을 생각해내게 된 데에는 신플라톤주의 와 헤르메티시즘 사상이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1665년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어 뉴턴은 그 뒤 2년 동안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 색깔에 관한 이론, 역제곱 법칙 등 훗날 자신의 주요 업적을 이룩하는 데 기본 바탕이 되는 핵심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뉴튼의 반사망원경(1671년)
직경 2.5cm 금속거울 사용

166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루카스좌 수학교수 (Lucasian professor of Mathematics)가 된 뉴턴은 광학에 대해서 강의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미 빛이 단색광이 아니라 혼합광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시기에 굴절망원경과는 다른 방식의 반사망원경 을 발명해서 학계에서 과학자로서도 명성을 분명하게 쌓게 되었다.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한 뉴턴은 당시 왕립학회에서 영향력이 있던 후크 (Robert Hooke, 1635-1703)와 격한 논쟁을 벌였다. 후크와 벌인 논쟁 이후 뉴턴은 외부와 관계를 끊고 격리 생활을 하면서 헤르메티시즘과 연금술과 같은 신비주의 전통의 학문에 탐닉하기도 했다.


초판 표지

핼리

1679년 경 뉴턴은 행성 운동과 연관하여 역제곱 법칙을 언급하는 편지를 후크로부터 받았다. 뉴턴은 이 편지를 받고 이런 내용이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과 유사하다고 느꼈고, 이 역제곱 법칙을 행성운동을 해결하는 데 본격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핼리 (Edmond Halley, 1656-1742)는 후크와 함께 역제곱 법칙을 이론적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작업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뉴턴이 역제곱 법칙을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 문제를 해결했다는 소문에 접한 핼리는 1684년 8월 케임브리지의 뉴턴을 방문했다. 핼리는 뉴턴의 이 '발명'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이것을 작은 책으로 출판하도록 뉴턴 권유했다. 핼리의 권유를 받은 뉴턴은 처음에는 『운동에 관해서』라는 작은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립학회로부터 출판 약속을 받은 뒤 뉴턴은 이보다 더 긴 분량의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 18개월 동안 집필에 전념한 뉴턴은 1687년 고전역학의 완성판이라고 불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혹은 『프린키피아』 라는 3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1686년 왕립학회에 『프린키피아』 제 1권의 완성된 원고가 접수되었을 때, 후크는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당시 쇠락해가던 후크로서는 뉴턴이 자신의 책에서 후크도 역제곱 법칙에 관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을 인용해주는 정도로도 만족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학에 관한 글에서 후크와 격렬한 논쟁을 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뉴턴은 이 정도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았다. 후크의 표절 주장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자신의 원고를 계속 집필해갔으며, 심지어 자신의 원고에서 후크에 대한 거의 모든 인용을 삭제해버렸다. 후크에 대한 뉴턴의 분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뉴턴은 후크가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미 집필한 광학에 관한 책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왕립학회의 회장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린키피아』 초판은 라틴어로 씌어진 510쪽 분량의 방대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 뉴턴은 마치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서인『원론』의 책 형식처럼 운동에 관한 논의를 정의, 공리, 법칙, 정리, 보조정리, 명제 등으로 분류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제 1권은 진공 중의 입자의 운동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처음 부분에는 관성의 법칙, 힘과 가속도에 관한 뉴턴의 운동 법칙, 작용-반작용의 법칙 등 뉴턴의 유명한 운동의 3법칙이 등장하고 있다. 뉴턴은 이 운동의 3법칙과 역제곱의 힘을 바탕으로 삼체 문제를 위시한 다양한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기술했다. 제 2권은 유체역학 분야에 해당하는 것으로 저항이 있는 매질 내의 운동을 다루고 있다. 나중에 틀린 이론으로 판명된 이 책의 내용에서 뉴턴은 소용돌이 운동의 원심력에 의해서 행성의 운동을 설명했던 데카르트의 이론을 간접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제 3권은 천체 역학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서 뉴턴은 경험 법칙이었던 케플러의 법칙을 역제곱에 비례하는 힘을 가정함으로써 증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구의 세차운동, 달의 운동의 불규칙성, 조석운동, 혜성의 운동 등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출판과 동시에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책은 복잡한 기하학적 서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문 학자들도 읽기 힘든 대단히 어려운 책이었다. 더구나 대륙에서는 '인력'이라는 개념이 문제가 되었다. 인력과 척력과 같이 원격 작용에 의한 힘 개념은 당시에 주로 연금술사나 마술사들이 쓰던 용어였는데, 특히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 아래에 있던 곳에서는 이런 원격작용에 의한 힘을 인정한 뉴턴 역학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보였다. 아무튼 이 책은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뉴턴에게 국제적 명성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학문적인 활동 이외에도 뉴턴은 1696년부터 조폐국에서 일하면서 위조지폐 방지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조폐국에서 일하던 뉴턴이라는 존재는 당시 런던의 위조지폐범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실제로 그가 재직하던 동안 수많은 위조지폐범들이 교수대로 보내졌다. 뉴턴의 과학은 신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만년에 뉴턴은 성경의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다니엘과 요한의 예언서를 해석했는데, 이 저작들은 오랫동안 비밀로 내려오다가 뉴턴이 죽은 지 한참 뒤에야 출판되었다. 뉴턴은 라이프니츠와 미적분학 발견의 우선권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에는 추종자들의 부축임에 못 이겨서 시작한 논쟁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추잡한 싸움으로 변했다. 결국 이 둘 사이의 싸움은 두 사람이 죽으면서 끝나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와 쌍벽을 이루는 뉴턴의 저작으로는 빛의 다양한 성질에 대해 논의한 『광학』 (Opticks, 1704)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1672년 경에 이미 거의 완성된 논문으로 1703년 왕립학회에서 힘이 있던 후크가 죽고 자신이 1703년 왕립학회의 회장이 된 다음 자신의 권위가 커질 때 출판한 것이었다.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이 강했던『프린키피아』와는 달리 이 책은 실험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뉴턴은 이 책에서 빛을 입자로 보고, 새로운 실험 도구인 프리즘을 이용해서 빛의 반사, 굴절, 분산을 비롯해서 색에 대한 다양한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이 책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는 뉴턴은 이 책에서 데카르트와는 달리 색깔에 대한 거시적 현상만을 언급하고 미시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태도는 그가 중력이 실제로 존재함을 강조하기 위해『프린키피아』에서 언급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로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다. 뉴턴은 데카르트주의자들이 가정했던 빛에 대한 미시적 메커니즘은 그 존재론적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은 실험적으로 분명히 입증할 수 있는 거시적인 메커니즘만을 논의하려 했던 것이다.

뉴턴의 과학 방법론을 한마디로 표현하지면 수많은 현상들 속에서 힘을 설정하고, 이것으로부터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현상을 다시 설명해내면, 그 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들로부터 힘을 도출하는 과정은 다분히 가상적, 상상적, 사색적인 측면이 강한 것으로 수많은 임의성이 존재했다. 실제로 『광학』의 질문(Query) 31번을 보면 뉴턴이 빛의 굴절과 힘의 관계, 다양한 화학물질에서 나타나는 여러 힘을 도출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뉴턴이 시도했던 것은 뉴턴의 사후에 나타날 18세기의 과학의 모습에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조프루아 (Etienne-François Geoffroy, 1672-1731)가 집필한 『친화력 표』 (Affinity Table, 1718)에서 보여지는 화학적 친화력에 관한 논의는 뉴턴의 사색적 전통을 이어받아 전개한 것이었다. 무게가 없는 입자 를 가정한 칼로릭 이론이나 전기학, 자기학에서 역제곱 법칙을 도출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모두 뉴턴의 영향을 받아 추진된 것이었다.

일단 도출된 힘으로부터 수학적으로 현상을 다시 얻어내는 과정은 경험적이고 사색적인 과정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프린키피아』와 『광학』의 차이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뉴턴에 의해서도 완전히 융합되지 않았으며, 뉴턴주의자들도 시기와 분야에 따라서 서로 다른 쪽을 강조했다. 따라서 18세기에 다양한 '인력'에 바탕을 둔 추측이나, 사색적 연구가 많이 나오는 한편에서는 해석역학 등과 같이 이론적이고 수학적인 성격이 강한 과학도 동시에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이중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뉴턴의 과학방법론 을 따르는 18세기 뉴턴주의 과학은 내용이나 구체적인 방법상으로 영향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과학"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즉 뉴턴의 과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분야는 서로 다르더라도 단일한 방법, 관점 등으로 과학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비전을 갖게 해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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