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와 조선의 선박들
실생활과 전시 넘나든 뛰어난 기술 자랑
2007년 04월 19일 | 글 | 편집부ㆍ |
 
항공모함, 잠수함, 이지스함 등 외국의 첨단의 군함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우리는 저런 군함을 만들 수 없는가’하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장 우수한 군함을 만들어온 해양국가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다. 우리는 육지에서 완패한 임진왜란을 바다에서 역전시킨 해양강국이었다. 그리고 이는 고려시대 이래로 이어져온 조상들의 탁월한 선박 건조 능력이 바탕이 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선(韓船)의 선구자 완도선

인양된 목재를 이용해 복원한 완도선의 밑바닥.
1984년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어두지섬 앞바다에서 한척의 침몰선이 발굴됐다. 함께 인양된 3만여 점의 도자기를 분석한 결과, 이 배는 고려시대 11세기 중반의 선박으로 해남군 산이면 일대의 가마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가득 싣고 항해하던 중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

선체와 함께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를 비롯해서 총 3만여 점으로 고려청자가 대부분이며 잡유 26점, 토제유물 2점, 철제유물과 목제유물이 각각 18점과 9점이다. 이들 유물은 전라 경상 제주도의 지방관청, 민가, 그리고 사찰 등에서 실생활에 사용된 것으로, 배로 이 유물들을 운송하다 이곳에서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15m 해저에서 발굴된 완도선은 선수와 선미부가 유실된 채 배의 중앙부분만이 남아 있으나, 우리 한선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시아권에서 발견된 구조선(構造船)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도선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배와 더불어 한선의 발생과 발달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완도선의 구조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①용골이 없고 바닥이 평평한 단면구조이다. ② 가룡목으로 좌·우현을 고정시켰다. ③흠불이로 외판을 접합한 구조로 돼있다. ④ 충해 방지를 위해 연화법(그을리기)을 사용했다. ⑤돛대가 하나인 단주범선이다. ⑥사용된 선재는 한국산 육송 등이며, 나무못이 사용됐다. ⑦복원선의 길이는 약 9m, 선폭은 약 3m, 무게는 약 10t이다.

완도선이 갖고 있는 특성은 바로 우리네 배의 전통적 특성이다. 조선시대 말까지 우리 한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형태를 유지했다. 그것은 갯벌이 많은 우리 연안의 특성을 이용한 것으로 배를 갯벌에 올려놓고 물건을 싣고 내리기 편리하고 전투시 배를 은폐시켰다가 유리한 시점에 배를 출항시키기도 좋았다.

한선은 쇠못 대신 참나무나 박달나무로 된 나무못을 사용했다. 쇠못은 염분이 있으면 쉽게 부식되는데 철이 부식할 때 나무도 함께 부식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 선조들은 나무못을 사용했다. 배가 물에 들어가면 밖에 있는 선재가 불어 나무못은 오히려 강도가 높아진다. 고려 원종 15년(1274)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단행했을 때, 일본 군선과 몽고의 군선은 풍랑에 파손됐으나 고려선만은 완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일본과 몽고의 군선이 쇠못을 사용해 풍랑에 쇠못 구멍이 점차 넓어져 자연 파손됐으나, 고려 군선은 나무못을 사용하고 가룡목이 풍랑에도 선체를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도시를 만든 조운선(漕運船)

곡식을 실었던 조운선. 유사시에는 병선으로 활용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수도를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성으로 옮긴 이유 중의 하나가 세곡을 옮기는 조운로가 막혀버렸기 때문이었다. 개성을 굽이쳐 흐르던 예성강의 토사가 쌓여 선박의 운항과 접안이 어렵게 됐다. 이로 인해 지방의 세곡과 물산들이 때맞춰 도착하지 못해 개성은 생필품 부족과 물가의 폭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 위기를 극복해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안이 바로 조운이 편리한 한성으로 수도를 정하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육로가 개발되지 못한 시절에 각 지방의 특산물과 생산품을 쉽게 유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수로였다. 물의 양이 많고 맑은 한강은 조선을 부흥시킬 조운로로 이용하기에 제격이었다. 작게는 나룻배로부터 크게는 병선이나 조운선이 동원돼 많은 물동량을 적은 노동력과 저렴한 비용으로 먼 지방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조운선은 국가에서 운용하던 관용선(官用船)으로 관청에서 수납한 세곡과 중앙정부에서 소용되는 일용품이 거의 조운선으로 운송됐다. 조운선은 조선 전기에는 병조선(兵槽船)이라 불렸다. 상장(上粧, 구조물)을 설치하면 병선이 되고 상장을 철거하면 조운선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는 평시에 조운선으로 활용하다 전시에는 상장을 설치해 병선으로 운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사시 재빠른 전시체제로 돌입하기 위한 지혜의 소산이었다.

조운선이 정박하는 나루와 포구에는 관련 관리와 인부, 그리고 상인들이 모였고 이들의 식사와 침식을 위해 또 다른 주민들이 모이게 됐다. 처음에는 조그만 마을로 시작된 나루와 포구는 얼마 되지 않아 번창하는 도시로 변했다. 조선시대 조운선이 정박해 새로운 도시가 된 대표적인 예는 서울의 용산과 마포, 노량진, 동작나루, 양화진, 충청도의 충주, 전라도의 법성, 덕성, 영산포, 강원도의 원주, 춘천, 황해도의 금곡, 조음, 그리고 평안도의 안주, 삭주, 의주 등이 있다.

16세기 동양에서 가장 훌륭한 조선술을 보유했던 조선은 17세기 이후 군선 개량에 소극적이었다. 이는 조선의 지도이념인 주자학이 실용성보다 의례를 중시하면서 집권층이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의에 반하는 붕당정치와 세도정치로 일관함으로써 백성들의 창의성과 기술개발을 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술자를 쟁이(장인)라는 말을 붙여 천시한 결과였다.

우리와는 반대로 서양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국민의 창의성과 기술 개발을 장려해 증기선을 만들고 위력적인 대포를 제작하게 됐다. 그들 근대식 군함이 조선 영해를 침범했을 때, 인력과 풍력에 의존했던 우리나라의 범선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해 급기야 강제개항이라는 국치를 당하게 됐다.

해방 이후 우리는 조선업 분야에 괄목한 발전을 이룩해 세계 2위의 선박 수주국이 됐다. 이제 우리들은 전쟁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군함을 보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의력과 지혜를 개발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것이다.

<장학근의 ‘우리 역사 속의 군함’ 기사 발췌 및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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