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에서 해방시켜주는 인공해마
컴퓨터와 연결돼 1+1의 뇌가 된다
| 글 | 목정민 기자 ㆍloveeach@donga.com |
외워도 외워도 까먹는 인간의 두뇌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바이오닉 뇌’가 등장하면 ‘공부의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서기 2021년. 조니(키아누 리브스 분)는 실리콘으로 된 기억 확장 칩을 뇌에 이식했다. 그는 사실 뇌에 비밀정보를 입력해 의뢰인에게 전달하는 스파이다. 그는 유명 제약회사의 신기술을 자신의 뇌기억장치에 담아 외부로 유출하라는 특명을 받는데….

SF영화 ‘코드명J’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조니는 기억용량을 획기적으로 늘린 미래 인물이다. 한림대 의대 신형철 교수는 “조니가 머리에 심은 실리콘 칩은 인공 뉴런으로 만든 회로일 것”이라고 말했다. 아직 인공 뉴런 칩은 개발되지 않았지만 뉴런을 집적하거나 뉴런의 작동 메커니즘을 모사해 뇌의 기능을 강화하는 칩을 개발하려는 연구가 활발하다.


USB 닮은 인공해마
뇌의 기억용량을 높이면 기억력도 좋아진다. 평소 머릿속에 담아두기 힘들던 것도 쉽게 담아둘 수 있다. 가장 외우기 힘든 것을 뽑으라면 단연 영어단어다.
영어 단어는 두세 번 읽고 돌아서면 까먹기 일쑤다. ‘수능 필수 영단어 1000제’ 같은 책을 볼 때마다 ‘저 단어를 언제 다 외우나’ 눈앞이 캄캄하다. 다음은 헬라의 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희곡 ‘여성의 의회’(The Ecclesiazusae)에서 사용한 단어인데, 세상에서 가장 길다고 알려져 있다.

lopadotemachoselachogale-
okranioleipsanodrimhypotrim-
matosilphioparaomelitokatakechy-
menokichlepikossyphophattoperis-
teralektryonoptekephalliokigklope-
olagoiosiraiobaphetraganoptery-
gon(182자)

보기만 해도 한숨부터 절로 나오는 이 단어를 ‘잘’ 외우는 방법은 무엇일까. 암기카드를 만들거나 노랫말을 붙여도 외우기 쉽지 않다.

KAIST 바이오및뇌공학과 정재승 교수는 인공해마의 도움을 받으면 182자를 쉽게 외울 수 있다고 말한다. 해마는 10분 이내의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역할을 하는 기관인데, 이곳이 망가지면 건망증에 걸리거나 영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10분 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치매 환자도 해마가 망가진 경우가 많다. 정 교수는 “컴퓨터에 USB를 꽂아 메모리 용량을 늘리듯 뇌의 해마에 칩을 심으면 기억력을 강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과학자들은 입력된 정보를 계산해 결과를 도출하는 해마의 메커니즘을 수학적으로 분석한 뒤 이와 연산방식이 동일한 인공해마(실리콘 칩)를 만들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시어도어 버거 교수는 쥐의 뇌 해마에 이 칩을 이식했다. 연구팀은 쥐의 손상된 해마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각 부위를 전기신호로 자극했다. 이 과정을 수백만 번 되풀이해 전기신호에 따라 쥐가 보이는 반응을 분석했다. 이 정보를 취합해 쥐 해마의 수리적 모형을 만들고 칩에 옮겼다. 연구팀은 다른 쥐의 해마를 파괴해 기억을 못 하도록 만든 뒤 해마가 있던 자리에 칩을 심었다.

기억력을 테스트하는 ‘모리스 수조 실험’. 물이 가득 담긴 수조 한가운데 목적지(A)를 놓고 쥐가 목적지를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한다.
물이 가득 든 수조 한가운데 투명한 섬을 만었다. 수조에 빠진 쥐는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다가 우연히 섬을 찾아 살아난다. 10분 이내에 같은 실험을 반복하면 정상적인 쥐는 투명한 섬이라 잘 보이지 않지만 상대적 위치를 기억해 곧바로 섬을 찾아간다(모리스 수조 실험). 이 행동을 반복할수록 섬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진다. 연구팀이 만든 칩을 장착한 쥐도 보통 쥐와 마찬가지로 섬을 찾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점 짧아졌다. 인공해마가 성공적이었다는 말이다.

신형철 교수는 “인공해마가 현실화되고 성능이 향상되면 기억 속도, 양, 활용 등 모든 면에서 현대인류는 ‘폐기처분’될지도 모른다”며 “인공해마는 신인류의 출현인 동시에 인간을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시키는 도구”라고 말했다.


암기 ‘짱’ 두뇌설명서-1
구 성 : 실리콘 칩
사 용 법 : 칩을 뇌 중앙의 해마에 심는다
사용기간 : 이식한 뒤 평생
사용대상 : 해마에 이상이 생겨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 기억력을 높이고 싶은 일반인


현실성 높은 뇌-컴퓨터 접속기술
아직 인공해마는 기초연구 단계다. 신 교수는 “기초연구단계인 인공해마를 대신해 해마를 외부의 컴퓨터와 연결하는 뇌-컴퓨터 접속기술(BCI, Brain-computer interface technology)이 현실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뇌가 받아들인 정보를 컴퓨터로 보내 처리하면 뇌의 장점과 컴퓨터의 장점을 동시에 쓸 수 있다. 한 사람의 몸에 뇌가 2개 달린 셈이다.

20대 루게릭병 환자인 미국의 매튜 맥기 씨는 2006년 뇌 피질의 운동영역에 ‘브레인 게이트’라는 칩을 이식했다. 그 결과 맥기 씨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컴퓨터 화면의 포인터를 움직였다. 그의 생각에 따라 뇌의 뉴런이 활성화되고 이 신호가 컴퓨터로 옮겨져 움직임을 이끌어낸 것이다. 신 교수는 “BCI 기술이 발전하면 기억을 담당하는 부위인 해마도 컴퓨터와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루게릭병 환자인 미국인 매튜 맥기 씨는 ‘브레인 게이트’를 뇌에 이식해 컴퓨터와 뇌를 연결했다. 현재 그는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조작해 모니터의 마우스포인터를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뇌의 해마에 칩을 심거나 뇌를 외부 컴퓨터와 연결하는 기술은 알츠하이머, 뇌졸중, 간질 같은 뇌질환으로 기억력을 상실한 환자들에게 희소식이 될 것이다. 우울증에 걸린 뇌에 인공칩을 넣어 항상 행복할 수 있도록 조절할 수도 있다. 신 교수는 “해마는 학습, 기억, 감정 등 거의 모든 인간의 중요한 고등 정신기능에 직접 관련돼 있다”며 “해마 BCI가 개발된다면 인류의 사회는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암기 ‘짱’두뇌 설명서-2
구 성 : 자석 달린 TMS 휴대용 기기
사 용 법 : TMS로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
사용대상 : 기억력, 공정한 판단력, 행복도를 높이고 싶은 일반인 누구나
주의사항 : TMS의 부작용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과도하게 사용하면 위험할 수 있음


자석이 천재 만든다
기억력을 높이려고 머리에 칩을 심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겐 쉬운 결정이 아니다. 두개골을 열고 닫아야 하며, 뇌의 정중앙에 있는 해마에 칩을 심다가 뇌의 다른 부위를 다칠 위험도 있다. 일상에서 간단한 도구로 뇌 능력을 높일 수 없을까.

뇌는 전기장, 자기장, 적외선으로 자극할 수 있다. 이 중 전기장은 부작용이 있고 적외선은 두개골을 투과하는 능력이 낮다. 반면 자기장은 뉴런의 분화를 촉진한다. TMS(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는 자석코일로 뇌조직에 자기장을 일으켜 뉴런을 활성화시키거나 무력화시킨다.

뇌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브레인 게이트’.
미국 뉴욕 시립대 포르투나토 바탈리아 박사는 2007년 5월 보스턴에서 열린 미국신경과학회에서 쥐의 뇌를 TMS로 자극한 결과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서 뉴런의 분화가 촉진됐다고 밝혔다.

연구팀이 TMS로 5일 동안 뇌를 자극한 결과 정보를 장기간 저장하는 신경계의 메커니즘이 활성화됐다. 바탈리아 박사는 “쥐 실험 결과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면 노화나 노인성 치매로 인한 기억력 저하를 TMS로 예방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정재승 교수는 “미래에 일반인들이 뇌를 ‘업그레이드’할 때 수술이 필요 없는 TMS기술을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측했다.

인공해마와 BCI, TMS기술이 발달해 뇌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면 기억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 우울증 같은 질병도 예방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행동과 사고를 담당하는 뇌를 업그레이드시키는 일은 인간의 삶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과 맞닿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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