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호의 대양도전기②…“사라진 섬을 찾아라”

맹그로브 숲 해안가 황폐화 속도 빨라져

2008년 12월 11일
 



권영인 박사가 지난달 24일 그랜드바하마 북서쪽 우드케이 섬에서 황폐화된 맹그로브 숲을 살펴보고 있다. 그랜드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 kunta@donga.com


“어? 이상하네. 섬이 없어요. 지도에 있어야할 섬이. 허리케인에 쓸려 나간 모양입니다.”

지난달 25일 오전 10시. 조타석에 앉아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모니터를 보며 방향타를 잡고 있던 권영인 박사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권 박사의 옆에서 수심을 확인하는 송동윤 씨도 어리둥절한 표정이긴 마찬가지.

25일 장보고호는 산호와 맹그로브 나무의 생태를 점검하기 위해 섬의 북서쪽 끝에 있는 샌드케이 섬으로 향했다. 두 시간 남짓 주 돛과 보조 돛을 펴고 미끄러지듯 바다를 달린 장보고 호 선수(船首)에 멀리 섬 하나가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뒤 GPS 모니터에 알쏭달쏭한 화면이 떴다. 지도상에 나타난 섬 위로 장보고 호가 지나는 모습이 포착된 것.

권 박사는 “최근 이 지역 섬의 지형이 크게 바뀐 것 같다”고 했다. 장보고호의 GPS에 넣은 지도 메모리는 10년 전 제작된 것이었다. 10년 사이에 뭔가 큰일이 일어난 셈이다.



24일 권영인 박사가 우드케이 섬 생태계를 탐사하기 위해 북쪽 바닷가로 상륙하고 있다.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kunta@donga.com
망원경 너머로 멀리 야자수 두 그루와 작은 맹그로브 숲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도에 나타난 섬 크기는 지금보다 5배가 훨씬 넘는 듯 했다. 투명한 코발트색 바다 위로 하얀 햇살이 쏟아지며 바닥의 해초와 산호가 마치 손을 뻗으면 잡힐 듯 어른거렸다.

권 박사는 곳곳에 도사린 암초와 산호를 피해 조심스럽게 배를 모래톱 가까이로 몰아갔다.

“앗!” 권 박사의 입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졌다. 수심 8피트를 가리키던 수심계가 변덕을 부리더니 갑자기 3피트를 가리켰다. 뒤를 보니 방향타와 추진 프로펠러도 모래톱에 단단히 처박혔다. 방향타와 프로펠러가 바닥에 걸리면 끝장이다. 자칫 배가 큰 파도에 부딪혀 밀리면 그대로 좌초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숨 막히는 위급 상황. 난파의 위기감이 배를 엄습했다. 신속하게 닻을 다시 올리고 배를 후진시켜야 했다. 동윤 씨가 배 앞머리로 뛰어나가 닻을 들어올리는 동안 권 박사는 조심스럽게 후진 엔진을 돌려 배를 섬 바깥쪽으로 뺐다. 잠시 뒤 배는 모래톱을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배와 섬 사이의 거리는 100여m. 이제는 상륙이 문제다. 권 박사와 촬영팀은 장보고호에 있는 카약과 구명조끼를 이용하기로 했다. 권 박사는 사물함에서 부삽과 토양 샘플을 넣는 코어 채취 장치를 꺼내 노란 배낭에 넣었다. 짧은 쇠파이프 형태의 코어 장치를 모래톱에 40~50cm 깊이로 꽂으면 최근 수년간 섬에 쌓인 퇴적물 성분 변화를 알아낼 수 있다.

권 박사가 카약을 몰고, 이성환 PD와 김태곤 감독이 카약 뒤에 매달려 물장구를 치기로 했다. 동윤 씨는 수심 확인을 위해 배에 남기로 했다. 한국보다 훨씬 남쪽이지만 카리브해의 겨울 바닷바람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섬에 가까워질수록 할퀴고 깨진 흔적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바다 한가운데 말라 죽은 맹그로브 나무 등걸이 을씨년스러움을 한껏 더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섬 안팎은 허리케인의 영향으로 맹그로브 숲과 해안 퇴적물들이 모두 깎여나간 상태였다. 카약에서 내려 섬으로 다가서니 바닷가에 폐허가 된 계단과 사람이 살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케인으로 숲과 함께 사람들의 삶의 터전마저 사라지자 섬을 버리고 모두 다른 곳으로 이주한 것이다. 권 박사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져나갔다.



허리케인의 습격으로 황폐해진 우드케이섬의 맹그로브 숲.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kunta@donga.com

전날인 장보고호 탐사대는 같은 광경을 목격했다. 24일 장보고 호는 그랜드바하마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 남짓 거리의 우두케이 섬을 찾았다.

이곳에서도 서쪽 바닷가에 죽은 맹그로브들이 흉측한 몰골을 드러낸다. 2004년 이 지역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은 바하마 서쪽 섬들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자신을 ‘칼’이라고만 소개한 한 어부는 “이 섬도 원래 맹그로브 나무들이 무성했는데 최근 잇따른 허리케인으로 인해 모두 파괴됐다”고 말했다.

짠 바닷물에서도 살 수 있는 맹그로브는 해안가 침식을 막아주고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 외에도 해안 생태계에 영양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맹그로브 나무가 죽자 섬의 침식 속도도 점차 빨라지게 됐다.



지난달 25일 그랜드바하마 서북쪽에 위치한 샌드케이 섬에 상륙하기 위해 카약을 타고 접근하고 있다.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 kunta@donga.com

섬 곳곳에서는 죽은 소라와 고동 껍데기기 무더기로 발견됐다. 나무가 사라진 숲 속에서는 깨진 술병과 사람이 먹다버린 쓰레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소라를 비롯한 해양 수산물의 남획과 환경 파괴 문제는 바하마가 최근 겪고 있는 심각한 환경 문제이기도 하다.

한동안 바닷가 곳곳과 숲 속을 살펴본 권 박사는 해변에서 모래 코어를 채취해 배로 가지고 돌아왔다. 주 성분이 규소인 한국의 모래와 달리 이곳의 모래는 부드러운 석회질 가루로 이뤄져 있다.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kunta@donga.com

이날 밤 웨스트엔드 선착장으로 돌아온 장보고호 선실 한 켠에 마련된 임시 실험실에서는 이날 채취한 모래 구조를 분석하는 작업이 진행됐다.(계속)



24일 권영인 박사가 우드케이 섬에 상륙한 직후 모래 코어를 채취하고 있다.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kunta@donga.com



권영인 박사가 우드케이섬 서쪽 해안가에서 파도와 바람에 깎여나간 바위를 살펴보고 있다.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kunta@donga.com



황폐해진 맹그로브 숲 곳곳에서 발견되는 버려진 술병.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 kunta@donga.com



25일 송동윤 씨가 해질녘 샌드케이섬 탐사를 마치고 웨스트엔드 선착장으로 귀환하는 동안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그랜드 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기자kunta@donga.com


그랜드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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