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호의 대양도전기③…“시계 필요 없어요”

비상식량으로 매일 연명…무료함과 사투

2008년 12월 15일
 

선상 생활은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버티기 힘들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보고 호의 서너 평 남짓한 생활공간에서 남자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별로 없다. 불현듯 밀려드는 ‘지루함’도 참기 힘든 선상의 일상이다. 그저 담배 한대를 입에 물고 애써 머리를 텅 비우는 것 빼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





●아침 7시, 기상

장보고 호의 아침은 7시부터 시작된다. 한 달이 넘는 항해를 하다보니 이제는 알람시계를 맞추지 않아도 자연히 눈을 뜨게 된다. 사실 장보고 호 선실에는 시계가 없다. 매일매일 똑같은 일상에서 시계는 어쩌면 그저 사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머리를 깎지 못해 덥수룩해진 머리를 손으로 가라앉히며 권영인(47) 박사는 “파도라도 높게 치는 날이면 기상 시간은 더 앞당겨 진다”고 했다. 어른 한 명 겨우 누울 정도 크기의 한 평이 채 안되는 선실에서 매일처럼 토막 잠을 잔지도 벌써 한 달여. 기지개조차 펴지 못하는 키 작은 선실을 나서는 권 박사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 소리가 흘러나온다. 맞은편 송동윤 씨의 선실에서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린다. 매일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이 벌써부터 힘들게 만든다.

아침 세수나 양치질은 건성일 수밖에 없다. 물은 배에서 연료보다도 더 몸값이 높은 가장 중요한 자원이다. 배에 딸린 물탱크 들어있는 18갤런의 물로는 채 일주일도 버티기 힘들다. 당연히 샤워는 상상조차 할 수도 없다. 집에 있을 때는 매일처럼 샤워를 했던 송 씨로서는 못 씻는다는 것만큼 참기 힘든 일은 없다. 그나마 시설이 좋은 ‘마리나’(선착장)에나 들어가서야 따뜻한 물로 피곤한 몸을 달랠 수 있다. 취재진이 가져온 물 티슈 봉지를 건네자 송 씨의 얼굴이 순간 활짝 핀다.




●‘김치볶음, 쇠고기, 또 김치볶음, 쇠고기’

아침 8시, 장보고 호의 연구실이자 거실, 식당으로 쓰이는 중앙 선실 테이블 앞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오늘의 아침 메뉴는 오트밀 죽과 비스킷. 코펠에 들어있는 작은 밥그릇에 오트밀 가루를 넣고 뜨거운 물을 살짝 부으면 죽이 금방 완성된다. 어려운 물 사정은 메뉴에 그대로 반영된다.

두 사람은 밥그릇을 입으로 ‘호호’ 불며 숟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비스킷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후루룩 후루룩’ 숟가락질 서너 번에 금방 밥그릇 바닥이 드러났다. 동윤 씨가 ‘대선배’를 위해 페트병 물을 조심스럽게 따른다. 전날 선착장 인근의 호텔 수도꼭지에서 받아온 것이다. 당일 항해 일정을 논의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조용한 침묵이 흐른다. 항해가 거듭되면서 동윤 씨는 아침을 거르는 일이 많아졌다. “원래 아침을 잘 안 먹지만 입맛을 점점 잃어간다”고 했다.

점심과 저녁 메뉴도 거의 바뀌지 않는다. 메뉴는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식량. 동결 건조된 군용 비상식량을 민수용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나 종류는 ‘김치볶음밥’과 ‘쇠고기덮밥’ 달랑 2개뿐. 권 박사는 약 100일치에 가까운 비상식량을 배에 실었다.

때때로 찰고추장이 떨어진 입맛을 돋운다. 미국에서 준비한 플라스틱 4통 분량의 김치는 벌써다 시어 꼬부라졌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냉장고 가동을 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딱 김치파전 부쳐 먹으면 좋을 만큼 시큼한 냄새가 냉장고 안에 가득했다.



장보고 호의 공식 주방장이라고 밝힌 동윤 씨는 요즘 들어 별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정된 재료, 한정된 물, 한정된 불을 사용해 요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는지 동윤 씨의 손맛은 날로 ‘일취월장’하고 있다. 영양보충을 위해 준비한 미국산 꽁치 통조림과 스팸 통조림, 신 김치, 간 마늘, 비상식량에 들어있는 된장 가루가 재료의 전부다.

어쩌다 항구에 입항하는 날이면 간단한 야채 한 두 개가 더 추가된다. 선실 한 쪽에 마련된 싱크대에서 된장국의 간을 보고 있는 동윤 씨의 뒷모습을 보면서 권 박사는 “보기만 해도 정말 대견하다”고 했다.

● 생리현상 펌프질로 해결

불편한 것은 샤워와 식사 뿐 만이 아니다. 좁은 배 안에서 매일매일 꼭 찾아오는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생리현상을 해결하러 화장실에 갈 때마다 매번 진풍경이 펼쳐졌다.

장보고 호에는 선실 한 쪽으로 샤워실 겸 화장실이 마련돼 있다. 변기 한쪽으로는 펌프 손잡이가 달려있다. 펌프의 압축력을 이용해 오물을 내려 보내고 세척용 물을 끌어올리기 위한 장치다. 오물은 보관 탱크에 모아놓았다 항구에서 버리기도 하지만 큰 바다로 나서면 그대로 내보내기도 한다.

물을 아끼기 위해 변기를 씻어낼 물은 바다에서 끌어온다. 이 때문에 볼 일을 다보고 나서는 옆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30~40번씩 펌프질을 해야 한다. 두 사람은 이미 체질이 돼 버린 모양이지만 처음해보는 사람은 이마에 땀이 맺힐 때까지 펌프질을 해야 했다.
장보고 호에는 이밖에도 ‘제2의 화장실’이 있다.

배 뒤에 있는 계단이 바로 그것이다. 권 박사는 “자연의 힘으로 충분히 자정이 가능하다”며 “배 운항 중에 여유가 없을 때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구명조끼를 입고 흔들리는 계단 끝에 매달려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일은 보는 사람도 짜릿하다.




●노트북 디지털 현미경으로 꾸민 한 평 연구실

장보고 호의 실험실은 권 박사의 개인 선실 바로 앞에 위치해 있다. 긴 싱크대 모양의 작고 소박한 실험대에는 책 몇 권, 권 박사의 개인 컴퓨터, 디지털 현미경이 올려져 있다. 권 박사는 이곳에서 매일 밤 일기를 쓰고 그날 항해 일지를 정리한다.

닻을 내리고 정박한 날에는 배 뒤편에 설치한 센서를 내려 메탄과 이산화센서를 측정하기도 한다. 섬에라도 상륙한 날이면 모래톱에서 가져온 샘플을 살펴본다. 그랜드바하마 북서쪽 샌드케이의 모래톱에서 가져온 토양 샘플을 살펴보던 권 박사는 “많은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급적 정리를 꼭 해두려고 한다”고 했다.

장보고 호는 아직까지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지 못했다. 미국동부운하를 따라 내려오면서 바닷물과 대기 중에 섞인 메탄과 이산화탄소 농도를 측정했을 뿐이다. 초보 선장과 선원에게 항해와 연구를 동시에 진행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장보고 호는 11월 20일 미국을 떠나기 전 여섯 상자 분량의 자료를 버렸다. 카타마란 형 요트는 가벼워야 빠른 속도를 낸다. 큰 바다에서 속도를 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결국 무게가 많이 나가는 짐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권 박사는 일부 자료를 제외하고 탐사를 떠나기 전 산 책과 도서관에서 복사해온 자료를 모두 처분했다. 그렇다고 배와 두 사람의 안전을 위해 필요한 항해 장비들을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기와 바닷물에 녹아 있는 메탄가스와 이산화탄소를 측정하는 컴퓨터도 출항 1주일 만에 고장을 일으켰다. 배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흔들림 때문이었다. 크고 작은 진동은 정교한 전자장비의 천적이다.

● 밤 9시면 하루 일과 끝

장보고호 저녁은 일몰과 함께 시작된다. 요즘 들어 낮 길이가 짧아지면서 식사시간은 더 앞당겨졌다. 장보고호의 유일한 동력원은 태양광 발전기와 풍력발전기. 하루 온종일 전기를 만들어도 장보고 호의 전력 사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해가 진 뒤 2~3시간이면 전기를 꺼야한다. 권 박사가 하루 일지를 정리하는 동안 동윤 씨도 자신의 일기를 써내려간다.

“이곳에서 생활을 기록으로 남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회가 주어지면 어디 기고도 한 번 해보고 싶어요.”
정리 정돈을 잘 하는 동윤 씨의 선실은 한 달 가까운 선상 생활에도 비교적 깔끔했다. 어스름한 불빛 아래로 한쪽으로 책들이, 겨울과 여름옷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가져온 MP3플레이어는 충전이 여의치 않아 무용지물이 된지 꽤 됐다.

섭씨 20씨 안팎의 카리브해 지역이지만 밤바다 날씨는 꽤 쌀쌀했다. 채 10시가 되기도 전 동윤 씨가 선실 불을 끄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권 박사도 일찌감치 침낭속에 들어갔지만 이날 역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파도가 크게 치는 날이면 신경이 쓰여 잠을 잘 수 없어.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들리면 나가봐야하고. 잠을 자는건지 마는건지..." 이따금씩 배 바닥을 때리는 파도 소리만 불 꺼진 선실 안을 무겁게 맴돌았다. (계속)





그랜드바하마=박근태 동아사이언스 기자 kunt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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