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린과 숨겨진 딸, 그리고 유머
천재 과학자의 복잡한 사생활
2007년 03월 13일 | 글 | 편집부ㆍ |
 
바퀴가 안 달렸잖아?

올름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위에는 아인슈타인 얼굴(왼쪽 아래)이 숨어있다.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작은 도시 울름에서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첫 울음을 터트렸다. 갓 태어난 그는 커다란 덩치와 일그러진 머리통으로 외할머니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그러진 머리는 정상이 됐지만 각진 뒤통수는 그 후에도 변치 않았다.

세 돌이 안 된 아인슈타인은 여동생 마야가 태어나자 “바퀴가 안 달렸잖아?”라는 깜찍한 말을 했다고 전해진다. 심통이 난 얼굴로 이런 말을 했다는데, 그는 동생이 생긴다는 걸 장난감이 생기는 일쯤으로 여긴 것 같다.

바이올린은 아인슈타인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그에게 바이올린을 사주고 음악선생을 붙여주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하기 싫다고 화를 내며 의자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여선생은 놀라서 도망갔고 새로운 선생이 와서 그를 가르쳤다. 그는 수년간 억지로 바이올린을 배웠다.

이런 역경을 거친 후 뜻밖에도 아인슈타인은 음악중독자가 됐고 파이프 담배처럼 바이올린을 항상 끼고 살았다.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느닷없이 “그래, 바로 이거야”라며 문제를 푼 적도 있다고 한다. 그가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자였는지는 논란거리였지만, 후에 인도주의적 사업을 돕기 위해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콘서트를 갖기까지 했다.

세 여자와 숨겨진 딸

1896년 스위스 아라우 칸톤 고등학교 시절의 아인슈타인. 앞줄 맨 왼쪽에 앉아 있는 학생이 아인슈타인이다.
아인슈타인은 1889년에는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그런데 학교의 분위기는 군대처럼 무거웠다. 그가 3학년이 됐을 때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을 찾아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족을 데리고 갔고 홀로 남은 아인슈타인은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가족 곁으로 온 아인슈타인은 시험에만 합격하면 입학할 수 있는 스위스 취리히 공대에 도전했다. 대학 입시에서 수학과 물리학은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나머지는 엉망이었다. 다행히 물리 부분을 채점했던 하인리히 베버 교수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어떤 고등학교에서든지 졸업장을 받아오면 이듬해 입학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취리히에서 40km 떨어진 아라우에 있는 고등학교를 선택하고 그곳 교사인 요스트 빈텔러의 집에 하숙하게 됐다. 그는 자유스런 학교 분위기를 좋아했고 하숙집에서 첫사랑 마리를 만났다. 봄방학 때 가족 곁으로 온 아인슈타인은 마리와 사랑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취리히 공대에 입학해 세르비아 여학생 밀레바 마리치를 만났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무렵에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결혼하기로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밀레바가 나이가 너무 많고 (그녀는 아인슈타인보다 4살 위였다) 여성적이지 못하며 건강하지도 않아 며느릿감으로 완전히 실격이라고 생각해 둘의 결혼을 반대했다.

둘은 1903년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해 한스와 에두아르트 두 아들을 두었다(1986년 공개된 두 사람 사이의 편지들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결혼 전 둘 사이에는 리제를이라는 딸이 이미 있었고 이 딸은 두살 때 병으로 죽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둘째 아들 에두아르트는 정신분열증에 걸려 있었고 밀레바와 시어머니의 갈등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사이가 멀어졌고 아인슈타인이 일약 세계적 스타가 되던 해인 1919년에 이혼했다. 두 아들은 밀레바가 키우게 됐고, 아인슈타인은 딸 둘을 둔 육촌 누이 엘자와 곧바로 결혼했다. 1922년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타자 상금 일부를 밀레바에게 이혼 위자료로 줬다.

발길질할 장소 발견 24달러 75센트

근엄한 과학자에게 유머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아인슈타인은 연구를 하다가 짬이 나면 유머를 얘기하기 좋아했다. 아인슈타인의 연구 조수 중에는 1948~ 1949년에 일했던 헝가리 출신 존 케메니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즐기는 유머를 되풀이해 얘기했기 때문에 케메니는 아인슈타인이 가장 좋아하는 유머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수리공에 관한 유머였다.

한 남자가 자기 차를 수리하러 갔다. 수리공은 찬찬히 살펴보더니 차를 한번 세게 걷어찼다. 그러자 차가 멀쩡하게 굴러갔다. 차 주인은 흐뭇해했고 수리공은 25달러(1940년대 후반엔 상당한 거금)를 달라고 했다. 어이가 없어서 항목별 청구서를 요구하자 수리공은 ‘발길질 25센트, 발길질할 장소 발견 24달러 75센트’라는 청구서를 써주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유머를 좋아한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발길질이 아니라 어디에 발길질해야 할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의 이름을 꺼내지 마라

러시아 스파이 마구에리타 코넨코바와 아인슈타인. 그는 코넨코바가 러시아로 돌아가기 전에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시계는 1998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 나왔다.
아인슈타인은 전쟁이 한창이던 1914년 자신의 평화주의적 신념을 선포했다. 당시 베를린의 모든 지식인은 독일 군대와 그 지휘자를 지지하고 독일 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탄원서를 내고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유럽인에게 보내는 호소’를 작성해 지식인들이 모두 나서서 고삐 풀린 민족주의자들의 광분을 끝내자고 촉구했다.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후 유대인 학자들은 급속히 대학에서 쫓겨났고, 아인슈타인의 이름을 언급하는 일조차 금기시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인슈타인은 프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 사직서를 보내며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에도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1939년 8월 2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은 특히 유명하다. 미국이 독일보다 먼저 핵폭탄 제조 계획에 착수해야 한다는 걸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핵폭탄을 개발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며 태평양 전쟁을 끝냈다. 하지만 수십만의 희생자가 따랐다. 그래서인지 아인슈타인은 1945년부터 임종할 때까지 ‘핵 관련 지식인 비상대책회의’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한 사람이 말년에 아인슈타인에게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건 모차르트 음악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걸 의미하죠.”

<이충환의 ‘아인슈타인이 가장 좋아하는 유머는?’기사 발췌 및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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