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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 각 부분

 

하나(하흔): 벽체는 하나라 하며, 부재를 가위의 기능처럼 엮어서 펴면 울타리가 되게 하고 접으면 옮기기에 간단한 부피로 포개진다. ‘하나는 버드나무로 만든다. 여름에는 하나를 높게 하고, 겨울에는 낮게 한다.

       

오니(운흐니): 경사진 지붕면은 긴 장대로 된 서까래를 방사형으로 걸쳐 만드는데 이 서까래를 몽골어로 오니라 한다. 오니는 버드나무로 만들고, 상단은 천창을 이루는 원형의 틀(터너)의 측면에 준비된 구멍에 끼우고 하단은 고리를 만들어 벽체인 하나의 윗 부분에 걸고 가죽끈으로 묶는다. 게르 하나에 81개 또는 72개의 오니가 사용된다. 72란 수는 몽골의 72절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터너(도노, 토우노, 토흔): 게르의 지붕 한가운데에 있는 원형 천창(天窓)터너’(토우노)라 하는데 느릅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 만든다. 원을 이루는 틀 측면에 빙 둘러가며 구멍이 있어 여기에 우산살처럼 서까래 오니를 방사형으로 꽂게 되어 있다. 때로는 오니를 그냥 걸치고 가죽끈으로 고정시키는 방법도 쓰인다.

 

 

바간나(바흐칸): 천창 터너는 보통 두 개의 기둥으로 받쳐지는데 이 기둥은 바간나라 하며, 서까래인 오니가 모두 터너에 집중되므로 결국 지붕의 무게 대부분을 이 기둥들이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게르가 커지면 기둥이 네 개가 사용된다. 부족에 따라 세 개의 기둥을 쓰는 곳도 있다. 게르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 바간나는 우주목(宇宙木)으로서 샤먼도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에스기(이스끼): 게르를 덮고 에워싸 게르의 표피가 되는 펠트재료를 몽골어로 에스기라 한다. ‘에스기는 양털을 펴서 다져 만든다. 겨울에는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여름에는 한 겹으로 덮는다. 에스기 겉에는 에스기가 오래 가도록 광목 같은 천으로 덮는다. 펠트에도 세부 명칭이 있어서 천창 토오노를 덮는 것은 우르호나머지 지붕부분을 덮는 것을 테에베르’, 벽을 감싸는 부분을 토오르라 하며, 출입문을 감싸는 것을 우우드라 한다.

 

 

하알가: 문틀을 하알가라 한다. 문은 하나만 두며, 주로 동남쪽으로 둔다. 흔히 있는 북풍을 피하기 위함이다. 몽골어로 우우드 사이흐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하면 문을 지킨다는 의미이나 가정을 지킨다”, “집을 본다는 의미로 쓰인다.

 

 

 

 

 

엉긴 히드 사원, 라마불교의 쇠퇴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 당시, 라마교의 승려들이 탄압을 받아 환속을 강요당하고, 치욕적인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 몽골의 전체 인구의 26% 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으며 계속 부흥하고 있다. 국가 종교로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징기스칸 시대부터 비롯되었다. 징기스칸은 불교를 믿는 위구르인을 선생이나 공직자로 채용했다. 위구르인은 일반인으로부터 크게 존경받았고 몽골에 지대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왕위에 있으면서 징기스칸은 또한 주요 불교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후계자인 오게데이칸(Ogedei Khan)은 티벳의 라마승을 초대해 하라호룸(Kharakhorum)에서 불교의식을 배웠다. 그리고 여기서 샤머니즘이 결합되어 이러한 다신교적인 샤머니즘이 몽골의 전통적인 신앙이 되었다. 불교가 몽골의 정식 종교로 채택된 것은 쿠빌라 칸(Kubila Khan) 때의 일이다. 쿠빌라 칸은 불교를 원나라의 공식 종교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라마승 로디자틀산(Lodijaltsan)을 몽골 불교의 공식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라마승은 군대의 의무를 공식적으로 면제받았으며 세금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쿠빌라 칸의 노력에도 불교는 몽골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종교가 되지는 못했다. 불교는 상류층들의 종교였으며 티벳제국이 몰락함에 따라 불교도 그 지지기반을 잃고. 대신 샤머니즘이 16세기 중반부터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 황모파 불교(Yellow Hat sect Buddhism) 또는 라마교가 몽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라마교는 정치적 사회적 이유에서 몽골에 도입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라마교는 몽골의 지배계층이 그들의 입지를 종교적 인물을 통해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고, 둘째로, 티벳의 황모파 지지자들이 적모파에 대항해 몽골 지배층과 연합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라마교가 몽골에 도입된 세번째 이유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호전적인 몽골을 잠잠하게 만들 수단으로 라마교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1577, 알탄 칸(Altan Khan)은 티벳의 수장을 몽골로 초대했다. 알탄 칸은 몽골을 라마교로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것이다. 알탄 칸은 불교신앙을 법률에 통합하여 샤머니즘의 관행을 제거하는 법적인 근거로 삼았다. 그의 이 같은 시도는 아브타이 사인 칸(Avtai Sain Khan) 에 의해 지속되었다. 아브타이 사인 칸은 1586년 제3 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몽골 라마교의 중심으로 하라호름(Kharakhorum)에 주(Zuu)사원을 설립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라마교의 수장인 자나바자르(Zanabazar)의 지도아래 라마교 절과 학교가 생겨났다. 자나바자르는 상류 계급이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몽골인들에게 라마교를 전하는 데 열심히 노력했다. 이후 200년간 몽골 인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라마교는 점점 몽골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이 기간동안 승려들을 사원 밖으로 내보내 일하게 함으로써 몽골의 노동인구를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소위 "좌익편향(Left Deviation)" (1929-1932)이라는 이름으로 대략 300개의 사원을 폐쇄했다. 일부 승려들은 처벌이 두려워 떠났다가 1932"새전환운동(New Turn movement)"의 시작으로 다시 사원으로 돌아왔다. 이 운동은 신앙, 교육, 선전을 지향한 운동이었다. 1936년 사원 수는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폐쇄당한 300개 이상의 사원을 포함해 모두 767개에 이르렀다. 그리고 "좌익 편향(Left Deviation)" 직후의 기간동안 늘어난 승려의 수는 10,000명 이상으로 전체 모두 100,000명 이상의 승려가 생겨났다. 당시 성인 라마승은 전체 남성 인구의 40%이상을 차지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의 큰 문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몽골 공산당은 "사원의 기관화"를 실시했다. 이 같은 정책을 실시한 까닭은 몽골 공산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승려들은 사원을 떠나 세속의 생활로 돌아갈 것을 매우 강력히 권고 받았다. 1938년 약 20,000명의 승려들이 유목민이 되었으며 5,000명은 정부 지원 인원으로, 나머지 청년은 군대로, 어린이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승려들은 1930년대 중반 사원 방화와 파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1937년은 몽골 역사상 최악의 한해로 기록된다. 수백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천개의 불교서적이 불에 태워졌으며 100,000명 이상의 라마승들은 세속 생활로 돌아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후 40년 이상, 몽골인들은 공포 속의 종교 생활을 했다. 나이든 신자들은 100여명의 승려가 남은 중심 사원 간단 사원에 나갔으며 혹은 고비 사원으로 갔다. 고비사원에는 약 40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집에서만 종교생활을 했고 단체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중지되었다. 현재 독립국가인 몽골의 불교는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사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도 하고 1930년대 억지로 세상으로 쫓겨 났던 많은 승려들이 다시 사원으로 돌아와 원래 살고자 했던 삶을 살고 있다. 1990, 20여명의 여성 신자들이 세운 여성들을 위한 사원이 울란바트르에 세워졌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현재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활동에 나섰으며 몽골인을 서구 종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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