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트레킹에서는 아침과 점심 식사 때마다 식염포도당 두 알씩 먹었다. 식염포도당은 지금까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었는데 우연히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에서 전국일주를 계획하며 준비한 준비물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알고보니 마라톤 등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복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철 더운 환경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작업장은 물론이고 요즘은 군대에서도 혹서기 훈련 때 필수품으로 준비해 둔다고 둔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단순하게 땀을 흘린 후 염분만 보충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해질 균형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해질이란 우리 몸의 체액을 이루는 중요한 성분이라고 한다. 이심전심이었는지 마침 아는 분이 마나슬루 가는 것을 알고 식염포도당 한 통(천혜당제약, 1000정)을 보내와 100정 정도 가지고 갔다. 준비물 목록에도 넣어 동행자들에게도 가져오라고 했지만 대부분 가져오지 않았다. 내가 가져 온 것을 권유해도 어쩌다 한 번 먹는 시늉만 한다. 나는 이번에 운동을 별로 하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토굴 앞마당을 하루 50분 동안 '뺑뺑이 도는 일'도 두어 달밖에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트레킹 준비에서 가장 부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은근히 일정을 여유 있게 짠 덕을 좀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이번 트레킹에서는 덜 피곤했고 다람살라에서 가벼운 두통이 한 번 왔을 뿐이다. 운행 중 식염포도당을 계속 먹은 나와 무진행 보살님은 고소가 오지 않았다. 쿰부트레킹 때와는 달리 얼굴도 전혀 붓지 않았다. 그것이 식염포도당 덕분이라는 것을 100%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무진행 보살님이 막판에 조금 지쳤던 것은 고소 때문이 아니라 60대 중반의 나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체력저하 현상 탓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기적인 산행으로 체력훈련을 많이 했는데도 나중에 힘들어 했고 대부분 고소로 고생을 조금 했다. 아침은 야외식탁에서 먹었다. 자리는 그대로이고 텐트만 걷은 상태다. 약간 쌀쌀하지만 아직은 2000m 아래여서 그리 춥지는 않다. 식사하러 텐트에서 나오는 즉시 우리의 텐트도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들에 의해 걷힌다(영어로 쓴 글을 보면 이 대목에서 항상 무너진다-collapsed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출발 전 타시와 함께 동네 소년가 이 왔다. 발 한쪽에 상처가 나 있고 곪아 있다. 항생제가 필요한데 구급약이 든 가방은 모두 카고백에 넣었고 포터는 이미 출발한 상태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약에는 항생제가 없다. 우선 급한 대로 관절염 약을 3일분 주었다. 어쨌든 염증약이니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일부터는 구급약 가방을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7시 출발. 해가 비치는 시링기 히말을 보며 걸었다. 좁은 협곡에 있는 길은 강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출발한지 30분 쯤 지나자 동쪽 사면으로 건너는 허름한 다리가 하나 나왔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급경사 오르막인데 보통이 아니다. 산사태가 난 듯한 지역은 사다리를 설치해 놓았다. 이런 곳은 말도 다니기 어려울 것 같다. 8시에 1980m의 라나(Rana)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라나는 스넬그로브의 책에는 코야(Koya)로 나온다. 자매로 보이는 아이 둘이 마중(?)나와 있다. 이곳 아이들은 매일 지나가는 트레커들을 보는 게 심심한 산골생활의 유일한 구경거리일 것이다. 아이들이 아주 수줍어 한다. 네팔말로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다. 이곳은 티베트계 방언을 쓰기 때문에 티베트어도 잘 안통한다고 칼스텐은 말했다. 라나를 지나 잠시 후 다시 작은 다리를 두 개 더 건너 절벽길로 접어들었다. 두 번째 다리 아래에는 수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방앗간이 있다. 절벽길 중 한 곳은 산사태가 나 아슬아슬하다. 길이 거의 무너져 있다. 다행히 8시 45분 비히(Bihi)에 도착한 후부터 강바닥에서 한참 올라 온 평범한 산길이다(마나슬루 트레킹 지도에는 비히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 비히에서 오늘의 목적지 갑(Gap)까지 3시간이 걸린다고 마을 이정표에 쓰여 있다. 여기서부터 사마가온까지는 계속 서쪽을 간다. 햇볕이 들어와 따뜻한 한적한 산길을 걷는다. 비히를 넘어서니 산기슭 좁은 경작지를 찾아 마을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계곡 건너편에도 협곡을 끼고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인다. 마니월 하나를 지나자 제법 깊은 지류 계곡이 하나 나오고 그 위에 바닥을 나무로 깔아놓은 멋진 다리가 놓여 있다(지도 상단 중앙의 Mani Walls라고 쓰여진 곳). 이 계곡은 이곳 쿠탕콜라에서 제일 높은 시링기 히말에서 내려오는 빙하수가 만든 시링기 콜라다. 여기서 길이 갈라진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다리는 부리 간디키 강을 건너 왼쪽 사면으로 가는 다리다. 그쪽으로 가면 프록(Prok)이 나온다. 그 길로 가도 갑에서 만나지만 길이 험한 편이라 트레커들은 잘 이용하지 않는다. 1056년 9월 중순(14일 전후) 스넬그로브는 남루(남룽)에서 갑(Ghap)으로 내려온 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프록으로 간다. 잠시 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쿠탕(Kutang) 다음 날 우리는 남루(남룽) 마을을 통과하여 점점 좁아지는 협곡을 향해 내려갔다. 길은 이제 무성한 수풀에 둘러싸여 있고 우리의 등산화는 미끄러운 바위와 진흙에 위험스럽게 미끄러졌다. 우리는 불어난 급류 위에 놓인 단단한 나무다리를 건너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곧 천연 바위다리를 통해 오른쪽 사면으로 되돌아 왔다. 아래쪽 깊은 계곡에는 부리 간다키가 포말과 세찬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쿠탕으로 들어가고 있다. 1마일 정도 떨어진 곳부터 계곡이 넓어졌다. 길은 협곡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가파른 계단식 경작지로 둘러싸여 있는 높은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 보였다. 우리는 첫 번째 마을 착(Tsak, 지금의 갑)으로 가는 다리에 이르렀다. 우리의 포터들은 그곳으로 갔다. 왼편 사면으로 내려가는 길이 더 쉽기 때문이다. 빠상과 나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다른 길을 따라 오른쪽 사면의 프록(Prok) 마을로 갔다. 우리는 그 마을에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절벽 꼭대기 근처에 그려진 훌륭한 '연꽃에서 태어난' 붓다상을 보기 위해 멈추었다. 그 후 입구 초르텐을 통과하여 수확이 끝난 옥수수 대가 있는 밭 사이의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마을 중심에 이를 때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길가에 티베트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한 작은 소년 옆에 있던 작고 사나운 개가 우리를 보더니 짖으며 달려왔다. 소년은 놀라는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우리는 소년에게 절로 가는 길을 묻자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길을 가리켰다. "순례자들이니?" 우리가 물었다. 절 앞 넓은 베란다는 옥수수 알갱이가 든 통과 옥수수 더미로 가득차 있었다. 그 곳에 두 남자가 옥수수 알갱이를 까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타나자 바라보았다. 우리는 절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 아내가 안내해 줄 겁니다." 나이 많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불러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한 스님이(그는 유명한 라마다) 만일 우리가 가는 도중 낙챠(Naktsa) 곰빠를 방문하면 참배하라고 했다는 것을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아주 좋아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 사원 아래 마을인 롱(Drong)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어주었다. 법당 안에는 완벽한 티베트 경전 세트가 왼편 벽 선반에 있었다. 오른편 벽에는 1천 좌의 부처님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있었다. 가운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고 좌우에는 '무량광(Boundless Light, 아미타불)과 '자비의 눈(Glancing Eye, 관세음보살) 상이 있다. 그 라마는 우리가 불상들을 알아보는 것을 보자 더욱 기뻐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볶은 옥수수를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는 버터 램프 두 개를 사서 공양올리고 발코니에서 쉬면서 그에게 건너편 계곡에 있는 마을 이름을 묻고 춤(Tsum)으로 가는 높은 길을 가리켰다. 옥수수는 내 치아에는 너무 딱딱했지만 빠상의 방앗간에서는 잘 갈렸다. 비록 그가 위쪽 절로 오르는 가파른 길에서 목이 탄다는 불평은 했지만. 경사면 꼭대기에 정원으로 둘러 싸인 몇 채의 집들이 서 있었다. 우리가 부르자 한 비구니 스님이 나와 반갑게 절 안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평화와 분노의 신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있고 불단 위에는 '연화생(빠드마삼바바)'과 그의 두 여신 아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 석가모니 조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는 버터 램프를 공양 올리고 비구니 스님을 따라 방 두 개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우리에게 음료수 한 대접과 정원에서 따 온 채소 한 다발을 주며 우리의 순례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미안해했다. 스님은 우리에게 자기가 오랬동안 순례길을 다녀보았기 때문에 자주 잠잘 곳과 음식을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전에 우리는 그것을 슬픔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꺼이 감수했다. 우리는 존경스런 이 스님 앞에서 거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스님은 순례길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을 등에 지고 다녔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8명의 튼튼한 남자들이 우리의 짐을 지고 천천히 계곡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호화로운 원정대에 비하면 우리는 확실히 궁핍했다. 그것은 비단 10명의 대원으로 이루어진 마나슬루 원정대가 600명의 포터를 쓴 일본 팀의 경우와 비교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신선한 채소에 감사했다. (David L. Snellgrove, 협곡이 가파른 지형에 놓인 다리는 계곡의 하단부에 설치하기 때문에 다리가 있으면 다리를 향해 내려갔다가 다리를 건넌 후에는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그래서 시링기 콜라를 가로지른 다리를 건넌 후에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평탄한 산길이다. 건너편으로 긴 폭포가 보였다. 10시 15분 경 이름모를 작은 마을을 지났다. 트레킹 지도에도 없고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을에서 나오던 두 여자아이에게 보명화 보살님이 무언가 선물을 준 모양이다. 아주 신이나서 달려오는 표정이 산골 소녀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라 입성은 허름해도 어린 아이들과는 달리 깨끗한 얼굴이다. 협곡에서 떨어진 산길을 계속 가다보면 또 어느새 절벽길이 나왔다. 그렇게 몇 구비 돌다 밭 가운데 두 채의 집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인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주방팀들이 보인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다. 이곳에서 갑(Ghap)이 멀지 않다는 사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르텐형 카니가 보이는 것을 보고 알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카니는 보통 돌을 독립문 모양으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다. 쿰부의 팡보체 마을 입구에는 돌 대신 나무로 만들어 놓은 카니가 있다. 초르텐형 카니는 고급스러운 카니다. 그것은 조성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곧 마을이 부유하다는 뜻이다. 모양은 위쪽은 초르텐이고 기단부에는 사람이 지나가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안쪽 사방 벽에는 불보살상 벽화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만달라가 그려져 있다. 좀솜 위 까그베니와 무스탕의 짜랑에도 초르텐형 카니가 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마당에는 추수를 끝낸 옥수수 알갱이를 덕석에 말리고 있다. 그 한쪽에는 죽은 까마귀를 매단 장대를 세워놓았다. 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 같은데 과연 약아빠진 새들이 무서워할지는 의문이다. 이 집 꼬맹이 둘이 말없이 우리 곁에 와서 구경한다. 이곳 아이들은 대체로 수줍은 편이다. 정신없이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녀석은 별로 보지 못했다. 우리는 이곳 사람들을 구경하고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구경한다. 아주 공평한 일이다. 점심 먹고 12시 10분 출발했다. 오늘은 점심을 빨리 먹은 셈이다. 트레킹 이래 처음 만난 초르텐 카니를 통과했다. 많이 낡아 있다. 내부의 불상 벽화도 마찬가지다. 이곳 마을의 경제력이 처음 조성했을 때보다 약해졌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40분 후 부리 간다키 강을 가로지른 트러스트 철교를 지나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서진을 하고 있는 지금부터 사마가온까지 왼쪽 사면은 남쪽이 된다. 다리를 건너 오르니 바로 마니월이 나온다. 경전이나 진언을 새긴 마니석은 많이 보았는데 이곳은 불상을 많이 조각해 놓았다. 오후 1시 갑(Ghap)에 도착했다. 스넬그로브의 책에는 착(Tsak)으로 나오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야영을 할 계획이었는데 이미 캠프사이트에 다른 팀이 와 있어 조금 더 가기로 했다. 다시 마니월과 몇 채의 민가를 지나고 산사태 길을 지나 오늘까지 2000m 돌파하는데 7일 걸렸다. 7일이며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는 3500m의 마낭, ABC 트레킹 때는 4100m의 베이스캠프, 쿰부 트레킹 때는 4410m의 마체르모, 랑탕 트레킹 때는 로우레비나 패스(4700m)와 고사인꾼드(4321m)를 넘어 4026m의 로우레비나 야크, 그리고 작년 무스탕 트레킹 때는 3800m의 남걀에 도착했다. 마나슬루가 얼마나 천천히 고도를 올리는 코스인지 알 만하다. 롯지 앞 초우따라에서 포터들이 쉬고 있다. 캠프사이트가 넓고 좋아 이곳에서 캠프를 치기로 했다. 계곡 아래쪽(동쪽)으로 어제 보지 못했던 가네시 히말이 보인다. 텐트를 다 설치하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널며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나중에 또 다른 중년의 서양인 부부가 도착했다. 이곳에 넓기는 하나 8동(트레커용 6, 세르파용 1, 식당용 1, 화장실용 1)의 텐트가 있으니 아무래도 복잡하다. 그들도 4동을 쳐야 한다. 잠시 서성이며 가이드와 상의하더니 아랫집으로 돌아갔다. 심심해서 주방용 움막으로 구경가니 주방 수석보조요원 빠상이 약이 있느냐고 묻는다. 어제 바위에서 미끌어져 발 뒤쪽 바닥이 벗겨져 있다. 슬리퍼를 신고 오다가 미끌어지니 속수무책이다. 딱지가 앉기는 했지만 주변에 고름이 보인다. 소독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가지고 간 항생제 7일분을 주었다. 이번에 오면서 약을 많이 가지고 왔다. 지난 봄 무스탕을 다녀온 양혜숙님이 보내준 약이다. 원래 같이 가기로 했으나 가지 못하게 된 어떤 의사선생님이 무스탕 갈 때 가져가라고 보내준 것을 다시 내게 보내온 것이다. 제역회사에서 병원에 주는 관절염 약과 항생제 샘플이다. 제일 반가운 약이 항생제다. 이런 오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약 중 하나가 항생제다. 이곳에서는 약이 없어 상처가 나면 어떻게 치료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약을 거의 먹지 않는 이곳 사람들에게 항생제는 기적의 약이다. 페니실린이 처음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오남용으로 박테리아의 내성이 강해져 오히려 건강에 해롭게 되자 선진국에서는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도록 하고 있다. 페니실린이란 페니실리움속(屬)곰팡이에서 만들어지는 항생제로 가장 먼저 발견되었으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생제 중의 하나이다. 1927년에 알렉산더 플레밍은 우연히 푸른곰팡이로 오염되어 있는 배지에 황색포도상구균(화농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곰팡이를 분리하여 액상 배지에 배양해 이 곰팡이에서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는 일반 세균들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으며 1940년에 다른 연구자들이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었다. 이 페니실린은 세계 2차대전 때 전쟁의 총상으로 신음하던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다. 감기약을 제외하면(이상하게 트레킹 때마다 감기가 걸린다) 이제는 웬만해서는 양약을 먹지 않기 때문에 '항생제계'를 떠난 지도 10년이 넘지만 나도 한 때는 테라마이신 연고와 캡슐의 애용자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으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설 때마다 몇 가지 약품과 함께 항생제를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처방이 없어 구할 수 없었다. 감기는 바이러스가 원인이다. 세균감염은 박테리아가 원인이다. 그러므로 감기에는 항생제가 필요없고 써도 듣지 않는다. 최근 의약품 오남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사이언스 TV>를 보니 사람들이 감기에 항생제를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의사와 약사 포함) 의외로 많고 처방도 그렇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벨기에가 가장 심해서 약국에서 자유롭게 항생제를 구입할 수 있단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그 프로그램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페셀의 책에는 북쪽 계곡 투어 마지막 날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실려 있다. 재미있고도 슬픈, 그러나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다. 항생제로 한 주민을 치료하는 이야기이다. 이 글은 인터넷에 올린 무스탕 트레킹 연재 때 번역해 올렸는데 책으로 만들면서는 '잡설'로 분류되어 삭제되었다. 그러나 번역한 공력과 내용이 아까워 인터넷에 올린 사진 <13.바람부는 광야> 편에 다시 첨부했다. 페셀이 로만탕 북동 쪽 깊은 계곡에 있는 삼종(Sam Dzong)까지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협곡에서 돌아왔을 때 타시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작은 먼지구름을 가리켰다. 그것은 누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갈기와 함께 말을 탄 사람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나는 그가 캄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에게 도착하자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빠르게 말했다. 나는 처음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그가 이틀 동안 나를 찾아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줄 땔나무를 로만탕에 가져다 놓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땔나무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로만탕에서 우리를 만나지 못한 그는 우리가 서쪽 계곡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서쪽으로 갔다가, 지금 우리가 계곡을 탐사하고 돌아온 이 동쪽 계곡에서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가 우리를 찾은 이유는 약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로만탕에 가져다 놓은 땔나무는 약값이었다. 얘기가 좀 복잡하다. 그러나 이 불쌍한 사내의 끔찍한 상처를 보았을 때 나는 거의 토할 뻔했다. 그리고 이 불쌍한 사내가 이런 상처로 이틀이나 나를 찾아다닌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짜랑 근처에 사는 부유한 농부였다. 어느 날 밤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땅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수로에 발이 담가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물이 밤사이에 얼었다. 그가 나를 만나기 6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상이 걸린 이 불쌍한 사내의 발은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갔다. 오직 감염된 그의 상처부위를 먹고 있는 구더기들이 살이 썩는 것과 죽음을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주사 맞는 것을 싫어해서 치과의사에게 가느니 차라리 치통으로 죽는 것을 택할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상처와 피를 보면 나는 아주 메스꺼워진다. 내가 의사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무스탕의 사람들 속에 있을 때다. 지금 나는 빈약한 약품 분배자의 기능을 넘어서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내 의료 능력을 신뢰하여 이틀간 말을 몰고 찾아다닌 이 사내를 돕기 위해 나는 의학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수술용 마스크를 쓰고 고무장갑을 끼고 마취된 환자의 깊은 곳을 자르는 장면이다! 우리 세 사람은 내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을 끓여 달라고 했다. 그리고 붕대로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가지고 온 얼마간의 탈지면은 로만탕에 두고 왔다. 나는 결국 세 장의 의식용 스카프를 가지고 이 남자의 상처를 씻기로 했다. 나는 큰 가위로 썩은 피부와 감염으로 딱딱해진 부위를 도려냈다. 나는 이 사내가 이 상태로 어떻게 6개월을 견뎌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로바들의 뛰어난 체력과 높은 고도에 따른 춥고 건조한 날씨로 부패가 아주 더디게 진행된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른 기후나 다른 나라였다면 그는 몇 달 전에 죽었을 것이다. 1시간 동안 나는 락시를 알코올로, 의식용 스카프를 붕대로, 큰 부엌칼을 외과용 메스로, 그리고 무엇을 할지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수술을 했다. 유일한 의약품은 작은 페니실린 연고제 하나였다. 마침내 이 가여운 상처는 붕대에 감겨졌다. 발의 일부분이 잘리고 피가 흐르기는 했지만, 그가 만든 특별히 큰 장화 속으로 그의 발이 다시 들어갈 때 나는 그 발이 충분히 깨끗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환자의 첫 진료는 끝났다. 그리고 치료비로 로만탕에는 엄청난 양의 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3주 동안 그는 계속 나를 따라다녔으며 나는 그에게 붕대를 6번 더 감아 주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내가 로만탕을 떠날 때 그의 상처는 아물었다고 나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Michel Pessel,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pp. 233-235) 그 의사선생님 덕분에 이번에 가지고 온 항생제 양은 500mg 짜리 1500 캡슐이다. 관절염약도 가지고 왔지만 그것보다는 항생제가 더 유용하다. 트레킹 도중 필요한 주민들과 스태프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하이라이트는 트레킹 12일 째인 삼도에서였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 다음 네팔 방문 때도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네팔에서, 특히 히말라야에서 유통기한은 큰 의미없다. 기한이 지난 것이라도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삼도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때 구경 온 옆집 독일 팀의 한 사나이가 무엇을 나누어 주느냐고 물었다. 항생제를 영어로 무어라 할까? 그때는 잘 몰라 "안티바이러스, 예를들어 페니실린 같은 거"라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돌아와 찾아보니 안티바이오틱(Antibiotic)이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다르니 안티바이러스(Antibirus)라고 하면 틀린 말이다. 그러나 그 친구도 비영어권 사람의 말이라 대충 항생제를 그렇게 표현했으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혜명화 보살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이제 겨우 2140m인데 고소증상을 보인다. 보통은 3000m 가까이 올라야 나타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일찍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체력이 저하되면 더 쉽게 나타날 수 있다. 고소가 와 두통이 오고 식욕이 떨어진 혜명화 보살은 저녁을 먹지 않고 일찍 텐트로 들어갔다. 가지고 간 다이아목스를 12시간 마다 1정씩 먹으라고 주었다. 트레킹이 처음인 사람은 국토도보종단이나 군대에서 행군 등을 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많이 걸을 일이 없다. 하루 평균 5시간 이상 7일을 걸었으니 슬슬 지칠 때도 되었다. 마니슬루 트레킹은 고도를 천천히 올리기 때문에 고소적응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실제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라르키아 라를 넘기 전 기간이 너무 길어 일찍 체력이 바닥나게 된다. 평소 체력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힘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트레킹 중에는 음식을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하고(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염분 보충과 전해질 균형을 위한 식염포도당 섭취도 중요하다. |
trek 7. 뎅 - 갑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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