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k 6. 필림 - 뎅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티베트 마을로 들어서다

2007. 10. 18(목)

필림의 현지 이름은 필론(Philön) 또는 도당(Dodang)이라고 한다. 좀솜의 옛 이름은 종삼(Dzongsam)이다. 네팔의 지명은 대부분 표기가 다른 몇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이번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를 보고 비로소 그 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인도를 식민지배했던 영국은 1808년 측량조사국(the Survey of India)을 세워 전 인도대륙의 지도를 만드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다른 열강을 제치고 제국을 더욱 확장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1830년까지 조사는 네팔과 티베트 국경까지 이루어졌는데 에베레스트 산의 측량과 산 이름의 명명도 이 때 이루어졌다. 그리고 네팔과 티베트를 포함한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그 지도를 바탕으로 현재의 네팔 트레킹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명이 다른 것은 그런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무스탕 지역의 길링(Ghiling)도 원래는 겔링(Geling)이고 이곳 마나슬루의 라르키아(Larkya)도 원래 이름은 바북(Babuk)이다. 새로운 이름이 전혀 다른 뜻은 아니지만 원래의 이름과는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마나슬루 히말을 최초로 본 유럽인은 영국의 유명한 등반가이자 탐험가인 빌 틸먼(W. Tilman) 일행이다. 그들은(동료 3명과 유명한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두 번에 걸쳐 랑탕 지역의 가네시 히말과  랑탕 계곡을 거쳐 강자 라로 넘어 주갈 히말까지 탐사했다. 랑시샤 카르카에서 주갈로 넘어 오는 능선 이름은 그래서 틸먼즈 콜(Tilman's Col)이다. 가네시 히말에서 그는 팔도르(Paldor, 5996m)를 올랐다.

이듬해인 1950년 봄 그는 <네팔-영국 안나푸르나 원정대> 대장으로  안나푸르나 4봉 등정을 위해 마낭 지역으로 간다. 당시는 포카라까지 가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카트만두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트리술리 바자르-다딩베시-아루갓바자르-칸촉-고르카-베시사하르-마낭으로 갔다. 칸촉의 능선에서 그들은 처음 하늘 높이 걸려 있는 마나슬루 히말의 웅자를 보았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북쪽으로 거의 30마일 떨어져 있는 히말출리(7893m)를 똑똑히 보았다... 쌍안경과 망원경으로 보니 히말출리의 번쩍이는 꼭대기가 잘 보였다. 비록 30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대부분의 산들이 쉽게 등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저 산이 과연 히말출리가 맞는가 의심했다. 히말출리 바로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설봉을 지닌 보우다(Baudha, 6672m)가 우리가 보기엔 더 오르기 쉬운 능선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우리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지나가며 바라보기만 했다. 몇 달 후 우리가 오를 수 있는 봉우리를 찾을 때 로버츠(J.O.M. Roberts 소령)와 나는 그것을 그냥 지나친 것을 후회했다. 우리는 아무도 보우다가 보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지 아니면 오르지 못할 것 같은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중 -Nepal Himalaya, p. 815)

네팔 히말라야를 논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텐징 노르가이나 힐러리 그리고 메스너 같은 등반가는 일단 논외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네팔 히말라야는 등반이 아닌 문화적 접근으로 네팔 히말라야 학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다. 일본의 가와구찌 스님, 영국의 산악인 빌 틸먼, 이탈리아의 티베트 학자 지우제페 투치, 영국의 티베트 학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이 그들이다.

학자적 분위기와 다른 등반가인 틸먼이 다른 유명한 등반가들을 제치고 이 그룹에 들어간 것은 그가 최초로 랑탕 지역을 방문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랑탕과 안나푸르나, 그리고 에베레스트 지역의 원정을 통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세한 탐사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책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은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 1866-1945) 스님은 당시 일본의 승려 사회에 염증을 느껴 티베트에 들어가서 참된 불법을 구하고 불경을 구해 오겠다고 결심하고, 1897년 6월 하순 일본 고베 항을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르질링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찬드라 다스나 티베트인들로부터 1년 5개월간 티베트어를 배운 뒤 1899년 1월 중국 승려로 칭하고 네팔에 잠입, 카트만두에 머무르면서 무스탕을 경유해 티베트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티베트와 중국은 모든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라사 여행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스탕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북쪽의 오지를 통해 카일라스 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그 해 3월 초순 카트만두를 떠나 포카라를 거쳐 뚝체에서 한 동안 머무르면서 잡입할 경로를 모색했다. 이곳에서 무스탕 짜랑(Tsarang)의 한 승려와 교분을 맺은 그는 그 인연으로 묵티나트를 거쳐 무스탕 계곡을 따라 올라가 짜랑의 곰빠에서 거의 1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서북의 오지 돌포로 우회하여 티베트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카일라스를 순례하고 라사까지 여행한 뒤 라사의 세라 사원에서 1년 넘게 머무르면서 공부하다가, 시킴 쪽의 국경을 넘어 다르질링으로 내려와 캘커타로 갔다. 그는 네팔과 티베트에 들어간 최초의 일본인으로 이후 일본 티베트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티베트 여행기>(초판 1907년)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이 여행 과정을 소상히 기술했다. 좀솜의 무스탕 박물관에는 가와구치 스님의 사진과 무스탕 여정이 전시되어 있고 마르파에는 기념관이 있다.

이탈리아 티베트 학자 투치 교수가 쓴 는 무스탕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네팔 전반에 관한 책이다. 1952년 9월  15일 카트만두를 걸어서 출발한 원정대는 고르카, 포카라, 고라빠니를 거쳐 10월 20일 까그베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짧은 무스탕 방문을 마치고 베니에서 룸비니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포카라로 되돌아와 비행기로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65일 간의 원정이었다. 그의 책에는 무스탕 부분을 포함하여 네팔 여러 지방의 문화, 특색, 풍속을 전문가의 안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 학부(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데이비드 스넬그로브(David L. Snellgrove) 교수는 1956년에 돌포에서 카트만두까지 네팔 서부에서 북부를 횡단했는데, 돌포에서 까그베니로 내려와 깔리 간다키 강을 따라 축상에서 뚝체 근처까지 오르내린 다음 다시 올라가 무스탕의 로게까르와 짜랑을 돌아보고 로만탕은 직접 방문하지 않은 채 묵티나트로 갔다.

그는 묵티나트에서 토롱 라를 넘어 마낭의 나르 계곡을 방문 한 후 다라빠니에서 빔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라르키아 라를 넘어 부리 간다키 계곡으로 내려왔다(지금의 안나푸르나 라운딩과 마나슬루 트레킹 코스의 역방향이다). 그는 이 여행에 대해 <히말라야 순례(Himalaya Pilgrimage)>라는 책을 썼다.

1964년 봄에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Michel Peissel)이 무스탕에 들어가 몇 달 간 머무르면서 무스탕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무스탕, 잃어버린 티베트 왕국(Mustang-A Lost Tibetan Kingdom)>을 썼는데, 지금까지 나온 무스탕에 관련 문헌 중 가장 탁월한 책이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사람은 스넬그로브이다. 그는 최초로 돌포지역을 탐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고 있는 쿠탕(마나슬루) 지역을 서양인으로는 처음 답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 <히말라야 순례>(초판 1958년) 후반부는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1981년 보스톤 샴발라출판사에서 발행한 <히말라야 순례> 뒤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학자의 예리한 안목과 경험많은 여행자의 따뜻함을 지닌 스넬그로브는 수 백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네팔 오지 마을의 삶의 방식을 재창조했다. 그와 그의 셰르파 가이드는 인도 국경에 가까운 저지대 평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티베트어를 쓰는 오지인 돌포의 고산 고개를 넘고 무스탕을 지나 마나슬루 지역을 거쳐 카트만두에 내려 오기까지  7개월 동안 1600km 이상을 여행했다. 여행 중 그들은 승려들과 라마들, 야크지기와 마을 주민들, 사원과 사당 그리고 불교 사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비밀 의식과 수련을 목격했다. 사원은 이 외진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이다. 스넬그로브 교수의 불교와 히말라야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에 이 책은 다양한 여행자들은 물론 학자들과 학생들에게 매우 가치있는 자료이다. 데이비드 스넬그로브는 런던대학의 동양-아프리카 학부의 명예교수이며 영국 학술원 회원이다. 그는 두 권의 인도-티베트 불교를 포함하여 많은 티베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항상 아쉬운 것은 이런 고전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투치의 , 스넬그로브의 <Himalaya Pilgrimage>, 틸먼의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 페셀의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이 네 권은 네팔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볼 만한 책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기초자료다.

위의 책들은  1967년에 나온 페셀의 책을 제외하고 모두 초판이 1950년대에 나왔다. 한 나라 학문의 성숙도는 이런 기초자료의 번역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그 속에 든 정신을 들여다 보면 빈 깡통인 것이 많다. 그저 돈 버는 방법을 쓴 책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그 런 책을 보면 부자가 된다고 믿는 바보들이 의외로 많다).

팔리지 않는 책은 출판사에서 내기 어렵다. 출판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 <대우학술총서>처럼 기업에서 후원해 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권 당 번역비와 출판비로 300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히말라야 원정에 기꺼이 수 억씩 부담하는 기업이 있는데 한 번쯤은 원정대 후원 대신 이런 책 번역에 후원한다면 한꺼번에 네 권을 다 번역할 수 있고, 그 가치는 조금 과장한다면 히말라야 원정 100번 이상의 가치가 있다.

히말라야 관련 글을 쓰는 사람마다 참고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옛 영어책을  이리저리 들춰야 하는 수고를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네팔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지역이라면 모르겠지만 해마다 1만 명 이상의 여행자와 수 십 팀의 원정대가 찾는 곳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와는 다른 곳이다.

물론 이런 책들의 번역을 위해서는 단순히 영어만 잘 해서는 부족하다. 네팔과 히말라야 그리고 티베트 문화와 언어, 역사  등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어에 대한 전문가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은 계속 인문학의 변방국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  *

어제 분실사고가 생겼다. 백산 스님의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카고백 속에 든 작은 손가방이 열려 있고 그 안에 넣어 둔 지갑이 통째 사라진 것이다. 백산 스님의 텐트는 제일 후미진 곳에 있었다. 누군가 텐트에 들어 간 모양인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지인은 아닐 것 같고 가능성은 포터들이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상황에서 감히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단단히 마음 먹고 한 일이다.

지갑에는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 그리고 한국돈 10만원밖에 없으니 큰 피해는 아니다. 신용카드는 신고하면 보름 전까지 보상이 가능하고 운전면허증은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사나흘 후면 도착하는 남룽이나 사마가온은큰 마을이라 전화가 있을 것이니 거기서 카드를 정지시키면 된다고 위로했다. 여권을 모두 삼툭에게 맡긴 것이 다행이다.

여권은 처음부터 맡길려고 한 것이 아니라 트레킹 허가를 위해 맡겨 둔 것이다. 원래는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우연히 그날이 네팔 축제일이라 관공서가 휴일이었다. 다음 날은 토요일(우리의 일요일에 해당)이라 역시 휴무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정대로 먼저 출발하고 셰르파 보조인 겔루 셰르파가 트레킹 2일째인 10월 14일 트레킹 허가를 받아 우리를 뒤따라왔다. 겔루는 어제 오후 우리와 합류했다.

네팔 사람들은 비교적 착하다. 그러나 100% 믿으면 안된다. 그래서 여권과 비행기표, 돈이든 지갑 등은 항상 몸에 달고 다녀야 한다. 트레킹을 떠날 때 여권과 항공권은 트레킹 여행사에 맡겨 두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개별 여행자는 그럴 수가 없다. 작은 어깨걸이 가방이 그래서 필요하다. 나는 그 가방은 밤에 잘 때만 벗어놓을 뿐 화장실 갈 때도 가지고 간다. 그것은 트레킹 전후 카트만두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는 카메라 가방까지 두 개나 되어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래도 분실할 경우의 난감함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감수한다.

보통 때처럼 7시에 출발했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둡고 쌀쌀하다. 길은 이미 강에서 멀리 올라와 있어 강물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들린다. 폭포를 위에서 보며 간다. 곧 해가 맞은 편 산 위에 비치기 시작했다. 멀리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건너편으로 큰 구릉 마을인 팡싱이 보인다.

필림 바로 동쪽에는 가네시 히말(7163m)이 있다. 3년 전 랑탕의 로우레비나 야크에서 본 코끼리 뒷모습처럼 생긴 가네시 히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물론 필림에서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랑탕에서는 늘 가네시의 뒷모습만 보인다. 우리 여정에서는 가까운 산이 가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2000년 이곳을 지나간 칼스텐이 오른쪽 춤 계곡을 경유한 여행기에는 그곳에서 본 가네시 1봉(7,406m) 서벽 사진이 있다.

Img_4574.jpg사진의 오른쪽이 가네시 히말 산군이다. 왼쪽 두 번째 크고 작은 두 개의 봉우리가 뭉쳐 있는 것이 마나슬루다. 마나슬루 왼쪽은 히말출리, 오른쪽 평평한 봉우리 다음 뾰족한  봉우리는 확실치 않으나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시링기 히말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manaslu_from_Laurebina_yak.jpg 지금 그 사이 계곡을 여행 중이다. 가네시 히말 산군은 제1봉(7406m)부터 5봉(6950m)까지 있다. 1949년 랑탕 지역을 탐사한 영국의 틸먼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주봉은 1955년 10월 프랑스·스위스합동등반대가 처음으로 등정했다.

출발한 지 30분 후 작은 마을에 이르니 프랑스 팀이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은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다. 어제도 필림에서 우리가 먼저 캠프사이트를 차지한 까닭에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도 그리 나쁘지 않다. 곧 '한 채의 찻집'이라는 뜻의 에클레바티(Ekle Bhatti)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대여섯 채 되는 마을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멋진 폭포가 보인다.

마을을 지나 언덕에 오르니 북쪽 계곡 모습이 훤하게 드러난다. 양쪽 산이 가파르니 북쪽으로 가는 계곡은 점점 좁아진다. 오른쪽 사면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길이가 수 백 미터는 됨직하다. 그 아래 산허리로 난 가는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고산에 들어 온 기분이 들었다.

해는 떴지만 산이 높아 여전히 그늘 속이다. 1시간 운행 후 산기슭 코너 오르막에 올라 쉬고 있는데 프랑스 팀이 도착한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이런 캠핑트레킹은 휴가가 긴 서양 사람들이 아니면 젊은 사람이 오기 힘들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트레킹 시즌인 10월과 11월에 3주간의 긴 시간을 내기 어렵다.

10여 분 동안 같이 가는데 앞에 가던 프랑스 팀이 멈추어 서서 건너편 기슭을 가리키며 웅성거린다. 멀어서 잘 안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바위 위에서 놀고 있다. 히말라야에 서식하고 랑구르(Langur) 원숭이로 은갈색 털에 검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원숭이들은 랑탕 지역에서도 몇 번 보았다. 힌두교도들은 이 원숭이를 원숭이의 신인 하누만의 현현으로 보고 숭배하고 있다.

길은 강에서 점점 높아지고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복구한 곳도 나왔다. 잠시 후 오른쪽으로 샤르(shar) 콜라의 물이 내려오는 춤(Tsum) 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춤이란 이 계곡 전체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1956년 9월 하순, 스넬그로브는 팡싱을 거쳐 시드리바스까지 내려와 필림으로 건너온 후 다시 춤 계곡으로 올라가 여러 마을과 곰빠를 방문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900년 전 벌거벗은 티베트 성자 밀라레빠(Milarapa, 1052-1135)가 이 계곡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이 계곡은 티베트 국경을 넘어 키이롱(Kyirong)과 연결된다. 랑탕의 샤브루베시 북쪽 국경을 넘으면 나오는 티베트 마을이 바로 키이롱이다. 그 마을은 온천이 좋은 아늑한 마을이라 하인리히 하러는 말년에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그의 책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 쓰고 있는데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계곡이 합수되는 지점을 조금 지나 다리를 건너 오늘 처음으로 서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이제부터 오르는 부리 간다키 상류 계곡은 현지인들은 쿠탕(Kutang)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중산간 지방의 구릉족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티베트족들이 사는 마을이다. 재배하는 작물도 쌀은 더 이상 나지 않고 보리, 옥수수, 메밀만 나며 가옥 형태도 티베트 양식으로 바뀐다.

아침에 지도를 보고 오늘 점심은 냑(Nyak)에서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을이 길가에 표시되어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리를 건너 조금 가면 나오는 서쪽 사면의 출룽(Chhulung) 콜라로 1시간 올라가야 한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가 지적했듯이 마나슬루 트레킹 지도는 정확하지 않다. 서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춤 계곡 아래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춤 계곡을 지난 후에 나온다.

출룽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고르카로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계곡을 따라 히말출리(7893m)를 향해 남서쪽으로 계속 오르다가 히말출리 아래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 그리고 보우다 히말(6672m) 아래에 있는 루피나 라( Rupina La, 4720m)를 넘어 고르카까지 내려간다. 루피나 라에서 베시사하르까지도 산길이 있으나 트레커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지도참조)

마나슬루 트레킹의 시작 마을인 고르카에서 아루갓바자르로 가지 않고 바로 북진하여 루피나 라를 거쳐 출룽 계곡으로 내려오는 트레킹은 히말출리와 보우다 히말의 환상적인 풍광을 즐길 수 있어  모험적인 그룹이 시도하는 코스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아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 트레커 팀은 루피나 라에 눈이 쌓여 넘지 못하고 따또빠니 쪽 계곡을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큰 소나무가 많이 있는 비탈길을 간다. 한적한 오솔길이다. 9시가 넘어선 뒤에야 햇볕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허름한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가더니 곧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는 다리가 나왔다. 이 다리가 가관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 철망은 떨어진 것을 대충 보수해 두었다. 틈 사이는 나무로 막았다. 원래 나무로 된 바닥도 한쪽이 떨어져 나갔는지 판자로 막아두었다. 아마 낙석이 떨어진 모양이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이 다리가 바로 안드레스가 말한 '잠 다 깼니?' 다리인데 2년 전 안드레스의 사진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통행을 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대체로 겁이 많은 여성동포들은 떨며 건넜다. 길은 산사태가 난 험한 길과 강 옆 절벽을 보수한 길을 지난 후 강에서 조금 떨어진 산길로 접어들더니 다시 절벽 옆으로 돌고 있다.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 힘도 들고 배도 고프다.

지금까지는 11시 이전에 운행을 멈추었는데 오늘은 중간에 점심 먹을 마을이 없다. 무조건 오늘의 목적지인 뎅(Deng)까지 가야 한다. 11시 15분 뎅 마을을 알리는 돌로 만든 카니가 반겨주었다. 문을 통과하자 멀리 마을 초르텐과 몇 채의 집이 보였다. 마을로 가려면 왼편 산기슭을 돌아가 작은 지류를 건너야 한다. 이 지류는 여기서 보이지는 않는 히말출리에서 내려오는 물이라고 한다.

뎅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마을 길가에 있는 수도에 아낙네들이 있고 벌거벗은 아이 하나가 땅바닥에서 놀고 있다. 복장은 전형적인 티베트 복장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추바(chuba)를 입고 있다. 무스탕을 방문한 페셀은 현지인들과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추바를 입었다. 그러나 무스탕에서도 이제 추바를 입고 있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이곳 사람들의 복장을 안드레스의 여행사진에서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직접 보니 이곳이 무스탕보다 더 오지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논스톱(비록 중간에 여러 번 쉬기는 했지만) 4시간 30분의 운행으로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마당에 깔아 둔 깔개에 앉아 주방팀이 내 온 차부터 마셨다. 그리고 오늘은 운행 끝이라는 내 말에 한시름 놓는 표정이다. 원래의 계획도 여기까지다. 그래도 너무 일찍 끝나는 것 같아 점심 먹고 다음 마을인 라나(Rana)까지 갈 생각을 하고 타시에게 말하니 타시와 밍마 셰르파가 고개를 젖는다. 그곳은 캠프사이트가 한 곳밖에 없는데 이미 프랑스 팀이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그 다음 마을인 비히(Bihi)까지 또 한 시간을 가야 하니 너무 멀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다.

점심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 서양 커플이 도착한다. 이곳은 유난히 커플 팀이 많이 보인다. 지금까지 세 팀을 보았는데 트레킹 12일 째인 삼도에 이를 때까지 일곱 팀을 보았다. 나이도 노부부에서 젊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부부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는 티베트 빵과 소시지 그리고 야채를 곁들인 푸짐한 점심 식사를 하는데 그들은 간단하게 식판 하나씩 받는다. 그들의 가이드가 주방에서 가져왔다. 두 사람이라도 식당텐트를 가져오지만 보통 점심은 그렇게 먹는 모양이다.

이곳 캠프사이트가 겁나는 곳이다. 바로 뒤로는 절벽이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식물은 관상용이 아니라 식용 작물이란다. 그 뒤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식사를 마친 커플은 다음 마을로 떠나고 우리는 남은 오후를 한가하게 보냈다. 곧 다른 팀이 도착해 아랫집에 캠프를 쳤다. 이곳은 고도가 2000m 가까이 된다. 좌우로 높은 산이 있어 해가 빨리 진다. 멀리 북쪽 계곡 사이로 시링기 히말(7187m)이 개끗하게 잘 보인다.

시링기는 부리 간다키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어제까지 정북 방향에 있었지만 지금은 동북쪽으로 비켜 있다. 우리는 시링기의 왼편 계곡으로 빠져 서쪽을 향할 것이다.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는 여기서 남쪽 계곡 사이로  가네시 4봉(7102m)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늦은 오후의 뿌연 햇살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식당텐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타시가 포터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달밧도 잘 못먹어 하산한다고 한다. 이 아이는 아루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 중 한 명이다. 4일만 일하고 하산하는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눈이 충혈되어 있는 모습이 좋지 않아보인다. 식량이 점점 줄어들므로 나머지 아르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들도 3일 후에 도착할 사마가온에서 모두 돌아간다고 한다.

직원의 채용과 해고는 전적으로 서다인 타시의 고유권한이다. 그럼에도 굳이 데리고 온 것은 팁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500루삐를 주고 돌아가 몸조리 잘 하라고 했다. 18일 동안 짐을 지는 포터들과 주방 보조요원들에게 줄 팁으로 1인당 1000루삐를 책정해두었다. 여행사 소속 포터들의 일당은 보통 350~400루삐 사이다. 1000루삐면 전체 임금의 15% 정도로 3일치 일당에 가깝다.

이들은 여행사로부터 조금 박한 임금을 받지만 계속 일을 할 수 있어 좋고 덤으로 트레킹 그룹으로부터 팁을 두둑하게 받아 좋다. 그룹으로 오는 팀은 비교적 경비를 여유 있게 가지고 오기 때문에 팁이 후한 편이다. 또 고객에게 헌신하는 그들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4일 일한 사람에게 500루삐의 팁은 좀 많은 편이지만 몸도 좋지 않으니 그냥 주었다(잔돈도 없다).

백산스님은 나중에 이 친구가 혹 지갑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의심이 된다고 했다. 어제 분실사고 후 오늘 갑자기 떠나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 그냥 잊어 버리는 좋다. 우선은 빨리 신용카드부터 정지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전화가 있다는 남룽까지는 앞으로 이틀 더 걸어야 한다.    

<참고> 루피나 라 경유를 시도한 팀이 찍은 사진

고르카에서 본 마나슬루 산군(왼편은 안나푸르나)
루피나 라 아래에서 본 동쪽 가네시 히말 산군
루피나 라를 눈 때문에 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뒤돌아 본 북서쪽 풍경
                                        
(
http://www.bergdias.de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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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림을 나와 코너를 돌기 전 돌아보다. 멀리 긴 다리가 보인다. 해가 서쪽 산을 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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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협곡에 떨어지는 폭포를 위에서 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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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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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후 에클레 바티 도착. 뒤로 보이는 폭포가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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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비치지 않아 쌀쌀한데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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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 바티 지나 언덕에서 본 부리 간다키 협곡과 마나슬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폭포. 가는 산허리길과 지나가는 포터의 모습이 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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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다리를 건너 포터들을 앞세운 우리 팀들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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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지난 후 계속 산허리를 따라 구부러진 길을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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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프랑스 팀이 따라와 우리가 쉬고 있는 곳에서 쉰다. 대부분 젊은 커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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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10여 분 걷자 계곡 건너편으로 히말라야에 많이 서식하는 랑구르 원숭이 무리가 보였다.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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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트레일은 계곡에서 높이 올라와  산허리를 계속 돌고 도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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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점. 춤 계곡 위에 놓여 있는 다리에서 찍었다. 오른쪽이 부리 간다키 강의 상류인 쿠탕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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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 서쪽 사면으로 넘어오다. 아직 해는 비치지 않아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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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를 돌자 해가 비쳐 따뜻했다. 큰 소나무가 많은 멋진 산허리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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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오른쪽 동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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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해 보이는 이 다리는 그래도 똑바로 서 있어 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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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거친 절벽길을 조금 지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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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다리가 나왔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는 이 다리를 "안녕, 잠 다 깼니(Good morning, are you well awake)?" 다리로 불렀는데 그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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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엔 너뭇가지로 막아놓았다. 바닥에도 보조 널빤지를 덧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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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한 사람식 다리를 건넌 후 산사태 길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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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의 정성이 깃든 절벽길 돌다리길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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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제법 넓은 산길이 나왔다. 그곳에 있는 나무 열매는 식용이라고 하는데 보기와는 달리 맛은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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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도를 올린다. 멀리 시링기 히말(7187m)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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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수목한계선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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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카니(Kani)가 나타났다. 카니가 있다는 것은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카니는 마을 전체의 출입문이다. 무스탕 지역에서는 카니 대신 초르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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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를 지나자 오늘의 목적지 뎅(Deng) 마을이 보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왼쪽 산허리로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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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뎅 마을 초입 길가 언덕의 소박한 초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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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수돗가에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있다. 벌거벗은 저 녀석은 춥지도 않은가 보다. 집 앞에 주방팀이 있다. 그곳 마당이 오늘 우리의 야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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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나온 티베트 빵. 꿀을 발라 먹으면 맛이 좋다. 오이, 소시지, 콩 등을 먹었다. 한국팀을 위해 삼툭은 젓가락을 준비했다. 그래서 가지고 간 젓가락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송남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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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야영지. 왼쪽 맨드라미처럼 생긴 작물 뒤는 깊은 낭떠러지다. 나중에 온 한 팀이 아랫집 마당에 캠프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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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보이는 시링기 히말(7187m). 티베트 국경 가까이 있는 시링기 히말은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오후 4시 경 찍은 사진인데 해는 이미 서쪽의 높은 산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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