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아주 먼 옛날에 한 점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팽창, 냉각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에 처음으로 제안된 우주 팽창론은 그 뒤 여러 유형으로 발전했는데, 오늘날 우주론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폭발이론은 1940년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했다. 1948년 대폭발 이론을 제기하여 현재 우주론이 등장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러시아의 과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 1904­1968)였다.

팽창우주론의 등장

1916년에 발표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우주론 분야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둔 초창기 우주론은 현재의 팽창 우주와는 다른 정적인 우주론이었다. 우선 상대성 이론을 주창한 장본인인 아인슈타인은 우주론에서 물리적이며 정적인 우주론을 선호해서 자신이 발견한 장 방정식에 우주상수를 추가해서 우주를 정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아인슈타인과 연결을 가지고 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는 아인슈타인의 물리적인 우주와는 다른, 물질이 없고 가상적인 또다른 우주 모형을 제한했다. 드 지터의 모형은 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선호되었지만, 그의 우주 모형 역시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것이었다.

1920년대를 통해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서 정적인 우주론과는 다른 팽창우주론이 제안되었다. 1922년 러시아의 지구물리학자이며 기상학자인 프리드만(Alexandr Alexandrovich Friedmann, 1888­1925)은 아인슈타인과 드 지터가 제안했던 정적인 우주론과는 다른 새로운 팽창우주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했다. 하지만 프리드만의 이론은 주창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계속적인 발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25년 프리드만은 기상 관측용 대형 기구를 타고 자유 비행을 하다가 혹한을 겪은 뒤 페렴에 걸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프리드만과는 독립적으로 1927년 벨기에의 가톨릭 신부이며 천체물리학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Abb Georges Edouard Lematre, 1894­1966)는 2년 뒤에 나타나게 되는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1953)의 속도-거리 관계와 유사한 적색편이와 거리와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보다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의 새로운 팽창우주론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선구자적인 작업은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한편 1929년 미국의 허블은 윌슨 산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은하들 사이의 거리와 적색편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이 팽창우주론을 지지하는 중요한 천문학적 증거들을 발표했다. 허블 자신은 자신이 얻은 데이터를 팽창우주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1930년 에딩턴과 드 지터 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천문학자들은 정적 우주론이 새로운 천체 관측 결과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신 새로운 우주론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작업이 '재발견' 되었다. 이리하여 1930년을 기점으로 해서 천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적인 우주론에서 팽창우주론으로의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의 등장

팽창우주론은 1940년대 중반 이후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과 정상 상태 우주론(Steady-state cosmology)이 등장하고 이 두 이론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더욱 세련된 형태로 발전했다. 대폭발 이론에서는 초기 우주에서 중성자 포획에 의해 원소가 형성되는 과정을 우주의 팽창 과정과 연결했다. 대폭발 이론은 러시아 출신의 미국 과학자인 가모브에 의해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가모브는 1904년 3월 4일 러시아 영화 '전함 포템킨'의 배경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한 가모브는 팽창우주론의 창시자였던 프리드만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접했다. 이 때 가모브는 프리드만과 함께 상대론적 우주론을 연구하려고 했으나, 프리드만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양자론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928년 대학을 졸업한 가모브는 괴팅겐으로 가서 높은 에너지 장벽을 낮은 운동에너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양자투과 개념을 기초로 하는 핵붕괴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 그 뒤 그는 닐스 보어가 있는 코펜하겐 이론 물리학 연구소와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원자핵에 관한 '액체 방울' 모형을 제안하여, 핵분열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별 내부의 열핵 반응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구 소련을 떠난 가모브는 1934년부터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1936년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와 함께 베타 붕괴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 뒤 가모브는 별의 진화와 열핵 반응에 대해 연구했는데, 별의 진화에 대한 가모브의 연구는 이후 대폭발 이론에 관한 연구로 이어졌다.

전쟁 중 많은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동원되었고, 이에 따라 별의 진화 및 열핵 반응에 관한 연구는 핵무기 개발과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연구들은 순수 우주론 연구로 이어졌다. 1948년 조지 가모브, 그의 제자 랠프 알퍼(Ralph Asher Alpher) 그리고 한스 베테(Hans Bethe)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자핵들은 특정한 온도와 밀도의 평형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원초적 물질이 팽창하고 냉각되는 연속적인 형성과정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가모브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할 때 자신의 이름이 감마와 유사하고 자신의 제자 이름은 알파와 유사한 것을 보고, 베타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한스 베테에게 자신들의 논문에 공동 저자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베테는 대폭발 이론의 창안에 직접적인 관여는 하지 않았지만, 가모브는 자신의 논문의 저자들의 이름에 알파-베타-감마가 포함되게 하기 위해 베타에 해당하는 베테를 공동 저자로 초빙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폭발 이론을 창안한 논문은 알퍼-베테-가모브 이론, 즉 알파-베타-감마 이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원소 형성 과정과 우주 팽창에 관한 논의는 서로 연결을 맺으면서 발전해 나갔다.

케임브리지의 정상상태 우주론

한편 194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천문학자들은 가모브의 팽창우주론과는 전혀 다른 정상 상태 팽창우주론을 제기했다. 이 또다른 우주론은 허먼 본디(Hermann Bondi), 토머스 골드(Thomas Gold)가 제안해서 프레드 호일(Fred Hoyle)에 의해 대폭발 이론의 대안으로써 제기된 우주 모형이었다. 이리하여 1950년대를 통해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천문학계에서는 대폭발 이론과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서로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했다.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소위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perfect cosmological principle)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원리에 의하면 물리 법칙들은 우주 구조에 독립적일 수 없으며, 반대로 우주 구조는 물리 법칙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물리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주가 안정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또한 우주는 모든 곳에서 균일해야 하며 거시적 규모에서 변화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우주는 항상 팽창하되 지속적으로 새로운 물질이 탄생해서 일정한 평균 밀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18세기 영국의 지질학자 제임스 허튼은 지구는 정상 상태이며 지질학적 현상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작은 정도나마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질학적 과정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지질학적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 theory)을 제창했다.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이 허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일종의 '우주론적인 동일과정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학철학적 근거로 본다면 대폭발설은 격변론(Catastrophe theory)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폭발 우주론의 발전

대폭발 이론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가모브, 알퍼, 로버트 허먼(Robert C. Herman), 제임스 폴린(James W. Follin)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하지만 1953년 이후 대폭발 이론에 관한 논의는 학계에서 급격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대폭발 이론에 대한 논의가 쇠퇴하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우선 당시 핵물리학의 지식으로는 중성자 포획에 의해 가벼운 원소들이 형성되는 비율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인 우주배경 복사의 존재는 1948년에 처음으로 예언됐으며, 1956년까지 최소한 7회에 걸쳐 그 존재에 대한 예언이 반복되었지만, 당시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논의는 천문학이나 물리학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폭발 이론은 가모브라는 물리학자 자신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1950년대에 대폭발 이론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에 들어와서 가모브 자신이 대폭발 이론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1956년 콜로라도 대학으로 옮긴 뒤에는 학문적으로 아주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가모브는 엄청난 술고래였는데, 종종 이 주벽 때문에 학회에서 눈꼴사나운 상황을 연출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결국 그의 이런 특이한 행동이 물리학 공동체에서 자신의 위치를 몰락시키는 데 기여했고, 대폭발 이론의 창시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대폭발 이론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가모브와 함께 연구하던 알퍼와 허먼 역시 1950년대 중반 이후 기업체 연구소에 자리를 잡으면서 천체 물리학이나 핵물리학 분야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알퍼는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회사의 연구소에서, 그리고 허먼은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 회사의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우주론 분야보다는 유체역학이나 고체물리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폭발 이론에 형성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우주론 분야에서 멀어지면서 대폭발 이론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1960년대에 대폭발 이론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을 때 이 우주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창시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정상상태 우주론과 철학적 논쟁

본디, 골드, 호일 등에 의해서 1948년 제창된 정상상태 우주론 역시 만들어진 지 10년 동안은 내용상 크게 변하지 않는 상태로 발전되었다. 1950년대에 정상상태 우주론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은 대폭발 이론을 창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1951년 정상상태 우주론의 새로운 버전을 제안한 맥크리아(William Hunter McCrea)였다. 그는 호일의 이론을 에너지 보존 법칙과 일반 상대성 이론에 더욱 부합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맥크리아는 연속적인 물질의 창조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을 서로 부합되게 만들기 위해 음의 우주압력(negative cosmic pressure) 혹은 음의 에너지 우주 스트레스(negative- energy cosmic stress)의 존재를 제안하기도 했다.

1959년 본디와 라이틀턴(Raymond Arth Lyttleton)은 이러한 음의 스트레스에 대한 물리적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에 초과 전하의 형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기적 우주(Electrical Universe)를 제안했다. 즉 물질이 생성됨에 따라 아주 작은 양의 우주 초과 전하(universal charge excess)가 형성되어 이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우주의 팽창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기적 우주론은 곧이어 실시된 실험실 상의 정밀한 실험에 의해 반박되어 1960년 이후에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정상상태 우주론 역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한편 1960년을 전후해서 우주론을 둘러싼 과학철학적 논쟁도 나타났다. 1961년 옥스퍼드의 철학자 하레(W.H. Harr)는 완전한 우주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상상태 우주론이 지닌 과학적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하레는 본디와 골드가 제안한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와 같은 균일성 가정에 기초를 둔 연역적 방법을 불명확한 일반화 방법(the method of indefinite generalization)이라고 불렀다. 하레의 목적은 우주 생성론에 관련된 모든 이론들은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반증이론으로 유명했던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의 과학철학 역시 우주론적 논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1934년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라는 이름으로 독일어로 출판된 포퍼의 책은 1959년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라는 이름으로 영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영미 철학계에 급속도로 소개가 되었다. 포퍼의 이론에서는 반증가능성의 유무 여부가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중요한 구획기준이 된다. 정상상태 우주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우주론이 다른 우주론에 비해 우주에서 반박가능한 관찰 증거를 제시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포퍼의 프로그램을 환영하였다.

포퍼 자신은 1950년대에 우주론과 관련된 철학적 논쟁에는 끼여들지 않았다. 포퍼는 본래 프리드만과 드메트르의 우주론에 대해 배우면서 대폭발 이론에 매료됐었다. 하지만 시간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많은 보조 가설 때문에 반박 불가능한 이 대폭발 이론을 싫어했다. 포퍼는 대폭발 이론보다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지만,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 자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헬륨 문제, 우주 배경복사, 대폭발 이론의 부상

1961년 브란스(Carl Brans)와 디키(Robert Henry Dicke, 1916­1997)는 일반상대성 이론보다는 마흐의 법칙의 관점에 더욱 충실한 새로운 중력이론을 시도했다. 헝가리 물리학자 롤란드 폰 외트뵈슈(Roland von Etvs, 1848­1919)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1888년에서 1922년까지 행한 정밀한 실험을 통해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비를 108의 비율까지 정확하게 측정했다. 브란스와 디키는 이 비율에 대한 측정을 1011 이하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무엇보다도 브란스와 디키는 여기서 중력 상수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한 폴 디랙의 주장을 다시 부활시켰다. 1937년 디랙(P.A.M. Dirac, 1902­1984)은 우주의 질량, 중력 상수, 우주의 허블 나이 등의 세 기본 우주 상수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 거대 수 가설(Large Number Hypophesis)에 바탕을 둔 우주론을 언급하면서 중력상수를 비롯한 물리의 기초상수들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주장했었다. 브란스와 디키는 디랙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중력 상수가 우주가 팽창하면서 1년에 1,000억분의 2의 비율로 아주 조금씩 작아진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브란스와 디키의 이론은 일종의 대폭발 이론이었지만, 르메트르와 가모브의 이론과는 다른 전통에 속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브란스와 디키는 1961년의 논문에서 가모브, 앨퍼, 허먼 등이 행했던 과거의 연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란스와 디키의 이 비정통 이론은 태초의 우주에서 발생하는 복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줌으로써 대폭발 이론이 부상되는 것과 간접적인 연결을 맺고 있었다.

한편 우주 속의 헬륨의 분포에 대한 논의는 정상상태 팽창우주론과 대폭발 이론 사이에서 대폭발 이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64년 호일과 테일러(R.J. Taylor)는 은하에 존재하는 헬륨의 비율이 정상적인 별에서 생성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다는 것에 주목했다. 즉 무거운 원소들은 전체 원소들의 질량의 약 2 % 정도 되기 때문에 별의 내부에서 핵반응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헬륨의 경우는 우주상에 정상적인 별에서 생성되었다고 하기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호일과 테일러는 헬륨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아주 극적인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우주가 고온, 고압 단계를 거쳤거나 혹은 아주 거대한 물체가 지금까지 생각되던 천체 물리학적 진화 과정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가정해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상상태 우주론을 지지했던 호일은 거대한 물체의 존재를 선호했고, 테일러는 고온, 고압의 초기 단계를 선호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가모브의 대폭발 이론을 입증하는 우주 배경 복사가 발견되면서 대폭발 이론이 정상 상태 우주론을 누르고 우주론 분야에서 지배적인 학설로 부상되었다.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이론적인 차원의 논의는 1948년부터 몇 번 있었지만, 1950년대를 통해서 우주 배경 복사를 찾으려는 연구 프로그램은 사실상 중단되었었다. 우주 배경 복사는 우주론과는 직접적으로는 연관 없이 발전했던 전파천문학 분야에서 발견되었다. 1965년 미국 뉴저지 주 벨 전화 연구소에 있는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극히 예민한 잡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이크로파 탐지 시험을 하던 중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밤낮과 계절이 상관없이 관측되는 복사선을 발견했다.

1964년 여름과 1965년 2월 프린스턴 대학의 디키는 뉴저지 주 크로포드 힐에 있는 벨 전화 연구소에서 이미 우주배경복사와 관련된 측정을 하는 것을 모른 채로 자신의 동료들인 제임스 피블스(James Peebles), 피터 롤(Peter Roll), 윌킨슨(Wilkinson) 등에게 우주배경복사를 측정해보라고 제안했었다. 1965년 3월 초에 제출한 논문에서 디키와 피블은 뚜렷한 실험적 증거가 없이 단지 정성적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이 프린스턴 연구팀이 실험적 결과를 얻기 전에 그들은 자신들이 찾으려는 복사에 관한 증거를 프린스턴 연구소 근처에 있는 벨 전화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당시에 디키는 우주배경복사를 확인할 이론은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얻지 못한 상태였고, 펜지어스는 이론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로 실험 결과만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린스턴 연구팀의 이론적 해석 도움으로 벨전화연구소의 연구팀이 발견한 복사선은 초기의 우주 팽창 과정에서 생겨나서 우주의 팽창과 함께 변화되어 현재의 마이크로파로 지구에서 관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디키, 피블즈, 롤, 윌킨슨 등이 펜지어스와 윌슨의 측정을 대폭발 이론에 입각해서 해석함으로써, 벨전화연구소에서 아무 생각없이 발견한 우주 배경 복사는 가모브의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1981년 앨런 구스(Alan H. Guth)는 초기 표준 팽창 우주론이 지니는 문제점으로 보완하기 위해서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라는 새로운 우주 모형을 발표했다. 구스가 표준 팽창우주론의 문제점으로서는 첫째, 당시의 표준 우주론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우주 내의 여러 지역들이 거의 동일하며, 특히 동시에 같은 온도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우주가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것처럼 균일하기 위해서는 우주 초창기의 허블 상수가 무지무지하게 정확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스는 표준 우주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은 우주가 초창기에 팽창할 때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해서 1028제곱이나 그 이상으로 과냉각되었다는 것을 가정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스의 이 시니리오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우주는 초기 대폭발이 있을 때 아주 극적인 사건을 겪은 뒤에 오늘과 같이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학대중화와 가모브

가모브는 물리학 연구를 벗어나 생물 과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1954년 그는 유전정보의 암호화 이론을 전개하여 DNA 분자의 정보가 단백질을 형성하는 20종류의 아미노산 서열로 번역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즉 그는 세 쌍의 염기 서열이 결합하여 20개의 염기 삼중쌍(triplet)을 형성하고 이것이 20 종류의 아미노산과 1대 1로 대응됨을 처음으로 밝혔던 것이다.

가모브는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책을 무려 20여권이나 출판하여 과학 대중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가 집필한 최초의 대중과학서는 1937년에 나온 『이상한 나라의 톰킨스씨』(Mr. Tomkins in Wonderland)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톰킨스는 그가 집필하는 대중과학 책의 주인공으로 계속 등장하여 나중에는 아예 톰킨스 시리즈로까지 출판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하나, 둘, 셋 ... 무한』(One, Two, Three ... Infinity, 1947)『우주의 창조』(The Creation of the Universe, 1952),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A Planet Called Earth, 1963), 『태양이라고 불리는 별』(A Star Called Sun, 1964) 등과 같은 많은 대중 과학책을 집필하여 복잡한 과학 개념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소개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과학 대중화에 대한 공로로 1956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수여하는 칼링거 상(Kalinga Prize)을 수상하기도 한 가모브는 1968년 8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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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지 가모브,『조지 가모브 자서전』 (사이언스북스, 2000).
1930년대는 인류가 핵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대 전기를 마련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은 중성자를 발견했으며, 프랑스 파리의 졸리오-퀴리 부부는 인공 방사성 원소를 합성하는 데 성공하여 방사성 추적자법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로마의 페르미 연구팀은 중성자를 이용해서 수많은 원소의 핵변환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938년 말에는 독일 베를린의 오토 한(Otto Hahn, 1879­1968)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에 의해 우라늄 핵분열이 발견되어 인류는 바야흐로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중성자 발견

인류로 하여금 핵변환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고 핵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1932년 채드윅에 의한 중성자의 발견이었다. 1930년 독일 베를린의 제국물리기술 연구소에서 일하던 발터 보테(Walter Wilhelm Georg Bothe, 1891­1957)와 벡커(H. Becker)는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를 베릴륨에 쏘았을 때, 다른 원소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력한 '감마선'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 프랑스에서도 퀴리 부인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Irne Joliot-Curie, 1926년까지 Irne Curie, 1897­1956)와 그의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퀴리(Frdric Joliot-Curie, 1926년까지 Jean-Frdric Joliot, 1900­1958)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이 강력한 감마선으로 실험하던 중 역시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 그들은 파라핀, 물, 셀로판 등과 같이 수소를 포함한 물질을 알루미늄 창 앞에 삽입시키고, 여기에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투과력이 강한 감마선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이 경우에 이온화 상자로 측정한 이온화의 강도는 통상의 감마선처럼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들은 이것이 수소 함유 물질에서 나오는 양성자 때문이라는 것을 실험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만약 이 현상을 감마선에 의해서 나타나는 컴프턴 효과에 의해서 양성자가 튀어나온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 감마선은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와 작용 단면적(cross section)을 가져야만 했다. 이 놀라운 현상은 이렌 퀴리가 1931년 12월 28월 과학아카데미의 주례 회의에서 처음으로 발표했으며, 1932년 1월 18일 남편과 함께 공동으로 더욱 자세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들의 발표문은 파리의 과학아카데미 논문집인 『콩트 랑뒤』(Comptes Rendus)에 실려 이것이 1월말에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도착했다.

퀴리의 첫 번째 논문이 나오고 이어 두 번째 논문이 나오는 사이에 케임브리지에서는 채드윅의 지도 아래 보테와 벡커가 관찰한 현상에 해당하는 실험을 2년간 계속하던 웹스터(H.C. Webster)가 왕립학회지에 자신의 실험 결과를 기고했다. 웹스터는 자신의 실험에서 아주 수수께끼와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즉 알파 입자의 빔이 베릴륨 표적 위에 쏘아질 때 알파 입자의 입사 방향으로 방출하는 방사선이 반대 방향으로 방출하는 방사선에 비해 훨씬 투과력이 강했다. 만약 이 방사선이 감마선이라면 이것은 이해하기 아주 힘든 현상이었다.

채드윅은 웹스터의 지도 교수로서 자신의 실험실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에 대해 주목하는 한편, 파리에서 전해오는 소식도 면밀히 검토하였다. 특히 그는 1920년 러더퍼드의 베이커 강연의 영향을 받아 핵 내부에 중성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또한 채드윅은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으로부터 양질의 폴로늄을 얻을 수 있었으며, 1920년대를 통해 발전한 새로운 전자공학적 실험 기법과 정교한 계수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1932년 2월 17일 채드윅은 '중성자의 가능한 존재'(Possible existence of a neutro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네이처』지에 보냈으며 이것은 열흘 뒤에 출판되었다. 이 논문에서 채드윅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매우 강력한 '감마선'이 감마선이 아니라 수소원자와 질량이 비슷하고 중성을 띤 새로운 입자인 '중성자'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투과력이 강한 '감마선'이 복사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채드윅의 기발한 발상과 치밀한 추론에 의해 여기에는 감마선과 아울러 새로운 소립자인 중성자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인공방사선 원소의 발견과 방사선 추적자법의 발전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되고, 곧이어 우주선에서 양전자가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핵과 관련된 현상을 더욱 분명한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성자 발견의 근처까지 갔었던 파리의 졸리오-퀴리 연구팀도 이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1934년 방사성 원소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933년 졸리오-퀴리 팀은 가벼운 원자들에 알파 입자를 쏘면 양전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 성과를 그 해 10월에 열린 솔베이 회의에서 보고했다. 이 실험을 계속하던 중 파리 라듐 연구소의 졸리오-퀴리 팀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폴로늄 시료 위에 알루미늄 판막을 갖다 놓으면, 시료를 제거하여도 양전자의 방출이 급격히 감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알루미늄 판막이 방사성을 띠면서 마치 통상의 방사성 물질처럼 지수적으로 방사선 붕괴의 방출이 감소하였다. 이런 현상은 보론과 마그네슘과 같은 가벼운 원소에서 발견되었는데, 반감기가 보른은 14분, 마그네슘 2분 30초, 알루미늄은 3분 15초였다. 결국 졸리오-퀴리 팀은 이 실험에서 질소, 규소, 인의 동위원소에 해당하는 인공 방사성 원소를 처음으로 얻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1934년 2월 10일 『네이처』지에 출판되었는데, 다음 해 졸리오-퀴리 부부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합성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인공 방사성의 합성 성공은 무엇보다도 과학 연구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는 방사선 추적자법의 보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미 1913년 헝가리 태생의 과학자 에베시(Gyrgy Hevesy, 1885­1966)는 납의 동위원소인 라듐D가 보통의 납과 화학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라듐D를 보통의 납과 섞어서 방사성을 추적하는 '방사성 지시자'(radioactive indicator)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오늘날은 '방사성 추적자'(radioactive tracer)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하지만 당시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그리 많지 않아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931년부터 사이클로트론을 비롯해서 여러 입자 가속 장치가 고안되었고, 1932년 채드윅에 의해서 발견된 중성자를 이용해 보다 용이하게 새로운 원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인공 방사성 원소의 합성에 성공하면서 방사성 추적자 방법은 물성 과학은 물론, 생명 과학, 생태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중요한 연구 수단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

한편 영국의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뒤 수많은 과학자들은 이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서 핵변환을 일으키는 실험을 했다. 중성자는 전하가 없기 때문에 쉽게 원자핵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따라서 핵을 쉽게 변환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과학자들에게 이 중성자는 아주 유용한 연구수단이 되었다. 1930년대에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 원자핵이 변환되는 것을 연구하던 수많은 과학자들 가운데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한 것은 독일의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었다. 그들은 1938년 말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바륨이 생성되고, 여기서 두세 개의 중성자가 나와서 이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라늄을 연구하고 있던 여러 연구팀 가운데 왜 하필이면 베를린의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팀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당시 우라늄의 핵변환을 연구하던 팀 가운데에는 베를린 팀 이외에도 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던 연구팀이 많았다. 우선 졸리오-퀴리 팀은 1934년 붕소, 마그네슘, 알루미늄 등에 폴로늄에서 나오는 강력한 알파선을 충돌시켜, 최초로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실험을 본 로마의 페르미는 졸리오-퀴리가 사용한 고에너지 알파입자 대신에 채드윅이 발견한 느린 중성자로 인공적으로 원소 변환시켜 방사성 물질을 만들려는 착상을 했다. 결국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와 아말디(E. Amaldi), 다고스티노(O. D'Agostino), 라세티(F. Rasetti), 세그레(Emilio Gino Segr, 1905­1989) 등으로 구성된 로마의 연구팀은 1934년 중성자를 쏘아서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때 이들은 수많은 원소에 중성자를 쏘아서 원소변환을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우라늄에도 중성자를 쏘아서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초우라늄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또한 파리 팀도 1934년부터는 우라늄과 토륨에 중성자를 쏘아 핵의 변환과정을 연구하고 있었다.

학제간 연구조직의 중요성

우선 베를린 팀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하게 된 가장 커다란 요인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 팀의 특이했던 연구조직을 들 수 있다. 당시 파리의 이렌 퀴리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과 로마의 엔리코 페르미 연구팀은 주로 물리학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반면에 베를린의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 슈트라스만 연구팀은 물리학자와 화학자들로 구성된 완벽한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팀이었다.

우선 팀장인 오토 한은 유기화학자 출신으로 핵 현상을 연구한 경험이 있었던 방사화학자였다. 1897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들어간 오토 한은 대학 당시에는 주로 맥주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공부에는 그다지 뜻이 없던 학생이었다. 1901년 박사학위를 한 뒤 그는 병역을 마친 뒤 1904년 9월 자비로 영국으로 건너가 비활성 기체의 연구로 유명한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 1852­1916) 연구실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램지는 방사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 한에게 100 그램의 바륨염을 주면서 마리 퀴리의 방법을 이용해서 라듐을 추출하라고 부탁했다. 방사화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던 오토 한은 이것을 추출하는 연구를 하다가 운이 좋게도 방사토륨(radiothorium)을 발견했다.

뜻밖의 중대한 발견을 한 오토 한은 유기화학보다는 방사화학을 하기로 마음먹고, 보다 넓은 경험을 쌓기 위해 1905년 9월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 있던 러더퍼드를 찾아갔다. 이곳에서도 그는 방사악티늄을 발견하는 재능을 발휘했다. 1906년 가을 오토 한은 베를린의 에밀 피셔(Emil Fisher, 1852­1919)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도 메조토륨(mesothorium)을 분리해내는 등 방사화학 분야에서 계속 좋은 연구 업적을 냈다. 1910년에 베를린 대학 화학과 교수가 된 그는 이곳에 있던 루벤스, 네른스트, 제임스 프랑크, 막스 폰 라우에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물리학자 가운데 오토 한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그와 평생을 같이 연구했던 리제 마이트너였다. 물리학자였던 리제 마이트너는 당시 독일에서는 드물었던 여성과학자였는데, 한과는 이미 1907년부터 함께 연구를 했었다.

1912년 말 베를린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가 설립되자 오토 한은 1913년부터 1944년까지 줄곧 이 연구소에서 방사성 분과를 이끌었다.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가 설립되자 리제 마이트너도 처음에는 한의 연구실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1917년부터는 자신의 연구실을 얻어서 한과 계속 공동연구를 했다. 화학자 오토 한과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와의 오랜 공동 연구의 성과는 우라늄 핵분열 발견으로 나타나게 된다.

페르미 팀과 졸리오-퀴리 팀의 작업을 검토한 뒤 1934년 가을 중성자를 이용해서 우라늄을 변환시키는 실험을 한에게 제안했던 것은 물리학자였던 마이트너였다. 한과 마이트너는 핵변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원소를 분석할 전문적인 분석화학자를 찾았는데, 그가 바로 슈트라스만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과학자들의 협동적 연구가 베를린 팀이 우라늄을 발견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파리 팀과 로마 팀에는 우수한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없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라듐과 바륨이 원소의 주기율표상에서 같은 2A족에 속해서 그것들의 화학적 성질이 비슷했다는 것도 이 연구에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기율표상에서 2번째 세로축에 해당하는 제 2A족 원소들은 원자주위를 돌고 있는 최외각 전자들이 모두 2개씩이어서 다른 물질과 화학결합을 할 때 비슷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 유사한 화학적 성질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아주 꼼꼼한 분석화학자가 아니고서는 이것을 구별해내기가 대단히 힘이 들었다. 1930년대까지 과학자들이 얻은 원자변환 지식에 따르면, 원자번호가 92번인 우라늄은 자연붕괴를 하여 알파선과 베타선을 방출하면서 당시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커다란 초우라늄 원소로 변환되거나, 혹은 원자번호 91번인 프로탁티늄, 90번인 토륨, 89번인 악티늄, 88번인 라듐 등과 같은 여러 원소로 변하다가 마침내는 안정한 납으로 되어 방사성 원소로서의 일생을 마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자핵에 변환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작은 범위에서 일어나지 우라늄이 절반으로 쪼개져서 원자번호가 56번인 바륨으로 변화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얻어낸 생성물 속에는 분명히 바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과학자들은 이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한편 1937년 파리 라듐 연구소의 이렌 퀴리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공동연구자인 사비치(Paul Savitch)는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서 3.5시간의 반감기를 갖는 방사성 물질을 발견했다. 이렌 퀴리와 사비치는 애초에 그것을 원자번호 90번인 토륨의 동위원소라고 생각했다. 베를린 팀은 이 토륨의 동위원소를 찾으려고 했으나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부정적인 결과를 파리 팀에게 알렸는데, 이후 계속된 실험에서 파리 팀은 이번에는 그것이 원자번호 89번인 악티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없었던 파리 팀은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바로 이 3.5 시간의 반감기를 갖는 방사성 물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오토 한, 마이트너, 슈트라스만으로 구성된 베를린 연구팀은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했던 것이다.

베를린 팀의 승리

1938년 7월 중순 외국인 신분이었던 마이트너가 나치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서 베를린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이상적이던 베를린 연구팀이 깨어졌다. 이제는 마이트너가 빠진 상태에서 방사화학자 오토 한과 분석화학자 슈트라스만이 그들이 하던 연구를 계속해야만 했다. 베를린 팀의 분석화학자였던 슈트라스만은 기존의 핵 물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선입관이 없이 오직 생성물의 화학조성을 분석화학 방법으로 정확하게 분석해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마이트너의 추측대로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서 만든 생성물에서 라듐을 찾기 위해 실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실험을 하면 할수록 자꾸 자신이 찾고자 했던 이 라듐이 바륨과 같이 행동한다는 느낌이 분석화학자인 그에게 와 닿았다. 물리학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바륨이 분석화학자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슈트라스만의 이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과 슈트라스만은 함께 '화학자의 입장'에서 실험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반복했다. 이 실험을 행한 다음 주 월요일인 1938년 12월 19일 그들은 마이트너에게 놀라운 결과를 전하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라듐 동위원소가 라듐처럼 행동하지 않고, 바륨처럼 행동한다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마침내 마이트너가 떠난 지 불과 5개월 뒤인 1938년 12월 베를린 팀은 중성자의 충돌에 의한 우라늄 핵변환의 생성물이 바륨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라늄은 약간 작아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일단 우라늄이 중성자에 의해 분열된다는 착상이 확인된 뒤에는 나머지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으며, 마이트너와 그의 조카인 오토 프리시(Otto Robert Frisch, 1904­1979)의 해석에 힘입어 거의 순식간에 대략의 우라늄 분열 메커니즘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우라늄은 바륨과 크립톤으로 분열된 뒤 두세 개의 중성자를 방출하고, 또한 심한 질량 결손에 의해서 막대한 에너지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원자탄의 기본 원리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결국 현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우라늄 핵분열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인 핵물리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핵물리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석화학자에 의해 그 발견의 실마리가 잡혔던 것이다.

페르미 팀이 핵분열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는 연구조직의 차이 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과학외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페르미 팀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서 사분오열되어 연구에 단절이 생겼다. 1938년 파시스트 인종법안은 페르미 처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1938년 12월 페르미는 중성자를 사용해서 방사성 물질을 만든 공로로 노벨상을 받으러 스톡홀름에 갔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고 그냥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핵분열의 발견과 핵에너지 시대의 진입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에 의한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으로 우리 인류는 새로운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1933년 핵물리학자인 러더퍼드는 우리 시대에 원자에너지를 산업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요원하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이렇듯이 1939년 봄까지도 원자에너지를 산업적이나 군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게 보였다. 그러나 1938년 말에 독일의 한과 슈트라스만이 우라늄 핵분열의 산물인 바륨을 발견하고, 다음해 1월 6일 이것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돌변했다. 우라늄 핵분열 소식은 발견되자마자 급속히 퍼지면서 과학자들은 곧바로 이와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한과 오랫동안 함께 연구했다가, 우라늄 핵분열 발견 직전에 독일을 떠나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던 리제 마이트너는 한에게 핵분열 발견 소식을 듣고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 그녀를 방문한 오토 프리시와 함께 1월 16일에 공동으로 이에 관련된 글을 『네이처』지에 보냈으며,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머물고 있던 보어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1월 20일에 역시 『네이처』지에 핵분열과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불과 한 달도 안된 사이에 핵분열 소식은 지구를 완전히 한바퀴 돈 셈이었다.

우라늄 핵분열에 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척되면서 우라늄235 외에도 자연에 보다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라늄 238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핵 물질이 미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940년 5월 버클리 대학의 맥밀런(Edwin M. McMillan, 1907­1991)과 에이블슨(Philip M. Abelson)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원자번호 93의 넵튜늄을 발견했고, 이어서 1941년 2월 버클리의 젊은 화학자인 시보그(Glenn T. Seaborg, 1912­1999)는 세그레와 함께 연구하여 플루토늄을 발견했다. 세그레와 시보그가 1941년 5월 느린 중성자에 의한 플루토늄의 단면적이 우라늄 235의 1.7배라는 사실을 계산해내면서 플루토늄은 주요 핵연료로 부상되었다.

핵분열과 새로운 핵연료의 발견에 따라 핵에너지의 산업적, 군사적 응용 가능성이 급속도로 현실화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페르미는 1942년 역사상 최초로 원자로를 건설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에 의해서 1945년 원자탄은 제조되었다. 원자탄은 완성되자마자 곧바로 전쟁에 사용되었다. 우라늄의 핵분열이 발견된 지 겨우 6년만의 일이다.

1945년 오토 한은 독일 핵 개발에 관한 전후 조사 때문에 영국으로 잡혀가 억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독일이 항복한 뒤인 1945년 7월 3일 연합국 정보 요원들은 전쟁 중에 독일이 어느 정도까지 핵 개발을 진행시켰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 1889­1979), 발터 보테, 카를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cker), 오토 한 등 핵 개발과 관련된 핵심적인 과학자들을 독일에서 납치하여 케임브리지에서 약 25마일 떨어진 한 농가에 억류해 놓았다. 알소스 특명(Alsos Mission)으로 이름 붙여진 이 군사 활동을 통해 연합국 정보 요원들은 독일 과학자들을 외부와 차단시켜 놓고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 내용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 노벨상은 유명한 과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억류된 과학자들을 풀려나게 하는 데에도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1945년 11월 16일 오토 한은 자신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듬해 그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던 슈트라스만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에서 1980년 생애를 마감했다.

참 고 문 헌

[1] J. Chadwick, Nature 129, 312 (1932).
[2] J. Chadwick, "The Existence of a Neutron," Proc. Roy. Soc. London (1932), Vol. 136, pp. 692-708.
[3] O. Hahn and F. Strassmann, Naturwiss, 27, 11-15 (1939).
[4] O. Hahn and F. Strassmann, Naturwiss, 27, 89-95 (1939).
[5] John Hendry, Cambridge physics in the thirties (Bristol, Hilger, 1984).
[6] William R. Shea (ed.), Otto Hahn and the rise of nuclear physics (Dordrecht, Reidel, 1983).
[7] Fritz Krafft, Im Schatten der Sensation: Leben und Wirken von Fritz Straßmann (Weinheim, Verlag Chemie,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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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뜨거움과 차가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온도라는 개념이 실제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에 대한 최소한의 정량적인 개념은 온도계가 발명되면서 가능하게 되었지만, 온도계의 발명만으로 열에 대한 학문 분야가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열에 관한 분야가 열역학이라는 체계적인 이론 체계로 발전한 것은 에너지 보존법칙과 엔트로피 법칙 등 열역학의 기본 법칙이 정립된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9세기말 클라우지우스, 맥스웰을 거쳐 볼츠만은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정립하고 열에 대한 현상을 통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통계 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출현과 칼로릭 이론의 발전

온도계는 1592년 갈릴레오에 의해 처음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갈릴레오는 온도 측정을 위한 팽창 매질로 공기를 사용했는데, 갈릴레오가 발명한 이 기체 온도계는 구체적인 온도 단계가 없어 체계적인 정량적 측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의 온도계는 기압계와 같은 맥락에서 발전했다. 이 기체 온도계가 점차로 액체 온도계로 대체되면서 비교적 정확한 온도 측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온도계가 발명된 뒤 과학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온도계를 고안해냈다. 이에 따라 18세기 초에 이르면 무려 35 종류나 되는 다양한 온도 체계가 창안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스웨덴의 천문학자였던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01­1744), 네덜란드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Gabriel Fahrenheit, 1686­1736), 프랑스의 레오뮈르(Ren-Antoine Ferchault de Raumur, 1683­1757) 등이 제안한 온도 체계가 비교적 널리 사용되었다. 18세기 초 파렌하이트는 오늘날 우리가 화씨라고 부르는 온도 체계를, 그리고 1742년 셀시우스는 수은을 사용해서 섭씨 온도 스케일을 창안했다. 파렌하이트는 애초에 물의 빙점을 30, 체온 90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32와 96으로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빙점은 32, 체온은 98.6으로 정해졌다. 오늘날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1730년 프랑스의 레오뮈르는 물의 빙점을 0, 비등점을 80으로 정한 온도 스케일도 제안했었다. 이 체계는 창안 당시에는 다른 체계에 비해 아주 널리 사용되었지만, 19세기 말에 다른 체계들로 흡수, 교체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재 물의 빙점을 32로 하고 비등점을 212로 하여 그 사이를 180 등분한 화씨 온도 체계와, 물의 빙점을 0으로 하고 비등점을 100으로 하여 그 사이를 100 등분한 섭씨 온도 체계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등장과 함께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열에 대한 정량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특히 물리학자인 라플라스와 화학자인 라부아지에는 열량계를 이용해서 열에 대한 정량화 작업을 추진했다. 이들이 전개한 열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열을 무게가 없는 입자로 생각하는 칼로릭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당시에 칼로릭은 화학 원소와 마찬가지로 근본 물질로 간주되었다. 근대적인 원소의 개념을 확립했던 라부아지에가 열거한 원소 가운데에는 빛과 함께 열의 양을 나타내는 칼로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이공학 교육기관이었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공학자들은 칼로릭 이론을 기반으로 해서 열 현상에 대한 수학적 논의를 전개시켜 나갔다. 푸리에(Joseph Fourier, 1768­1830)와 같은 사람들은 칼로릭 이론에 입각해서 열 전달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루었으며, 사디 카르노(Sadi Carnot, 1796­1832)는 열 효율 문제를 수학적으로 다루었다. 전문가로서의 분명한 경력을 쌓은 이들은 열의 전도도, 온도 변화, 기울기 등과 같은 열과 관련된 수학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24년 사디 카르노는 '열의 동력에 관한 고찰'(Rflexions sur la puissance motrice de feu)이라는 글에서 열기관의 열효율은 그 열기관의 구성물질에 관계없이 그 열기관을 구성하는 두 온도만의 함수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카르노는 물이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떨어지면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물의 양과 한 일의 양의 비가 두 위치의 차이만의 함수로 표현되는 데에 주목했다. 물의 낙차와 마찬가지로 열도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내려가면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열의 양과 그 과정에서 한 일의 비, 즉 열효율은 두 온도의 차이만의 함수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 카르노의 핵심적 주장이었다.

하지만 열기관의 효율을 이론적으로 다룬 카르노의 이 논문은 출판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고 학자들에 의해 거의 무시되었다. 우선 이 논문은 아주 적은 수량만 복사되었고 따라서 문헌의 전파 속도도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에 증기기관 기술의 중심지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무명의 프랑스 저자가 쓴 이 책이 영국으로 전파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이외에도 이 논문은 공학자들이 주로 읽는 공학 전문잡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논문의 내용도 열기관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인 문제를 취급했기 때문에 공학자들마저 이 논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의 동시 발견

한편 1840년대에 들어와서 여러 형태의 에너지들, 즉 역학적 에너지와 열, 화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같은 종류의 물리적 양이고, 이것들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에너지가 서로 변환가능하다는 생각이 퍼지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계몽사조에 대한 반발로 독일에서 유행하던 자연철학주의(Naturphilosophie)의 영향이 컸다. 셸링, 노발리스를 비롯한 자연철학주의들은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성장한 분석적, 기계적, 실험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에 다시 조화와 감성을 부여했다. 자연친화적이며 유기체적인 자연관을 선호했던 자연철학주의자들은 자연의 여러 가지 다양성의 밑바탕에는 통일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조의 영향 아래 1840년대에 열역학 제1법칙에 해당하는 에너지 보존법칙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동시에 발견되었다.

본래 의사였던 로버트 마이어(Robert Meyer, 1814­1878)는 음식물이 몸 속에 들어가서 열로 변하고, 이것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역학적 에너지로 변한다는 생각을 기초로 해서 모든 종류의 에너지들이 서로 변환가능하며, 전체 에너지의 양은 보존된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즉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역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같은 종류의 물리적 양이며, 자연에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로서 열과 일의 변환 계수를 계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물리 분야의 전문학술지인 『물리학 및 화학 연보』(Annalen der Physik und Chemie)에 보냈다. 하지만 당시 '새로운 물리-화학 잡지'를 표방하며 학술잡지를 새롭게 개편하려던 편집인 포겐도르프(Johann Christian Poggendorff, 1796­1877)는 마이어의 논문이 너무 사색적이고 전문적인 물리학 논문이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수록을 거절했다. 마이어의 논문이 수록을 거부당한 것은 당시 독일 과학이 초기의 낭만주의적인 단계를 벗어나 과학 방법에서 분석적이고 수학적인 강조하는 형태로 제도화되어 기존의 자연철학주의에 영향을 받은 낭만적인 과학활동에 대해 반발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예에 해당한다. 마이어는 할 수 없이 자연철학주의에 대해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구스타프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가 운영하는 화학저널인 『화학 및 약학 연보』(Annalen der Chemie und Pharmacie)에 자신의 논문을 기고했다.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1842년에 마이어가 한 작업을 모른 채로 1847년 생체의 열은 생명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음식물의 화학에너지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그는 여러 형태의 에너지들이 서로 변환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역학적 에너지에만 적용되던 에너지 보존법칙을 다른 에너지까지 확장시켰다. 헬름홀츠는 이런 생각이 담긴 논문을 포겐도르프의 『물리학 및 화학 연보』에 투고했지만,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편집인으로부터 수록을 거부당했다. 헬름홀츠도 할 수 없이 이 내용을 물리학회 강연집인 『에너지 보존 법칙에 관해서』(Uber die Erhaltung der Kraft, 1847)라는 소책자로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관한 생각은 독일뿐만이 아니라 실험적 전통이 강했던 영국에서도 등장했다. 영국의 제임스 줄(James Prescott Joule, 1818­1889)은 1840년대의 여러 작업을 통해서 에너지는 보존되고 또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줄은 자신의 실험을 정리해서 1850년 '열의 역학적 등가에 관해서'(On the mechanical equivalent of heat)라는 논문으로 출판하고 여기서 772 파운드가 1피트 내려갈 때 생기는 역학적 에너지로 물 1파운드(453그램)를 화씨 1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클라우지우스와 엔트로피 개념의 출현

1834년 철도 공학자였던 에밀 클라페롱(Emile Clapeyron, 1799­1864)은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카르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다시 정리해서 물리학자들과 공학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카르노의 열기관 효율에 관한 이론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47년 6월 훗날 켈빈 경(Lord Kelvin)이 되는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은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모임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던 줄을 만났다. 이 때 톰슨은 에너지 보존법칙을 입증하려는 줄의 실험에 대한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줄의 발표를 들은 뒤 톰슨은 칼로릭 이론을 사용한 카르노의 법칙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르노와 클라페롱의 견해에 의하면 칼로릭이라는 열 입자는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떨어지면서 일을 할 때 칼로릭의 양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은 열과 일이 같은 종류의 양이기 때문에 일을 할 때에는 칼로릭 양에 변화가 생겨야만 하고 따라서 이 두 주장 사이에는 서로 모순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톰슨은 카르노 법칙과 줄의 법칙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1854년 열에 관한 동역학적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

1850년 당시 베를린의 공병 및 공업학교 교수였던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열의 동력에 관해서'(Ueber die bewegende Kraft der Wrme)라는 논문에서 카르노의 원리와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열효율은 두 온도만의 함수라는 카르노의 원리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과 부합되게 하기 위해서는 열에서 일이 나올 때는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열은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고, 외부의 일의 작용이 없이는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올릴 수 없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초보적인 이해가 가능한 형태로 나타낼 수 있었다.

1851년 톰슨은 '열의 동력학적 이론에 관해서'(On the dynamical Theory of Heat)라는 논문에서 한편으로는 클라우지우스의 우선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카르노의 이론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 즉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했다. 톰슨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스스로 옮겨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열은 낭비(dissipation)가 되기 때문에 일단 일이 열로 바뀐 뒤에는 그 열이 모두 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이렇게 열이 낭비되는 과정을 비가역적(irreversible) 과정이라고 말하고 "현재의 물질 세계는 역학적 에너지가 낭비되는 일반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클라우지우스는 1857년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운동에 관해서'(Ueber die Art der Bewegung, welcher wir Wrme nennen)이라는 글에서 기체에 대한 운동학적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클라우지우스는 분자를 당구공으로 간주할 뿐만이 아니라 병진 운동, 회전 운동, 진동 운동 등 복잡한 분자 운동을 고려하여 기체 운동을 다루었다. 클라우지우스의 이 논문은 19세기 기체 분자 운동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1850년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정성적인 논의를 제기한 이후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수학적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의 결과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라는 새로운 물리량을 정의하게 되었다.

1865년 클라우지우스는

라는 방정식(S는 엔트로피, T는 온도, Q는 열의 양)을 기술하면서 엔트로피(entropy)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때 그는 열 현상을 지배하는 두 개의 일반적 법칙을 제안했다. 우선 그 하나는 열역학 제1법칙으로 '우주의 에너지는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 다.

다음으로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수학적 표현이다. 하지만 당시에 클라우지우스가 수학적으로 전개한 엔트로피 개념은 에너지 개념에 비해 직접적으로 이해되기 힘든 것이었고, 또한 개념 자체도 모호한 점이 많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열에 대한 통계적 접근과 맥스웰의 악령

한편 열역학은 대개의 경우 수많은 입자로 구성된 계를 다루기 때문에 통계적인 취급을 해야한다는 생각도 등장하게 되었다. 열에 대한 통계적 접근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은 맥스웰(James C. Maxwell, 1831­1879)이었다. 1855년과 1859년 사이에 맥스웰은 애덤스 상(Adams Prize) 문제인 토성 띠의 역학적 체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많은 물체에 대한 상호작용을 다루었고, 이 과정에서 역학에 대한 통계적 취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맥스웰은 1859년부터 많은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체 동력학의 문제를 다루면서 열역학의 문제를 통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주로 속도의 분포에 관한 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1866년과 1868년에 발표한 '기체의 동력학 이론에 관해서'(On the Dynamical Theory of Gases)라는 논문에서 맥스웰은 분자들의 속도 분포가 최소 제곱(Least Square) 이론에서 관찰 오차의 분포를 나타내는 것과 같은 형태를 띤다고 간주하고, 기체의 확산, 점성, 열전도도 등과 관련된 여러 열역학적 문제를 통계적으로 다루었다.

기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취급하였지만, 맥스웰 자신이 결정론을 포기하고 비결정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1867년 맥스웰은 피터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일 톰슨에 의해 '맥스웰의 악령'(Maxwell's Demon)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유명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별 분자의 운동을 탐지하고 이에 반응할 수 있는 가설적인 지적 존재, 말하자면 맥스웰의 악령이 있다면 열역학 제2법칙이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맥스웰은 열역학 제2법칙이 자연계에서 절대적인 법칙이 될 수 없고, 단지 통계적인 확실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이 가상적인 장치를 고안했다. 탐지 능력 자체에는 정보가 들어 있고 따라서 악령의 행위 자체가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고 있기 때문에 정보 자체도 엔트로피와 관련이 된다. 하지만 맥스웰이 이 문제를 제기했던 당시에는 이런 이해가 없었고, 따라서 맥스웰 악령 이야기는 정보 엔트로피 개념이 분명하게 확립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해결하기 힘든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볼츠만 통계역학의 출현

맥스웰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한 기체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가 통계역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학 체계를 완성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이었다. 빈에서 태어난 볼츠만은 1866년 빈 대학의 요제프 슈테판(Josef Stefan, 1835­1893) 밑에서 기체 운동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볼츠만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역마살'이 아주 강하게 낀 사람으로 기질상 어느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25세의 나이로 그라츠 대학의 수리물리학 교수가 된 볼츠만은 그 뒤 그라츠(1869­73; 1876­79), 빈(1873­76; 1894­1900; 1902­06), 뮌헨(1889­93), 라이프치히(1900­02) 등 아주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수학 및 물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렇게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볼츠만은 기체 운동론에 대한 자신의 연구만은 항상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볼츠만이 맥스웰의 기체 운동론을 처음으로 접한 증거는 1868년에 출판한 열평형에 관한 논문에서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맥스웰이 논의한 분자의 속도 분포에 관한 논의를 더욱 확장시켜 오늘날 우리가 맥스웰-볼츠만 속도 분포함수이라고 부르는 식과 모든 통계역학의 계산에서 기본이 되는 '볼츠만 인수'를 얻어냈다.

맥스웰과 볼츠만은 평형 상태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가는 과정도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평형 상태의 분포 법칙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스웰의 작업을 더욱 확장시키려던 볼츠만은 수송 방정식(transport equation)으로 알려지게 되는 보다 일반적인 해법을 찾아나갔다. 우선 그는 열역학적 엔트로피를 분자 짜임새(configuration)의 통계적 분포와 연결시켜 엔트로피의 증가가 분자 수준의 무질서도 증가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열역학 제2법칙을 해석하는 것으로 '볼츠만의 최소 정리' 혹은 '볼츠만의 H-정리'로 알려지는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엔트로피의 증가의 법칙을 역학의 법칙과 확률의 방법을 사용해서 유도해 낸 것이었다.

H-정리를 둘러싼 논쟁들

1872년 볼츠만은 기체 분자가 열 평형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체 내의 일반적인 수송 과정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기체 운동론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업적 중에 하나인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일반적인 수송 방정식으로부터 기체의 확산, 점성, 열전도 계수를 계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볼츠만의 수송 방정식에 대한 정확한 해를 구하는 것은 특별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 볼츠만은 비평형 상태에서도 엔트로피의 정의를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볼츠만의 H-함수에 관한 논의도 전개했다. 1872년 논문에서는 H-함수는 E-함수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1890년대에 와서 E는 H로 표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리하여 비평형 상태에서 H-함수는 항상 감소한다는 볼츠만의 H-정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볼츠만의 H-정리로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적인 처리가 어느 정도 해결한 듯이 보였으나, 1876년 빈 대학에서 볼츠만과 함께 연구하던 요제프 로슈미트(Joseph Loschmitt, 1821­1895)가 볼츠만의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슈미트는 가역적인 뉴턴 역학의 법칙으로는 비가역적인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유도해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뉴턴 역학으로 비가역적인 열역학 제2법칙을 유도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윌리엄 톰슨에 의해서도 지적된 사항이었다.

로슈미트의 반론에 대해 볼츠만은 처음에는 실제 세계 내에서 과정의 비가역성은 운동 방정식이나 분자 사이의 힘의 법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조건의 문제 때문에 야기된다고 대응했다. 로슈미트와의 논쟁을 통해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확률적인 것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논쟁 과정을 통해 1877년 볼츠만은 열역학 제 2법칙과 열 평형 상태에 관한 확률 계산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통계역학의 대체적인 골격을 완성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엔트로피와 확률 사이의 관계인 S=k log W라는 유명한 관계식에 해당되는 식을 확률 방법을 써서 유도했다. 여기서 W는 체계의 주어진 거시 상태에 상응하는 미시상태의 가능한 분자의 배열수이고, S는 엔트로피를 말하며, k는 볼츠만 상수이다.

1890년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 ­1912)는 삼체 문제를 다루는 현상 논문에서 일정한 전체 에너지를 갖고 유한한 부피 내에서 움직이도록 제한된 임의의 역학 체계는 종국적으로 특정한 초기 짜임새로 되돌아온다는 정리를 발표했다. 영원 회귀의 원리는 이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예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적도 있었다. 이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무한정 증가할 수는 없고, 언젠가는 초기 값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이 회귀 정리를 볼츠만의 통계역학에 적용할 경우 볼츠만의 H-정리는 항상 유효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1895년 12월 베를린의 젊은 수학자로서 당시 플랑크의 학생이었던 체를레모(Ernst Zerlemo, 1871­1953)는 이 회귀 정리를 이용하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역학 모형을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열역학 제2법칙이 경험적으로 유효한 것이라면 결정론적인 역학적 관점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를레모의 주장은 1896년 『물리학 연보』에 발표되었고, 이어 볼츠만과 체르레모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명한 것이지만, 제를레모는 그것을 열 이론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신의 H-정리에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완전히 조화될 수 있으며,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선 평형 상태는 단일한 짜임새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가능한 짜임새의 집단이다. 특정한 초기 상태가 회귀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나타나는 하나의 요동으로서 이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따라서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하는 자신의 H-정리의 유효성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볼츠만의 최후

1894년 슈테판이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으로 옮겨 그의 후임이 되었으며,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에 『기체론 강론』(Vorlesungen ber Gastheorie)을 출판하면서 기체 운동 이론을 포함한 통계물리학의 일반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볼츠만의 통계 역학이 수용되는 과정은 현대 양자론이 등장하는 과정과 간접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새로운 복사이론을 제기하면서 볼츠만의 논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그 이후 과학자들 사이에서 볼츠만의 통계 역학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자의 실재를 부정하던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와 그의 추종자들은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원자론에 대해 계속 끈질기게 비판을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볼츠만은 심각한 학문적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06년 여름 볼츠만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였으며 아드리아 해 북동부에 위치한 트리에스테 근처의 아름다운 두이노 만으로 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해 9월 5일 볼츠만은 갑자기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볼츠만이 자살한 실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룩한 평생의 업적이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 계속 거부되는 고립감이 그로하여금 자살로까지 이르게 만든 한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볼츠만이 세상을 떠난 때를 전후에서 브라운 운동과 같은 요동 현상에 관한 분자 운동에 관한 비평형 통계 이론이 1905년 독일의 아인슈타인, 1906년 폴란드의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Marian von Smoluchowski, 1872­1917)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1908년 경 프랑스의 장 페랭(Jean Perrin, 1870­1942)은 브라운 운동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의 이론을 입증하는 실험을 하여 원자의 실재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와 아울러 1905년 이후 흑체복사 이론과 연관된 양자론이 점차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수용되어 갔으며, 핵 및 원자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사실이 등장했다. 이처럼 볼츠만의 사망을 전후해서 볼츠만이 이룩한 통계역학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 고 문 헌

[1] J. C. Maxwell, Phil. Mag. 32, 390- 393 (1866); Phil. Mag. 35, 129-145, 185-217 (1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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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오래 전부터 마찰시킨 물질들이나 자석들이 서로 끌리거나 밀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신비한 작용을 하는 전기와 자기에 관한 지식은 오랜 동안 경험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졌다. 전기, 자기, 빛 등에 관한 지식이 수학적 테크닉의 도움으로 이론 물리학과 만나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1864년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전기와 자기 현상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리 법칙을 정립해서 전자기학이라는 새로운 통합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다.

자기학의 기원

자석은 이미 기원전부터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나, 자석이 남북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기원 전후로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풍수가들은 자석을 택지나 묘소의 방향을 잡는 데에 이용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물에 자침을 띄워 방향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11세기에 이르면 이 방법을 항해에도 사용하게 된다. 나침반의 원조인 이 장치는 당시에 중국에 왔던 아랍 상인들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유럽 선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씌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석에 관한 문헌은 1269년 프랑스 천문학자 페레그리누스(Petrus Peregrinus de Maricourt)가 집필했다고 하는 『자석에 대한 편지』(Epistola de magnete)이다. 이 책자에서 그는 자석을 지구의 본을 딴 작은 천체 모형으로 간주하면서, 자석의 극성, 나침반 등 자석의 다양한 성질에 대해 언급했다. 페레그리누스는 체계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그 때까지 유럽에 알려진 자석에 관한 지식을 종합하여 서구 자기학에 대한 학문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페레그리누스의 이 선구적인 논의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유럽에서 잊혀졌다.

300여년이 지난 뒤인 1581년 영국의 선원이자 기계제작자인 노먼(Robert Norman)은 『새로운 인력』(The Newe Attractive)이라는 책에서 자석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노먼은 지자기의 방위각과 복각에 대해 언급하는 등 나침반의 성질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당시에 몇몇 지식 계층은 실제 생활에 종사하는 장인 계층과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지식을 얻기도 했다. 즉 지식 계층에 속하는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는 노먼과 같은 장인계층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경험적으로 얻은 자기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학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길버트는 1600년 『자석에 관해서』(De Magnete)라는 책에서 자석에 관한 지식을 정리하여 자기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자기 현상을 지구의 균질한 부분들이 서로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려는 성질로 자석이 전체 지구의 근본적 형상에 부합하려는 충동이라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자석을 살아있는 지구의 작은 분신이라는 뜻으로 'Terrella'라고 불렀다. 길버트는 자기력을 살아있는 영혼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근대적인 기계적 철학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기본적으로 물활론적 성격의 르네상스 자연주의 전통 내에 있는 것이었다.

『자석에 관해서』에서 길버트는 지자기의 요소를 상호인력(Coition), 남북방향의 정향성(Direction), 방위각(Variation), 복각(Declination), 회전운동(Revolution) 등으로 구분하였다. 훗날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는 지자기를 연구할 때 방위각을 Declination이라고 명명하고, 복각을 Inclination이라고 명명했는데,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지자기의 요소는 이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전기학의 발전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박(琥珀)을 모피에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들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어의 electricity라는 단어도 그리스어로 '호박'이라는 뜻의 엘렉트론(elektron)에서 비롯되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전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역시 길버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길버트는 『자석에 관해서』라는 책에서 자기 이외에 전기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전기와 자기를 철저히 구별하여 다루었다. 그는 전기력은 자기력과는 달리 전기소(electrical effluvium)라는 극히 희박한 액체, 즉 수분에 의해 매개된다고 생각했다.

길버트 이후 전기에 관한 연구는 예수회(Jesuit) 관련 과학자들과 이탈리아에서 실험을 주로 하던 치멘토 아카데미(Accademia del Cimento)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우선 왕립학회의 '실험 책임자'(curator of experiment)였던 프랜시스 혹스비(Francis Hauksbee, ca.1666 ­1713)는 수은 기둥 위의 진공에서 발생하는 빛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전기를 연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기구를 제작했다. 그는 회전하는 유리공이나 원판을 이용해서 전기를 발생시킨 뒤 이 전기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섬광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아마추어 실험가로서 왕립학회지『철학 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자주 기고했던 스티븐 그레이(Stephen Gray, 1666-1736)는 1729년 정전기 현상이 접촉에 의해서 아주 멀리 전달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물질을 잡고 있을 때 전기력이 전달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대중적인 흥미를 끌며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었다. 젊은 보병장교였던 뒤페(Charles- Francois de Cisternai Dufay, 1698-1739)는 1733년 그레이의 실험을 더욱 체계적으로 확대해서 금속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물질을 비벼서 전기를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뒤페는 다양한 물질들로부터 전기를 발생시킨 뒤 이를 종합하여 전기가 수지성(resinous)과 유리질(vitreous)이라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유리병과 같은 유리성 물질을 마찰시켜 만든 전기는 호박과 같은 수지성 물질을 마찰시켜 만든 전기를 끌어당기고, 같은 종류의 전기들은 서로 밀친다는 것이다. 한편 뒤페의 동료이며 계몽사조기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전기학자인 아베 놀레(Abb Jean Antoine Nollet, 1700-1770)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전기를 띤 물체에서 나오는 전기적 유체의 흐름이 서로 반대인 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뒤페와 놀레가 전기가 두가지 형태의 유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데에 반해서 충실한 뉴턴주의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전기가 한 종류의 유체로 이루어졌다는 일 유체설(One-Fluid Theory)을 주장했다. 그는 뉴턴의 중력 에테르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게 압력에 의해 인력과 척력을 나타내는 단일한 정적인 전기 '대기' (atmosphere) 이론을 제안했다. 무엇보다도 프랭클린은 1749년 번개 실험을 제안하고 1752년 실제로 연을 날리는 실험을 하여 번개가 일종의 전기적 작용이라는 것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프랭클린이 했던 연날리기 실험은 실제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는데, 1753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유능한 물리학자였던 리치만(George Wilhelm Richmann)은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한편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일종의 축전지로서 전기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라이덴 병(the Leyden jar)은 독일의 클라이스트(Ewald Georg von Kleist, ca. 1700-1748)와 Leyden의 무센부룩(Pieter van Musschenbroek, 1692-1761)에 의해 발명되었다. 1746년 1월 무센부룩은 온도계의 척도를 창안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레오뮈르(Ren-Antoine Ferchault de Raumur, 1683-1757)에게 라이덴 병을 이용해서 얻어내 자신의 놀라운 실험 결과에 대해 알렸다.

1767년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는 뉴턴의 중력 법칙과 같이 전하도 거리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뒤 글래스고의 조지프 블랙의 학생이었던 존 로빈슨(John Robinson, 1739-1805)의 실험(1769년),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l731-1810)의 실험(1771년), 군사공학자이자 토목공학자였던 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Charles Augustin Coulomb, 1736-l806)의 실험(1785년) 등을 통해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정량적인 법칙이 얻어지게 되었다. 결국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사실이 발견되고 전기와 자기에 대한 지식이 누적되면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났으며, 전기, 자기에 대한 정량화도 함께 진행되었던 것이다.

동전기의 발견과 전기화학의 발전

1780년대에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루이기 갈바니(Luigi Galvani, 1737-1798)는 금속을 개구리 신경에 접촉했을 때 개구리가 움츠리는 것을 보고 동물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소위 동물전기 현상을 발견하고 이것을 1791년 세상에 발표했다. 당시 갈바니는 이것이 동물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동물전기라고 불렀지만, 실상 전기는 쇠와 구리가 접촉해서 발생한 것이었으며, 개구리는 이 실험에서 단지 검출기 역할만을 했었다. 물론 갈바니도 두 금속의 접촉에 의해서만 전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해부학자였기 때문에 전기 현상에 대한 설명보다는 생리학적인 측면에 더욱 많은 관심을 집중했다.

갈바니의 친구였던 볼타(Allesandro Volta, 1745­1827)는 갈바니와는 달리 동물의 생리학적 현상보다는 전기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1794년부터 금속만을 가지고 전기를 발생시키는 실험을 한 끝에 갈바니 실험에서 개구리는 단지 검출기 역할만을 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즉 서로 다른 금속들이 젖은 도전체를 사이에 두고 접촉할 때 흐르는 전기가 발생하고, 이것을 여러 개를 쌓아 기둥으로 연결하여 강한 전류를 얻어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공 전기 발생 기관인 볼타 전지의 효시가 된다.

금속 전기를 옹호하는 볼타의 주장에 대해 동물전기 옹호자들은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에 따라 이들 사이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1797년 볼타는 동물 전기 이론을 제압하고 자신의 접촉 이론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를 얻어냈다. 3년 뒤인 1800년 볼타는 최초의 전기 배터리를 대중 앞에 선을 보이면서 자신의 배터리가 지닌 증거 효과를 극대화시키며 동물 전기 옹호자와의 논쟁에서 마침내 대중적인 차원에서도 승리했다. 이 소식은 곧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전해져 이듬해 볼타는 나폴레옹 앞에서 배터리에 의해 전기가 발생하는 것을 시연함으로써 학문적 명성과 아울러 정치적인 힘도 얻었다.

전기화학의 출현

볼타의 배터리 발명 소식은 곧 유럽의 여러나라에 전달되어 새로운 여러 학문 분야들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볼타의 연구가 영국의 왕립학회지에 발표된 뒤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는 전기 분해에 관한 연구를 통해 나트륨(sodium)과 칼륨(potassium)과 같은 새로운 화학원소를 발견했다. 전기화학은 영국보다도 독일에서 더 많은 각광을 받았다. 특히 당시 독일에서는 자연철학주의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인 과학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화학 물질과 전기의 상호 작용을 다루는 볼타의 전기화학은 이 사조에 속했던 과학자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독일의 과학자 리터(Johann Wilhelm Ritter, 1776-1810)는 자연적 힘의 단일성 및 변환가능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과학자였다. 그는 자연철학주의 사조의 전도사들인 노발리스, 셸링 등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 화학적 에너지, 전기적 에너지, 빛 에너지 등이 서로 변환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에너지 변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갈바니 전기에 대해 좀더 알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는 볼타를 방문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자연철학주의의 이런 전통은 동력학주의(Dynamismus)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무게가 없는 입자를 바탕으로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원자주의(Atomismus)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1800년 항성 천문학과 성운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셀(William Herschel, 1738-1822)은 열 작용과 관련되고 가시광선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적외선을 발견했다. 독일의 낭만주의적 과학 전통 속에서 리터는 그 이듬해 자연철학주의의 중요한 철학 원리 가운데 하나였던 양극성(Polaritt)의 원리에 입각해서, 적외선의 반대편에 있으며 강한 화학적 작용을 보이는 자외선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자기 효과의 발견

전자기 효과를 발견한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Oersted, 1777-1851)도 바로 독일의 낭만주의 과학자들과 밀접한 연결을 맺고 있던 덴마크 과학자였다. 외르스테드가 전기의 흐름이 자석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전자기 효과를 발견한 것도 그가 자연의 통일된 힘을 찾으려는 자연철학주의적인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터와 교분을 가지면서 서로 긴밀한 서신 연락을 하던 그는 이미 1813년에 전자기적 효과를 예견하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1820년 7월 21일 코펜하겐에 있던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자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험"이라는 라틴어로 씌어진 책자를 전 유럽의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 책은 매우 모호하고 사변적인 형태로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 유럽의 과학자들은 저마다 이 놀라운 현상을 재확인하려는 다양한 실험을 반복하게 되었다.

외르스테드의 발견 소식이 프랑스에 처음 전달되었을 때 비오(Jean Baptiste Biot, 1774-1862)와 푸아송(Simon-Denis Poisson, 1781-1840)과 같은 프랑스 과학자들은 이 발견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과학적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대적인 입장을 지녔던 프랑스 과학자들도 이 현상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면서 수학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로 이 현상을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1920년 9월 4일 아라고(Francois Arago, 1786-1853)는 아카데미에 이 사실을 발표하고 11일에는 이 실험을 재현해 보였다. 그 뒤 앙페르(Andr Marie Ampre, 1775-1836)는 9월에서 11월 사이에 전류가 흐르는 두 평행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발견하는 한편 전자기 효과와 관련된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리하여 1820년에서 1825년을 거치는 동안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발견을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 사이의 작용으로 일반화하는 수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데 성공했다.

패러데이와 전자기 유도의 발견

전류가 자기에 미치는 영향을 수학적으로 전개한 앙페르의 작업은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에 의해 전자기 유도 법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13세의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서적 판매 및 제본공으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어려서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 나오는 전기에 관한 127쪽의 글을 읽고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12년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에서 전기화학자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데이비와의 만남은 패러데이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1813년 데이비의 조수가 된 그는 이때부터 1861년 사임할 때까지 평생동안 왕립연구소와 인연을 함께 했다.

패러데이는 1824년 벤젠과 부틸렌을 발견했으며, 벤졸을 분리하는 등 화학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전기화학과 전자기학 분야에서 보다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국에 있었지만 데이비 등의 작업을 통해 자연의 통일적인 힘을 찾으려는 독일 자연철학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 아래서 그는 1820년 10월 1일 외르스테드의 발견을 스스로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가 1831년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견하고, 1849년,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중력이 다른 종류의 힘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려고 시도한 것도 바로 이런 영향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힘들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패러데이는 1825년에서 1828년 사이에 이미 전자기 유도를 확인하려는 초보적인 실험을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패러데이가 사용했던 측정 장치의 한계로 말미암아 전자기 유도 현상을 확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1831년 8월 29일 패러데이는 오늘날의 변압기와 유사한 장치를 고안하는 데 성공했다. 패러데이는 이 변압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실험을 더욱 정교하게 진행시켜 마침내 10월 17일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11월 왕립학회에서 발표했다. 이때 패러데이는 전자기 유도 현상을 설명하면서 전압에 의해 극성화된 입자선의 기하학적 표현인 유도력선(line of inductive force)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1845년 패러데이는 자기장에 의해 편광면이 회전하는 광자기 회전효과를 발견했으며, 비스무트와 유리와 같은 물질이 반자성의 성질을 보임을 실험을 통해 발견했다. 광자기 회전 효과와 반자성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기력선(Magnetic Field)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기장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패러데이는 1852년 '자기력선의 물리적 특성'(The physical character of the lines of force)이라는 논문에서 힘들은 주위 공간을 통한 굽어진 역선에 의해서 서로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자기력선을 단순한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패러데이의 자기력선과 장의 개념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패러데이가 제창한 장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자기력이 무한한 속도가 아니라 유한한 속도로 전파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845년 3월 19일 가우스는 자신의 공동연구자였던 빌헬름 베버(Wilhelm Weber, 1804-1891)에게 빛과 유사한 속도로 전달되는 전자기 전달 현상에 관한 생각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유한한 전파 속도를 지닌 전자기장 개념이 담겨 있는 가우스의 이런 선구적인 생각은 당시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가우스가 죽은 뒤에 출판된 가우스 전집에 수록되어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이 완성된 뒤에 맥스웰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1892년부터 켈빈 경(Lord Kelvin)이 되는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도 1840년대에 열현상과 전기현상의 수학적 유추를 이용해 전기현상에 대한 수학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1847년 그는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가 발전시킨 연속매질 속에서의 회전 및 변형력에 관한 수학적 방법을 채용하고 탄성 고체의 직선 및 회전 변형과 같은 용어로 사용하여 전기력과 자기력의 전파 과정에 대한 수학적 설명을 제안했다. 이후 톰슨은 패러데이의 자기장 개념을 수학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전자기 현상을 에테르 속에서의 소용돌이(vortex) 운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맥스웰의 학창시절

앙페르, 패러데이, 톰슨 등에 의해 발전한 전자기학을 수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통일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태생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었다. 맥스웰은 1847년 16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여 광학과 열역학 분야에서 활동하던 물리학자인 포브스(James David Forbes, 1809-1868)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philosophy of common sense)으로 유명한 형이상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9th Baronet, 1788-1856)---광학과 동력학을 통일한 것으로 유명한 아일랜드 수리물리학자인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1805-1865)이 아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에든버러 대학 시절 맥스웰은 기하학과 강체 문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850년부터 맥스웰은 스코틀랜드를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우등졸업생 제조기(wrangler maker)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던 튜터(tutor) 윌리엄 홉킨스(William Hopkins) 밑에서 공부했다. 맥스웰 이외에도 사원수(quaternion)의 연구로 유명한 수리물리학자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 점성 유체의 행동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스톡스, 열역학 및 전자기학 연구로 유명한 윌리엄 톰슨, 매트릭스와 공간 기하학 연구로 현대 순수 수학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아서 케일리(Arthur Cayley, 1821-1895), 고전역학의 권위자이며 탁월한 케임브리지 대학 선생이었던 라우스(Edward John Routh, 1831-1907) 등도 모두 홉킨스의 지도 아래 과학자로 성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귀납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과 스톡스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맥스웰이 공부하던 시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수학 트라이퍼스(Mathematical Tripos)라는 졸업 시험 제도가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은 졸업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철저한 수련 생활을 하게 되는데, 시험 문제의 출제 경향 자체가 이곳을 졸업한 사람들의 학문적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케임브리지에서는 무엇보다도 혼성 수학(mixed mathematics)의 전통이 매우 강했다. 또한 수학 트라이퍼스 시험 제도 내에서 물리학은 해석 동력학의 형태로 수학 교과 과정의 한 부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케임브리지 수학자들은 기하학적이고 역학적인 유비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나중에 물리학자로서 활동하게 되는 과학자들도 전기 동력학을 다루면서 해석학적인 수학 도구를 많이 사용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출현하게 되는 데에도 이런 기하학적이고 기계적인 유비의 전통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맥스웰은 1854년 수학 트라이퍼스 시험에서 라우스에 이어 차석 우등졸업생(second wrangler)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아울러 라우스와 공동으로 첫 스미스 상(Smith's Prize)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성립

맥스웰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된 관계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1856년 맥스웰은 애버린(Aberdeen)의 매리셜 칼리지(Marischal College)의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전자기학의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작업을 하게 된다. 학창시절부터 기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맥스웰은 전자기력의 작용을 기하학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에 주목했다. 아울러 맥스웰은 열과 전기 현상 사이의 기하학적 유추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톰슨의 논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1856년에 발표한 '패러데이의 역선에 관해서'(On Faraday's Line of Force)라는 논문은 초기 맥스웰의 학문적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물리적 가설과 이론의 방법을 일단 유보하고 유추의 방법을 사용해서 패러데이의 역선과 관련된 문제를 접근했다. 여기서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역선을 물리적 표현으로 보지 않고 단지 기하학적 유추 표현으로 보았다. 한편 같은 해 톰슨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광자기 회전효과를 자기의 소용돌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맥스웰은 톰슨의 논문을 접한 뒤 패러데이 자기력선을 물리적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패러데이의 역선을 이해하는 데 소용돌이 메커니즘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1860년 런던의 킹스 칼리지 교수가 된 맥스웰은 보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패러데이의 자기력선을 바라보게 된다. 우선 그는 1861-2년에 출판한 '물리적 역선에 관해서'(On the Physical Lines of Forces)라는 논문에서 전자기장을 가설적이고 유추적인 차원을 넘어서 물리적이고 역학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톰슨과 랭카인(William Rankine, 1820-1872) 등에 의해 제안된 분자 소용돌이(molecular vortices) 모형을 도입했다. 또한 맥스웰은 유체역학적이고 기계적인 유비를 이용해서 전자기 장을 "자기-전기 매질"을 꿀벌집 모양의 세포 에테르로 묘사했다. 여기에서 각 세포는, 그것들의 운동이 불균일한 자장 내의 전류의 흐름에 해당하는, 일종의 '공전 입자'(idle-wheel particle)의 층에 의해서 둘러싸인 분자 소용돌이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런 설명이 가상적이고 유추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맥스웰은 이 모형이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가설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여기서 비탄성 유체의 탄성 변위 뒤틀림(elastic displacement distortion) 현상에 대한 유추로서 전기적인 변이전류(displacement current) 개념을 도출해내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기계적인 형태에서 나온 것으로 전류, 전하를 중심으로 하는 전자기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했다기보다는 유체역학적인 유비에 의한 전기장을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었다.

맥스웰은 이 논문에서 탄성체의 속도를 피조(Armand Hippolyte Louis Fizeau, 1819-1896)가 측정한 빛의 속도와 비교해본 뒤 광학과 전자기학의 통합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런 통일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마침내 "빛은 전기적, 자기적 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매질의 종파로 구성되어 있다"(light consists in the transverse undulations of the same medium which is the cause of electric and magnetic phenomena.)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은 기계적인 모형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는 형태로서 일종의 '빛에 대한 전자기계 이론'(electro-mechanical theory of light)이라고 할 수 있다.

1865년 '전자기장의 동력학 이론' (Dynamical theory of the electromagnetic field)이라는 논문에서 맥스웰은 비로소 앙페르 법칙과 변이전류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빛에 대한 전자기론(electromagnetic theory of light)을 분명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873년 맥스웰은 그 동안 자신이 얻은 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전자기론』(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으로 맥스웰의 전자기학 체계는 완전한 모습을 띠고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헤르츠와 전자기파의 발견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톰슨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특히 독일의 과학자들은 맥스웰의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전자기학 체계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완성하던 무렵 독일에서는 베버의 전자기학 전통에 따라 쿨롱 법칙과 앙페르 법칙을 포괄하는 전자기학을 전개했다. 앙페르가 발견한 전자기 법칙은 독일의 빌헬름 베버를 비롯한 추종자들에 의해서 원격작용에 의한 전자기 역제곱 법칙으로 발전되었다. 즉 베버의 영향을 받은 많은 독일 과학자들은 전자기력이 무한대의 속도로 전파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에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수용되어 결과적으로 상대성 이론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데에는 헤르츠가 전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확인한 것이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독일 과학의 대부였던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베버의 전자기학을 더욱 세련된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1879년 베버의 이론틀 내에서 매질의 극화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헬름홀츠는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유전성 극화에 의한 전자기 효과를 검출하는 내용을 현상 공모 문제로 출제했다. 그는 자신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헤르츠(Heinrich Hertz, 1857 ­1894)에게 이 문제를 풀도록 격려했으나, 헤르츠는 당시에 이 전자기 효과를 실험적으로 검출하는 데에 실패했다.

결국 헤르츠는 전자기 효과 검출 실험이 아닌 다른 주제로 박사학위를 하게 되었다. 그 뒤 헤르츠는 베를린, 킬 등을 전전하다가 1885년 카를스루에 고등기술학교(Technische Hochschule Karlsruhe)의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바로 여기서 그는 1887년 10월에서 1888년 2월 사이에 전기스파크를 이용해서 행한 유명한 전자파 발견 실험에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헤르츠는 전체적으로는 헬름홀츠의 이론틀 내에서 실험을 진행시켰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실험은 베버의 전자기학을 더욱 발전시킨 헬름홀츠의 이론을 부정하고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을 검증한 셈이 되었다. 헤르츠가 전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고 난 뒤 독일에서는 맥스웰 전자기학이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마침내 로렌츠의 전자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1] W. D. Niven, (ed.), The Scientific Papers of J. Clerk Maxwell, 2 vols. (Cambridge, 1890; repr. New York, 1952).
[2] J. C. Maxwell,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 2 vols (Oxford, 1873).
[3] P. M.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4] Thomas L. Hankins, Science and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파동역학은 행렬역학과 함께 양자물리학이 형성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역학 체계이다. 파동역학은 행렬역학보다 약간 뒤에 출현하기는 했지만, 과학자들은 편미분방정식으로 기술되는 파동역학을 더 선호했다. 오스트리아 과학자 슈뢰딩거가 창안한 이 파동역학 체계는 오늘날 양자화학, 고체물리학, 양자통계역학, 양자광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일반성을 인정받고 있고 적용영역 또한 계속 확장되고 있다.

슈뢰딩거의 학창시절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dinger)는 1887년 8월 12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슈뢰딩거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모습인 복합적인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며 성장했다. 슈뢰딩거의 일생은 상호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슈뢰딩거에 관한 대표적인 전기 작가인 월터 무어는 슈뢰딩거의 생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현대물리학의 위대한 창시자들 가운데 가장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싸웠지만, 모든 정치적 행동은 경멸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허세와 형식을 혐오했지만, 영예를 얻고 상훈을 받는 것을 어린애처럼 즐겨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동료라는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 개념에 몰두했지만, 모든 종류의 협동적 작업을 멀리했다. 그의 지성은 명확한 추론에 바쳐졌지만, 그의 기질은 프리마돈나처럼 폭발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공언하고 다녔지만, 항상 종교적 상징을 사용했으며, 그의 과학적 작업은 신성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면에서 그는 진정한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Moore, p.4) 슈뢰딩거의 인생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 모순된 수많은 모습들, 말과 행동이 서로 따로 노는 듯한 것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특유한 기질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1898년 슈뢰딩거는 11세의 나이로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 김나지움은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등이 다니던 곳이었는데, 빈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학교였다. 김나지움 당시부터 반에서 항상 일등을 하는 수재였던 슈뢰딩거는 1906년 빈 대학에 들어가 물리학을 공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물리학과에서는 크리스티안 도플러(Christian Doppler), 요제프 슈테판(Josef Stefan), 요제프 로슈미트(Josef Loschmidt), 루트비히 볼츠만, 프란츠 엑스너(Franz S. Exner), 하젠뇌를(Friedrich F. Hasenrhrl) 등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물리학 연구 전통이 분명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빈 대학의 물리학 전통은 1850년 이 대학의 물리학과 학과장이 된 도플러부터 시작된다. 그는 광원과 관찰자 사이의 상대적 운동이 광원에서 나오는 빛의 파장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 과학자였다. 1863년부터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은 요셉 슈테판은 1879년 온도에 따른 열복사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발견한 과학자였다. 1884년 당시 그라츠에 있던 볼츠만은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한 이 실험식에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적용하여,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슈테판-볼츠만 법칙을 이론적으로 유도했다. 슈테판의 조교였다가 교수가 된 로슈미트는 우리에게 아보가드로 수로 알려진 수를 밝히는 등 기체 분자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과학자였다.

1894년 슈테판이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으로 옮겨 그의 후임이 되었으며, 바로 이곳에서 기체 운동 이론 분야를 비롯한 통계물리학 체계를 창안했다. 볼츠만의 영향 아래 빈 대학에서는 강한 통계 물리 전통이 수립되었고, 이런 전통은 프란츠 엑스너, 슈뢰딩거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원자론을 주장하던 볼츠만은 원자의 실재를 비판하던 에른스트 마흐의 추종자들의 끈질긴 비판 속에서 슈뢰딩거가 빈 대학에 입학하기 몇 달 전인 1906년 여름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안타까운 불의의 사고로 슈뢰딩거는 거장인 볼츠만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슈뢰딩거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슈뢰딩거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실험 물리학 분야의 엑스너와 이론 물리학 분야의 하젠뇌를이었다. 특히 슈뢰딩거는 하젠뇌를 교수의 이론물리학 강연에 많은 매력을 느꼈고, 그에게 역학, 전자기학, 열역학, 광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하젠뇌를 교수는 이탈리아 남부 티롤 지방의 플라우트 고지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의 공격으로 수류탄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실험물리학자였던 엑스너는 비인과적 자연기술을 선호하였으며, 볼츠만이 전개했던 통계적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던 사람이었다. 자연법칙을 통계적으로 바라보는 엑스너의 철학적 관점은 슈뢰딩거의 지적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4년 3월 5일 슈뢰딩거는 「물리학 연보」에 '탄성적으로 결합된 점계의 동역학에 관해서'(Zur Dynamik elastisch gekoppelter Punktssysteme)라는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은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출판한 가장 탁월한 것이었으며, 향후 슈뢰딩거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수리물리학에서 사용하는 편미분방정식은 원자론적 입장에서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미분방정식에서 사용되는 극한은 단지 '유사극한'(Pseudogrenzwerte)으로 순수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극한과는 다르다. 또한 연속체에 바탕을 둔 미분방정식은 물질이 실제로는 원자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전쟁으로 징집하기 직전에 완성한 이 논문에서 슈뢰딩거는 원자 모형에 기반을 둔 계에 있어서 초기 값의 명시화에 대해 심도 깊은 분석을 함으로써, 볼츠만이 탐구했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슈뢰딩거가 여기서 보여준 학문적 스타일은 훗날 물리학의 혁명을 가져올 파동역학에서 등장하는 파동 운동에 대한 미분방정식을 기술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전후의 슈뢰딩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슈뢰딩거는 포병 장교로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되었다. 1915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 있었던 제3차 이손초 전투에서 거둔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던 슈뢰딩거는 1917년 봄 빈으로 배치되어 다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슈뢰딩거는 빈의 근교 장교 학교에서 기상학 및 물리학 실험 등을 가르쳤다. 이 때 그는 원자열과 분자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양자론에 대한 논문을 처음으로 집필했다. 또한 그는 브라운 운동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마리안 스몰루코프스키(Marian Smoluchowski)의 영향을 받아 방사선 붕괴률에 관한 재멋대로 요동(random fluctuation)에 관한 완전한 분석인 슈바이들러 요동(Schweidler fluctuation)을 포함하는 통계 물리 분야의 논문을 집필했다.

한편 슈뢰딩거는 전선에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처음으로 접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접하자마자 그는 이 이론이 지닌 중요성을 즉각 간파했다. 빈으로 돌아온 그는 빈 대학의 루트비히 플람(Ludwig Flamm), 한스 티링(Hans Thirring)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도 이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곧 그 자신도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이때 슈뢰딩거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면서 광학에서 나오는 호이헨스의 원리와 역학에서 나오는 해밀턴 방정식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했는데, 이 주제는 훗날 그가 파동역학을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전후에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와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에 심취했다. 슈뢰딩거가 당시에 이런 철학에 심취하게 되는 데에는 전후에 등장한 사조로서 결정론적 세계관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비합리주의적이고 낭만적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칸트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처한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단지 감각 인상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현상을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짜맞추는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정신과 의지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칸트보다도 더 나아갔다. 즉 칸트는 물자체는 인간의 사유나 경험으로부터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칸트와는 달리 물자체가 의지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의지는 현상도 표상도 아니며 직접적으로 경험된 실제라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정신과 의지가 물질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인도의 베단타 철학도 접하게 되었다. 1918년 당시 슈뢰딩거는 여러 저자들이 쓴 인도철학에 관한 책을 주석까지 달면서 열심히 탐독했다. 슈뢰딩거가 훗날 파동역학을 창안하고 생명과 정신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데에는 인도철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슈뢰딩거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 힘든 것처럼 인도 철학이 그의 파동역학 형성에 미친 영향을 분명한 형태로 파악하기는 무척 힘들다.

파동역학 출현 이전의 슈뢰딩거

1918년에서 1920년까지 빈 대학에서 머무는 동안 슈뢰딩거는 색채이론에 대한 논문을 집필했다. 1920년 잠시 슈트트가르트 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슈뢰딩거는 슈트트가르트에서 외각 전자가 궤도 내부로 침투하는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좀머펠트의 고전양자론을 교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양자론 분야에 뛰어들었다. 1921년 10월 슈뢰딩거는 마침내 자신의 최대의 업적을 이루게 될 취리히 대학의 이론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취리히 초창기 시절인 1922년부터 1923년 사이에 슈뢰딩거는 주당 11시간이나 강연을 하는 힘든 생활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1923년은 그의 학문적 생산력에 있어서 최저를 기록한 시기가 되었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뛰어난 교수들이 대부분의 강의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1922년 12월 9일 슈뢰딩거는 물리학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대중들 앞에서 보여주는 교수 취임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엑스너의 철학적 견해를 열광적으로 소개했다. 1919년 엑스너는 『자연과학의 물리적 기초에 관한 강연』이라는 책에서 자연 법칙의 통계적 기초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책에서 그는 통계적인 총체를 포함하는 개별 분자적 사건은 인과적 법칙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무질서하게 일어나며 어떤 인과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슈뢰딩거는 당시에 파동-입자 이중성 문제에 대해 골치를 앓으면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을 파기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1922년 11월 8일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과 복사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파울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말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방출 과정에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파기된다고 믿는다." 즉 원자에서 복사선이 구면파로 방출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늘 모양의 운동량을 원자에게 주어 원자가 뒤로 밀려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거시적으로만 유효한 통계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파동역학을 완성하기 이전에 슈뢰딩거는 자연법칙이 통계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4년 보어를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의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는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기했을 때 이들의 생각에 매우 동조적이었다. 당시 보어, 크라머스, 슬레이터 등 코펜하겐의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안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원자세계의 기술에 있어서는 에너지와 운동량이 통계적으로만 보존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이 새로운 복사 이론이 지닌 통계적 성격이 비인과적 자연법칙을 주장하던 엑스너의 주장과 서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 아주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파동역학을 완성하기 전에는 슈뢰딩거가 비인과적 자연법칙에 대해 무척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그가 양자역학에 관한 철학적 해석인 코펜하겐의 견해를 거부했다는 것과 연관시켜 볼 때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동역학의 탄생

1925년부터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기체 이론과 연관시켜 이상기체의 통계학적 열역학에 관한 연구를 했다. 1924년 6월 인도 다카 대학의 물리학자 보즈(Satyendra Nath Bose)는 아인슈타인에게 기체 운동 이론에 관한 한 논문을 보내왔다. 이 논문은 보제가 이미 영국의 물리학 저널인 〈필로소피컬 매거진〉에 보냈다가 거절당했던 것이었다. 보즈가 쓴 논문을 본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의 중요성을 금방 알아차렸고, 스스로 번역하고 개인 의견을 첨부해 독일 물리학회 저널로 보냈다. 이리하여 훗날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양자 통계역학의 두 기둥이 되게 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1924년 이상기체 이론을 연구하던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는 물질이 파동적인 성질을 나타낸다는 물질파 이론을 제안했다. 슈뢰딩거와 드브로이는 각각 파동역학과 물질파 이론을 창안하기 직전에 모두 이상기체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25년 11월 3일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와 11월 16일 알프레드 란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이 드브로이 논문을 면밀히 읽었으며, 그 의미를 이제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아인슈타인 이론에 의하면 움직이는 입자는 세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파동 복사 위로 솟아 나온 거품산등성이(Schaumkamm)일 뿐이며, 이런 관점이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왔던 기체 통계학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1926년 마침내 기존의 행렬역학과는 전혀 다른 파동역학이라는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를 만들어 냈다. 슈뢰딩거가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에서 자신의 파동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슈뢰딩거 자신이 확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과정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들이 상당수 없어져서 무척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으로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슈뢰딩거의 첫 시도는 이론적 결과가 실험치와 맞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슈뢰딩거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포기하고 비상대론적인 파동방정식을 전개하여 이것으로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이 상대성이론을 전제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엉성한 비상대론적인 식이 실험치와 일치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슈뢰딩거는 이 비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첫 논문으로 1926년 1월에 발표했던 것이다. 첫 번째 논문에서 슈뢰딩거는 고전역학의 해밀턴-야코비 방정식에 변분법을 적용해서 파동방정식을 유도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이 방정식을 유도하기 전에 여러 추측을 통해서 파동 방정식의 형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슈뢰딩거는 원자 내의 전자가 정상적인 에너지 준위들 사이를 마치 도약을 하듯이 순간적으로 상태가 전이된다는 양자비약(quantum jump) 개념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런 괴이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연속체적인 자신의 파동역학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파동함수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이런 연속체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프랑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여러 실험을 통해서 양자비약을 실험적 사실로 믿고 있었던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충돌과정을 설명하는 데 이용하면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통계적이고 비인과적으로 해석했다. 즉,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의 제곱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른 입자들과 서로 충돌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한 상태, 즉 확률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비인과적 세계관을 선호하는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전체 인생을 통해 볼 때 그는 자연 법칙의 통계적 성질에 대해 아인슈타인처럼 철저하게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슈뢰딩거가 양자이론에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양자론의 비결정론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에너지 준위들 사이를 마치 도약하듯이 순간적으로 상태가 바뀌는 양자비약을 인정한다는 점이었다. 양자비약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은 데이비슨(C.J. Davisson)의 전자 산란 실험과 톰슨(George Paget Thomson)의 전자 회절 실험을 통해 그 실험적인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데이비슨은 당시에 벨전화연구소에서 연구하던 과학자였다. 그는 1926년 여름 영국으로 휴가를 갔다가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학술회의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보른의 강연을 통해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과 슈뢰딩거 파동역학을 접했다. 보른의 강연에 자극을 받은 그는 이미 1923년에 한 바 있던 전자산란에 관한 초보적인 실험을 다시 한번 정교하게 반복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927년 3월 데이비슨과 저머(Lester H. Germer)는 니켈 단결정을 이용한 전자 산란 실험을 통해 드브로이 물질파를 실험적으로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였던 G.P. 톰슨도 1926년에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학술회의에 참가한 뒤 보른의 강연에 흥미를 갖고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을 실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1925년 7월 보른의 학생이었던 엘자서(Walter Elsasser)는 카를 람사우어가 실험하던 느린 전자의 투과현상을 이용해서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을 실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엘자서는 보른 밑에서 이론 물리학으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실험 계획을 포기했다. 1926년 9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다이몬드(E.G. Dymond)는 헬륨에서 전자 산란 실험을 통해 엘자서가 찾고자 했던 간섭 유형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를 얻어냈다. G.P. 톰슨은 다이몬드의 실험이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에 대한 정성적인 검증이라고 믿었으며, 자신은 고체 표적을 사용해서 보다 정량적인 실험적 증거를 얻어내려고 했다. 1927년 11월 G.P. 톰슨은 알루미늄, 금, 셀룰로이드 등의 고체 표적에 음극선 빔을 발사해서 전자가 회절하는 모습을 사진 건판에 담는 데 성공했다. 데이비슨과 톰슨의 실험으로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은 분명한 실험적 증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자리잡은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35년 코펜하겐 해석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Boris Podolsky), 로젠(Nathan Rosen) 등과 함께 파동함수에 의해서 주어지는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자극을 받은 슈뢰딩거는 같은 해 관찰자의 측정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의 해석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이때 그가 했던 논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양자역학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한 예로 여러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한편 인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슈뢰딩거는 생명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44년 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훗날 생명과학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젊은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그는 유전자를 하나의 정보운반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생명체는 지금까지 확립된 물리법칙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다른 새로운 물리법칙'도 포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슈뢰딩거의 사생활

슈뢰딩거는 자신의 왕성한 학문적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여인과 정사(Love Affair)를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김나지움 시절부터 슈뢰딩거는 연극을 좋아했으며, 세기말인 아방가르드 시대에 빈에서 만연했던 에로틱한 미술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학자로서의 일생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었던 25세 때 슈뢰딩거는 넘을 수 없었던 신분의 차이로 사모했던 사람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경험했다. 그 뒤 슈뢰딩거 생애의 무대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슈뢰딩거는 잘츠부르크의 평범한 여인과 결혼하였지만 그들 사이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혼 한 뒤 슈뢰딩거는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일으키고 다녔으며, 자신 역시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몇 번이고 이혼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인 안네마리 베르텔-슈뢰딩거(Annemarie Bertel-Schrdinger)는 슈뢰딩거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지 않고 평생 그와 함께 살았다. 어린 이란성 쌍둥이 가운데 한 명인 이타 융거(Itha Junger), 슈뢰딩거 친구의 아내이며 슈뢰딩거의 첫 번째 딸을 낳았던 힐데그룬데 마르히(Hildegrunde March), 무대 배우로서 맹렬 여성인 유부녀 세일러 메이(Sheila May) 등은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연인들이었다. 심지어 슈뢰딩거는 대학의 동료 교수인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 자신의 부인과 공공연한 관계를 맺는 것을 묵인할 정도로 기이한 생활을 했다. 평생 식지 않는 학문적 열정과 끝없는 여성 편력을 동시에 과시했던 슈뢰딩거는 1961년 1월 4일 고향인 빈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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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막스 보른, 파울리,하이젠베르크를 중심으로-

20세기 초 물리학의 혁명적인 변혁이었던 양자역학의 형성에는 당대의 수많은 천재적 과학자들이 관계했다. 막스 플랑크(Max Planck, 1858­1947),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 1900­1958), 에드빈 슈뢰딩거(Edwin Schrdinger, 1887­1961),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1892 ­1987), 막스 보른(Max Born, 1882­1970), 프랑크(James Franck, 1882­1964), 요르단(Pascual Jordan, 1902­1980) 등등 물리학의 혁명을 이끌었던 이들의 이름은 우리가 현재 물리학 교과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다.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이라는 한 개인에 의해 주도된 측면이 강한 반면에, 양자역학은 한 개인에 의해 성립되었다기보다는 수많은 과학자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룩한 공동 작품의 성격이 강하다. 또한 양자역학의 성립에 공헌을 했던 개개인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나 닐스 보어의 상보성원리로 귀착되는 코펜하겐의 해석이라는 정해진 목표를 향해서 단순히 상호협조만 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비결정론적인 양자역학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새로운 물리적 세계관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지만, 각 개인은 그 진행과정에서 서로 상반된 견해를 피력했고, 따라서 양자역학의 성립 과정에 있어서 그 기여방식도 서로 달랐다.

본 논문에서는 양자물리학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했던 막스 플랑크, 닐스 보어, 막스 보른, 볼프강 파울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등 5인의 물리학자를 중심으로 그들의 새로운 물리학을 보는 견해의 차이가 양자역학의 형성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양자역학의 발전 과정을 어떤 형태로 이끌어 갔는가에 대해서 다각도로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서로 상이한 학문적인 배경으로 인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되었던 그들의 학문적 스타일의 차이가 양자역학의 형성에 어떻게 다른 형식으로 기여하였는가에 대해서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것이다. 위 5인의 과학자의 학문적 특성을 살펴보기 위해서 그들이 학문세계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보자.

혁명을 원하지 않았던 보수주의자: 막스 플랑크

양자물리학은 1900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기한 양자가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00년 12월 14일 당시 베를린 대학의 물리학 교수였던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흑체에서 나오는 복사 에너지가 특정한 상수의 정수배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막스 플랑크 본인은 자신의 주장이 지니는 의미를 완전하게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이것은 결과적으로 20세기에 나타나게 될 새로운 현대물리학의 시발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는 1858년 4월 23일 북부 독일의 항구 도시인 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목사, 학자, 법률가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막스 플랑크는 이런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플랑크는 물리학의 혁명을 이끌었던 다른 과학자들과는 달리 그리 천재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뮌헨의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을 다니던 학창 시절 그의 석차는 대체적으로 상위권이었으나 한번도 전체에서 수석을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즉, 어학, 수학, 역사, 음악 등 모든 과목을 고루 잘했으며 부지런하고 성실했으나, 천재적인 재능이나 타고난 적성을 지니지는 못했다. 대신 그는 프로이센을 대표하는 보수적 집안의 출신답게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강했으며, 그 자신도 어느 의미에서는 대기만성형의 인물이었다.

1874/75 겨울 학기부터 뮌헨대학 철학부에서 공부를 시작한 플랑크는 1878년부터 대학을 옮겨 베를린의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와 구스타프 키르히호프(Gustav Kirchhoff, 1824­1887) 밑에서 배웠고, 1879년 6월 '열역학의 제2 법칙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최우수 성적(summa cum laude)으로 뮌헨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1880년 6월 뮌헨 대학에서 교수자격 논문을 통과해서 그 곳에서 사강사로 생활하다가, 1885년에는 고향인 킬 대학 수리물리학 부교수, 1889년에는 키르히호프 후임으로 베를린 대학의 부교수가 되었다가 마침내 1892년 베를린 대학 정교수로 자리잡게 된다. 바로 이곳에서 플랑크는 자기 생애의 최대의 업적인 흑체 복사 이론을 완성했던 것이다.

양자론은 연속적인 자연 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고전전자기학과, 원자론적이며 띄엄띄엄한 양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던 통계역학 사이의 불일치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양자론은 고전전자기학과 통계역학 사이에 내재하고 있었던 문제를 통일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양자론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자연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추구했던 플랑크의 학문적 태도는 플랑크가 자랐던 당시 독일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플랑크는 독일이 통일되는 모습을 보면서 성장했고, 물리 세계에서 통일을 추구했던 그의 양자론은 독일 제국의 통일 이념과 서로 연결을 맺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 독일에 걸맞는 표준을 정하는 노력은 양자론의 출현을 낳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19세기말 독일의 조명산업에서는 전등의 필라멘트에서 방출되는 스펙트럼의 가시 영역과 비가시 영역에 대한 보다 넓은 지식을 필요로 했다. 이런 산업계의 요구에 부응해서 과학기술계에서 표준을 정하는 임무를 맡았던 제국물리기술연구소(Physikalisch-Technische Reichsanstalt)에서 일하던 빌헬름 빈, 오토 룸머, 페르디난트 쿠를바움, 하인리히 루벤스 등과 같은 당대의 유능한 실험물리학자들은 복사현상에 대한 면밀한 실험을 행했다. 플랑크가 1900년에 제기한 새로운 복사 법칙은 자신의 이론적 작업을 이런 실험적 결과에 부합되게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플랑크는 1900년 10월 당시에 경험적으로 얻어진 빈의 복사 법칙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그 때까지 있었던 모든 실험적 사실도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복사식을 제안했다. 두 달 뒤인 1900년 12월 14일 막스 플랑크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에너지 양자가 진동수에 비례한다는 ε=hν라는 새로운 양자 가설을 얻어내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으로 고전물리학과는 다른 새로운 양자론은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다.

막스 플랑크에 의해서 제안된 흑체 복사 이론은 고전물리학과 대별되는 새로운 양자론의 탄생을 알리는 출발점이었지만,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플랑크 자신에게 이 변혁은 원하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막스 플랑크의 논문에 나타나는 식으로서 에너지가 플랑크 상수와 빛의 진동수의 정수 배로 표시되는 것은 사실 1, 2, 3, 4라는 식의 정수배 뿐만이 아니라 1.5, 2.5, 3.5 등의 구간의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1906년 이후에 나타난 플랑크의 저작을 보면 플랑크가 바로 이런 시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볼 수 있다. 플랑크가 사용한 자신의 논문에서 사용한 방법으로 훗날의 보즈-아인슈타인 통계에 해당하는 통계적 방법은 사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애매한 것이었다. 우선 미국의 깁스(J. W. Gibbs, 1839­1903)가 다루었던 에너지 등분배 법칙(equipartition law)은 1902년 이후에나 과학자들 사이에서 분명하게 인식되었다. 따라서 에너지 등분배 법칙이 분명하게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플랑크가 사용했던 통계적 방법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바로 이런 점에서 플랑크는 새로운 양자물리학의 포문을 연 선구자임에도 불구하고 태생적으로 보수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보수적인 개혁 뒤에 마침내 아주 혁명적인 새로운 시도가 등장했다. 1905년과 1906년 아인슈타인은 광전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빛을 입자로 보고 복사 현상을 설명하는 광양자 가설을 제기했다. 아인슈타인은 플랑크와는 달리 처음부터 빛을 입자로 보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논문은 후일 고전적인 입자에 적용되는 맥스웰-볼츠만 통계와 빛과 같은 양자역학적인 입자에 적용되는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로 분명히 구분될 수 있는 통계역학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으며, 볼츠만 통계와 구분이 애매했던 플랑크의 통계학적 논의와는 분명히 구별이 되는 것이었다. 즉, 플랑크가 사용한 정수배라는 의미는 구간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고, 반드시 에너지의 불연속성을 가정하지는 않아도 되었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는 분명히 불연속적인 에너지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처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과 플랑크의 작용 양자 개념의 차이를 비교해보면 플랑크 개혁의 보수성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다.

양자론의 창시자인 막스 플랑크 자신은 양자가설이 물리학 분야 내에서 이론적인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즉 20세기 초 현대물리학 분야에서 나타난 혁명적 변화는 정작 이를 촉발시켰던 막스 플랑크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혁명이었다. 플랑크는 아주 보수적인 인물로서 본래 고전 물리학을 거부할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플랑크의 작용 양자에 관한 논의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에너지 불연속 개념은 그리 중요한 개념이 아니었다. 당시에 플랑크 자신에게 있어서는 볼츠만의 통계역학과 고전 전자기학을 동시에 만족하는 통일되고 체계적인 자연법칙을 유도하는 것이 양자 불연속 개념보다도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플랑크가 흑체복사의 에너지가 정수배로 변화한다는 중대한 가정을 처음으로 자신의 논문에서 쓰고는 있었지만, 그 자신은 빛이 바로 입자라는 생각에 대해서는 심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높이 평가했지만, 정작 자신의 업적과 관련이 있었던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던 것이다. 더욱이 고전 양자론의 시작을 알렸던 플랑크는 양자론의 발전과정에서 나온 마지막 산물인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비결정론에 대해서도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통과 혁신 사이의 갈등: 닐스 보어

1913년 닐스 보어(Niels Bohr)는 새로운 원자모형을 제안해서 빛의 복사에 관한 이론이었던 양자론을 원자모형 문제와 연결시켰다. 닐스 보어는 수소의 스펙트럼선에 관한 놀라운 주기적 법칙인 발머계열에 관한 식이 나타난 해인 1885년 10월 7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태어났다. 코펜하겐에서 성장한 보어는 이곳에서 당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금속내의 전자이론에 대해서 석사논문을 시작했고, 이것을 확대해서 1911년 자신의 박사논문을 완성했다. 이 연구에서 보어는 금속 내의 전자 이론을 확립하는 것은 당시 맥스웰과 로렌츠에 의해서 대표되었던 고전전자기학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해 보어는 전자의 발견자로 알려져 있는 J.J. 톰슨과 물리학에 대해서 토론해 보기 위해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로 갔다. 그러나 보어의 서투른 영어 실력과 톰슨의 무관심으로 인하여 보어는 톰슨과 함께 연구를 하고 싶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게 되었고, 할 수 없이 맨체스터로 옮겨 그 곳에 있던 러더퍼드와 함께 연구를 하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1913년 보어는 러더퍼드의 새로운 원자모형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그리고 선스펙트럼에 관한 발머 계열식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원자모형을 제안하게 됐던 것이다.

톰슨의 원자모형에 대한 보어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보어의 원자모형은 기본적으로 톰슨의 연구계획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톰슨은 멘델리예프의 주기율표에 의해서 표현되는 화학원소의 주기적 성질에 관한 설명을 찾고 있었는데, 보어의 원자모형은 바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구되었던 것이다. 톰슨의 열광적인 숭배자였던 보어는 화학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관한 설명을 얻기 위해 노력하던 중 1913년초에 우연히 발머 계열에 관한 식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매우 형식적이고도 실용적인 입장에서 원자 내의 전자들은 양자화된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궤도만을 허용한다는 것을 근간으로 하는 자신의 원자모형을 제안했던 것이다.

1913년 보어가 제기한 고전양자론에는 기본적으로는 고전 전자기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양자 상태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 서로 섞여 있었다. 새로운 양자론의 발달 과정에서 보어는 보수적인 성격과 혁명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닌 복합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보어의 초기 고전양자론은 전통과 혁신 사이를 왔다갔다했던 케플러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고 주장한 토머스 쿤의 견해는 바로 이런 측면을 반영한 것이다.

1920년을 전후하여 보어는 자신의 초기 원자론의 문제점을 개선하고 스펙트럼의 진동수 뿐만 아니라 그 세기에 대한 논의까지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대응원리(Correspondence Principle)라는 새로운 사고틀을 제안했다. 대응원리란 미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새로운 양자이론은 그 극한에 있어서 거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기존의 고전역학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이 대응원리는 과학자들에게 그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던 새로운 양자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아내는데 좋은 도구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 원리는 항상 고전 역학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역학을 찾아야 한다는 분명한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으며, 적용 범위도 제한적이지 못해 물리 이론으로서의 자격 여부도 불확실했다. 대응원리나 고전양자론 논의에서 볼 때 보어의 태도는 혁명적인 측면과 아울러 실용주의적인 측면을 보이고 있으며, 항상 고전역학을 염두에 두었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수학적 전통 속의 형식주의자: 막스 보른

막스 보른(Max Born)은 1882년 12월 11일 지금은 폴란드 영토이나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던 브레스라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0년부터 자신의 고향인 브레스라우에서 대학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그 후 하이델베르크, 취리히 등을 옮겨다니며 공부하다가 마침내 1904년부터는 당시 세계 수학의 메카였던 괴팅겐에서 본격적으로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괴팅겐에는 펠릭스 클라인, 힐베르트, 헤르만 민코프스키 등 당대의 쟁쟁한 수학자들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수학 이외에도 수학을 물리학, 천문학, 지구과학 및 공학에 응용하는 데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보른은 처음에는 수학을 공부하였으나 박사학위를 받은 뒤로는 그 연구 분야를 바꾸어 본격적으로 이론 물리학을 연구했다. 이런 학문적 조건은 또 보른의 학문적 성향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즉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서 성장하면서 이 곳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보른은 될 수 있으면 경험적, 실험적 자료가 많은 물리학적 문제를 선택하여 수학적으로 아주 엄밀하고 일반적인 해를 구하는 수학적이고도 형식주의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시 물리학 내에서 해결하기 어려웠던 광양자의 존재에 관한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보른은 빛이 실제로 입자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 같이 논쟁에 여지가 있는 문제는 의도적으로 피하고, 빛과 물질의 상호 작용에 관계되는 광범위한 실험적 사실을 어떻게 수학적으로 완벽하고 일반적으로 기술하느냐에 치중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자칫하면 물리개념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약점이 있는 반면, 만약 문제 자체가 정확하게 설정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계획의 진전이 대단히 크다고 하는 장점도 있었다. 보른은 1909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부족하여,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강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상대론적 강체 개념을 정의했다가 커다란 학문적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상대성 이론 분야에서 학문적 패배를 맛 본 보른은 1912년부터 자신의 연구 영역을 상대론 분야에서 고체 비열 분야로 바꾸면서 그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보른이 연구 분야를 상대성 이론에서 보체 비열 분야로 바꾼 이유는 상대론 분야가 자신의 역량에 비해 너무 어렵고 통상적인 물리학과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특히 관찰 자료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보른은 이후에도 수많은 관찰 자료가 존재하는 분야를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다루는 학문적 스타일을 유지하게 되는데, 고체 비열, 광학, 고전양자론 분야는 보른의 이런 성격에 가장 부합되는 분야였다.

1921년 보른은 실험 물리학자이며 자신의 친구였던 프랑크와 함께 괴팅겐 대학 이론 물리학 교수가 되었다. 괴팅겐에서 보른은 파울리, 하이젠베르크, 노르트하임(Lothar Nordheim) 등 우수한 공동연구자들과 함께 푸앵카레와 보린(Petrus Theodor Bohlin, 1860­1939) 등에 의해서 개발된 천체 역학적 이론을 이용해서 보어의 원자론을 다전자 체계로 확장하는 프로그램을 정력적으로 추진했다. 보른은 파울리와는 세차운동에 의해 생기는 '고유 겹침'(intrinsic degeneracy)을, 하이젠베르크와는 전자들의 질량이 서로 같아 위상 관계가 생기는 '우연한 겹침'(accidental degeneracy)을, 노르트하임과는 수소 분자 등에서 장미꽃 형태의 괘도로 나타나는 '경계 겹침' (limiting degeneracy)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다전자 체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겹침 현상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했던 이들의 연구 결과 헬륨이나 수소 분자의 에너지 값이 보어 원자론에 의해서 예측된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 결과적으로 고전양자론의 한계를 결정적으로 밝히게 되었다. 그 뒤 보른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은 고전양자론이 아닌 새로운 역학체계를 모색하게 되었고, 이런 일련의 노력의 결과로 새로운 양자역학이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양자역학 출현 과정에서 보른의 역할은 행렬역학의 수학적 발전 과정에서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1925년 여름 무렵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새로운 역학 체계인 행렬역학의 기본적인 개념틀을 얻어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이 역사적인 논문에서 사용한 상징적인 곱셈이 수학적으로는 행렬의 곱셈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즉 하이젠베르크는 행렬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이 행렬역학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내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생각을 행렬역학이라는 일반적인 역학체계로 발전시킨 사람은 수학적 전통 내에 있었던 막스 보른이었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을 살펴본 후 하이젠베르크가 사용한 상징적 곱셈이 바로 자신이 대학시절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었던 일종의 행렬곱셈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양자역학에서 나오는 유명한 기본식인 pq-qp 이라는 수학적 표현을 최초로 얻어냈던 사람은 하이젠 베르크가 아니라 보른과 그의 학생이었던 요르단이었다.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더욱 깊게 고찰하여 오늘날 양자역학 교과서에 나오는 수많은 수학적 개념을 발전시켰다. 힐베르트 공간, 선형변환에 있어서의 주축 변환, 에르미트 행렬 등과 같은 수학적 개념은 바로 보른에 의해 행렬역학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결국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에는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 있었던 보른의 역할이 컸다.

철저한 개념적 혁명을 요구했던 완벽주의자: 볼프강 파울리

1900년 4월 25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난 볼프강 파울리는 어릴 적부터 보기 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12세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완전히 이해했으며, 14세에 오일러의 저작을 읽었고, 18세에는 난해하기로 정평이 있었던 푸앵카레의 천체역학에 탐닉했다. 1918년 10월 파울리가 뮌헨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당시 완성된 지 얼마가 되지 않기 때문에 난해한 학문 분야로 알려져 있던 일반 상대론을 상당한 수준으로 연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대학 스승인 좀머펠트는 당시 수리과학 백과사전의 물리학분야 편집인이었는데, 그 때 그는 상대론 분야를 체계적으로 소개할 집필인을 물색하고 있었다. 물론 상대론의 주창자인 아인슈타인이 가장 적격자였으나, 아인슈타인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기 때문에 다른 인물을 구해야만 했다. 당시 파울리는 대학 초년생으로서 상급학생들이나 신청하는 좀머펠트의 세미나에 참가했었다. 이때 전자기학과 중력이론의 문제를 게이지 이론을 이용하여 통합하였던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의 통일장 이론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파울리를 본 좀머펠트는 선뜻 이 중요한 집필을 대학 초년생이었던 파울리에게 맡겼다. 파울리가 집필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개론서는 그 뒤 단행본으로 출판되어 오랫동안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교재로 활용되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상대성이론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파울리는 상대론에 비해 비교적 많은 경험적 자료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당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양자론 분야로 곧 관심분야를 옮겼다. 양자론을 연구하는 동안 파울리는 당시의 고전양자론을 구성하고 있던 많은 개념들이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적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척 커다란 불만을 느꼈다. 그는 당시로서는 풀리지 않던 양자현상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유용한 개념적 도구였던 보어의 대응원리도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원리자체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새로운 양자론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이라는 것에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다. 그는 원자모형을 설명함에 있어서 가능한 한 모든 고전역학적 개념을 거부하였는데, 이런 특징을 강하게 부각시킨다면 어떤 의미에서 그는 새로운 양자론 형성에 있어서 철저한 개념적인 혁명을 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완화된 혁명론자: 하이젠베르크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 12월 5일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 후 1910년 고전어와 그리스 문헌학 선생이었던 그의 아버지가 뮌헨으로 자리를 옮기었기 때문에 그는 1911년 뮌헨의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을 들어가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하이젠베르크의 아버지는 예비역 보병장교로 소집됐기 때문에 전쟁 중 거의 집을 떠나 있었다. 이렇게 하이젠베르크는 부모의 보살핌이 거의 없이 줄곳 혼자서 공부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미적분학, 타원함수 등을 독학으로 배웠으며, 수론(Number Theory)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려고까지 했다.

이렇게 기성세계로부터 단절됐던 것이 후일 하이젠베르크의 독창적인 사상의 출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젊은이들은 패전 후 낙심에 차있던 구세대들을 불신하고,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독자적인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했다. 즉 구세대는 이미 부수어졌고 따라서 새로운 세계는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 신세대에 의해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당시의 청년운동에 지도자로서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자연과학적인 세계상의 변환과 당시의 사회적 현상 사이에는 일종의 사회심리학적인 교류가 존재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1920년 하이젠베르크는 뮌헨대학에 입학했다. 뮌헨대학에서의 첫 학기 때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사고에 있어서 대담성과 독창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896년 제만(Pieter Zeeman)이 자기장 내에서 스펙트럼선의 분리현상을 발견한 이후 분광학적 기술이 계속 향상되어, 1920년경에는 수많은 관측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이 가운데에서 가장 설명이 어려웠던 현상은 자기장에서 괘도각운동량과 오늘날 우리가 스핀각운동량이라고 부르는 양과의 커플링에 의해서 스펙트럼선이 복잡하게 갈라지는 이상제만효과(Anomalous Zeeman Effect)였다. 뮌헨대학에 입학한 하이젠베르크는 좀머펠트의 세미나에서 이 이상제만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1/2, -1/2의 양자수를 도입했다. 이것은 양자수를 원자의 정상상태에서의 정상파와의 비유로 이해했던 좀머펠트에게는 아주 깜작 놀랄 일이었다. 즉 당시의 고전 양자론에서는 양자수가 1,2,3,4,...와 같은 정수만을 허용하였지 +1/2, -1/2과 같은 분수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친구였던 파울리는 만약 1/2이 양자수가 된다면 1/4, 1/8, 1/16도 똑같이 양자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주장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는 "성공은 수단을 신성화한다"고 응변하면서 자신의 방법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하이젠베르크가 1/2 양자수를 도입한 것은 그가 현대적인 의미의 스핀을 도입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1/2의 양자수의 원인을 전자의 자전이 아니라 원자핵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궤도전자의 상대론적 효과에 의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이젠베르크의 초기 중핵 모형(Core Model)이라고 부른다.

1920년 초부터 이상제만효과를 연구하던 란데(Alfred Land)는 당시의 실험적 사실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부여하기 위해 일종의 벡터 모형을 제안했었다. 그러나 란데의 이 모형에서는 고전역학적인 각운동량의 두곱인 S2이 양자론적으로는 S(S+1)라는 형태로 해석되어 모형을 취급하는 방식 자체가 기존의 고전역학으로부터 일탈하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후일 파울리의 배타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파울리와 하이젠베르크는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다. 우선 파울리는 란데의 고전역학적인 벡터모델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새로운 양자개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반면에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중핵 모형(Core Model)과 보른이 제안했던 수학적인 차분방정식에 의해서 이것을 설명해보려고 노력했다. 하이젠베르크의 이 시도는 부분적인 성과만을 얻은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실패작이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상제만효과를 자신의 '중핵 모형'으로 설명하는 데 실패한 뒤, 가상진동자를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운동학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파울리가 새로운 양자개념에 입각해 아주 정합적인 새로운 운동학적인 개념을 추구한 반면에, 하이젠베르크는 일단 고전전자기적인 가상진동자를 이용해 고전적인 운동방정식을 만든 다음 새로운 양자법칙을 얻어내기 위해 보어의 대응원리에 따라 기존역학 체계로부터의 의도적인 일탈을 모색했다. 이런 노력 끝에 그는 1925년 7월에 새로운 역학체계인 행렬역학의 기본 개념틀을 얻어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도 대담한 방법에 의해서 기존의 고전양자론을 개선하려고는 했지만 파울리보다는 완화된 형태로 고전역학을 거부했으며, 행렬역학은 바로 하이젠베르크의 이런 태도에 의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배타원리의 출현과 파울리 완벽주의의 한계

고전역학적 개념을 철저히 거부한 파울리는 1925년 비정상제만효과를 란데의 벡터 모형으로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고전역학적인 모형을 이용한 설명을 단호히 거부했다. 그 대안으로 그는 주양자수, 방위양자수, 자기양자수 외에 제4의 양자수를 가정함으로써 소위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제창하게 된다. 각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이 배타원리를 바탕으로 파울리는 고전역학적인 개념을 부분적으로 함유하고 있었던 보어의 고전양자론의 문제점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양자상태 개념에 입각해서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파울리가 1925년 초의 배타원리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핀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제4의 양자수를 기계적이며 고전역학적인 모형으로 설명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한 예로, 1925년 초 크로니히(R. Del Kronig)라는 한 젊은 물리학자가 파울리가 제안한 제4의 양자수를 전자의 스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내용을 파울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 때 파울리는 크로니히의 견해가 기계적이고 고전역학적인 해석이며, 따라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런 바람에 크로니히 자신은 그만 스핀가설에 관한 주장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크로니히는 중대한 발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핀 발견의 영광은 에렌페스트 밑에서 공부하던 윌렌벡(George Eugene Uhlenbeck)과 하우트스미트(Samuel Abraham Goudsmit)에게 돌아가 버렸다. 1928년 파울리는 미안한 마음에 크로니히를 자신의 조교로 받아들여 주었다. 배타원리의 등장이 파울리 식의 완벽주의의 승리였다고 한다면, 스핀 이야기는 파울리의 완벽주의가 빚어낸 대표적인 한계였다고 할 수 있다.

보어의 반동 쿠데타: 광양자 가설의 폐기

보어의 보수적인 속성은 1924년에 그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비판하였다는 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당시 보어는 가상 진동자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미시세계에서의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법칙의 파기를 내세우며, 파동론에 입각한 복사이론을 부활하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다. 가상 진동자(virtual oscillator) 개념이란 원자들이 가상적인 복사장을 통해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가상적인 진동자들과 서로 교통(交通)하는 일련의 가상적인 진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가설로 1924년 유럽에서 박사연구원으로 활동하던 미국의 과학자 슬레이터(John C. Slater)가 처음으로 제안했던 개념이었다. 이 가설에다가 미시세계에서 에너지와 운동량 보존법칙을 파기하는 보어 자신의 생각을 결합시켜, 보어, 클라머스(Hendrik A. Kramers), 슬레이터 세 사람이 공동으로 새로운 복사이론을 발표했던 것이다. 보어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광전효과를 비롯한 많은 문제를 설명하는 데에는 좋은 개념적 도구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빛의 간섭이나 회절 현상을 설명할 때에는 파동론에 의해서 정의되는 진동수나 파장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보어가 보기에는 1922/23년에 컴프턴(Arthur Holly Compton)과 드베이어(Peter Debye)에 의해서 발표된 전자에 대한 X-선 산란 실험, 즉 컴프턴 산란 실험도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확증하는 결정적 실험은 되지 못했다.

보어의 새로운 파동론적인 주장과 아인슈타인이 옹호하는 기존의 광양자 가설 가운데 어느 것이 타당한가를 확인하기 위해 베를린의 제국물리기술연구소에서 일하던 발터 보테(Walther Bothe)와 한스 가이거(Hans Geiger)는 기존의 전기계수법을 개량해서 창안해낸 새로운 측정 방법인 동시계수법을 이용해서 엄밀한 결정적 실험을 실시했다. 1925년 4월에 얻어낸 보테와 가이거의 실험 결과는 아인슈타인에게 승리를 안겨 주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광양자설은 1924년에 있었던 보어의 반동적인 쿠데타를 1925년 보테와 가이거가 실험적으로 반박하고, 곧 이어서 미국의 컴프턴이 사이먼(A.W. Simon)과 함께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컴프턴 효과에 관한 실험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과학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후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에 대해 다시는 의심하지 않았으나, 보어는 그 후에도 이 광양자 가설의 유효성에 대해 계속 회의를 표명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보어는 1925년부터 그의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견해인 상보성 원리가 나오게 되는 1927년까지 물리학적 저술 활동을 그만둔 채 철학적인 문제에 몰두했다. 양자역학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게 될 상보성 원리는 보어의 이런 보수적 태도가 반영되어 형성된 것이었다.

절충적 혁명: 코펜하겐 해석의 출현

행렬역학이 완성되고 있는 때인 1926년 초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파동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을 완성시켰다. 새로운 파동역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의 파동함수의 제곱이 실제 전자의 밀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가 주장한 연속체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프랑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행한 여러 실험을 통해서 양자 비약을 실험적 사실로 믿고 있었던 막스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충돌과정을 설명하는 데 이용하면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통계적이고 비인과적으로 해석했다. 즉,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의 제곱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른 입자들과 서로 충돌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한 상태, 즉 확률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른의 통계적 해석은 충돌과정에서 나타나는 에너지에 국한된 지극히 수학적인 것이었지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의 개념에까지 확대되는 해석은 아니었다. 수학적 형식주의자였던 막스 보른은 통계적 개념을 새로운 운동학적 개념틀로 확대 적용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 물리교과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논의인, 전자의 위치 내지 운동량을 발견할 확률이라는 식의 운동학적인 개념은 실상은 파울리가 처음 제안했던 것이다. 새로운 양자론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항상 새로운 운동학적인 개념을 세우기를 희망했던 파울리는 보른의 통계적 해석을 위치와 운동량의 개념에까지 확대시켰던 것이다.

행렬역학과 마찬가지로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하는 데에도 파울리는 커다란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발표하기 몇 달 전인 1926년 10월 19일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에게 훗날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될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우선 이 편지에는 통계적 해석을 위치와 운동량의 개념으로 확대시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편지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관계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우리는 운동량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위치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운동량과 위치의 눈을 동시에 뜨면 틀리게 된다." 파울리는 위치 표현으로 양자역학을 기술하는 방법을 유도하고 이것을 변환시켜 운동량 표현으로 기술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그 다음 파울리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동역학을 만들 생각으로 위치 표현과 운동량 표현을 동시에 적용하는 시도를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동역학 체계를 만들려던 파울리의 시도는 뜻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혔다. 파울리가 극복해야 한다는 이 난관을 하이젠베르크는 자연이 벗어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로 간주하고 새로운 물리관이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최종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완전한 개념적 완성을 추구했던 완벽주의자 파울리가 아니라 파울리의 말을 옆에서 듣고있던 하이젠베르크였다. 하이젠베르크는 파울리가 자신에게 보낸 이 편지를 받은 후 얼마 있다가 감마선 현미경에 의한 사고실험을 통해서 그의 불확정성원리의 기본적인 개념틀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한편 광양자 가설에 관한 논쟁에서 아인슈타인에게 패배한 후 지속적으로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몰두했던 보어도 하이젠베르크와 비슷한 견해에 도달했다. 우리는 항상 거시세계의 용어와 거기에서 얻어진 개념을 바탕으로 원자현상이라는 미시세계를 기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우리의 용어에는 어떠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즉 원자현상의 기술에 있어서 한 용어의 무모순성은 항상 그것의 정의가능성과 관찰가능성의 상보적 관계 때문에 제한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입자나 파동이라는 개념은 거시적인 일상 개념에서 얻어진 것이기 때문에 빛과 같은 미시세계의 현상을 기술하는 데에는 일정한 한계가 주어진다. 이러한 생각을 보어의 상보성원리라고 하는데 보어는 이 개념을 바탕으로 그 이전에 자신이 곤경에 빠졌던 파동-입자의 이중성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즉 과거에 자신이 빛을 파동으로 보고 광양자 가설을 극복하려고 했던 시도도 완전히 잘못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보어의 해석의 이면에는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깔려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 어

양자역학의 형성에 있어서 최후의 승리자는 막스 플랑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도, 볼프강 파울리와 같은 완벽주의자도 아니었으며, 막스 보른과 같은 수학적 형식주의자도 아니었다. 1900년에서 1927년까지의 양자역학에 관한 논의에서 그 최종적 승리는 기존의 물리학에 반해서 대담한 가설과 일탈을 시도했다는 점에서의 혁명적인 측면과 항상 고전물리학을 염두에 두었다는 측면에서의 보수적인 측면을 동시에 기지고 있었던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에게 돌아가 버렸다. 하지만 플랑크는 양자론의 포문을 여는 곳에서, 파울리는 배타원리의 창안한 부분에서, 보른은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를 확립하는 곳에서, 하이젠베르크나 보어가 하지 못했던, 심하게 말한다면 할 수도 없었던 일을 해내었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물리적 세계관인 양자역학은 서로 상이한 학문적 배경에 의해서 배태되었던 다양한 학문적 스타일을 갖춘 과학자들의 종합적인 노력에 의해서 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사람들이 양자역학을 완전하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이면에는 양자역학적 혁명이 완전한 개념적 혁명으로 종결되지 않고 절충적 혁명의 성격을 띠고 마무리되었다는 것도 자리잡고 있다. 이런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양자론이 등장한 지 100년이 다 되어 가는 지금도 양자역학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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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Daniel Serwer, HSPS 8, 189-256 (1977).
행렬역학은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인 양자역학을 기술하는 대표적인 역학 체계이다. 이 행렬역학이 출현한 이후 연산자 역학, 파동역학 등 양자 현상을 기술하는 새로운 역학이 등장하였고, 결국 이들 다양한 기술 방식들은 서로 경쟁하고 통합적으로 발전하면서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가 출현하게 되었던 것이다. 행렬역학에서는 위치와 운동량과 같은 물리량의 곱이 행렬이라는 형식의 곱에 의해 기술된다. 행렬역학은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에 의해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그는 1925년 행렬에 대한 수학적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행렬역학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이 들어 있는 상징적인 곱셈을 처음으로 제안해 혼란스럽던 20년대 원자 물리학계에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 체계를 확립하는 새로운 돌파구를 열었다.

하이젠베르크의 학창 시절

양자역학의 형성을 비롯해서 현대물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하이젠베르크는 1901년 12월 5일 독일 뷔르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본래 베스트팔렌 사람이었던 그의 아버지 아우구스트 하이젠베르크는 바이에른에서 고전어를 가르치는 김나지움 선생을 하다가 교수 자격을 얻기 위해 뮌헨에서 뷔르츠부르크로 떠났고, 여기서 그의 둘째 아들이었던 베르너를 얻었다. 1910년 1월 아우그스트는 독일에서 단 하나뿐인 뮌헨대학의 중세 및 근세 그리스 문헌학 정교수로 초빙되었고, 이에 따라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뮌헨 사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911년 하이젠베르크는 막스 플랑크가 나온 명문학교인 뮌헨의 막스밀리안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하이젠베르크의 아버지는 예비역 보병장교로 소집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1916년 부상을 입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부모의 가르침이 중요했던 이 시기에 하이젠베르크는 어른들의 보살핌이 거의 없이 대부분을 혼자서 공부하게 되었다. 김나지움을 졸업할 때까지 그는 미적분학, 타원함수 등을 독학으로 배웠으며, 정수론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려는 시도도 했었다. 김나지움 시절에 그가 감명 깊게 읽었던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 나오는 물질관은 평생토록 물질 법칙을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 영향을 미쳤다.

전쟁의 여파로 기성세계로부터 단절됐던 것은 후일 하이젠베르크의 독창적인 사상의 출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패전으로 끝난 뒤 독일의 젊은이들은 패전 후 낙심에 차있던 구세대들을 불신하고, 자기들끼리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크고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새로운 길을 찾아나갔다. 즉 구세대는 이미 부수어졌고 따라서 새로운 세계는 기성세대가 아닌 젊은 신세대가 주축이 되어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 자신도 당시에 청년운동의 지도자로서 이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이런 것을 고려한다면 자연과학적인 세계상의 변환과 당시의 사회적 현상 사이에는 일종의 사회심리학적인 상호작용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김나지움에서 하이젠베르크는 종교,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수학, 물리, 역사, 체육 등 거의 모든 과목에서 수(sehr gut)를 받았다. 또한 구두 시험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이 무척 탁월했기 때문에 김나지움에서는 그를 대학에 장학생으로 추천했다. 김나지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하이젠베르크는 1920년 뮌헨대학에 입학했다. 애초에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보다는 수학을 공부하려고 마음먹었었다. 당시 뮌헨대학에는 1882년 π가 무리수일 뿐만이 아니라 어떤 대수적 방정식의 근도 될 수 없는 초월수라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고대부터 내려온 원적 문제를 마침내 해결한 바 있는 페르디난트 폰 린데만(Ferdinand von Lindemann, 1852­1939)이라는 유명한 수학 교수가 있었다. 하이젠베르크는 수학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에 린데만을 찾아갔지만, 린데만은 하이젠베르크가 헤르만 바일의 작업과 같은 수리 물리학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그를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다. 하지만 물리학 교수이며 1년 전에 이미 파울리라는 물리학 신동을 발견한 바 있었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52­1939)는 하이젠베르크와의 대면을 통해 그가 대단히 우수한 학생이라는 알아차렸고 그를 상급생들이나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자신의 고등세미나에 참가할 수 있는 특전을 주었다. 이리하여 하이젠베르크는 자연스럽게 물리학을 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으며, 여기서 자신의 평생의 학문적 친구인 볼프강 파울리도 만나게 되었다.

뮌헨대학에서의 첫 학기 때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사고에 있어서 대담성과 독창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갓 입학한 하이젠베르크는 좀머펠트의 세미나에서 당시에 많은 분광학자들과 물리학자들을 괴롭혔던 이상제만효과를 설명하기 위해서 +1/2, -1/2의 양자수를 도입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다. 이런 설명은 양자수를 원자의 정상상태에서 나타나는 정상파로 비유해서 이해했던 좀머펠트에게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즉 당시의 보어와 좀머펠트에 의해 발전했던 고전 양자론에서는 양자수가 1, 2, 3, 4, ...와 같은 정수만을 허용했지, +1/2, -1/2과 같은 분수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보다는 1년 선배였지만 서로 절친한 친구로 지냈던 파울리는 만약 1/2이 양자수가 된다면 1/4, 1/8, 1/16도 똑같이 양자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주장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하이젠베르크는 '성공은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응변하면서 자신의 방법의 타당성을 주장했다. 하이젠베르크가 1/2 양자수를 도입한 것은 현대적인 의미의 스핀의 도입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이 1/2의 양자수의 원인을 전자의 자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원자핵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궤도전자의 상대론적 효과에 의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하이젠베르크의 초기 '중핵 모형'이라고 부른다.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이 중핵 모형은 파울리의 배타원리의 발견에 따라 그 지위를 상실하게 되지만, 그가 주장한 1/2의 양자수는 파울리의 배타원리에서도 받아들이게 된다.

하이젠베르크와 '방랑시절'(Wanderjahre)

1922년 6월 하이젠베르크는 때마침 괴팅겐 대학에 초청되어 양자역학에 대한 강연을 하던 닐스 보어를 처음으로 만났다. 후일 '보어 축제'(Bohr-Festspiele)라고 불리게 될 이 강연에는 보른, 프랑크, 좀머펠트, 파울리, 훈트, 요르단, 란데, 게를라흐 등 훗날 양자역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대부분의 학자들이 괴팅겐에 함께 모여 약 열흘간 서로 진지한 토론을 벌였다. 하이젠베르크도 자신의 스승인 좀머펠트의 주선으로 이 모임에 참가해서 닐스 보어와 진지한 토론을 할 기회를 얻었고, 이때 보어와의 만남을 통해 자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갖는 데 많은 자극을 받았다.

1922년 9월 초 좀머펠트는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 6개월 동안 객원교수로 가게 되었고, 자신의 수제자인 하이젠베르크를 괴팅겐의 막스 보른에게 보냈다. 이리하여 하이젠베르크는 괴팅겐 대학의 보른 밑에서 이론 물리학을 다루는 수학적 방법을 철저하게 배울 기회를 얻게 되었다. 보른과의 협동 작업을 통해 하이젠베르크는 헬륨 문제가 기존의 고전양자론에 의해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했다. 삼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 과정을 통해 하이젠베르크는 현재의 양자 조건이 잘못됐던지 아니면 전자의 운동이 더 이상 고전역학적 방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변혁이 없이는 헬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느끼게 되었다.

1923년 유체역학과 관련된 아주 우수한 논문을 완성한 하이젠베르크는 뮌헨대학에서 박사 학위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이때 구두 시험장에서 뮌헨대학의 실험 물리학자였던 빌헬름 빈에게 잘못 걸려들어 전공인 물리학에서 아주 낮은 점수를 얻고 가까스로 졸업하는 일생 일대의 수모를 당하게 된다. 즉 당시에 뮌헨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실험실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고도 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 논문을 쓸 수는 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론 물리학자와 실험 물리학자들이 동석한 구두시험장을 통과해야만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빈은 하이젠베르크에게 패브리-패로 간섭계(Fabry-Ferot interferometer), 현미경 분해능 문제, 납축전지의 원리 등에 대해 질문을 했으나 실험실에 거의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하이젠베르크는 빈이 한 이 질문들 가운데 어느 것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하이젠베르크는 박사 시험에서 거의 탈락의 위기에 놓였으나, 좀머펠트가 그를 아주 대단한 천재라고 우겨대 간신히 턱걸이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박사 시험 성적은 전공인 물리학은 턱거리 점수인 3점이었고, 부전공인 수학은 1점, 천문학은 2점이었다. (독일의 학점은 미국과는 달리 1점이 좋은 점수이고 3점이 나쁜 점수이다.)

박사 시험 성적이 나빴음에도 불구하고 하이젠베르크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던 막스 보른은 그를 조교로 다시 받아 주었다. 보른의 지도 아래 하이젠베르크는 1924년 비정상 제만효과에 관한 논문으로 단 1년만에 '교수 자격 취득 과정'(Habilitation)을 통과했다. 교수자격 취득 논문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보른이 창안한 차분 역학의 방법을 이용해서 물리적인 해석이 없이 아주 형식적인 차원에서 란데의 g 인수에 대한 해석을 전개했다.

1924/25년 겨울 하이젠베르크는 어려운 독일 경제 상황 중에도 록펠러 재단 장학생으로 닐스 보어와 함께 연구할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보어로부터 물리학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훗날 하이젠베르크는 회고하기를, 자신은 뮌헨의 좀머펠트에게는 물리학 분야가 할 만한 것이라는 희망을 배웠고, 괴팅겐의 막스 보른에게서는 수학을, 그리고 코펜하겐의 보어에게서는 철학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세 사람에 대변되는 서로 다른 학문적 전통을 두루 섭렵한 결과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역학 체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행렬역학의 등장

1925년 4월초 하이젠베르크는 코펜하겐에서 보어로부터 원자 구조에 관한 많은 훈련을 받은 뒤 사강사의 의무인 강의를 하기 위해 독일로 되돌아왔다. 1925년 5월부터 하이젠베르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방법으로 원자론의 문제를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단 고전전자기적인 가상 진동자를 이용해 고전적인 운동방정식을 만든 다음에, 새로운 양자법칙을 얻어내기 위해 보어의 대응원리에 따라 기존역학 체계로부터의 의도적인 일탈을 모색했다. 한 예로서 그는 고전적인 다주기 체계에 상응하는 위치 좌표를 푸리에 급수로 전개했고 이 계수들이 양자론적인 결과에 맞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조작이 필요한가를 면밀히 살폈다.

수소의 스펙트럼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경우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이 의식적인 일탈이 더욱 분명하게 되겠지만, 수소 문제는 이런 창의적인 추론을 하기에는 너무 복잡해 부적절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고전적인 양이 어떤 조작을 통해 양자론적인 양과 상응되는가는 알아내기 위해 수소 체계보다 좀 간단한 1차원적인 비조화 진동자 문제를 예로 선택했다. 또한 모든 변수를 고려한 것이 아니라 모든 물리법칙을 논의함에 있어서 항상 관찰가능한 양만을 고려해야 한다는 파울리의 철학적 입장을 받아들여 관찰 가능한 양을 중심으로 자신의 논의를 제한했다. 이에 따라 그는 양자론적인 대응 조작을 추론하는 작업을 보다 간편하게 할 수 있었다.

1925년 6월 7일 하이젠베르크는 건초병을 치료하기 위해 2주간 휴가를 내고 북해의 휴양지인 헬골란트 섬으로 향했다. 이 헬골란트 섬에서 하이젠베르크는 비조화 진동자에 대한 수학적 형식화를 다시 추구했고, 바로 이곳에서 행렬역학으로 구체화되는 핵심적인 생각을 얻어냈다. 헬골란트에서 돌아온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이 생각해낸 새로운 양자론적 방법이 에너지 보존 법칙을 만족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25년 7월 새로운 역학체계인 행렬역학의 기본적인 개념틀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행렬역학의 출현을 예고한 이 역사적인 논문에서 그가 사용한 상징적인 곱셈이 수학적으로는 행렬의 곱셈에 해당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이것을 처음으로 알아낸 사람은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내에서 성장했던 막스 보른이었다. 즉, 보른은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을 살펴본 뒤, 하이젠베르크가 사용한 상징적 곱셈이 바로 자신이 대학시절부터 배워서 잘 알고 있었던 일종의 행렬곱셈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늘날 우리가 하이젠베르크 교환식이라고 부르는 식은 물론 하이젠베르크의 논문에 하나의 상징적인 곱셈으로 나타나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행렬로 처음으로 표현한 사람은 보른과 그의 학생이었던 요르단(Pascual Jordan, 1902­1980)이었다. 1926년 초 보른, 하이젠베르크, 요르단은 서로 힘을 합쳐서 소위 '3인 논문'을 출판했다. 이 논문의 출현과 함께 1926년 초 뒤늦게 행렬역학의 가치를 인정한 파울리가 수소의 발머계열식을 행렬역학적인 방법으로 성공적으로 풀어냄으로써 행렬역학은 그 기본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

보른, 요르단, 파울리 등의 도움으로 행렬역학을 완성한 뒤 하이젠베르크는 양자역학을 더욱 일반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게 된다. 1927년 초 하이젠베르크는 감마선 현미경에 의한 사고실험을 통해서 불확정성원리라는 새로운 사고틀을 찾아냈다. 즉 우리는 한 전자의 위치를 더욱더 정확히 알기 위해서 더욱더 짧은 파장의 현미경을 써야 한다. 그러나 컴프톤 효과의 영향 때문에 우리는 그 전자의 운동량에 대해서는 그만큼 부정확한 값을 얻게 된다. 즉, 위치와 운동량은 아주 작은 범위 내에서 서로 불확실한 관계 내에 있게 되는 것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창안하고 있는 동안 양자역학의 철학적 기초에 대해 몰두하고 있었던 보어도 이와 비슷한 견해에 도달했다. 우리는 항상 거시세계의 용어와 거기에서 얻어진 개념을 바탕으로 원자현상이라는 미시세계를 기술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미시세계를 기술하는 우리의 용어에는 어떠한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즉 원자현상의 기술에 있어서 한 용어의 무모순성은 항상 그것의 정의가능성과 관찰가능성의 상보적 관계 때문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것을 보어의 '상보성 원리'라고 하는데, 보어의 이 상보성 원리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서로 합쳐져서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는 코펜하겐 해석이 확립되게 된다.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어떻게 창안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대략 3가지 방향에서 그 영향 관계를 생각할 수 있다. 우선 현미경의 분해능 문제는 하이젠베르크의 박사 학위 구두시험에서 빈이 하이젠베르크에게 질문했던 것이었다. 박사 시험에서 낭패를 본 경험이 하이젠베르크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하이젠베르크의 절친한 친구이며 동료 물리학자인 파울리가 불확정성 원리를 창안하기 직전에 하이젠베르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1926년 10월 19일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운동량이라는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고 위치라는 눈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운동량과 위치의 눈을 동시에 뜨면 틀리게 된다." 이 말에서 우리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에 아주 근접했던 파울리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최종적으로 주창한 사람은 파울리가 아니라 파울리의 말을 옆에서 듣고 있었던 하이젠베르크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하이젠베르크 자신의 주장으로 아인슈타인의 영향이다. 하이젠베르크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에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에게 관찰이란 것은 관찰하려는 현상과 감각의 연관성을 정해주는 자연법칙을 우리가 알고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으며,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해주는 것이 바로 이론이라는 말을 해주었다고 한다. 하이젠베르크는 바로 이 말을 듣고 양자역학의 철학적 해석인 불확정성 원리의 기본적인 착상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이 지닌 비결정론적인 성격에 대해 무척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죽을 때까지 상보성원리를 주창한 보어와 양자역학의 유효성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국가사회주의 치하의 하이젠베르크

1927년 하이젠베르크는 26세의 나이로 라이프치히 대학 정교수가 되었고, 1933년에는 독일 물리학회에서 수여하는 막스 플랑크 메달과 물리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하이젠베르크 자신은 젊어서 청년운동에 참가하는 등 상당히 우파적인 인물이었지만,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 하이젠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자들로부터 '백색 유태인', '정신적 유태인 혹은 유태인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식의 인신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이젠베르크가 국가사회주의자들로부터 이런 공격을 받은 이유는 나치주의자들이 보기에 하이젠베르크가 나치주의자들이 유태인의 학문이라고 간주했던 상대성이론과 양자론에 대해서 호의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이젠베르크에 대한 나치주의자들의 공격은 하이젠베르크가 좀머펠트의 후임으로 뮌헨대학 교수로 임용되는 것을 저지하던 때를 전후해서 절정을 이루었다. '독일 국가사회주의 교원 연맹'을 필두로 한 나치 선동대들은 하이젠베르크의 과학사상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이젠베르크의 교수 임용에 대한 강한 반발을 보였다. 결국 하이젠베르크는 국가사회주의자들의 방해 공작 때문에 그의 스승이었던 좀머펠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뮌헨대학의 이론물리학 정교수에는 임용되지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의 핵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가 과연 나치에 대해서 얼마나 협조적이었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독일 과학사가와 미국 과학사가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해서 핵개발에 참가했던 독일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위해 군사무기를 개발하는 것에는 참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나치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인 태업을 했다고 한다. 즉, 자신들이 나치가 핵무기를 개발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방해해서 결국 나치가 핵무기를 보유하지 못했다고 후일 증언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을 어느 정도 믿어야 할지는 판단하기 힘든 역사적 숙제이지만, 나치가 핵무기를 만들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양심적인 독일 과학자들의 방해 공작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라늄 개발을 결정할 당시인 1942년 전쟁 상황은 독일에게 유리했으며, 따라서 독일의 지도부는 전쟁이 일찍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이런 판단에서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많은 자원이 요구되는 원자탄 개발 같은 계획을 추진할 필요성은 절실하지 않았다. 또 다른 요인으로는 하이젠베르크가 주도한 독일의 핵개발 팀은 주로 이론물리학자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우라늄의 연구를 실험실 수준에서 곧바로 거대한 생산 설비가 요구되는 산업적, 군사적 수준으로 발전시킬 배경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물리학자들뿐만이 아니라 실험물리학자, 화학자, 공학자, 그리고 거대한 설비의 건설 경험이 많았던 산업가들이 함께 참가해서 성공할 수 있었던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아무튼 1942년 7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10월 1일에는 베를린 대학 정교수로 임용되었다.

전후 재건과 하이젠베르크

전후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과학을 대표할 책임이 있는 과학자로서 폐허화된 독일 과학을 재건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49년 3월에 창립된 독일 연구협의회의 의장직을 맡는 한편, 자신이 독일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록펠러 재단의 장학금의 도움으로 코펜하겐으로 가서 닐스 보어와 함께 연구했던 경험을 되살려 훔볼트 재단의 재건에 힘쓰게 된다. 훔볼트 재단에서는 박사 학위를 한 젊은 학자들에게 독일에서 공부할 기회를 제공했는데, 하이젠베르크는 이 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으면서 독일에서 우수한 학문 연구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1956년부터는 독일 원자력 문제에 대해 정부에 자문을 하는 등 전후 독일의 과학 정책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자전적인 책인 『부분과 전체』(1969)와 현대물리학에 대한 자신의 철학적 견해를 소개한『물리학과 철학』(1959)을 비롯한 많은 비전문적인 저작을 통해서도 20세기 과학 사상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편 하이젠베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쿼크가 물질을 구성하는 궁극적인 소립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만약 궁극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소립자가 아니라 물질의 기본 대칭성일 것이라는 견해를 견지했다. 어린 시절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읽었을 때부터 간절히 추구해 온 물질의 기본 대칭성에 대한 믿음을 간직한 채 1976년 2월 1일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뮌헨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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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David Charles Cassidy, Uncertainty: the life and science of Werner Heisenberg (Freeman, New York, 1992).
원자 내에 있는 각 전자는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는 1925년 비정상 제만 효과와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그 뒤 아주 근본적인 원리로 발전해서 물리학의 모든 분야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배타원리는 금속의 전자론과 같은 고체물리학부터 초대칭 이론과 같은 고에너지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그 보편적인 적용 가능성을 넓히고 있다. 이 배타원리는 '물리학의 양심'(Das Gewissen der Physik)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파울리라는 물리학자와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다.

파울리와 상대성 이론

1900년 4월 25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태어난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는 어릴 때부터 보기 드문 신동이었다. 그는 12세에 유클리드 기하학을 완전히 이해했으며, 14세에 오일러의 저작을 읽었고, 18세에는 난해하기로 정평이 있었던 푸앵카레의 천체역학에 탐닉하기까지 했다. 1918년 10월 파울리가 뮌헨 대학에 들어갔을 때, 그는 이미 당시 완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난해한 학문 분야로 알려져 있었던 일반상대론을 상당한 수준까지 연구할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에 입학한 파울리는 대학 초년생으로서 상급학생들이나 신청하는 좀머펠트의 고급세미나에 참가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했다. 당시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은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아인슈타인은 헤르만 바일이 수학적으로 제안한 이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는데, 파울리 역시 바일이 연속체 가설을 바탕으로 관찰할 수도 없는 전자 내부의 구조를 가정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바일의 통일장 이론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했다.

파울리의 대학 스승인 좀머펠트는 당시 수리과학 백과사전의 물리학 분야 편집인이었는데, 그때 그는 상대론 분야의 집필인을 물색하고 있었다. 물론 상대론의 주창자인 아인슈타인이 가장 적격자였으나, 아인슈타인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했기 때문에 다른 인물을 구해야만 했었다. 자신의 세미나에서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이론을 통렬히 비판하는 파울리를 본 좀머펠트는 선뜻 이 중요한 집필을 21세의 어린 파울리에게 맡겼다. 아인슈타인이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말하기를, "이 완숙되고 훌륭하게 집필된 책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자가 21세의 한 청년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을 것이다. 개념 발전에 관한 심리학적 이해, 수학적 추론의 정확성, 깊은 물리학적 통찰력, 개괄적이고도 체계적인 서술능력, 참고문헌에 대한 인식, 주제 처리에 있어서의 완전성, 비판의 정확성 등등, 무엇을 먼저 치하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놀랍다."라고 평했다.

파울리와 고전양자론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상대성이론 분야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파울리는 그 뒤 상대론에 비해 비교적 많은 경험적 자료가 존재하고 있었으며, 또한 당시에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던 양자론 분야로 곧 관심 분야를 옮겼다. 파울리는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만으로도 이미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충분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교육법에서는 대학에 들어온 뒤 최소한 6학기 이상을 등록해야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1921년 여름에 와서야 최우수 성적(summa cum laude)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은 수소 분자 이온에 대한 양자론적 설명에 관한 것이었다. 수소 분자 이온은 삼체 문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반적인 해법을 얻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파울리는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수소 분자 이온이 갖는 다양한 전자 궤도의 안정성 문제를 다루었다.

박사 학위를 한 뒤 1921/22년 겨울 학기에 파울리는 수학의 메카인 괴팅겐으로 가서 막스 보른의 조교가 되었다. 당시 보른은 천체 역학에서 사용하는 건드림이론(Strungstheorie)을 이용해서 헬륨 문제와 같이 삼체 문제를 포함한 역학 체계에 대한 다전자 체계의 고전 양자론을 일반적으로 전개하려는 야심찬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하고 있었다. 파울리는 보른을 도와 세차운동에 의해 생기는 '고유 겹침'(intrinsic degeneracy)을 다루는 다체 문제에 대해 연구했다. 하지만 파울리는 보른이 물리적 내용보다는 지나치게 수학적 형식주의에 매달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울리와 보른 사이의 협력 작업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6개월 뒤 파울리는 함부르크로 가서 파울리와 같은 좀머펠트의 문하생이었던 빌헬름 렌츠(Wilhelm Lenz)의 조교가 되었다. 1922년 6월 파울리는 괴팅겐에서 닐스 보어를 처음으로 만나 그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해 가을 그는 코펜하겐으로 가서 1년간 머물면서 닐스 보어와 진지한 학문적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파울리는 닐스 보어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에너지 보존법칙이나 대응원리와 같은 몇몇 부분에서는 닐스 보어에게도 강한 비판을 가했다. 무엇보다도 파울리는 당시의 고전양자론을 구성하고 있던 많은 개념들이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이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척 커다란 불만을 느꼈다. 예를 들어, 그는 당시로서는 풀리지 않던 양자현상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개념적 도구였던 보어의 대응원리도 여전히 기존의 고전역학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원리 자체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새로운 양자론을 구성하는 중심 개념이라는 것에는 깊은 회의를 나타냈다. 많은 과학자들은 미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새로운 양자이론은 그 극한에 있어서 거시적 세계를 기술하는 기존의 고전역학과 일치한다는 이 대응원리를 이용해서 그때까지는 설명할 수 없었던 새로운 양자현상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찾아내는 데 많이 이용하곤 했었다. 이런 대응원리조차도 파울리는 거부했다. 그는 새로운 양자론의 형성에 있어서 철저한 개념적인 혁명을 요구하는 완벽주의자였다.

파울리는 자신이 생각할 때 아주 완벽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출판하지 않았다. 그의 유고를 보면 그가 논문으로 출판을 해도 손색이 없었을 수많은 작업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의 논문을 출판하기 전에 '물리학의 양심'이라고 불렀던 파울리에게 논문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파울리의 친구들은 그가 논문을 출판해도 좋다고 하면 자신의 논문에 문제가 없는 것으로 믿었다. 그는 수많은 논문들이 출판도 되기 전에 휴지통으로 들어가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물론 그가 비판을 했을 경우에도 살아남는 논문은 있었지만, 그것은 스핀 이론과 양-밀스 이론과 같이 아주 독창적인 몇몇 논문에서만 예외적으로 나타났다.

이상제만 효과와 란데의 모형

1920년 초부터 이상제만효과를 다루는 분광학 분야에서도 기존의 고전역학적 모형에서 벗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나타났다. 1896년 제만(Pieter Zeeman)이 자기장 내에서의 스펙트럼선의 분리현상을 발견한 이래 분광학적 기술이 계속 향상되어, 1920년경에는 수많은 관측자료가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 가장 설명하기 힘들었던 현상 가운데 하나는 자기장에서 궤도각운동량과 오늘날 우리가 스핀각운동량이라고 부르는 양과의 커플링에 의해서 스펙트럼선이 복잡하게 갈라지는 현상인 이상제만효과였다. 1920년 초부터 이상제만효과를 연구하던 란데(Alfred Land)는 당시의 실험적 사실에 대한 이론적 설명을 하기 위해 일종의 벡터 모형을 제안했다. 그러나 란데의 이 모형에서는 고전역학적인 각운동량의 두 곱이 양자론적으로는 다른 식으로 나타나서 모형을 취급하는 방식 자체가 기존의 고전역학으로부터 일탈하는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전자의 스핀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전이었고, 과학자들은 이 스핀에 해당하는 양을 원자핵 가까이에서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궤도전자의 상대론적 효과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원자 중핵의 각운동량으로 표현했다. 이에 따라 원자의 각운동량은 중핵 각운동량 R, 궤도 각운동량 K, 전체 각운동량 J에 의해 표현되었다. 이 R, K, J는 현재의 S+1/2, L+1/2, J+1/2에 해당한다. K=1/2, 3/2, 5/2, 7/2 ... 등을 배열할 수 있고, 이는 s, p, d, f ...를 나타낸다. 또한 R=1/2, 2/2, 3/2, 4/2 ... 등을 배열할 수 있고, 이는 홑겹 상태, 겹 상태, 3중 상태, 4중 상태 등을 나타낸다. 이때 1/2 정수가 양자수로 나타나는데, 이것은 정상파 모형에 기초를 둔 보어-좀머펠트 고전 양자론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것이었다 . 또한 란데의 g-인자 계산에서도 문제점이 나타났다. 약한 외부 자기장의 경우 3 R2-K2 에는 란데의 g -인자는 로 표시되어, 분모의 1/4이라는 수가 기 존의 벡터 모형에서 벗어났다. 반대로 강한 자기장의 경우에는 로 중핵 각운동량의 자기에너지 하에 궤도 각운동량의 2배가 되는 인수가 나타나는 문제가 발생했다.

( 여기서 m=mK+mR, mk=Kcos(KH), mR=Rcos(RH)이다.) 궤도 각운동량과 스핀 각운동량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기는 이 현상은 1926년 토머스(L. H. Thomas)가 전자의 회전에 따른 상대론적 효과를 보정하면서 부분적으로 해결되었고, 1928년 디랙이 완성한 상대론적 전자론에 의해 완전히 설명되었는 데 당시로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이외에도 원자에 전자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늘려나가면서 원자계의 상태를 계산하면 보어의 원자 구성원리의 기본이 되었던 에렌페스트의 단열 원리가 붕괴되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수를 바탕으로 분광학적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1/2 정수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를 놓고 당시 독일의 과학자들은 엄청나게 헤매고 있었다. 1924년 2월 21일 파울리는 보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독일의 원자 물리학자들은 현재 두 부류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그 한 부류는 먼저 1/2 정수를 양자수로 사용해서 어떤 문제를 풀다가 그것이 경험과 맞지 않으면 다시 정수 양자수로 계산합니다. 반면에 또 다른 부류는 먼저 정수로 계산하다가 그것이 경험과 맞지 않으면, 다시 1/2 정수로 계산합니다. 이 두 부류의 원자 물리학자들은 그들의 이론에서 어떠한 선험적 논증도 얻어질 수 없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이론 물리학은 내 취향과는 결코 맞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은 고체의 열전도에 관한 일로나 돌아가렵니다." 10개월 뒤 비정상 제만 효과로 다시 돌아온 파울리는 마침내 자신의 생애 최대의 업적인 배타원리를 창안하게 된다.

배타원리의 출현

당시 이상제만 효과에 관련되어 나타났던 수많은 문제점은 훗날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과 스핀 이론이 완성된 뒤에야 비로소 완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으로서 당시로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였다. 1925년 파울리는 배타원리를 창안하여 고전양자론 내의 문제를 부분적으로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즉 고전역학적 개념을 철저히 거부한 파울리는 비정상제만효과를 란데의 벡터 모형으로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 고전역학적인 모형을 이용한 설명을 단호히 거부하고, 주양자수, 방위양자수, 자기양자수 외에 제4의 양자수를 가정함으로써 소위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제창하게 된다. 각 전자는 원자 내에서 동일한 양자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이 배타원리를 바탕으로 파울리는 고전역학적인 개념을 부분적으로 함유하고 있었던 보어의 고전양자론의 문제점을 완전히 제거하고, 새로운 양자상태 개념에 입각해서 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대한 완벽한 설명을 얻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파울리가 1925년 초의 배타원리에 관한 논문에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스핀 개념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제4 양자수를 기계적이며 고전역학적인 모형으로 설명하는 것을 철저히 거부했다. 한 예로, 1925년초 크로니히(R. Del Kronig)의라는 한 젊은 물리학자가 파울리가 제안한 제4의 양자수를 전자의 스핀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내용을 파울리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이때 파울리는 크로니히의 견해가 기계적이고 고전역학적인 해석이며, 따라서 구시대적인 발상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고, 이런 바람에 크로니히 자신은 그만 스핀가설에 관한 주장을 포기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크로니히는 중대한 발견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스핀 발견의 영광은 에렌페스트 밑에서 공부하던 윌렌벡(George Eugene Uhlenbeck)과 하우트스미트(Samuel Abraham Goudsmit)에게 돌아가 버렸다. 우리가 흔히 파울리의 스핀 매트릭스라고 부르는 것은 토머스가 스핀 각운동량의 상대론적 효과를 가정해서 분광학적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한 뒤인 1927년 5월 자기 전자에 대한 양자역학을 다룬 파울리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한편 1926년 엔리코 페르미는 이상 기체 상태 방정식에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적용하여 새로운 통계 법칙을 유도했다. 이어 1927년 디랙은 분자 집단에 대한 문제를 풀 때 대칭 고유함수를 포함하는 상태함수는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를 따르는 반면에 반대칭 고유함수를 포함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새로운 통계역학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파울리의 배타원리를 따르는 입자들은 페르미-디랙의 통계라는 새로운 통계역학적 방식에 의해 취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파울리의 행렬역학

파울리는 물리 법칙은 항상 원칙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들 사이의 관계를 바탕으로 세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찰 가능한 양을 중시하는 경향은 이미 그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비판할 때부터 엿보이기 시작했다. 파울리의 이런 철학적 관점은 그의 친구였던 하이젠베르크가 행렬 역학을 창안할 때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25년 행렬역학과 관련된 하이젠베르크의 최초 논문에는 원리적으로 관찰 가능한 양의 관계들로만 새로운 양자역학을 정립하겠다는 주장이 담겨있는데, 바로 이것은 그의 친구 파울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가 행렬역학의 철학적 입장을 정립하는 데 파울리는 커다란 역할을 했지만, 파울리 자신은 하이젠베르크가 창안한 양자역학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보른에 의해 행렬 역학이라고 하는 수학적 형식으로 발전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 보른, 요르단 등이 행렬역학을 완성하고 있던 상당기간 동안 이 과정에서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행렬역학의 유효성이 점차로 여러 곳에서 인정되기 시작하면서 파울리도 행렬역학의 실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시 보어 역시 행렬역학의 발전에 대해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만약 행렬 역학이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성공적으로 유도하면 이를 받아들이려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교과서에서는 수소 문제를 뒤이어 나타나는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을 이용해서 풀고 있으며, 이 문제를 행렬역학에 의해 푸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행렬역학의 창시자들 역시 행렬역학을 이용해 수소 문제를 해결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뒤늦게 행렬 역학의 발전 대열에 합류한 파울리 수소 문제를 행렬역학을 이용해 성공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행렬역학이 원자의 분광학적 현상과 부합되는 올바른 이론이라는 것을 닐스 보어를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에게 분명하게 인식시켰다.

파울리와 뉴트리노

1914년 채드윅이 베타 붕괴할 때 전자가 연속적인 에너지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발견한 이래로 과학자들은 전자가 일정한 에너지를 갖지 않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엘리스(C. D. Ellis)는 베타 붕괴를 할 때 이런 연속적인 에너지 스펙트럼을 갖는 이유는 핵내부에서 전자의 에너지가 감마선으로 변환되면서 다양한 에너지 분포가 생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마이트너(L. Meiter)는 핵내부에서 전자는 띄엄띄엄 에너지를 갖지만 핵외곽에서 다른 전자에 에너지를 방출해서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베타 붕괴에 의해 나오는 전자의 에너지 스펙트럼이 내부에서 진행되는 1차적인 것인지 아니면 외부에서 나타나는 2차적인 것이지를 확인하려면 베타 붕괴 때 나오는 전자를 흡수하여 생기는 절대 열 에너지를 측정하면 되었다. 만약 1차 과정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열량계에서 측정된 열 에너지는 베타 스펙트럼의 평균값이 될 것이며, 2차 과정에 의해 생긴 것이라면 측정된 열 에너지는 베타 스펙트럼의 상한가가 될 것이다. 1927년 엘리스(C. D. Ellis)와 우스터(W. A. Wooster)는 라듐 E에서 생성되는 열 에너지를 측정한 결과 이것이 베타 스펙트럼의 평균값과 같음을 보였다. 이어 1930년 마이트너와 네른스트의 공동연구자였던 오르토만(W. Orthomann)은 좀더 개량된 실험 장치를 사용해서 엘리스와 우스터가 측정한 값을 더욱 정확히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 나아가 마이트너는 이 논문에서 베타 붕괴를 할 때에 엘리스가 가정한 연속적인 감마 스펙트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보였다.

이에 따라 연속적인 베타 스펙트럼을 해석하는 두 가지 이론적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 하나는 베타 붕괴 때에 에너지 보존 법칙을 파기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1차 단일 과정에서도 에너지 보존법칙의 유효함을 인정하고 대신 새로운 중성 입자가 방출된다고 가정하는 것이었다. 보어는 자신이 1924년에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기 위해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기할 때 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에너지 보존법칙을 파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파울리는 새로운 중성 입자를 가정함으로써 에너지 보존법칙을 유지했다. 1930년 12월 파울리는 튀빙겐에서 열리는 물리학회에 바로 이 새로운 중성 입자를 가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친애하는 방사성 신사 숙녀 여러분'(Liebe Radioaktive Damen und Herren)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서 파울리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유지하기 위해 스핀이 1/2이고 빛과는 구별되는 새로운 중성입자를 가정했다. 파울리는 이 입자를 '중성자'(Neutron)이라고 불렀는데, 이 입자의 질량은 전자의 크기 정도로 양성자 질량의 1 % 이내가 된다고 생각했다.

1932년 채드윅은 양성자와 질량이 비슷한 새로운 중성 입자를 발견했다. 이리하여 파울리가 예언한 중성자는 채드윅이 발견한 중성입자와 구별하기 위해 1934년 페르미는 이탈리아 이름인 뉴트리노(Nutrino)라는 새로운 이름을 제안했다. 파울리가 에언한 이 중성미자는 1956년 로스 앨러머스의 코원(Clyde L. Cowan)과 라이니스(Frederick Reines)에 의해 마침내 실험적으로 발견되었다. 1956년 6월 15일 파울리는 코원과 라이니스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우리는 양성자 역 배타 붕괴를 관찰하여 분열된 조각으로부터 뉴트리노를 분명히 관측했다는 사실을 당신에게 알려주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관찰된 단면적은 예측된 값인 6·10-44 cm과 잘 일치합니다." 이 편지는 파울리의 놀라운 통찰력에 대한 찬사와 함께 그에게 확실한 학문적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파울리와 양자역학의 해석

파울리는 1931년 결혼에 실패한 뒤 심한 좌절에 빠졌다. 1931년 겨울 그는 최악의 상태에 빠졌는데, 이때 파울리는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카를 구스타프 융에게 찾아갔다. 이 만남은 훗날 둘 사이의 과학적 접촉으로 이어졌다. 파울리는 측정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양자역학적 과정을 관찰자의 주관적이고 심리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양자역학이 지니는 비결정론적 성격을 종교에서 연금술적 상징들이 표출되는 집단 무의식을 다룬 칼 융의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켰다. 즉 관찰자의 주관적 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마치 소우주인 인간이 정신적으로 만다라(mandala)에 들어가서 우주 생성에 개입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적 대상에 관찰자의 측정행위가 영향을 미치는 전체성을 논함에 있어서 보어는 관찰을 원자계와 측정 도구와의 상호작용으로 보았다. 하지만 파울리는 측정도구를 관찰자의 감각기관이 확장된 것으로 보면서, 관찰을 원자계와 관찰자의 의식과의 상호작용으로 간주했다. 파울리는 물질과 정신의 엄격한 구별을 강조했던 데카르트적 이원론의 견해와는 달리 실재는 물리적 측면과 정신적 측면을 동시에 포함하는 전체로서 이해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즉 물질(matter)과 정신(psyche)은 실제에 대한 상보적 표현이며,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파울리의 이런 생각은 연금술적 전통과 불교적 세계관과 깊은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만년에 정신과 물질의 문제에 몰두한 파울리는 1958년 12월 15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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