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과학에 대한 시대 구분을 할 때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1895년을 그 기점으로 잡는다.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X-선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을 발견한 해였다. 뢴트겐이 이 새로운 광선을 발견한 뒤에 이에 자극되어 그 이듬해 프랑스의 베크렐은 우라늄에서 최초로 방사선을 발견했으며, 1897년에는 영국의 J. J. 톰슨이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해서 1899년경에는 음극선의 입자성이 강력하게 부각되게 된다. 톰슨에 의한 음극선의 입자성 발견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상대성이론이 출현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X-선의 본성에 대한 논쟁에서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는 빛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게 된다. 빛에 대한 이중성 개념은 물질파 개념과 함께 양자역학이 성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방사선의 발견은 핵변환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핵분열이 발견되어 우리는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과학은 X-선의 발견을 계기로 해서 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음극선 실험과 X-선

1850년대부터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기 방전관에서 나오는 음극선을 이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해나가고 있었다. 초기 이들의 실험은 주로 음극선 자체의 성질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음극선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학자들은 음극선을 다양한 물체에 충돌시켜 여기서 나타나는 모습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X-선의 발견은 바로 이런 실험 과정에서 얻어졌던 것이다.

1892년 본 대학의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는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헤르츠는 그의 제자인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1947)에게 이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 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레나르트 창문')을 대어서 여기에 음극선을 쏜 다음 이 금속 창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광선의 성질을 여러 기체들 속에서 면밀하게 점검했다. 이 실험에서 레나르트는 음극선에 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성질들을 관찰했다. 만약 레나르트가 여기서 금속판을 투과해서 나오는 음극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반대편에도 감광판을 대었더라면 레나르트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X-선 발견의 영광은 레나르트가 아니라 레나르트가 이런 실험을 하는 방법을 알려준 뢴트겐에게 돌아가 버린 것이다.

뢴트겐(Wilhlem Conrad Rntgen, 1845 ­1923)은 독일의 레네프에서 독일인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65년 입학시험을 통해서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ETH)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1869년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한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1839­1894)의 조교가 되어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 뒤 쿤트를 따라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1874년 교수자격과정(Habilita- tion)을 이수하고, 그 이듬해 뷔템베르크의 작은 학교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을 거쳐 1879년 기센대학 교수가 되었다. 기센대학에서 10여년간 교수로 재직한 그는 1888년 마침내 프리드리히 콜라우시(Friedrich Kohlrausch)의 후임으로 그가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정착하게 되었다. 50세가 넘은 1895년초까지 뢴트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48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발표한 논문 하나로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1894년 5월 5일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서 음극선을 금속 박판에 쏘기 위한 실험장치에 관한 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문'에 사용되는 금속 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레나르트의 도움을 받아 뢴트겐은 레나르트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을 하던 중 뢴트겐은 대학의 학장으로 뽑혀서 당분간 자신의 음극선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1895년 10월 말 임기를 마친 뢴트겐은 1년 전에 자신이 한 실험을 다시 한번 반복해 보았다.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후일 신문기자와 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 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도 이렇게 뒤덮인 종이는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인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 때 히토르프-크룩스 관에서는 륌코르프 고전압 발생장치에 의해서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해서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시안화바륨을 감광시켰던 것이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12월 22일 그는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서 그녀의 손을 X-선으로 찍어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뢴트겐은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 학회지에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접수시켰다.

이 짧은 논문은 곧 인쇄되어 1896년 신년에 이미 뢴트겐은 논문의 별쇄본을 X-선 사진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1월 4일에는 독일 물리학회 50주년 기념 학회가 있었는데, 뢴트겐의 발견은 이때 전 독일 과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의학자들은 X-선의 의학적 중요성을 발 빠르게 알아차리고 뢴트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도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해서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1월 9일에는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이 새로운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이 날아왔다: "본인은 우리의 조국 독일에 인류를 위한 커다란 축복이 될 새로운 과학의 승리를 안겨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 1896년 1월 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는데,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인 그해 2월 24일에 베크렐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 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다. X-선 발견은 영국 과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J. J. 톰슨은 X-선 발견의 소식을 듣고 이에 관련된 실험을 하다가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했다. 그 뒤 톰슨은 음극선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 즉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X-선의 발견은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뢴트겐은 발견 당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의 물리학 분야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당시에 뢴트겐이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과학자들에게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X선은 뢴트겐 이전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었을 것이다. 18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정전기 발생 장치에서 나오는 스파크에서도 이미 X-선이 발생했었을 것이고, 1879년 크룩스 자신도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불평하곤 했었다. 더구나 레나르트를 비롯한 몇몇 독일 물리학자들은 크룩스 관 주변에서 발생하는 발광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하는 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특히 레나르트의 창문 실험은 X-선 발견에 가장 근접했던 실험이었으며, 실제로 레나르트는 뢴트겐이 히르토프-크룩스 관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레나르트는 자신이 이 중대한 발견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특히 뢴트겐이 X-선 발견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도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X-선의 본성에 대한 초창기의 해석

뢴트겐이 새로운 종류의 광선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한 뒤 많은 과학자들은 투과력이 강한 이 광선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렸다. 즉 뢴트겐의 발견 직후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 입자, 에테르 내의 와동, 높은 주파수를 지닌 음파 혹은 중력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했다. 하지만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곧 전자기파로서 통상의 빛, 종파, 충격파 등 3가지 유형의 해석으로 좁혀졌다. 우선 초창기 유행하던 X-선 본성에 대한 해석으로는 1900년까지 주로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선호되던 해석으로 X-선을 매우 높은 진동수를 지닌 통상의 빛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은 빛과 같이 직진을 하며, 자기장이나 전기장에 의해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뢴트겐 자신과 루트비히 볼츠만 등은 X-선을 19세기를 통해서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에테르의 압축에 의해서 생기는 종파(longitudinal wave)로 해석했다. 당시에 빛은 압축가능한 매질에서 전파되는 소리와는 달리 횡파(transverse wave)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압축이 불가능한 완전탄성체라는 극히 이상적인 매질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에테르가 조금이라도 압축이 가능하다면 소리와 같이 빛의 종파 성분이 존재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이라는 것이다.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 J.J. 톰슨 등은 X-선을 에테르 내에서 순간적으로 불연속적으로 전파되는 충격파(impulse)로 이해했다. 우선 독일의 비헤르트는 1896년 5월 X-선이 불규칙적인 빛의 충격파라고 제안했다. 뢴트겐이 제안한 압축파의 가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영국의 스톡스는 1896년 11월 X-선이 기본적으로는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횡파로서 개별 음극선이 아주 빠르게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충격파라고 주장했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대가인 J.J. 톰슨은 이 스톡스의 가설에 대한 자세한 계산을 했다. 톰슨도 처음에는 종파 가설에 대해 고려했지만, 스톡스 가설에 대한 엄밀한 점검을 하는 과정에서 1897년 12월부터 스톡스 가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국의 켈빈 경은 처음에는 X-선이 물질에 잘 흡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X-선을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종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899년에 이르면 켈빈도 암묵적으로나마 X-선이 충격파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미 1899년에도 X-선이 회절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1899년 2월 네덜란드의 윈드(C.H. Wind)와 하가(H. Haga)는 격자에 의해서 X-선이 회절되는 사진을 찍었다. 당시 괴팅겐 대학의 사강사였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는 이 회절 사진에 대해서 충격파 가설에 입각해서 X-선 펄스의 간격을 계산하기도 했다. 이어 1904년 영국의 바클러(Charles G. Barkla, 1877­1944)는 X-선이 편광이 된다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X-선의 본성에 대한 충격파 가설을 지지하는 간접적인 증가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1905년까지 충격파 가설은 X-선의 본성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견해가 되게 된다.

레나르트의 방아쇠 가설과 그 문제점

1905년경부터 충격파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이 해석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X-선의 이온화 성질에 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에 문제가 있음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우선 X-선이 모든 기체 원자들을 이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히 통과하는 원자들의 극히 일부만을 이온화시킨다는 것이 설명되어야만 했다. 또한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크다고 하는 특이한 성질도 설명되어야만 했다. 1902년 레나르트는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을 하던 중 자외선에 의해서 방출되는 전자의 속도가 빛의 강도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런 광전효과 현상을 원자 속의 전자는 이미 원자 속에서 퍼텐셜 에너지에 해당하는 속도를 얻고, 빛은 단지 전자를 방출시키는 방아쇠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방아쇠 가설(triggering hypothesis)를 제기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큰 이유도 이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것이다.

한편 방아쇠 가설이 옹호하고 있는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 이외에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자론적 해석도 등장했다. 1907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던 윌리엄 H.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는 X-선이 강한 투과력을 갖는 것은 X-선이 펄스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X-선이 두 하전입자가 같은 평면에서 회전하는 중성쌍(neutral pair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만 보다 잘 설명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파동론적 견해와는 다른 입자론적 해석을 제기했다. 브래그는 훗날 결정 격자에 의해 X-회절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해서 결과적으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적어도 1907년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X-선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과학자였다. 그리하여 1908년을 통해서 기존의 펄스 가설을 옹호하던 바클러와 입자론적인 중성쌍 가설을 새로이 제기한 브래그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양자 가설의 등장

한편 190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서 광전효과를 설명한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X-선에 대한 다양한 양자론적인 해석들이 나타났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양자라는 국소적으로 독립된 에너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레나르트가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광전 효과 설명을 이 새로운 광양자 가설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양자 가설에 의하면 빛에 의해 튀어나오는 광전자의 최대 속도는 빛의 세기와 무관하고, 빛의 진동수만이 전자가 받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은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과학자들에 의해서 널리 수용되고 있었던 빛의 파동설은 빛과 관련된 아주 많은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광전 효과는 잘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빛의 간섭 현상을 비롯한 몇몇 현상들을 당시 과학자들에게 납득이 갈 정도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양자론적 해석은 독일의 과학자 사회에서 서서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과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1874­1957)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X-선의 성질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양자론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 자신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광양자 가설을 전개해나갔다. 1905년 양극선에서 나오는 양이온선(canal ray)의 도플러 효과를 발견한 슈타르크는 이 양이온선에서 관찰된 현상과 연관하여 광양자 가설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X-선의 성질을 광양자 가설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테르 파동설'과 광양자 가설을 동시에 적용해 본 슈타르크는 전통적인 연속체 물리학의 무비판적인 적용을 반대했으며, 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독일의 과학자들의 구미에 맞게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에서 빛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이 서서히 수용되면서 레나르트에 의해 제기된 방아쇠 가설은 점차로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X-선 회절 실험: 라우에 반점과 브래그 부자의 실험

광양자 가설이 등장하고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가설이 대두되었지만 1911년까지도 X-선이 전자기파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하는 것은 좀처럼 분명한 형태로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한편 X-선 발견으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뢴트겐은 1900년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뮌헨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 겸 물리학 교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뢴트겐은 이 뮌헨에서 대학의 엄청난 지원 속에서 거대한 연구 시설을 갖춘 연구소를 꾸려나갔다.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는 이보다는 규모가 작은 이론 물리학 연구소가 하나 있었는데, 1906년 좀머펠트는 뢴트겐의 추천으로 이곳의 교수로 오게 되었다. 결정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실험에 성공해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힌 곳은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 꾸민 거대한 연구소가 아니라, 바로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 있었던 좀머펠트의 작은 이론 물리연구소였다.

좀머펠트 역시 X-선의 본성에 대해 연구한 학자였는데, 그는 특히 우수한 학생들을 발굴, 교육, 육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머펠트 연구실에는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라는 사강사가 있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의 막스 플랑크 밑에서 상대성 이론과 광학에 대한 연구를 한 뒤 1909년부터 이곳에서 사강사 생활을 하면서 격자에서 나타나던 회절에 관한 것을 연구하던 이론 물리학자였다. 또한 좀머펠트의 연구소 내에는 이론 물리학 분야 이외에 작은 실험 분과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교로 일하던 사람이 바로 발터 프리드리히(Walther Friedrich, 1883­1968)였다.

라우에의 X-선 회절 실험을 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인물은 에발트(Peter Paul Ewald, 1888­1985)였다. 1912년 그는 좀머펠트 연구소에서 결정 속의 입자들의 규칙적인 공간 배열을 기본 가정으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스 폰 라우에는 바로 이 에발트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X-선을 결정 격자에 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결정적인 착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는 만약 X-선이 아주 짧은 파동이라면 아주 규칙적인 원자 배열로 이루어진 결정 격자를 통해서 나오는 밝고 어두운 회절 무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막스 폰 라우에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서 정작 뢴트겐과 좀머펠트와 같은 뮌헨 대학의 물리학 교수들은 강한 의문을 내비치며 회의를 표명했다.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의 이 생각을 실험실에 있던 발터 프리드리히에게 개진해보았지만, 좀머펠트의 반대에 눌려 프리드리히도 회의를 표명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막스 폰 라우에는 파울 크니핑(Paul Knipping, 1883­1935)이라는 젊은 박사과정 학생에게 이 실험을 감행해보자고 설득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2년 4월 21일 막스 폰 라우에, 발터 프리드리히, 파울 크니핑은 X-선 회절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황산구리 결정격자에 X-선을 쏘는 실험을 통해서 좀머펠트 연구소의 젊은 과학자들은 X-선이 결정 격자를 통과할 때 회절과 간섭을 일으켜 사진 건판에 소위 라우에 반점이라는 여러 반점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그들은 X-선이 아주 짧은 파장을 지닌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격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5월 4일 프리드리히, 크니핑,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들의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들이 그 동안 자신들이 행했던 실험에서 얻은 내용을 바이에른 아카데미에 전했다. 6월이 되자 막스 폰 라우에는 감격에 젖어 최초의 X-선 회절에 의한 반점 사진을 그의 동료들에게 보냈고, 이에 따라 결정 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소식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6월 10일 아인슈타인은 막스 폰 라우에에게 "당신의 실험은 물리학이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합니다."라는 내용의 축하 엽서를 보냈다.

뮌헨의 젊은 과학자들이 얻어낸 놀라운 실험은 곧 영국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와 관련된 실험을 하도록 자극했다. 특히 영국의 윌리엄 H. 브래그와 그의 아들 W.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1890­1971)는 선택적 반사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결정 격자에서의 X-선 회절 실험을 더욱 간단하고 분명한 형태로 진행시켰다. 본시 윌리엄 H. 브래그는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지만, 1912년 말까지는 X-선의 파동적 해석에 대한 반감을 상당 부분 완화시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브래그 부자는 3차원 결정 격자를 이용한 폰 라우에 연구팀과는 달리 평형면 반사를 이용해서 X-선 회절 법칙을 얻어냄으로써 결정 격자를 매우 간단한 수학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리하여 이들의 실험은 X-선결정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성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 현상에 대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분자생물학의 성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2년에서 1913년에 걸쳐 이룩한 X-선 회절 실험에 대한 노벨상 위원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914년 막스 폰 라우에는 자기의 스승 막스 플랑크보다 먼저 노벨상을 받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브래그 부자도 X-선 회절 실험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참 고 문 헌

[1] W. C. Rntgen, "Uber eine neue Artvon Strahlen," Wrzburger Berichte (1895), pp. 132-141.
[2] W. Friedrich, P. Knipping and M. Laue, "Interferenzerscheinungen bei Rntgenstrahlen," Ann. d. Phys. 41 (1913), 971-988.
[3] W. H. Bragg and W. L. Bragg, "The reflection of X-rays by crystalls," Proc. Roy. Soc. London A 88 (1913), pp. 428-438.
[4] Bruce R. Wheaton, The tiger and the shark (Cambridge, Cambrige Univ. Pr., 1983).
[5] E. Segr, From X-ray to quarks (San Francisco: Freeman,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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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4월 30일 영국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J. J.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지난 4개월간에 걸친 음극선에 대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자신이 음전하를 띤 원자 이하의 미립자(corpuscle)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알아냈다고 했는데, 톰슨이 발견한 이 미립자를 훗날 사람들은 전자(electron)라고 부르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전자는 물성과학 분야는 물론 전자공학, 의공학 등 다양한 응용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음극선에 대한 연구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전자라고 부르는 개념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과학자들의 수많은 실험과 이론적 작업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음극선 연구의 시작

전자들의 흐름인 음극선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838년부터 영국의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다양한 기체로부터 스파크의 형태로 나타나는 전기 방전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대기압 하에서의 기체 방전뿐만이 아니라 압력을 낮추었을 때 나타나는 방전의 모습도 관찰했다. 그는 기체의 기압이 낮아지면서 양극에서 음극까지 다소 지속적인 발광이 나타나다가 기압이 아주 낮아지면 전극의 중간 지점에서 어두운 지역이 나타나면서 발광이 중단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흔히들 패러데이 암부(Faraday dark space)라고 부른다.

자장이 방전관에 미치는 영향은 독일의 본 대학의 율리우스 플뤼커(Julius Plcker, 1801­1868)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본래 그는 해석기하학 분야가 전문인 수학자였고 1836년부터 1847년까지 본 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플뤼커는 1847년 본 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옮기면서 이론물리학이 아닌 실험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본의 유리기구 제작자인 하인리히 가이슬러(Heinrich Geißler, 1814­1879)는 플뤼커에게 전기 방전에 필요한 유리관을 만들어주었는데, 플뤼커는 그 관을 가이슬러관이라고 불렀다. 전기 방전을 연구하던 플뤼커는 1858년 자력이 기체 방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실험을 하던 중 자석 근처에서 기체 방전이 어느 정도 휘는 것을 관찰했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이듬해 방전관의 음극 근처에서 밝은 녹색의 발광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사용했던 '진공관'의 진공도는 그다지 높지 않아 더 이상의 정밀한 실험은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가이슬러는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는 가이슬러관 뿐만이 아니라 고진공을 만들 수 있는 진공 펌프도 발명했다. 그는 1855년 개스킷이 필요 없는 수은 진공펌프를 발명했는데, 이것으로 기체 방전관 내의 진공도를 대기압의 만분의 1 정도로 낮추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1864년에는 독일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기구제작자인 륌코르프(Heinrich Daniel Rhmkorff, 1803-1877)는 불꽃 유도 코일을 개발해서 1피트 이상의 거리에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고전압을 발생시킬 수 있게만들어 주었다.

플뤼커의 제자였던 빌헬름 히토르프(Johann Wilhelm Hittorf, 1824­1914)는 가이슬러의 수은 진공펌프와 륌코르프의 고전압 발생장치를 이용해서 1869년 고진공 방전관을 만들고 그 속에서 소위 '글로우 광선'(Strahlen des Glimmens)을 발견했다. 그는 이 광선이 고체 뒤편에 그림자가 생기게 하는 것을 볼 때 음극에서 직선으로 전파된다고 생각했고, 이 광선이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고 유리에 닿으면 발광을 한다는 것도 관찰했다. 1876년 독일 베를린 대학의 헬름홀츠 밑에서 연구하던 골트슈타인(Eugen Goldstein, 1850­1930)은 플뤼커와 히토르프의 실험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 플뤼커와 히르토프의 실험을 반복해본 골트슈타인은 자신이 관찰한 광선에 '음극선' (Kathodenstrahl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크룩스의 발견

1878년 영국의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는 훗날 크룩스관(Crookes tube)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고진공관 속에서 나타나는 전기 방전 현상을 연구하여 방전관 내에서 소위 '크룩스의 暗部'(Crookes dark space)의 두께가 방전관 내의 분자의 압력이 감소함에 따라 넓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독일에서 가이슬러라는 기구 제작자가 플뤼커를 도운 것처럼 영국에서는 찰스 김밍엄(Charles H. Gimingham)이라는 사람이 크룩스에게 유리 기구를 비롯한 각종 기구를 만들어주었다. 이듬해까지 계속된 실험에서 크룩스는 음극선이 고체를 통과할 때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일련의 연구를 종합해서 크룩스는 1879년 왕립학회의 베이커 강연에서 자신이 관찰한 것을 발표했다. 이 때 그는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보통의 기체, 액체, 고체 상태와는 다른 물질의 '제 4 상태'라고 불렀다.

독일의 반응

음극선이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서 물질의 제 4 상태에 해당한다는 크룩스의 주장에 대해서 음극선을 에테르적인 파동으로 해석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가했다. 우선 1883년 킬 대학에 있던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는 글로우 방전에 관한 자신의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음극선이 정전기장에 의해서는 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헤르츠는 음극선이 빛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음극선이 자장에 의해서 휘는 것도 빛의 편광면이 자장에 의해서 회전되는 광자기회전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헤르츠의 이런 생각은 하인리히 비데만(Heinrich Wiedemann, 1826­1899), 골트슈타인 등과 같은 독일의 다른 과학자들도 받아들였던 생각이었다.

슈스터와 톰슨의 실험

한편 영국에서는 아서 슈스터(Arthur Schuster, 1851­1934)라는 과학자가 방전관 내에 있는 음으로 하전된 입자가 자장에 의해서 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을 행했는데, 이런 일련의 실험의 결과로서 1890년 그는 글로우 방전관 내에서 음으로 하전된 입자들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 즉 e/m를 측정해서 이것이 103과 106 e.m.u. g?1사이에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극대치인 106을 고려했다면 그는 1897년 J. J. 톰슨이 측정한 양인 전자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에 가까운 값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극대치를 고려하지 않고 분자의 이온에 해당하는 중간의 양만을 신뢰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은 음극선의 본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체에 있어서의 패러데이 전해질 법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슈스터의 이 실험은 방전현상을 연구하던 당시의 영국 과학자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J. J. 톰슨도 분명히 이 논문을 읽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가 슈스터의 영향으로 나중에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게 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톰슨이 이 실험을 하게 된 데에는 1895년의 X-선 발견과 그 이듬해의 방사선 발견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X-선 발견의 영향

뢴트겐의 발견이 알려진 직후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1912)가 1896년 1월 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다. 이에 따라 프랑스 학계에서 이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인 1896년 2월 24일에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실상 베크렐 집안은 3대째 대대로 자연사 박물관에서 우라늄 화합물을 포함한 여러 물질들의 형광 현상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견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톰슨의 전자 발견 역시 X-선에 대한 영국 과학자들의 반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이 음극선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은 당시 크룩스 이래로 영국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지니고 있던 입자적 해석의 전통을 계승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톰슨은 그 이전에 기체 방전, 개별 전하(discrete electric charge), 분할가능한 원자(divisible atom) 등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X-선 발견 이후 톰슨이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다시금 음극선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게 된 것이다.

톰슨(Joseph John Thomson)은 1856년 12월 18일 영국 맨체스터 근처 치덤 힐(Cheetham Hill)에서 태어났다. 1871년 맨체스터 대학의 오웬스 칼리지에 입학한 그는 1876년까지 그곳에서 물리학, 수학, 공학 등을 공부했다. 1875년 톰슨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한번 트리니티 칼리지에 도전해서 마침내 입학에 성공하게 된다. 1876년부터 1884년까지 그는 이 트리니티 칼리지를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 활동을 했다. 1879년 석사학위를 한 그는 곧바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상근 펠로(Resident Fellow)가 되었고, 1881년에는 조교수(Assistant Lecturer)가 되었다. 1884년 톰슨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과 레일리(Lord Rayleigh, John William Strutt, 1842?1919)에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겸 제 3대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 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기존의 수학 트라이퍼스(Mathematical Tripos) 이외에 자연과학 트라이퍼스(Natural Science Tripos)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케임브리지 실험과학의 전통을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특히 그는 '전자' 발견을 비롯한 음극선에 관한 연구를 한 공로로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톰슨은 케번디시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연구소에는 수많은 유능한 과학 인재들이 몰려들었는데, 1884년에서 1918년 그가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 길러 낸 과학자들 가운데 7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7명의 왕립학회 회원(Fellow of the Royal Society), 그리고 수십 명의 물리학 교수가 나왔다. 1918년 자신이 과거에 몸담고 있던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Master)이 되면서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직을 자신의 제자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1940년 8월 30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기 몇 달 전까지 톰슨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직을 아주 잘 수행했다.

톰슨은 젊은 시절부터 통일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는 기계적 철학과 유추 개념을 이용해서 물질, 전기, 에너지를 통일할 수 있는 에테르 개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화학 원소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원자 모형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시도의 일환으로 1882년 소용돌이(vortex) 원자 모형을 제안하기도 했다. 톰슨은 이 모형으로 화학원소의 주기율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화학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대한 그의 관심은 20세기 초에도 이어져 심지어는 그의 원자 모형을 반대하고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선택했던 닐스 보어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톰슨은 1884년부터 X-선 발견 소식이 있기 직전인 1895년까지 주로 기체 방전과 화학 작용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 분야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물질, 전기, 에테르 등에 대해 통일적인 이해를 갖기 위해서였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물질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전하(discrete electric charge)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뢴트겐에 의해 X-선이 발견된 이후인 1896년부터 톰슨은 X-선의 이온화 성질에 대해 연구했고, 이 과정에서 분할가능한 원자(divisible atom)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음극선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톰슨의 음극선에 관한 연구는 미립자 가설에 대한 톰슨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체 방전, 개별 전하, 분할가능한 원자 등에 대한 톰슨의 관심에서 시작된 연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6년 말부터 음극선의 성질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톰슨은 다음 해인 1897년 4월 30일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자신의 미립자 가설을 최초로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음극선이 수소 원자의 1/1000 정도의 질량을 지닌 음으로 하전된 미립자이며, 원자들은 바로 이 미립자들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입자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톰슨은 무엇보다도 1883년 헤르츠가 했던 실험, 즉 정전기 장에서 음극선이 휘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톰슨 역시 헤르츠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보았는데, 그 역시 처음에는 헤르츠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된 실험을 통해 정전기장 속에서 음극선이 휘지 않는 이유는 음극선에 의해 희박화된 기체에 주어지는 전도성(conductivity)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톰슨이 음극선관 내의 진공도를 더욱 높이자 이 전도도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마침내 헤르츠의 실험과는 달리 정전기장에서도 음극선이 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음극선이 전기장과 자기장에서 모두 휘는 것을 확인한 톰슨은 이 미립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전기장과 자기장 모두에서 다양한 기체를 넣고 측정했다. 다양한 기체를 넣고 측정한 결과 음극선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는 기체와 상관없이 거의 일정했다. 자기장을 이용해서 측정한 하전량과 질량의 비, 즉 e/m는 1.0?107에서 3.12?107 e.m.u g?1로서 평균 1.96?107 e.m.u g?1로 나타났으며, 전기장을 이용해서 측정한 값은 0.67?107에서 0.91?107 e.m.u. g?1로서 평균 0.78?107 e.m.u. g?1로 나타났다. (톰슨의 논문에는 m/e로 값이 나와 있으나 편의상 e/m으로 기술한다.) 이렇게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107 크기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톰슨은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입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일 수 있었다. (현대적인 e/m 값은 (1.7588028 ? 0.0000031)?107 e.m.u g?1이다.) 음극선에 관한 톰슨의 완전한 논문은 1897년 8월 7일 『필로소피컬 매거진』(Philosophical Magazine)에 제출되어 그해 10월에 출판되었다.

1897년 당시에 톰슨은 자신의 논문에서 단순히 미립자의 존재에 관한 언급만을 했을 뿐 음극선 입자 가설에 대해서는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톰슨이 음극선 입자 가설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1899년 이후의 일이며, 자기 자신은 평생 동안 '전자'(electron)라는 개념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톰슨이 말한 미립자가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전자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역사적 탐구를 필요로 한다.

1890년대에 라모(Joseph Larmor, 1857- 1942)와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 1853­1928)는 전자기학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소위 전자론(electron theory)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들의 논의에서 나오는 전자 개념은 전적으로 전자기학 내의 이론적인 수준에서 다루어진 개념이었지, 아직 구체적인 실험에 의해서 전자 그 자체의 존재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음극선 연구가 주로 자유 하전입자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면 분광학적 연구는 원자 내에서 움직이는 속박된 하전입자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온네스(Heike Kammerligh onnes, 1853- 1926)가 이끄는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일하던 제만(Pieter Zeeman, 1865­ 1943)은 속박된 하전입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게 되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즉 1896년 12월 분광학을 연구하던 제만은 자기장에서 나트륨 D-선들의 스펙트럼 선이 갈라지는 소위 제만 효과를 발견했던 것이다. 당시에 전자기학 분야의 대가이며 역시 네덜란드 과학자였던 로렌츠는 제만이 발견한 이 현상을 개별 원자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전자론으로 해석하여 역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계산했다. 제만의 실험과 로렌츠의 해석으로 계산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 즉 e/m는 107 e.m.u. g?1 크기로서 몇 달 뒤에 톰슨이 측정한 결과와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톰슨의 음극선 실험이 나오고 몇 달 뒤에 피츠제럴드(George Francis FitzGerald, 1851­1901)는 음극선이 자유 '전자' (electron)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이리하여 자유 전자와 속박된 전자는 서로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1896년 베크렐이 우라늄 방사선을 발견한 이래 퀴리 부부와 러더퍼드 등에 의해서 진행된 방사선에 관한 연구 역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원자 구성입자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1898년 이후 카우프만(Walter Kaufmann, 1871­1947)과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는 아주 정밀하게 톰슨이 측정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아주 정확히 측정하여 톰슨의 실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 나아가 카우프만은 1901년 전자의 속도가 빛의 속도의 1/3에서 1/30 정도로 빠르게 달릴 때 속도 증가에 따라 전자의 겉보기 질량이 증가하는 속도를 목격했는데, 이런 관측 결과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전자기적 세계관이 부상하고 결과적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는 촉발 역할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실험 결과가 나오면서 1899년 이후 현대적인 의미의 전자 개념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톰슨은 자신이 과학자로 활동하는 동안 '전자'(electron)라는 단어를 쓰기를 꺼려했다. 사실상 '전자' 발견 공로로 노벨상을 받을 때에도 그는 전자라는 말 대신에 '미립자'(corpuscle)라는 말을 사용했다. 톰슨은 소위 전자론에 대해 저항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이 발견한 미립자의 전기적 특성도 물질 입자와 에테르와의 상호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톰슨을 전자의 발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전자를 발견한 후보자들로는 톰슨 이외에도 실험적인 차원에서는 제만과 비헤르트를 들 수 있고, 이론적 차원에서는 전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로렌츠와 라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유일한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1897년 그가 제창한 미립자 이론이 원자 구조의 해명과 전자 개념의 출현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이 당시에 실험 과학의 중심지였던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이었다는 것도 톰슨이 전자 발견자로 기록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캐번디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톰슨의 학파가 과학계 여러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톰슨의 제자들이 톰슨이 발견한 전자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성공적으로 계승, 전파했다는 것도 전자 발견자로서 톰슨의 이미지가 부각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실제로 톰슨은 당시 어떤 다른 과학자들보다도 전자의 발견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홍보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톰슨이 전자가 실재함을 실험적으로 잘 보였기 때문에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 핵킹(Ian Hacking)은 과학적 실재론을 논의함에 있어서 실험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핵킹의 주장에 입각해서 보면 톰슨이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된 이유는 그가 전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적 현상을 정확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즉 전자를 분리해내고, 측정하고, 조작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전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톰슨이 전자를 발견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1900년 이후 전자의 속성은 계속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서서히 발견되어 나갔다. 타운전트(John Sealy Edward Townsend, 1868-1957)는 이온화 작용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전자의 움직임을 탐구해나갔으며, 1903년 해럴드 윌슨(Harold A. Wilson)---구름상자를 창안한 윌슨과는 다른 사람임---은 톰슨의 구름 방법을 개량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했다. 윌슨은 급작스런 팽창에 의해 이온화된 구름상자 속에서 형성되는 구름이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는 비와 전기장에 의해 떨어지는 비를 측정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했다. 마침내 1913년 밀리컨(Robert A. Millikan, 1868­1953)은 자신의 유명한 유적 실험을 통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아주 정확히 측정함으로써 분명한 의미에서 단일 전자의 실재가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REFERENCES

[1] J. J. Thomson, "Cathode Ray," Philos- ophical Magazine 44 (1897), pp. 293-316.
[2] Isobel Falconer, "Corpuscles, Electrons and Cathode Rays: J. J. Thomson and the 'Discovery of the Electron',"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20 (1987), pp. 241-276.
[3] Per F. Dahl, Flash of the Cathode Rays: A History of J. J. Thomson's Electron (Institute of Physics Publishing, Bristol,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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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거품 상자(bubble chamber)의 원조인 윌슨의 구름상자(cloud chamber), 혹은 안개상자(Nebelkammer)는 1930년대 이후 우주선(cosmic ray) 분야에서 원자구성입자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장치였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원자물리학 실험 분야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윌슨 자신은 원자물리와는 거리가 먼 기상학에서 활동했던 과학자였다. 70여년에 걸친 긴 학문 여정 속에서 윌슨은 항상 날씨와 관련된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원자물리학 분야에서 쓰이는 구름상자가 기상학을 연구하던 윌슨에 의해서 등장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윌슨이 성장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학문적 특성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그 어느 시대의 과학자들보다도 자연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데 열광적이었다. 빅토리아인들에게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것은 비단 과학자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탐험가들은 사막, 정글, 남극과 북극의 빙산 등을 탐험했으며, 화가들은 폭풍우, 산림, 절벽, 폭포 등을 화폭에서 재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기상학과 광학 분야에서 자연 현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모방실험(Mimetic experimentation)에 열중했다. 즉 그들은 푸른 하늘, 먼지, 구름, 안개, 비, 천둥, 번개 등의 기상학 현상을 실제로 실험실에서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런 모방 실험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자물리학 분야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형태의 윌슨의 구름상자는 1911년이 되서야 등장하게 되지만, 윌슨의 이 작업은 1890년대에 그의 기상학 분야에서 추구했던 모방 실험의 결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슨(Charles Thomson Rees Wilson, 1869-1959)은 15세에 맨체스터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의 오웬스 칼리지에 의대 학생으로 입학해서 1887년 18세의 나이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약 1년여 동안 철학, 라틴어, 그리스어를 공부하다가 케임브리지에서 장학금을 얻어 입학한 뒤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었다. 1888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윌슨은 1892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자연과학 분야 졸업 시험인 자연과학 트라이퍼스(Natural Science Tripos)를 마쳤다.

오웬스 칼리지 시절부터 윌슨은 방학을 이용해서 스코틀랜드 산악 지역을 탐험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려한 산하를 답사하면서 윌슨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소위 훔볼트식의 과학 연구 방식에 심취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사진기를 가지고 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구름에 대해서 사진을 찍곤 했다. 1927년 아서 컴프턴(Arthur Holly Compton, 1892-1962)과 함께 고에너지 광양자 산란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윌슨은 당시 북부 산악 지대에서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94년 9월 나는 벤 네비스(Ben Nevis) 정상에 있는 기상대에서 몇 주를 보냈다. 태양이 언덕 마루 주변의 구름 위에 비출 때 보였던 놀라운 광학 현상, 특히 태양 코로나 주변이나 언덕 마루에 드리워진 그림자 주변의 컬러 고리, 혹은 안개나 구름 위의 후광 등에 대한 관찰 등은 내 관심을 크게 자극했고, 나로 하여금 그것들을 실험실에서 흉내내도록 만들었다." 벤 네비스를 여행하는 동안 윌슨이 관찰했던 광학적, 전기적 현상은 그 뒤 윌슨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것은 그가 이 이후 평생 동안 하게 될 과학 연구 목표가 되었다. 1959년 윌슨이 죽기 직전까지 기상 광학과 대기 전기는 그의 핵심 연구 과제였던 것이다.

물리 실험조교와 튜터를 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젊은 윌슨은 케임브리지에서의 어려운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 위한 시간을 낼 수는 없었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요크셔의 브래드퍼드 그래머스쿨(Bradford Grammar School)에서 몇 달간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오히려 전보다도 자유시간을 갖기가 더 어려웠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그는 캐번디시연구소에 등록한 의학도를 위해 물리학을 가르치는 실험교수(demonstrator)로 일하면서 캐번디시연구소와 다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 때 캐번디시연구소에는 톰슨(J.J. Thomson, 1856-1940)의 지도 아래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 타운전트(John Sealy Edward Townsend, 1868-1957) 등 우수한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었고, 윌슨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이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윌슨 이전에도 몇몇 과학자들이 구름을 형성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에이트킨(John Aitken, 1839-1919)의 실험이 윌슨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이트킨은 윌슨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인으로서 벤 네비스에서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에이트킨은 구름 실험을 통해서 과포화 상태의 공기 중에서 먼지 입자가 물방울을 응결시키는 핵으로 작용한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그는 1888년 과포화 공기의 응결을 연구하기 해서 공기 중의 먼지 입자의 수를 세는 소위 먼지 상자(dust chamber)를 고안해내었는데, 에이트킨의 이 먼지 상자가 윌슨의 구름상자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기상학 현상에 강한 인상을 받고 돌아온 윌슨은 구름의 광학적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윌슨은 에이트킨과 유사한 팽창 장치를 이용해서 수증기를 응결시켜 자신이 벤 네비스에서 보았던 컬러 고리 모양의 광학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1895년 3월에는 먼지 없는 공기 속에서 수증기가 응결하는 최초의 실험장치를 만들었다. 이 실험에서 윌슨은 응결을 위한 팽창비(expansion rate)---여기서 팽창비는 팽창 후의 부피와 팽창 전의 부피의 상대적 비율로 정의된다--를 찾아내려고 노력했고, 초기 온도가 16.7 °C일 때 임계 팽창비가 1.258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보다 낮은 팽창비에서는 먼지가 없는 공기 중에서 응결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렇게 임계 팽창비를 정확하게 측정해가는 과정에서 곧이어 대륙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광선'들도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윌슨이 구름상자를 연구하던 캐번디시연구소에서는 1884년부터 J.J. 톰슨이 소장으로 이끌면서 물질의 근본 구성을 연구하는 분석적 연구 전통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이런 분석적 연구 전통은 훔볼트적이며 형태론적인 모방 실험 전통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윌슨이 기상학적 전통에서 개발한 실험 장치는 캐번디시의 분석적인 연구 전통에 속했던 과학자들이 사용하게 되었고, 결국 구름상자는 원자 세계를 연구하는 장치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훗날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 훌륭하게 사용되게 될 윌슨의 구름상자는 물질의 구성에 대해 연구하는 캐번디시연구소의 분석적 연구 전통과 자연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시키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방 실험의 전통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윌슨은 1888년부터 1892년까지 케임브리지 학생으로서, 그리고 1895년부터는 케번디시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물질의 구조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의 연구 스타일을 배웠다. 더구나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은 이온과 같은 기본적인 전하량을 가정해서 물질을 연구하던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이리하여 케임브리지의 이온 물리학 전통은 자연스럽게 윌슨의 구름상자 발명과 궤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1896년 새해 전세계 과학자들은 독일의 뢴트겐(Wilhelm Konrad Rntgen, 1845-1923)이 발견한 새로운 종류의 광선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뢴트겐이 찍은 반지를 낀 자기 처의 사진은 논문 발표와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소위 '광선'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1912)가 뢴트겐이 찍은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 회의에서 회람시켰고, 이런 일이 있은 뒤 얼마 안되어 1896년 3월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은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발견했다. 뢴트겐의 새로운 발견은 캐번디시연구소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음극선 연구에 다시 지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인 1897년 4월 30일 J. J. 톰슨은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음의 전하를 띤 원자 이하의 미립자, 즉 전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하게 된다.

뢴트겐의 새로운 광선 발견 소식에 접합 윌슨은 이 새로운 광선을 자신이 만든 구름상자에 쏘아보기를 바랬다. 윌슨은 1896년 톰슨의 조수인 에버릿(Ebenneezer Everett)에게 X-선 관을 빌려 이것을 자신의 구름상자에 투사했다. 이 실험에서 윌슨은 X-선에 의해 형성된 핵 주위에 응결이 생기는 팽창비가 1.25임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1896년 3월에 발견된 우라늄선도 X-선과 마찬가지로 팽창비 1.25에서 응결을 증가시키는 것을 발견했다. 우라늄선과 X-선에서 모두 같은 팽창비에서 짙은 안개가 생기는 것을 확인한 윌슨은 응결핵이 이 새로운 광선에 의해 생기는 이온들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98년까지의 실험에서 윌슨은 구름상자에서 나타나는 응결 현상을 몇몇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우선 먼지가 없는 공기에서 팽창비가 1.25 이하일 때는 응결이 생기지 않는다. 그 뒤 1.25에서 1.31 사이에는 분명한 형태의 빗방울이 생겨나다가 팽창비가 1.31일 때 빗방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마지막으로 팽창비가 1.37 이상일 때는 짙은 안개만이 형성된다. 또한 이 때를 즈음해서 윌슨은 응결핵의 전하가 차이가 나면 빗방울이 생기는 팽창비가 차이가 나는 것도 발견했다. 즉 두 배의 전하량을 가진 응결핵은 팽창비가 1.25에서 빗방울이 생기게 만드는 반면, 단위의 전하량을 지닌 응결핵은 팽창비가 1.31이 되야 빗방울이 생기게 된다.

1898년 말 윌슨은 그 동안의 실험을 정리해서 {철학연보}(Philosophical Transac- tions)에 하나의 긴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윌슨은 X-선, 우라늄선, 자외선, 그리고 그 외 다른 기작에 의해 기체 속에서 응결핵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윌슨은 이런 체계적인 실험이 자신이 본래 의도했던 연구 방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즉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체계적으로 실험을 하는 동안 윌슨의 장치는 대기 현상을 재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이온들의 성질을 연구하는 장치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훗날 윌슨의 구름상자가 원자구성입자를 연구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연구 방향의 변화는 과학 발전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상학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윌슨에게는 이것은 원래 자신이 목적한 바가 아니었다. 결국 윌슨은 구름상자가 천둥과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구름상자를 포기하고 이온화를 측정하는 전기적 장치인 검전기를 자신의 새로운 실험 장치로 채택하게 된다. 이후 윌슨의 주요 관심사는 대기 전기를 연구하는 것이 되었고, 1910년 12월까지는 그는 구름상자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연구 활동했다.

실제 비가 형성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비의 형성과정을 실제로 사진을 찍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윌슨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름과 같은 자연 현상을 사진으로 찍곤 했다. 1908년 윌슨은 당시에 워딩턴(A.M. Worthington)에 의해 출판된 『물튀김 연구』(A Study of Splashes)에 나오는 물방울과 물이 튀기는 모습에 대한 고속촬영 사진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윌슨은 다시금 구름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해서 그것을 촬영하고 싶어했다. 즉 사진기를 이용해서 음전하 입자와 양전하 입자가 서로 결합해서 구름이 형성되는 과정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결국 사진 기술을 이용해서 비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사하려는 윌슨의 의도로 말미암아 윌슨은 기상학에서 다시 이온 물리학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이런 연구 테마의 변화 과정에서 윌슨의 구름상자가 입자의 궤적을 촬영하는 장치로 이용되게 된 것이다.

1910년 12월 윌슨은 다시 자신의 구름상자 장치로 돌아왔다. 그는 이온화된 입자들을 이용해서 구름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했고, 이 과정에서 이온화된 입자들의 궤적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구름상자가 탄생되었다. 1911년 4월 윌슨은 알파 입자, 베타 입자, 감마선, X-선 등이 지나가는 모습에 대한 희미한 사진을 발표했다. 이어 다음 해인 1912년 윌슨은 이들 입자들의 궤적에 대한 아주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알파 입자가 물질과 충돌해서 휘는 모습을 잘 보여준 선명한 사진은 당시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가 예측했던 알파 입자 궤적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많은 과학자들에게 구름상자의 잠재적인 위력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다.

윌슨의 구름 상자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지게 된 데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과학 실험 장치를 제작, 판매해왔던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The Cambridge Scientific Instrument Company)의 역할도 컸다. 윌슨의 구름상자가 나온 바로 이듬해인 1913년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는 상업용 구름상자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이 이 장치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갔다. 1919년 러더퍼드는 톰슨의 후임으로 맨체스터에서 캐번디시 연구소로 옮겨왔는데, 거기에는 다케오 시미츠(Takeo Shimizu)라는 일본 학생이 있었다. 현재의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연구소에는 1920년에 찍은 당시의 학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학생 사진 가운데 나타나 있는 유일한 동양인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다케오 시미츠이다. 러더퍼드는 다케오 시미츠에게 윌슨의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알파 입자와 질소 원자핵의 충돌을 점검해 볼 것을 권유했고, 1921년 다케오 시미츠는 빠르고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제작했다. 다케오 시미츠는 단순조화운동으로 움직이는 피스톤으로 압축과 팽창을 하게 함으로써 적정 시간 내에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구름상자를 개선해주었다. 당시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는 시미츠가 자동 구름상자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도록 도와주었고, 그에게 로열티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타게오 시미츠는 가정 문제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 뒤 소식이 끊겨 향후의 구름상자의 개선 과정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다케오 시미츠가 일본으로 떠나 더 이상 구름상자를 개량하는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핵반응을 실험하는 작업은 1921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패트릭 블랙킷(Patrick M.S. Blackett, 1897-1974)의 몫이 되었다. 블랙킷은 다케오 시미츠의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단순 조화 운동으로 움직이는 피스톤을 포기하고 갑작스럽게 팽창시키는 윌슨의 원래 장치로 다시 복귀했다. 물론 문제는 갑작스럽게 팽창시키면서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자동화된 장치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블랙킷의 새로운 자동화된 구름상자는 약 10-15초에 한번씩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1924년 그는 이 실험 장치로 질소 원자가 붕괴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25년 이후 블랙킷은 계속 구름상자를 개선해 나갔다. 정확한 과포화 상태에서 알파 입자를 투사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블랙킷은 아주 복잡한 행정 경로를 지닌 피스톤 운동으로 유지되는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고안해야만 했다. 1920년대의 구름상자에는 아직 전자공학적 장치가 이용되지 않았으며, 피스톤의 운동과 사진의 셔터도 복잡한 기계 장치에 의해서 조절되었다. 이외에도 블랙킷은 두 개 경사 렌즈 카메라를 이용해서 가장 최적의 촬영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 막스 보른(Max Born)이 양자역학적인 충돌 이론을 제창한 이래로 양자물리학자들은 충돌 현상과 연관된 다양한 양자역학적 산란식을 유도해냈다. 하지만 당시 러더퍼드를 비롯한 중진 과학자들은 알파 입자의 산란과 같은 핵 현상에 양자역학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충돌 현상과 연관된 양자역학적 논의는 막스 보른, 디랙(Paul Adrien Maurice Dirac, 1902-1984),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 모트(Nevill Francis Mott, 1905-1996)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됐는데, 특히 모트는 다양한 충돌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양자역학적 논의를 전개했다. 그는 1929년 보스-아인슈타인 통계에 따르는 알파 입자들 사이의 충돌 과정을 양자역학적으로 기술하면서 새로운 양자론적 산란과 고전적인 러더퍼드 산란 사이의 비를 계산했는데, 그 비율은 산란각이 45˚일 때 최대값이 2로 나타났다. 양자역학적 산란과 고전적 산란의 비인 이 2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기만 하면 충돌 과정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1930년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과 블랙킷은 이 문제의 비율인 2를 실험적으로 확인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충돌 과정에서 양자역학적 기술이 유효함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 당시 채드윅은 이 과정을 자신이 러더퍼드와 오랫동안 함께 사용해오던 섬광계수기 방법을 통해 입증했으며, 블랙킷은 자신이 1920년대를 통해 개량을 거듭해오던 구름상자에 의한 사진 촬영에 의해 이 사실을 입증했다. 채드윅과 블랙킷의 이 두 실험은 양자역학의 유효성을 분명하게 입증했다는 것 이외에 이 실험들이 그들에게 있어서 전자 장치를 이용하지 않은 마지막 실험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우선 채드윅은 이 실험 이후 섬광계수기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전자공학적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1932년 새로운 중성자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931년부터 블랙킷도 자신의 구름상자에 전자공학적 장치를 도입했다. 케임브리지의 구름상자에 전자공학적 장치가 결합하게 되는 데에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주세페 오키알리니(Giuseppe P. S. Ochialini)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24년 한스 가이거(Hans Geiger, 1882-1945)와 발터 보테(Walther Bothe, 1891-1957)는 광양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위해 새로운 동시계수법에 의한 실험 장치를 고안했다. 동시계수법은 1928년 가이거와 뮐러가 개발한 더욱 민감한 계수기와 결합되면서 우주선 분야에서 핵심적인 장치로 부상되었다. 1930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브루노 로시(Bruno Rossi)는 2중 동시계수기보다 발달된 형태인 3중 동시계수기를 개발했는데, 그의 전자공학적 기법은 오키알리니에게 전수되었다. 1931년 오키알리니는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 블랙킷을 도와 전자공학적인 동시계수 장치를 구름상자와 결합시켰다. 이리하여 우주선이 구름상자에 도착하면 이 신호를 전자공학적 장치가 감지해서 정확한 시간에 구름상자를 팽창시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블랙킷과 오키알리니는 이 새로운 전자공학적으로 조절되는 새로운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칼 앤더슨(Carl David Anderson, 1905-1991)이 양전자를 확인한 직후에 바로 우주선에서 양전자의 존재와 디랙의 이론의 유효성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윌슨의 구름상자는 블랙킷의 개량과정을 거쳐 오키알리니의 전자공학적 기법이 결합되면서 우주선 및 고에너지 분야의 연구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장치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블랙킷은 구름상자의 개량과 우주선 분야에서의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원자 구성 입자의 연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수많은 캐번디시 연구자들이 이 장치를 활용했다. 하지만 정작 구름상자를 개발한 윌슨 자신은 캐번디시 연구소 동료들이 갔던 연구 방향을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이 날씨에 대한 연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기상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 이외에도 지리적인 요인도 함께 작용했다. 즉 그는 캐번디시연구소가 원자 물리학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캐번디시연구소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물리연구소(Solar Physics Laboratory)로 자신의 실험 장치를 옮겼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90세에 뇌우에 관한 논문을 마지막으로 쓰기까지 기상학 연구에 몰두했다.

참 고 문 헌

[1] C.T.R. Wilson, on the Condensation Nuclei produced in Gases by the Action of Rontgen Rays, Uranium Rays, Ultra-violet Light, and other Agents," Philosophical Transations 192 (1899), pp. 403-453.
[2] C.T.R. Wilson, on a Method of making Visible the Paths of Ionising Particle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85 (1911), pp. 285-288.
[3] C.T.R. Wilson, on an Expansion Apparatus for making Visible the Tracks of Ionising Particles in Gases and some Results obtained by its Us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87 (1912), pp.277-292.
[4] P.M.S. Blackett and G.P.S. Occhialini, "Some Photographs of the Tracks of Penetrating Radiatio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139 (1933), pp. 699-727.
[5] Peter Galison, Image and Logic: A Material Culture of Microphysic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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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왜 푸른가 하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해왔던 질문이었다. 높은 고도에서 천정(zenithal) 방향의 하늘은 분명하게 푸른빛을 띠며, 중간 고도에서도 대개의 경우 하늘은 푸른빛을 나타내곤 한다. 예로부터 하늘이 푸른 이유에 대한 다양한 유형의 설명이 있어 왔다. 우선 근대 과학의 초창기에 많은 과학자들은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해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늘이 푸른 이유가 빛의 산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19세기 말에 와서야 분명한 형태로 밝혀졌다. 1871년 영국의 존 윌리엄 스트럿, 즉 제 3대 레일리 경(John William Strutt, from 1881 the third Lord Rayleigh, 1843-1919)은 빛의 산란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처음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레일리의 산란 이론에 의하면, 하늘이 푸른 이유는 대기 중에서 빛이 빛의 파장의 약 1/10 이하의 미립자를 통과할 때 생기는 산란의 세기가 파장의 4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즉 태양 빛이 대기 중을 통과할 때 짧은 파장의 빛일수록 더 많이 산란되기 때문에 하늘이 푸른빛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푸른빛(파장의 길이 400 nm)의 산란율은 붉은빛(파장의 길이 640 nm)에 비해 약 6배 가량 크기 때문에 푸른빛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해질 무렵과 해뜰 무렵 하늘이 붉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해질 무렵과 해뜰 무렵에 태양 빛은 더욱 먼 거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푸른빛은 거의 다 산란되고, 지구에 직접 도달하는 빛은 붉은색이나 주황색을 띠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뉴턴의 초기 해석

서양에서 하늘이 푸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있어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장인이자 예술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대기 중의 미세하고 혼탁한 물체에 의해 대기 중에 푸른빛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현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런 설명 이상의 더 자세한 이론적인 논의는 전개하지 않았다.

1672년 경 뉴턴(Isaac Newton, 1642- 1727)은 그의 광학에 대한 글에서 하늘이 푸른 이유는 물방울 같이 투명한 물질로 이루어진 얇은 막에서 빛이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필름이 얇을 때는 검은 색으로 나타나다가, 두꺼워지면서 점점 푸른색을 띠게 되고, 계속 흰색, 노란색, 붉은색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뉴턴은 하늘에서 나타나는 푸른색을 자신의 소위 "뉴턴의 고리" (Newton's Ring)에 중앙에 생기는 검은 점에서 가장 가까운 푸른빛이라는 뜻에서 "첫번째 푸른색"(the blue of the first order)이라고 불렀다.

람베르트의 법칙과 괴테의 색깔이론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푸른 하늘에 대한 설명과는 별도로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서 빛이 대기 중에서 흡수되는 비율에 대한 정량적인 연구가 행해졌다. 1729년의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 부게르(Pierre Bouguer, 1698-1758)는 그의 {광학론} (Essai d'optique sur la gradation de la lumire)에서 균일한 투명 매질 속을 투과하는 빛의 세기는 매질의 경로 길이에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와는 독립적으로 1760년 스위스-독일 과학자인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 1728-1777)는 광도계(photometry)를 비롯한 몇몇 실험 장치를 이용해서 부게르의 결과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후 사람들은 빛이 대기 중에서 강도가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람베르트 법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하늘의 푸른 이유를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해 설명하려는 뉴턴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독일에서는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뉴턴의 생각에 대한 낭만적 반발도 나타났다. 뉴턴의 색깔 이론에 반발을 들었던 독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색깔이론(Farbenlehre)을 들 수 있다. 괴테는 하늘의 색을 근원현상(Urphnomen)으로 해석했는데, 그는 이 근원 현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현저한 혼동을 불러일으켜서 하늘에 보이는 푸른색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클라우지우스의 대기 상층부 기포설

19세기 중반 뉴턴의 입장을 받아들여 뉴턴의 설명에 대한 엄밀한 수학적 분석을 했던 사람은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47-1853)였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으로 유명한 그는 젊었을 때 하늘이 푸른 이유와 황혼 현상, 그리고 대기 중에서의 빛의 산란 및 흡수에 대한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을 전개했다. 그가 이와 같은 일을 했었다는 것은 과학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1847년부터 클라우지우스는 대기 중을 통과하면서 반사된 빛의 세기와 대기 중에서의 빛의 산란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초창기 논문에서도 훗날 열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분명한 연구 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분명한 물리적 사실들을 선택한 뒤 미시적 모형을 이용해서 현상에 적합한 수학적 방정식을 전개했다. 클라우지우스는 푸른 하늘을 비롯한 대기의 굴절과 반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뉴턴의 입장을 따랐지만, 하늘이 푸른 이유가 구형의 물방울에 의해 빛이 반사되어 생긴다고 하는 뉴턴과 존 허셜(John Herschel, 1792-1871)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아주 엄밀하고 긴 수학적 취급을 한 뒤 클라우지우스는 뉴턴과 허셜의 주장과는 달리 하늘이 푸른 이유는 대기 상층부에 안쪽에 공기가 가득 차 있는 빈 물방울 기포가 존재하고 이것에 반사되어 푸른빛을 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클라우지우스 이론에 대한 반론

클라우지우스의 주장대로 대기 상층부에 기포가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몇몇 영국 과학자들은 기상학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클라우지우스의 견해를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영국의 포브스(James David Forbes, 1809-1868)는 하늘이 푸른 이유는 가스 상태와 액체 상태 사이의 아주 '특별한' 상태에 의해 나타난다고 주장했었다. 1853년 영국의 필립스(Reuben Phillips)는 1844년의 헨리의 실험과 1846년 월러(Augustus Waller)의 관찰을 근거로 클라우지우스의 주장에 들어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1844년 헨리는 미국철학회에서 공기가 들어 있는 비누 방울에 대한 실험에 대해서 발표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서 비누 방울의 두께가 일정할 경우 내부 공기에 대한 압축력은 지름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이를 근거로 필립스는 지름이 아주 작은 물방울의 압축력은 대기압의 약 2-3 배가 되기 때문에 내부의 공기를 밀어내고, 이에 따라 대기 기포가 생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클라우지우스가 주장하는 대기 상층부의 물방울 기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1846년 영국 켄싱턴(Kensington)에서 활동하던 월러는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다양한 물방울의 모습에 대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현미경을 가지고 수증기, 농무(fog), 구름, 연무(mist), 우박 등에 기상현상에 대해서 정밀한 관찰을 했는데, 그의 실험에서도 수증기의 기포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월러의 관찰 결과에 따라 필립스는 대기 상층부에 기포가 존재한다는 클라우지우스의 주장은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브뤼케의 카멜레온과 푸른 하늘

1850년대부터 굴절과 반사에 의해 하늘이 푸른 현상을 설명하려는 뉴턴과 클라우지우스의 주장과는 다른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다. 그것은 미립자 산란에 의해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1853년 독일의 에른스트 브뤼케(Ernst Wilhelm von Brcke, 1819-1892)는 카멜레온의 색 변화에 대한 연구로부터 혼탁한 매질 속의 밝은 색소에서 산란되는 빛이 카멜레온의 색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런 현상을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는 데 활용했다. 원래 그는 동물 생리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 현상을 발견했지만, 물리학 분야의 독자를 의식해서 동물생리학 학술 잡지가 아닌 물리학 잡지에 이 발견 사실을 출간했다. 브뤼케의 주장과 필립스의 반론이 나온 뒤 클라우지우스는 이들 주장에 자신의 종합적인 의견을 개진한 뒤, 이후 그는 대기 상층부의 기포의 존재를 가정해서 푸른 하늘을 설명하려는 자신의 논의를 중단하게 된다.

한편 브뤼케는 독일의 유명한 생리학자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ller, 1801-1858)의 제자였다. 요하네스 뮐러는 1833년 베를린 대학에 자리잡은 뒤 그곳에서 생리학, 해부학, 동물 분류, 병리학 등의 연구 전통을 세운 학자였다. 브뤼케는 베를린 대학에서 헤르만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1821-1894), 뒤 부아-레몽(Emil Du Bois-Reymond, 1818- 1896), 카를 루트비히(Carl Ludwig, 1816- 1895) 등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들은 유기체를 물리화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기계론적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연구 프로그램에서 눈은 아주 좋은 연구 소재였다. 브뤼케는 광학 매질, 잔상, 척추동물 눈의 배경으로부터의 빛의 반사와 같은 주제를 연구해서 1847년 [인간 눈의 해부학적 기술]이라는 인간의 눈에 대한 표준적 저작을 남기기도 했다.

브뤼케의 영향을 받아 헤르만 헬름홀츠도 1851년부터 눈과 생리광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856년부터 {생리광학 편람} (Handbuch der physiologishcen Optik)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집필한 그는 사람이 눈이 푸른 까닭은 눈 속의 부유 입자들의 작용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실제로 서양의 어린아이의 눈은 어른에 비해 훨씬 강한 푸른빛을 띠게 되는데, 어린아이는 아직 황색에서 짙은 갈색에 이르는 멜라닌 색소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검은 배경의 눈 속에서 푸른빛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틴들 효과와 푸른 하늘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대기중의 미립자에 의한 빛의 산란 현상으로 하늘이 푸른 까닭을 설명하려는 구체적인 실험은 1868년 영국의 존 틴들(John Tyndall, 1820-1893)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틴들은 과학 분야의 연구는 물론 과학 교육 및 강연 활동과 같은 과학 대중화에도 많은 공헌을 한 과학자였다. 1853년 틴들은 런던의 왕립연구소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왕립연구소의 책임자인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와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패러데이의 뒤를 이어 1867년부터 1885년까지 왕립연구소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이곳에서 대중을 상대로 과학 실험과 강연을 하는 등 과학 연구 및 과학 대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당시 틴들은 몇몇 유기 물질에 강한 빛을 쪼일 때 푸른빛이 발생하는 것에 주목했다. 특히 그는 부틸질산염(butyl nitrite)에 약간의 염산을 혼합한 기체의 경우 이런 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남을 확인했다. 이 부틸질산염 증기는 약간의 염산과 혼합될 때 태양이나 강한 전기 아크등에 의해서 쪼여지면서 화학적 분해 작용을 일으키고 구름을 형성시키는데, 1-2분 뒤 이 구름들은 푸른빛을 발산시킨다. 틴들은 이 때 나오는 푸른빛은 이탈리아의 푸른 하늘과 견줄 만하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틴들은 이 유기 물질을 투과한 푸른빛이 완전 편광된 빛임을 확인했는데, 이것은 태양 빛이 완전 편광이라는 당시의 관찰 결과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이론에 의하면 태양 빛이 완전 편광되는 것은 브루스터 법칙(Brewster's law)에 의해서만 설명이 되었다. 1811년 스코틀랜드의 브루스터(David Brewster, 1781-1868)는 빛이 굴절 표면을 어떤 각도, 즉 편광 각도로 입사하면 반사된 빛은 완전 편광됨을 발견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편광 각도의 탄젠트가 접촉하고 있는 두 매질 사이의 굴절률의 비와 같다는 수학적 관계도 도출했다. 틴들은 자신의 실험에서 빛이 완전 편광된 것은 브루스터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태양 빛이 완전 편광인 것은 굴절과 반사에 의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틴들은 자신이 행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역사상 최초로 분명한 형태로 하늘이 푸른 현상을 실험실 상에서 재현하는 데 성공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대기중의 미립자에 의해 빛이 산란되는 현상을 '틴들 효과'(The Tyndall effect)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한 아크등 불을 먼지 입자에 쪼일 때, 빛이 산란되는 것을 연구한 뒤 틴들은 공기 중에 떠 있는 유기 물질을 파괴하기 위해 열을 사용하게 되었다. 열로 유기체를 파괴하는 실험 장치를 사용한 것이 계기가 되어 틴들은 1870년 이후 생명체의 자연발생설에 반대하면서 파스퇴르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레일리와 푸른 하늘에 대한 이론적 설명

틴들의 실험 결과가 발표된 직후 곧바로 하늘이 푸른 이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존 스트럿에 의해 제안되었다. 1871년 존 스트럿은 틴들 효과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이 논문에서 존 스트럿은 빛의 산란의 세기가 파장의 4제곱에 반비례함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뉴턴과 클라우지우스 이론은 푸른 하늘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의 대열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존 스트럿이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은 현재 우리가 하는 설명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현재의 우리처럼 맥스웰의 전자기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설명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전자기학을 설명할 때 많이 통용되던 고체의 탄성 이론을 이용해서 이 현상을 설명했던 것이다. 1881년 이제는 제 3대 레일리가 된 존 스트럿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수용해서 자신이 고체 탄성 이론에 의해 전개했던 이론을 맥스웰의 전자기학으로 대체했다.

1890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로렌츠(Ludvig Valentin Lorenz, 1829-1891)는 구형 입자에 의한 빛의 산란에 대한 논문을 덴마크어로 발표했다. 로렌츠도 단일한 구형 입자에 의해 산란된 빛의 세기가 파장의 4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1899년 레일리가 유도한 대기 중에서의 빛의 투과도도 계산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레일리나 네덜란드의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 1853-1928)와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으며, 레일리도 덴마크의 로렌츠의 산란 이론을 모른 채로 1899년의 산란 이론을 전개했다.

후기 레일리 이론

초기의 레일리 설명에 의하면 빛이 푸른 이유는 대기중의 먼지와 같은 작은 부유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즉 초기 레일리의 설명에는 부유 물질이 없으면 대기는 푸른빛을 띠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부유 물질이 없는 청명한 하늘도 푸를 것인가? 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역시 레일리에 의해 주어졌다. 1899년 레일리는 먼지, 수증기 등 부유 물질이 없어도 산소와 질소의 대기 분자들에 의한 산란에 의해서도 하늘이 푸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즉 레일리의 후기 이론에 의하면 아주 깨끗하고 맑은 대기도 빛의 산란에 의해서 푸른 하늘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더욱이 레일리의 후기 이론은 초기 이론과는 달리 현대적인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레일리는 자신의 후기 산란 이론에서 부유 물질이 없는 공기 분자들만으로 대기의 투명도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1906년 이후 부유 물질이 없는 대기 중에서도 푸른 하늘을 나타낼 수 있다는 레일리가 후기에 주장한 내용을 입증하는 몇몇 관측 자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1906-7년 미국 스미스니언 연구소는 워싱턴과 윌슨 산에서 다양한 파장에 걸쳐서 대기의 투명도에 대해 관측했다. 결국 과학자들은 해수면뿐만이 아니라 아주 높은 고도에서 측정한 관측을 통해서 부유 물질이 없을 때도 레일리 산란 이론에서 유도되는 이론적 예측이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푸른 하늘의 실험실 상의 재현

푸른 하늘을 실험실 상에서 재현하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에 만연했던 모방 실험(Mimetic experimentation)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기상학과 광학에서 자연 현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실험을 많이 행했다. 기상학에서의 모방 실험이란, 예를 들어 먼지, 구름, 안개, 비, 천둥 번개 등을 실제로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것으로, 소립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윌슨(Charles Thomson Rees Wilson, 1869-1959)의 구름 상자(cloud chamber)도 이런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윌슨의 구름 상자는 1911년이 되어서야 개발됐지만, 윌슨의 이 연구는 이미 1890년대에 이루어진 그의 기상학 분야에서의 모방 실험의 결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푸른 하늘을 실험실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실험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프랑스의 카바네(J. Cabannes), 폴란드의 마리안 스몰루초프스키(Marian Smoluchowski, 1872 -1917), 그리고 존 스트럿(John William Strutt)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죽은 1919년부터 제4대 레일리가 되는 로버트 스트럿(Robert John Strutt, 1875-1947)에 의해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다. 1870년대에 틴들도 실험실에서 푸른 하늘을 재현했지만, 그의 실험은 미세한 부유 물질이 존재해서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재현한 것이었다. 부유 물질이 존재하지 않은 공기에서도 산소와 질소 분자에 의한 산란에 의해서도 하늘이 푸른 것을 실험실 상에서 재현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와서야 분명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915년 카바네는 사진 광도계 방법을 사용해서 레일리의 식을 정량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해서 레일리 식에 해당하는 몇몇 결과를 얻었다. 1916년에는 스몰루초프스키 역시 푸른 하늘에 관한 레일리 이론을 확증하는 몇몇 실험 결과를 얻었다. 미세한 부유 물질이 없는 순수한 공기에 빛이 투과해서 푸른색을 나타낸다는 것을 실험실에서 가장 확실하게 재현한 사람은 로버트 스트럿이었다. 로버트 스트럿은 진공관 내의 기체 방전의 잔광(afterglow), 밤하늘에 나타나는 야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학자였다. 이런 연구와 연관해서 스트럿은 1918년부터 푸른 하늘을 복원하는 일련의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우선 그는 항공기의 움직임을 추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탐조등 빛에서 아주 청명한 밤과 지상에서 높은 고도에서도 빔의 궤적에 따라 매우 여리지만 분명한 푸른빛의 산란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주목했다. 틴들의 실험에서는 먼지가 없는 공기에서 빛이 산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먼지가 없는 공기에서는 강력한 빔의 궤적이 아주 어두워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로버트 스트럿은 용기 벽에서 빛이 퍼져나가는 것을 최대한 막고, 가능하면 가장 어두운 배경에서 공기를 통과한 빛을 관찰하도록 만들었다. 맑은 날의 조도는 보름달의 밝기에 비해 약 550,000배가 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로버트 스트럿은 약 5 마일로 추정되는 대기의 높이의 550,000분의 1에 해당하는 0.58 인치 두께로 실험실의 공기 층을 축소시키고, 조도를 보름달의 밝기로 유지해 실험을 했다. 이런 일련의 실험 조건을 만족시킨 뒤 마침내 스트럿은 먼지가 없는 공기로 가득 찬 실험실 내에서 푸른 하늘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스트럿은 이어 계속된 실험에서 빛의 산란도 조사했는데, 공기를 통과하고 나온 빛이 완전 편광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완전 편광에서 벗어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산소나 질소 분자가 완전히 구형이 아니라 방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1920년대 초에 이르러 과학자들이 하늘이 푸른 현상을 실험실에서 완전히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하늘이 푸른 이유가 레일리 산란에 설명된다고 믿게 되었다. 결국 푸른 하늘에 대한 과학적 설명 및 실험실 상에서의 재현은 레일리 부자의 대를 이은 연구를 통해 이룩된 업적이었다.

참 고 문 헌

[1] John Tyndall, Philsophical Magazine 37, 384-394 (1869).
[2] J. W. Strutt, Philsophical Magazine 41,107-120; 274-279 (1870).
[3] Lord Rayleigh, Philsophical Magazine 47, 375-384 (1899).
[4] R. J. Strutt,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94, 453-45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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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순의 과학산책]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원소는?

원자번호는 19세기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제안한 이래로 원소를 구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는 원자번호가 1이며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은 원자번호가 92번이다. 원소의 발견은 과학자들 사이에 아주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어 많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 원소 주가율표와 이를 만든 러시아 화학자 멘델레예프.
처음에 멘델레예프는 원자량에 따라 원소를 구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1902년 러더퍼드와 소디가 원소 변환을 발견하고 새로운 방사성 물질이 출현하면서 과학자들이 저마다 자신들이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혼선이 빚어졌다. 다행히도 1913년 방사성 원소와 그의 주기율 법칙과의 관계를 연구하던 소디가 핵의 전하량은 같지만 원자량이 다른 ‘동위원소’ 개념을 제기하고, 뒤이어 헨리 모즐리가 X-선 분광학을 이용하여 원자번호를 원자량이 아닌 핵의 전하량에 의해 재정의하면서 논란은 점차 해소되었다.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원소도 속속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는 원자탄 개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1940년 5월 버클리대학의 에드윈 맥밀런과 필립 에이블슨은 원자번호 93번인 넵튜늄을 발견했으며, 이어 1941년 2월 버클리의 젊은 화학자 글렌 시보그는 세그레와 함께 원자번호 94번인 플루토늄을 발견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과 함께 현재 중요한 핵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자번호가 94번 이상인 초우라늄도 계속 발견되어 미국, 퀴리, 버클리, 캘리포니아, 아인슈타인, 페르미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원소들이 주기율표를 채워나갔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독일, 구소련의 과학자들은 101번 멘델레븀(Md), 102번 노벨륨(No), 103번 로렌슘(Lr), 104번 러더퍼듐(Rf), 105번 더브늄(Db), 106번 시보규ㅁ(Sg) 107번 보어륨(Bh), 108번 하슘(Hs), 109번 마이트너륨(Mt) 등 원자번호 100번 이상의 원소들을 계속 합성해 내었다.

초우라늄 원소들은 그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많은 논쟁이 야기되기도 했다.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면 새로운 원소의 발견자가 그 원소의 이름을 정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1994년 국제 순수 및 응용 화학연맹(IUPAC:International Union of Pure and Applied Chemistry)이 원자번호 106번의 명칭을 시보규ㅁ으로 정하는 것을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미국화학회와 IUPAC는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하다가 1997년 중반에야 논란이 해소되었다.

과학자들은 110번이 넘는 새로운 원소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1994년 다름슈타트 중이온연구소의 연구팀이 원자번호 110번과 111번 원소를 발견한 것이다. 이어 1996년 이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납과 아연을 충돌시켜 원자번호 112번의 원소도 합성해냈다.

다른 초우라늄 원소와 마찬가지로 원자번호 112번 원소도 생성 즉시 순식간에 붕괴하지만, 이것이 발견됨으로써 과학자들은 원자번호 114번의 새로운 원소도 합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론상 원자번호 114번부터 이어지는 주기율표상의 원소들은 ‘안정된 원소군’에 해당된다. 즉 이 부분의 원소들은 상대적으로 긴 수명을 지녀서 과학자들이 물질의 조성과 성질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99년 러시아의 듀브나 핵연구소 연구원들은 플루토늄과 칼슘 이온을 충돌시켜 양성자가 114개인 원자번호 114번의 원자를 만들어냈다. 이보다 한달 앞서서 미국 로렌스 버클리연구소의 연구팀들은 납과 크립톤 이온을 충돌시켜 원자번호 116번과 118번의 물질의 존재도 확인했다. 아직 원자번호 113번, 115번, 117번의 존재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과학자들은 최고 150번까지 원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미래의 주기율표는 서울의 지하철 노선만큼이나 복잡해질 것 같다.

(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 )

시간이 멈춘 곳… 神의 언어를 듣다
카트만두 북쪽 170㎞ 거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눈 덮인 웅장한 풍광에 경탄


랑탕히말은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제1의 트래킹(tracking) 코스로, 엄청난 규모의 숲과 동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코스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문 등반가들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 8000m급 고봉을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대신 입구까지 도로가 연결되는 등 인공적 요소도 많다. 114달러만 주면 경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즘 세상에 험한 길을 스스로 걷고자 선택하는 이들로선 그런 인공적 요소가 달갑지는 않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170㎞ 거리(절반 이상이 비포장 험로라서 자동차로 9시간 걸린다)에 있는 랑탕히말은 1949년 영국인 탐험대가 답사하기 전까지 지도상에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이곳을 탐험했던 영국인 틸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카트만두에서 새벽에 떠나 둔체(해발 1950m)를 지난 뒤 저녁 무렵 계곡 입구인 샤부르벤시(1460m)에 도착, 숙박을 한 뒤 트래킹은 시작된다. 1월 10일 충주시 청소년수련원 주최로 구성된 히말라야 오지학교탐사대(대장 김영식 충주 칠금중학교 교사)와 함께 찾았다. 교사와 화가, 시인, 농민 등으로 구성된 팀이다. 우리는 트래킹과 함께 학교를 방문해 네팔의 교육문화를 체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0일간 20명의 대원은 랑탕히말의 핵심 구간 60㎞를 도보로 답사했다.

선인장~전나무 숲까지 다양한 식물

전반부는 출발지인 샤부르벤시에서 림체(2440m)-랑탕마을(3300m)-캉진곰파(3800m)-캉진리(4550m)에 이르는 계곡 트래킹 코스. 되짚어 나오는 구간까지 30㎞에 불과한 거리지만 3일간 고도를 3000m 이상 올려야 하기 때문에 고소 적응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물길을 거슬러 계곡 상류로 올라가는 동안 북쪽으로 이름 없는(?) 4000m급 봉우리들이 있고 그 뒤로 랑탕Ⅱ(6561m), 랑탕리룽(7234m) 등 험준한 봉우리가 만년설로 단장한 채 우뚝 솟아 있다.

아열대 기후에 속한 이곳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선인장부터 침엽수인 전나무 숲까지 시시각각 식물군이 변한다. 트래킹 중 만나는 인종도 다양하다. 카트만두 부근에선 네왈리족, 둔체에선 타망족,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리와 많이 닮은 티베트족, 고산 등반의 길잡이로 잘 알려진 셰르파족의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네팔은 크게 36부족, 세분하면 7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다민족 국가다. 힌두교를 국교로 삼고 있으면서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 다양한 문화를 선보인다.

해발 2500m를 넘어서면 고산증(high altitude sickness)이 트래커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대부분 가벼운 두통으로 끝나지만 극심한 구토와 복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도를 1000m 올린 뒤엔 한나절 정도 쉬면서 적응기를 가지면 대부분 문제가 해소된다. 체온을 잘 관리하고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것이 도움이 된다.
캉진곰파(‘곰파’는 절을 의미한다)에 이르는 계곡에 과거 영화로웠던 티베트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판에 불경이나 문양을 새겨 탑으로 쌓은 마니차가 길 한가운데 중앙분리대처럼 길게 이어진다. 네팔인은 마니차를 만나면 반드시 왼쪽으로 지나간다. 돌아올 때 반대편을 거치면 불경을 한 번 읽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언제 새겨진 것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마니차의 행렬은 우리의 팔만대장경에 비견할 정도로 길다. 길 가는 동안에도 스스로를 깨우치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트래커들은 계곡을 오른다.

캉진곰파에서 트래커들은 각자의 일정과 고소 적응능력에 따라 3가지 코스를 택할 수 있다. 마을 뒤편 빙하를 감상하는 것이 손쉽고 해발 4550m 캉진리 산에 올라 랑탕히말의 웅장한 풍광을 감상할 수도 있다. 한나절 정도 투자하여 설산이 양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랑시사 마을의 커르커(야크 방목장)까지 다녀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반군들도 관광객은 건드리지 않아

랑탕히말 트래킹 코스는 후반부가 극적이다. 랑탕계곡의 오르막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대나무가 많은 뱀부마을(1960m)에서 남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택해 코사인 쿤드(호수)에 이르는 구간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잿빛 털을 가진 네팔원숭이 무리가 노니는 아열대숲을 지나 겨울에도 푸른 대나무 숲을 만난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무렵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갑작스럽게, 신비로운 툴루샤부르 마을(2210m)이 나타난다. 40~60도 경사의 산비탈을 해부라도 하듯 겹겹이 다락밭으로 만든 사면을 지나면 칼 같은 능선 위에 마을이 있다. 지금은 싸구려 페인트로 칠한 롯지들이 볼썽사납게 섞여 있지만 과거 티베트불교의 중심지답게 고색창연한 문양의 창틀로 가득한 고가(古家)가 트래커의 숨결에 평온을 불어넣는다.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히말라야 고봉의 옆구리로 붉게 스미는 저녁노을과 까마득한 계곡의 전망을 보여주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정화된다.

툴루샤부르에 이르면 최근 네팔 정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공산반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카트만두의 신문들은 이틀이 멀다하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교전 소식을 전한다. 가끔 별도의 입장료(?)를 요구하는 것 외에 반군은 절대로 관광객을 건드리지 않는다. 관광객이 줄면 그만큼 네팔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심 그들을 만나길 기대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반군 때문에 최근 네팔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현저히 줄고 있다. 경제난의 여파로 석유와 설탕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카트만두 시내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 행렬을 자주 볼 수 있다. 2001년, 당시 국왕과 친형 가족을 몰살시키고 정권을 잡은 현 갸넨드라 국왕은 국민의 존경도, 정치권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잡은 권력조차 카트만두를 벗어나 트래킹 코스에 오르면 한낱 부질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툴루샤부르에서 싱곰파(3350m)에 이르는 구간은 3시간30분 정도의 짧은 코스. 그 중 1.5㎞ 구간은 아득한 감동을 연출한다. 100~300년생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난 숲길을 걷다가 지친 듯 멈추어보자. 섬광처럼 한 줄 가슴을 스치고 지나는 시 구절이 없다면 더 올라가도 소용이 없다. 마침 눈까지 내려 마음 저 안쪽에 남아 있던 흉터마저 가려주었다.

고사인쿤드(4380m)는 힌두교 성지. 해발 4300m 지점에 고사인쿤드를 비롯해 번뇌의 숫자와 일치하는 108개의 호수가 있다.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를 불교의 상징으로 알고 있지만 힌두교에선 부처를 수많은 힌두의 신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으니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싱곰파에서 고사인쿤드까지는 하루 트래킹 코스. 맑은 날 안나푸르나(8091m), 마나슬루(8163m), 거네스(7429m) 등 히말라야의 고산준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지만 1월 중순엔 무릎까지 차오르는 폭설이 발목을 잡았다. 남녀의 성기인 링거와 요니를 모신 사당만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결국 중간 기착지인 라우레미나야크(3930m)를 조금 지나 4000m 지역까지 갔다가 철수해야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눈보라 속에서 들려온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다시 싱곰파로 돌아온 일행은 ‘부정 탄 사람’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바빴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신은 모든 것을 용서한 듯 아침 하산길에는 더없이 맑은 풍경을 허락했다. 네팔 트래킹 정보(www.nepaltour.pe.kr)

글·사진= 장창락 자유기고가

trek 6. 필림 - 뎅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티베트 마을로 들어서다

2007. 10. 18(목)

필림의 현지 이름은 필론(Philön) 또는 도당(Dodang)이라고 한다. 좀솜의 옛 이름은 종삼(Dzongsam)이다. 네팔의 지명은 대부분 표기가 다른 몇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이번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를 보고 비로소 그 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인도를 식민지배했던 영국은 1808년 측량조사국(the Survey of India)을 세워 전 인도대륙의 지도를 만드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다른 열강을 제치고 제국을 더욱 확장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1830년까지 조사는 네팔과 티베트 국경까지 이루어졌는데 에베레스트 산의 측량과 산 이름의 명명도 이 때 이루어졌다. 그리고 네팔과 티베트를 포함한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그 지도를 바탕으로 현재의 네팔 트레킹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명이 다른 것은 그런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무스탕 지역의 길링(Ghiling)도 원래는 겔링(Geling)이고 이곳 마나슬루의 라르키아(Larkya)도 원래 이름은 바북(Babuk)이다. 새로운 이름이 전혀 다른 뜻은 아니지만 원래의 이름과는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마나슬루 히말을 최초로 본 유럽인은 영국의 유명한 등반가이자 탐험가인 빌 틸먼(W. Tilman) 일행이다. 그들은(동료 3명과 유명한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두 번에 걸쳐 랑탕 지역의 가네시 히말과  랑탕 계곡을 거쳐 강자 라로 넘어 주갈 히말까지 탐사했다. 랑시샤 카르카에서 주갈로 넘어 오는 능선 이름은 그래서 틸먼즈 콜(Tilman's Col)이다. 가네시 히말에서 그는 팔도르(Paldor, 5996m)를 올랐다.

이듬해인 1950년 봄 그는 <네팔-영국 안나푸르나 원정대> 대장으로  안나푸르나 4봉 등정을 위해 마낭 지역으로 간다. 당시는 포카라까지 가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카트만두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트리술리 바자르-다딩베시-아루갓바자르-칸촉-고르카-베시사하르-마낭으로 갔다. 칸촉의 능선에서 그들은 처음 하늘 높이 걸려 있는 마나슬루 히말의 웅자를 보았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북쪽으로 거의 30마일 떨어져 있는 히말출리(7893m)를 똑똑히 보았다... 쌍안경과 망원경으로 보니 히말출리의 번쩍이는 꼭대기가 잘 보였다. 비록 30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대부분의 산들이 쉽게 등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저 산이 과연 히말출리가 맞는가 의심했다. 히말출리 바로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설봉을 지닌 보우다(Baudha, 6672m)가 우리가 보기엔 더 오르기 쉬운 능선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우리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지나가며 바라보기만 했다. 몇 달 후 우리가 오를 수 있는 봉우리를 찾을 때 로버츠(J.O.M. Roberts 소령)와 나는 그것을 그냥 지나친 것을 후회했다. 우리는 아무도 보우다가 보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지 아니면 오르지 못할 것 같은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중 -Nepal Himalaya, p. 815)

네팔 히말라야를 논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텐징 노르가이나 힐러리 그리고 메스너 같은 등반가는 일단 논외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네팔 히말라야는 등반이 아닌 문화적 접근으로 네팔 히말라야 학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다. 일본의 가와구찌 스님, 영국의 산악인 빌 틸먼, 이탈리아의 티베트 학자 지우제페 투치, 영국의 티베트 학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이 그들이다.

학자적 분위기와 다른 등반가인 틸먼이 다른 유명한 등반가들을 제치고 이 그룹에 들어간 것은 그가 최초로 랑탕 지역을 방문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랑탕과 안나푸르나, 그리고 에베레스트 지역의 원정을 통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세한 탐사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책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은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 1866-1945) 스님은 당시 일본의 승려 사회에 염증을 느껴 티베트에 들어가서 참된 불법을 구하고 불경을 구해 오겠다고 결심하고, 1897년 6월 하순 일본 고베 항을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르질링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찬드라 다스나 티베트인들로부터 1년 5개월간 티베트어를 배운 뒤 1899년 1월 중국 승려로 칭하고 네팔에 잠입, 카트만두에 머무르면서 무스탕을 경유해 티베트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티베트와 중국은 모든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라사 여행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스탕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북쪽의 오지를 통해 카일라스 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그 해 3월 초순 카트만두를 떠나 포카라를 거쳐 뚝체에서 한 동안 머무르면서 잡입할 경로를 모색했다. 이곳에서 무스탕 짜랑(Tsarang)의 한 승려와 교분을 맺은 그는 그 인연으로 묵티나트를 거쳐 무스탕 계곡을 따라 올라가 짜랑의 곰빠에서 거의 1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서북의 오지 돌포로 우회하여 티베트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카일라스를 순례하고 라사까지 여행한 뒤 라사의 세라 사원에서 1년 넘게 머무르면서 공부하다가, 시킴 쪽의 국경을 넘어 다르질링으로 내려와 캘커타로 갔다. 그는 네팔과 티베트에 들어간 최초의 일본인으로 이후 일본 티베트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티베트 여행기>(초판 1907년)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이 여행 과정을 소상히 기술했다. 좀솜의 무스탕 박물관에는 가와구치 스님의 사진과 무스탕 여정이 전시되어 있고 마르파에는 기념관이 있다.

이탈리아 티베트 학자 투치 교수가 쓴 는 무스탕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네팔 전반에 관한 책이다. 1952년 9월  15일 카트만두를 걸어서 출발한 원정대는 고르카, 포카라, 고라빠니를 거쳐 10월 20일 까그베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짧은 무스탕 방문을 마치고 베니에서 룸비니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포카라로 되돌아와 비행기로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65일 간의 원정이었다. 그의 책에는 무스탕 부분을 포함하여 네팔 여러 지방의 문화, 특색, 풍속을 전문가의 안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 학부(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데이비드 스넬그로브(David L. Snellgrove) 교수는 1956년에 돌포에서 카트만두까지 네팔 서부에서 북부를 횡단했는데, 돌포에서 까그베니로 내려와 깔리 간다키 강을 따라 축상에서 뚝체 근처까지 오르내린 다음 다시 올라가 무스탕의 로게까르와 짜랑을 돌아보고 로만탕은 직접 방문하지 않은 채 묵티나트로 갔다.

그는 묵티나트에서 토롱 라를 넘어 마낭의 나르 계곡을 방문 한 후 다라빠니에서 빔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라르키아 라를 넘어 부리 간다키 계곡으로 내려왔다(지금의 안나푸르나 라운딩과 마나슬루 트레킹 코스의 역방향이다). 그는 이 여행에 대해 <히말라야 순례(Himalaya Pilgrimage)>라는 책을 썼다.

1964년 봄에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Michel Peissel)이 무스탕에 들어가 몇 달 간 머무르면서 무스탕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무스탕, 잃어버린 티베트 왕국(Mustang-A Lost Tibetan Kingdom)>을 썼는데, 지금까지 나온 무스탕에 관련 문헌 중 가장 탁월한 책이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사람은 스넬그로브이다. 그는 최초로 돌포지역을 탐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고 있는 쿠탕(마나슬루) 지역을 서양인으로는 처음 답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 <히말라야 순례>(초판 1958년) 후반부는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1981년 보스톤 샴발라출판사에서 발행한 <히말라야 순례> 뒤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학자의 예리한 안목과 경험많은 여행자의 따뜻함을 지닌 스넬그로브는 수 백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네팔 오지 마을의 삶의 방식을 재창조했다. 그와 그의 셰르파 가이드는 인도 국경에 가까운 저지대 평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티베트어를 쓰는 오지인 돌포의 고산 고개를 넘고 무스탕을 지나 마나슬루 지역을 거쳐 카트만두에 내려 오기까지  7개월 동안 1600km 이상을 여행했다. 여행 중 그들은 승려들과 라마들, 야크지기와 마을 주민들, 사원과 사당 그리고 불교 사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비밀 의식과 수련을 목격했다. 사원은 이 외진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이다. 스넬그로브 교수의 불교와 히말라야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에 이 책은 다양한 여행자들은 물론 학자들과 학생들에게 매우 가치있는 자료이다. 데이비드 스넬그로브는 런던대학의 동양-아프리카 학부의 명예교수이며 영국 학술원 회원이다. 그는 두 권의 인도-티베트 불교를 포함하여 많은 티베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항상 아쉬운 것은 이런 고전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투치의 , 스넬그로브의 <Himalaya Pilgrimage>, 틸먼의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 페셀의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이 네 권은 네팔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볼 만한 책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기초자료다.

위의 책들은  1967년에 나온 페셀의 책을 제외하고 모두 초판이 1950년대에 나왔다. 한 나라 학문의 성숙도는 이런 기초자료의 번역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그 속에 든 정신을 들여다 보면 빈 깡통인 것이 많다. 그저 돈 버는 방법을 쓴 책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그 런 책을 보면 부자가 된다고 믿는 바보들이 의외로 많다).

팔리지 않는 책은 출판사에서 내기 어렵다. 출판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 <대우학술총서>처럼 기업에서 후원해 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권 당 번역비와 출판비로 300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히말라야 원정에 기꺼이 수 억씩 부담하는 기업이 있는데 한 번쯤은 원정대 후원 대신 이런 책 번역에 후원한다면 한꺼번에 네 권을 다 번역할 수 있고, 그 가치는 조금 과장한다면 히말라야 원정 100번 이상의 가치가 있다.

히말라야 관련 글을 쓰는 사람마다 참고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옛 영어책을  이리저리 들춰야 하는 수고를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네팔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지역이라면 모르겠지만 해마다 1만 명 이상의 여행자와 수 십 팀의 원정대가 찾는 곳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와는 다른 곳이다.

물론 이런 책들의 번역을 위해서는 단순히 영어만 잘 해서는 부족하다. 네팔과 히말라야 그리고 티베트 문화와 언어, 역사  등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어에 대한 전문가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은 계속 인문학의 변방국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  *

어제 분실사고가 생겼다. 백산 스님의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카고백 속에 든 작은 손가방이 열려 있고 그 안에 넣어 둔 지갑이 통째 사라진 것이다. 백산 스님의 텐트는 제일 후미진 곳에 있었다. 누군가 텐트에 들어 간 모양인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지인은 아닐 것 같고 가능성은 포터들이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상황에서 감히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단단히 마음 먹고 한 일이다.

지갑에는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 그리고 한국돈 10만원밖에 없으니 큰 피해는 아니다. 신용카드는 신고하면 보름 전까지 보상이 가능하고 운전면허증은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사나흘 후면 도착하는 남룽이나 사마가온은큰 마을이라 전화가 있을 것이니 거기서 카드를 정지시키면 된다고 위로했다. 여권을 모두 삼툭에게 맡긴 것이 다행이다.

여권은 처음부터 맡길려고 한 것이 아니라 트레킹 허가를 위해 맡겨 둔 것이다. 원래는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우연히 그날이 네팔 축제일이라 관공서가 휴일이었다. 다음 날은 토요일(우리의 일요일에 해당)이라 역시 휴무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정대로 먼저 출발하고 셰르파 보조인 겔루 셰르파가 트레킹 2일째인 10월 14일 트레킹 허가를 받아 우리를 뒤따라왔다. 겔루는 어제 오후 우리와 합류했다.

네팔 사람들은 비교적 착하다. 그러나 100% 믿으면 안된다. 그래서 여권과 비행기표, 돈이든 지갑 등은 항상 몸에 달고 다녀야 한다. 트레킹을 떠날 때 여권과 항공권은 트레킹 여행사에 맡겨 두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개별 여행자는 그럴 수가 없다. 작은 어깨걸이 가방이 그래서 필요하다. 나는 그 가방은 밤에 잘 때만 벗어놓을 뿐 화장실 갈 때도 가지고 간다. 그것은 트레킹 전후 카트만두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는 카메라 가방까지 두 개나 되어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래도 분실할 경우의 난감함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감수한다.

보통 때처럼 7시에 출발했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둡고 쌀쌀하다. 길은 이미 강에서 멀리 올라와 있어 강물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들린다. 폭포를 위에서 보며 간다. 곧 해가 맞은 편 산 위에 비치기 시작했다. 멀리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건너편으로 큰 구릉 마을인 팡싱이 보인다.

필림 바로 동쪽에는 가네시 히말(7163m)이 있다. 3년 전 랑탕의 로우레비나 야크에서 본 코끼리 뒷모습처럼 생긴 가네시 히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물론 필림에서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랑탕에서는 늘 가네시의 뒷모습만 보인다. 우리 여정에서는 가까운 산이 가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2000년 이곳을 지나간 칼스텐이 오른쪽 춤 계곡을 경유한 여행기에는 그곳에서 본 가네시 1봉(7,406m) 서벽 사진이 있다.

Img_4574.jpg사진의 오른쪽이 가네시 히말 산군이다. 왼쪽 두 번째 크고 작은 두 개의 봉우리가 뭉쳐 있는 것이 마나슬루다. 마나슬루 왼쪽은 히말출리, 오른쪽 평평한 봉우리 다음 뾰족한  봉우리는 확실치 않으나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시링기 히말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manaslu_from_Laurebina_yak.jpg 지금 그 사이 계곡을 여행 중이다. 가네시 히말 산군은 제1봉(7406m)부터 5봉(6950m)까지 있다. 1949년 랑탕 지역을 탐사한 영국의 틸먼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주봉은 1955년 10월 프랑스·스위스합동등반대가 처음으로 등정했다.

출발한 지 30분 후 작은 마을에 이르니 프랑스 팀이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은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다. 어제도 필림에서 우리가 먼저 캠프사이트를 차지한 까닭에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도 그리 나쁘지 않다. 곧 '한 채의 찻집'이라는 뜻의 에클레바티(Ekle Bhatti)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대여섯 채 되는 마을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멋진 폭포가 보인다.

마을을 지나 언덕에 오르니 북쪽 계곡 모습이 훤하게 드러난다. 양쪽 산이 가파르니 북쪽으로 가는 계곡은 점점 좁아진다. 오른쪽 사면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길이가 수 백 미터는 됨직하다. 그 아래 산허리로 난 가는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고산에 들어 온 기분이 들었다.

해는 떴지만 산이 높아 여전히 그늘 속이다. 1시간 운행 후 산기슭 코너 오르막에 올라 쉬고 있는데 프랑스 팀이 도착한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이런 캠핑트레킹은 휴가가 긴 서양 사람들이 아니면 젊은 사람이 오기 힘들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트레킹 시즌인 10월과 11월에 3주간의 긴 시간을 내기 어렵다.

10여 분 동안 같이 가는데 앞에 가던 프랑스 팀이 멈추어 서서 건너편 기슭을 가리키며 웅성거린다. 멀어서 잘 안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바위 위에서 놀고 있다. 히말라야에 서식하고 랑구르(Langur) 원숭이로 은갈색 털에 검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원숭이들은 랑탕 지역에서도 몇 번 보았다. 힌두교도들은 이 원숭이를 원숭이의 신인 하누만의 현현으로 보고 숭배하고 있다.

길은 강에서 점점 높아지고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복구한 곳도 나왔다. 잠시 후 오른쪽으로 샤르(shar) 콜라의 물이 내려오는 춤(Tsum) 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춤이란 이 계곡 전체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1956년 9월 하순, 스넬그로브는 팡싱을 거쳐 시드리바스까지 내려와 필림으로 건너온 후 다시 춤 계곡으로 올라가 여러 마을과 곰빠를 방문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900년 전 벌거벗은 티베트 성자 밀라레빠(Milarapa, 1052-1135)가 이 계곡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이 계곡은 티베트 국경을 넘어 키이롱(Kyirong)과 연결된다. 랑탕의 샤브루베시 북쪽 국경을 넘으면 나오는 티베트 마을이 바로 키이롱이다. 그 마을은 온천이 좋은 아늑한 마을이라 하인리히 하러는 말년에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그의 책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 쓰고 있는데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계곡이 합수되는 지점을 조금 지나 다리를 건너 오늘 처음으로 서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이제부터 오르는 부리 간다키 상류 계곡은 현지인들은 쿠탕(Kutang)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중산간 지방의 구릉족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티베트족들이 사는 마을이다. 재배하는 작물도 쌀은 더 이상 나지 않고 보리, 옥수수, 메밀만 나며 가옥 형태도 티베트 양식으로 바뀐다.

아침에 지도를 보고 오늘 점심은 냑(Nyak)에서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을이 길가에 표시되어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리를 건너 조금 가면 나오는 서쪽 사면의 출룽(Chhulung) 콜라로 1시간 올라가야 한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가 지적했듯이 마나슬루 트레킹 지도는 정확하지 않다. 서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춤 계곡 아래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춤 계곡을 지난 후에 나온다.

출룽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고르카로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계곡을 따라 히말출리(7893m)를 향해 남서쪽으로 계속 오르다가 히말출리 아래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 그리고 보우다 히말(6672m) 아래에 있는 루피나 라( Rupina La, 4720m)를 넘어 고르카까지 내려간다. 루피나 라에서 베시사하르까지도 산길이 있으나 트레커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지도참조)

마나슬루 트레킹의 시작 마을인 고르카에서 아루갓바자르로 가지 않고 바로 북진하여 루피나 라를 거쳐 출룽 계곡으로 내려오는 트레킹은 히말출리와 보우다 히말의 환상적인 풍광을 즐길 수 있어  모험적인 그룹이 시도하는 코스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아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 트레커 팀은 루피나 라에 눈이 쌓여 넘지 못하고 따또빠니 쪽 계곡을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큰 소나무가 많이 있는 비탈길을 간다. 한적한 오솔길이다. 9시가 넘어선 뒤에야 햇볕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허름한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가더니 곧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는 다리가 나왔다. 이 다리가 가관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 철망은 떨어진 것을 대충 보수해 두었다. 틈 사이는 나무로 막았다. 원래 나무로 된 바닥도 한쪽이 떨어져 나갔는지 판자로 막아두었다. 아마 낙석이 떨어진 모양이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이 다리가 바로 안드레스가 말한 '잠 다 깼니?' 다리인데 2년 전 안드레스의 사진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통행을 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대체로 겁이 많은 여성동포들은 떨며 건넜다. 길은 산사태가 난 험한 길과 강 옆 절벽을 보수한 길을 지난 후 강에서 조금 떨어진 산길로 접어들더니 다시 절벽 옆으로 돌고 있다.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 힘도 들고 배도 고프다.

지금까지는 11시 이전에 운행을 멈추었는데 오늘은 중간에 점심 먹을 마을이 없다. 무조건 오늘의 목적지인 뎅(Deng)까지 가야 한다. 11시 15분 뎅 마을을 알리는 돌로 만든 카니가 반겨주었다. 문을 통과하자 멀리 마을 초르텐과 몇 채의 집이 보였다. 마을로 가려면 왼편 산기슭을 돌아가 작은 지류를 건너야 한다. 이 지류는 여기서 보이지는 않는 히말출리에서 내려오는 물이라고 한다.

뎅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마을 길가에 있는 수도에 아낙네들이 있고 벌거벗은 아이 하나가 땅바닥에서 놀고 있다. 복장은 전형적인 티베트 복장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추바(chuba)를 입고 있다. 무스탕을 방문한 페셀은 현지인들과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추바를 입었다. 그러나 무스탕에서도 이제 추바를 입고 있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이곳 사람들의 복장을 안드레스의 여행사진에서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직접 보니 이곳이 무스탕보다 더 오지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논스톱(비록 중간에 여러 번 쉬기는 했지만) 4시간 30분의 운행으로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마당에 깔아 둔 깔개에 앉아 주방팀이 내 온 차부터 마셨다. 그리고 오늘은 운행 끝이라는 내 말에 한시름 놓는 표정이다. 원래의 계획도 여기까지다. 그래도 너무 일찍 끝나는 것 같아 점심 먹고 다음 마을인 라나(Rana)까지 갈 생각을 하고 타시에게 말하니 타시와 밍마 셰르파가 고개를 젖는다. 그곳은 캠프사이트가 한 곳밖에 없는데 이미 프랑스 팀이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그 다음 마을인 비히(Bihi)까지 또 한 시간을 가야 하니 너무 멀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다.

점심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 서양 커플이 도착한다. 이곳은 유난히 커플 팀이 많이 보인다. 지금까지 세 팀을 보았는데 트레킹 12일 째인 삼도에 이를 때까지 일곱 팀을 보았다. 나이도 노부부에서 젊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부부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는 티베트 빵과 소시지 그리고 야채를 곁들인 푸짐한 점심 식사를 하는데 그들은 간단하게 식판 하나씩 받는다. 그들의 가이드가 주방에서 가져왔다. 두 사람이라도 식당텐트를 가져오지만 보통 점심은 그렇게 먹는 모양이다.

이곳 캠프사이트가 겁나는 곳이다. 바로 뒤로는 절벽이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식물은 관상용이 아니라 식용 작물이란다. 그 뒤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식사를 마친 커플은 다음 마을로 떠나고 우리는 남은 오후를 한가하게 보냈다. 곧 다른 팀이 도착해 아랫집에 캠프를 쳤다. 이곳은 고도가 2000m 가까이 된다. 좌우로 높은 산이 있어 해가 빨리 진다. 멀리 북쪽 계곡 사이로 시링기 히말(7187m)이 개끗하게 잘 보인다.

시링기는 부리 간다키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어제까지 정북 방향에 있었지만 지금은 동북쪽으로 비켜 있다. 우리는 시링기의 왼편 계곡으로 빠져 서쪽을 향할 것이다.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는 여기서 남쪽 계곡 사이로  가네시 4봉(7102m)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늦은 오후의 뿌연 햇살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식당텐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타시가 포터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달밧도 잘 못먹어 하산한다고 한다. 이 아이는 아루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 중 한 명이다. 4일만 일하고 하산하는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눈이 충혈되어 있는 모습이 좋지 않아보인다. 식량이 점점 줄어들므로 나머지 아르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들도 3일 후에 도착할 사마가온에서 모두 돌아간다고 한다.

직원의 채용과 해고는 전적으로 서다인 타시의 고유권한이다. 그럼에도 굳이 데리고 온 것은 팁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500루삐를 주고 돌아가 몸조리 잘 하라고 했다. 18일 동안 짐을 지는 포터들과 주방 보조요원들에게 줄 팁으로 1인당 1000루삐를 책정해두었다. 여행사 소속 포터들의 일당은 보통 350~400루삐 사이다. 1000루삐면 전체 임금의 15% 정도로 3일치 일당에 가깝다.

이들은 여행사로부터 조금 박한 임금을 받지만 계속 일을 할 수 있어 좋고 덤으로 트레킹 그룹으로부터 팁을 두둑하게 받아 좋다. 그룹으로 오는 팀은 비교적 경비를 여유 있게 가지고 오기 때문에 팁이 후한 편이다. 또 고객에게 헌신하는 그들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4일 일한 사람에게 500루삐의 팁은 좀 많은 편이지만 몸도 좋지 않으니 그냥 주었다(잔돈도 없다).

백산스님은 나중에 이 친구가 혹 지갑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의심이 된다고 했다. 어제 분실사고 후 오늘 갑자기 떠나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 그냥 잊어 버리는 좋다. 우선은 빨리 신용카드부터 정지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전화가 있다는 남룽까지는 앞으로 이틀 더 걸어야 한다.    

<참고> 루피나 라 경유를 시도한 팀이 찍은 사진

고르카에서 본 마나슬루 산군(왼편은 안나푸르나)
루피나 라 아래에서 본 동쪽 가네시 히말 산군
루피나 라를 눈 때문에 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뒤돌아 본 북서쪽 풍경
                                        
(
http://www.bergdias.de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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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림을 나와 코너를 돌기 전 돌아보다. 멀리 긴 다리가 보인다. 해가 서쪽 산을 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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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협곡에 떨어지는 폭포를 위에서 보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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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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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후 에클레 바티 도착. 뒤로 보이는 폭포가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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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해가 비치지 않아 쌀쌀한데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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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클레 바티 지나 언덕에서 본 부리 간다키 협곡과 마나슬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폭포. 가는 산허리길과 지나가는 포터의 모습이 점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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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다리를 건너 포터들을 앞세운 우리 팀들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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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를 지난 후 계속 산허리를 따라 구부러진 길을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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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프랑스 팀이 따라와 우리가 쉬고 있는 곳에서 쉰다. 대부분 젊은 커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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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10여 분 걷자 계곡 건너편으로 히말라야에 많이 서식하는 랑구르 원숭이 무리가 보였다.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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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트레일은 계곡에서 높이 올라와  산허리를 계속 돌고 도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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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점. 춤 계곡 위에 놓여 있는 다리에서 찍었다. 오른쪽이 부리 간다키 강의 상류인 쿠탕 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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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 서쪽 사면으로 넘어오다. 아직 해는 비치지 않아 쌀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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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를 돌자 해가 비쳐 따뜻했다. 큰 소나무가 많은 멋진 산허리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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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오른쪽 동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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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해 보이는 이 다리는 그래도 똑바로 서 있어 양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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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를 건너 거친 절벽길을 조금 지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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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다리가 나왔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는 이 다리를 "안녕, 잠 다 깼니(Good morning, are you well awake)?" 다리로 불렀는데 그럴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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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엔 너뭇가지로 막아놓았다. 바닥에도 보조 널빤지를 덧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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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한 사람식 다리를 건넌 후 산사태 길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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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주민의 정성이 깃든 절벽길 돌다리길도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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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제법 넓은 산길이 나왔다. 그곳에 있는 나무 열매는 식용이라고 하는데 보기와는 달리 맛은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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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도를 올린다. 멀리 시링기 히말(7187m)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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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수목한계선은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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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카니(Kani)가 나타났다. 카니가 있다는 것은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카니는 마을 전체의 출입문이다. 무스탕 지역에서는 카니 대신 초르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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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니를 지나자 오늘의 목적지 뎅(Deng) 마을이 보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왼쪽 산허리로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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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뎅 마을 초입 길가 언덕의 소박한 초르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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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수돗가에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있다. 벌거벗은 저 녀석은 춥지도 않은가 보다. 집 앞에 주방팀이 있다. 그곳 마당이 오늘 우리의 야영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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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으로 나온 티베트 빵. 꿀을 발라 먹으면 맛이 좋다. 오이, 소시지, 콩 등을 먹었다. 한국팀을 위해 삼툭은 젓가락을 준비했다. 그래서 가지고 간 젓가락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송남형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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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야영지. 왼쪽 맨드라미처럼 생긴 작물 뒤는 깊은 낭떠러지다. 나중에 온 한 팀이 아랫집 마당에 캠프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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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보이는 시링기 히말(7187m). 티베트 국경 가까이 있는 시링기 히말은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오후 4시 경 찍은 사진인데 해는 이미 서쪽의 높은 산 뒤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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