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대부터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기 방전관에서 나오는 음극선을 이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해나가고 있었다. 초기 이들의 실험은 주로 음극선 자체의 성질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음극선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학자들은 음극선을 다양한 물체에 충돌시켜 여기서 나타나는 모습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X-선의 발견은 바로 이런 실험 과정에서 얻어졌던 것이다.
1892년 본 대학의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는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헤르츠는 그의 제자인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1947)에게 이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 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레나르트 창문')을 대어서 여기에 음극선을 쏜 다음 이 금속 창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광선의 성질을 여러 기체들 속에서 면밀하게 점검했다. 이 실험에서 레나르트는 음극선에 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성질들을 관찰했다. 만약 레나르트가 여기서 금속판을 투과해서 나오는 음극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반대편에도 감광판을 대었더라면 레나르트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X-선 발견의 영광은 레나르트가 아니라 레나르트가 이런 실험을 하는 방법을 알려준 뢴트겐에게 돌아가 버린 것이다.
뢴트겐(Wilhlem Conrad Rntgen, 1845 1923)은 독일의 레네프에서 독일인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65년 입학시험을 통해서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ETH)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1869년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한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18391894)의 조교가 되어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 뒤 쿤트를 따라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1874년 교수자격과정(Habilita- tion)을 이수하고, 그 이듬해 뷔템베르크의 작은 학교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을 거쳐 1879년 기센대학 교수가 되었다. 기센대학에서 10여년간 교수로 재직한 그는 1888년 마침내 프리드리히 콜라우시(Friedrich Kohlrausch)의 후임으로 그가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정착하게 되었다. 50세가 넘은 1895년초까지 뢴트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48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발표한 논문 하나로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1894년 5월 5일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서 음극선을 금속 박판에 쏘기 위한 실험장치에 관한 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문'에 사용되는 금속 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레나르트의 도움을 받아 뢴트겐은 레나르트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을 하던 중 뢴트겐은 대학의 학장으로 뽑혀서 당분간 자신의 음극선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1895년 10월 말 임기를 마친 뢴트겐은 1년 전에 자신이 한 실험을 다시 한번 반복해 보았다.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후일 신문기자와 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 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도 이렇게 뒤덮인 종이는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인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 때 히토르프-크룩스 관에서는 륌코르프 고전압 발생장치에 의해서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해서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시안화바륨을 감광시켰던 것이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12월 22일 그는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서 그녀의 손을 X-선으로 찍어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뢴트겐은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 학회지에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접수시켰다.
이 짧은 논문은 곧 인쇄되어 1896년 신년에 이미 뢴트겐은 논문의 별쇄본을 X-선 사진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1월 4일에는 독일 물리학회 50주년 기념 학회가 있었는데, 뢴트겐의 발견은 이때 전 독일 과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의학자들은 X-선의 의학적 중요성을 발 빠르게 알아차리고 뢴트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도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해서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1월 9일에는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이 새로운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이 날아왔다: "본인은 우리의 조국 독일에 인류를 위한 커다란 축복이 될 새로운 과학의 승리를 안겨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 1896년 1월 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는데,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인 그해 2월 24일에 베크렐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 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다. X-선 발견은 영국 과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J. J. 톰슨은 X-선 발견의 소식을 듣고 이에 관련된 실험을 하다가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했다. 그 뒤 톰슨은 음극선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 즉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X-선의 발견은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뢴트겐은 발견 당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의 물리학 분야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당시에 뢴트겐이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과학자들에게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X선은 뢴트겐 이전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었을 것이다. 18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정전기 발생 장치에서 나오는 스파크에서도 이미 X-선이 발생했었을 것이고, 1879년 크룩스 자신도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불평하곤 했었다. 더구나 레나르트를 비롯한 몇몇 독일 물리학자들은 크룩스 관 주변에서 발생하는 발광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하는 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특히 레나르트의 창문 실험은 X-선 발견에 가장 근접했던 실험이었으며, 실제로 레나르트는 뢴트겐이 히르토프-크룩스 관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레나르트는 자신이 이 중대한 발견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특히 뢴트겐이 X-선 발견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도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뢴트겐이 새로운 종류의 광선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한 뒤 많은 과학자들은 투과력이 강한 이 광선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렸다. 즉 뢴트겐의 발견 직후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 입자, 에테르 내의 와동, 높은 주파수를 지닌 음파 혹은 중력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했다. 하지만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곧 전자기파로서 통상의 빛, 종파, 충격파 등 3가지 유형의 해석으로 좁혀졌다. 우선 초창기 유행하던 X-선 본성에 대한 해석으로는 1900년까지 주로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선호되던 해석으로 X-선을 매우 높은 진동수를 지닌 통상의 빛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은 빛과 같이 직진을 하며, 자기장이나 전기장에 의해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뢴트겐 자신과 루트비히 볼츠만 등은 X-선을 19세기를 통해서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에테르의 압축에 의해서 생기는 종파(longitudinal wave)로 해석했다. 당시에 빛은 압축가능한 매질에서 전파되는 소리와는 달리 횡파(transverse wave)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압축이 불가능한 완전탄성체라는 극히 이상적인 매질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에테르가 조금이라도 압축이 가능하다면 소리와 같이 빛의 종파 성분이 존재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이라는 것이다.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 J.J. 톰슨 등은 X-선을 에테르 내에서 순간적으로 불연속적으로 전파되는 충격파(impulse)로 이해했다. 우선 독일의 비헤르트는 1896년 5월 X-선이 불규칙적인 빛의 충격파라고 제안했다. 뢴트겐이 제안한 압축파의 가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영국의 스톡스는 1896년 11월 X-선이 기본적으로는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횡파로서 개별 음극선이 아주 빠르게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충격파라고 주장했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대가인 J.J. 톰슨은 이 스톡스의 가설에 대한 자세한 계산을 했다. 톰슨도 처음에는 종파 가설에 대해 고려했지만, 스톡스 가설에 대한 엄밀한 점검을 하는 과정에서 1897년 12월부터 스톡스 가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국의 켈빈 경은 처음에는 X-선이 물질에 잘 흡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X-선을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종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899년에 이르면 켈빈도 암묵적으로나마 X-선이 충격파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미 1899년에도 X-선이 회절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1899년 2월 네덜란드의 윈드(C.H. Wind)와 하가(H. Haga)는 격자에 의해서 X-선이 회절되는 사진을 찍었다. 당시 괴팅겐 대학의 사강사였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는 이 회절 사진에 대해서 충격파 가설에 입각해서 X-선 펄스의 간격을 계산하기도 했다. 이어 1904년 영국의 바클러(Charles G. Barkla, 18771944)는 X-선이 편광이 된다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X-선의 본성에 대한 충격파 가설을 지지하는 간접적인 증가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1905년까지 충격파 가설은 X-선의 본성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견해가 되게 된다.
1905년경부터 충격파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이 해석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X-선의 이온화 성질에 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에 문제가 있음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우선 X-선이 모든 기체 원자들을 이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히 통과하는 원자들의 극히 일부만을 이온화시킨다는 것이 설명되어야만 했다. 또한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크다고 하는 특이한 성질도 설명되어야만 했다. 1902년 레나르트는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을 하던 중 자외선에 의해서 방출되는 전자의 속도가 빛의 강도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런 광전효과 현상을 원자 속의 전자는 이미 원자 속에서 퍼텐셜 에너지에 해당하는 속도를 얻고, 빛은 단지 전자를 방출시키는 방아쇠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방아쇠 가설(triggering hypothesis)를 제기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큰 이유도 이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것이다.
한편 방아쇠 가설이 옹호하고 있는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 이외에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자론적 해석도 등장했다. 1907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던 윌리엄 H.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는 X-선이 강한 투과력을 갖는 것은 X-선이 펄스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X-선이 두 하전입자가 같은 평면에서 회전하는 중성쌍(neutral pair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만 보다 잘 설명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파동론적 견해와는 다른 입자론적 해석을 제기했다. 브래그는 훗날 결정 격자에 의해 X-회절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해서 결과적으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적어도 1907년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X-선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과학자였다. 그리하여 1908년을 통해서 기존의 펄스 가설을 옹호하던 바클러와 입자론적인 중성쌍 가설을 새로이 제기한 브래그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190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서 광전효과를 설명한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X-선에 대한 다양한 양자론적인 해석들이 나타났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양자라는 국소적으로 독립된 에너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레나르트가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광전 효과 설명을 이 새로운 광양자 가설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양자 가설에 의하면 빛에 의해 튀어나오는 광전자의 최대 속도는 빛의 세기와 무관하고, 빛의 진동수만이 전자가 받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은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과학자들에 의해서 널리 수용되고 있었던 빛의 파동설은 빛과 관련된 아주 많은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광전 효과는 잘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빛의 간섭 현상을 비롯한 몇몇 현상들을 당시 과학자들에게 납득이 갈 정도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양자론적 해석은 독일의 과학자 사회에서 서서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과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18741957)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X-선의 성질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양자론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 자신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광양자 가설을 전개해나갔다. 1905년 양극선에서 나오는 양이온선(canal ray)의 도플러 효과를 발견한 슈타르크는 이 양이온선에서 관찰된 현상과 연관하여 광양자 가설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X-선의 성질을 광양자 가설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테르 파동설'과 광양자 가설을 동시에 적용해 본 슈타르크는 전통적인 연속체 물리학의 무비판적인 적용을 반대했으며, 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독일의 과학자들의 구미에 맞게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에서 빛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이 서서히 수용되면서 레나르트에 의해 제기된 방아쇠 가설은 점차로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광양자 가설이 등장하고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가설이 대두되었지만 1911년까지도 X-선이 전자기파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하는 것은 좀처럼 분명한 형태로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한편 X-선 발견으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뢴트겐은 1900년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뮌헨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 겸 물리학 교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뢴트겐은 이 뮌헨에서 대학의 엄청난 지원 속에서 거대한 연구 시설을 갖춘 연구소를 꾸려나갔다.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는 이보다는 규모가 작은 이론 물리학 연구소가 하나 있었는데, 1906년 좀머펠트는 뢴트겐의 추천으로 이곳의 교수로 오게 되었다. 결정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실험에 성공해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힌 곳은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 꾸민 거대한 연구소가 아니라, 바로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 있었던 좀머펠트의 작은 이론 물리연구소였다.
좀머펠트 역시 X-선의 본성에 대해 연구한 학자였는데, 그는 특히 우수한 학생들을 발굴, 교육, 육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머펠트 연구실에는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라는 사강사가 있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의 막스 플랑크 밑에서 상대성 이론과 광학에 대한 연구를 한 뒤 1909년부터 이곳에서 사강사 생활을 하면서 격자에서 나타나던 회절에 관한 것을 연구하던 이론 물리학자였다. 또한 좀머펠트의 연구소 내에는 이론 물리학 분야 이외에 작은 실험 분과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교로 일하던 사람이 바로 발터 프리드리히(Walther Friedrich, 18831968)였다.
라우에의 X-선 회절 실험을 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인물은 에발트(Peter Paul Ewald, 18881985)였다. 1912년 그는 좀머펠트 연구소에서 결정 속의 입자들의 규칙적인 공간 배열을 기본 가정으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스 폰 라우에는 바로 이 에발트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X-선을 결정 격자에 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결정적인 착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는 만약 X-선이 아주 짧은 파동이라면 아주 규칙적인 원자 배열로 이루어진 결정 격자를 통해서 나오는 밝고 어두운 회절 무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막스 폰 라우에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서 정작 뢴트겐과 좀머펠트와 같은 뮌헨 대학의 물리학 교수들은 강한 의문을 내비치며 회의를 표명했다.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의 이 생각을 실험실에 있던 발터 프리드리히에게 개진해보았지만, 좀머펠트의 반대에 눌려 프리드리히도 회의를 표명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막스 폰 라우에는 파울 크니핑(Paul Knipping, 18831935)이라는 젊은 박사과정 학생에게 이 실험을 감행해보자고 설득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2년 4월 21일 막스 폰 라우에, 발터 프리드리히, 파울 크니핑은 X-선 회절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황산구리 결정격자에 X-선을 쏘는 실험을 통해서 좀머펠트 연구소의 젊은 과학자들은 X-선이 결정 격자를 통과할 때 회절과 간섭을 일으켜 사진 건판에 소위 라우에 반점이라는 여러 반점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그들은 X-선이 아주 짧은 파장을 지닌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격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5월 4일 프리드리히, 크니핑,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들의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들이 그 동안 자신들이 행했던 실험에서 얻은 내용을 바이에른 아카데미에 전했다. 6월이 되자 막스 폰 라우에는 감격에 젖어 최초의 X-선 회절에 의한 반점 사진을 그의 동료들에게 보냈고, 이에 따라 결정 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소식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6월 10일 아인슈타인은 막스 폰 라우에에게 "당신의 실험은 물리학이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합니다."라는 내용의 축하 엽서를 보냈다.
뮌헨의 젊은 과학자들이 얻어낸 놀라운 실험은 곧 영국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와 관련된 실험을 하도록 자극했다. 특히 영국의 윌리엄 H. 브래그와 그의 아들 W.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18901971)는 선택적 반사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결정 격자에서의 X-선 회절 실험을 더욱 간단하고 분명한 형태로 진행시켰다. 본시 윌리엄 H. 브래그는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지만, 1912년 말까지는 X-선의 파동적 해석에 대한 반감을 상당 부분 완화시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브래그 부자는 3차원 결정 격자를 이용한 폰 라우에 연구팀과는 달리 평형면 반사를 이용해서 X-선 회절 법칙을 얻어냄으로써 결정 격자를 매우 간단한 수학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리하여 이들의 실험은 X-선결정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성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 현상에 대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분자생물학의 성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2년에서 1913년에 걸쳐 이룩한 X-선 회절 실험에 대한 노벨상 위원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914년 막스 폰 라우에는 자기의 스승 막스 플랑크보다 먼저 노벨상을 받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브래그 부자도 X-선 회절 실험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1] W. C. Rntgen, "Uber eine neue Artvon Strahlen," Wrzburger Berichte (1895), pp. 132-141.
[2] W. Friedrich, P. Knipping and M. Laue, "Interferenzerscheinungen bei Rntgenstrahlen," Ann. d. Phys. 41 (1913), 971-988.
[3] W. H. Bragg and W. L. Bragg, "The reflection of X-rays by crystalls," Proc. Roy. Soc. London A 88 (1913), pp. 428-438.
[4] Bruce R. Wheaton, The tiger and the shark (Cambridge, Cambrige Univ. Pr., 1983).
[5] E. Segr, From X-ray to quarks (San Francisco: Freeman,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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