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영혼의 산 마나슬루를 만나다 |
2007. 10. 21(일) |
|
|
트레킹 둘째날 아침, 아직 텐트 안에 있는데 밖에서 "띨 레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띨 레리?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텐트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플라이를 여니 빠상이 홍차를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 띨 레리'는 '티 레디(tea ready)'를 빠르게 한 말이었다. 이 소리는 그 후 매일 하루에 세 번 차 마시는 시간에 들려왔다. 남형 씨는 나중에 이 소리가 들을 때마다 "꼴 레리~"라는 말이 생각났다고 회고했다.
짐을 챙기고 텐트 안에서 차 마시고 세수하고 나와 아침을 먹는 일상은 여전하다. 이제는 이력이 나서 모두들 짐을 잘 챙긴다. 매일 아침이면 떠나는 유목민 생활이다. 그러나 몸만 빠져나오면 나머지 일은 알아서 다 처리해주는 우아한 유목민이다. 이런 편리함은 예전 식민지 시대 때 서양인들이 식민지 나라 하인들을 데리고 뻐기며 다니던 제도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보수를 주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변했지만 여전히 상하관계가 적용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7시 10분 출발. 동쪽 계곡이 열려 있어 해가 일찍부터 비춘다. 날이 맑아 하늘이 푸르고 깨끗하다. 길을 나서니 이곳 리히와 나디출리 사이에 있는 심낭히말(Simnang Himal, 6251m)이 잠시 보이다가 곧 무성한 소나무 숲에 가려졌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잡목이 없는 큰 소나무 숲 길을 걸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비히는 좀솜 위의 마을 까그베니(2800m)와 고도가 비슷하지만 풍경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까그베니에서 위쪽은 황량하고 건조하고 환상적인 침식과 풍화작용의 절벽 풍광이 펼쳐진다. 그러나 까그베니 보다 더 높은 이곳 비히에서 시얄라에 이르는 계곡은 몬순의 영향을 받아 울창한 삼림이 형성되어 있다. 비가 내리고 안내리고의 차이로 이같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천천히 내리막을 내려가 지류 계곡인 히난콜라(Hinan Khola)를 건넜다. 히난콜라는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지점에서 남서쪽에 있는 나디출리(Ngadi Chuli)와 히말출리(Hinmal Chuli) 사이의 능선에서 만들어진 리단다(Lidanda) 빙하에서 나온 물이 흐르고 있다. 콜라를 건너기 위해선 산기슭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6시에서 9시를 거쳐(여기에 다리가 있다) 12시 방향으로 타원을 반바퀴 도는 모양새다.
계곡을 건너 계속 우회전하며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 앞쪽(북쪽)으로 보이는 쿠탕 히말이 우람하다. 출발한지 30분 후 계곡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고개마루에 우뚝 서 있는 초르텐 카니에 도착했다. 우리가 건너 온 계곡 뒤쪽으로 히말출리의 능선이 조금 보였다. 즐거운 산길이지만 당연히 오르막이 있어 힘을 좀 쓰야할 때도 있다. 초르텐과 긴 마니월을 지나고 건너편 계곡에 있는 마을도 보며 운행을 계속했다.
쇼(Sho, 2930m)마을 입구의 카니에는 리히에서 정확하게 1시간 걸린 8시 10분에 도착했다. 카니 옆 바위벽에는 파란 글씨로 "WELCOME TO MANASLU"라는 글이 쓰여 있어 마나슬루가 곧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계곡이 시원하게 넓어졌다. 그리고 계곡 끝에 하얀 설산이 보였다. 마나슬루는 아니고 그 북서쪽에 있는 나이케 피크(Naike Peak, 6416m)다. 마나슬루 위쪽의 산군은 북서쪽으로 줄지어 마나슬루 북봉(Manaslu North, 7157m), 나이케 피크, 라르키아 피크(Larkya Peak, 6249m)로 이어지고 라르키아 라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라트나 출리(Ratna Chuli, 6767m)로 연결된다.
길을 가운데 두고 집들이 경작지 근처 여기저기에 그룹을 이루고 있다. 돌집에 너와지붕이다. 잘 마른 누런 보리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밭에는 외로이 혼자 보리를 따는 사람도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보리를 밑둥까지 베지 않고 꼭다리만 따 대나무 바구니에 담는다.
쇼는 마을이 둘이다. 첫 번째 마을을 지나 잠시 나오는 산길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던 한 노숙자가 우리가 지나가자 접시를 두드리며 노래한다. 앞에는 음식을 끓여먹는 시커먼 그릇이 타다 남은 나뭇가지 위에 있다. 언뜻 그 모습을 보고 무애가를 부르면서 유랑했다는 원효스님이 떠올랐다. 그냥 호기심만 가지고 지나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심했다. 보시를 조금 했어야 했다. 그런 자비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절로 우러나와야 한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마나슬루 지역의 7000m 이상의 산들(*보우다는 6672m) |
두 번째 마을에 들어서니 설산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곳도 마을 집들이 넓게 흩어져 있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서 드디어 마나슬루가 나타났다. 트레킹 9일만에 마나슬루를 만나니 감개가 무량하다. 설산 아래 보이는 조그만 동산 위에 로(Lho, 3100m)의 곰빠가 보였다.
9시 10분, 로 마을 롯지 앞 테이블에서 쉬었다. 바람이 세게 분다. 로는 상당히 큰 마을이다. 마나슬루 북쪽에 위치한 마을 중 큰 마을로는 이곳 로와 오늘의 목적지 사마가온, 그리고 마지막 마을인 삼도가 있다. 물을 마시고 보명화 보살님이 늘 공급해 주고 있는 간식을 먹고 있으니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한다.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모른체 했지만 우리만 먹고 있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계곡 위로는 마나슬루와 그 북쪽 연봉이 보이고 계곡 아래쪽으로는 가네시 히말의 끝바락이 보인다. 티베트와 북쪽 국경을 이루고 있는 왼편의 쿠탕히말이 우람하다.
20분 쉬고 다시 출발하는데 타시가 한 마을 남자를 안내해 왔다. 약을 좀 달라고 한다. 자기 아내가 입 안이 헐고 부었는데 10일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고 한다. 내가 무슨 의사도 아니고 환자의 상태도 직접 보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러 약을 처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사정이 딱하니 고개를 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항생제다. 헐어 부었다는 것은 염증이 있다는 말이고 염증에는 항생제가 특효약이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작용은 없을 것이다.
이틀 전부터 타시가 운반하고 있는 구급배낭을 열어 항생제 7일분(21캡슐)을 주었다. 식후 한 알씩 하루에 세 번 복용하라고 약병에 쓰인 용법을 일러주었는데 음식이 부실하고 항생제 내성이 거의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좀 과도한 투약일 것 같다. 하루에 두 알 정도만 복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전스님의 책 <달라이라마와 함께 한 20년>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
길을 나서자 마나슬루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초르텐과 마니월 옆을 지나가는 트레커들의 모습이 멋진 히말라야 고산트레킹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부터 사마가온까지 보이는 마나슬루는 북서면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마나슬루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중에 다람살라 가는 도중 북면과 빔탕에서 남서면이 조금 보이지만 우리가 늘 보아 온 마나슬루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 모습이다.
두 개의 뿔이 솟아 있는 독특한 모양의 마나슬루는 산스크리트어 마나사(Manasa)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영혼(soul)이란 뜻이다. 그래서 마나슬루는 '영혼의 산'이다. 예전에는 쿠탕(Kutang) 1로 알려졌으며 인도측량국 조사에서는 단순하게 피크 30(Peak xxx)으로 표기했다. 1956년 이곳을 방문한 스넬그로브에 의하면 마나슬루의 현지 이름은 풍겐(Pung-gyen)이며 풍겐은 마나슬루에 거주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고 한다.
마을을 벗어나 산길을 걸었다. 전봇대와 전깃줄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곳에는 수력발전소 있다는 말을 들었다. 길은 또 하나의 지류계곡을 건너기 위해 계속 내려가고 있다. 리히 이후부터는 더 이상 오른쪽 계곡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다. 내리막은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되다는 뜻이라 반갑지 않지만 히말라야의 길은 높은 고개를 넘을 때 외엔 선택의 여지없이 항상 그렇다.
10시 경 작은 작은 나무다리가 있는 다모난콜라(Damonan Khola)에 도착했다. 이 작은 지류는 풍겐 빙하에서 발원한 물이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다모난 콜라를 따라 계속 오르막이 이어졌다. 길가에 한 가족들이 쉬고 있다. 송아지와 말도 있는데 아이들과 10여 명이나 된다. 타시는 앞장 서고 나는 사진을 찍느라 제일 뒤에 처져 있으니 무슨 일로 가족 전체가 내려가는지 물어볼 길이 없다. 그냥 "타시델레!" 인사만 교환했다.
시얄라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어떤 곳은 지그재그로 나 있다. 사람들이 지치기 시작한다. 다시 무성한 숲을 지나는데 계곡 물가에 있는 수력발전소 돌집이 보인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주변의 여러 마을(쇼, 로, 시얄라,사마가온)로 공급된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수력발전소다. 삼툭이 남걀 마을에 설치하고 싶어하는 수력발전소다. 이전에 삼툭과 트레킹을 같이 할 때마다 삼툭은 수력발전소를 보면 관심을 가자고 살펴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로서는 고향을 위해 하고 싶은 평생의 숙원사업일 것이다.
네팔에서 일이란 우리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정국도 불안정하여 약속한 정부보조금은 백년하청이다. 우기는 없지만 겨울철 혹한기가 있어 건설 시기도 제한된다. 건자재 수송도 중요한 것은 헬기로 운반해야 하니 비용이 많이 든다. 기왕에 짓는 수력발전소니 주변 다른 마을도 같이 쓰자는 요청이 들어와 발전 용량을 늘여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비용은 기하급수로 늘어나 작년 한국에서 모금만 돈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큰 프로젝트를 혼자 동분서주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삼툭 외에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남걀에는 전무하니 그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어쨌든 일이 잘 되어 하루빨리 남걀과 그 주변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시얄라를 목재소로 묘사한 이전 방문자들의 여행기처럼 주변 나무가 많이 잘려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르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길에서 숲 위로 설산이 보였다. 히말출리 아니면 나디출리일 것이다. 11시 30분 시얄라(Syala, 3500m)에 도착했다. 지그재그 길을 오르면서 본 마을 입구를 알리는 카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카니를 지나고 다시 멋진 초르텐 카니를 지나자 목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재재소 같은 넓은 마을이 나타났다. 한 노인이 길가에 혼자 마니차를 돌리고 있다.
레이놀즈가 처음 마나슬루를 방문했던 1992년에 시얄라에는 집 네 채와 작은 곰빠 하나만 있었는데 4년 후 다시 오니 20채 이상의 집이 들어서 있고 주변의 나무들이 무분별하게 벌채되어 파괴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목재는 티베트로 팔려간다. 경작지가 적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나무가 생계를 보전해 주는 좋은 자원이기는 한데 환경 훼손이 심하다. 올 때 산사태 비슷한 길도 그런 남벌로 생긴 결과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골이라 거주민이 많지 않아 대규모 벌채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삼림이 워낙 무성하여 별로 표시가 나지 않으며,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급경사 절벽지대라 나무 베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나무를 베더라도 한계가 있다. 2000년 가을 이곳을 지나갔던 칼스텐 네벨(Carsten Nebel)은 그의 여행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터키석 색깔이 된 부리 간다키 강은 먼 아래에 있다. 우리는 작은 지류를 따라 갈 것이다. 그곳에 수력발전기를 세울 계획이 있는 모양이다. 강력한 기둥을 세우기 위한 숲길이 나 있고 큰 통나무들이 잘려지고 있다. 십여 명의 거칠게 보이는 남자들이 나무를 야크 등에 싣고 있다. 티베트로 나무를 가져가면 많은 이익이 남는다. 나무를 밀과 교환하여 로 마을로 가지고 온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다시 사마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얕은 여울의 진탕길을 조금 지난 후 나는 우리 그룹을 따라잡았다.
전나무 숲 그늘을 걷는 것은 즐겁다. 녹색의 숲 끝 위로 솟아 있는(나디 출리?) 가파르고 얼음이 덮여 있는 능선 아래의 소풍길을 걸은 후 고원을 향해 �은 오르막을 올라 시얄라(Shyala)에 도착했다. 벌목은 시얄라의 번창하는 사업이다. 40채의 나무 오두막들은 가게 또는 벌목꾼들의 집이다. 마을 주변의 나무들은 대부분 벌목되었다. 풍광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좋지만 시얄라는 슬픈 마을이다.
거대한 산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히말 출리와 피크 29(최근 나디 출리로 명명되었다)가 왼쪽에 있고 마나슬루와 큰 빙하는 바로 앞쪽에 있다. 다른 설산 봉우리들은 오른쪽에 있고 우리가 방금 지나왔던 계곡의 먼 끝에는 가네시 히말이 있다. 눈과 얼음의 원형극장이다! 그러나 아래쪽 마을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벌목은 통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우리는 자연보호구역에 있다. 아마 정부 공무원들의 감시도 있을텐데도 무차별 벌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http://www.myhimalayas.com/manaslu/3.htm)
마을 제일 위쪽 점심을 먹을 캠프사이트로 가자 모두 정신이 없다. 마지막 운행을 오르막으로 장식한데다 이미 11시 30분이나 되어 점심시간이 1시간 이상 지나 허기가 진 탓이기도 하다. 주방에서 내 온 차와 비스킷을 대충 먹고는 쓰러진다. 3500 고지라 고산병이 나타나기 쉽다. 어제 상태가 좋아졌던 혜명화 보살은 오는 도중 구토를 했다. 백산스님과 남형씨는 두통이 있다고 한다.
두통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니 크게 위험하지 않으나 구토는 문제가 있다. 다시 다이아목스를 먹도록 하고 충분히 쉬도록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음식이 잘 넘어갈 리가 없다. 모두 그저 먹는 시늉만 한다. 가장 왕성한 식욕을 보이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팀을 이끄는 사람이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비록 전깃줄이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고 목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 분위기를 망치긴 해도 설산이 원형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얄라는 멋진 곳이다. 이곳에서 보이는 설산은 왼편부터 히말출리, 나디출리, 마나슬루, 마나슬루 북봉, 나이케 피크다. 맞은편에는 6천 미터급 쿠탕히말 연봉들이 원형극장의 나머지를 채우고 있으니 그 장엄한 풍광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을 보니 시얄라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하루 더 머무는 것도 괜찮다고 쓰여 있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도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원형 설산의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얄라에서 사마가온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니 이곳에서 머문 다음 날 오전에 사마가온까지 간 후 캠프를 치고 오후에 빙하호수를 다녀오는 일정이 가능하다.
점심을 먹고 1시에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는 카니를 지나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 내리막길을 계속 가다가 두 번째 지류를 만났다. 눔라 콜라(Numla Khola)다.. 이곳은 위쪽 언덕이 무너져 내린 듯한 모양이라 마치 산사태가 난 듯한 모습이다. 이곳이 마나슬루 북서면의 빙하인 풍겐 빙하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는 계류다.
다리를 건너 다시 조금 올라 넓은 길로 들어섰다. 관목이 많이 있다. 이제 수목한계선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 갑자기 뻥 뚫린 넓은 계곡이 눈 앞에 펼쳐졌다. 사마가온 앞의 초원지대인데 이곳이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넓은 초지이다. 이 정도면 히말라야에서 대초원으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넓다. 점점이 보이는 것은 말도 있지만 대부분 야크며 수 백 마리가 흩어져 풀을 뜯고 있다.
초원으로 들어서기 전 풍겐곰빠로 올라가는 길이 나왔다. 3시간 거리라고 이정표에 쓰여 있다. 스넬그로브에 의하면 1953년 일본팀이 마나슬루 등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다음 해 산사태가 일어나 풍겐곰빠가 무너져 버려 당시 곰빠에 거주하던 18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풍겐 신이 이방인들의 무례한 방문에 노하여 그런 일이 있어났다고 믿어 그 해 2차 일본원정대가 도착했을 때 마나슬루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일본대는 마나슬루를 포기하고 대신 가네시로 방향을 틀었다. 나중에 일본은 풍겐곰빠를 새로 재건해 준 후에 마나슬루 초등에 성공한다. 1956년의 일이다.
구름이 몰려와 날은 춥지만 오랜만에 넓은 초원을 걸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초지의 첫 광장 중간에 돌로 쌓아 만든 투박한 초르텐이 있다. 시얄라에서 목재를 가지고 간 포터들이 쉬고 있다. 이들은 전통 있는 여행사 포터들이라 노란 제복을 입고 있다. 트레킹에 목재가 필요할 까닭은 없을 테고 아마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다. 넓은 초원에는 야크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렇게 많은 야크를 한꺼번에 본 것은 처음이다.
우리 팀 중 야크를 본 사람은 나와 무진행 보살님 뿐이다. 쿰부 트레킹 때 페리체 부근에서 많이 보았다. 추쿵에서 임자체 베이스캠프 가는 도중 인적 없는 벌판에 야크 떼를 방목하고 있었다. 랑탕 지역에도 야크가 흔하다. 랑탕 트레킹의 종착지인 컁진의 야크치즈 공장은 맛 좋은 무공해 치즈로 아주 유명하다. 안나푸르나 지역에서는 마낭 위쪽으로 볼 수 있다. 초지가 귀한 무스탕에서는 야크들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고원으로 가 있어 볼 수 없었다.
초원 끝에는 사마가온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크고 멋진 초르텐 카니가 서 있다. 카니를 통과하자 사마가온(Samagaon, 3530m)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마나슬루 북쪽 지역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가장 먼저 초르텐과 곰빠와 마니월 무더기를 빙 두르고 있는 있는 마니차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불교복합센터'다. 사마가온의 '대초원'과 더불어 마나슬루 지역의 명물 중 하나다. 마을은 그 뒤쪽으로 보였다.
마을 길에 들어서자 늘 그렇듯 '환영위원회' 위원들이 반겨(?)준다. '히말라야 환영위원회'는 항상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큰 마을이라고는 해도 집을 꾸며 사는 모습은 형편없다. 작년에 무스탕을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사는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문화에 대한 주관적인 충격 때문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충격 받을 일이 아니었다.
마나슬루에 비하면 무스탕 사람들은 멋진 주택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무스탕은 대부분 이층집이다. 나무가 귀해 흙벽돌로 지었지만 외벽은 하얗게 칠해 말끔하다. 평평한 지붕에는 장작더미를 빙 둘러 쌓아 놓았다. 곰빠는 붉은 색으로 칠해 권위가 있다. 곰빠 외벽에는 특별한 상징이 있는 흰색과 붉은색, 푸른색 칠을 해 품위가 있다. 황량함 속에서 빛나는 진주 같은 무스탕 마을의 풍광은 정말로 티베트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피어났던 한 왕국의 문화를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이곳은 수 백년 전 티베트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티베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이곳까지 넘어 올 이유가 없다. 살 길을 찾아 떠난 유랑민들이었다. 나무가 많기는 하지만 경작지가 적은 척박한 땅이다. 고급문화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에서 보았던 곰빠를 흉내내어 지었고 집도 낯선 몬순의 기후에 맞추어 지었다. 비가 많은 지역은 집 단장을 하지 못한다. 인도의 집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대만에 갔을 때 아파트 외벽이 형편없는 것을 보았다. 그곳도 우기가 길어 여름이면 아파트 벽에 곰팡이가 낀다(보드나트의 불탑을 매년 가을에 새로 회칠하는 이유도 몬순 때 이끼가 끼기 때문이다). 매년 반복되는 우기이다 보니 해마다 성물(聖物)도 아닌 아파트 외벽을 새로 칠할 이유가 없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현상에 대한 체념에서다. 그대신 살고 있는 아파트 내부는 아주 화려하게 잘 꾸미고 산다고 한다.
마나슬루의 집들은 이층 양식이기는 하나 겉에서 보면 1층이나 다름없다. 1층은 우리로 치면 조금 높은 마루처럼 보인다. 집도 허름해서 지붕에 건초를 잔뜩 쌓아 놓은 가옥을 보고 처음에는 가축우리인 줄 알았다.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집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의 삶이라는 뜻과 같다.
그래도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은 외부에서 보는 시각과는 달리 행복할 것 같다. 문명의 혜택도 받지 않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매일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없다. 제3 세계 국가의 빈민가 사람들처럼 할 일이 없어 방황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집이 있다. 좁은 토지나마 경작지가 있고 목축을 하며 티베트와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남기고 있다. 최소한 먹고 자고 입는데 대한 부족함은 없다. 다만 의료와 교육시설의 부족은 큰 문제로 남아 있다.
사실 동물처럼 인간의 삶을 단순화하면 의식주 세 가지로 귀결된다. 이 세 가지만 해결되면 걱정이 없다. 나머지는 별로 쓸데없는 욕심일 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이나 은둔자들은 깊은 산골에 들어가 소박한 생활을 하며 보다 본질적인 것에 정신을 집중한다. 부와 명예와 권력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한여름 뜬 구름과 같으며 언젠가는(그리 멀지 않다) 사라질 이 몸을 위해 맛난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며 세상에서 명성을 날려본들 결국에는 한 줌 재가되거나 땅에 묻혀 썩고 만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지 롯지촌이 나타났다. 이곳의 집들은 신식으로 지은 쿰부 지역의 이층집 모양을 하고 있다. 마나슬루 트레킹 여행자들이 늘어나면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캠프사이트는 모두 이곳에 있다. 캠프사이트마다 만원을 이루고 있다. 길가에 'Video Hall'이라는 팻말이 전봇대에 붙어 있어 웃음이 나왔다. 이곳까지 와서 비디오를 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오후 2시 20분, 초르텐 카니 옆에 있는 <노둡(Ngodup) 롯지> 캠프사이트로 갔다. 길가 간판에는 주방, 식당, 포터용 방, 쇼핑센타, 화장실을 제공한다고 쓰여 있다. 이 롯지에 마침 전화가 있다. 백산스님이 여러 번 시도 끝에 아는 스님과 통화에 성공했다. 필림에서 잃어 버린 신용카드를 중지시켜 달라는 내용이다. 요금은 1분당 100루삐. 산간오지치고는 싼 편이다. 작년 무스탕에서는 1분당 250루삐 주었다.
오늘은 제일 건장한 사람인 남형 씨가 고소를 먹고 헤맨다. 오후에 맛있는 감자를 먹었는데 저녁 식사 때는 텐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고소를 염려해 올 때 공항면세점점에서 산 담배 한 포를 트레킹 2일 째 되는 날 포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금연중인데도 고소가 왔으니 보람이 없다. 그렇지만 흡연을 계속 했다면 상황이 더 나빠졌을지 모른다. 누나인 보명화 보살님의 걱정이 태산이다. 저녁 식사 중 혹 시장하면 먹으라고 삶은 감자를 갖다준다.
고소가 오면 아무 것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남형 씨에게 다이아 목스를 주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도 예방차원에서 한 알씩 먹었다. 낮에 조금 헤맸던 혜명화 보살은 이제 괜찮다고 한다. 내일은 캠프를 이동하지 않는 고소적응일이니 충분히 쉬면 상태가 좋아질 것이다. 내일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은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말에 모두들 긴장한다. 최소한 로까지는 되돌아 가야 한다. 하루 여유가 있으니 다음날 올라오면 되지만 오늘 오르막에서 흘린 땀을 생각하고는 모두 제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이다.
트레킹의 반이 지났다. 고소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도를 높이는 데다 하루 일정이 그리 길지 않아 체력 부담이 적으므로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삼도에서도 고소적응을 위해 하루 더 머물 예정이라 여유가 있다. 3500고지의 밤은 제법 쌀쌀했다.
trek 9. 리히 - 시얄라 - 사마가온 (top으로) | ||||||||||||||||||||||||||||||||||||||||||||||||||||||||||||||||||||||||||||||||
| ||||||||||||||||||||||||||||||||||||||||||||||||||||||||||||||||||||||||||||||||
'해외 등반 및 트레킹 > 마나슬루 라운드 트레킹(2008)' 카테고리의 다른 글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0) | 2008.02.01 |
---|---|
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 (0) | 2008.02.01 |
trek 8. 고산 트레킹이 시작되는 누프리 계곡 (0) | 2007.12.25 |
trek 7. 쿠탕 계곡과 스넬그로브와 항생제 (0) | 2007.12.25 |
trek 6. 고산지역 티베트 마을로 들어서다 (0) | 2007.12.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