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일기 제6일] (1) 설산에서 바람 맞다

8월 15일, 광복절이다.

새벽에 일어나니 밤사이 눈이 내려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다. 밖에 나오니 새벽하늘에 별빛이 눈부시다. 정말 많은 별들이 하늘에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이야 언제고 보이고, 별이야 언제고 있지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아야만 하늘은 비로소 내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이고, 별이 내 마음에 쏟아지는 것이다.


4시가 되니 아이들이 잠이 덜 깬 목소리로 두런거리며 돌아다닌다. 아마 어떤 꿈 많은 소년, 소녀들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들어 있을 것이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주먹밥을 만들어 챙기고 차에 오른다. 아이들에게 배낭을 잘 꾸려 놓았는지, 잊은 것은 없는지 확인하도록 하고 6시에 출발을 하니 도로 또한 빙판이다. 안전거리를 확보하고 이동 중 오른쪽에 통가리로 산과 나우로호에 산이 어둠 속에서 수묵화처럼 피어나고 있었는데, 그 위로 산과 똑같은 모양의 구름이 얹혀 있어 새롭고 신기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왼쪽으로는 해가 오르려고 하늘빛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나우로호에 산으로 오르는 도로에 접어드니 차는 이내 비포장길로 접어들고 잠시 달리다가 멈춰 섰다. 앞의 지 사장이 운전하는 차가 미끄러져 헛바퀴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내려서 차를 밀었다. 뒤에 있던 차들도 탄력을 받지 못해 몇 번 더 차를 밀어야 했다.


바람 소리가 장난이 아니다. 아이들에게 옷을 단단히 입으라고 하였다. 움직여서 땀이 나기 전까지는 몸을 따뜻하게 보호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어수선한 가운데 미처 일출을 볼 수가 없었다.


차에서 내려 장비를 점검하고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였다. 작년에는 이 곳에 눈이 내리지 않아서 나무다리가 훤히 드러나 있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눈이 가득 덮여 산행이 만만치 않을 듯 싶었다.


30여 명의 대부대가 일렬로 늘어서 산행을 시작하는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었다. 윤미, 종석이, 재준이, 태리, 혜진이는 1명씩 안내 보행을 하였다. 지난 번 사전 교육 때 조령산에서 산행시 안내 보행 실습을 하였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기는 하지만 이제 앞으로 경사가 급해지면 아이들이 지칠 것이기 때문에 필요한 경우 지도자를 투입하기로 하였다.


길 옆으로 빙하 녹은 물이 내를 이루어 흐르고, 작은 폭포가 물소리로 귀를 잡고, 물빛으로 눈길을 잡는다. 눈밭 위 투명한 고드름은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인다.


민상이가 고드름을 가지고 장난을 하는 모습이 참 귀엽다. 이 피디, 김 대장, 한 기자, 임 선생님이 각자의 카메라를 가지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인다. 저 카메라에는 대원들의 숨소리도 담기고, 눈보라도 담기고, 산도 담기고, 물도 담기고 우리들의 소망도 함께 담기리라.


저만치 산장이 나타난다. 산장에는 어제 미리 도착하여 숙박을 한 듯한 외국인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다. 대원들은 산장에서 한숨을 돌리고, 스패츠, 아이젠 장비를 착용하고, 가방 어깨끈을 조이고, 피켈을 부여잡고 다시 출발을 한다. 길을 안내하느라 도우미들의 목소리가 어지러이 날아다닌다. 어느 다리에선가 혜진이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곳도 눈밭이어서 다치지는 않았지만 도우미들이 더 주의해야 할 것이다.


외국인들 지들이 먼저 산행을 하여 길을 만들어 주어야지 장애우를 데리고 가는 우리가 길을 만들어야 하느냐고 김 대장의 너스레가 시작된다. 이 말을 듣기라도 한냥 긴 대열을 이루고 나아가는 우리 대원들의 행렬 사이로 외국인들이 지나간다. 아무래도 보행이 더디기에 늦게 출발한 이들이 우리를 지나쳐 저 앞으로 나가더니 차츰차츰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다.


발걸음은 다시 이어졌고, 김 사장은 후미에서, 선두에서 아이들이게 용기를 주느라 분주하다. 김종민 팀장은 선두에서 시각장애 학생들이 편하게 걸을 수 있도록 눈을 발로 밟아 길을 만들었다. 참여하는 사람 하나하나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이 대단하다.


이제 마지막 화장실이 나타난다. 뒤집어 보면 남자들에게는 지금부터 화장실이 더욱 넓어지고 커지는 것이다. 돌아서기만 하면 화장실이 되기 때문이다. 조금 쉬는 중에 혜진이가 통증을 호소한다. 아무래도 어제 OPC에서 다쳤던 다리가 성치 않은 모양이다. 고심 끝에 김 부장이 혜진이를 데리고 내려가기로 하였다.


다른 대원들은 손을 흔들어 혜진이를 배웅하고 산행을 다시 시작했고, 이제부터는 경사가 급해져서 박 부대장이 태리의 산행을 돕기로 하였다.


그런데 태리의 상태도 좋지는 않았다. 평소 운동을 할 기회가 별로 없었던 태리는 체력이 많이 약한 편이었다. 그래 포기하려는 것을 박 부대장이 가는 데까지 올라가다가 정 힘들면 그 때 내려오자고 달래며 끌고 올라갔다. 올라가며 모처럼 태리가 환히 웃는 모습을 보았다. 태리가 곧 사람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신기해했고, 박 부대장은 네가 잘 걸어서 금세 사람들을 따라잡은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앞에는 소병조 선생님이 재준이를 데리고 올라가고 있었다. 소 선생님은 스틱을 양 손에 쥐고 끝을 재준이가 잡게 하여 스틱을 당겨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하였다. 산행을 하며 아이디어를 발휘하여 각자의 방식을 터득하여 산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뒤따라오던 태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속으로 내려갔나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뒤 고개 저 쪽으로 두 명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참을 따라온다. 그러다 어느 고개 마루에선가 박 부대장이 하산을 결심하고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친다.


부대장과 작별을 하고, 걸음을 재촉하여 선두 쪽으로 붙었다. 가다가 지은이를 만나고, 선정이를 만나고, 진주와 윤미를 만나고, 종석이를 만나고, 그렇게 선두 쪽으로 나아갔다.


이제부터는 선두 쪽에서 카메라에 아이들을 담기로 하였다.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다. 바람에 날리는 눈발이 얼굴을 때린다. 마치 소백산에서 맞는 칼바람, 모래바람을 연상시킨다.


정상이 가까워지니 바람이 더 거세지고 앞사람의 발자국이 지워지기 시작한다. 이러다가 하이트 아웃이 생기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길을 표시하는 나무 표지에는 눈이 쌓여 얼음을 이루고 있었고, 그 얼음은 심한 바람으로 한쪽 방향으로만 바람 무늬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새들 정상이 보인다. 눈보라는 더욱 거세져 이러다 날라가 버리는 건 아닌지 공포에 휩싸인 나는 피켈을 눈에 박고 꽉 잡고 김 대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니 임선생이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나도 앞사람의 발자국을 잃어버려 엉뚱한 곳으로 길을 들어었는데 한 기자가 그 쪽이 아닌 것 같다고 조언을 하여 방향을 바로 잡았는데 임 선생이 엉뚱한 곳으로 올라간다. 바람이 너무 거세 불러도 안 들릴테니 그저 바라만 보고 안전하게 올라가기만 기대할 뿐이다.


눈보라가 좀 약해짐 틈을 이용하여 새들에 오르니 정말 눈부시게 아름답다. 사방이 온통 눈으로 덮이고 눈빛은 희다 못해 푸른빛을 띠고 있다. 어디를 보아도 그 아름다운 빛에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다.


이제 저쪽에 김 대장, 이 피디를 선두로 윤미 일행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새들 정상에 선 것을 진심으로 기뻐했고, 뒤 이어 올라오는 대원들을 껴안고 축하해 주었다.


바람이 덜 부는 것을 가려 점심 식사를 하였다. 밥은 이미 식어 위 속으로 한기가 들어간다. 물은 끓여 배낭 안쪽에 넣어 두었더니 아직 따뜻하다. 점심을 먹고 나니 구름이 걷히고 저 멀리 설산들이 모습을 드러내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바로 눈앞에 있는 나우로호에 산도 자꾸만 올라가고 싶은 유혹이 생기도록 아름다웠다.


김 대장이 대원들을 불러 경사길 보행법과 미끄러졌을 때 정지하는 법을 가르쳤고, 대원들이 실습을 하였다. 촬영을 하며 굉장한 추위를 느꼈다. 등산화가 방수가 안 되어 양말까지 다 젖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벌 양말을 가져왔지만 신발이 젖은 마당에 양말은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었다. 다음 루아페후 산 등반 때는 대책을 미리 세워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산길에 들었다. 하산이 쉬울 것 같았는데 그 사이 기온이 올라가 표면의 얼은 눈이 녹아 발이 푹푹 빠진다. 심한 경우는 허벅지까지 빠진다. 밑을 내려다보면 시퍼런 것이 그 밑으로도 아무 것도 없다. 크레바스라고나 할까. 겁이 난다.


소 선생님이 부대장에게 무전을 친다. 박 부대장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주변에서도 무슨 이야기하는지 다 들린다. 내려올 때는 하산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이렇게 하면 루아페후 산 등반도 무난하리라.


이미 많이 지친 아이들이 길모퉁이를 돌 때마다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푸념을 한다. 그러며 언제 차 있는 곳에 도착하냐고 한 마디씩 한다. 김 사장이 아이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하산을 하니 혜진이, 태리, 박 부대장, 김 부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비를 풀고 차에 올라탔다. 아이들은 차에 타자마자 곧바로 잠이 든다. 피곤하기도 하겠지. 김 사장이 오늘 날씨가 참 좋아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날씨는 계속 맑을 예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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