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랑탕-캉친콤파 3800m “아름다운 설산 파노라마”

 

  고소 증세가 심한 장창락 기자는 랑탕에 남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캉친 콤파로 향했다. 아침 산바람이 거세게 내리 분다. 기온도 많이 내려간 것 같다. 우리는 파카로 중무장을 했다. 상류로 가면서 계곡의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아직 위세가 크다. 융설수는 큰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나 역시 약간의 고소 증세가 나타나는 것 같다. 머리가 찡하고 약간 힘이 없다. 안희상 씨 부부가 힘겨워하는 가운데 서로를 위로하며 놀라운 투혼을 보여 주었다. 종미 선생은 어제부터 증세가 있었는데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인다. 설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참으로 아름답다. 봄에 왔다면 고산 식물과 고산 꽃들이 어우러져 정말로 아름다울 것 같다. 리룽 빙하와 킴증 빙하가 아름답다. 같이 간 가이드 핀조가 네팔의 정정을 이야기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모이스트들이 반군인데, 그들은 부자들의 재산을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순수한 골짜기의 유목민과 농민을 선동한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농민들만 괴롭히고 있다고 했다. 핀조의 어머니도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반군이 와서 당신 아들은 외국에 나가서 돈도 잘 벌고 하니 6개월에 200불 정도를 내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카투만두에 와서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교통 통신의 어려움으로 그들의 결속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오늘 점심은 티벳 빵이었는데 종류도 다양하다. 옛날 우리나라의 국수꼬리 구워 먹던 것을 연상되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3개의 코스로 나누어 그룹별로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대장과 광옥, 재학, 영홍, 종익 등과 같이 우리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4400m 정도의 산에 올라가 설산을 근접해서 보기로 했다. 캉친이 3800m 정도이니 약 600m 정도 올라가야 한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산인데 숨이 턱까지 찬다. 고소 증세로 인하여 숨이 차 휘파람 소리가 나려고 한다. 어려웠지만 주변의 랑탕히말의 멋진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다. 너무 아름답고 경이롭다. 힘이 무척 들었지만 어마어마한 빙하의 흔적과 주변은 나를 놀라게 했고, 안 왔으면 후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나는 오늘 히말라야의 독수리를 보았다. 류시화 시인의 시에 나오는 독수리를 말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독수리를 나는 보았다. 매우 높이 날고 있었다. 그 산이 4400m 정도였으니 그보다 훨씬 높이 날고 있었다. 독수리는 고소증도 없는가보다. 이 황량한 지역에 먹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의 작은 디카로 사진을 찍었는데 잡혀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살펴본 바로는 캉친 콤파는 주변이 아주 넓은 다양한 일종의 복합 선상지이다. 건조 지역에 잘 발달하는 그런 복합선상지로 구성되어 있고, 이 선상지가 개석되면서 서서히 랑탕 계곡을 만드는 것이다. 왜 이 지역을 랑탕 계곡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실질적인 계곡은 이 선상지가 개석 되면서 랑탕에 이르러 깊은 계곡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랜 트레킹과 고소 증세로 사람들이 조금씩 예민해 지는 것 같다. 여러 사람이 함께 트레킹 할 때 많은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만 피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대장과 박연수 부대장, 말없이 후미의 사람들을 챙기는 박원래, 나정흠 선생은 훌륭한 산악인이다. 그들의 풍부한 경험이 초보들로 가득한 우리 대원들을 잘 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속으로 고마운 생각이 든다. 계곡 트레킹이라 그런지 지금 여기는 아주 조용하다. 롯지도 17개가 있는데 우리가 롯지를 사용하는 유일한 집단이다. 다른 곳은 텅텅 비어 있다. 이곳은 역시 여름트레킹 지역인가보다. 내일은 랑탕 국립 초등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우리의 올챙이 송을 가르쳐 주기로 했고, 네팔의 레쌈삐리리를 합창하기로 했다. 핀조의 도움으로 우리는 노래 연습을 즐겁게 했다. 리마와 그 일행이 멋진 네팔 춤을 보여주었다. 아주 흥겹고 즐거운 밤이다.


 

 

오늘은 비교적 코스가 길어서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 7시 30분 모두가 모였고 김영식 대장님이 일장 훈시를 했다. 대열에서 뒤에 쳐지지 말 것, 물을 많이 마실 것(고지대라서 큰 호흡에 수분이 많이 증발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걸을 것, 사탕이나 초코렛을 먹은 후 포장 종이를 버리지 말 것(사실 우리가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상표가 한국 글씨로 되어 있고 그것을 보고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 마구 버렸다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상에 서로를 비방하는 글이 많이 올라오는 것이고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원인이 된다. 진짜 문제는 트레킹 도중에 주변 아이들이 실제로 사탕을 달라고 하는 것인데, 참으로 그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서 사탕을 주면 포터나 그네들은 먹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사탕 포장지를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버린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2002년 안나푸르나 베이스 켐프까지 트레킹을 했고 이번이 두 번째인데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안 주자니 마음이 안쓰럽고, 주자니 얻어먹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 같고.......

  계속된 계곡 트레킹이다. 참으로 깊은 계곡이다. 어느 정도 걷다가 열린 하늘 사이로 멀리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계곡을 배경으로 한 설산은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랑탕의 상류가 보이는 이곳 고라타벨라는 비교적 평지가 넓고, 말과 야크와 양도 꽤 많다. 봄에 꽃이 핀다면 이곳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 같다. 우연히 전주에서 왔다는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부부 두 명에 포터를 4명 고용했다고 했다. 그 부부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하는 트레킹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외국인들을 보면 1-2명이 가이드 한 명을 고용해서 현지식을 먹으면서 다니는데 그것이 진정한 트레킹이 아닌가 생각도 되고, 언젠가 나도 그렇게 해 볼 것이다. 오전보다 오후에는 길도 길고 고도를 1000m가량 높여서인지 대원들도 꽤 힘들어한다. 랑탕의 상류로 오를수록 고산족과 야크가 더 많이 눈에 보인다.

 

진정한 걷기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아침 8시 우리는 “아자아자” 파이팅을 외치고 출발했다. 처음이라 다들 신기해 한다. 아열대림의 숲을 헤치고 좁은 길을 향해서 우리는 걷는다. 꾀 여러 곳의 현수교를 지난다. 이런 신기조산대의 협곡은 아주 위험하기도 하고 골이 깊어서 계곡을 연결하는데 현수교는 아주 적격이다. 출렁거림과 스릴도 만점이다. 주변에 조그만 땅이라도 있으면 개간하여 경지로 이용한다. 워낙 경지가 협소하여 급경사도 계단식으로 모두 이용한다. 계단식 경작 방식은 토양의 유출을 막고 경지를 고정시키는 역할도 하고, 평탄하여 작업하기도 좋다. 이곳에서의 가장 합리적인 토지 이용 방식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랑탕 계곡이다. 처음 걷는 것이라 그런지 약간 힘도 들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우선 그 계곡의 깊이와 크기에 압도된다. 주변의 울창한 아열대림은 몇 백 년을 묵었는지 모르겠다. 융설수(融雪水)의 큰 울림과 흐름, 곳곳에 있는 산사태의 엄청난 흔적. 물방아를 이용한 마니차는 쉼 없이 돌고 돈다. 성황당과 같은 만장과 힌두식의 많은 종교적 상징들이 이곳이 성역임을 표시한다. 포터들이 힘겨워한다.

  밤부에서 점심을 먹는다. 떡국인데 육수 국물까지 넣어 맛도 좋다. 그릇 바닥에서 약간의 모래가 씹히지만 문제 될 것이 없다. 첫날이라 다들 조금씩 힘들어 하지만 별 문제는 없는데 우리의 장창락 기자가 진땀을 흘린다. 알고 보니 그는 커다란 두 대의 카메라에다가 많은 사진 장비까지 배낭에 지고 오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그는 전문 포터가 아니었다. 결국 사진기 한 대는 최광옥 선생님의 몫이 되었고 최 선생님은 이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최 기자가 되어 버렸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날이 어두워졌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포터들이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겨울 내내 놀다가 운행 첫날 무거운 짐에 녹초가 된 것 같다. 이래저래 사는 것이 힘이 드는구나. 저녁에 우리는 운이 좋게도 이웃집에서 라마제 굿을 실제 보게 되었다. 정초에 악귀를 물리치는 우리네 옛날 굿판 같았는데 모두 아주 숙연한 분위기였고 멋졌다. 굿판이 끝나고 그네들의 전통 술인 창을 마셨는데 우리 막걸리와 맛이 비슷하다.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밤하늘에 별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히말라야   밤하늘의 별은 정말로 아름답다. 머리 위에서 수없이 반짝이던 그 많은 별들을 잊을 수가 없다.


1월 네팔(5)설 ‘로살’(네팔 설 로살에 관한 글을 옮겨보았다.)


네팔에도 설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가족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모습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네팔 사람들도 우리만큼 설을 정겹게 보냅니다.

네팔은 태음태양력인 비크람삼버트력을 사용하는 탓에 양력 기준으로 하면 매년 설 날자가 조금씩 변합니다. 네팔의 설 ‘로살’은 보통 양력으로 4월 14~16일 사이에 찾아옵니다. 로살의 ‘로’는 해(year), ‘살’은 새로운(new)의 의미입니다. 네팔의 신년 맞이는 11월경(양력 2월)부터 시작됩니다.

네팔의 11월은 ‘검은 달’입니다. 나쁜 기운이 강하다고 믿기 때문에 11월에는 결혼식 등 축하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11월에 태어난 아이는 불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이 낳기를 꺼릴 정도입니다. 네팔도 남존여비적인 문화를 갖고 있어 어떤 지방에서는 11월에 태어난 딸은 평생 배필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라마승려(왼쪽)가 구마의식인 또나고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지 않는 오른쪽에서 북을 두드리며 불경(페자)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려운 11월에 네팔인들은‘또나고숨’이라는 구마(驅魔)의식을 치릅니다. 라마승을 초빙해 집안에서 옥수수와 보리 가루를 섞은 ‘잠바’로 4가지 색깔(동서남북을 의미)의 제웅(除雄)을 만듭니다. 제웅 주변에 작은 촛불을 켜고 악귀를 쫓는 불경(페자)을 읽은 뒤 잠바 가루를 뿌려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악귀가 실린 제웅을 집 주변으로 가지고 나갑니다.

또 나고숨 때 사용하는 제웅. 다양한 크기의 것을 여럿 만들고 촛불을 켜서 신비스런 분위기입니다. 이 의식을 주재하는 라마승이 제웅을 들고 나가는 방향을 정해주거나 사방 4곳으로 모두 들고 나갑니다. 집주인과 이웃 사람들은 제웅을 놓은 뒤 칼을 뽑아들고 강렬한 소리를 질러 악귀를 위협합니다. 힘을 합쳐 다시는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지요. 악귀를 이긴 주인과 이웃들은 뺨에 잠바 가루를 발라 승리를 표시하고 창(쌀로 만든 술)이나 럭시(기장과 누룩으로 만든 민속주 둠바를 증류한 독주)를 마시면서 자축합니다.


바닥에 흰 잠바 가루를 뿌린 것이 보이실 겁니다. 악귀가 실린 제웅을 들고 나갈 때 이것을 밟고 나갑니다. 로살 이틀 전 네팔인들은 ‘시마랑구’라는 과자를 만들어 먹습니다. 과자 안에는 한해의 운수를 가늠해볼 수 있는 9가지 상징물이 들어있습니다. 고추, 소금, 숯, 양털, 콩, 밀가루로 만든 해, 달ㆍ별ㆍ네모과자 등은 각각 게으름, 악운, 알뜰함, 수다스러움 등 한해의 운수나 경계해야 할 것들을 의미합니다. 과자 속에서 새해에 스스로를 다스리는 지혜를 찾아내는 것이지요.

우리가 ‘까치설날’로 삼는 그믐날 네팔인들은 집안을 정갈하게 청소합니다. 설날 새벽, 좋은 옷을 골라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을의 가장 좋은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여기에 버터로 만든 물고기를 띄워 집에 가져옵니다. 가장 먼저 길어 올리는 이와 가정에 복이 온다고 해서 경쟁이 치열한 편입니다. 여기에 띄운 물고기를 ‘금(金)물고기’라고 부르는 것도 특이합니다. 이 물을 4~5일간 집안에 정갈하게 보관했다가 가족들이 나누어 마십니다.

물을 길어온 초하룻날 아침에 사원에 가서 음식을 바치며 복을 기원하는 것 외에 네팔 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쌀로 빚은 술 창과 ‘갑세’라는 밀가루과자를 만들어 먹으며 쉽니다. 이날 이웃집 방문은 금기입니다.

초이튿날부터 한 달 동안에는 반대로 이웃집을 돌면서 그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흥겹게 춤추며 놉니다. 레삼삐리리 등 네팔의 민요는 단순하면서도 흥겹고 춤을 동반하기에 여러 사람이 어울려 흐르기에 좋은 노래입니다. 우리 민요의 쾌지나칭칭나네와 비슷한 반복 구조를 가지고 있는 노래입니다. 멀리 떠나 부재중인 가족이 있으면 ‘갑세’를 수북이 쌓아 따로 상을 차려 놓은 채 한 달 동안 그를 기억합니다. 떨어져 있으나 마음속에 언제나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지금 누가 있습니까. 네팔 인들처럼 따로 상을 차려 기억할 그 누구 말입니다.



 

 


 

*1/11 자연의 신에게 목숨을 맡기다

오늘부터 진정한 트레킹에 접어드는 시간이 시작된다. 7시 30분 호텔에서 버스에 모든 짐을 싣고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로베시로 간다. 카투만두 시내를 벗어나면서 시작되는 수많은 검문이 이 나라의 현재 정정을 말해준다. 랑탕으로 가는 길은 포카라로 가는 길보다 정말 험하고 위험한 것 같다. 깎아지른 절벽과 산허리를 깎아 만든 길로 인하여 아찔한 순간이 계속된다. 경사가 심한 이곳은 신기조산대의 특성상 여름의 폭우에 언제나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실재로 곳곳에 산사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사태로 유실된 도로는 지금도 이곳 사람들의 수작업에 의해서 아주 서서히 복구되고 있으나 언제 복구가 끝날지 알 수 없다. 아니 완전한 복구란 없다. 언제나 엄청나게 빠른 지형 변화가 나타나는 곳이니까 말이다. 무너지면 일시 복구하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좌우로 흔들리는 버스는 전복 직전이다. 최소한 500m가 넘는 저 낭떠러지기로 버스가 구른다면?(버스를 탄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이 버스 안의 사람은 누구 하나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히말라야의 신에게 목숨을 담보하는 것이 훨씬 속이 편할 것 같다. 8시간 가까이를 달린 후에야(거리는 멀지 않지만) 샤브르베시에 도착했다. 깊은 계곡의 물은 아주 큰 소리를 내며 흐른다. 수천길 계단식 경작지는 역사 이래 이곳 주민들의 조상들이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 왔을까 하는 역정을 말해준다. 곳곳에 돌아다니는 버팔로, 양과 닭, 결국 이들도 험한 이곳에서 인간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저녁은 이곳의 토종 닭 볶음이다. 덴지의 솜씨가 다시 나를 감격시켰다. 어찌나 맛이 좋던지, 안희상 선배님이 한마디 했다. “덴지 나와 함께 한국 가서 닭볶음 식당이나 하자구!” 이렇게 하루가 갔다.


 

 

멋진 닭고기 정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먼저 화장장으로 갔다. 산자와 죽은 자가 같이 있는 곳. 죽은 자와 헤어지는 곳. 곳곳에 시신 타는 냄새가 역하다. 건기라서 하천 물은 마르고 오염도는 심각하다. 어디서 아주 슬픈 곡조의 군악대 조가가 들려온다. 군인들이 도열해 있다. 그들은 건너편의 망자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계급이 꽤 높은 자가 사망했다고 한다. 반군과의 교전에서 죽은 모양이다. 잠시 주변이 숙연해졌다. 아! 죽음 앞에서는 계급이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공평하구나. 죽은 자를 보내려고 제사 지내고 난 후 재물을 강물로 버리자 주변 아이들이 금방 물로 들어가 그것을 건져간다. 먹기 위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확인만 되지 않았을 뿐 거적을 뒤집어 쓴 자가 전혀 미동도 않은 체 자고 있다. 그는 아마 죽어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오가는 사람들은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그가 아픈지, 잠자는지, 죽었는지. 여기는 이런 곳이다. 자연계에서 죽음은 하나의 과정일 뿐인 것을.....

 

 

 

* 1/10 셀파족 학교 방문과 네팔 전통 춤 관람과 체험

 

  조금 쌓인 피곤함을 말끔히 없앨 만큼 제법 잠을 푹 잤다. 아침 기분이 상쾌하다. 9시경 호텔을 출발하여 셀파족 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정성스레 준비한 옷가지와 학용품을 버스에 싣고 약 40분 정도 버스를 달려(카투만두 시내에서) 외곽에 있는 초ㆍ중ㆍ고가 함께 있는 공립학교를 방문했다. 멀리 구름 속에 보이는 설산이 내일부터의 트레킹을 설레게 한다. 학교의 시설은 아주 열악해 보였다. 과학실을 가 보니 교사가 그린 태양계 그림이 붙어있다. 선물을 학교에 모두 전달하고 학교 측에서 알아서 분배하면 좋겠는데 현지 가이드 말이 그렇게 하면 아이들에게 골고루 배분되지 않는다고 했다(중간에 횡령자가 있다는 말이겠지) 그래서 우리는 일일이 낱개 포장을 하는 수고를 했던 것이다. 나 역시 교사지만 (이 학교의 교사는 국가에서 선정한 절반과, 그 지역에서 선발한 절반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국가와 일반 국민이 교사를 절대로 믿지 못하는  국가의 장래를 어찌 생각해야 할까 마음이 찹찹하다. 그러나 교실에 들어섰을 때 어린이들의 눈은 그저 말고 초롱초롱하기만 하다. 4명 정도씩 3교실을 방문하고 선물을 주기로 했다. 우리가 들어선 교실에서는 그래도 내가 나이가 많다고 나보고 학생들에게 한 마디 하라고 했다. “초롱초롱한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저는 고등학교 교사랍니다. 모두 새 옷으로 여러분에게 기쁨을 주었으면 좋았을 것인데, 일부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입던 옷 중에서 새것을 잘 세탁해서 가져온 것입니다. 기꺼이 받아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보니 여러분은 모두 아주 총명한 것 같습니다. 부디 열심히 공부하여 네팔의 훌륭한 일꾼이 되어 주세요” 통역을 담당했던 핀조는 한국어에 능통한 일류 통역사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의 교육이 무너진다. 학교가 무너진다고 하지만. 어느 시대에도 그런 소리는 늘  있어 왔다. 이 학교를 방문하며 적어도 우리나라의 성장에 교육이 얼마나 공헌 했는가를 절감했다. 학교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곳곳에 있는 정부군의 초소가 이곳이 반군의 출몰지역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네팔의 정정은 아주 안정된 것이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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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오지 학교 탐사대”라는 이름으로 우리 대원 21명은 1월 8일부터 1월 24일까지 16박 17일의 일정으로 네팔을 다녀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두 곳의 학교도 방문하고 네팔의 불교문화와 힌두교문화, 랑탕의 깊은 계곡과 눈 덮인 랑탕히말의 자연을 보고 티벳 문화의 흔적 등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그 기억이 잊혀지기 전에 서투르지만 후기를 남기려 한다.

   

 

 웬 장비가 이리도 많을까? 사람이 며칠을 사는데 이리 많은 것들이 필요하구나. 1월 8일 충주 청소년 수련관에 모인 우리 일행은 바리바리 짐을 꾸려 14시 30분 인천 공항으로 출발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차들이 꾀 많았다. 우리의 장도를 축하하려는 듯 눈보라가 멋지게 휘날렸다. 밤 9시에 인천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5시간 30분 정도 걸려 한밤중에 방콕에 도착했다. 카투만두로 가는 연결 비행기 노선이 맞지 않아 우리는 무려 8시간 정도를 공항에서 기다리다가 11시 30분 비행기로 이튿날 오후 14시 30분경 카투만두에 도착했다. 덴지와 핀조 일행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주황색 꽃목걸이는 만든이의 정성이 가득했고, 아름다웠다. 버스로 시내를 거쳐 안나푸르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긴 비행시간과 방콕에서 기다리기 지루하여 마신 양주 때문인지 몹시 피곤하다. 잠시 시내를 산책했다. 2002년도에 왔을 때처럼 공해에 눈과 목이 아리다. 카투만두의 대기오염은 상상을 초월한다. 자동차 배기가스와 기온이 안정된 고도가 높은 분지의 특성 때문이다. 예전보다 차와 오토바이가 더 늘어난 듯하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별 반응이 없다.

  저녁은 빌라에베레스트에서 한식으로 했다. 기내식과 간식으로 깔깔해진 입맛에 역시 우리의 된장국과 김치는 특효약이다. 타멜 거리를 지나 호텔로 돌아오는 도중에 교통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가는 것 같다. 쉴 새  없는 차와 오토바이의 경적소리, 사람들과 자전거가 휩싸여 그냥 흘러간다. 먼지와 향냄새가 뒤섞여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어서 빨리 이 도심을 벗어나고 싶다. 저녁 후 동료들은 내일 방문할 학교의 옷가지를 포장하고 정리한다. 콜멘에서 지원한 80벌의 옷과, 각 학교에서 수거한 옷가지들을 정리하는데 꽤 많은 양이다. 많은 사람들의 따스한 정이 모여 있는 옷가지들이다. 이제 깊은 잠을 청해야겠다. 룸메이트는 태권도로 몸을 단련한 58세의 신흥고등학교 체육 선생님이신 최창원 선생님이시다. 크! 최 선생님은 펜티 한 장에 웃통도 다 벗고 잠을 잔다. 나는 옷을 다 입고 자도 약간 추위를 느끼는데 대단한 청춘이다. 구랫나루에 가슴에 털 난 사나이다. 잠자는 모습을 흘깃 훔쳐보니 한창때는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을 듯한 태권도 챔피언이다. 나이는 나보다 한참 위이지만 이런 무쇠 사나이를 보디가드(?)로 둔 나는 얼마나 행복한 녀석인가! 인천 공항에서부터 장창락 기자와 나는 담배를 끊기로 약속했다. 담배를 한 대 피우다 걸리면 네팔  토종닭 한 마리를 사기로 했다. 담배를 안 피우기로 한지 24시간이 약간 더 지났다. 약 기운이 떨어져서인지 머리가 띵하고 의욕도 없고 기운도 없다. 주변 사람들은 이제 생각이 날 때가 되었는데 한 대 피우면 어떨까 하고 유혹한다. 그깟 닭 한 마리가 뭐 대수냐는 듯.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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