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잠이 깨어 풀어 둔 고도계의 온도를 보니 2도다. 어제만 해도 7도였는데 상당히 기온이 내려갔다. 그렇지만 우모복에 모자까지 쓰고 자니 침낭속에서는 춥지 않았다. 마나슬루의 일출을 보기 위해 텐트밖으로 나왔다. 캠프장에서는 산이 조금밖에 보이지 않아 먼저 나와 있던 무진행 보살님과 함께 바깥 길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날이 쌀쌀하다. 세계 10위 봉인 안나푸르나(8091m)를 중심으로 서쪽 34km 지점에는 세계 7위 봉인 다울라기리(8167m)가 있고 동쪽 72km 지점에는 세계 8위 봉인 마나슬루(8156m)가 있다. 마나슬루 동쪽으로는 가네시 히말과 랑탕 히말이 연봉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그레이트 히말라야산맥(Great Himalayas)을 따라 거의 일직선으로 서 있어 네팔 히말라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곧 일출이 시작되었다. 희미하던 마나슬루 왼편 봉우리가 연분홍빛으로 물들더니 차츰 진해진다. 그쪽이 동쪽이다. 일단 해가 뜨자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과 5분이 지나지 않아 두 봉우리 모두 오렌지빛으로 변한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멋진 일출을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 헤매던 남형 씨도 컨디션이 회복되어 일출을 구경한다. 기초체력이 튼튼하니 회복도 빠른 것 같다. 나는 콧물이 여전하다. 며칠 전부터는 입술이 말라 입술연고를 바르고 있다. 사마가온은 마나슬루가 가장 잘 보이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마나슬루 정상까지는 불과 9km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마나슬루 등반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마나슬루를 어떤 이들은 왕관 모양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악마의 이빨로 묘사한다. 아무런 선입관 없이 보면 왕관이고 많은 희생자를 낸 한국 산악인들에게는 악마의 이빨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인 풍겐은 '팔찌'라는 뜻이다. 한국은 마나슬루 원정에 많은 희생을 치뤘다. 1971년 첫 번째 원정에서 김기섭 대원의 추락사로 실패했다. 1972년 두 번째 시도에서는 북동릉 7250m 지점에서 눈사태로 5명의 대원과 세르파 10명이 사망하는 히말라야 등반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를 당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80년 4월 동국대 원정대의 서동환이 세르파 2명과 함께 북동릉을 통해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해가 산을 비추자 산 서편으로 연기같은 것이 바람에 휘날린다. 사실은 연기라 아니라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진 눈이 기화되어 깃발처럼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다. ABC에서 보는 안나푸르나의 일출은 군불지피는 연기나 나듯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넓은 광장에는 30여명의 트레커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날씨는 꽤 쌀쌀하다. 영하 5도는 되는 것 같다. 이윽고 일출이 시작되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 위로 레이저쑈가 시작된 것이다. 빛은 제일 높은 안나푸르나 1봉 끝에 반사되었다. 빛이 닿는 순간 어둠 속에서 설산의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변했다. 황금빛이란 바로 이런 색을 말하는 것이리라.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황금빛.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햇빛이 닿자마자 봉우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을 받아 기화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옛날 시골집에서 다 식은 구들장을 뎁히기 위해 어머니가 새벽 군불을 땔 때 아련히 피어나던 연기같았다. (붓다아이, <2002 ABC트레킹> day 8) 히말라야의 일출은 어느곳이든 황홀하다. 지금까지 구름 때문에 못 본 나가르코트를 제외하고는 어느 히말라야의 일출이든 실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히말라야에서 일출을 본 사람은 다른 곳의 일출은 눈에 차지 않는다. 두 발로 며칠씩 땀흘리며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4000m 고지에 오른 후, 추운 아침 8000m급 순백의 설산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바라보는 감동은 히말라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장엄한 풍광이다. 오늘은 짐을 싸지 않아도 되는 고소적응일이라 한결 여유가 있다. 그것은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날은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피곤한 몸을 추스릴 수 있다. 주방팀은 여전히 음식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들 역시 오늘은 주방도구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반드시 3500m 지점에서 고소적응일을 둔다. 안나푸르나 지역의 마낭, 쿰부 지역의 남체바자르가 3500고지 전후여서 그곳에서는 하루 더 머물여 고소적응을 한다. ABC나 랑탕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따로 고소적응일을 두지 않는데 그것은 최종목적지가 4000m 정도로 히말라야에서는 비교적 낮은 고도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라운딩이나 쿰부 트레킹은 3500m 지점을 통과한 후에도 5000m를 향하여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고소적응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무시하고 운행하다가는 도중에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고소가 심해지면 땀께나 흘리며 오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가 고소을 완화시킨 후 올라가거나 아니면 아예 하산을 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머뭇거리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통계에 의하면 히말라야 트레킹 중 해마다 두 명이 고소로 죽는다고 한다. 8만 명 중 두 명이니 확률은 아주 적다. 그러나 규칙을 무시한다면 당신은 그 두 명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고소는 적응될 때까지는 누구에나 예외가 없다. 히말라야 8000m 원정을 수십 번 다녀 온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대장 같은 '히말라야의 귀신'들도 마찬가지다. 고산병은 제로섬(zero sum)게임과 같아 60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다가 2000m 이하로 내려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몸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 때는 '저산병'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갑자기 많아진 산소량으로 인해 졸음이 쏟아지는 행복한 증상이다. 따라서 2주 이상 저지대에서 머문 후 고산으로 가면 몸은 다시 고소적응이 필요하게 된다. 이전의 적응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 쓸모가 없다. 3천 미터는 고산병이 시작되는 높이다. 4천 미터만 되면 공기 중 산소는 평지의 60%밖에 되지 않고 5천 미터가 되면 53%로 뚝 떨어진다. 기압도 마찬가지로 낮아진다. 높이 오를수록 기압이 낮아지고 바다 밑으로 깊이 내려갈수록 기압이 높아진다는 책에서 배운 과학 지식을 바로 체험하게 된다. 그에 따라 우리 몸의 충격은 엄청나다. 산소가 없으니 피의 흐름이 저하된다. 적혈구의 운반을 산소가 하기 때문이다. 피가 잘 돌지 않으니 몸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마치 주행 중 자동차 연료가 제대로 분사되지 않고 아주 조금씩 분사되는 것과 같다. 그 상태에서 자동차는 쿨럭거리며 비틀거릴 것이다. 가슴에 통증이 오기도 한다. 산소부족으로 혈액농도가 높아져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데다 심장도 팽창하여 박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이 없는 사람을 일러 '박력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혈액농도가 높으니 피를 걸러주는 콩팥에 부담이 간다. 소변색이 진한 갈색으로 변하는 이유다. 걸죽해진 혈액농도를 묽히려면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부족한 산소를 보충하려고 호흡이 가빠진다. 또 낮은 기압으로 온 몸의 세포가 팽창하게 된다. 그래서 손발과 얼굴이 붓는 부종이 생긴다. 이것이 심하면 뇌나 폐에 물이 고이는 뇌수종, 폐수종으로 발전하여 치명상을 입는다. 2002년 겨울, 쿰부 트레킹 중 4750m의 추쿵에서 잘 때 호흡곤란으로 고통을 경험했다. 숨이 막히는 고통이었다. 산소가 부족하면 보통 폐에서 호흡을 빨리하여 산소를 보충하게 되어 있다. 달리기를 하면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5천 미터 가까운 곳에서는 평지와는 달리 공기 중 산소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호흡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호흡을 한 후에 비로소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3천 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우리 몸의 이상적인 1일 적응한계를 300m로 잡고 있다. 즉 하루 300m만 오른다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수많은 현장 경험을 토대로 연구한 것이다. 결국 히말라야에 오른다는 것은 이런 높이에 따르는 몸의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일 큰 관건이다. 추위와 폭설 같은 날씨문제는 2차적인 문제다. 추위는 장비를 잘 준비하면 되고 날씨는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고도적응에 실패하면 무조건 내려가야 한다. 두통과 구토를 동반한 기력상실증이 오면 속된 말로 '히말라야고 나발이고' 아무 생각 없어진다. (붓다아이, <2004 랑탕 헬람부 트레킹> day 2) 마나슬루의 경우 3500 고지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8일이 걸린다. 그만큼 천천히 오르기 때문에 고소적응이 잘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00m 고도에서는 기압이나 산소량이 우리 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산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운항 중인 비행기 기내 기압은 2000m 고도의 기압에 맞춘다. 고산병은 산소량이 해수면의 78%에 불과한 2500m부터 증세가 나타난다. 2500m 지점부터 '고산병미터기'가 작동한다. 제법 오래 2000m 지점에서 지냈으니 고산에 올라가도 고산병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6일간 올라왔던 고도는 별 의미가 없고 이틀 전 2540m의 남룽을 지나면서부터 '미터기' 작동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이틀만에 3530m까지 올라왔으니 고도를 1000m 가까이 올렸다. 고소적응을 위한 조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마가온은 '마나슬루의 마낭'이다. 고소적응일이라고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것은 좋지 않다. 가까운 곳이라도 고도가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갔다 오는 것이 좋다. 고소적응을 위한 불변의 원칙은 "낮에는 높은 곳을 오르고 밤에는 낮은 곳에서 잔다."이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번갈아 오르내리면 우리 몸이 고소에 더욱 잘 적응한다는 것이다. 오늘 일정은 마나슬루 빙하 아래의 비렌드라 빙하호수 방문으로 정했다.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에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세 곳이 있다. 풍겐곰빠와 마나슬루 베이스캠프 그리고 비렌드라 빙하호수이다. 풍겐곰빠는 왕복 6시간 이상 걸리는 조금 힘든 곳이다. 그곳에서 보는 마나슬루와 마나슬루 동면의 풍겐 빙하는 멋있다고 하지만 그런 풍경만 보러 가기엔 너무 멀다. 풍겐곰빠는 1953년 겨울 산사태로 무너진 후 다시 재건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오래된 유물이 없다. 이곳에 온 스넬그로브도 그래서 방문하지 않았다. 마나슬루 베이스캠프 역시 다녀 온 사람의 여행기를 보니 6시간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코스다. 체력보충을 위해 쉬는 날인데 그렇게 힘든 운행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빙하호수는 마을 바로 위에 있어 짧은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마나슬루의 주 빙하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든 호수다. 호수 위 서쪽 능선으로 오르면 마나슬루와 호수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아침에 보명화 보살님과 무진행 보살님이 롯지 뒤로 흐르는 맑은 개울에서 빨래를 했다. 트레킹 중 빨래다운 빨래를 한 유일한 곳이다. 휴식일이기에 가능했다. 이 마을 위로는 시간이 있어도 추워서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내 빨래 몇 가지는 무진행 보살님이 같이 빨아주었다. 물은 예상대로 얼음물이라 고무장갑을 껴도 손이 시리다. 그러므로 히말라야에서는 고무장갑과 함께 내피용 장갑이 필요하다. 마을 주변에도 방목하는 야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물가 초지에도 많이 보인다. 정말 이 마을은 야크가 많다. 이상하게 염소나 양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야크가 이렇게 많으니 야크치즈 공장이 있지 않을까 해서 타시에게 물어보니 치즈공장은 없다고 한다. 가끔 나오는 야크치즈는 카트만두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이었다. 텐트 꼭대기에 빨래줄을 연결해 빨래를 널었다. 빨래줄은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필수품이다. 기왕이면 넉넉하게 7-8m 길이가 좋다. 마트에서 파는 기성제품보다 등산용품점에서 파는 가는 등산용 줄이 더 가볍고 부피가 적다. 양쪽 끝에 작은 알미늄 캬라비너를 묶어두면 설치에 편리하다. 등산점에 가면 그렇게 만들어 준다. 오전 8시, 침낭도 펼쳐 담장에 널고 하이킹에 나섰다. 롯지 바로 앞에 있는 마니월을 지나 마을을 벗어나니 관목숲 지대가 나왔다. 키가 큰 나무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수목한계선에 가까이 왔다는 증거다. 그동안 언제 수목한계선까지 오르나 했는데 운행을 계속 하니 결국 도착했다. 수목한계선이란 날씨가 추워 그 위로는 더 이상 큰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고도를 말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목재용 나무를 뜻하는 팀버(timber)라는 말을 써 팀버라인(timber line)이라고 한다. 몇 번의 트레킹에서 살펴보니 히말라야의 수목한계선은 3800m 정도이다. 그곳 관목 지대에서 장엄한 모습의 마나슬루가 파노라마로 보였다. 이곳이야말로 마나슬루 일출을 가장 보기 좋은 곳이다. 캠프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라 추운 아침에 움직이기가 쉽지는 않다. 캠프 근처에서 보는 모습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라면 당연히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첫날은 그렇다치고 다음날도 그러지 못했다. 그럴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ABC는 롯지 바로 뒤가 안나푸르나 전망대여서 힘들지 않다. 랑탕에서 가장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는 로우레비나 야크도 롯지 위 길을 조금만 오르면 된다. 쿰부에서는 에베레스트 일출을 볼 수 있는 고쿄리나 칼라파타르에 오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5000m가 넘는 정상을 향해 2시간 올라가는 운행은 거의 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일출을 보았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고도가 높아 운행이 힘들 뿐더러 무지무지하게 춥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마나슬루 파노라마 일출은 조금만 수고하면 된다. 고도도 높지 않고 길도 거의 평지길이다. 그러나 10여일 간 운행으로 지치기 시작한 상태라 그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산이라 판단력이 떨어진 것 같다. 체력이 떨어지고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한 고산지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래서 항상 트레킹을 마치고 정상으로 돌아오면 아쉬움이 남곤 한다. 이런 여행기를 쓰는 이유도 다음에 방문할 사람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코스에 대한 정보가 없는 곳은 현지에서 스스로 판단해야 하므로 항상 바쁘다. 곧 부리 간다키 강바닥으로 들어서 작은 통나무 다리를 건넜다. 우리 앞에는 어제 고소정을을 마친 서양팀이 삼도를 향해 가고 있다. 강바닥 돌이 특이하게 둥근 모양이 많고 모두 하얗다. 오래 전 빙하기 때는 이곳이 모두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주변의 바위들은 모두 빙하에 의해 운반된 빙퇴석이다. 빙퇴석을 영어로는 모레인(moraine)이라고 한다. 히말라야의 고산은 모두 이런 모레인 지대이다. 조금 가다가 빙하 호수가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나슬루가 바로 앞에 떡 버티고 있다. 그곳에서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찍고었다. 타시에게 부탁한 사진은 역시 구도가 시원치 않다. 삼툭이나 타시나 못 찍기는 마찬가지다. 평소 카메라를 다룰 일이 없는 사람에게 좋은 구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 이제는 증명사진으로 만족하고 있다. 관목숲을 헤치고 능선을 향해 오른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충 능선을 목표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갔다. 그런데 내려올 때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길이 있어 힘이 덜 들었다. 처음부터 오르막이 시작되는 능선 초입으로부터 올랐으면 관목을 헤치는 고군분투가 필요 없었다. 타시도 마나슬루가 이번이 두 번째라 미처 그 길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가려면 마을에서 나와 강바닥 길을 오르다가 중간에 만들어 둔 출입문을 통과하자마자 출입문과 연결되어 있는 왼편 돌담을 따라 빙하가 내려오는 계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우리는 조금 빙 돈 셈이다. 강바닥에 횡으로 긴 돌담을 쌓아 막아 둔 것은 야크들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능선에 올라 바라보는 마나슬루와 빙하호수가 절경이다. 빙하에서 녹은 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바위 절벽을 타고 내려온다. 가끔 빙하가 부숴져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위에서 보면 작게 보여도 호수는 길이 950m, 너비 250m인 직사각형 모양으로 작은 호수는 아니다. 돌담이 호수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위성사진에서 확인해 보니 돌담의 길이가 약 1km다. 엄청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스탕에 흔히 있는 2-3km 짜리 돌담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히말라야의 모든 빙하 옆 능선이 그렇듯 이곳도 무른 흙이 아슬아슬하다. ABC나 MBC 절벽 만큼 높지 않지만 자칫 흙이 허물어지면 한참 미끄러질 판이다. 칼스텐은 이곳에서 미끌어졌을 때 "얼음물 목욕을 하지 않기 위한 성공적인 노력의 결과 " 손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한다. 바람부는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마나슬루와 빙하와 진한 에메랄드빛 호수를 감상했다. 북쪽으로는 날카로운 능선을 지닌 쿠탕 히말의 연봉이 달리고 있다. 30분 정도 쉬면서간식도 먹고 햇볕을 쬐기도 하며 놀다가 9시 3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내리막길에서 보니 건너편 길가에 노란 텐트가 여러 동 있다. 캠프사이트가 모두 차는 바람에 저 팀은 어제 마을 바깥까지 밀려났다.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덕분에 멋진 일출을 감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출 한 번 편하게 보려고 일부러 캠프를 버리고 야외로 나가자고 할 수는 없다. 스태프들에게는 잠자리와 주방시설이 갖추어진 캠프사이트가 훨씬 편리하다. 트레커들이 산책 삼아 아침에 30분 걸어 일출을 감상하는 것이 여러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다. 천천히 걸어 캠프로 돌아오니 11시가 되었다. 이쪽 길에도 야크들이 많이 방목되어 있다. 돌담은 이녀석들의 '북진탈출'을 막는 수용소 담장이다. 빙하호수 왕복에 3시간 걸렸으니 가벼운 하이킹이다. 오는 도중 내친 김에 사마곰빠까지 방문하고 싶었으나 점심시간이 되어 오후 일정으로 돌렸다. 타시에게 오후에 곰빠 참배가 가능한지 알아보라고 했다. 잠시 후 돌아 온 타시에 의하면 법당은 하루 두 번, 오전 7시와 오후 6시 예공 때만 개방한다고 한다. 2005년 이곳을 방문한 안드레스의 말과 다르다. 우리는 사마가온에 11시 30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삼도(Samdo)까지는 3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이미 오늘 로에서 고도를 350m 올렸다. 삼도까지 가면 다시 250m를 더 오른다. 라르키야 라를 오르려면 고소적응을 잘 해야 한다. 고산에서 하루에 500m 이상 오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리고 어쨌든 사마가온은 멋진 마을이어서 그냥 통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후 전체를 쉬면서 전망 좋은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마나슬루 원정대는 사마가온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마가온에는 세 개의 롯지와 두 개의 캠프사이트가 있다. 원정대가 몇 주 후 돌아오면 보통 사마의 모든 맥주는 동이난다. 독일 등반가 디터 포르쉐(dieter Porsche)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등정에 성공하고 사마로 돌아와 그들이 묵고 있는 롯지는 물론 다른 롯지의 맥주까지 다 마셔 버렸다. 사마의 맥주가 떨어지자 로에서 사가지고 왔다. 그 결과 윗 계곡의 모든 맥주는 사라졌다. 타격을 받은 사람은 다음날 내려 온 다른 원정대 사람들이었다. 남은 것은 물과 콜라뿐이었으니... 사마가온 옆 작은 언덕에는 오래된 곰빠가 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마지막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능하면 크게 소리쳤다. "오 라마, 오 라마, 어디 있나요." 그러자 5분 후 젊은 라마가 나타났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는 100m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자다가 우리의 소릴 들은 것이다. 그는 즐거이 아름다운 곰빠를 보여주었다.(안드레스, <2005 마나슬루 트레킹> day 9) 점심을 먹고 쉬다가 오후 1시 30분 사마곰빠로 올라갔다. 마을 북쪽 작은 언덕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사마곰빠는 누프리 계곡에서 제일 역사가 깊은 곰빠다. 주지스님(head lama)은 마을에 살고 있고 주법당 주변에 있는 30여 채의 토굴에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는 독특한 형태의 토굴촌이다. 비록 법당은 들어갈 수 없지만 안드레스의 여행기에서 내부 사진을 다 보았으므로 불만은 없다. 사진을 보니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지역의 곰빠와 별 차이가 없다. 독특한 점이라면 주불을 무스탕의 로게까르 곰빠처럼 빠드마삼바바를 모시고 있는 점이다. 가장 독특한 점은 법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스님네들의 토굴이다. 토굴답게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집 앞에서 곡식을 털며 겨울 준비를 하는 비구니 스님 등 몇몇 스님들이 보였지만 많은 집은 주인이 출타 중인지 나뭇가지로 대문을 걸어 두었다. 칼스텐의 여행기에는 스님의 초청을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고 해서 나도 혹시 누가 불러줄까 싶어 어슬렁거렸으니 그나마 보이는 스님들도 일에 열중할 뿐 별 반응이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캠프로 내려오는 길에 마을에서 올라오는 한 노비구니 스님과 "타시델레"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않게 사마가온 곰빠 참배를 마쳤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불교가 낮설지 않은 한국인 트레커들의 기록에는 사마곰빠를 방문했다는 글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서양인 트래커들의 기록을 보면 예외없이 곰빠를 방문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히말라야 트레킹을 단순한 자연을 즐기는 것에 만족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자연은 물론 그 지방의 문화를 아우르는 경험을 추구한다. 서양인들의 그런 적극적이고 여유 있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그들의 문화와 학문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고 심도있게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무스탕에 대한 연구의 지존이 미셸 페셀이라면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정보는 스넬그로브가 꽉 잡고 있다. 그의 책은 전체를 개관하는 도입부분에 32쪽, 돌포 지역에 130쪽, 깔리 간다키와 무스탕 지역에 40쪽, 마낭과 나르 푸 가온 지역에 37쪽, 그리고 마나슬루 지역에 24쪽, 카트만두 귀로에 10쪽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책에서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의 기술은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전문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도 무스탕에 대한 정보가 여전히 페셀의 책에 근거를 두고 있듯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정보는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에 근거를 두고 있다. 1956년 9월 9일 늦은 오후, 스넬그로브는 비를 맞으며 사마가온에 도착한다. 3월 1일 카트만두를 출발했으니 벌써 여행기간이 6개월이 넘었다. 그는 빔탕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어 내려오는 중이다. 이제 그가 쓴 사마가온 대목을 번역하려고 한다. 어차피 이번 기회가 아니면 스넬그로브의 글을 번역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라 카더라" 식의 간접화법 보다 글쓴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가장 명료하다. 우리는 늦은 오후 사마가온a)에 도착하여 사원으로 올라갔다. 우리의 텐트가 아닌 다른 어떤 대피소를 찾기 위해서다. 사원은 주 법당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30채의 단층 집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비구니 스님들의 처소다. 모두들 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한 스님이 우리를 초대하여 자기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그 스님은 이 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라마의 확실한 소유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혹시 라마가 화를 낼 지도 모르니 하룻밤 이상 머물지 말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우리는 임시 거처를 얻어 물에 흠뻑 젖은 상자들을 풀고 내용물을 텅 빈 방 가운데에 펼쳐놓았다. 방은 어두웠으나 편안했다. 천장의 덮개가 달린 연통은 아주 커서 방에 연기가 차지 않았다. 우리는 불가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우리의 마지막 가리발디(Garibaldi, *건포도를 넣고 살짝 구운 비스킷) 비스킷을 먹으며 인생은 어쨌든 즐거운 것임을 느꼈다. 더구나 빠상은 바북(Babuk, *라르키아 바자르)에서 반 마리 분의 양고기를 사왔으므로 우리는 카레로 양념한 신선한 고기와 무로 벌일 축제를 기대할 수 있었다. 다음날도 여전히 비가 왔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크고 밝은 사원 주방으로 옮기고 사원 전체에 대한 조사를 했다. 건물들은 돌로 지었다. 곰빠는 마낭 동쪽의 모든 다른 곰빠와 마찬가지로 하얀색을 칠했다. 다른 건물은 자연 돌색 그대로 회색이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두껍게 묶은 관목덤풀이다. 그것들은 곰빠 담장 위 뿐만 아니라 출입문과 창문 위 차양에도 놓아두었다. 곰빠 내부에서 우리는 테라코타로 크게 조성한 '연꽃에서 태어난 자'(빠드마삼바바)가 중앙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큰 청동상이 왼편에 있다. 이 청동상은 최근 네팔 밸리의 파탄에서 온 장인이 조성한 것이다. 그곳에는 또 작은 조형상도 셋 있는데 그것은 '연꽃에서 태어난 자', 11면(eleven-headed) '관세음보살', 그리고 수퇘지 머리를 한 여신 바즈라바라히(Vajravarahi)다. 왼편 벽에는 16나한과 '연꽃에서 태어난 자'의 8현신, '죽음의 왕' 그리고 다른 사나운 모습의 신장들이 그려져 있다. 오른편 벽에는 여러 불보살들의 상이 그려져 있다. 이 사원은 닝마파로 프레스코 벽화는 나무판에 그려져 벽에 부착되어 있다.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지역 모든 곰빠의 특징이다. 근처의 작은 곰빠에는 경전이 있다. 오후에 마을에서 라마가 올라왔다. 우리는 그가 전에 무스탕의 로게까르 곰빠에서 잠깐 몇 마디 말을 나누었던 그 순례 라마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전의 그 인연으로 현지에서 우리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라마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후 곧 우리에게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다른 '갸미'(gya-mi, * 사악한 종족)와 세르파들의 나쁜 행위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경우 '갸미'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네 번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을 온 일본 등반대들이다. 마을 주민들은 전염병이 돌아 가축과 양들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은 직접적인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심한 피해는 18명이 죽은 풍겐 사원의 파괴다. 풍겐(dpung-brgyan=팔찌)은 마나슬루의 현지 이름이며 그곳에 거주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신은 첫 '갸미' 등산가들이 돌아간 그 해 겨울, 무례한 그의 성소 침입의 대가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알 수 없는 규모의 무시무시한 산사태로 그의 분노를 보인 것이 확실하다고 마을 사람들은 주장했다. 사원은 사실상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대부분이었던 그곳에서 살던 스님들은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조금 주저하며 그들에게 만일 그것이 진짜 이유라면 신은 일본등반대에게 그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 보였다. 사마와 로의 주민들은 곰빠의 관리자로서 모르는 외국인들의 접근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이것은 그들이 다음 해 일본인들이 다시 왔을 때 적의를 표출하며 근처 어느 산도 등반을 허락하지 않은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완강한 태도 때문에 일본 등반대는 1956년에야 마나슬루에 올랐다. 그들의 성공은 이런 쓴 맛을 대가로 치룬 후에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다른 곳을 등반하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은 일본이 잃어 버린 사원 재건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은 불교국가이며 그곳에서 번창하는 교리는 티베트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티베트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불교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b) 티베트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신성한 경전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그들은 티베트어 불경 외에 다른 경전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과 논쟁하는 것이 피곤하므로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척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 축복 속에 함께 하기를 확실히 원했다. 그 회의에서 조용히 있던 라마는 나중에 우리에게 왜 외국인들은 산에 오르기 위해 오는가 물었다. "그들은 정말로 어떤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듯이 정상에 있다는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단지 카트만두에 있는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등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라마에게 그의 개인 법당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시 우리를 안내했다. 그 방은 25평방피트 정도의 낮은 방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다시 장식되어 있었다. 조각이 아름다운 서가가 맞은편 벽에 진열되어 있고 그곳에는 닝마파의 중요한 특별 경전인 63권의 고귀한 보전(Precious Treasury)이 들어 있었다.c) 왼편 벽의 나무판에는 사나운 신인 카갸(Ka-gyä)와 그의 여섯 호위자들이 그려져 있다. 그 오른쪽에는 닝마파의 주요 네 가지 의례를 대표하는 신들과 라마들의 네 가지 다른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경우에서 '연꽃에서 태어난 자'는 중앙신이다. 그림들은 모든 현대 티베트 그림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이며 확실히 잘 그려졌다. 화가와 조각가는 로의 사람이다. 그의 이런 멋진 작품을 본 후 우리는 새로 재건된 풍겐 사원 방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완전히 파괴된 후라 그곳에는 역사적이고 흥미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마곰빠조차 과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라마는 오래 전 화재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David L. Snellgrove, <Himalaya Pilgrimage>, pp. 244-247) 그곳을 다녀 온 지금 이 글을 읽으니 50여 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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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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