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3,680m

3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 티베트 국경 방문

4,2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20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7고소적응일 - 빙하호수와 사마곰빠 방문

2007. 10. 22(월)


 

아침에 잠이 깨어 풀어 둔 고도계의 온도를 보니 2도다. 어제만 해도 7도였는데 상당히 기온이 내려갔다. 그렇지만 우모복에 모자까지 쓰고 자니 침낭속에서는 춥지 않았다. 마나슬루의 일출을 보기 위해 텐트밖으로 나왔다. 캠프장에서는 산이 조금밖에 보이지 않아 먼저 나와 있던 무진행 보살님과 함께 바깥 길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날이 쌀쌀하다.

세계 10위 봉인 안나푸르나(8091m)를 중심으로 서쪽 34km 지점에는  세계 7위 봉인 다울라기리(8167m)가 있고 동쪽 72km 지점에는 세계 8위 봉인 마나슬루(8156m)가 있다. 마나슬루 동쪽으로는 가네시 히말과 랑탕 히말이 연봉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그레이트 히말라야산맥(Great Himalayas)을 따라 거의 일직선으로 서 있어 네팔 히말라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곧 일출이 시작되었다. 희미하던 마나슬루 왼편 봉우리가 연분홍빛으로 물들더니 차츰 진해진다. 그쪽이 동쪽이다. 일단 해가 뜨자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과 5분이 지나지 않아 두 봉우리 모두 오렌지빛으로 변한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멋진 일출을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 헤매던 남형 씨도 컨디션이 회복되어 일출을 구경한다. 기초체력이 튼튼하니 회복도 빠른 것 같다. 나는 콧물이 여전하다. 며칠 전부터는 입술이 말라 입술연고를 바르고 있다.

사마가온은 마나슬루가 가장 잘 보이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마나슬루 정상까지는 불과 9km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마나슬루 등반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마나슬루를 어떤 이들은 왕관 모양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악마의 이빨로 묘사한다. 아무런 선입관 없이 보면 왕관이고 많은 희생자를 낸 한국 산악인들에게는 악마의 이빨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인 풍겐은 '팔찌'라는 뜻이다.

한국은 마나슬루 원정에 많은 희생을 치뤘다. 1971년 첫 번째 원정에서 김기섭 대원의 추락사로 실패했다. 1972년 두 번째 시도에서는 북동릉 7250m 지점에서 눈사태로 5명의 대원과 세르파 10명이 사망하는 히말라야 등반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를 당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80년 4월 동국대 원정대의 서동환이 세르파 2명과 함께 북동릉을 통해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해가 산을 비추자 산 서편으로 연기같은 것이 바람에 휘날린다. 사실은 연기라 아니라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진 눈이 기화되어 깃발처럼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다. ABC에서 보는 안나푸르나의 일출은 군불지피는 연기나 나듯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넓은 광장에는 30여명의 트레커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날씨는 꽤 쌀쌀하다. 영하 5도는 되는 것 같다. 이윽고 일출이 시작되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 위로 레이저쑈가 시작된 것이다. 빛은 제일 높은 안나푸르나 1봉 끝에 반사되었다. 빛이 닿는 순간 어둠 속에서 설산의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변했다. 황금빛이란 바로 이런 색을 말하는 것이리라.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황금빛.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햇빛이 닿자마자 봉우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을 받아 기화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옛날 시골집에서 다 식은 구들장을 뎁히기 위해 어머니가 새벽 군불을 땔 때 아련히 피어나던 연기같았다. (붓다아이, <2002 ABC트레킹> day 8)

히말라야의 일출은 어느곳이든 황홀하다. 지금까지 구름 때문에 못 본 나가르코트를 제외하고는 어느 히말라야의 일출이든 실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히말라야에서 일출을 본 사람은 다른 곳의 일출은 눈에 차지 않는다. 두 발로 며칠씩 땀흘리며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4000m 고지에 오른 후, 추운 아침 8000m급 순백의 설산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바라보는 감동은 히말라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장엄한 풍광이다.

오늘은 짐을 싸지 않아도 되는 고소적응일이라 한결 여유가 있다. 그것은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날은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피곤한 몸을 추스릴 수 있다. 주방팀은 여전히 음식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들 역시 오늘은 주방도구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반드시 3500m 지점에서 고소적응일을 둔다. 안나푸르나 지역의 마낭, 쿰부 지역의 남체바자르가 3500고지 전후여서 그곳에서는 하루 더 머물여 고소적응을 한다. ABC나 랑탕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따로 고소적응일을 두지 않는데 그것은 최종목적지가 4000m 정도로 히말라야에서는 비교적 낮은 고도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라운딩이나 쿰부 트레킹은 3500m 지점을 통과한 후에도 5000m를 향하여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고소적응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무시하고 운행하다가는 도중에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고소가 심해지면 땀께나 흘리며 오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가 고소을 완화시킨 후 올라가거나 아니면 아예 하산을 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머뭇거리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통계에 의하면 히말라야 트레킹 중 해마다 두 명이 고소로 죽는다고 한다. 8만 명 중 두 명이니 확률은 아주 적다. 그러나 규칙을 무시한다면 당신은 그 두 명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고소는 적응될 때까지는 누구에나 예외가 없다. 히말라야 8000m 원정을 수십 번 다녀 온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대장 같은 '히말라야의 귀신'들도 마찬가지다. 고산병은 제로섬(zero sum)게임과 같아 60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다가 2000m 이하로 내려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몸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 때는 '저산병'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갑자기 많아진 산소량으로 인해 졸음이 쏟아지는 행복한 증상이다. 따라서 2주 이상 저지대에서 머문 후 고산으로 가면 몸은 다시 고소적응이 필요하게 된다. 이전의 적응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 쓸모가 없다.

3천 미터는 고산병이 시작되는 높이다. 4천 미터만 되면 공기 중 산소는 평지의 60%밖에 되지 않고 5천 미터가 되면 53%로 뚝 떨어진다. 기압도 마찬가지로 낮아진다. 높이 오를수록 기압이 낮아지고 바다 밑으로 깊이 내려갈수록 기압이 높아진다는 책에서 배운 과학 지식을 바로 체험하게 된다. 그에 따라 우리 몸의 충격은 엄청나다. 산소가 없으니 피의 흐름이 저하된다. 적혈구의 운반을 산소가 하기 때문이다.

피가 잘 돌지 않으니 몸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마치 주행 중 자동차 연료가 제대로 분사되지 않고 아주 조금씩 분사되는 것과 같다. 그 상태에서 자동차는 쿨럭거리며 비틀거릴 것이다. 가슴에 통증이 오기도 한다. 산소부족으로 혈액농도가 높아져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데다 심장도 팽창하여 박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이 없는 사람을 일러 '박력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혈액농도가 높으니 피를 걸러주는 콩팥에 부담이 간다. 소변색이 진한 갈색으로 변하는 이유다.

걸죽해진 혈액농도를 묽히려면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부족한 산소를 보충하려고 호흡이 가빠진다. 또 낮은 기압으로 온 몸의 세포가 팽창하게 된다. 그래서 손발과 얼굴이 붓는 부종이 생긴다. 이것이 심하면 뇌나 폐에 물이 고이는 뇌수종, 폐수종으로 발전하여 치명상을 입는다.

2002년 겨울, 쿰부 트레킹 중 4750m의 추쿵에서 잘 때 호흡곤란으로 고통을 경험했다. 숨이 막히는 고통이었다. 산소가 부족하면 보통 폐에서 호흡을 빨리하여 산소를 보충하게 되어 있다. 달리기를 하면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5천 미터 가까운 곳에서는 평지와는 달리 공기 중 산소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호흡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호흡을 한 후에 비로소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3천 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우리 몸의 이상적인 1일 적응한계를 300m로 잡고 있다. 즉 하루 300m만 오른다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수많은 현장 경험을 토대로 연구한 것이다.

결국 히말라야에 오른다는 것은 이런 높이에 따르는 몸의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일 큰 관건이다. 추위와 폭설 같은 날씨문제는 2차적인 문제다. 추위는 장비를 잘 준비하면 되고 날씨는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고도적응에 실패하면 무조건 내려가야 한다. 두통과 구토를 동반한 기력상실증이 오면 속된 말로 '히말라야고 나발이고' 아무 생각 없어진다. (붓다아이, <2004 랑탕 헬람부 트레킹> day 2)

마나슬루의 경우 3500 고지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8일이 걸린다. 그만큼 천천히 오르기 때문에 고소적응이 잘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00m 고도에서는 기압이나 산소량이 우리 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산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운항 중인 비행기 기내 기압은 2000m 고도의 기압에 맞춘다.

고산병은 산소량이 해수면의 78%에 불과한 2500m부터 증세가 나타난다. 2500m 지점부터 '고산병미터기'가 작동한다. 제법 오래 2000m 지점에서 지냈으니 고산에 올라가도 고산병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6일간 올라왔던 고도는 별 의미가 없고 이틀 전 2540m의 남룽을 지나면서부터 '미터기' 작동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이틀만에 3530m까지 올라왔으니 고도를 1000m 가까이 올렸다. 고소적응을 위한 조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마가온은 '마나슬루의 마낭'이다.

고소적응일이라고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것은 좋지 않다. 가까운 곳이라도 고도가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갔다 오는 것이 좋다. 고소적응을 위한 불변의 원칙은 "낮에는 높은 곳을 오르고 밤에는 낮은 곳에서 잔다."이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번갈아 오르내리면 우리 몸이 고소에 더욱 잘 적응한다는 것이다.

오늘 일정은 마나슬루 빙하 아래의 비렌드라  빙하호수 방문으로 정했다.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에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세 곳이 있다.  풍겐곰빠와 마나슬루 베이스캠프 그리고 비렌드라 빙하호수이다. 풍겐곰빠는 왕복 6시간 이상 걸리는 조금 힘든 곳이다. 그곳에서 보는 마나슬루와 마나슬루 동면의 풍겐 빙하는 멋있다고 하지만 그런 풍경만 보러 가기엔 너무 멀다. 풍겐곰빠는 1953년 겨울 산사태로 무너진 후 다시 재건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오래된 유물이 없다. 이곳에 온 스넬그로브도 그래서 방문하지 않았다.

마나슬루 베이스캠프 역시 다녀 온 사람의 여행기를 보니 6시간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코스다. 체력보충을 위해 쉬는 날인데 그렇게 힘든 운행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빙하호수는 마을 바로 위에 있어 짧은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마나슬루의 주 빙하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든 호수다. 호수 위 서쪽 능선으로 오르면 마나슬루와 호수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아침에 보명화 보살님과 무진행 보살님이 롯지 뒤로 흐르는 맑은 개울에서 빨래를 했다. 트레킹 중 빨래다운 빨래를 한 유일한 곳이다. 휴식일이기에 가능했다. 이 마을 위로는 시간이 있어도 추워서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내 빨래 몇 가지는 무진행 보살님이 같이 빨아주었다. 물은 예상대로 얼음물이라 고무장갑을 껴도 손이 시리다. 그러므로 히말라야에서는 고무장갑과 함께 내피용 장갑이 필요하다.

마을 주변에도 방목하는 야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물가 초지에도 많이 보인다. 정말 이 마을은 야크가 많다. 이상하게 염소나 양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야크가 이렇게 많으니 야크치즈 공장이 있지 않을까 해서 타시에게 물어보니 치즈공장은 없다고 한다. 가끔 나오는 야크치즈는 카트만두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이었다.

텐트 꼭대기에 빨래줄을 연결해 빨래를 널었다. 빨래줄은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필수품이다. 기왕이면 넉넉하게 7-8m 길이가 좋다. 마트에서 파는 기성제품보다 등산용품점에서 파는 가는 등산용 줄이 더 가볍고 부피가 적다. 양쪽 끝에 작은 알미늄 캬라비너를 묶어두면 설치에 편리하다. 등산점에 가면 그렇게 만들어 준다.

오전 8시, 침낭도 펼쳐 담장에 널고 하이킹에 나섰다. 롯지 바로 앞에 있는 마니월을 지나 마을을 벗어나니 관목숲 지대가 나왔다. 키가 큰 나무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수목한계선에 가까이 왔다는 증거다. 그동안 언제 수목한계선까지 오르나 했는데 운행을 계속 하니 결국 도착했다. 수목한계선이란 날씨가 추워 그 위로는 더 이상 큰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고도를 말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목재용 나무를 뜻하는 팀버(timber)라는 말을 써 팀버라인(timber line)이라고 한다. 몇 번의 트레킹에서 살펴보니 히말라야의 수목한계선은 3800m 정도이다.

그곳 관목 지대에서 장엄한 모습의 마나슬루가 파노라마로 보였다. 이곳이야말로 마나슬루 일출을 가장 보기 좋은 곳이다. 캠프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라 추운 아침에 움직이기가 쉽지는 않다. 캠프 근처에서 보는 모습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라면 당연히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첫날은 그렇다치고 다음날도 그러지 못했다. 그럴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ABC는 롯지 바로 뒤가 안나푸르나 전망대여서 힘들지 않다. 랑탕에서 가장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는 로우레비나 야크도 롯지 위 길을 조금만 오르면 된다. 쿰부에서는 에베레스트 일출을 볼 수 있는 고쿄리나 칼라파타르에 오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5000m가 넘는 정상을 향해 2시간 올라가는 운행은 거의 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일출을 보았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고도가 높아 운행이 힘들 뿐더러 무지무지하게 춥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마나슬루 파노라마 일출은 조금만 수고하면 된다. 고도도 높지 않고 길도 거의 평지길이다. 그러나 10여일 간 운행으로 지치기 시작한 상태라 그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산이라 판단력이 떨어진 것 같다. 체력이 떨어지고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한 고산지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래서 항상 트레킹을 마치고 정상으로 돌아오면 아쉬움이 남곤 한다. 이런 여행기를 쓰는 이유도 다음에 방문할 사람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코스에 대한 정보가 없는 곳은 현지에서 스스로 판단해야 하므로 항상 바쁘다.

CIMG0877.jpg곧 부리 간다키 강바닥으로 들어서 작은 통나무 다리를 건넜다. 우리 앞에는 어제 고소정을을 마친 서양팀이 삼도를 향해 가고 있다. 강바닥 돌이 특이하게 둥근 모양이 많고 모두 하얗다. 오래 전 빙하기 때는 이곳이 모두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주변의 바위들은 모두 빙하에 의해 운반된 빙퇴석이다. 빙퇴석을 영어로는 모레인(moraine)이라고 한다. 히말라야의 고산은 모두 이런 모레인 지대이다.

조금 가다가 빙하 호수가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나슬루가 바로 앞에 떡 버티고 있다. 그곳에서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찍고었다. 타시에게 부탁한 사진은 역시 구도가 시원치 않다. 삼툭이나 타시나 못 찍기는 마찬가지다. 평소 카메라를 다룰 일이 없는 사람에게 좋은 구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 이제는 증명사진으로 만족하고 있다.

관목숲을 헤치고 능선을 향해 오른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충 능선을 목표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갔다. 그런데 내려올 때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길이 있어 힘이 덜 들었다. 처음부터 오르막이 시작되는 능선 초입으로부터 올랐으면 관목을 헤치는 고군분투가 필요 없었다. 타시도 마나슬루가 이번이 두 번째라 미처 그 길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가려면 마을에서 나와 강바닥 길을 오르다가 중간에 만들어 둔 출입문을 통과하자마자 출입문과 연결되어 있는 왼편 돌담을 따라 빙하가 내려오는 계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우리는 조금 빙 돈 셈이다. 강바닥에 횡으로 긴 돌담을 쌓아 막아 둔 것은 야크들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능선에 올라 바라보는 마나슬루와 빙하호수가 절경이다. 빙하에서 녹은 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바위 절벽을 타고 내려온다. 가끔 빙하가 부숴져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위에서 보면 작게 보여도 호수는 길이 950m, 너비 250m인 직사각형 모양으로 작은 호수는 아니다. 돌담이 호수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위성사진에서 확인해 보니 돌담의 길이가 약 1km다. 엄청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스탕에 흔히 있는 2-3km 짜리 돌담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히말라야의 모든 빙하 옆 능선이 그렇듯 이곳도 무른 흙이 아슬아슬하다. ABC나 MBC 절벽 만큼 높지 않지만 자칫 흙이 허물어지면 한참 미끄러질 판이다. 칼스텐은 이곳에서 미끌어졌을 때 "얼음물 목욕을 하지 않기 위한 성공적인 노력의 결과 " 손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한다.

바람부는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마나슬루와 빙하와 진한 에메랄드빛 호수를 감상했다. 북쪽으로는 날카로운 능선을 지닌 쿠탕 히말의 연봉이 달리고 있다. 30분 정도 쉬면서간식도 먹고 햇볕을 쬐기도 하며 놀다가 9시 3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내리막길에서 보니 건너편 길가에 노란 텐트가 여러 동 있다.

캠프사이트가 모두 차는 바람에 저 팀은 어제 마을 바깥까지 밀려났다.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덕분에 멋진 일출을 감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출 한 번 편하게 보려고 일부러 캠프를 버리고 야외로 나가자고 할 수는 없다. 스태프들에게는 잠자리와 주방시설이 갖추어진 캠프사이트가 훨씬 편리하다. 트레커들이 산책 삼아 아침에 30분 걸어 일출을 감상하는 것이 여러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다.

천천히 걸어 캠프로 돌아오니 11시가 되었다. 이쪽 길에도 야크들이 많이 방목되어 있다. 돌담은 이녀석들의 '북진탈출'을 막는 수용소 담장이다. 빙하호수 왕복에 3시간 걸렸으니 가벼운 하이킹이다. 오는 도중 내친 김에 사마곰빠까지 방문하고 싶었으나 점심시간이 되어 오후 일정으로 돌렸다. 타시에게 오후에 곰빠 참배가 가능한지 알아보라고 했다. 잠시 후 돌아 온 타시에 의하면 법당은 하루 두 번, 오전 7시와 오후 6시 예공 때만 개방한다고 한다. 2005년 이곳을 방문한 안드레스의 말과 다르다.

우리는 사마가온에 11시 30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삼도(Samdo)까지는 3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이미 오늘 로에서 고도를 350m 올렸다. 삼도까지 가면 다시 250m를 더 오른다. 라르키야 라를 오르려면 고소적응을 잘 해야 한다. 고산에서 하루에 500m 이상 오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리고 어쨌든 사마가온은 멋진 마을이어서 그냥 통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후 전체를 쉬면서 전망 좋은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마나슬루 원정대는 사마가온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마가온에는 세 개의 롯지와 두 개의 캠프사이트가 있다. 원정대가 몇 주 후 돌아오면 보통 사마의 모든 맥주는 동이난다. 독일 등반가 디터 포르쉐(dieter Porsche)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등정에 성공하고 사마로 돌아와 그들이 묵고 있는 롯지는 물론 다른 롯지의 맥주까지 다 마셔 버렸다. 사마의 맥주가 떨어지자 로에서 사가지고 왔다. 그 결과 윗 계곡의 모든 맥주는 사라졌다. 타격을 받은 사람은 다음날 내려 온 다른 원정대 사람들이었다. 남은 것은 물과 콜라뿐이었으니...

사마가온 옆 작은 언덕에는 오래된 곰빠가 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마지막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능하면 크게 소리쳤다. "오 라마, 오 라마, 어디 있나요." 그러자 5분 후 젊은 라마가 나타났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는 100m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자다가 우리의 소릴 들은 것이다. 그는 즐거이 아름다운 곰빠를 보여주었다.(안드레스, <2005 마나슬루 트레킹> day 9)

점심을 먹고 쉬다가 오후 1시 30분 사마곰빠로 올라갔다. 마을 북쪽 작은 언덕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사마곰빠는 누프리 계곡에서 제일 역사가 깊은 곰빠다. 주지스님(head lama)은 마을에 살고 있고 주법당 주변에 있는 30여 채의 토굴에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는 독특한 형태의 토굴촌이다.

CIMG0880.jpg비록 법당은 들어갈 수 없지만 안드레스의 여행기에서 내부 사진을 다 보았으므로 불만은 없다. 사진을 보니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지역의 곰빠와 별 차이가 없다. 독특한 점이라면 주불을 무스탕의 로게까르 곰빠처럼 빠드마삼바바를 모시고 있는 점이다. 가장 독특한 점은 법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스님네들의 토굴이다. 토굴답게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집 앞에서 곡식을 털며 겨울 준비를 하는 비구니 스님 등 몇몇 스님들이 보였지만 많은 집은 주인이 출타 중인지 나뭇가지로 대문을 걸어 두었다. 칼스텐의 여행기에는 스님의 초청을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고 해서 나도 혹시 누가 불러줄까 싶어 어슬렁거렸으니 그나마 보이는 스님들도 일에 열중할 뿐 별 반응이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캠프로 내려오는 길에 마을에서 올라오는 한 노비구니 스님과 "타시델레"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않게 사마가온 곰빠 참배를 마쳤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불교가 낮설지 않은 한국인 트레커들의 기록에는 사마곰빠를 방문했다는 글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서양인 트래커들의 기록을 보면 예외없이 곰빠를 방문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히말라야 트레킹을 단순한 자연을 즐기는 것에 만족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자연은 물론 그 지방의 문화를 아우르는 경험을 추구한다. 서양인들의 그런 적극적이고 여유 있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그들의 문화와 학문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고 심도있게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무스탕에 대한 연구의 지존이 미셸 페셀이라면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정보는 스넬그로브가 꽉 잡고 있다. 그의 책은 전체를 개관하는 도입부분에 32쪽, 돌포 지역에 130쪽, 깔리 간다키와 무스탕 지역에 40쪽, 마낭과 나르 푸 가온 지역에 37쪽, 그리고 마나슬루 지역에  24쪽, 카트만두 귀로에 10쪽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책에서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의 기술은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전문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도 무스탕에 대한 정보가 여전히 페셀의 책에 근거를 두고 있듯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정보는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에 근거를 두고 있다.

snellgrove_route_00.jpg1956년 9월 9일 늦은 오후, 스넬그로브는 비를 맞으며 사마가온에 도착한다. 3월 1일 카트만두를 출발했으니 벌써 여행기간이  6개월이 넘었다. 그는 빔탕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어 내려오는 중이다. 이제 그가 쓴 사마가온 대목을 번역하려고 한다. 어차피 이번 기회가 아니면 스넬그로브의 글을 번역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라 카더라" 식의 간접화법 보다 글쓴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가장 명료하다.

우리는 늦은 오후 사마가온a)에 도착하여 사원으로 올라갔다. 우리의 텐트가 아닌 다른 어떤 대피소를 찾기 위해서다. 사원은 주 법당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30채의 단층 집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비구니 스님들의 처소다. 모두들 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한 스님이 우리를 초대하여 자기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그 스님은 이 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라마의 확실한 소유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혹시 라마가 화를 낼 지도 모르니 하룻밤 이상 머물지 말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우리는 임시 거처를 얻어 물에 흠뻑 젖은 상자들을 풀고 내용물을 텅 빈 방 가운데에 펼쳐놓았다. 방은 어두웠으나 편안했다. 천장의 덮개가 달린 연통은 아주 커서 방에 연기가 차지 않았다. 우리는 불가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우리의 마지막 가리발디(Garibaldi, *건포도를 넣고 살짝 구운 비스킷) 비스킷을 먹으며 인생은 어쨌든 즐거운 것임을 느꼈다. 더구나 빠상은 바북(Babuk, *라르키아 바자르)에서 반 마리 분의 양고기를 사왔으므로 우리는 카레로 양념한 신선한 고기와 무로 벌일 축제를 기대할 수 있었다.

다음날도 여전히 비가 왔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크고 밝은 사원 주방으로 옮기고 사원 전체에 대한 조사를 했다. 건물들은 돌로 지었다. 곰빠는 마낭 동쪽의 모든 다른 곰빠와 마찬가지로 하얀색을 칠했다. 다른 건물은 자연 돌색 그대로 회색이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두껍게 묶은 관목덤풀이다. 그것들은 곰빠 담장 위 뿐만 아니라 출입문과 창문 위 차양에도 놓아두었다.

곰빠 내부에서 우리는 테라코타로 크게 조성한 '연꽃에서 태어난 자'(빠드마삼바바)가 중앙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큰 청동상이 왼편에 있다. 이 청동상은 최근 네팔 밸리의 파탄에서 온 장인이 조성한 것이다. 그곳에는 또 작은 조형상도 셋 있는데 그것은  '연꽃에서 태어난 자', 11면(eleven-headed)  '관세음보살', 그리고 수퇘지 머리를 한 여신 바즈라바라히(Vajravarahi)다.

왼편 벽에는 16나한과 '연꽃에서 태어난 자'의 8현신, '죽음의 왕' 그리고 다른 사나운 모습의 신장들이 그려져 있다. 오른편 벽에는 여러 불보살들의 상이 그려져 있다. 이 사원은 닝마파로 프레스코 벽화는 나무판에 그려져 벽에 부착되어 있다.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지역 모든 곰빠의 특징이다. 근처의 작은 곰빠에는 경전이 있다.

오후에 마을에서 라마가 올라왔다. 우리는 그가 전에 무스탕의 로게까르 곰빠에서 잠깐 몇 마디 말을 나누었던 그 순례 라마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전의 그 인연으로 현지에서 우리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라마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후 곧 우리에게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다른 '갸미'(gya-mi, * 사악한 종족)와 세르파들의 나쁜 행위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경우 '갸미'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네 번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을 온 일본 등반대들이다.

마을 주민들은 전염병이 돌아 가축과 양들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은 직접적인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심한 피해는 18명이 죽은 풍겐 사원의 파괴다. 풍겐(dpung-brgyan=팔찌)은 마나슬루의 현지 이름이며 그곳에 거주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신은 첫 '갸미' 등산가들이 돌아간 그 해 겨울, 무례한 그의 성소 침입의 대가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알 수 없는 규모의 무시무시한 산사태로 그의 분노를 보인 것이 확실하다고  마을 사람들은 주장했다.

사원은 사실상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대부분이었던 그곳에서 살던 스님들은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조금 주저하며 그들에게 만일 그것이 진짜 이유라면 신은 일본등반대에게 그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 보였다. 사마와 로의 주민들은 곰빠의 관리자로서 모르는 외국인들의 접근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이것은 그들이 다음 해 일본인들이 다시 왔을 때 적의를 표출하며 근처 어느 산도 등반을 허락하지 않은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완강한 태도 때문에 일본 등반대는 1956년에야 마나슬루에 올랐다. 그들의 성공은 이런 쓴 맛을 대가로 치룬 후에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다른 곳을 등반하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은 일본이 잃어 버린 사원 재건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은 불교국가이며 그곳에서 번창하는 교리는 티베트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티베트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불교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b) 티베트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신성한 경전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그들은 티베트어 불경 외에 다른 경전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과 논쟁하는 것이 피곤하므로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척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 축복 속에 함께 하기를 확실히 원했다. 그 회의에서 조용히 있던 라마는 나중에 우리에게 왜 외국인들은 산에 오르기 위해 오는가 물었다. "그들은 정말로 어떤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듯이 정상에 있다는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단지 카트만두에 있는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등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라마에게 그의 개인 법당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시 우리를 안내했다. 그 방은 25평방피트 정도의 낮은 방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다시 장식되어 있었다. 조각이 아름다운 서가가 맞은편 벽에 진열되어 있고 그곳에는 닝마파의 중요한 특별 경전인 63권의 고귀한 보전(Precious Treasury)이 들어 있었다.c) 

왼편 벽의 나무판에는  사나운 신인 카갸(Ka-gyä)와 그의 여섯 호위자들이 그려져 있다. 그 오른쪽에는 닝마파의 주요 네 가지 의례를 대표하는 신들과 라마들의 네 가지 다른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경우에서 '연꽃에서 태어난 자'는 중앙신이다. 그림들은 모든 현대 티베트 그림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이며 확실히 잘 그려졌다. 화가와 조각가는 로의 사람이다. 그의 이런 멋진 작품을 본 후 우리는 새로 재건된 풍겐 사원 방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완전히 파괴된 후라 그곳에는 역사적이고 흥미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마곰빠조차 과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라마는 오래 전 화재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David L. Snellgrove, <Himalaya Pilgrimage>, pp. 244-247)

그곳을 다녀 온 지금 이 글을 읽으니 50여 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든다.


<각주>

a) 사마가온의 현지 티베트 이름은 Rö이다. (back)

b) 1952-3년 한 학자 그룹이 이들 등반대를 따라 왔다. 그들은 조사결과를 세 권의 책으로 냈다. <네팔 히말라야의 동식물(Fauna and Flora of the Nepal Himala)>(1955), <네팔 히말라야의 땅과 작물들(Land anf Crops of the Nepal Himalaya)>(1956)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의 사람들(peoples of the Nepal Himalaya)>(1957), ed. H. Kihara, Japan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Science, Tokyo. (back)

c) 이것의 유럽본은 로마에 있는 투치 교수 서재(Professor Tucci's library)와 런던의 동양학부(the School of Oriental Studies)에 있다. 

manaslu_0508_AdR59__P_1100.jpg

manaslu_0508_AdR56__P_1100.jpg

manaslu_0508_AdR58__P_1100.jpg

manaslu_0508_AdR57__P_1100.jpg

2005년 안드레스가 찍은 사마곰빠 내부 사진

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top으로)

 Manaslu_trekmap_09_10.jpg

manaslu_map_T.jpg

nupri_map.jpg

Manaslu_map_1014_google.jpg

Manaslu_0678-sunrise.jpg

Manaslu_0679-sunrise.jpg

Manaslu_0684-sunrise.jpg

마나슬루 일출

Manaslu_0694.jpg

Manaslu_0696.jpg

Manaslu_0697.jpg

마나슬루 빙하

개울 찬물에 빨래를 하다

텐트 사이에 빨래를 널다

Manaslu_0700.jpg

Manaslu_0707.jpg

Manaslu_0718.jpg

마을을 벗어나면 관목숲이 나온다. 가는 도중 혜명화 보살이 티베트 가족을 만나 사진을 찍고 액정화면을 보여주자 아주 신기해 한다.

Manaslu_0708-pano.jpg

Manaslu_0706-pano.jpg

Manaslu_0711-pano.jpg

들판에서 본 마나슬루 파노라마. 이곳에 나와 일출을 보면 정말 멋있을 것 같다.

Manaslu_0714.jpg

Manaslu_0713.jpg

Manaslu_0740.jpg

서양인 팀과 같이 강바닥을 걷다. 그들은 어제 고소적응을 마치고 삼도로 가는 중이다. 우리는 다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빙하호수 능선으로 향했다.

manaslu_0722.jpg

manaslu_0728.jpg

manaslu_0734.jpg

manaslu_0730.jpg

manaslu_0732.jpg

manaslu_0725.jpg

manaslu_0724.jpg

manaslu_0735.jpg

manaslu_0737.jpg

능선을 향하던 중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처음으로 '마나슬루 트레킹 증명사진'을 찍었다. 뒤쪽 관목숲 능선으로 올라가야 빙하호수가 보인다.

Manaslu_0742-gracier.jpg

Manaslu_0741-gracier.jpg

Manaslu_0743-gracier.jpg

Manaslu_0750-gracier.jpg

Manaslu_0747.jpg

Manaslu_0748.jpg

비렌드라 빙하 호수 능선에서 본 마나슬루와 빙하 풍경

Manaslu_0752.jpg

호수 능선에서 본 북쪽 풍경. 오른쪽은 설산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쿠탕 히말 연봉이다. 삼도에서는 왼쪽 산에 가려 마나슬루가 보이지 않는다.

Manaslu_0759.jpg

능선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야외 캠프가 보였다. 저곳에 캠프를 치면 아침에 멀리 나갈 것 없이 최상이 마나슬루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Manaslu_0760.jpg

내려 오는 길에 만난 방목 하는 야크들. 어느 동물이건 하얀색은 길조로 알려져 있는데 우연히 하얀 야크를 두 마리나 만났다.

Manaslu_0772.jpg

Manaslu_0769.jpg

Manaslu_0763.jpg

Manaslu_0773.jpg

Manaslu_0764.jpg

Manaslu_0775.jpg

사마가온 곰빠. 주 법당을 중심으로 30여 채의 토굴이 둘러싸고 있다. 이를테면 토굴촌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자급자족한다. 한 비구니 스님과 신도가 곡식을 털고 있다. 오른족 하단 사진은 곰빠에서 본 사마가온 마을 모습. 초르텐이 많이 보이는 큰 마을이다.

trek 9. 리히 - 시얄라 - 사마가온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영혼의 산 마나슬루를 만나다

2007. 10. 21(일)


 

트레킹 둘째날 아침, 아직 텐트 안에 있는데 밖에서 "띨 레리~" 하는 소리가 들렸다. 띨 레리?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랐다. 텐트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플라이를 여니 빠상이 홍차를 따르고 있다. 그러니까 ' 띨 레리'는 '티 레디(tea ready)'를 빠르게 한 말이었다. 이 소리는 그 후 매일 하루에 세 번 차 마시는 시간에 들려왔다. 남형 씨는 나중에 이 소리가 들을 때마다 "꼴 레리~"라는 말이 생각났다고 회고했다.

짐을 챙기고 텐트 안에서 차 마시고 세수하고 나와 아침을 먹는 일상은 여전하다. 이제는 이력이 나서 모두들 짐을 잘 챙긴다. 매일 아침이면 떠나는 유목민 생활이다. 그러나 몸만 빠져나오면 나머지 일은 알아서 다 처리해주는 우아한 유목민이다. 이런 편리함은 예전 식민지 시대 때 서양인들이 식민지 나라 하인들을 데리고 뻐기며 다니던 제도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보수를 주는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로 변했지만 여전히 상하관계가 적용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7시 10분 출발. 동쪽 계곡이 열려 있어 해가 일찍부터 비춘다. 날이 맑아 하늘이 푸르고 깨끗하다. 길을 나서니 이곳 리히와 나디출리 사이에 있는 심낭히말(Simnang Himal, 6251m)이 잠시 보이다가 곧 무성한 소나무 숲에 가려졌다.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잡목이 없는 큰 소나무 숲 길을 걸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비히는 좀솜 위의 마을 까그베니(2800m)와 고도가 비슷하지만 풍경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까그베니에서 위쪽은 황량하고 건조하고 환상적인 침식과 풍화작용의 절벽 풍광이 펼쳐진다. 그러나 까그베니 보다 더 높은 이곳 비히에서 시얄라에 이르는 계곡은 몬순의 영향을 받아 울창한 삼림이 형성되어 있다. 비가 내리고 안내리고의 차이로 이같은 극명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천천히 내리막을 내려가 지류 계곡인 히난콜라(Hinan Khola)를 건넜다. 히난콜라는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지점에서 남서쪽에 있는 나디출리(Ngadi Chuli)와 히말출리(Hinmal Chuli) 사이의 능선에서 만들어진 리단다(Lidanda) 빙하에서 나온 물이 흐르고 있다. 콜라를 건너기 위해선 산기슭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6시에서 9시를 거쳐(여기에 다리가 있다) 12시 방향으로 타원을 반바퀴 도는 모양새다.

계곡을 건너 계속 우회전하며 다시 오르막을 올랐다. 앞쪽(북쪽)으로 보이는 쿠탕 히말이 우람하다. 출발한지 30분 후 계곡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고개마루에 우뚝 서 있는 초르텐 카니에 도착했다. 우리가 건너 온 계곡 뒤쪽으로 히말출리의 능선이 조금 보였다. 즐거운 산길이지만 당연히 오르막이 있어 힘을 좀 쓰야할 때도 있다. 초르텐과 긴 마니월을 지나고 건너편 계곡에 있는 마을도 보며 운행을 계속했다.  

manaslu 0607 HH  11  P 0325쇼(Sho, 2930m)마을 입구의 카니에는 리히에서 정확하게 1시간 걸린 8시 10분에 도착했다. 카니 옆 바위벽에는 파란 글씨로 "WELCOME TO MANASLU"라는 글이 쓰여 있어 마나슬루가 곧 나타나리라는 것을 예고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계곡이 시원하게 넓어졌다. 그리고 계곡 끝에 하얀 설산이 보였다. 마나슬루는 아니고 그 북서쪽에 있는 나이케 피크(Naike Peak, 6416m)다. 마나슬루 위쪽의 산군은 북서쪽으로 줄지어 마나슬루 북봉(Manaslu North, 7157m), 나이케 피크, 라르키아 피크(Larkya Peak, 6249m)로 이어지고 라르키아 라에서 잠시 숨을 고른 후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라트나 출리(Ratna Chuli, 6767m)로 연결된다.

길을 가운데 두고 집들이 경작지 근처 여기저기에 그룹을 이루고 있다. 돌집에 너와지붕이다. 잘 마른 누런 보리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밭에는 외로이 혼자 보리를 따는 사람도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보리를 밑둥까지 베지 않고 꼭다리만 따 대나무 바구니에 담는다.

쇼는 마을이 둘이다. 첫 번째 마을을 지나 잠시 나오는 산길에서 뜻밖의 풍경을 만났다. 따뜻한 햇볕을 쬐고 있던  한 노숙자가 우리가 지나가자 접시를 두드리며 노래한다. 앞에는 음식을 끓여먹는 시커먼 그릇이 타다 남은 나뭇가지 위에 있다. 언뜻 그 모습을 보고 무애가를 부르면서 유랑했다는 원효스님이 떠올랐다. 그냥 호기심만 가지고 지나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심했다. 보시를 조금 했어야 했다. 그런 자비심은 어떤 상황에서도 저절로 우러나와야 한다. 나는 아직 많이 부족함을 느낀다.

마나슬루 지역의 7000m 이상의 산들(*보우다는 6672m)

두 번째 마을에 들어서니 설산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이곳도 마을 집들이 넓게 흩어져 있다. 그리고 마을을 벗어나는 곳에서 드디어 마나슬루가 나타났다. 트레킹 9일만에 마나슬루를 만나니 감개가 무량하다. 설산 아래 보이는 조그만 동산 위에 로(Lho, 3100m)의 곰빠가 보였다.

9시 10분, 로 마을 롯지 앞 테이블에서 쉬었다. 바람이 세게 분다. 로는 상당히 큰 마을이다. 마나슬루 북쪽에 위치한 마을 중 큰 마을로는 이곳 로와 오늘의 목적지 사마가온, 그리고 마지막 마을인 삼도가 있다. 물을 마시고 보명화 보살님이 늘 공급해 주고 있는 간식을 먹고 있으니 아이들이 우루루 몰려와 구경한다.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모른체 했지만 우리만 먹고 있자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계곡 위로는 마나슬루와 그 북쪽 연봉이 보이고 계곡 아래쪽으로는 가네시 히말의 끝바락이 보인다. 티베트와 북쪽 국경을 이루고 있는 왼편의 쿠탕히말이 우람하다.

20분 쉬고 다시 출발하는데 타시가 한 마을 남자를 안내해 왔다. 약을 좀 달라고 한다. 자기 아내가 입 안이 헐고 부었는데 10일 동안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고 한다. 내가 무슨 의사도 아니고 환자의 상태도 직접 보지 못한 상태에서 함부러 약을 처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사정이 딱하니 고개를 저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처방은 항생제다. 헐어 부었다는 것은 염증이 있다는 말이고 염증에는 항생제가 특효약이다. 아니더라도 최소한 부작용은 없을 것이다.

이틀 전부터 타시가 운반하고 있는 구급배낭을 열어 항생제 7일분(21캡슐)을 주었다. 식후 한 알씩 하루에 세 번 복용하라고 약병에 쓰인 용법을 일러주었는데 음식이 부실하고 항생제 내성이 거의 없는 이곳 사람들에게는 아무래도 좀 과도한 투약일 것 같다. 하루에 두 알 정도만 복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전스님의 책 <달라이라마와 함께 한 20년>에도 그런 내용이 있다.

길을 나서자 마나슬루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초르텐과 마니월 옆을 지나가는 트레커들의 모습이 멋진 히말라야 고산트레킹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이곳에서부터 사마가온까지 보이는 마나슬루는 북서면이고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마나슬루의 모습이기도 하다. 나중에 다람살라 가는 도중 북면과 빔탕에서 남서면이 조금 보이지만 우리가 늘 보아 온 마나슬루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 모습이다.

두 개의 뿔이 솟아 있는 독특한 모양의 마나슬루는 산스크리트어 마나사(Manasa)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영혼(soul)이란 뜻이다. 그래서 마나슬루는 '영혼의 산'이다.  예전에는 쿠탕(Kutang) 1로 알려졌으며 인도측량국 조사에서는 단순하게 피크 30(Peak xxx)으로 표기했다. 1956년 이곳을 방문한 스넬그로브에 의하면 마나슬루의 현지 이름은 풍겐(Pung-gyen)이며 풍겐은 마나슬루에 거주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고 한다.

마을을 벗어나 산길을 걸었다. 전봇대와 전깃줄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다. 이곳에는 수력발전소 있다는 말을 들었다. 길은 또 하나의 지류계곡을 건너기 위해 계속 내려가고 있다. 리히 이후부터는 더 이상 오른쪽 계곡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다. 내리막은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되다는 뜻이라 반갑지 않지만 히말라야의 길은 높은 고개를 넘을 때 외엔 선택의 여지없이 항상 그렇다.

10시 경 작은 작은 나무다리가 있는 다모난콜라(Damonan Khola)에 도착했다. 이 작은 지류는 풍겐 빙하에서 발원한 물이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다모난 콜라를 따라 계속 오르막이 이어졌다. 길가에 한 가족들이 쉬고 있다. 송아지와 말도 있는데 아이들과 10여 명이나 된다. 타시는 앞장 서고 나는 사진을 찍느라 제일 뒤에 처져 있으니 무슨 일로 가족 전체가 내려가는지 물어볼 길이 없다. 그냥 "타시델레!" 인사만 교환했다.

시얄라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어떤 곳은 지그재그로 나 있다. 사람들이 지치기 시작한다. 다시 무성한 숲을 지나는데 계곡 물가에 있는 수력발전소 돌집이 보인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주변의 여러 마을(쇼, 로, 시얄라,사마가온)로 공급된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수력발전소다. 삼툭이 남걀 마을에 설치하고 싶어하는 수력발전소다.  이전에 삼툭과 트레킹을 같이 할 때마다 삼툭은 수력발전소를 보면 관심을 가자고 살펴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로서는 고향을 위해 하고 싶은 평생의 숙원사업일 것이다.

네팔에서 일이란 우리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 정국도 불안정하여 약속한 정부보조금은 백년하청이다. 우기는 없지만 겨울철 혹한기가 있어 건설 시기도 제한된다. 건자재 수송도 중요한 것은 헬기로 운반해야 하니 비용이 많이 든다. 기왕에 짓는 수력발전소니 주변 다른 마을도 같이 쓰자는 요청이 들어와 발전 용량을 늘여야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비용은 기하급수로 늘어나 작년 한국에서 모금만 돈으로는 어림도 없다. 그런 큰 프로젝트를 혼자 동분서주 하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삼툭 외에 대외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이 남걀에는 전무하니 그의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어쨌든 일이 잘 되어 하루빨리 남걀과 그 주변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시얄라를 목재소로 묘사한 이전 방문자들의 여행기처럼 주변 나무가 많이 잘려 있다. 그렇게 정신없이 오르다가 쉬다가를 반복했다. 마지막 피치를 올리는 길에서 숲 위로 설산이 보였다. 히말출리 아니면 나디출리일 것이다. 11시 30분 시얄라(Syala, 3500m)에 도착했다. 지그재그 길을 오르면서 본 마을 입구를 알리는 카니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카니를 지나고 다시 멋진 초르텐 카니를 지나자 목재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재재소 같은 넓은 마을이 나타났다. 한 노인이 길가에 혼자 마니차를 돌리고 있다.

레이놀즈가 처음 마나슬루를 방문했던 1992년에 시얄라에는 집 네 채와 작은 곰빠 하나만 있었는데 4년 후 다시 오니 20채 이상의 집이 들어서 있고 주변의 나무들이 무분별하게 벌채되어 파괴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 목재는 티베트로 팔려간다. 경작지가 적은 이곳 사람들에게는 나무가 생계를 보전해 주는 좋은 자원이기는 한데 환경 훼손이 심하다. 올 때 산사태 비슷한 길도 그런 남벌로 생긴 결과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산골이라  거주민이 많지 않아 대규모 벌채가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고, 삼림이 워낙 무성하여 별로 표시가 나지 않으며, 주변을 제외하면 대부분 급경사 절벽지대라 나무 베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나무를 베더라도 한계가 있다. 2000년 가을 이곳을 지나갔던 칼스텐 네벨(Carsten Nebel)은 그의 여행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이제 터키석 색깔이 된 부리 간다키 강은 먼 아래에 있다. 우리는 작은 지류를 따라 갈 것이다. 그곳에 수력발전기를 세울 계획이 있는 모양이다. 강력한 기둥을 세우기 위한 숲길이 나 있고 큰 통나무들이 잘려지고 있다. 십여 명의 거칠게 보이는 남자들이 나무를 야크 등에 싣고 있다. 티베트로 나무를 가져가면 많은 이익이 남는다. 나무를 밀과 교환하여 로 마을로 가지고 온다. 그들의 도움으로 나는 다시 사마로 가는 길을 발견했다. 얕은 여울의 진탕길을 조금 지난 후 나는 우리 그룹을 따라잡았다.

전나무 숲 그늘을 걷는 것은 즐겁다. 녹색의 숲 끝 위로 솟아 있는(나디 출리?) 가파르고 얼음이 덮여 있는 능선 아래의 소풍길을 걸은 후 고원을 향해 �은 오르막을 올라 시얄라(Shyala)에 도착했다. 벌목은 시얄라의 번창하는 사업이다. 40채의 나무 오두막들은 가게 또는 벌목꾼들의 집이다. 마을 주변의 나무들은 대부분 벌목되었다. 풍광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좋지만 시얄라는 슬픈 마을이다.

거대한 산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다. 히말 출리와 피크 29(최근 나디 출리로 명명되었다)가 왼쪽에 있고 마나슬루와 큰 빙하는 바로 앞쪽에 있다. 다른 설산 봉우리들은 오른쪽에 있고 우리가 방금 지나왔던 계곡의 먼 끝에는 가네시 히말이 있다. 눈과 얼음의 원형극장이다! 그러나 아래쪽 마을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된다. 벌목은 통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우리는 자연보호구역에 있다. 아마 정부 공무원들의 감시도 있을텐데도 무차별 벌목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http://www.myhimalayas.com/manaslu/3.htm)

마을 제일 위쪽 점심을 먹을 캠프사이트로 가자 모두 정신이 없다. 마지막 운행을 오르막으로 장식한데다 이미 11시 30분이나 되어 점심시간이 1시간 이상 지나 허기가 진 탓이기도 하다. 주방에서 내 온 차와 비스킷을 대충 먹고는 쓰러진다. 3500 고지라 고산병이 나타나기 쉽다. 어제 상태가 좋아졌던 혜명화 보살은 오는 도중 구토를 했다. 백산스님과 남형씨는 두통이 있다고 한다.

두통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니 크게 위험하지 않으나 구토는 문제가 있다. 다시 다이아목스를 먹도록 하고 충분히 쉬도록 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니 음식이 잘 넘어갈 리가 없다. 모두 그저 먹는 시늉만 한다. 가장 왕성한 식욕을 보이는 사람은 나뿐이다. 나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팀을 이끄는 사람이라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비록 전깃줄이 어지럽게 설치되어 있고 목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 분위기를 망치긴 해도 설산이 원형으로 둘러싸여 있는 시얄라는 멋진 곳이다. 이곳에서 보이는 설산은 왼편부터 히말출리, 나디출리, 마나슬루, 마나슬루 북봉, 나이케 피크다. 맞은편에는 6천 미터급 쿠탕히말 연봉들이 원형극장의 나머지를 채우고 있으니 그 장엄한 풍광을 한 번 상상해 보시라!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을 보니 시얄라에서 고소적응을 위해 하루 더 머무는 것도 괜찮다고 쓰여 있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도 이곳에서 하루 더 머물렀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원형 설산의 멋진 일출을 감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시얄라에서 사마가온까지는 1시간 30분 거리니 이곳에서 머문 다음 날 오전에 사마가온까지 간 후 캠프를 치고 오후에 빙하호수를 다녀오는 일정이 가능하다.

점심을 먹고 1시에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는 카니를 지나 작은 다리를 하나 건너 내리막길을 계속 가다가 두 번째 지류를 만났다. 눔라 콜라(Numla Khola)다.. 이곳은 위쪽 언덕이 무너져 내린 듯한 모양이라 마치 산사태가 난 듯한 모습이다. 이곳이 마나슬루 북서면의 빙하인 풍겐 빙하에서 발원한 물이 흐르는 계류다.

다리를 건너 다시 조금 올라 넓은 길로 들어섰다. 관목이 많이 있다. 이제 수목한계선에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그리고 코너를 돌자 갑자기 뻥 뚫린 넓은 계곡이 눈 앞에 펼쳐졌다. 사마가온 앞의 초원지대인데 이곳이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넓은 초지이다. 이 정도면 히말라야에서 대초원으로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넓다. 점점이 보이는 것은 말도 있지만 대부분 야크며 수 백 마리가 흩어져 풀을 뜯고 있다.

초원으로 들어서기 전 풍겐곰빠로 올라가는 길이 나왔다. 3시간 거리라고 이정표에 쓰여 있다. 스넬그로브에 의하면 1953년 일본팀이 마나슬루 등정을 시도하다가 실패한 다음 해 산사태가 일어나 풍겐곰빠가 무너져 버려 당시 곰빠에 거주하던 18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풍겐 신이 이방인들의 무례한 방문에 노하여 그런 일이 있어났다고 믿어 그 해 2차 일본원정대가 도착했을 때 마나슬루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았다. 결국 일본대는 마나슬루를 포기하고 대신 가네시로 방향을 틀었다. 나중에 일본은 풍겐곰빠를 새로 재건해 준 후에 마나슬루 초등에 성공한다. 1956년의 일이다.

구름이 몰려와 날은 춥지만 오랜만에 넓은 초원을 걸으니 발걸음이 가볍다. 초지의 첫 광장 중간에 돌로 쌓아 만든 투박한 초르텐이 있다. 시얄라에서 목재를 가지고 간 포터들이 쉬고 있다. 이들은 전통 있는 여행사 포터들이라 노란 제복을 입고 있다. 트레킹에 목재가 필요할 까닭은 없을 테고 아마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양이다. 넓은 초원에는 야크들이 많이 흩어져 있다. 이렇게 많은 야크를 한꺼번에 본 것은 처음이다.

우리 팀 중 야크를 본 사람은 나와 무진행 보살님 뿐이다. 쿰부 트레킹 때 페리체 부근에서 많이 보았다. 추쿵에서 임자체 베이스캠프 가는 도중 인적 없는 벌판에 야크 떼를 방목하고 있었다. 랑탕 지역에도 야크가 흔하다. 랑탕 트레킹의 종착지인 컁진의 야크치즈 공장은 맛 좋은 무공해 치즈로 아주 유명하다. 안나푸르나 지역에서는 마낭 위쪽으로 볼 수 있다. 초지가 귀한 무스탕에서는 야크들이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고원으로 가 있어 볼 수 없었다.

초원 끝에는 사마가온 마을 입구를 표시하는 크고 멋진 초르텐 카니가 서 있다. 카니를 통과하자 사마가온(Samagaon, 3530m)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마나슬루 북쪽 지역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가장 먼저 초르텐과 곰빠와 마니월 무더기를 빙 두르고 있는 있는 마니차 담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바 '불교복합센터'다. 사마가온의 '대초원'과 더불어 마나슬루 지역의 명물 중 하나다. 마을은 그 뒤쪽으로 보였다.

마을 길에 들어서자 늘 그렇듯 '환영위원회' 위원들이 반겨(?)준다. '히말라야 환영위원회'는 항상 아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큰 마을이라고는 해도 집을 꾸며 사는 모습은 형편없다. 작년에 무스탕을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사는 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너무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미처 예상치 못했던 문화에 대한 주관적인 충격 때문이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충격 받을 일이 아니었다.

마나슬루에 비하면 무스탕 사람들은 멋진 주택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무스탕은 대부분 이층집이다. 나무가 귀해 흙벽돌로 지었지만 외벽은 하얗게 칠해 말끔하다. 평평한 지붕에는 장작더미를 빙 둘러 쌓아 놓았다. 곰빠는 붉은 색으로 칠해 권위가 있다. 곰빠 외벽에는 특별한 상징이 있는 흰색과 붉은색, 푸른색 칠을 해 품위가 있다. 황량함 속에서 빛나는 진주 같은 무스탕 마을의 풍광은 정말로 티베트 불교문화가 찬란하게 피어났던 한 왕국의 문화를 거침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이곳은 수 백년 전 티베트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티베트에서 잘 먹고 잘 사는 사람들이 이곳까지 넘어 올 이유가 없다. 살 길을 찾아 떠난 유랑민들이었다. 나무가 많기는 하지만 경작지가 적은 척박한 땅이다. 고급문화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에서 보았던 곰빠를 흉내내어 지었고 집도 낯선 몬순의 기후에 맞추어 지었다. 비가 많은 지역은 집 단장을 하지 못한다. 인도의 집들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대만에 갔을 때 아파트 외벽이 형편없는 것을 보았다. 그곳도 우기가 길어 여름이면 아파트 벽에 곰팡이가 낀다(보드나트의 불탑을 매년 가을에 새로 회칠하는 이유도 몬순 때 이끼가 끼기 때문이다). 매년 반복되는 우기이다 보니 해마다 성물(聖物)도 아닌 아파트 외벽을 새로 칠할 이유가 없다.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반복되는 현상에 대한 체념에서다. 그대신 살고 있는 아파트 내부는 아주 화려하게 잘 꾸미고 산다고 한다.

마나슬루의 집들은 이층 양식이기는 하나 겉에서 보면 1층이나 다름없다. 1층은 우리로 치면 조금 높은 마루처럼 보인다. 집도 허름해서 지붕에 건초를 잔뜩 쌓아 놓은 가옥을 보고 처음에는 가축우리인 줄 알았다. 다른 면에서 생각해보면 그만큼 이곳 사람들은 집에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의 삶이라는 뜻과 같다.

그래도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은 외부에서 보는 시각과는 달리 행복할 것 같다. 문명의 혜택도 받지 않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매일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없다. 제3 세계 국가의 빈민가 사람들처럼 할 일이 없어 방황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집이 있다. 좁은 토지나마 경작지가 있고 목축을 하며 티베트와의 교역을 통해 이익을 남기고 있다. 최소한 먹고 자고 입는데 대한 부족함은 없다. 다만 의료와 교육시설의 부족은 큰 문제로 남아 있다.

사실 동물처럼 인간의 삶을 단순화하면 의식주 세 가지로 귀결된다. 이 세 가지만 해결되면 걱정이 없다. 나머지는 별로 쓸데없는 욕심일 뿐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이나 은둔자들은 깊은 산골에 들어가 소박한 생활을 하며 보다 본질적인 것에 정신을 집중한다. 부와 명예와 권력은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한여름 뜬 구름과 같으며 언젠가는(그리 멀지 않다) 사라질 이 몸을 위해 맛난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며 세상에서 명성을 날려본들 결국에는 한 줌 재가되거나 땅에 묻혀 썩고 만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다.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지 롯지촌이 나타났다. 이곳의 집들은 신식으로 지은 쿰부 지역의 이층집 모양을 하고 있다. 마나슬루 트레킹 여행자들이 늘어나면서 새로 지은 건물이다. 캠프사이트는 모두 이곳에 있다. 캠프사이트마다 만원을 이루고 있다. 길가에 'Video Hall'이라는 팻말이 전봇대에 붙어 있어 웃음이 나왔다. 이곳까지 와서 비디오를 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오후 2시 20분, 초르텐 카니 옆에 있는 <노둡(Ngodup) 롯지> 캠프사이트로 갔다. 길가 간판에는 주방, 식당, 포터용 방, 쇼핑센타, 화장실을 제공한다고 쓰여 있다. 이 롯지에 마침 전화가 있다. 백산스님이 여러 번 시도 끝에 아는 스님과 통화에 성공했다. 필림에서 잃어 버린 신용카드를 중지시켜 달라는 내용이다. 요금은 1분당 100루삐. 산간오지치고는 싼 편이다. 작년 무스탕에서는 1분당 250루삐 주었다.

오늘은 제일 건장한 사람인 남형 씨가 고소를 먹고 헤맨다. 오후에 맛있는 감자를 먹었는데 저녁 식사 때는 텐트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고소를 염려해 올 때 공항면세점점에서 산 담배 한 포를 트레킹 2일 째 되는 날 포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금연중인데도 고소가 왔으니 보람이 없다. 그렇지만 흡연을 계속 했다면 상황이 더 나빠졌을지 모른다. 누나인 보명화 보살님의 걱정이 태산이다. 저녁 식사 중 혹 시장하면 먹으라고 삶은 감자를 갖다준다.

고소가 오면 아무 것도 먹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남형 씨에게 다이아 목스를 주고 나서 나머지 사람들도 예방차원에서 한 알씩 먹었다. 낮에 조금 헤맸던 혜명화 보살은 이제 괜찮다고 한다. 내일은 캠프를 이동하지 않는 고소적응일이니 충분히 쉬면 상태가 좋아질 것이다. 내일도 좋아지지 않는 사람은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말에 모두들 긴장한다. 최소한 로까지는 되돌아 가야 한다. 하루 여유가 있으니 다음날 올라오면 되지만 오늘 오르막에서 흘린 땀을 생각하고는 모두 제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이다.

트레킹의 반이 지났다. 고소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천천히 고도를 높이는 데다 하루 일정이 그리 길지 않아 체력 부담이 적으므로 극단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삼도에서도 고소적응을 위해 하루 더 머물 예정이라 여유가 있다. 3500고지의 밤은 제법 쌀쌀했다.
 

trek 9. 리히 - 시얄라 - 사마가온   (top으로)

 Manaslu_trekmap_09_10.jpg

manaslu_map_T.jpg

nupri_map.jpg

Manaslu_0547.jpg

Manaslu_0548.jpg

왼편 지류 계곡을 유턴하여 북쪽 쿠탕 히말을 향해 가는 따뜻한 산길. 잠시 후 오르막 끝 초르텐 카니 앞에서 쉬었다. 뒤로 마나슬루 히말의 설산이 보인다.

Manaslu_0555.jpg

Manaslu_0559.jpg

쇼 마을 입구의 카니. 바위에 "마나슬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써 있다.

Manaslu_0564.jpg

쇼의 아래 마을과 윗 마을 사이의 길에서 따뜻한 햇볕아래 접시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유랑자. 이런 산골에서는 드문 일이다. 지금까지 트레킹 중 이런 사람은 나도 처음 보았다.

Manaslu_0575.jpg

Manaslu_0578.jpg

쇼의 윗마을에서 처음으로 마나슬루(제일 왼쪽)를 보았다. 이곳의 가옥은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방이 주거용이다. 이 집도 묵재를 많이 다듬어 놓았다.

Manaslu_0591.jpg

Manaslu_0594.jpg

제법 큰 로 마을 풍경. 조금 어수선하다. 마나슬루가 가까이 다가왔다.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서 있는 제법 큰 규모의 로 곰빠.

Manaslu_0597.jpg

Manaslu_0598.jpg

로의 롯지 엎 탁자에서 휴식. 아이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우리끼리 간식을 먹자니 좀 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누어 먹는 것이 우리의 정서인데... 아래쪽을 보니 그곳에도 지붕에 타르초를 걸어 둔 곰빠가 있다. 왼편은 티베트와 북쪽 국경을 이루는 쿠탕 히말이다. 계곡 사이로 가네시 히말이 조금 보인다.

Manaslu_0602.jpg

Manaslu_0604.jpg

마나슬루와 마나슬루 노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초르텐과 마니월이 멋진 히말라야의 풍경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티베트풍의 초르텐을 보았다. 로에서 보는 마나슬루도 멋있다. 예리한 능선이 잘 보인다. 이곳의 일출도 장엄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일출의 장엄한 모습이 짐작된다.

Manaslu_0605.jpg

Manaslu_0611.jpg

밭에서 보리를 수확하는 아줌마들. 꼭지만 따 바구니에 담는다. 로를 지나 작은 지류 계곡을 건넜다. 마나슬루 히말이 만든 능선 아래에 있는 풍겐 빙하에서 내려오는 물이다. 다리를 건넌 후부터는 계속 오르막이다. 오른쪽 상단의 전봇대가 안내하는 길은 계곡 상류로 향하고 있다.

Manaslu_0612.jpg

Manaslu_0615.jpg

윗마을에서 내려오는 한 가족을 만났다. 아이들이 많은데 어린 아이들도 잘 걷는다. 오르는 도중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한 산사태가 난 길이 있다. 방향은 마나슬루를 향하고 있으니 계속 계곡 상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Manaslu_0616.jpg

Manaslu_0617.jpg

계곡 뒤로 설산이 보였다. 라니피크(6693m)와 심낭히말(6251m), 그리고 오른쪽 사진은 피크 29로 불렸던 나디출리(7871m)다.

Manaslu_0619.jpg

시얄라의 수력발전소 건물. 이곳에서 만들어진 전기는 주변의 여러 마을(쇼, 로, 시얄라,사마가온)으로 공급된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규모가 큰 수력발전소다.

Manaslu_0622.jpg

Manaslu_0624.jpg

무진행 보살님이 시얄라를 향한 지그재그길 마지막 구간을 오르고 있다. 전나무 숲 뒤 계곡 건너편으로 우람한 히말출리(7893m)가 나타났다. 히말출리는 삼도에서 제일 잘 보이고 멋있다. 삼도에서 마나슬루는 앞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Manaslu_0627.jpg

 Manaslu_0630.jpg

시얄라 마을 앞 뒤에 서 있는 초르텐 카니는 문양이 아름답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유일하다. 시얄라는 설산으로 둘러싸인 원형극장으로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영혼의 산 마나슬루가 바로 뒤에 우뚝 서 있다.

Manaslu_0631.jpg

Manaslu_0636.jpg 

남서쪽에 있는 마나슬루, 마나슬루 노스, 나이케 피크. 전깃줄과 목재가 어지럽지만 이곳 사람들의 생계수단이니 나무랄 수만은 없다. 그냥 그 장면은 무시하고 감상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마을 위 캠프사이트에서 점심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했다.

Manaslu_0640.jpg

 Manaslu_0642.jpg

시얄라에서 조금 내려오면 다시 산사태가 일어난 듯한 계곡이 하나 나온다. 풍겐 곰빠 아래 빙하에서 내려오는 지류다. 다리를 건너 왼편 사진 중앙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가면 오른쪽 사진의 넓은 평지길이 나온다.

Manaslu_0644.jpg

 Manaslu_0649.jpg

평지 끝 코너를 돌면 갑자기 넓은 '대초원'이 펼쳐진다. 가슴이 툭 트이는 풍경이다. 초원 입구에 돌로 투박하게 쌓은 초르텐이 하나 있다. 주변에는 온통 야크들이 흩어져 풀을 뜯고 있다.

Manaslu_0657.jpg

 Manaslu_0660.jpg

초지 끝에 있는 초르텐 카니를 통과하면 사마가온이 눈 앞에 보인다. 앞에는 초르텐, 마니월, 곰빠가 한데 모여 있는 '불교복합센터'가 있고 그 뒤로 올드빌리지가 이어진다. 롯지촌인 뉴빌리지의 이층 건물은 그 뒤쪽으로 보인다. 중앙 상단의 동산에는 사마곰빠가 있다. 센터는 마니차를 설치한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마니차를 돌리며 운행하는 것이 심신에 좋다.

Manaslu_0661.jpg

불교복합센터의 규모를 보아서 짐작할 수 있지만 사마가온이 마나슬루 북쪽 누프리 계곡 티베트 마을에서 가장 큰 중심 마을이다. 곰빠위 역사도 가장 깊다. 스넬그로브가 방문할 당시 이 마을이 제일 윗마을이었다.

Manaslu_0662.jpg

 Manaslu_0663.jpg

마을로 내려와 돌아본 초르텐 카니. 뒷산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멋있다. 오늘도 오후가 되자 어김없이 산 아래에서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Manaslu_0664.jpg

 Manaslu_0665.jpg

마을은 이미 사진을 보았지만 생각보다 더 누추했다. 아마 작년 무스탕에서 본 마을과 은연 중 대조한 탓일 것이다. 그래도 언제나 환영인파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Manaslu_0667.jpg

 Manaslu_0668.jpg

올드빌리지에서 롯지촌으로 가는 짧은 길. '비디오홀'이라는 간판 사진 아래 안드레스는 "놀라운 제안"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간판 아래 보이는 이층집이 노둡 롯지다. 건물 앞마당이 캠프사이트인데가 타르초가 걸려 있다.

 manaslu_0508_AdR31__P_1100.jpg

2005년 11월 안드레스가 찍은 노둡 롯지 사진. 그들도 이곳에서 묵은 모양이다. 오른쪽 방이 식당이고 식당에 들어서면 바로 왼편으로 주방으로 연결된 문이 있다.

trek 8. 갑 - 남룽 - 리히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고산 트레킹이 시작되는 누프리 계곡

2007. 10. 120(토)


 

며칠 째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 기침은 나오지 않는데 콧물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차콜라에서 땀을 잔뜩 흘린 후 찬물에 목욕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 무진행 보살님이 주는 감기약을 먹고 있지만 쉽게 나을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서 주머니에는 여차하면 코를 풀 수 있도록 휴지를 준비하고 있다.

출발 전 1리터짜리 물통에 뜨거운 물을 2/3 정도 받고 차를 조금 넣는다. 둥글레차와 우롱차(烏龍茶), 녹차를 가져왔는데 우롱차가 제일 인기가 있다. 둥글레차 티백은 바로 먹어야지 물병에 오래 넣어두면 흐물흐물해져 지꺼기가 나오고 맛도 별로다. 우롱차의 향은 히말라야의 물 맛을 먹기 좋게 바꾼다. 이 차가 물이 좋지 않은 중국에서 발달된 이유를 알겠다. 녹차는 물이 나쁘면 무용지물이어서 그냥 생으로 먹는 편이 나았다. 우롱차는 차잎이 물에 풀리면 아주 커지므로 10알 정도만 넣어야 한다. 말린 잎이 작다고 조금 많이 넣으면 병의 반이 차잎으로 찬다. 찻물도 너무 진해진다.

7시 15분 캠프를 출발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숲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 계곡에 놓인 나무다리가 보였다. 저 다리를 건너가는가  했는데 계속 직진한다. 그 다리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건너편 마을로 가는 길이란다. 무성한 숲길이 계속되었다. 자주 보이는 마니월과 수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마니차만 없다면 이곳이 히말라야가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요세미티 계곡을 걷는 기분이다. 경사도 완만한 오르막이라 힘들지 않았다.

맞은 편 계곡 우람한 절벽을 바라보며 산길을 돌아가다가 8시 경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갔다. 이곳은 강이라기 보다는 계곡 수준이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계곡도 좁아지고 수량도 적다. 한 곳은 병목현상이 있어 물이 우렁차게 흐른다. 양쪽 바위가 물에 닳아 반들반들하다.

이곳은 앞 장에서 소개했던 스넬그로브의 글 초반부의 "우리는 불어난 급류 위에 놓인 단단한 나무다리를 건너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곧 천연 바위다리를 통해 오른쪽 사면으로 되돌아 왔다. 아래쪽 깊은 계곡에는 부리 간다키가 포말과 세찬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에 해당하는 곳이다. 스넬그로브는 위에서 내려왔고 우리는 위로 올라가고 있다. 지금은 천연다리 대신 작은 다리가 있다. 그 옆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무너진 외나무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무성한 숲 사이 바위 옆에서 휴식. 랄리구라스(로도덴드론) 나무와 대나무, 전나무, 호랑가시 나무가 함께 섞인 숲이다. 가이드북을 보니 남룽 까지는 이런 길이며 원숭이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끔 답답한 숲 속을 빠져나와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니 다행이다.  그리고 곧 스넬그로브의 책에 나온대로 바위 위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통해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갔다.

무성한 숲 길이 계속되고 있다. 산기슭 전체가 큰 나무들의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무성한 숲이 있는 서쪽 능선 위로 설산의 이 봉우리가 보이고 있다. 위치상으로 볼 때 마나슬루 능선은 아니고 나디출리와 히말출리, 보우다히말 연봉 같다. 수풀이 무성하니 길 가 바위에 석이(石耳) 버섯이 가끔 보인다. 야생화에 일가견이 있는 무진행 보살님과 보명화 보살님이 운행을 멈추고 열심히 딴다. 드물기도 하고 운행 중이라 양이 많지는 않다.

이곳 사람들도 석이 버섯을 먹는지 모르겠다. 6년 전 칠불사 살 때 대중공양 들어온 것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쫄깃쫄깃한 것이 정말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났다. 히말라야의 석이는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마나슬루에서 석이 버섯이 날 만한 곳은 숲이 무성해 그늘이 져 이끼가 많은 이곳이 유일할 것 같았는데 나중에 빔탕에서 띨제 내려가는 길도 나무에 이끼가 많은 숲이어서 그곳도 가능성이 있다.

9시 10분 현재 계속 오르막이다. 고도계는 2540m를 가리키고 있다. 30분 후 남룽(Manrung)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마을로 들어 가는 초입에서 마을에서 나오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인 체왕 도르제 라마는 3년 전 한국에서 일하고 왔다해서 깜짝 놀랐다. 옷을 보니 스님인 것 같다. 이름 뒤에 붙은 라마라는 것도 그렇다. 네팔 사람들의 제일 뒤에 오는 이름은 그들의 종족을 표시한다. 네팔에서 라마족은 없다.  삼툭 구릉 라마처럼 환속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이 깊은 마나슬루 산중에 사는 사람이 한국에 일하고 왔다는 것이 신기하다. 과연 티베트 종족은 유목민답게 국제적이다. 젊은 사람도 가기 힘든 형편인데 40세는 넘어보이는 이 아저씨가 갔다는 것도 놀랍다. 영어나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고 더듬거려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커피사탕 몇 개를 만난 기념으로 주었다.

남루(Namru)라고도 하는 남룽에는 10시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을이 협소하다. 롯지에서 운영하는 식당 안에 가게도 하나 있고 등유를 판다는 간판도 있지만 별로 머물고 싶은 분위기는 아니다. 하루의 운행을 멈추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라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여기서 점심 먹고 다음 마을인 리히까지 가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처음 계획했던 갑-남룽-로-사마가온의 일정은 갑-리히-사마가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하루의 여유가 더 생겼다. 사마가온에서는 하루 휴식일이 있으니 남는 하루는 마지막 마을인 삼도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고소적응일은 많이 둘수록 좋다.

마을 길가 담장 위로 장작이 많이 쌓여 있다. 티베트나 무스탕에는 나무가 귀해 평평한 지붕 가에 장작을 빙 둘러 많이 쌓는 것으로 부를 과시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흔해빠진 것이 나무라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지붕도 판석이 아닌 판자로 얹은 너와지붕이다. 마을 자체는 앞 뒤의 높은 산 때문에 답답한 느낌을 준다.

식당은 그런대로 괜찮다. 입구쪽 진열장에는 콜라, 라면, 사탕, 맥주 위스키 등이 잔뜩 있다. 2500고지에서 운행을 멈추고 있자니 춥다.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열고 자켓을 걸쳤다. 출입문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고 깨진 창문에서도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얼마 후 안드레스의 여행기에 나오는 술취한 사우지(남자 주인)가 들어오더니 아무 말없이 종이를 내미는데 초등학교를 위한 기부금 권선문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영수증을 불쑥 내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100루삐만 기부했다. 말 한마디에 천량빚을 값는다고 좀 더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도움을 청했다면 500루삐는 기부받았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11시 15분 출발했다. 주방팀들이 미리 도착해서 요리를 준비하므로 점심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지류에 걸쳐 있는 전형적인 히말라야 스타일의 나무다리를 건너니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경찰 한 명이 길가에 책상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다. 타시가 등록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 전진했다.

마을을 벗어나는 오르막을 올라 무성한 소나무 숲 사이에 있는 마니월을 지나니 시야가 툭 터졌다. 12시 경 반짬(Bhanzam)이라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둔덕에 올랐다. 마을 이정표는 반짬인데 트레킹 지도에는 바르참(Barchham)으로 표기되어 있다. 넓은 운동장과 돌집이 있는 마을인데 운동장은 자세히 보니 보리밭이다. 아직 추수 전인 누런 보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그러나 마니월이 있고 돌담이 정겹게 쌓여 있는 마을에 인적이 없으니 어쩐지 슬쓸하다. 이런 곳은 아이들이 뛰놀고 있어야 그림이 완성된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인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넓은 보리밭이다. 뒤를 돌아보니 설봉이 보인다. 가네시 4봉이다. 마을을 지나니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고도는 점점 높아져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춤 계곡 입구에서 시작되는 쿠탕 계곡은 남룽을 지나면서 누프리(Nupri) 계곡으로 이름이 바뀐다(쿠탕을 하누프리[lower Nupri]로 부르기도 한다). 누프리는 '서쪽 산들'이란 뜻이다. 그르므로 누프리 계곡은 '서쪽 산들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이 계곡이 마나슬루, 라르키아 피크 등 서쪽에 있는 산에서 내려와 쿠탕 계곡까지 계속 동진하는 모양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히말라야에 가는 사람은 원정대는 말할 것도 없고 트레커들도 필연적으로 티베트어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 몇 가지 말의 뜻을 알고 가면 좋다. 티베트어로 동쪽은 샤르(shar), 서쪽은 눕(nup), 남쪽은 로(lho), 그리고 북쪽은 창(chang)이다. 세르파라는 말은 샤르-파(Shar-pa)라는 티벳어에서 나온 말인데 파(pa)가 '~지방 사람'이란 뜻이므로 '동쪽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무스탕에서 중국에 대한 저항 게릴라 활동으로 유명했던 캄파는 '캄 지방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티베트에서도 용맹하기로 유명한 캄 지방 사람들이다.

에베레스트 서쪽에 눕체(Nuptse,7855m )가 있고 남쪽에는 로체(Lhotse, 8516m)가 있다. 로체와 거의 붙어 있는 동쪽 봉우리는 로체샤르(Lhotse Shar, 8400)다. 로체샤르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높은 산인 로체의 위성봉으로 세계에서 7번째로 높은 봉우리인데 8,000m가 넘으면서도 흔히 8,000m 이상의 고봉을 의미하는 14좌에는 들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독립봉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아 8,505m의 얄룽캉과 함께 16좌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또 에베레스트 북쪽에는 북쪽에는 창체(Changtse, 7553m)가 있다. 이 산들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눕체는 서산, 로체는 남산, 로체샤르는 남동산, 창체는 북산이다.

'탕'은 티베트어로 '평원'이란 뜻이다. 무스탕의 수도 로만탕의 원래 이름은 '만탕'으로 '기원의 평원'이란 뜻이다.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어 이르는 곳 이름은 빔탕인데 '모래의 평원'이란 뜻이다. 그곳에는 정말 빙하에서 부서져 나온 마사토 같은 모래가 많다. 따라서 티베트 북부에 있는 고원인 '창탕(Changtang)'이 '북쪽 평원'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창탕에서 발원하여 히말라야와 평행선을 이루며 동진하다가 나중에 뱅골만으로 빠지는 강 이름인 창포(Changpo)의 창도 북쪽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티베트계 사람들의 이름은 종종 그가 태어난 요일을 취한다. 티베트어로 일요일은 니마(Nima), 월요일은 다와(Dawa), 화요일은 밍마(Mingma), 수요일은 락빠(Lhakpa), 목요일은 푸르바(Phurba), 금요일은 빠상(Pasang), 토요일은 �바(Pemba)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락빠는 영화 <히밀라야>에서 죽어서 돌아오는 틴레의 아들 이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바로 야크 등에 실려 오는 남편을 보고 그의 아내 뻬마가 "락빠!"하고 소리치며 우는 장면이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를 두어 번  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이름을 가진 세르파족의 가이드나 포터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아주 흔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 무스탕의 로만탕에서 만난 니마는 일요일생이고, 지금 우리의 주방팀에 있는 빠상과 푸르바, 그리고 밍마 세르파의 출생요일은 각각 금요일과 목요일, 화요일임을 알 수 있다.

'행운(good luck)'을 뜻하는 타시(Tashi)라는 이름도 티베트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다. '장수(long life)'을 뜻하는 이름은 체링(Tsering)이고 '행운'을 뜻하는 이름은 소남(Sonam)이다. 이렇게 기복적인 이름을 선호하는 것은, 삶이란 끝없는 고통이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인간의 보편적인 소망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고 소망대로 모든 이들이 무병장수를 이루기는 어렵다. <보살의 37가지 수행>을 가르친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톡메 상포 스님(1285-1369)은 병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병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나쁜 업의 영향으로 생긴 아프다는 느낌에서 온 착각된 경험일 뿐이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확실한 특질을 보여준다. 또 병이란 마술적인 환영(幻影)이어서 느끼긴 하지만 여전히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병은 윤회계의 성질을 보여주는 정신적 스승이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참을성을 연마하는 것,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이 바른 대처법이다. 이런 면에서 병은 지난 생에 저질렀던 나쁜 행위와 무지를 정화하는 가장 뛰어난 방법이다. 나는 병을 일부러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이 병으로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깊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병든 몸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다. (<Life and Teaching of Ngulchu Thogme Sangpo>(Translated from Tibetan) Translated By Erik Pema Kunzang, 대원 한글역)

반짬 마을을 뒤로 하고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큰 나무는 없고 낮은 관목이 있는 산길이 나온다. 중간중간에 집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 역시 계곡 건너편으로도 마을이 보인다. 조금 더 오른 후 뒤를 돌아보니 가네시 히말 4봉(7102m)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얼마 후 계곡이 넓어지고 마을을 알리는 리히(Lihi, 2905m) 마을의 카니가 나타났다. 제법 큰 마을이다. 집들이 넓은 경작지를 중심으로 그룹을 이루며 여기 저기 모여 있다.

카니 앞에는 마을환영위원회(?) 위원들이 마중나와 있다. 새로운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마중은 이들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동생을 업고 있는 녀석도 둘이나 된다. 40대 이상이라면 대부분 겪었던 전형적인 우리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마중나온 '위원님'들에게 사탕 하나씩 주고 싶은 유혹을 느꼈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참았다. 만일 그런 식의 보답이 계속 된다면 순순한 아이들의 마음은 트레커들이 나타날 때마다 뭔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굴해지고 만다.

카니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옥수수 대를 모으고  있다. 옥수수 수확은 다 끝났지만 보리는 아직 추수 전이다. 마을 중앙의 마니차 담장 옆을 지났다. 캠프장은 마을을 벗어나 있다. 초르텐 카니를 지나는데 또 다른 환영인파가 기다리고 있다. 이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사탕을 달라고 한다. 이렇게 뭘 달라고 하는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주어서는 안된다.

오후 1시, 카니를 지나 캠프장에 도착했다. 우리 보다 먼저 온 부부 트레커가 마당 탁자에서 차를 마시며 쉬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제 우리 뒤에 도착해 아랫집에 캠프를 친 팀이다. 이들은 잠시 후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여기서 1시간 거리인 쇼(Sho)나 2시간 거리인 로(Lho)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등산화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옷은 잠깐이라도 바람에 말린다. 발목은 이제 많이 나아졌다. 3일 동안 운행했는데 끈으로 묶은 등산화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끈은 닳아 곧 떨어지겠지만 다른 끈으로 매면 된다. 늘 가지고 다니던 비상용 끈을 7번째 트레킹에서 처음 쓰면서 7년간 가지고 다닌 보람을 느꼈다.

등산장비점에서 파는 가는 줄이었으면 더 질기겠지만 그나마 이런 허접한 끈이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포터들은 아직도 슬리퍼로 운행하고 있다. 아무리 습관이 되었다 해도 그것은 힘든 일이다. 등산화를 신으면 신발이 알아서 발을 고정시켜 주니 발을 디딜 때마다 발까락에 힘 줄 일이 없다. 슬리퍼는 매 번 균형을 잡기 위해 신경을 쓰므로 쉬 피로해진다.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오후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정북 방향의 맞은 편 계곡 절벽 위로 6천미터 급 산들이 줄지어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쿠탕 히말이다. 꼭대기에 눈은 그리 많지 않다. 텐트를 다 친 포터들은 카드놀이에 열중이다. 우리 같으면 고스톱 쯤 될 것이다. 40세의 밍마 세르파도 합류해 있다. 도대체 이 친구들은 틈만 나면 카드놀이다. 단순하게 즐기는 거라면 좋은데 외상장부까지 기재하는 것을 보니 단순한 재미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들에게 트레킹 중 유일한 오락거리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짐만 나르는 일이라 일찍 운행을 마치면 할 일이 없다. 히말라야에 오는 것도 우리처럼 히말라야가 그리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들어오는 것이다. 수없이 보아 온 히말라야가 특별하게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포터들이 그러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나잇살 먹은 타시와 밍마까지(둘 다 40세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별로 보기 좋지 않다.

타시는 운행 때는 물론 아침 일찍부터 텐트 안에서 늘 진언을 외우며 염주를 돌리는 독실한 불자인데 카드놀이 할 때는 영락없이 포터 수준으로 내려간다. 하루 일정이 빡빡하면 스태프들이 한가하게 카드놀이를 할 여유가 없다. 도박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면 이번엔 대원들이 피곤해 죽겠다고 아우성 칠 것이다. 차라리 그들의 '여가선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

2층 주방으로 가니 컴컴한 방안에서 우리 주방팀과 포터 몇 명이 화톳불을 쬐고 있다. 주인 아주머니와 할머니도 있다. 마나슬루 지역의 롯지 주방은 다른 메이저 트레킹 코스에 있는 마을의 주방과는 천지차이다. 그런 곳은 주방이 모두 정갈하다. 조금 엉성한 쿰부 윗지역(특히 닥락)이라도 화로주변이나 찬장은 정돈되어 있다. 이곳은 현지인들 용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수선하다. 마침 콩을 볶아 먹고 있어 뜨거운 콩을 호호 불어가면 얻어 먹었다.

저녁은 언제나 그렇듯 진수성찬이다. 밥에 수프에 빵에 한국산 밑반찬까지 푸짐하다. 저녁에는 촛불을 켠다. 트레킹 둘째날 저녁 소티콜라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주방에 가보니 어두운 곳에 촛불을 켜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빠상에게 식당텐트에도 촛불을 켜달라고 하니 그후부터 매 번 저녁마다 받침대로 쓸 돌을 골라와 촛불 세 개를 켜 준다.

등유를 압축하여 쓰는 밝은 랜턴이 있지만 시끄럽기도 하고 너무 밝아 쓰지 않고 있다. 촛불 세 개가 어두울 것 같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눈에 익숙하면 잘 보인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좋다. 92년 여름 독일 갔을 때 제일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그곳 사람들이 저녁 식사 때는 항상 촛불을 켜고 먹는 것이다. 집에서는 물론 식당에 가도 그랬다. 환한 형광등 조명 아래서 시끌벅적하게 먹는 우리와는 정서가 많이 달랐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 어쩌면 호롱불을 켜고 밤을 보냈던 유년시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궁핍한 삶이었겠지만 어린 아이 때는 그런 절박함을 알 리가 없다. 다만 항상 배부르게 먹고 싶었다는 기억은 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지난 일 중 어려웠던 일보다는 즐거웠던 일이 추억이라는 포장과 향수(鄕愁)라는 간판을 달고 나타난다.

타시가 이곳에서 들은 소식에 의하면 며칠 전 비가 내렸을 때 라르키아 라에는 폭설이 내려 3일간 길이 막혔다는 소식이다. 지금은 통행이 재개되었다고 한다. 비가 일찍 내린 것이 천만다행이고 앞으로는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날씨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일이라 인솔자인 나로서는 신경이 많이 쓰인다.

오늘까지 8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슬슬 체력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다행히 혜명화 보살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오늘은 백산스님과 남형씨가 고소 조짐이 있어 다이아목스를 주었다. 나는 여전히 콧물을 달고 있다. 두 노장 보살님들은 아직 멀쩡하다. 저녁을 먹은 후 내일의 일정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찍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다. 감기도 걸렸고 3000m 가까운 고지라 조금 추워 우모복을 입고 잤다. 내일부터 본격적이 고산 트레킹이 시작된다.
 

trek 8. 갑 - 남룽 - 리히 (top으로)

 Manaslu_trekmap_08.jpg

manaslu_map_T.jpg

nupri_map.jpg

Manaslu_0466.jpg

좁은 바위 수로를 흐르는 부리 간다키 강물. 바위가 물에 닳아 반들반들하다. 스넬그로브의 글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다.
 

Manaslu_0468.jpg

무성한 숲 사이에서 첫 번째 휴식.
 

Manaslu_0474.jpg

경전의 말씀이 새겨진 마니월. 불상조각이 없는 마니월은 오랜만이다.
 

Manaslu_0476.jpg

무성한 삼림이 있는 능선 뒤로 마나슬루 히말 연봉이 나타났다.
 

Manaslu_0477.jpg

9시 15분 두 번째 휴식. 이 구간에서 가끔 바위 위에 붙어 있는 석이 버섯을 보았다. 숲 속이라 습도가 많다는 뜻이다.
 

Manaslu_0478.jpg

남룽까지 이런 울창한 이런 숲속길이 계속 이어진다.
 

Manaslu_0480.jpg

남룽 마을 들어서기 직전 만난 마을 사람들. 한 사나이가 먼저 "꼬레아?"하고 물었다.
 

Manaslu_0481.jpg

한국에서 3년 일하고 돌아온지 3년 되었다는 체왕 도르제 라마. 붉은 색의 옷이 승려풍이다. 한국말은 영 못한다. .
 

Manaslu_0482.jpg

남룽 마을 입구 길가에 있는 장작더미. 나무가 흔한 곳이라 연료는 걱정이 없겠다.

 

Manaslu_0486.jpg

남룽의 롯지 식당. 그늘이고 찬 바람이 불어 쌀쌀했다.

 

Manaslu_0490.jpg

남룽의 꼬마. 장작 더미에 말리고 있는 것은 야크가죽이다.
 

Manaslu_0492.jpg

전형적인 히말라야의 나무다리. 깊은 협곡에 놓여 있으면 아찔할 것이다.

 

Manaslu_0494.jpg

다리를 건너면 바로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경찰관 모습이 서양사람 같다. 저지대에서 파견 나온 브라민족이다.  

Manaslu_0498.jpg

 곧 시야가 넓어졌다.

 

Manaslu_0500.jpg

갑자기 나타난 반짬 마을. 좁은 계곡을 다니다가 만난 넓은 보리밭과 돌집이 인상적이었다.
 

Manaslu_0512.jpg

반짬을 벗어나는 조그만 둔덕에 올라 아래쪽(동쪽)을 바라본 풍경. 설산은 가네시 히말(4봉)이다.
 

Manaslu_0513.jpg

계곡 건너편에도 이런 마을이 자주 나타난다.
 

Manaslu_0514.jpg

리히 마을 입구의 카니. 포터들은 아직도 슬리퍼를 신고 짐을 나르고 있다.
 

Manaslu_0516.jpg

리히 마을환영위원회 멤버들.

 

Manaslu_0517.jpg

카니를 지나자 넓은 경적지가 있고 집들이 그룹을 이루며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왼편 탑은 마을 동쪽 초르테 카니다. 야영장은 그곳을 지나 있다.  

Manaslu_0519.jpg

제일 위로 곰빠가 있다. 곰빠 지붕은 항상 뾰족한 급색 탑을 세워두었기 때문에 일반 집과 쉽게 식별이 된다.
 

Manaslu_0520.jpg

마을 중심의 마니차 담. 마니차까지 있는 걸 보면 제법 큰 마을임을 알 수 있다.
 

 

Manaslu_0525.jpg

마을을 벗어날 즈음 두 번째 환영인파를 만났다. 뭔가를 달라고 조른다.
 

Manaslu_0526.jpg

불쌍해 보인다고 주어버릇하면 아이들 습관을 나쁘게 만든다. 가난해도 떳떳한 것이 비굴하며 여유 있는 것보다 낫다.
 

Manaslu_0528.jpg

비히의 캠프장. 오른쪽 탁자에 어제 보았던 중년 부부가 먼저 와 차를 마시며 쉬는 모습이 보인다.
 

Manaslu_0529.jpg

캠프장까지 따라와 구경하는 아이들. 혹 뭔가 얻을 것이 있는가 해서 오기도 하지만 집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구경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Manaslu_0531.jpg

휴식을 마친 후 다시 운행을 시작하는 중년부부팀. 가이드가 한 아이와 장난을 치고 있다.
 

Manaslu_0536.jpg

쿠탕 히말을 마주한 캠프장 풍경.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Manaslu_0535.jpg

틈만 나면 카드판을 벌이는 스태프들. 그것밖에 낙이 없으니 말릴 수도 없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것이다.
 

Manaslu_0538.jpg

주막집 주방 내부 모습. 현지 주민용이라 어수선하다. 트레커들이 많이 찾는 다른 지역의 주방과의 차이가 확연하다. 녹색 옷을 입은 총각은 주방 수석보조요원 빠상이고 빨간 옷을 입은 총각은 주방장 노르지다. 

Manaslu_0542.jpg

저녁식사는 항상 촛불을 켜고 만찬을 즐긴다. 매 끼니마다 주방장이 정성들여 만든 요리가 너댓 가지 나오니 롯지 트레킹처럼 입맛이 없어 힘들 일은 없다. 이번 여행에서 달밧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석이(石耳) 버섯

석이버섯은 깊은 산속의 바위 표면에 발생하는 지의류(地衣類, 이끼)의 일종으로 석이과에 속하는 버섯이다. 형태는 잎과 같은 것 껍질 같은 것 아교와 같은 것 나무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중에서 잎모양의 것을 먹는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석이는 성질이 차고 평(平)하다고도 한다.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속을 시원하게 하고 위를 보하며 피나는 것을 멎게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하고 얼굴빛을 좋아지게 하며 배고프지 않게 한다. 높은 산의 벼랑에서 나는 것을 영지(靈芝)라고 한다.또 중국에서는 강정제로 노인이 상용하면 젊어지고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김시습은 석이버섯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푸른 벼랑 드높아서 올라갈 엄두 못내는데
우뢰와 비 이 돌 위의 석이버섯 키웠구려
안쪽은 거칠거칠 바깥쪽은 매끈매끈
캐어다가 비벼대니 깨끗하기 종이같네
양념하여 볶아 놓으니 달고도 향기나서
입에 좋은 쇠고긴들 아름다움 당할소냐?
먹고나자 제모르게 속마음이 시원하니
그대가 송석(松石)속에 배태함을 알겠도다
이걸로써 배 버리어 푸른 산에 서식하니
거(居)하며 양(養)함이 기(氣)와 체(體)에 옮기었네
십년 동안 틀린 행적 벌써 모두 잊고나니
오장육부 가끔 나가 씻을 필요 없어라. (Daum 백과사전)
 

<달라이 라마가 설법한 37 수행법>
-깨달음으로 이끄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 수행법-
Commentary on the Thirty Seven Practices of a Bodhisattva
이창호 옮김 (정우사)

이 책은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행서 중 하나인 톡메 상포 보살의 원전 <보살의 37수행법>을 달라이 라마가 1974년 보드가야에서 3일에 걸쳐 설법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 책의 원전을 정확하고도 쉬운 말로 실생활의 이모저모를 수행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까지 일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르침 37가지를 설법하고 있다. 모든 중생을 윤회에서 벗어난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고자, 깊은 사랑과 대자비심으로 설법한 이 책은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조언서이자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수행서이다.
 

trek 7. 뎅 - 갑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trek


 

쿠탕 계곡과 스넬그로브와 항생제

2007. 10. 19(금)


이번 트레킹에서는 아침과 점심 식사 때마다 식염포도당 두 알씩 먹었다. 식염포도당은 지금까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었는데 우연히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에서 전국일주를 계획하며 준비한 준비물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알고보니 마라톤 등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복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철 더운 환경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작업장은 물론이고 요즘은 군대에서도 혹서기 훈련 때 필수품으로 준비해 둔다고 둔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단순하게 땀을 흘린 후 염분만 보충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해질 균형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해질이란 우리 몸의 체액을 이루는 중요한 성분이라고 한다. 이심전심이었는지 마침 아는 분이 마나슬루 가는 것을 알고  식염포도당 한 통(천혜당제약, 1000정)을 보내와 100정 정도 가지고 갔다. 준비물 목록에도 넣어 동행자들에게도 가져오라고 했지만 대부분 가져오지 않았다. 내가 가져 온 것을 권유해도 어쩌다 한 번 먹는 시늉만 한다.

나는 이번에 운동을 별로 하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토굴 앞마당을 하루 50분 동안  '뺑뺑이 도는 일'도 두어 달밖에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트레킹 준비에서 가장 부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은근히 일정을 여유 있게 짠 덕을 좀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이번 트레킹에서는 덜 피곤했고 다람살라에서 가벼운 두통이 한 번 왔을 뿐이다. 운행 중 식염포도당을 계속 먹은 나와 무진행 보살님은 고소가 오지 않았다. 쿰부트레킹 때와는 달리 얼굴도 전혀 붓지 않았다.

Na_01.jpg그것이 식염포도당 덕분이라는 것을 100%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무진행 보살님이 막판에 조금 지쳤던 것은 고소 때문이 아니라 60대 중반의 나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체력저하 현상 탓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기적인 산행으로 체력훈련을 많이 했는데도 나중에 힘들어 했고 대부분 고소로 고생을 조금 했다.

아침은 야외식탁에서 먹었다. 자리는 그대로이고 텐트만 걷은 상태다. 약간 쌀쌀하지만 아직은 2000m 아래여서 그리 춥지는 않다. 식사하러 텐트에서 나오는 즉시 우리의 텐트도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들에 의해 걷힌다(영어로 쓴 글을 보면 이 대목에서 항상 무너진다-collapsed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출발 전 타시와 함께 동네 소년가 이 왔다. 발 한쪽에 상처가 나 있고 곪아 있다. 항생제가 필요한데 구급약이 든 가방은 모두 카고백에 넣었고 포터는 이미 출발한 상태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약에는 항생제가 없다. 우선 급한 대로 관절염 약을 3일분 주었다. 어쨌든 염증약이니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일부터는 구급약 가방을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7시 출발. 해가 비치는 시링기 히말을 보며 걸었다. 좁은 협곡에 있는 길은 강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출발한지 30분 쯤 지나자 동쪽 사면으로 건너는 허름한 다리가 하나 나왔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급경사 오르막인데 보통이 아니다. 산사태가 난 듯한 지역은 사다리를 설치해 놓았다. 이런 곳은 말도 다니기 어려울 것 같다.

8시에 1980m의 라나(Rana)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라나는 스넬그로브의 책에는 코야(Koya)로 나온다. 자매로 보이는 아이 둘이 마중(?)나와 있다. 이곳 아이들은 매일 지나가는 트레커들을 보는 게 심심한 산골생활의 유일한 구경거리일 것이다. 아이들이 아주 수줍어 한다. 네팔말로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다. 이곳은 티베트계 방언을 쓰기 때문에 티베트어도 잘 안통한다고 칼스텐은 말했다.

라나를 지나 잠시 후 다시 작은 다리를 두 개 더 건너 절벽길로 접어들었다. 두 번째 다리 아래에는 수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방앗간이 있다. 절벽길 중 한 곳은 산사태가 나 아슬아슬하다. 길이 거의 무너져 있다. 다행히 8시 45분 비히(Bihi)에 도착한 후부터 강바닥에서 한참 올라 온 평범한 산길이다(마나슬루 트레킹 지도에는 비히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 비히에서 오늘의 목적지 갑(Gap)까지 3시간이 걸린다고 마을 이정표에 쓰여 있다. 여기서부터 사마가온까지는 계속 서쪽을 간다.

햇볕이 들어와 따뜻한 한적한 산길을 걷는다. 비히를 넘어서니 산기슭 좁은 경작지를 찾아 마을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계곡 건너편에도 협곡을 끼고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인다. 마니월 하나를 지나자 제법 깊은 지류 계곡이 하나 나오고 그 위에 바닥을 나무로 깔아놓은 멋진 다리가 놓여 있다(지도 상단 중앙의 Mani Walls라고 쓰여진 곳). 이 계곡은 이곳 쿠탕콜라에서 제일 높은 시링기 히말에서 내려오는 빙하수가 만든 시링기 콜라다.

여기서 길이 갈라진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다리는 부리 간디키 강을 건너 왼쪽 사면으로 가는 다리다. 그쪽으로 가면 프록(Prok)이 나온다. 그 길로 가도 갑에서 만나지만 길이 험한 편이라 트레커들은 잘 이용하지 않는다. 1056년 9월 중순(14일 전후) 스넬그로브는 남루(남룽)에서 갑(Ghap)으로 내려온 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프록으로 간다. 잠시 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쿠탕(Kutang)

다음 날 우리는 남루(남룽) 마을을 통과하여 점점 좁아지는 협곡을 향해 내려갔다. 길은 이제 무성한 수풀에 둘러싸여 있고 우리의 등산화는 미끄러운 바위와 진흙에 위험스럽게 미끄러졌다. 우리는 불어난 급류 위에 놓인 단단한 나무다리를 건너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곧 천연 바위다리를 통해 오른쪽 사면으로 되돌아 왔다. 아래쪽 깊은 계곡에는 부리 간다키가 포말과 세찬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쿠탕으로 들어가고 있다. 1마일 정도 떨어진 곳부터 계곡이 넓어졌다. 길은 협곡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가파른 계단식 경작지로 둘러싸여 있는 높은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 보였다. 우리는 첫 번째 마을 착(Tsak, 지금의 갑)으로 가는 다리에 이르렀다. 우리의 포터들은 그곳으로 갔다. 왼편 사면으로 내려가는 길이 더 쉽기 때문이다. 빠상과 나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다른 길을 따라 오른쪽 사면의 프록(Prok) 마을로 갔다. 우리는 그 마을에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절벽 꼭대기 근처에 그려진 훌륭한 '연꽃에서 태어난' 붓다상을 보기 위해 멈추었다. 그 후 입구 초르텐을 통과하여 수확이 끝난 옥수수 대가 있는 밭 사이의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마을 중심에 이를 때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길가에 티베트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한 작은 소년 옆에 있던 작고 사나운 개가 우리를 보더니 짖으며 달려왔다. 소년은 놀라는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우리는 소년에게 절로 가는 길을 묻자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길을 가리켰다.

"순례자들이니?" 우리가 물었다.
"예, 우리는 키이롱(Kyirong)에서 왔어요. 그리고 네팔로 순례 가는 중이에요." 소년이 대답했다.
" 아저씨들은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소년이 물었다.
한 여인이 텐트 입구에 나타났다. 그녀는 개가 짖는 것을 멈추도록 돌을 던졌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우리는 인도에서 왔단다."' 우리가 대답했다.
"아저씨들도 순례자들이에요?."
"'응, 우리들도 순례자들이야."
"안녕히 가세요."
"잘 있있거라."  우리는 대답을 하고 절을 향해 올라갔다. 비록 아주 판에 박힌 말이었지만 어린 티베트 소년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절 앞 넓은 베란다는 옥수수 알갱이가 든 통과 옥수수 더미로 가득차 있었다. 그 곳에 두 남자가 옥수수 알갱이를 까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타나자 바라보았다. 우리는 절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 아내가 안내해 줄 겁니다." 나이 많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불러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한 스님이(그는 유명한 라마다) 만일 우리가 가는 도중 낙챠(Naktsa) 곰빠를 방문하면 참배하라고 했다는 것을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아주 좋아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 사원 아래 마을인 롱(Drong)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어주었다. 법당 안에는 완벽한 티베트 경전 세트가 왼편 벽 선반에 있었다. 오른편 벽에는 1천 좌의 부처님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있었다. 가운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고 좌우에는 '무량광(Boundless Light, 아미타불)과 '자비의 눈(Glancing Eye, 관세음보살) 상이 있다.

그 라마는 우리가 불상들을 알아보는 것을 보자 더욱 기뻐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볶은 옥수수를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는 버터 램프 두 개를 사서 공양올리고 발코니에서 쉬면서 그에게 건너편 계곡에 있는 마을 이름을 묻고 춤(Tsum)으로 가는 높은 길을 가리켰다. 옥수수는 내 치아에는 너무 딱딱했지만 빠상의 방앗간에서는 잘 갈렸다. 비록 그가 위쪽 절로 오르는 가파른 길에서 목이 탄다는 불평은 했지만.

경사면 꼭대기에 정원으로 둘러 싸인 몇 채의 집들이 서 있었다. 우리가 부르자 한 비구니 스님이 나와 반갑게 절 안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평화와 분노의 신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있고 불단 위에는 '연화생(빠드마삼바바)'과 그의 두 여신 아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 석가모니 조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는 버터 램프를 공양 올리고 비구니 스님을 따라 방 두 개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우리에게 음료수 한 대접과 정원에서 따 온 채소 한 다발을 주며 우리의 순례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미안해했다. 스님은 우리에게 자기가 오랬동안 순례길을 다녀보았기 때문에 자주 잠잘 곳과 음식을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전에 우리는 그것을 슬픔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꺼이 감수했다.

우리는 존경스런 이 스님 앞에서 거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스님은 순례길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을 등에 지고 다녔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8명의 튼튼한 남자들이 우리의 짐을 지고 천천히 계곡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호화로운 원정대에 비하면 우리는 확실히 궁핍했다. 그것은 비단 10명의 대원으로 이루어진 마나슬루 원정대가 600명의 포터를 쓴 일본 팀의 경우와 비교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신선한 채소에 감사했다. (David L. Snellgrove, pp. 251-253)

협곡이 가파른 지형에 놓인 다리는 계곡의 하단부에 설치하기 때문에 다리가 있으면 다리를 향해 내려갔다가 다리를 건넌 후에는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그래서 시링기 콜라를 가로지른 다리를 건넌 후에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평탄한 산길이다. 건너편으로 긴 폭포가 보였다.

10시 15분 경 이름모를 작은 마을을 지났다. 트레킹 지도에도 없고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을에서 나오던 두 여자아이에게 보명화 보살님이 무언가 선물을 준 모양이다. 아주 신이나서 달려오는 표정이 산골 소녀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라 입성은 허름해도 어린 아이들과는 달리 깨끗한 얼굴이다.  

협곡에서 떨어진 산길을 계속 가다보면 또 어느새 절벽길이 나왔다. 그렇게 몇 구비 돌다 밭 가운데 두 채의 집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인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주방팀들이 보인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다. 이곳에서 갑(Ghap)이 멀지 않다는 사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르텐형 카니가 보이는 것을 보고 알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카니는 보통 돌을 독립문 모양으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다. 쿰부의 팡보체 마을 입구에는 돌 대신 나무로 만들어 놓은 카니가 있다. 초르텐형 카니는 고급스러운 카니다. 그것은 조성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곧 마을이 부유하다는 뜻이다. 모양은 위쪽은 초르텐이고 기단부에는 사람이 지나가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안쪽 사방 벽에는 불보살상 벽화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만달라가 그려져 있다. 좀솜 위 까그베니와 무스탕의 짜랑에도 초르텐형 카니가 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마당에는 추수를 끝낸 옥수수 알갱이를 덕석에 말리고 있다. 그 한쪽에는 죽은 까마귀를 매단 장대를 세워놓았다. 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 같은데 과연 약아빠진 새들이 무서워할지는 의문이다. 이 집 꼬맹이 둘이 말없이 우리 곁에 와서 구경한다. 이곳 아이들은 대체로 수줍은 편이다. 정신없이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녀석은 별로 보지 못했다. 우리는 이곳 사람들을 구경하고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구경한다. 아주 공평한 일이다.

점심 먹고 12시 10분 출발했다. 오늘은 점심을 빨리 먹은 셈이다. 트레킹 이래 처음 만난 초르텐 카니를 통과했다. 많이 낡아 있다. 내부의 불상 벽화도 마찬가지다. 이곳 마을의 경제력이 처음 조성했을 때보다 약해졌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40분 후 부리 간다키 강을 가로지른 트러스트 철교를 지나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서진을 하고 있는 지금부터 사마가온까지 왼쪽 사면은 남쪽이 된다. 다리를 건너 오르니 바로 마니월이 나온다. 경전이나 진언을 새긴 마니석은 많이 보았는데 이곳은 불상을 많이 조각해 놓았다.

오후 1시 갑(Ghap)에 도착했다. 스넬그로브의 책에는 착(Tsak)으로 나오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야영을 할 계획이었는데 이미 캠프사이트에 다른 팀이 와 있어 조금 더 가기로 했다. 다시 마니월과 몇 채의 민가를 지나고 산사태 길을 지나 에 도착했다. 갑에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늘까지 2000m 돌파하는데 7일 걸렸다. 7일이며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는 3500m의 마낭, ABC 트레킹 때는 4100m의 베이스캠프, 쿰부 트레킹 때는 4410m의 마체르모, 랑탕 트레킹 때는 로우레비나 패스(4700m)와 고사인꾼드(4321m)를 넘어 4026m의 로우레비나 야크, 그리고 작년 무스탕 트레킹 때는 3800m의 남걀에 도착했다. 마나슬루가 얼마나 천천히 고도를 올리는 코스인지 알 만하다.

롯지 앞 초우따라에서 포터들이 쉬고 있다. 캠프사이트가 넓고 좋아 이곳에서 캠프를 치기로 했다. 계곡 아래쪽(동쪽)으로 어제 보지 못했던 가네시 히말이 보인다. 텐트를 다 설치하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널며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나중에 또 다른 중년의 서양인 부부가 도착했다. 이곳에 넓기는 하나 8동(트레커용 6, 세르파용 1, 식당용 1, 화장실용 1)의 텐트가 있으니 아무래도 복잡하다. 그들도 4동을 쳐야 한다. 잠시 서성이며 가이드와 상의하더니 아랫집으로 돌아갔다.

심심해서 주방용 움막으로 구경가니 주방 수석보조요원 빠상이 약이 있느냐고 묻는다. 어제 바위에서 미끌어져 발 뒤쪽 바닥이 벗겨져 있다. 슬리퍼를 신고 오다가 미끌어지니 속수무책이다. 딱지가 앉기는 했지만 주변에 고름이 보인다. 소독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가지고 간 항생제 7일분을 주었다.

이번에 오면서 약을 많이 가지고 왔다. 지난 봄 무스탕을 다녀온 양혜숙님이 보내준 약이다. 원래 같이 가기로 했으나 가지 못하게 된 어떤 의사선생님이 무스탕 갈 때 가져가라고 보내준 것을 다시 내게 보내온 것이다. 제역회사에서 병원에 주는 관절염 약과 항생제 샘플이다. 제일 반가운 약이 항생제다. 이런 오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약 중 하나가 항생제다.

이곳에서는 약이 없어 상처가 나면 어떻게 치료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약을 거의 먹지 않는 이곳 사람들에게 항생제는 기적의 약이다. 페니실린이 처음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오남용으로 박테리아의 내성이 강해져 오히려 건강에 해롭게 되자 선진국에서는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도록 하고 있다.

페니실린이란 페니실리움속(屬)곰팡이에서 만들어지는 항생제로 가장 먼저 발견되었으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생제 중의 하나이다. 1927년에 알렉산더 플레밍은 우연히 푸른곰팡이로 오염되어 있는 배지에 황색포도상구균(화농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곰팡이를 분리하여 액상 배지에 배양해 이 곰팡이에서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는 일반 세균들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으며 1940년에 다른 연구자들이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었다.

이 페니실린은 세계 2차대전 때 전쟁의 총상으로 신음하던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다. 감기약을 제외하면(이상하게 트레킹 때마다 감기가 걸린다) 이제는 웬만해서는 양약을 먹지 않기 때문에 '항생제계'를 떠난 지도 10년이 넘지만 나도 한 때는 테라마이신 연고와 캡슐의 애용자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으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설 때마다 몇 가지 약품과 함께 항생제를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처방이 없어 구할 수 없었다.

감기는 바이러스가 원인이다. 세균감염은 박테리아가 원인이다. 그러므로 감기에는 항생제가 필요없고 써도 듣지 않는다. 최근 의약품 오남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사이언스 TV>를 보니 사람들이 감기에 항생제를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의사와 약사 포함) 의외로 많고 처방도 그렇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벨기에가 가장 심해서 약국에서 자유롭게 항생제를 구입할 수 있단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그 프로그램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페셀의 책에는 북쪽 계곡 투어 마지막 날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실려 있다. 재미있고도 슬픈, 그러나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다. 항생제로 한 주민을 치료하는 이야기이다.  이 글은 인터넷에 올린 무스탕 트레킹 연재 때 번역해 올렸는데 책으로 만들면서는 '잡설'로 분류되어 삭제되었다. 그러나 번역한 공력과 내용이 아까워 인터넷에 올린 사진 <13.바람부는 광야> 편에 다시 첨부했다.  

페셀이 로만탕 북동 쪽 깊은 계곡에 있는 삼종(Sam Dzong)까지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협곡에서 돌아왔을 때 타시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작은 먼지구름을 가리켰다. 그것은 누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갈기와 함께 말을 탄 사람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나는 그가 캄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에게 도착하자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빠르게 말했다. 나는 처음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그가 이틀 동안 나를 찾아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줄 땔나무를 로만탕에 가져다 놓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땔나무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로만탕에서 우리를 만나지 못한 그는 우리가 서쪽 계곡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서쪽으로 갔다가, 지금 우리가 계곡을 탐사하고 돌아온 이 동쪽 계곡에서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가 우리를 찾은 이유는 약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로만탕에 가져다 놓은 땔나무는 약값이었다. 얘기가 좀 복잡하다. 그러나 이 불쌍한 사내의 끔찍한 상처를 보았을 때 나는 거의 토할 뻔했다. 그리고 이 불쌍한 사내가 이런 상처로 이틀이나 나를 찾아다닌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짜랑 근처에 사는 부유한 농부였다. 어느 날 밤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땅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수로에 발이 담가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물이 밤사이에 얼었다. 그가 나를 만나기 6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상이 걸린 이 불쌍한 사내의 발은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갔다. 오직 감염된 그의 상처부위를 먹고 있는 구더기들이 살이 썩는 것과 죽음을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주사 맞는 것을 싫어해서 치과의사에게 가느니 차라리 치통으로 죽는 것을 택할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상처와 피를 보면 나는 아주 메스꺼워진다. 내가 의사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무스탕의 사람들 속에 있을 때다. 지금 나는 빈약한 약품 분배자의 기능을 넘어서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내 의료 능력을 신뢰하여 이틀간 말을 몰고 찾아다닌 이 사내를 돕기 위해 나는 의학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수술용 마스크를 쓰고 고무장갑을 끼고 마취된 환자의 깊은 곳을 자르는 장면이다!

우리 세 사람은 내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을 끓여 달라고 했다. 그리고 붕대로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가지고 온 얼마간의 탈지면은 로만탕에 두고 왔다. 나는 결국 세 장의 의식용 스카프를 가지고 이 남자의 상처를 씻기로 했다. 나는 큰 가위로 썩은 피부와 감염으로 딱딱해진 부위를 도려냈다.

나는 이 사내가 이 상태로 어떻게 6개월을 견뎌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로바들의 뛰어난 체력과 높은 고도에 따른 춥고 건조한 날씨로 부패가 아주 더디게 진행된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른 기후나 다른 나라였다면 그는 몇 달 전에 죽었을 것이다.

1시간 동안 나는 락시를 알코올로, 의식용 스카프를 붕대로, 큰 부엌칼을 외과용 메스로, 그리고 무엇을 할지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수술을 했다. 유일한 의약품은 작은 페니실린 연고제 하나였다. 마침내 이 가여운 상처는 붕대에 감겨졌다. 발의 일부분이 잘리고 피가 흐르기는 했지만, 그가 만든 특별히 큰 장화 속으로 그의 발이 다시 들어갈 때 나는 그 발이 충분히 깨끗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환자의 첫 진료는 끝났다. 그리고 치료비로 로만탕에는 엄청난 양의 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3주 동안 그는 계속 나를 따라다녔으며 나는 그에게 붕대를 6번 더 감아 주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내가 로만탕을 떠날 때 그의 상처는 아물었다고 나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Michel Pessel,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pp. 233-235)

그 의사선생님 덕분에 이번에 가지고 온 항생제 양은 500mg 짜리 1500 캡슐이다. 관절염약도 가지고 왔지만 그것보다는 항생제가 더 유용하다. 트레킹 도중 필요한 주민들과 스태프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하이라이트는 트레킹 12일 째인 삼도에서였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 다음 네팔 방문 때도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네팔에서, 특히 히말라야에서 유통기한은 큰 의미없다. 기한이 지난 것이라도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삼도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때 구경 온 옆집 독일 팀의 한 사나이가 무엇을 나누어 주느냐고 물었다. 항생제를 영어로 무어라 할까? 그때는 잘 몰라 "안티바이러스, 예를들어 페니실린 같은 거"라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돌아와 찾아보니 안티바이오틱(Antibiotic)이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다르니 안티바이러스(Antibirus)라고 하면 틀린 말이다. 그러나 그 친구도 비영어권 사람의 말이라 대충 항생제를 그렇게 표현했으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혜명화 보살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이제 겨우 2140m인데 고소증상을 보인다. 보통은 3000m 가까이 올라야 나타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일찍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체력이 저하되면 더 쉽게 나타날 수 있다. 고소가 와 두통이 오고 식욕이 떨어진 혜명화 보살은 저녁을 먹지 않고 일찍 텐트로 들어갔다. 가지고 간 다이아목스를 12시간 마다 1정씩 먹으라고 주었다.

트레킹이 처음인 사람은 국토도보종단이나 군대에서 행군 등을 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많이 걸을 일이 없다. 하루 평균 5시간 이상 7일을 걸었으니 슬슬 지칠 때도 되었다. 마니슬루 트레킹은 고도를 천천히 올리기 때문에 고소적응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실제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라르키아 라를 넘기 전 기간이 너무 길어 일찍 체력이 바닥나게 된다.  평소 체력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힘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트레킹 중에는 음식을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하고(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염분 보충과 전해질 균형을 위한 식염포도당 섭취도 중요하다.
 

trek 7. 뎅 - 갑   (top으로)

 Manaslu_trekmap_07.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374.jpg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북쪽의 시링기 히말

 

Manaslu_0375.jpg

오전 7시, 좁은 협곡을 향해 출발하다.
 

Manaslu_0378.jpg

엉성한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넘어가다. 마나슬루 지역은 이런 다리가 많다.

Manaslu_0382.jpg

다리를 건너 산사태 지역을 오르는 길. 사다리까지 있다. 말이 다니기엔 많이 어려워 보인다.
 

Manaslu_0383.jpg

8시에 라나 도착. 아직 그늘 속이다.

 

Manaslu_0384.jpg

라나의 두 자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이곳에서 쉬면서 사이좋게 사탕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Manaslu_0392.jpg

작은 지류도 자주 나온다. 왼편의 집 지붕은 수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방앗간이다.
 

Manaslu_0397.jpg

절벽길이 무너져 있는 곳도 가끔 있다.

 

Manaslu_0398.jpg

이런 길을 지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떨어지면 아래로 한참 미끄러져 내려간다.
 

Manaslu_0402.jpg

계곡 양편으로 군데군데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햇볕이 따사로운 건너편 양지녁에 자리잡고 있다.
 

Manaslu_0403.jpg

깊은 협곡을 돌아보다. 멀리 작은 마을이 보인다.

 

Manaslu_0407.jpg

마니월 하나를 지난 후 시링기 콜라에 놓여 있는 낭만적인 다리를 건너다.
 

Manaslu_0410.jpg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르막계단이 나온다.
 

Manaslu_0416.jpg

맑고 순수한 모습의 산골 소녀들. 쿠탕 계곡에는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은 집들이 많이 있다.

 

Manaslu_0418.jpg

협곡은 여전히 좁으나 계곡 전체는 많이 넓어졌다.
 

Manaslu_0420.jpg

다시 협곡을 돌아가는 절벽길이 나왔다.
 

Manaslu_0422.jpg

갑에서 가까운 작은 집에서 점심을 먹다. 갑은 여기서 30분 거리다. 멀리 보이는 초르텐형 카니가 갑의 마을 입구 표시이다.
 

Manaslu_0427.jpg

뜨거운 햇살 아래 옥수수 알갱이를 말리고 있다. 스넬그로브의 여행기에도 이 지역 옥수수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절벽쪽 장대에 죽은 큰 새를 매달아 두었다.  

Manaslu_0428.jpg

수확이 끝난 옥수수밭에는 다 못 거둔 콩도 있다.
 

Manaslu_0432.jpg

이 집의 수줍은 두 아들내미. 하루종일 무엇을 하며 놀까? 그나마 둘이라서 덜 심심할 것이다.
 

Manaslu_0433.jpg

초르텐형 카니. 많이 낡았다. 중간에는 불경을 새긴 마니석을 올려놓았다.
 

Manaslu_0437.jpg

카니 내부 벽화. 이런 스타일의 카니는 무스탕 지역에 많이 있다.
 

Manaslu_0441.jpg

처음 나타난 철제 트러스트 다리를 건너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다. 역;사부터 사마가온까지 계곡이 동서로 나 있으므로 왼쪽 사면은 남쪽이 된다.
 

Manaslu_0448.jpg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오르면 초르텐과 마니월이 함께 있는 산길이 나온다.
 

Manaslu_0445.jpg

불상을 조각한 마니석으로 조성한 마니월.

 

Manaslu_0450.jpg

갑을 지나자 바로 산사태 길이 나왔다.

 

Manaslu_0451.jpg

오늘의 목적지로 삼은 갑의 캠핑장은 다른 팀이 먼저 차지하고 있어 우리는 갑에서 15분 거리인 <마나슬루 탁쿨리 호텔> 야영장에서 여장을 풀었다.

Manaslu_0456.jpg

캠프사이트. 오른쪽 엉성하게 보이는 움막이 주방용 움막이다.
 

Manaslu_0459.jpg

캠프를 친 후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스태프들. 카드놀이를 하는데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돈 내기를 한다.
 

Manaslu_0457.jpg

캠프 모습. 나중에 온 서양의 중년 부부는 다시 아랫집으로 돌아가 캠프를 쳤다.
 

Manaslu_0452.jpg

아래쪽(동쪽) 계곡 풍경.
 

박테리아는 독립적인 생물체다. 박테리아는 우리 몸에 이로운 특성을 가진것도 많고, 스스로 세포분열을 통해 증식한다. 물론 콜레라 처럼 인체에 해로운 대사물질을 배출하는 박테리아도 있다. 인간의 소화기간 내에서는 약 1kg에 해당하는 천억마리의 세균이 증식하고 있고, 인체의 생리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크기는 몇 마이크로미터 정도다.

바이러스는 독립된 생물체로 인정받지 않는다. 박테리아에 비해 100배 이상 작아 전자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다.  바이러스는 유전자 가닥(DNA)와 단백질로 구성된 외피로 이루어져 있다. 대사작용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물이나 영양분이 필요없다. 바이러스의 유일한 목표는 숙주의 몸에 침투해 다량으로 증식하고 퍼지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세포내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며, 이렇게 생성된 바이러스는 결국 세포를 파괴한다.  바이러스는 세포막이 없어서 항생제가 아무 효과가 없고, 예방 주사만 효과가 있다. (마르틴 보레, 토마스 라인톄<나는 왜 이런게 궁금할까>)
 

trek 6. 필림 - 뎅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티베트 마을로 들어서다

2007. 10. 18(목)

필림의 현지 이름은 필론(Philön) 또는 도당(Dodang)이라고 한다. 좀솜의 옛 이름은 종삼(Dzongsam)이다. 네팔의 지명은 대부분 표기가 다른 몇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이번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를 보고 비로소 그 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인도를 식민지배했던 영국은 1808년 측량조사국(the Survey of India)을 세워 전 인도대륙의 지도를 만드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다른 열강을 제치고 제국을 더욱 확장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1830년까지 조사는 네팔과 티베트 국경까지 이루어졌는데 에베레스트 산의 측량과 산 이름의 명명도 이 때 이루어졌다. 그리고 네팔과 티베트를 포함한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그 지도를 바탕으로 현재의 네팔 트레킹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명이 다른 것은 그런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무스탕 지역의 길링(Ghiling)도 원래는 겔링(Geling)이고 이곳 마나슬루의 라르키아(Larkya)도 원래 이름은 바북(Babuk)이다. 새로운 이름이 전혀 다른 뜻은 아니지만 원래의 이름과는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마나슬루 히말을 최초로 본 유럽인은 영국의 유명한 등반가이자 탐험가인 빌 틸먼(W. Tilman) 일행이다. 그들은(동료 3명과 유명한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두 번에 걸쳐 랑탕 지역의 가네시 히말과  랑탕 계곡을 거쳐 강자 라로 넘어 주갈 히말까지 탐사했다. 랑시샤 카르카에서 주갈로 넘어 오는 능선 이름은 그래서 틸먼즈 콜(Tilman's Col)이다. 가네시 히말에서 그는 팔도르(Paldor, 5996m)를 올랐다.

이듬해인 1950년 봄 그는 <네팔-영국 안나푸르나 원정대> 대장으로  안나푸르나 4봉 등정을 위해 마낭 지역으로 간다. 당시는 포카라까지 가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카트만두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트리술리 바자르-다딩베시-아루갓바자르-칸촉-고르카-베시사하르-마낭으로 갔다. 칸촉의 능선에서 그들은 처음 하늘 높이 걸려 있는 마나슬루 히말의 웅자를 보았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북쪽으로 거의 30마일 떨어져 있는 히말출리(7893m)를 똑똑히 보았다... 쌍안경과 망원경으로 보니 히말출리의 번쩍이는 꼭대기가 잘 보였다. 비록 30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대부분의 산들이 쉽게 등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저 산이 과연 히말출리가 맞는가 의심했다. 히말출리 바로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설봉을 지닌 보우다(Baudha, 6672m)가 우리가 보기엔 더 오르기 쉬운 능선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우리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지나가며 바라보기만 했다. 몇 달 후 우리가 오를 수 있는 봉우리를 찾을 때 로버츠(J.O.M. Roberts 소령)와 나는 그것을 그냥 지나친 것을 후회했다. 우리는 아무도 보우다가 보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지 아니면 오르지 못할 것 같은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중 -Nepal Himalaya, p. 815)

네팔 히말라야를 논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텐징 노르가이나 힐러리 그리고 메스너 같은 등반가는 일단 논외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네팔 히말라야는 등반이 아닌 문화적 접근으로 네팔 히말라야 학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다. 일본의 가와구찌 스님, 영국의 산악인 빌 틸먼, 이탈리아의 티베트 학자 지우제페 투치, 영국의 티베트 학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이 그들이다.

학자적 분위기와 다른 등반가인 틸먼이 다른 유명한 등반가들을 제치고 이 그룹에 들어간 것은 그가 최초로 랑탕 지역을 방문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랑탕과 안나푸르나, 그리고 에베레스트 지역의 원정을 통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세한 탐사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책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은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 1866-1945) 스님은 당시 일본의 승려 사회에 염증을 느껴 티베트에 들어가서 참된 불법을 구하고 불경을 구해 오겠다고 결심하고, 1897년 6월 하순 일본 고베 항을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르질링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찬드라 다스나 티베트인들로부터 1년 5개월간 티베트어를 배운 뒤 1899년 1월 중국 승려로 칭하고 네팔에 잠입, 카트만두에 머무르면서 무스탕을 경유해 티베트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티베트와 중국은 모든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라사 여행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스탕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북쪽의 오지를 통해 카일라스 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그 해 3월 초순 카트만두를 떠나 포카라를 거쳐 뚝체에서 한 동안 머무르면서 잡입할 경로를 모색했다. 이곳에서 무스탕 짜랑(Tsarang)의 한 승려와 교분을 맺은 그는 그 인연으로 묵티나트를 거쳐 무스탕 계곡을 따라 올라가 짜랑의 곰빠에서 거의 1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서북의 오지 돌포로 우회하여 티베트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카일라스를 순례하고 라사까지 여행한 뒤 라사의 세라 사원에서 1년 넘게 머무르면서 공부하다가, 시킴 쪽의 국경을 넘어 다르질링으로 내려와 캘커타로 갔다. 그는 네팔과 티베트에 들어간 최초의 일본인으로 이후 일본 티베트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티베트 여행기>(초판 1907년)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이 여행 과정을 소상히 기술했다. 좀솜의 무스탕 박물관에는 가와구치 스님의 사진과 무스탕 여정이 전시되어 있고 마르파에는 기념관이 있다.

이탈리아 티베트 학자 투치 교수가 쓴 는 무스탕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네팔 전반에 관한 책이다. 1952년 9월  15일 카트만두를 걸어서 출발한 원정대는 고르카, 포카라, 고라빠니를 거쳐 10월 20일 까그베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짧은 무스탕 방문을 마치고 베니에서 룸비니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포카라로 되돌아와 비행기로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65일 간의 원정이었다. 그의 책에는 무스탕 부분을 포함하여 네팔 여러 지방의 문화, 특색, 풍속을 전문가의 안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 학부(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데이비드 스넬그로브(David L. Snellgrove) 교수는 1956년에 돌포에서 카트만두까지 네팔 서부에서 북부를 횡단했는데, 돌포에서 까그베니로 내려와 깔리 간다키 강을 따라 축상에서 뚝체 근처까지 오르내린 다음 다시 올라가 무스탕의 로게까르와 짜랑을 돌아보고 로만탕은 직접 방문하지 않은 채 묵티나트로 갔다.

그는 묵티나트에서 토롱 라를 넘어 마낭의 나르 계곡을 방문 한 후 다라빠니에서 빔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라르키아 라를 넘어 부리 간다키 계곡으로 내려왔다(지금의 안나푸르나 라운딩과 마나슬루 트레킹 코스의 역방향이다). 그는 이 여행에 대해 <히말라야 순례(Himalaya Pilgrimage)>라는 책을 썼다.

1964년 봄에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Michel Peissel)이 무스탕에 들어가 몇 달 간 머무르면서 무스탕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무스탕, 잃어버린 티베트 왕국(Mustang-A Lost Tibetan Kingdom)>을 썼는데, 지금까지 나온 무스탕에 관련 문헌 중 가장 탁월한 책이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사람은 스넬그로브이다. 그는 최초로 돌포지역을 탐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고 있는 쿠탕(마나슬루) 지역을 서양인으로는 처음 답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 <히말라야 순례>(초판 1958년) 후반부는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1981년 보스톤 샴발라출판사에서 발행한 <히말라야 순례> 뒤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학자의 예리한 안목과 경험많은 여행자의 따뜻함을 지닌 스넬그로브는 수 백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네팔 오지 마을의 삶의 방식을 재창조했다. 그와 그의 셰르파 가이드는 인도 국경에 가까운 저지대 평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티베트어를 쓰는 오지인 돌포의 고산 고개를 넘고 무스탕을 지나 마나슬루 지역을 거쳐 카트만두에 내려 오기까지  7개월 동안 1600km 이상을 여행했다. 여행 중 그들은 승려들과 라마들, 야크지기와 마을 주민들, 사원과 사당 그리고 불교 사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비밀 의식과 수련을 목격했다. 사원은 이 외진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이다. 스넬그로브 교수의 불교와 히말라야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에 이 책은 다양한 여행자들은 물론 학자들과 학생들에게 매우 가치있는 자료이다. 데이비드 스넬그로브는 런던대학의 동양-아프리카 학부의 명예교수이며 영국 학술원 회원이다. 그는 두 권의 인도-티베트 불교를 포함하여 많은 티베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항상 아쉬운 것은 이런 고전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투치의 , 스넬그로브의 <Himalaya Pilgrimage>, 틸먼의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 페셀의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이 네 권은 네팔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볼 만한 책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기초자료다.

위의 책들은  1967년에 나온 페셀의 책을 제외하고 모두 초판이 1950년대에 나왔다. 한 나라 학문의 성숙도는 이런 기초자료의 번역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그 속에 든 정신을 들여다 보면 빈 깡통인 것이 많다. 그저 돈 버는 방법을 쓴 책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그 런 책을 보면 부자가 된다고 믿는 바보들이 의외로 많다).

팔리지 않는 책은 출판사에서 내기 어렵다. 출판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 <대우학술총서>처럼 기업에서 후원해 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권 당 번역비와 출판비로 300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히말라야 원정에 기꺼이 수 억씩 부담하는 기업이 있는데 한 번쯤은 원정대 후원 대신 이런 책 번역에 후원한다면 한꺼번에 네 권을 다 번역할 수 있고, 그 가치는 조금 과장한다면 히말라야 원정 100번 이상의 가치가 있다.

히말라야 관련 글을 쓰는 사람마다 참고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옛 영어책을  이리저리 들춰야 하는 수고를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네팔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지역이라면 모르겠지만 해마다 1만 명 이상의 여행자와 수 십 팀의 원정대가 찾는 곳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와는 다른 곳이다.

물론 이런 책들의 번역을 위해서는 단순히 영어만 잘 해서는 부족하다. 네팔과 히말라야 그리고 티베트 문화와 언어, 역사  등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어에 대한 전문가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은 계속 인문학의 변방국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  *

어제 분실사고가 생겼다. 백산 스님의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카고백 속에 든 작은 손가방이 열려 있고 그 안에 넣어 둔 지갑이 통째 사라진 것이다. 백산 스님의 텐트는 제일 후미진 곳에 있었다. 누군가 텐트에 들어 간 모양인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지인은 아닐 것 같고 가능성은 포터들이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상황에서 감히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단단히 마음 먹고 한 일이다.

지갑에는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 그리고 한국돈 10만원밖에 없으니 큰 피해는 아니다. 신용카드는 신고하면 보름 전까지 보상이 가능하고 운전면허증은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사나흘 후면 도착하는 남룽이나 사마가온은큰 마을이라 전화가 있을 것이니 거기서 카드를 정지시키면 된다고 위로했다. 여권을 모두 삼툭에게 맡긴 것이 다행이다.

여권은 처음부터 맡길려고 한 것이 아니라 트레킹 허가를 위해 맡겨 둔 것이다. 원래는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우연히 그날이 네팔 축제일이라 관공서가 휴일이었다. 다음 날은 토요일(우리의 일요일에 해당)이라 역시 휴무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정대로 먼저 출발하고 셰르파 보조인 겔루 셰르파가 트레킹 2일째인 10월 14일 트레킹 허가를 받아 우리를 뒤따라왔다. 겔루는 어제 오후 우리와 합류했다.

네팔 사람들은 비교적 착하다. 그러나 100% 믿으면 안된다. 그래서 여권과 비행기표, 돈이든 지갑 등은 항상 몸에 달고 다녀야 한다. 트레킹을 떠날 때 여권과 항공권은 트레킹 여행사에 맡겨 두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개별 여행자는 그럴 수가 없다. 작은 어깨걸이 가방이 그래서 필요하다. 나는 그 가방은 밤에 잘 때만 벗어놓을 뿐 화장실 갈 때도 가지고 간다. 그것은 트레킹 전후 카트만두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는 카메라 가방까지 두 개나 되어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래도 분실할 경우의 난감함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감수한다.

보통 때처럼 7시에 출발했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둡고 쌀쌀하다. 길은 이미 강에서 멀리 올라와 있어 강물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들린다. 폭포를 위에서 보며 간다. 곧 해가 맞은 편 산 위에 비치기 시작했다. 멀리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건너편으로 큰 구릉 마을인 팡싱이 보인다.

필림 바로 동쪽에는 가네시 히말(7163m)이 있다. 3년 전 랑탕의 로우레비나 야크에서 본 코끼리 뒷모습처럼 생긴 가네시 히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물론 필림에서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랑탕에서는 늘 가네시의 뒷모습만 보인다. 우리 여정에서는 가까운 산이 가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2000년 이곳을 지나간 칼스텐이 오른쪽 춤 계곡을 경유한 여행기에는 그곳에서 본 가네시 1봉(7,406m) 서벽 사진이 있다.

Img_4574.jpg사진의 오른쪽이 가네시 히말 산군이다. 왼쪽 두 번째 크고 작은 두 개의 봉우리가 뭉쳐 있는 것이 마나슬루다. 마나슬루 왼쪽은 히말출리, 오른쪽 평평한 봉우리 다음 뾰족한  봉우리는 확실치 않으나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시링기 히말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manaslu_from_Laurebina_yak.jpg 지금 그 사이 계곡을 여행 중이다. 가네시 히말 산군은 제1봉(7406m)부터 5봉(6950m)까지 있다. 1949년 랑탕 지역을 탐사한 영국의 틸먼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주봉은 1955년 10월 프랑스·스위스합동등반대가 처음으로 등정했다.

출발한 지 30분 후 작은 마을에 이르니 프랑스 팀이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은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다. 어제도 필림에서 우리가 먼저 캠프사이트를 차지한 까닭에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도 그리 나쁘지 않다. 곧 '한 채의 찻집'이라는 뜻의 에클레바티(Ekle Bhatti)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대여섯 채 되는 마을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멋진 폭포가 보인다.

마을을 지나 언덕에 오르니 북쪽 계곡 모습이 훤하게 드러난다. 양쪽 산이 가파르니 북쪽으로 가는 계곡은 점점 좁아진다. 오른쪽 사면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길이가 수 백 미터는 됨직하다. 그 아래 산허리로 난 가는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고산에 들어 온 기분이 들었다.

해는 떴지만 산이 높아 여전히 그늘 속이다. 1시간 운행 후 산기슭 코너 오르막에 올라 쉬고 있는데 프랑스 팀이 도착한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이런 캠핑트레킹은 휴가가 긴 서양 사람들이 아니면 젊은 사람이 오기 힘들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트레킹 시즌인 10월과 11월에 3주간의 긴 시간을 내기 어렵다.

10여 분 동안 같이 가는데 앞에 가던 프랑스 팀이 멈추어 서서 건너편 기슭을 가리키며 웅성거린다. 멀어서 잘 안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바위 위에서 놀고 있다. 히말라야에 서식하고 랑구르(Langur) 원숭이로 은갈색 털에 검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원숭이들은 랑탕 지역에서도 몇 번 보았다. 힌두교도들은 이 원숭이를 원숭이의 신인 하누만의 현현으로 보고 숭배하고 있다.

길은 강에서 점점 높아지고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복구한 곳도 나왔다. 잠시 후 오른쪽으로 샤르(shar) 콜라의 물이 내려오는 춤(Tsum) 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춤이란 이 계곡 전체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1956년 9월 하순, 스넬그로브는 팡싱을 거쳐 시드리바스까지 내려와 필림으로 건너온 후 다시 춤 계곡으로 올라가 여러 마을과 곰빠를 방문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900년 전 벌거벗은 티베트 성자 밀라레빠(Milarapa, 1052-1135)가 이 계곡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이 계곡은 티베트 국경을 넘어 키이롱(Kyirong)과 연결된다. 랑탕의 샤브루베시 북쪽 국경을 넘으면 나오는 티베트 마을이 바로 키이롱이다. 그 마을은 온천이 좋은 아늑한 마을이라 하인리히 하러는 말년에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그의 책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 쓰고 있는데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계곡이 합수되는 지점을 조금 지나 다리를 건너 오늘 처음으로 서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이제부터 오르는 부리 간다키 상류 계곡은 현지인들은 쿠탕(Kutang)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중산간 지방의 구릉족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티베트족들이 사는 마을이다. 재배하는 작물도 쌀은 더 이상 나지 않고 보리, 옥수수, 메밀만 나며 가옥 형태도 티베트 양식으로 바뀐다.

아침에 지도를 보고 오늘 점심은 냑(Nyak)에서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을이 길가에 표시되어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리를 건너 조금 가면 나오는 서쪽 사면의 출룽(Chhulung) 콜라로 1시간 올라가야 한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가 지적했듯이 마나슬루 트레킹 지도는 정확하지 않다. 서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춤 계곡 아래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춤 계곡을 지난 후에 나온다.

출룽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고르카로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계곡을 따라 히말출리(7893m)를 향해 남서쪽으로 계속 오르다가 히말출리 아래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 그리고 보우다 히말(6672m) 아래에 있는 루피나 라( Rupina La, 4720m)를 넘어 고르카까지 내려간다. 루피나 라에서 베시사하르까지도 산길이 있으나 트레커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지도참조)

마나슬루 트레킹의 시작 마을인 고르카에서 아루갓바자르로 가지 않고 바로 북진하여 루피나 라를 거쳐 출룽 계곡으로 내려오는 트레킹은 히말출리와 보우다 히말의 환상적인 풍광을 즐길 수 있어  모험적인 그룹이 시도하는 코스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아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 트레커 팀은 루피나 라에 눈이 쌓여 넘지 못하고 따또빠니 쪽 계곡을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큰 소나무가 많이 있는 비탈길을 간다. 한적한 오솔길이다. 9시가 넘어선 뒤에야 햇볕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허름한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가더니 곧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는 다리가 나왔다. 이 다리가 가관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 철망은 떨어진 것을 대충 보수해 두었다. 틈 사이는 나무로 막았다. 원래 나무로 된 바닥도 한쪽이 떨어져 나갔는지 판자로 막아두었다. 아마 낙석이 떨어진 모양이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이 다리가 바로 안드레스가 말한 '잠 다 깼니?' 다리인데 2년 전 안드레스의 사진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통행을 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대체로 겁이 많은 여성동포들은 떨며 건넜다. 길은 산사태가 난 험한 길과 강 옆 절벽을 보수한 길을 지난 후 강에서 조금 떨어진 산길로 접어들더니 다시 절벽 옆으로 돌고 있다.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 힘도 들고 배도 고프다.

지금까지는 11시 이전에 운행을 멈추었는데 오늘은 중간에 점심 먹을 마을이 없다. 무조건 오늘의 목적지인 뎅(Deng)까지 가야 한다. 11시 15분 뎅 마을을 알리는 돌로 만든 카니가 반겨주었다. 문을 통과하자 멀리 마을 초르텐과 몇 채의 집이 보였다. 마을로 가려면 왼편 산기슭을 돌아가 작은 지류를 건너야 한다. 이 지류는 여기서 보이지는 않는 히말출리에서 내려오는 물이라고 한다.

뎅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마을 길가에 있는 수도에 아낙네들이 있고 벌거벗은 아이 하나가 땅바닥에서 놀고 있다. 복장은 전형적인 티베트 복장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추바(chuba)를 입고 있다. 무스탕을 방문한 페셀은 현지인들과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추바를 입었다. 그러나 무스탕에서도 이제 추바를 입고 있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이곳 사람들의 복장을 안드레스의 여행사진에서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직접 보니 이곳이 무스탕보다 더 오지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논스톱(비록 중간에 여러 번 쉬기는 했지만) 4시간 30분의 운행으로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마당에 깔아 둔 깔개에 앉아 주방팀이 내 온 차부터 마셨다. 그리고 오늘은 운행 끝이라는 내 말에 한시름 놓는 표정이다. 원래의 계획도 여기까지다. 그래도 너무 일찍 끝나는 것 같아 점심 먹고 다음 마을인 라나(Rana)까지 갈 생각을 하고 타시에게 말하니 타시와 밍마 셰르파가 고개를 젖는다. 그곳은 캠프사이트가 한 곳밖에 없는데 이미 프랑스 팀이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그 다음 마을인 비히(Bihi)까지 또 한 시간을 가야 하니 너무 멀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다.

점심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 서양 커플이 도착한다. 이곳은 유난히 커플 팀이 많이 보인다. 지금까지 세 팀을 보았는데 트레킹 12일 째인 삼도에 이를 때까지 일곱 팀을 보았다. 나이도 노부부에서 젊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부부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는 티베트 빵과 소시지 그리고 야채를 곁들인 푸짐한 점심 식사를 하는데 그들은 간단하게 식판 하나씩 받는다. 그들의 가이드가 주방에서 가져왔다. 두 사람이라도 식당텐트를 가져오지만 보통 점심은 그렇게 먹는 모양이다.

이곳 캠프사이트가 겁나는 곳이다. 바로 뒤로는 절벽이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식물은 관상용이 아니라 식용 작물이란다. 그 뒤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식사를 마친 커플은 다음 마을로 떠나고 우리는 남은 오후를 한가하게 보냈다. 곧 다른 팀이 도착해 아랫집에 캠프를 쳤다. 이곳은 고도가 2000m 가까이 된다. 좌우로 높은 산이 있어 해가 빨리 진다. 멀리 북쪽 계곡 사이로 시링기 히말(7187m)이 개끗하게 잘 보인다.

시링기는 부리 간다키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어제까지 정북 방향에 있었지만 지금은 동북쪽으로 비켜 있다. 우리는 시링기의 왼편 계곡으로 빠져 서쪽을 향할 것이다.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는 여기서 남쪽 계곡 사이로  가네시 4봉(7102m)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늦은 오후의 뿌연 햇살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식당텐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타시가 포터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달밧도 잘 못먹어 하산한다고 한다. 이 아이는 아루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 중 한 명이다. 4일만 일하고 하산하는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눈이 충혈되어 있는 모습이 좋지 않아보인다. 식량이 점점 줄어들므로 나머지 아르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들도 3일 후에 도착할 사마가온에서 모두 돌아간다고 한다.

직원의 채용과 해고는 전적으로 서다인 타시의 고유권한이다. 그럼에도 굳이 데리고 온 것은 팁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500루삐를 주고 돌아가 몸조리 잘 하라고 했다. 18일 동안 짐을 지는 포터들과 주방 보조요원들에게 줄 팁으로 1인당 1000루삐를 책정해두었다. 여행사 소속 포터들의 일당은 보통 350~400루삐 사이다. 1000루삐면 전체 임금의 15% 정도로 3일치 일당에 가깝다.

이들은 여행사로부터 조금 박한 임금을 받지만 계속 일을 할 수 있어 좋고 덤으로 트레킹 그룹으로부터 팁을 두둑하게 받아 좋다. 그룹으로 오는 팀은 비교적 경비를 여유 있게 가지고 오기 때문에 팁이 후한 편이다. 또 고객에게 헌신하는 그들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4일 일한 사람에게 500루삐의 팁은 좀 많은 편이지만 몸도 좋지 않으니 그냥 주었다(잔돈도 없다).

백산스님은 나중에 이 친구가 혹 지갑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의심이 된다고 했다. 어제 분실사고 후 오늘 갑자기 떠나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 그냥 잊어 버리는 좋다. 우선은 빨리 신용카드부터 정지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전화가 있다는 남룽까지는 앞으로 이틀 더 걸어야 한다.    

<참고> 루피나 라 경유를 시도한 팀이 찍은 사진

고르카에서 본 마나슬루 산군(왼편은 안나푸르나)
루피나 라 아래에서 본 동쪽 가네시 히말 산군
루피나 라를 눈 때문에 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뒤돌아 본 북서쪽 풍경
                                        
(
http://www.bergdias.de 자료)

 Manaslu_trekmap_06.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298.jpg

필림을 나와 코너를 돌기 전 돌아보다. 멀리 긴 다리가 보인다. 해가 서쪽 산을 비치기 시작했다.
 

Manaslu_0300.jpg

좁은 협곡에 떨어지는 폭포를 위에서 보고 걸었다.
 

Manaslu_0301.jpg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Manaslu_0304.jpg

30분 후 에클레 바티 도착. 뒤로 보이는 폭포가 심상치 않다.

Manaslu_0306.jpg

아직 해가 비치지 않아 쌀쌀한데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Manaslu_0307.jpg

에클레 바티 지나 언덕에서 본 부리 간다키 협곡과 마나슬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폭포. 가는 산허리길과 지나가는 포터의 모습이 점으로 보인다.

Manaslu_0311.jpg

작은 다리를 건너 포터들을 앞세운 우리 팀들이 가고 있다.

 

Manaslu_0314.jpg

폭포를 지난 후 계속 산허리를 따라 구부러진 길을 오르내린다.
 

Manaslu_0315.jpg

곧 프랑스 팀이 따라와 우리가 쉬고 있는 곳에서 쉰다. 대부분 젊은 커플들이다.
 

Manaslu_0316.jpg

그곳에서 10여 분 걷자 계곡 건너편으로 히말라야에 많이 서식하는 랑구르 원숭이 무리가 보였다.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이다.
 

Manaslu_0319.jpg

이제 트레일은 계곡에서 높이 올라와  산허리를 계속 돌고 도는 길이다.
 

Manaslu_0321.jpg

춤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점. 춤 계곡 위에 놓여 있는 다리에서 찍었다. 오른쪽이 부리 간다키 강의 상류인 쿠탕 계곡이다.
 

Manaslu_0326.jpg

강을 건너 서쪽 사면으로 넘어오다. 아직 해는 비치지 않아 쌀쌀했다.

 

Manaslu_0328.jpg

코너를 돌자 해가 비쳐 따뜻했다. 큰 소나무가 많은 멋진 산허리길이다.

 

Manaslu_0329.jpg

곧 오른쪽 동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나왔다.
 

Manaslu_0332.jpg

허술해 보이는 이 다리는 그래도 똑바로 서 있어 양반이다.
 

Manaslu_0334.jpg

다리를 건너 거친 절벽길을 조금 지나자,

 

Manaslu_0335.jpg

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다리가 나왔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는 이 다리를 "안녕, 잠 다 깼니(Good morning, are you well awake)?" 다리로 불렀는데 그럴 듯 하다.

Manaslu_0336.jpg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엔 너뭇가지로 막아놓았다. 바닥에도 보조 널빤지를 덧댔다.

Manaslu_0343.jpg

무사히 한 사람식 다리를 건넌 후 산사태 길을 지났다.
 

Manaslu_0346.jpg

마을 주민의 정성이 깃든 절벽길 돌다리길도 지났다.
 

Manaslu_0347.jpg

곧 제법 넓은 산길이 나왔다. 그곳에 있는 나무 열매는 식용이라고 하는데 보기와는 달리 맛은 별로였다.
 

Manaslu_0348.jpg

다시 고도를 올린다. 멀리 시링기 히말(7187m)의 모습이 보였다.


 

Manaslu_0352.jpg

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수목한계선은 아직 멀었다.
 

Manaslu_0353.jpg

반가운 카니(Kani)가 나타났다. 카니가 있다는 것은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카니는 마을 전체의 출입문이다. 무스탕 지역에서는 카니 대신 초르텐이 있다.

Manaslu_0355.jpg

카니를 지나자 오늘의 목적지 뎅(Deng) 마을이 보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왼쪽 산허리로 나 있다.
 

Manaslu_0356.jpg

 뎅 마을 초입 길가 언덕의 소박한 초르텐

 

Manaslu_0359.jpg

마을 수돗가에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있다. 벌거벗은 저 녀석은 춥지도 않은가 보다. 집 앞에 주방팀이 있다. 그곳 마당이 오늘 우리의 야영지이다.

CIMG0841.jpg

점심으로 나온 티베트 빵. 꿀을 발라 먹으면 맛이 좋다. 오이, 소시지, 콩 등을 먹었다. 한국팀을 위해 삼툭은 젓가락을 준비했다. 그래서 가지고 간 젓가락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송남형 사진)

Manaslu_0361.jpg

우리의 야영지. 왼쪽 맨드라미처럼 생긴 작물 뒤는 깊은 낭떠러지다. 나중에 온 한 팀이 아랫집 마당에 캠프를 쳤다.

Manaslu_0362.jpg

북쪽으로 보이는 시링기 히말(7187m). 티베트 국경 가까이 있는 시링기 히말은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오후 4시 경 찍은 사진인데 해는 이미 서쪽의 높은 산 뒤로 넘어갔다. 

trek 5. 도반 -  자갓 - 필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2007. 10. 17(수)

아침을 먹고 7시 10분 출발했다. 프랑스 팀은 이제야 식사 중이다. 우리는 텐트를 치지 않았으므로 포터들은 어제 내려놓은 짐 그대로 다시 지고 출발하니 스태프들의 일이 훨씬 단순하다. 그렇지만 다시 또 도미토리 방을 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마을 바로 뒤에 있는 다리를 건너 1시간 동안의 운행은 별 재미가 없는 단조로운 길이다. 30분 더 가자 제법 넓은 경작지 공간이 나오고 계곡 사이에 마이산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 하나가 떡 가로막고 있는 곳 조금 못미처 집이 세 채 있는 마을이 있다. 샤울리 바티(Shyuli Bhatti) 마을이다. 바티는 찻집이라는 뜻인 줄 알지만 샤울리는 무쓴 뜻인지 모르겠다. ABC트레킹에서 비레탄티와 간드룩 사이의 샤울리(Syauli) 바자르의 샤울리와 같은 뜻일 것이다(통일된 영어 표기가 없으므로 철자 한 두자 다른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샤울리 바티에서 30분 쯤 쉬었다. 물도 마시고 가지고 간 사탕을 나누어 먹었다. 집 주인과 우리 셰르파들 등 눈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나누어 주었다. 어제 늦게 지난 간 팀은 이곳에 캠프를 차렸을 것이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좁은 길을 30분 오르내리니 9시 10분 경 갑자기 툭 터진 강바닥이 나타났다.

숲 속을 걷다가 이렇게 개방된 공간을 보니 속이 후련하다. 이곳 풍경은 마치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코스에 나오는 딸(Tal)과 비슷한 분위기다. 그러나 번잡한 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 소리만 제외하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마나슬루나 마칼루 등 캠핑트레킹 코스의 좋은 점은 이런 한적함이다.

네팔에 트레킹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은 대략 1년에 8만명이다. 그 중 60%(48,000명)는 안나푸르나 지역으로 가고 17%(13,000명)는 에베레스트 지역으로, 13%(10,400명)는 랑탕 지역으로 간다. 그리고 위 3대 메이저 트레킹 코스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으로 전체의 10%(8,000명)가 간다.(Steve Razzetti, <Trekking and Climbing in NEPAL-25 Adventure Treks in the Might Himalaya>)

나머지 지역이란 마나슬루, 나르 -푸, 다울라기리, 캉첸중가, 마칼루, 무스탕, 돌포의 일곱 지역이 대표적인 곳인데, 단순하게 계산해서 8천 명을 7로 나누면 한 곳 당 1년에 1,100명 조금 넘는 수만 방문하는 셈이니 얼마나 한적할 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이 수치는 몇 년 전의 통계지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이란 물론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리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모처럼 차분한 마음을 가지려고 히말라야를 찾았는데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상할 때가 많다. 바글거리는 식당의 풍경도 처음엔 신기하고 즐겁다. 그러나 여러 해 겪다보면 소란스러움을 피해 점점 여행자가 적은 롯지를 찾게 된다. 3대 트레킹 코스를 다 마친 트레커이 좀 더 한적함을 즐길 수 있는 깊은 오지의 히말라야로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곳 넓은 강바닥, '마이산' 바로 아래에 바티가 하나 있다. 야영하기 좋은 곳이다. 2005년 마나슬루 트레킹을 했던 안드레스는 우리처럼 마차콜라에서 출발하여 따또빠니에서 점심을 먹고 도반을 지나 이곳에서 야영을 했다. 도반에서 이곳까지 두 시간 거리니 우리 역시 어제 비가 오지 않았다면 오후 3시 경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마나슬루 일정을 짤 때는 소요시간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어제 일정은 일단 도반으로 정했다. 지도상으로 자갓은 너무 멀었다. 이렇게 중간에 멋진 곳이 있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일정을 이곳으로 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제 날씨가 좋았다면 도반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갔을 것이다. 12시 45분은 운행을 마치긴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도반의 캠프사이트보다 이곳이 백 배 낫다. 누구든 다음에 올 사람들은 이곳을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이런 멋진 강변의 캠프사이트는 마나슬루에서도 유일하지만 아마 네팔 트레킹의 모든 코스에서 흔치 않을 것같다.

강바닥 옆을 가던 길은 물길 때문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오른쪽 산비탈의 울퉁불퉁한 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 시 후 다시 계곡 바닥으로 내려섰다. 넓은 강바닥은 점점 좁은 협곡으로 변해갔다. 주변의 풍광은 여전히 절벽이 압도하고 있다. 코너를 돌아 오른쪽 사면으로 올라서서 조금 가다가 지류계곡인 야라콜라를 건너는 현수교를 건너니  다시 계속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교차된다. 그리고 얼마 후 다리를 건너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왼쪽 사면으로 넘어 갔다.

길은 이제 단정한 돌계단의 오르내림이다. 그런데 주변 풍광이 엄청나다. 거대한 절벽 사이에 난 길은 마치 무릉도원으로 가는 비밀의 문처럼 보인다. 코너를 돌 때마다 변하는 풍경은 발걸음을 자주 멈춘게 한다. 고도는 1200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풍경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도반에서 자갓 사이의 이길은 마나슬루 트레킹 중 저지대에서는 가장 멋진 풍경을 지니고 있어 떠나기가 주저될 정도였다.

그 풍경의 중심에 있는 작은 마을 야루판트(Yaruphant)에 도착했다. 샤울리 바티에 서 있는 이정표를 보면 그곳에서 1시간 30분 거리로 나와 있다. 우리는 1시간 20분 걸렸다. 거대한 절벽을 마주하고 따뜻한 햇볕 아래 서너 채의 집이 조용히 모여 있다. 마치 세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은거하고 있는 은자들의 집 같다. 문득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 779-843)가 지은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尋隱者不遇)'라는 시가 생각났다.  

尋隱者不遇

 

松下問童子 (쏭 시아 원 통쯔)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 (이엔 쉬 차이 야오 취)

스승님은 약초를 캐러 가셨다고 대답한다.

只在此山中 (즈 짜이 츠 샨 쭝)

다만 이 산 속에 있을 터인데,

雲深不知處 (윈 션 뿌 즈 추)

구름이 깊어서 있는 곳을 모르겠네.


예전에 한시를 공부할 때 즐겨 읊던 5언절구다(그러고 보니 벌써 20여 년 전이다). 당시 어학연수를 명분으로 잠시 대만을 다녀오면서 노래 테이프를 몇 개 사왔는데 그 중 <兒童唱唐詩(上,下>) 테이프는 아이들이 당시(唐詩)를 노래로 부르는 내용으로 특히 좋아하여 지금도 가끔 듣곤 한다. 노래가 끝나고 해설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시끄럽게 들리기만 하던 중국어가 조용히 잘 말하면 음악 못지않게 아름다운 선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 게 되었다.

정말 이곳은 가도의 시에 나오는 그런 은자가 살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길은 계속 산허리 코너를 돌고 있다. 멋진 풍광을 벗어나는 마지막 오르막 코너에서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 점심 먹을 마을인 자갓(1415m)에는 10시 35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전부터 판석이 잘 깔려 있다. 마을 입구 팻말에는 <당신은 마나슬루 보존지역에 들어서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네팔어와 영어로 쓰여 있다. 마을 광장 끝에 있는 돌 초르텐을 보니 비로소 히말라야로 들어 온 기분이 들었다.

자갓이란 '톨게이트(tollgate)'라는 뜻이다. 즉, 통행세를 받는 곳이다. 예전 티베트와 무역을 할 때 이곳에서 통행세를 받았다. 안나푸르나 서키트 지역에도 자갓이 있다. 그곳 역시 마찬가지 기능을 했던 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경찰 체크포스트와 우체국, 초등학교가 있다.

멋진 캠프사이트에 주방팀이 준비 한 깔개가 놓여 있다. 여성동포들이 강한 햇볕을 피하기 위해 깔개를 그늘 쪽으로 옮긴다. 마당에는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히말라야에는 족제비 같은 동물이 없는 모양이다. 모든 닭은 방목을 하고 있다. 제일 윗 마을인 삼도에서도 그랬다. 얼마 후 프랑스 팀이 도착했다. 그들은 서양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거침없이 뜨거운 햇볕을 즐긴다.

잠시 타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40세인 그는 고향 무스탕 남돌을 떠나 포카라에 와 가이드 일을 한 지 10년 되었고 정식 라이센스는 3년 전에 취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으나 수입이 형편없어 나왔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셨으니 특별히 고향에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12살 아들과 9살 딸이 있다. 타시를 보니 마치 5년 전의 삼툭을 보는 것 같다. 영어를 잘 하니 그도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여행사를 하나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삼툭의 여행사에 소속된 지금은 한국어도 열심히 독학하는 중이라고 한다.

발목이 아무래도 심싱찮다. 이틀 동안 샌들을 신고 운행한 탓에 발목이 시큰거린다. 아침에 보명화 보살님이 가지고 온 발목보호대를 양말 안에 신었으니 조금 도움은 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한다. 특히 오른쪽 발목이 더 아팠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목이 따가웠다. 목감기가 시작될 때의 증상과 같았다. 순간 마차콜라에서 한 목욕이 떠올랐다.

결국 신주단지처럼 배낭에 넣어 지고 온 등산화를 꺼냈다. 가능하면 라르키아 라 가까이 가서 신으려고 했는데 이런 상태라면 그곳까지 가기도 전에 발목이 망가질 지경이다. 비상용 끈으로 밑창을 잘 묶은 후 오후 운행부터 신기로 했다. 제발 오래 버텨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점심으로 나온 티베트 빵에 꿀을 찍어 먹으니 맛이 좋다. 열이 많은 체질이라 평소 꿀을 잘 먹지 않는데 네팔 꿀은 잘 먹힌다. 꿀병은 엉성하지만 모두를 이구동성으로 맛이 좋다고 한다. 점심 먹은 후 12시 15분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니 바로 내리막길이 나오고 곧 왼편으로 두 개의 계곡(팡구콜라와 바루콜라)이 합수되는 강바닥으로 내려왔다. 여기서 길이 두 개로 갈린다. 하나는 계속 왼쪽 산기슭쪽을 타고 가다가 현수교를 건너는 높은길이고 다른 하나는 강바닥쪽으로 내려가는 낮은길이다.

우리가 타시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갈림길이 나오자 앞에 가던 사람이 망설이고 있다. 내가 앞장 서 윗길로 올랐다. 아무래도 큰 길이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곧 타시가 따라와 돌아오라고 한다. 윗길은 여름길로 몬순 때 물이 불어나면 사용하는 길이다. 지금은 겨울길인 강바닥길을 갈 수 있으며 강에는 작은 통나무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 강바닥을 잠시 걸은 후 왼쪽 사면으로 올라 여름길과 만났다. 그곳부터는 다시 계단길이다.

중간에 쉬기도 하면서 계단길을 45분 오르내리니 작은 마을 살레리(Salleri, 1340m)가 나왔다. 이 마을도 판석으로 잘 포장되어 있다. 길 옆 담장에는 이 길에 대한 연혁을 써 놓았다. 총 길이는 317m고 비용은 73,810 루삐 들었으며 살레리 마을부녀회(Mother's Group)에서 30%를 부담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완공연도는 네팔력 2055년 12월 27일이다. 금년이 2064년이니 11년 전이다.

여기서 다음 마을인 시드리바스(Sidribas)까지는 45분 거리다.  마을을 벗어나니 멀리 앞쪽으로 시링기 히말(Shringi HImal, 7187m)이 보인다. 티베트 국경 가까이 있는 산이다. 왼편 산기슭으로는 우리가 가야 할 산허리길이 실날처럼 있다. 그 길을 올라 코너를 돌았다. 오솔길 같은 내리막길이고 그 아래쪽으로 시드리바스가 있다. 멀리 건너편 산 중턱에 오늘의 목적지 필림이 보인다. 극적인 절벽길은 더 이상 없고 다만 한적하고 걷기 좋은 산길이다.

시드리바스(1420m)에서 처음으로 마니월을 보았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아이들과 엄마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풍경이 한가롭다. 개도 길바닥에 늘어져 있고 오리도 새끼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훈시(?) 중이다. 곧 부리 간다키 강을 가로지른 긴 다리가 보였다. 필림으로 가는 길이다. 계속 산기슭을 따라 가는 작은 길도 하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팡싱(Pangsing)을 거쳐 나중에 냑(Nyak)에서 주 트레일과 만난다. 그러나 캠핑할 곳도 없고 현지인들만 이용하는 거친 길이라 모험적인 트레커 외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필림으로 가는 이 다리는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긴 다리다. 어림짐작으로도 150m는 될 것 같다. 다리를 건너 필림까지는 200m 정도의 고도를 오르는 지그재그 오르막이 다. 하루의 일정을 마칠 때 쯤은 모두들 힘들어 하는데 오늘은 더욱 화끈하게 운행을 마감하고 있다.

오후 2시 40분, 필림(Philim, 1550m)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세워 놓은 관문인 카니(Kani)에는 마오이스트 깃발이 많이 꽂혀 있다. 필림은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캠프사이트는 아랫마을에 있다. 필림도 마나슬루에서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스넬그로브에 의하면 필림은 부리 간다키 계곡에서 티베트 곰빠가 있는 마을 중 제일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여장을 풀고 좀 씻어볼까 하고 마을 수돗가를 가니 마을 사람들이 많아 포기했다. 저 아래쪽으로 가면 또 수도가 하나 있다고 한 영감님이 몸짓으로 말했지만 내려가기가 귀찮아 그냥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는 것으로 만족했다. 닷새만에 겨우 1500 고지에 올랐다. 그래도 해가 지자 쌀쌀한 것이 고산지역에 가까이 온 것을 실감한다. 주방팀이 내 온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하루의 운행을 정리했다. 식당텐트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Manaslu_trekmap_05.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198.jpg

도반콜라를 건너 돌아본 도반 풍경. 어제 지나왔던 멋진 폭포가 보인다.

 

Manaslu_0200.jpg

제법 넓은 경작지에 있는 샤울리 바티 마을. 마이산 처럼 생긴 바위 절벽이 보인다. 잠시 후 우리는 그 절벽 아래를 지나갈 것이다.

 

Manaslu_0204.jpg

샤울리 바티에서 휴식. 아직 고도가 얼마 도지 않는데 혜명화 보살은 벌써부터 붓기가 보인다.
 

Manaslu_0206.jpg

곧  안나푸르나 지역의 딸(Tal)과 비슷한 분위기의 풍경이 나타났다. 그러나 전체적인 느낌은 비교를 불허한다.
 

Manaslu_0207.jpg

강바닥 길가에 바티(찻집) 하나가 있다. 도반보다 이곳에서 야영하면 더욱 멋진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Manaslu_0219.jpg

찻집에서는 반드시 쉬어 간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사탕이나 초코바를 먹어 에너자를 보충한다. 보명화 보살님이 초코바를 많이 가져와 쉴 때마다 나누어 주었다.  

Manaslu_0210.jpg

강바닥 길을 한참 간 후 길은 오른쪽 기슭으로 오른다. 고개에 올라 내려다 보니 다시 넓은 강바닥, 오른쪽 절벽 아래로 길이 나 있다. 절벽 코너를 돌면 길은 다시 산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동쪽 지류에 걸쳐진 다리를 하나 건넌 후 왼쪽 산기슭을 탄다.

Manaslu_0231.jpg

얼마 후 다시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서쪽 사면으로 가니 잘 만들어져 있는 돌계단길이 기다리고 있다. 거대한 절벽이 튀어 나와 있는 이곳 주변 풍경이 기가 막히다. 나는 이곳을 <마나슬루 풍경 베스트 5>에 넣었다.
 

Manaslu_0217.jpg

오르막을 오르면 멀리 은자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작은 마을 야루판트가 보인다. 거대한 절벽은 그곳으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보인다.
 

Manaslu_0218.jpg

강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야루판트 마을. 강 주변 땅은 돌이 많아 경작지로는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Manaslu_220-2.jpg

마을을 지나 고개에 올라 뒤를 돌아보다. 다시 보아도 멋진 풍경이다.

 

Manaslu_0224.jpg

10시 조금 넘어 자갓 마을 도착. 마나슬루 보존지역이 시작되는 마을이다.
 

Manaslu_0234.jpg

자갓 마을 광장에 세워진 초르텐. 트레킹 시작 후 처음 보았다. 본격적으로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접근하고 있다는 표시다.

Manaslu_0235.jpg

자갓 돌담에 있는 이정표. 마나슬루 지역에서는 라르케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1956년 가을 이 지역을 방문한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를 비롯하여 모든 문헌과 지도에는 라르키아(Larkya)로 표기하고 있다.  

Manaslu_0232.jpg

발목이 아파 더 이상 샌달을 신고 운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상용 끈으로 임시조치를 한 후 점심 먹고 오후 운행 때부터 다시 등산화를 신었다.

Manaslu_0236.jpg

자갓을 벗어나 겨울길에 놓여 있는 소박한 통나무다리. 여름길은 왼편 산기슭으로 나 있고 사진의 물이 흘러 나오는 계곡에 현수교가 놓여 있다.  포터들이 앞에 가고 있다.

Manaslu_0241.jpg

한가한 산골 마을 살레리 풍경
 

Manaslu_0240.jpg

살레리 마을 길 가 돌담에 부착되어 있는 도로포장공사 기록. 1996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고 쓰여 있다. 공사비 73,810루삐는 당시 약 1,000불 정도 된다. 

Manaslu_0243.jpg

살레리를 벗어나자 멀리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이 보였다. 시링기 히말은 티베트 국경에 가까이 있는 7천 미터급 산이다. 우리가 갈 길이 왼쪽 산허리에 보인다.
 

Manaslu_0249.jpg

트레킹 길은 항상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된다. 지금까지 아주 심한 오르막이나 내리막은 없었다.
 

Manaslu_0253.jpg

아래 강쪽으로 시드리바스 마을이 있다.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다. 저 정도 쯤이야... 건너편 산중턱에 오늘의 목적지 필림이 보인다.
 

Manaslu_0254.jpg

처음으로 마니월을 만난 시드리바스. 마니월이나 초르텐은 항상 왼편으로 통행해야 한다.

 

Manaslu_0256.jpg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한가하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엄마들과 아이들. 검둥개도 길 가운데에 늘어져 있다.
 

Manaslu_0258.jpg

모든 마을에는 이렇게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다음 목적지인 필름까지 45분 거리라고 쓰여 있다.

엄마와 아이들 1

Manaslu_0259.jpg

 엄마와 아이들 2

Manaslu_0262.jpg

시드리바스의 아이들

Manaslu_0265.jpg

곧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긴 다리가 나타났다. 필림으로 가는 15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긴 다리지만 그리 높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다리 건너는 것을 무서워 한다.  

Manaslu_0266.jpg

다리를 건너 한참 지그재그로 올라 필림에 도착했다. 마지막 운행에 땀께나 흘렸다. 마을 입구에 있는 카니(Kani)에는 마오이스트 깃발들이 색이 바랜 채 걸려 있다.
 

Manaslu_0279.jpg

필림 마을 중심가. 캠프사이트는 아줌마가 보고 있는 오른쪽에 바로 있다(아래사진).

 

Manaslu_0272.jpg

캠프를 치는 스태프들. 셰르파들과 주방팀들이 이 일을 한다.

 

Manaslu_0275.jpg

캠프가 완성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젖은 옷을 줄에 너는 일이다. 캠프사이트에는 대부분 이렇게 빨래줄을 설치해 두고 있다. 식사 전 손을 씻으라고 주방에서 항상 빨간 물통은 준비해 준다.  

Manaslu_0278.jpg

셰르파들을 도와 캠프를 치고 난 주방팀들은 바로 전을 벌이고 우리에게 차를 내 준 후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남자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선반 위로 김치그룻이 보인다.

Manaslu_0277.jpg

보통 오후 4시 경 차와 과자가 나온다.  뜨거운 밀크에 홍차티백과 설탕을 넣어 마시며 하루의 피곤을 달랜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trek 4. 마차콜라 - 따또빠니 - 도반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비를 만나다

2007. 10. 16(화)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예상했던 일이다. 비나 눈은 항상 예상을 해야 한다. 한 여름에도 눈이 올 수 있고 겨울에도 비가 내릴 수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저지대에서 고지대까지 다양한 고도를 거치기 때문이다. 2000m 이하는 아열대 기후라 비가 자주 내린다. 그리고 비행기로 바로 3000m 가까이 오르는 쿰부나 좀솜, 무스탕 지역도 비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는 우의나 스패츠, 아이젠은 반드시 지참해야 하는 필수품이다.

어제 오후 잠시 널어두었던 빨래는 비닐봉지에 넣었다. 이런 날씨에는 마르기가 쉽지 않다. 땀에 덜 젖는 티셔츠나, 바지는 빨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 트레킹에서 제일 문제는 속옷 빨래다. 하루만 운행해도 땀에 차는 속옷을 매 번 빨기도 어렵고 빨아도 마를 시간이 없다.

그나마 저지대는 나은 편이다. 고산으로 올라가면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기온이 낮아 잘 마르지 않는다. 매일 운행이 끝난 후 마른 옷으로 갈아입지만 다음날 운행을 시작할 때는 전날 입었던 옷과 양말을 다시 착용할 수밖에 없는데, 아침마다 온 몸이 으시시했다. 그렇다고 매일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도 없다. 그러려면 열 벌도 모자란다.

사실 하루 3리터 이상의 수분을 섭취하고 열심히 온 몸을 움직이는 트레킹을 이틀 정도만 하면 그동안 문명사회에서 축적되었던 노폐물이 거의 다 빠지낟.그 후에 나오는 땀은 냄새가 거의 없는 맹물 수준이어서 그리 냄새가 나지 않는다.  통기성과 보온성, 투습성이 뛰어난 등산의류는 운행 중에도 빨리 마른다.

양말은 다르다. 양말은 꽉막힌 등산화 속에 갇혀 있어 아무리 좋은 쿨맥스 양말과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어도 한계가 있다. 발냄새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점심시간에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벋는 이유는 발을 편하게 하려는 뜻이 있지만 양말을 말리기 위한 이유도 있다. 등산양말은 두껍기도 오죽 두꺼운가! 빨아도 말리기가 쉽지 않다. 나는 가지고 간 양말 네 컬레 중 한 컬레는 수면용으로 신고 세 컬레를 교대로 신으며 버텼다. 물론 중간에 빨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는 롯지트레킹이 훨씬 조건이 좋다. 롯지 식당에는 저녁에 난로를 피워놓기 때문에 젖은 빨래나 세탁한 빨래를 널어두면 쉽게 마른다. 밤에는 방 안에 빨래줄을 치고 널면 조금이라도 습기를 제거할 수 있다. 안나푸르나 지역 트레킹의 경우 롯지 식당 탁자 아래 요란한 소리를 내는 석유난로와 탁자를 빙 두르고 있는 담요 속에 빨래줄이 있다. 쿰부나 랑탕 지역은 식당 창가 주변에 빨래줄이 쳐져 있다.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비가 그치지 않아 출발을 조금 늦추었다. 타시가 앞장서야 하는데 텐트 걷는 일을 거들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정이 짧아 웬만큼 늦어도 무리가 없다. 다행히 곧 빗줄기가 가늘어져 텐트를 걷을 수 있었고 7시 40분 출발했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어제 늦게 도착한 프랑스 팀은 마을 끝 캠프사이트에서 이제 아침을 먹고 있다. 14명이나 되니 기동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식당텐트도 두 동이나 된다. 이 팀은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많다. 마나슬루 여행기를 보면 프랑스 팀을 만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무스탕 방문자도 프랑스가 단연 압도적으로 많다.

2005년 무스탕 방문자의 나라별 통계를 보면 프랑스가 156명으로 단연 으뜸이다. 2위 이태리는 88명, 3위 미국은 82명, 4위 독일은 80명이니 상위권에 속하는 다른 나라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비단 무스탕 지역 뿐만 아니라 아마도 네팔에서 캠핑트레킹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프랑스일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 바로 거센 지류가 흐르는 통나무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바로 강바닥으로 내려선다. 계곡에 물안개가 자욱하여 마치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길은 절벽길이 아니라 강물 2-3미터 바로 위를 걷는 쉬운 길이다. 빗줄기가 굵어져 우의를 입었다.

포터들은 비가 오면 비닐로 짐을 덮어 가방을 나르지만 비가 많이 오면 다 커버하지 못하므로 가방 안에 든 옷은 하나씩 따로 비닐패킹해야  한다. 배낭커버도 필요하다. 방수용도 되고 평소 운행 때도 커버를 쒸우고 운행하면 배낭을 보호해 준다.

'뜨거운 물'이라는 뜻의 따또빠니에는 10시에 도착했다. 입구에 물탕이 하나 있고 왼편으로는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는 홈을 판 돌 꼭지가 세 개 있다. 2005년 11월 이곳을 방문했던 안드레스의 글에는 욕탕에 물이 없는 모습인데 지금은 따뜻한 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다. 사진을 비교해 보니 2년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따또빠니에 도착하면 신나는 샤워는 아니더라도 몸을 씻고 빨래도 하며 한가한 오후를 보낼 생각이었다. 지금은 물이 나오는 �지도 세 개나 있으니 복잡하지도 않을 것이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욕탕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으슬으슬한 날씨여서 그럴 분위기가 나지 않았고 수온도 생각보다 높지 않고 미지근하다. 그래서 그냥 세수 정도로 끝냈다. 꼭지에서 나오는 물의 수온은 다 다른데 오른쪽 꼭지의 물 온도가 제일 높다. 따또빠니는 역시 안나푸르나 라운딩 중 나오는 따또빠니가 제일 뜨겁고 시설이 좋다.

1956년 이곳을 방문한 다비드 스넬그로브는 <히말라야 순례(Himalaya Pilgramage)>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작은 물줄기가 바위 아래에서 나와 노호하는 찬 부리 간다키 강으로 흐른다."라고 쓰고 있다. <마나슬루 트레킹 가이드북>을 쓴 레이놀즈가 1992년 마나슬루 개방 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찻집도 없고 물꼭지도 오직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캠핑트레킹이라고 아무데서나 점심을 먹지 않는다. 반드시 주방팀이 전을 펼칠 움막이나 롯지 아궁이가 있어야 하며 그런 곳이라야 식수도 구할 수 있다. ABC 트레킹 중 나오는 캠프사이트가 있는 롯지에는 한쪽에 반드시 그런 움막이 있다.

몇 채의 집이 마주보고 있는 이곳 따또빠니 마을 입구에 가게가 하나 있고 그 앞에 테이블이 하나 있어 일찍 온 우리가 차지했다. 지붕에 차양을 쳐 놓아 골목길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배낭에서 우모자켓을 꺼내 체온을 보존했다. 빠상이 곧 따뜻한 비스킷과 차를 가지고 왔다. 차 마시는 이 시간이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비는 차츰 잦아들었다.

별로 커지 않은 마을인데 아이들이 많다. 욕탕 앞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뭔 일인가 하고 가 보니 꼬마들이 엄마들의 보호 아래 비가 오든말든 즐겁게 물놀이를 하고 있다. 세상 근심걱정을 모르는 아이 때는 언제나 행복하다. 누구든 저런 시절이 있었으리라.

점시 먹고 출발할 때 비가 다시 굵어졌다. 15분 쯤 지나서 나무로 바닥을 깐 고풍스런(?) 현수교를 건너 처음으로 부리 간타키 강 오른쪽 사면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오르지 않아 건너편 절벽에서 엄청난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나타났다. 얼마나 장관인지 비가 내리는 중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감상했다. 마나슬루 지역은 유난히 수직 절벽이 많아 만나는 폭포마다 장관이다.

길은 울창한 수풀 사이로 나 있다. 야생 대마초가 자주 보인다. 히말라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이 대마초도 여행기에서 빠지지 않는 매뉴 중 하나다. 간혹 히말라야에 온 김에 대마초를 피워보려는 여행자도 있겠지만 트레킹을 망치지 않으려면 삼가는 것이 좋다.

목적지 도반에는  12시 45분에 도착했다. 스태프들은 이미 도착한 상태다. 타시가 이곳 유일의 도미토리 '호텔'에서 자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캠프사이트가 젖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젖은 땅에 텐트를 치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지만 자는 사람도 불편하다.

이층 도미토리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입구는 옥수수 등 곡물 창고이고 그 옆에 침상이 여덟 개 있는 큰 방 하나가 있다. 2층 전체가 천장을 공유하고 있다. 엉성한 창문으로 바람이 몰아쳐 왔다. '나만의 왕국'인 텐트에 비하면 썰렁하지만 비오는 날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 할 일이다.

모두를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어제 빨았던 빨래와 함께 발코니에 널었다. 가지고 온 빨래줄을 총 동원했다. 비가 오고 있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잘 마를 것 같다. 가지고 온 빨래집게 10개가 모자란다. 양말 한 컬레에만 두 개가 필요하니 그렇다. 다음부터는 15개로 상향조정해야겠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여유가 있다. 비는 이제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 비로 라르키아 라에는 1m 이상의 눈이 내려 3일간 길이 막혔다고 한다. 거기까지 간 이상 3일 기다렸다가 길을 뚫고 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보통 라르키아 라 넘기 전 마지막 캠프인 다람살라까지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고소적응일 하루를 포함해 11일이 걸린다(우리는 13일 일정이다). 거기서 라르키라 라를 넘어가면 카트만두까지 5일 걸리지만(뛰어가도 4일 걸린다), 갔던 길로 다시 내려오면 최소한 일주일이 걸린다.

오후 3시 경 프랑스 팀이 도착했다. 그리고 젖은 마당에 텐트를 친다. 이들은 인원이 많고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어서인지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각자 자기 텐트를 친다. 사전에 그런 약속이 있었는지 아무도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라면 그런 식의 트레킹을 기꺼이 감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조용한 산골이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트레커 20명에다 스태프 50명이 한꺼번에 몰렸다. 우리는 롯지에 딸린 도미토리 방과 식당 그리고 화장실까지 이용할 수 있어 편하다. 이들은 따로 식당텐트와 화장실 텐트를 세웠다.

그리고 1시간 30분 후인 4시 30분, 한 서양인 노(?)부부가 도착했다. 이곳이 복잡한 것을 보고 더 가려는 그 부부를 가이드가 만류한다. 앞으로 1시간 더 가야 하는데 너무 늦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도 마당에 텐트를 쳤다. 부부라서 한 동만 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5시 경 또 다른 그룹 6명이 나타났다. 도저히 자리가 없는 것을 안 이들은 그대로 통과했다. 다음 마을인 샤울리 바티에 도착하면 날이 저물 것이다.

마나슬루 지역은 캠프사이트가 많지 않고 있는 곳도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넓지 않아 트레커들이 몰리는 10월과 11월에는 캠프사이트 트래픽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오후 3시 이전에 운행을 마치는 여유 있는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그런 일정을 짠 우리는 한 번도 캠프사이트가 만원이어서 다음 캠프사이트까지 가는 일이 없었다.

여기는 전기가 들어온다. 식당에서 차 마시고 자녁까지 먹은 후 이야기를 나누다가 포터들을 위해 일찍 자리를 떴다. 식당은 우리가 떠나면 포터들의 침실로 사용된다. 식당텐트도 마찬가지다. 옆에서 기다리던 포터들이 반가운 듯 식탁과 의자를 치우로 잠자리를 마련한다.

도미토리의 높은 천장과 휑한 공간이 영 낯설다. 아직 마르지 않은 빨래는 방 안에 줄을 치고 널었더니 더욱 산만한 모양새다. 그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가뿐한 마음으로 침낭에 몸을 깊이 묻고 잠을 청했다.   

Manaslu_trek_map_04.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156.jpg

마차콜라 마을을 벗어나면 나오는 통나무 다리.

 

Manaslu_0157.jpg

다리를 건너 돌아 본 마차콜라 마을. 조랑말들이 따라오고 있다. 노란색 텐트는 프랑스 팀의 식당텐트.

 

Manaslu_0158.jpg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곧 계곡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Manaslu_0162.jpg

다시 작은 지류를 건너다. 통나무 다리 건너기는 보기와는 달리 어렵지 않다.

 

Manaslu_0166.jpg

잠시 계곡 위로 오른다. 돌계단이 비에 젖어 윤기가 흐른다. .
 

Manaslu_0168.jpg

점심 먹을 따또빠니 도착. 사전 정보와는 달리 욕탕에 물이 가득하다. 수온은 그리 높지 않았다.

 

Manaslu_0171.jpg

위 사진 왼쪽에 보이는 벽쪽으로 설치된 온천 꼭지. 오른쪽 물이 제일 뜨겁다.

 

Manaslu_0173.jpg

차를 마시고 쉬는데 아이들이 욕탕 주위에 몰려 있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가 보았다.

 

Manaslu_0174.jpg

어느새 꼬맹이들이 욕탕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엄마나 아이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Manaslu_0178.jpg

도반의 유일한 숙소인 <히말라얀 호텔-롯지>. 캠프사이트가 젖어 있어 우리는 이 숙소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뒤숭숭한 분위기의 도미토리 방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  

Manaslu_0179.jpg

이층 왼쪽은 고방이고 오른쪽이 도미토리. 발코니에 넌 우리팀 빨래가 요란하다. 아래층 왼쪽방은 식당이다.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 중 오른쪽은 우리팀의 밍마 셰르파이고 왼쪽은 미리 도착한 프랑스 팀 가이드다.

Manaslu_0181.jpg

오후 3시경 도착한 프랑스 팀은 진 땅에 그대로 텐트를 쳤다. 
 

Manaslu_0182.jpg

프랑스 팀의 식당텐트와스태프들. 

 

Manaslu_0185.jpg

일찍 도착하여 짐을 풀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팀 사람들은 한결 느긋한 표정이다.

 

Manaslu_0186.jpg

오후  4시 경부터 날이 좋아졌다. 마당에서 본 도반 풍경. 광각인 28.8mm의 렌즈여서 롯지 건물이 왜곡되어 기울어져 보인다.
 

Manaslu_0188.jpg

마을 위로 조금 올라가 내려다 보았다.
 

 

Manaslu_0189.jpg

포터들은 이렇게 한쪽에서 자기들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저 남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어떨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저런 모습을 보면 더 이상 우리가 먹는 음식의 맛이 있니 없니를 따지는 것은 복감(福減)하는 일이다.

Manaslu_0192.jpg

늦게 도착한 한 서양 부부. 가이드가 더 가면 힘들다는 말을 하고 있다. 반팔 차림의 할매가 주도를 하고 영감님은 딴청이다. 서양인으로서는 이례적이다. 보통은 아내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편이 모든 일을 처리한다.

Manaslu_0195.jpg

결국 이 부부도 마당 한쪽에 텐트를 쳤다. 늦게 온 사람들은 바빠죽겠는데 일찍 도착하여 짐을 푼 사람들은 한가하게 웃으며 구경하고 있다.

 

trek 3. 소티콜라 - 라푸베시 - 마차콜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마오이스트 통행세, 개울 목욕

2007. 10. 15(월)

아침 5시에 잠이 깼다. 히말라야에 들어오면 잠이 적어진다. 일찍 잠을 자는 탓도 있지만 책을 보느라 늦게 자도 마찬가지다. 피곤하게 몸을 움직였어도 일찍 누니 떠지고 그래도 잠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 신기하다. 밤에 후레쉬 빛이 텐트밖을 가끔 지나가는 걸 보니 셰르파들이 물건의 분실을 막기 위해 교대로 입초를 선 모양이다.

먼저 화장실부터 다녀 온 후 짐을 싼다. 일단 하루의 운행이 끝나고 짐이 들어오면 갈아 입을 옷가지를 찾느라 다 풀어제쳐 놓는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잘 싸서 가방에 집어 넣는다. 이미 무스탕 트레킹 때 경험한 매일 반복되는 일과지만 며칠 지나면 숙달되어 어렵지 않다. 6시에 모닝티가 배달되고 10분 후 세숫물이 온다. 세수 후 곧 아침식사가 시작되므로 그때까지 침낭을 과 짐을 다 싸서 자물쇠로 채워놓아야 한다. 아침 먹으러 갈 때는 배낭과 스틱, 카메라 가방 등을 다 가지고 나간다.

밖에는 식당텐트가 이미 철거되어 있다. 야외식탁에서 우리가 아침을 먹을 동안 텐트가 철거된다. 포터들은 이미 출발하고 있다. 제일 늦게 출발하는 포터는 우리의 식사가 다 끝나야 짐을 쌀 수 있는 식탁과 의자 담당 포터다. 아침은 간단하다. 뽀리지 대신 누릉지와 가지고 간 라면을 교대로 끓여달라고 했다. 짜파티와 계란 하나가 따라 나온다. 뜨거운 핫초코릿부터 듬뿍 마신다.

6시 30분에 아침을 먹고 7시에 출발했다. 무성한 숲 길을 걷고 고도도 300m 정도 오르는 오늘도 그리 힘든 일정이 아니다. 건너편 절벽에서 폭포가 자주 나타난다. 규모가 엄청나다. 얼마 가지 않아  마오이스트 검문소가 나타났다. 어제 저녁 작대기 하나 들고 어린 녀석 하나가 나타나 타시와 말을 주고 받을 때 이미 짐작했던 일이다.

사유재산제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정을 간파하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기초로 하여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공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의 이상은 19세기 후반 마르크스와 레닌이 주창하여 20세기에는 거의 전 세계를 풍미했다. 인류 역사상 현실적인 면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20세기가 끝나기도 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권력욕과 사리사욕 등이 너무 강렬해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고상한 이념은 또 다른 형태의 계급사회를 형성하여 피지배계급층에게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실패한 사상이지만 공산주의는 봉건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세상의 인민을 깨우는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네팔에 공산주의가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네팔의 사회가 낙후되었다는 말과 같다. 흔히 30년 전 우리와 비교하지만 사회적 구조와 그 구조를 이루는 사상적인 면에서는 우리의 50년대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네팔의 마오이스트들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만일 내가 네팔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그 일원이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그들 내부의 일이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 지배층의 행태는 그들에게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편들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히말라야가 좋아 찾아왔을 뿐이다. 히말라야는 왕족이든 정부군이든 마오이스트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다 받아들인다. 사람과 제도는 잠시 머물다 가지만 수천 만 년 동안 히말라야는 그대로 있다.

마오이스트들이 통행세를 내라고 한다. 명분은 혁명기금이고 그 돈은 나중에 혁명이 완수되면 다 환불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지만, 혁명이 성공할지도 의문이고 설사 성공한다하더라도  그 돈을 다시 돌려준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인당 14일간의 통과비로 1400루삐, 약 23불이다. 트레킹이 허가비로 240불을 네팔정부에 낸 것에 비하면 약소하다. 그나마 지금은 하루 100루삐니 다행이다. 예전에는 1인당 5000루삐를 걷을 때도 있었다.

그 정도는 시비할 것 없이 얼른 주는 것이 좋다. 여기는 그들의 해방구여서 그들이 바로 법이다. 강제징수는 하지 않고 친절하게 싫으면 돌아가라고 한다. 미소를 지으며 그들은 말한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여기서 네팔 정부의 무능함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히말라야를 한 두 번만 들어와 보면 산간오지에서 정부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게 된다. 오직 한줄기 절벽에 난 길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온다한들, 다이너마이트 하나에 길이 끊어져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길은 계속 숲길을 오르내린다. 9시부터 한 시간은 계속 절벽길이다. 그리고 트레킹 초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고산지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항상 절벽길을 가야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도 마찬가지다. 마을은 항상 계곡을 끼고 있으니 그 마을을 지나가는 길 역시 항상 계곡 옆 절벽길로 나 있는 것이다.

작은 지류 계곡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남형씨가 그곳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았다. 마차콜라라는 이름이 그 계곡에서 물고기(마차)가 많이 잡혀서 생긴 이름인 줄은 짐작했지만 우리나라 계곡 웅덩이처럼 이곳도 작은 물고기가 사는 것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이런 지류 계곡은 무성한 나무에서 나오는 물이라 물고기가 있는 것 같다.

작은 바티(bhatti)가 길가에 가끔 나타난다. 바티란 '찻집'이란 뜻이다. 우리로 치면 주막 이다. 현지인 여행자들이 잠시 쉬며 차를 마시는 작은 오두막이다. '에클로바티'란 지명은 안나푸르나의 좀솜 위쪽에도 있지만 이곳 마나슬루에도 있다. 뜻은 '한 채의 찻집'이다. 이런 곳은 반드시 돌로 만든 초우따라가 있어 짐꾼들이 편하게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다.

포터들이 쉬고 있다. 그곳은 또 우리가 쉬어가는 곳이다. 이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된다. 어린 나이에 남의 짐을 들어주며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처지가 안쓰럽고, 적은 보수를 받는 이들 덕분으로 그리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히말라야를 방문할 수 있는 것이 고맙다. 레이놀즈의 말대로 우리는 이들을 단지 짐꾼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정을 가능하게 해 주는 '노동전문가'로 생각해야 한다.

샌들을 신고 운행하니 아무래도 불편하다. 그러나 아직은 견딜 만하다. 남형씨도 출발 때부터 샌들을 신고 있으니 위안이 되었다. 잠시 쉬면서 물병의 목을 축인다. 캠핑트레킹이 아니었다면 밀크티 한 잔 사 먹었을 것이다. 캠핑을 하면 밀크티를 자주 마시게 되니 굳이 사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땀을 흘린 후에는 물이 제일 맛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차를 팔아주지 못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9시 조금 넘어 두 번째 바티를 지나자 이미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절벽길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엄청나고 실제로도 부리 같다키 강과 거의 수직으로 나 있는 멋진(?) 절벽길이다. 나무만 없다면 영화 <히말라야>에 나오는 폭순도 호수 절벽길과 같은 분위기일 것이다. 모두들 열심히 올라간다. 현지인 아줌마들도 짐을 지고 가고 있다. 아래에서 장을 보고 올라가는 모양이다.

오르막이 끝나고 잠시 강물과 평행선을 그리며 난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평행선 길이 나오고 곧 계단식 논이 펼져진 마을이 나타났다. 점심 먹을 라푸베시 마을이다. 시계를 보니 10시 20분이다. 오전 운행은 3시간 30분 내외인 이 정도 운행이 좋다. 가볍게 먹은 아침의 칼로리가 거의 다 소비되어 배가 고플 시간이다.

날은 점점 더 흐려지더니 빗방울까지 뿌린다. 현지인 여행자들도 말도 모두 점심을 먹기 위해 짐을 부려놓았다. 시장을 보고 가는 윗 마을 아줌마들과 처녀들도 처마 밑에서 쉬고 있다. 아이들도 동행하고 갓난쟁이까지 도꼬(대바구니)에 싣고 있다. 거친 히말라야는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어디에서건 같다.

맛잇는 티베트 빵으로 점심을 먹고 12시에 출발했다. 길은 강에서 조금 떨어진 산길이다. 30분쯤 지나자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긴 다리가 나타났다. 100미터는 될 것 같다(당시는 이 기록이 나중에 필림에서 깨질 줄 몰랐다). 한 서양인 커플이 가벼운 차림으로 통과하고 있다. 이 다리는 왼편 절벽에서 떨어지는 큰 폭포가 만든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가 없다면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수고를 해야 했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계곡이 넓어져 툭 터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 별로 힘든 길은 아니지만 온 몸이 땀에 젖었다. 길가에 노점이 하나 나타났다. 굵은 오이와 과자를 팔고 있다. 오이를 두 개 사서 깎아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쉬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 그렇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 때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아무래도 그때만 못하다. '도로묵'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1시간 동안 산허리길을 더 가니 멀리 오늘의 목적지 마차콜라가 보였다. 3시 15분 마차콜라 도착. 제법 큰 마을이다. 룽다가 보이고 붉은 칸나도 보인다. 소박한 산골 마을의 정취가 풍기는 마을이다. 캠프사이트에는 주방팀이 도착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 짐을 진 포터들도 도착했다. 스태프들은 텐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캠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무진행 보살님이 시원한 개울물에서 머리를 감았다고 해서 바지를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개울로 갔다. 기회가 있을 때 목욕을 하고 싶었다. 고지대로 가면 목욕하기가 어렵다. 지류 개울 쪽은 터가 넓어 말들이 짐을 내려놓고 풀을 뜯고 있다. 말들도 오늘 여기서 야영하는 모양이다. 마부도 있고 동네 아이들도 여러 명 보인다.

그동안 젖은 옷을 모두 가지고 와 간단하게 빨고 약간 춥기는 하나 용감하게 개울물에 몸을 �었다.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잘못이었다. 개운하게 씻은 것은 좋았으나 다음날부터 감기가 걸려 이후 열흘 가까이 고생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저녁 식사 전 식당에서 차를 마시는데 대규모 서양팀이 도착했다. 오후 6시가 다 되었는데 지금 도착했으니 오늘 운행이 제법 길었을 것이다. 알고보니 이들은 첫날 우리와 함께 출발한 프랑스 팀이다. 그들은 아루갓바자르 못미처 야영을 하는 바람에 반나절을 까먹었다. 그것을 오늘까지 이틀 동안 보충하려니 늦어진 것이다. 그들은 개울쪽 공터에 캠프를 친다. 일찍 운행을 마치는 우리팀은 항상 동네에서 제일 좋은 곳에 캠프를 차릴 수 있었다.   

Manaslu_trek_map_03.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091.jpg

운행이 시작되자 건너편 절벽으로 폭포가 자주 나타났다.
 

 

Manaslu_0097.jpg

징검다리를 건너 또 바티가 하나 보인다.

 

 

Manaslu_0098.jpg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남형씨가 잡은 마차 한 마리. 잡는 기술이 놀랍기도 하지만 아마 물고기들이 낯가림을 잘  하지 않는 탓이라 생각된다.   

Manaslu_0101.jpg

바티에서는 웬만하면 쉰다. 길 중간에서는 쉬기가 마땅찮다. 제일 왼쪽의 아낙네는 시장보고 올라가는 중인 것을 등에 밴 땀으로 알겠다. 바티의  아낙네들은 여유만만한 표정이다.  

Manaslu_0102.jpg

땀을 흘린 포터들이 쉬기 편하도록 바티에는 항상 초우따라가 만들어져 있다.  

 

Manaslu_0106.jpg


곧  멋진 절벽길이 나타났다.

 

  

Manaslu_0110.jpg

길이 넓어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수직절벽이라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벽에 딱 붙어 가는 게 좋을 것이다.

 

Manaslu_0112.jpg


절벽길을 올라 와 뒤를 돌아본 풍경. 강물이 한참 아래에 있다.
 

 

Manaslu_0116.jpg

다시 또 절벽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Manaslu_0118.jpg

 

10시 경 절벽길이 끝났다. 어쨌든 이 구간은  스릴 있는 멋진 길이다.
 

 

 라푸베시 입구를 알리는 집 몇 채가 나타났다.
 

Manaslu_0124.jpg

 

라푸베시 마을 입구. 보명화 보살님도 오늘 반 바지를 입었다.
 

 

Manaslu_0126.jpg

라푸베시 롯지. 현지인들을 위한 것이라 외국인이 사용하기엔 너무 열악하다. 우리는 오른쪽 야외 식당에서 점심을 기다렸다.

 

Manaslu_0130.jpg

시장보고 올라가는 윗 마을 아낙네들. 아이들도 대동했다.

 

Manaslu_0132.jpg

동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혜명화 보살. 빨간모자 쓴 사나이는 우리의 식탁, 의자 담당 포터 아저씨.
 

Manaslu_0136.jpg

라푸베시에서 한 시간 더 가자  긴 현수교나 나왔다. 멋진 출렁다리다. 한 서양인 커플이 건너고 있다.

 

Manaslu_0138.jpg

이 폭포가 위사진 왼편의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다리는 그 골짜기 위에 놓였다.

 

Manaslu_0137.jpg

무진행 보살님이 다리를 거의 다 건넌 후 왼편의 멋진 큰 폭포를 감상하고 있다. 흔들리는 다리 중간에서는 무서워 볼 엄두를 못냈을 것이다.

 

Manaslu_0141.jpg

다리를건너자 계곡이 넓어졌다. 산허리길로 조랑말들이 오고 있다. 말이 지나갈 때는 벽쪽에 바짝 붙어야 한다.
 

Manaslu_0143.jpg

길가 노점상 주인가족. 이곳에 쉬면서 오이 두 개를 사 고추장에 찍어 먹었는데 그런대로 맛이 괜찮았다.
 

Manaslu_0144.jpg

멀리 산허리길이 끝나는 지점 강변의 햇볕 아래 라푸베시가 보인다.  

 

Manaslu_0147.jpg

소박한 산골의 정취가 있는 라푸베시 마을 입구. 

 

Manaslu_0150.jpg

이미 도착한 주방팀은 차 준비로 바쁘고 호기심 많은 동네 아이들이 구경하러 왔다. 

 

Manaslu_0153.jpg

텐트가 쳐지길 기다리는 우리의 짐들. 

 

Manaslu_0154.jpg

마을 끝 지류 개울에서 시원하게 머리를 감은 두 사람. 이곳에서 화끈하게 목욕을 한 나는 그 후 감기로 고생 좀 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