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 Style]이런 곳도 있었네!… 인천공항의 재발견"



《2004년 개봉된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터미널’.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공항에서 생활하면서 16년간 단 한번도 공항을 벗어나지 않은 노숙자를 모델로 삼아 화제를 모았다.

공항은 여행의 출발점이자 마침표. 원 스톱 서비스가 가능한 만능 생활공간이기도 하다.

허둥지둥 공항에 도착했는데 간단하게 샤워라도 할 수 있다면? 결혼 피로연에서 짓궂은 친구들의 장난으로 엉망이 된 헤어스타일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중요한 출장을 앞두고 명상이나 기도할 공간이 있다면?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대한민국의 관문 인천국제공항에는 싸고 편리한 ‘알짜배기’ 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다.

물론 전제는 비행기 출발에 앞서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갖고 도착해야 한다는 점. 인천공항을 제대로 즐기는 법을 소개한다.



[1]몸이 근질근질하다. 샤워라도 하고 싶다=지하 1층 동편에 24시간 운영하는 사우나가 있다. 하루 200명 이상이 찾는다. 주간 1만 원, 야간에 수면실까지 이용하면 1만5000원. 마사지(4만∼12만 원)를 받거나 이발을 하고 구두에 광을 낼 수도 있다. 출국 직전이라면 4층 환승호텔 편의시설인 마사지 샤워 룸을 쓸 수 있다. 30분에 8000원.

[2]무겁고 구겨진 옷은 싫다=지하 1층 사우나 옆 세탁소. 여행지가 무더운 곳이라면 이용할 만하다. 드라이 크리닝을 곁들여 1개월 이내에 찾아야 한다. 정장은 8000원, 코트는 1만 원.

[3]휠체어나 전동차가 필요하다=3층 출국장 밖에 도착해 푸른색 ‘도우미 폰’을 찾을 것. 10대가 설치돼 있다. 이 전화를 이용해 휠체어를 부르거나 직원의 부축을 받을 수 있다. 티케팅을 하면서 전동차 서비스를 요청할 수 있다. 서비스 이용은 무료.

[4]‘망가진’ 스타일을 바로잡고 싶다=지하 1층 서편 미용실. 피로연을 마치고 공항에 온 신혼부부들이 자주 찾는다. 머리와 손톱, 피부 관리를 해준다. 가격은 3만 원 안팎.

[5]그렇게 챙겼는데도 빼놓은 물건이 있다=지하 1층에 안경점 슈퍼 의류판매점 등 공항 직원들이 주로 이용하는 상점들이 있다. 웬만한 물건은 시중 가격으로 구할 수 있다. 출국 심사를 마친 뒤 면세점을 이용하면 아무래도 가격이 비싸다.

[6]기도나 명상을 하고 싶다=4층 마사지 룸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10평 남짓한 기도실이 있다. 특정 종교색이 없이 긴 의자만 놓여 있고 각종 경전이 비치돼 있다.

[7]우는 아이를 달래야 한다=3층 출국장의 게이트 12번과 29번 옆에 있는 어린이 놀이방. 대형 TV, 비디오, 놀이시설이 마련돼 있다. 수유를 위한 작은 공간도 있다. 출국 심사 전이라면 같은 층의 유아휴게실을 이용한다.

[8]나도 VIP!=항공사 VIP라운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4층 동편 기도실 옆에는 SK텔레콤 VIP라운지와 KTF멤버스 서비스라운지가 있다. 인터넷과 국내 전화를 무료로 쓸 수 있다. 음료수와 간단한 과자도 제공된다. 동반 2인까지 출입할 수 있다.

[9]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하고 싶다=2층 중앙의 현대카드 VIP라운지와 스카이라운지. 현대카드 라운지는 현대 다이너스 카드 회원, 스카이라운지는 LG텔레콤 회원에게 출입 혜택을 준다. 인터넷, 전화, 음료 등 기본 서비스 외에 휴대전화 충전과 로밍, 여행자 보험, 드라이 크리닝 서비스도 대행한다. 다양한 형태로 출입 자격이 주어지므로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다.

[10]첨단 IT 체험과 함께 휴식을=4층 중앙에는 ‘SKT 유비쿼터스 체험관’이 있다. 2층 중앙의 ‘KT 플라자’에서도 인터넷과 관련된 각종 서비스를 무료로 받을 수 있다.

[11]악! 여권 유효기간이 지났다=3층 서편의 ‘인천공항 영사민원서비스 외교통상부 연락실’. 긴급한 사유로 출국할 때 여권 유효기간을 연장해 준다. 여권을 분실했거나 소지하지 않은 사람은 서비스가 불가능하다. 공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하다. 근무시간은 월∼금요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12]사진이 필요하다=연락실 바로 앞에 공항 내 유일한 디지털 사진자판기 2대가 있다. 즉석 증명사진은 1만 원. 인화도 가능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찍은 사진을 출력해 선물로 줄 수 있다.

[13]갑자기 아프다=지하 1층 공항의료센터. 각종 진료와 처방은 물론 여행자 건강상담, 국제적인 예방요법 안내 등 여행과 관련된 업무도 처리한다. 건강검진도 가능하며 지난해엔 ‘시차적응 클리닉’을 개설했다.

[14]급하게 물건을 보내야 한다=3층 서편에 택배 대행회사가 입주해 있다. 물건을 포장하거나 국내외로 물건을 보낼 수 있다.

[15]공항 이용에 불만이 있다=3층 서편에 출국장 민원실이 있다. 출입국하면서 생기는 다양한 불편사항을 처리해 준다.

[16]피켓이 필요하다=잘 모르는 손님을 마중 나왔다면 피켓이나 종이가 필요하다. 1층 입국장 양편의 안내 데스크에서 무료로 빌려준다.

[17]비행기를 보면서 우아하게 식사하고 싶다=웨스틴조선호텔이 운영하는 4층의 파노라마 라운지. 비행기 배경이 가장 좋은 것으로 유명하다.

[18]공항을 배경으로 멋진 기념사진 찰칵!=1층 중앙에 있는 밀레니엄 홀은 나무와 풀, 작은 연못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기념촬영 명소다. 봄에는 여객터미널 옆 ‘교통센터’의 성큰가든이 괜찮다. 톰 행크스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듯 공항 내부의 웅장한 모습을 찍고 싶다면 교통센터의 그레이트 홀이 최상이다.

[19]문화 공연을 보고 싶다=매월 첫째, 셋째 금요일 오후 3시 반부터 4시 반까지 밀레니엄 홀 연못 주변에서 공연이 열린다. 비보이, 남미음악, 사물놀이, 하모니카 연주, 국악, 포크송, 마술쇼 등 다양한 공연이 펼쳐진다.

[20]여 승무원과 눈을 마주치며 식사하고 싶다=지하 1층 중앙엘리베이터 옆 푸드 코트 ‘비타비아’. 비교적 저렴하고 다양한 메뉴로 항공사 직원들이 자주 찾는다. 계산대 옆에 수하물 보관용 공간이 있다.

[21]꼭 들러야 하는 맛집이 있다=4층 면세지역의 레스토랑 ‘마티나’. 공항 직원들의 식당 평가에서 선두를 다툰다. 쉐라톤워커힐호텔에서 운영하는데 푸짐한 양의 김치볶음밥과 게살이 씹히는 왕게살 스파게티가 일품이다.

[22]주책이다. 그래도 떡볶이 김밥 라면이 먹고 싶다=지하 1층의 잡화를 파는 가게 옆에 80여 석 규모의 스낵점이 있다. 삶은 달걀 3개가 1000원, 떡볶이는 2000원, 라면과 김밥은 2500원. 가격은 공항 밖과 별 차이 없다.

[23]공항은 비싸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싸게 사고 싶다=20일까지 4개 면세점이 10∼70% 가격을 깎아주는 세일행사를 열고 있다. 각종 선물을 주는 이벤트 행사도 있다.

[24] 한국의 특색이 있는 선물을 구하고 싶다=3층 면세지역 46번 게이트 옆의 한류테마 매장에 들르자.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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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1/2 화요일

날씨: 약간 흐림

걸은 구간: 백무동~장터목

소요 시간: 5시간

7시30분에 일어나 밥을 먹고 전화하니 벌써 음성까지 왔단다.

차를 타고 오도재를 넘어 가려다 길이 미끄러워 포기하고 내려가는데 석현이네 가 사고를 당 했는데, 그나마 큰 사고 가 아니라 백무동에서 만나 장터목으로 출발했다.

막 걷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에 힘 이 풀려 제일 뒤로 처지고 말았다.

5시간 쯤 걷자 산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장터목산장에 도착하니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녁을 먹고  7시5분쯤에 잠을 청했으나 방이 너무 더워 재대로 잘 수 없었다.

1/3

날씨: 매우 흐림

걸은 구간: 장터목~연하천

소요시간: 8시간

아침 일찍 모두 일출 보러 천왕봉으로 가고 나 혼자 남아 책을 보고 있었다.

1시간쯤 지나자 일행들이 들어오고 밥을 먹었다.

오늘 행군도 역시 강현이가 선두다. 아무래도 강현이는 이번산행을 놀이로 아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길 이 순탄해서 다행이다. 어제에 비하면 오늘은 산책로정도??

열심히 걸어 벽소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힘 이 난다.

연하천에 도착하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날이 저물고 있었고 나는 너무 피곤해 저녁도 굻고 잠을 청했다.

1/4 

날씨: 매우화창

걸은 구간: 연하천 ~ 성삼재

소요시간: 6시간

아침은 된장찌개로 채우고  출발하였는데 시작부터 계단이라니... 꿈이라 믿고 싶었다.

오늘은 강현이 보다 건영이와 석현이가 더 빠르게 앞질러 갔다. 쯧쯧... 강현이 보고는 천천히 가라더니 정작 자신들은 너무나 빠르게 가버린다.

토끼봉을 지나자 600계단이 나왔는데 무슨계단이 끝이안보인다.

그계단을 넘고 삼도봉에 올라보니 반야봉과 노고단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반야봉은 6학년때 가보았는데 내려갈 때 고생한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반야봉을 옆으로 두고 오솔길 같은 등산로를 따라 노고단으로 갔다.

오늘은 왠일인지 굳게 닫혀있던 노고단 탐방로가 열려있었는데 모두들 여름에 오자고 하여 그냥 지나쳐 성삼재로 갔다.

집으로 오며 다음엔 꼭 천왕봉을 가보리라 다짐했다.

산이란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고 앞으로는 더 열심히 산을 오를 것이다.

몸이 아픈데도 포기하지 않고 오른 것이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다.

출처 : 박영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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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을 다녀와서


첫날 2007년 1월 2일 화요일



  너무나도 힘들 것 같은 지리산 2박3일 코스(일명 종주코스)를 등산하기위해 청주에서 지리산국립공원을 향해 2시간30분을 달려왔다. 목적지인 백무동입구에 다 왔는데 걸려온 한통의 전화... 내용은 절망적이었다. 같이 가기로 한 석현형네 가족이 빙판길을 오르다가 바퀴2개가  수로로 빠져 나오질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행이도 1시간이 넘게 지나 레커 차를 불러 빠져 나왔다고한다. 그래서 오전에 출발하기로 했던 게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서 출발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도 못 먹은 채로 등산을 하기 시작하였다. 처음부터 표시판이 보였는데... 표지판은 ‘장터목 대피소5,8km’라고 적혀있었다. 4km도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완전절망이었다.

  이렇게5.8km를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조금만 천천히 올라가렴.”이라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휑~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 아버지, 석현이형, 강현이 우리 네 사람은 쉬었는데 5분쯤 기다리자 건호 형과 어머니가 보였다. 또 형과 어머니가 쉬는 것을 기다린 우리는 다 쉬고 또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올라가다가 아버지가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시는 게 보였는데 샘터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2시간정도 더올라가서 장터목대피소에서 잠을 잤다.



둘째 날 2007년 1월 3일 수요일


  정말 악몽 같은 밤이었다. 그러나 소원한가지는 풀었다. 그 소원은 찜질방에서 자는 거였는데 추울까봐 담요까지 빌려서 쓰고 잠을 잤는데 온도가 30도가 넘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천왕봉을 새벽에 일출을 보려고 힘들게 올라갔는데...  엄청난 안개 때문에 눈앞이 보이지 않아 허무하게 내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연화봉과 촛대봉, 세석, 벽소령을 거쳐서 연하천으로 갔는데... 벽소령에서 연하천으로 가는 길에서 1시간만 걸린다고 하셨지만 실제로는 2시간이 걸려서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었다. 연하천에 도착하여서 참치 찌개를 먹어 원기 충전을 하고 편안하게 잠을 잤다.


마지막 날 2007년 1월 4일


  마지막 날인 오늘은 아주 특별하였다. 일어나서부터 아버지께서 밥 먹자고 하셔서 타이밍이 절묘하였다. 우선 건호형부터 깨웠고 나는 죽을 맛으로 밥을 먹었지만 죽을 맛은 얼마 가지 않아서  살맛으로 변하였다. 오늘은 토끼봉을 거쳐 600계단을 올라 삼도봉을 거쳐 반야봉을 스쳐지나가서 임걸령을 지나 노고단을 지나서 성삼재로 내려가야 했다. 석현이형이랑 얘기를 하며 가다 보니 금방 도착하였다. 성삼재에서 택시를 불러 차가 있는 백무동으로가 저녁 겸 늦은 점심을 먹었고 오후7시에 집에 도착하여 나의 2박3일 지리산 종주코스 등산은 막을 내렸다. 아무리 힘든 산행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사람과 함께 한다면 힘들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산행 끝에 힘든 것을 이겨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출처 : 박영글회
글쓴이 : 예쁜강아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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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재테크)보험료 할증없이 車사고 처리하는 법

- 7년무사고 대물 50만원이하 보험처리해도 할증료 안물어
- 보험처리가 원칙...자비처리 시 손익 계산
- 보험처리 후 보험금 반납 가능..할증 안돼

[이데일리 문승관기자] 큰 교통사고라면 반드시 보험처리를 해야하지만 범퍼가 긁히거나 문이 살짝 찌그러지는 등의 작은 교통사고는 보험처리 여부를 망설이게 한다. 보험처리 이후 보험료가 할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상대방이 있는 교통사고를 자비로 처리하자고 하면 무보험 차량으로 오해받아 상대방에게 터무니없는 합의금을 요구받기도 한다. 단 한 건의 사고라도 보험료 할증으로 인한 영향은 10년까지 갈 수 있어 자칫 수백만원의 보험료를 더 낼 수 있다.

대부분 운전자들은 보험사들가 다 알아서 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보험사는 사고 운전자의 보험료를 할증시키는데 관심이 많지, 할인시키는데는 별 관심이 없다.

교통사고는 크던 작던 이래저래 골칫거리다. 작은 교통사고로 보험처리를 하고도 보험료 할증을 받지 않는 방법을 알아본다.

◇ 보험처리·자비처리 손익 계산 후 유리한 쪽 선택해야

교통사고로 보험처리를 했다면 보험처리가 나을지 아니면 자비처리를 하는 게 더 좋은지 손익계산을 따져봐야한다. 내년 1월1일부터 7년이상 장기 무사고 운전자들은 대물 50만원 이하의 `1점사고`는 보험료가 할증되지 않는다.

7년이상 무사고 운전자들은 대물 50만원 이하의 경미한 사고에 대해서는 보험처리를 하는 게 유리하다. 나머지 운전자들의 경우, 보험처리를 원칙으로 하되, 자비처리가 가능한 지를 따져야한다.

자비처리가 유리하다고 판단되면 보험사가 지급한 보험금을 보험사에 되돌려주면 사고가 없었던 것처럼 보험료가 할증되지 않는다.

작은 교통사사고가 나면 보험사에게 치료비와 수리비의 지불보증, 비용의 적정성 심사, 상대방과의 합의 등을 대신하도록 시키고 나중에 보험금을 보험사에 돌려줘 보험료 할증을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밖에 보험금을 받았던 담보 종목 일부에 대해서만 보험금을 되돌려주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대인사고와 자기신체사고 중에서 대인사고는 보험 처리하고 자기신체사고의 보상금은 보험사에 되돌려 줄 수있다.

그러나 염두에 둬야할 점은 보험사에 보험금을 돌려주고 사고 할증률을 없앨 수 있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기간도 각 보험사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해당 보험설계사나 보험사에 연락해 반드시 확인해야한다.

◇ 추가손해 발생하면 보험처리 다시 해야

자비처리가 유리해서 보험사에게 보험금을 돌려줬는데 추가손해가 발생했다면 자비처리 한 부분을 다시 보험처리할 수 있다.

다만 보험처리를 다시 하기 때문에 사고 할증율은 붙을 수 밖에 없다. 사고 발생시 현금으로 사고처리를 했어도 다시 보험처리를 할 수 있다.

그래도 사고 할증이 붙어도 추가손해로 인한 막대한 비용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 더 주목해야한다. 교통사고의 진행 경과를 보면서 보험처리냐 자비처리냐를 잘 선택하는 것도 추가적인 비용손실을 줄이는 현명한 방법이다.

작은 교통사고라도 보험처리가 원칙이다. 병원 치료비나 차량 수리비가 몇 십만원에 불과한 교통사고라도 일단 보험 처리를 원칙으로 생각해야한다. 그러면 보험사가 병원과 정비공장에게 지불보증을 하기 때문에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또 상대 운전자나 피해자가 추가 보상 및 별도 합의금을 요구해도 보험사가 나서기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없다. 보험사는 병원이나 정비공장이 치료약품이나 정비부품 사용을 속이지 않았는지 조사하기 때문에 운전자는 과도한 비용을 청구받을 염려가 없다.

다만 피해자가 아주 적은 금액으로 합의를 요구하는 경우 현금으로 주고 합의서를 받을 수도 있다. 나중에 피해자가 추가보상을 요구하면 그때가서 보험처리를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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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중원 배드민턴 클럽
글쓴이 : 조약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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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여행기 5회 >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 산행기 2006/06/13 11:47
http://blog.naver.com/hanik1008/60025234275

▲ 해발고도 5357m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와 로체, 마칼루
ⓒ2004 김남희
트레킹 열 세 번째 날

날씨 : 화창
걸은 구간 : 고쿄(Gokyo 4750m)-고쿄리(Gokyo Ri 5357m)-고쿄
소요 시간 : 3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떡진 머리, 일주일째 신는 양말.

날은 화창하다. 창 밖으로 햇살을 받고 깨어나는 산과 호수가 건너다 보인다. 고쿄 리(Gokyo Ri 5357m)에 올라가기 위해 작은 배낭을 꾸린다. 언니는 오후에 올라가겠다며 침낭 속에 누워 있고, 나는 미숫가루 한 잔을 뜨거운 우유에 타 마시고 기얀드라를 기다리는 중이다. 7시 30분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이 녀석은 밥 먹고 가겠다며 나더러 기다리란다. 기분이 좀 상하긴 하지만 나도 8시에 나왔으니 할 말이 없어 참을 수밖에….

8시 35분 출발. 어, 이거 만만하게 봤는데 길이 장난이 아니다. '이보다 더 높은 칼라파타르를 올랐으니 이 정도야'하고 생각했는데 보통 힘이 드는 게 아니다. 숙소에서 빤히 보이는 흙산을 오르는 동안 기침이 터져 가슴을 움켜쥐고 서너 걸음마다 한 번씩 쉬면서 오른다.

가도가도 끝없는 길. 눈 앞에 보이는 봉우리인가 싶어 물으면 그 때마다 기얀드라는 "그 뒤"라고 대답한다. 바로 저 봉우리인가 싶으면 다시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고 이번에야말로 다 왔나 싶으면 뒤로 또 다른 봉우리가 보이고…칼라파타르보다 훨씬 더 힘들게 오른다.

10시 30분. 거센 숨을 몰아쉬며 두 시간 만에 고쿄리 정상 도착. 정상에서는 8000m를 넘는 산들인 초유와 에베레스트, 로체와 마칼루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고개 위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거침이 없다.

인디언들의 글이 생각난다.

사냥을 나간 인디언은 너무도 아름답고 장엄한 대자연 앞에서 말을 잃을 때가 있었다. 바위산 위에는 검은 먹구름과 함께 무지개가 드리워지고, 푸르른 계곡 심장부에서 하얀 폭포가 쏟아져 내렸다. 드넓은 평원에서는 석양빛이 하루의 작별을 고했다. 그런 것들과 마주치는 순간, 우리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예배하는 자세를 갖추곤 했다. 그러기에 인디언은 굳이 일주일 중 하루를 신성한 날로 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날이 곧 신이 준 날이기에!

지금 이 산에서 머무는 내게도 하루하루가 신이 준 신성한 날이다. 이 세상에 살아있음이, 살아서 내 튼튼한 두 다리로 이곳까지 올라올 수 있음이, 나 홀로 신들의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허락한 그 누군가를 향한 감사의 마음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 고쿄 리에서 바라보는 고쿄 마을과 촐라체와 따우체
ⓒ2004 김남희
30분 남짓 머물다가 하산을 시작한다. 내려오는 길이 워낙 가팔라 발목과 종아리에 부담이 올 정도다. 하산은 50분 만에 완료. 숙소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수영 언니가 식당으로 건너온다. 여태 침낭 속에 누워 있었단다. 어제 저녁 8시 반부터 오늘 오후 12시까지! 정말 대단한 허리의 소유자다.

점심으로 커리를 시켜 먹는다. 요리사가 돌레로 나들이 간 탓에 맛이 어제와 다르다. 밥 먹고 햇볕 따뜻한 창가에 누워서 삼십 분쯤 잤다. 이 집처럼 따뜻한 집은 처음이다. 건물 전체가 이중창에 햇볕이 잘 들도록 위치를 잡아 밤에도 입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다. 한숨 달게 자고 일어나 시간을 보니 3시 40분. 짧은 겨울햇살이 부드러워지는 시간이다.

다시 고쿄리로 출발한다.

"You go. I sightseeing (너희들끼리 가. 난 관광하면서 여기서 놀래)"하며 안 간다는 기얀드라를 설득해 올라간다. 선글라스를 꼈지만 걷기가 힘들 정도로 산 뒤로 넘어가는 빛이 강렬하다. 반면에 해가 없는 곳에서는 추위로 온 몸이 얼어붙는다. 지난 번 칼라파타르에 올라갈 땐 눈사태 나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오늘은 빙하 무너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밑에서 올라오던 언니는 3분의 1쯤 와서 추워서 못 가겠다며 내려간다. 그걸 본 기얀드라.

"언니, go down? why? (언니 왜 내려가는데?)"
"아마 피곤한 가봐."
"Tired? No! She sleep morning, we two climb! We tired. she no tired.( 피곤하다고? 말도 안 돼. 오늘 오전 내내 잠만 잤잖아. 오늘 두 번째 여길 오르는 우리가 피곤해야지, 왜 언니가 피곤해?)"

영어도 잘 하지.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쉽게 다 표현하다니….

▲ 야크 등에 트레킹 장비를 싣고 전진 중인 트레커들과 포터들
ⓒ2004 김남희
언니가 내려가니 흥도 안 나고, 게다가 해마저 산을 넘어가 몹시 춥다. 결국 에베레스트가 보이는 바위산 중턱까지 올라가서 하산을 결심한다. 정상까지 20분만 더 가면 되는데 그냥 거기서 사진 몇 장 찍고 내려오고 만다.

"야, 내가 무슨 사진가도 아닌 주제에 남들은 한 번 오르기도 어렵다는 곳을 두 번이나 오른담. 내려가자, 내려가."

석양을 받은 산이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기얀드라는 "디디(누나), 포토?" 어김없이 묻는다. 그러나 춥고, 지치고 배고픈 나는 사진이고 뭐고 관심 없다. "No photo(사진 안 찍어)!" 외치고는 하산이다. 그저 빨리 따뜻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멀리 숙소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그립고 반갑다.

내려가는 길에 이 녀석이 길은 완전히 무시하고 그 가파른 언덕을 그냥 치고 내려간다. 따라가자니 나는 죽을 맛이다. 그나마 지팡이라도 있어서 그걸로 버팀목을 삼아 무릎에 힘을 팍팍 주며 미끄러지지 않으려 기를 쓰며 내려올 뿐.

숙소로 돌아와 "오늘 두 번 오르느라 고생했다"며 저녁 먹으라고 팁을 주니 너무 좋아한다. 계란 라면으로 저녁을 먹고, 난롯가에서 몸을 녹인다. 잠자리에서 삼겹살 먹고 싶다고 얘기했다가 언니에게 혼났다. "그만하고 자!"라고.

트레킹 열 네 번째 날

날씨 : 눈부시게 맑은 하루.
걸은 구간 : 고쿄(Gokyo)-팡가(Fangka)-마첼모(Machhermo)-루자(Luza)-돌레(Dole)
소요 시간 : 다섯 시간 반
복장 및 위생 상태 : 지저분함의 극치를 달리고 있음

7시 기상. 날은 오늘도 쾌청하다. 아침 먹고 8시 50분 출발. 얼어붙은 호수를 지나 오리들이 헤엄치는 호수를 오른쪽으로 끼고 걷는다. 1시간 남짓 평지를 걷고 나니 돌계단이 나온다. 이곳으로 올라올 때 꽁꽁 얼어있던 길은 그새 녹아 물이 흐르고 있다. 바위틈에서 나오는 차가운 물을 손에 받아 마셔본다.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차지만 뒷맛이 텁텁해 썩 맛있는 물은 아니다. 이제는 왼쪽으로 빙하 녹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이어진다. 귓전을 가득 채우는 물소리를 들으며 걷는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소리.

▲ 멍라 마을. 왼쪽 뒤로는 아마 다블람이 보인다.
ⓒ2004 김남희
10시 20분 팡가(Pangka 4485m) 도착.
삼십 분 만에 마첼모(Machhermo 4450m) 도착.
남갈 로지(Namgal Lodge)에서 핫 초콜릿을 마시며 잠시 쉰다. 이곳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깨끗한 숙소다. 고쿄에서 우리가 머물던 고쿄 리조트가 따뜻함의 극치였다면 여긴 깨끗함의 극치. 방은 햇볕이 잘 들지 않지만 이 트레일 중 유일하게 제대로 된 침대를 갖추고 있다. 나무로 대충 짜맞춘 침상이 아니라 정말 침대다! 부엌과 식당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결국 차 한 잔 마시러 왔다가 우리는 이른 점심을 먹고 간다.

눈 쌓인 설산을 바라보며 언니와 나눈 대화.

"저 하얀 생크림 좀 봐. 먹고 싶다."
"난 크림이 살짝 덮인 고구마 케잌. 피칸 파이도 먹고 싶다."
"…그만 하자."
우리는 점점 말초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12시 45분 출발. 1시 10분 루자(Luza 4360m).
루자로 오는 길에 고쿄 리조트의 요리사를 만났다. 등에는 나무 짐을 가득 지고 있다. 돌레에서 나무를 사서 올라가는 길이란다. 루자에서 내려오는 길은 산의 허리를 둘러 벼랑 사이로 난 길. 눈이 녹아 질척거린다.

2시. 라팔마(Lhabarma 4417m).
2시 30분. 돌레(Dole 4080m) 도착.
예티 인에 들러 써니와 캔에게 인사. 써니는 아빠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서는 길이다.

햇살을 등지고 산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눈부시다. 돌레를 벗어나자마자 나무들이 보인다. 고도가 낮아져 식물생장한계선을 벗어났음을 실감한다. 이 길로 올 때는 온 나무들이 눈꽃을 화려하게 피우고 있었는데, 지금 눈꽃은 흔적도 없이 녹고 길만 미끄럽다. 누군가 위험한 구간마다 얼음을 깨고 흙을 뿌려 놓았다. 그 마음이 몹시 고맙다.

4시 15분. 포르체 드렝카(Phortse Drengka 3680m) 도착.
이곳에 집이라고는 한 눈에 보기에도 작고 초라한 두 집뿐이다. 이곳에서 쿰중까지는 두 시간을 더 가야 한단다. 다음 마을인 멍라까지도 언덕을 한 시간 넘게 올라가야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머물 곳을 찾아야 하기에 결국 이곳에 머물기로 하고 짐을 푼다.

숙소라고 들어와 보니 부엌과 나무 침상 여러 개가 놓인 작은 방 하나가 전부인 두 칸 짜리 집이다. 지금껏 자 본 곳 중 가장 열악한 시설이다. 식구들은 모두 포르체에 살고 19살 된 주인 여자가 13살 된 여동생을 데리고 이곳에 머물고 있다. 오늘 쿰중에서 우아하게 씻으려 했는데 망했다. 그저께 저녁 때 고쿄에서 뜨거운 물에 씻은 후 내내 물티슈로 닦고 있다. 머리 안 감은 지는 내일 모레면 꼭 2주다. 온 몸에는 하얀 밀가루 같은 살비듬이 가득하고….

▲ 눈덮인 바위산과 길
ⓒ2004 김남희
우리는 화덕 옆에 불을 쪼이며 앉아(이 집에는 식당이 따로 없다) 먹고 싶은 음식들을 말해 본다.

나 - 계란찜. 오뎅을 듬뿍 넣은 떡볶이. 보쌈.
언니 - 깻잎향이 물씬 나는 순대 볶음. 날아가지 않는 하얀 쌀밥 위에 얹어 먹는 겉절이 김치.
나 - 엄마가 해준 꽃게찜. 엄마가 비오는 날이면 만들어주는 오징어 넣은 호박전.
언니 - 엄마의 코다리조림.
나 - 자장면과 미역국과 갈치구이.
언니 - 엄마가 해주는 잡채랑 멸치볶음.
나 - 오징어채 볶음이랑 잘 익은 총각김치. 그리고 고등어 신김치 조림과 돌솥 비빔밥.
언니 - 매운 오징어볶음.
나 - 부산 오뎅과 제육볶음.
언니 - 이제 그만 할래. 미칠 것 같아.

마지막 남은 물티슈로 얼굴과 발을 닦고, 잠자리에 든다. 생각보다 춥지는 않다.

▲ ‘동네 꼬마 녀석들. 추운 줄도 모르고...’ 볼과 손등이 발갛게 얼도록 물장난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 남체
ⓒ2004 김남희
<네팔 여행기 4>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 산행기 2006/06/13 11:45
http://blog.naver.com/hanik1008/60025234219
▲ 눈에 덮인 팡보체 마을
ⓒ2004 김남희
트레킹 열흘째 날
날씨 : ‘하늘엔 흰 눈이 내리고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 (벗님들-‘사랑의 슬픔’ 중에서)
걸은 구간 : 팡보체(Pangboche 4252m)-포르체(Phortse 3800m)-돌레(Dole 4080m)
소요 시간 : 다섯 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상체-비교적 양호 / 하체-몹시 불량


지난 밤 꿈에 헤어진 친구를 만났다. 꿈속에서도 나는 어딘가로 떠나고 있었는데 항구인지 기차역인지로 그는 나를 마중 나왔다. 하지만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체념 어린 담담한 눈으로 멀리서 나를 바라보기만 하다가 내가 떠날 때 옷이 든 봉투 하나를 건네고 돌아서 갔다.
그 눈빛이 너무 슬퍼 아침에 잠을 깨고도 한참 마음에 남았다. 꿈속에서 아픔을 참느라 이를 얼마나 악물었는지 양쪽 어금니가 얼얼하다.

모파상이 그랬지.
‘키스는 번개처럼 엄습하고 사랑은 마치 소나기처럼 지나간다. 그리고 인생은 또다시 하늘처럼 잠잠해지나니. 그러다 예전처럼 되풀이되고. 우리는 구름을 기억이나 할까?‘
나는 어서 소나기가 지나가고 구름이 걷힌 잠잠한 하늘이 되고 싶다.

어제 저녁 때 약간의 뜨거운 물을 얻어 세수를 했다.
우리가 세수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타쉬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세수를 하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우린 날씨도 너무 춥고 게으르기도 해서 일 주일에 한 번씩도 세수를 안 하는데…”라며 웃는다. 수영언니가 “그 말 듣고 나니 너무 미안하더라”하기에 “우리 그럼 내일 아침은 젖은 휴지로 그냥 닦고 말까?”했다.

그래서 오늘은 젖은 휴지로 닦기만 한다. 벌써 며칠 째 머리를 못 감고 있는지 모르겠다. 양말은 일주일째 같은 걸 신고 있고…. 그런데 점점 이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아진다.

▲ 팡보체에서 포르체 가는 길. 산 중앙으로 희미하게 길이 보인다.
ⓒ2004 김남희
부엌 화덕 옆에 쪼그리고 앉아 미숫가루와 오믈렛으로 아침 식사. 가급적 트레킹 중에 부엌 근처는 기웃거리지 않는 게 좋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화덕이 있는 부엌을 찾게 된다.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면 밥 먹기가 몹시 힘들어진다. 우선은 야채를 씻어서 조리하는 모습을 한번도 못 봤다. 감자, 양파, 양배추 종류에 관계없이 전부 껍질만 벗기고 그대로 쓴다. 행주로 쓰고 있는 걸레를 본다거나, 세제를 푼 대야에 한번 담갔다 빼는 게 전부인 설거지, 야채와 고기 및 모든 재료를 닦지도 않은 칼 하나로 요리하는 광경 등등 이런 걸 보고 나면 화기애애한 식사 분위기 조성이 어려워진다.

또 음식의 유통기한이나 신선함, 위생을 따져서도 안 된다. 우리가 먹었던 수프도 유통기한이 6개월 넘게 지났었고, 통조림 과일 역시 캔 껍질이 다 벗겨지고 찌그러들어 도저히 생산년도를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명랑한 식사 문화 건설을 위해 비위가 약한 분들은 절대 부엌에 들어가지 말 것!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 하나는 조리과정을 이토록 간략히 함으로써 조리시간의 엄청난 단축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주문 후 음식이 나오기까지의 평균 대기시간이 한 시간이라는 사실.)

지난 밤 내내 눈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다. 이 집 마당에서는 깡대와 탐셀꾸가 바로 앞산처럼 가까이 보인다. 탄성이 절로 터지는 ‘초특급 수퍼 울트라’ 전망이다. 나지막이 엎드린 돌담과 돌집들은 아직 잠들어 있고, 양철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소리만이 마을의 적막을 깨뜨리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전나무 숲에도 하얗게 눈이 내려앉아 제법 무거워 보인다. 숲이 바람을 막아줘서인지 이 마을은 고도에 비해 유난히 따뜻하다. 처음 이곳에 들어설 때 저 나무들을 보는 것만으로 얼마나 마음이 흐뭇하던지….

짐 들고 나와서 마을의 절을 둘러본다. 문이 잠겨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기얀드라가 사람을 불러와 열어준다. 부처님께 절하고, 시주하고 나온다. 티벳식으로 채색한 창문들이 오늘따라 흰 눈빛 속에서 더욱 곱다.

▲ 눈 덮인 고개를 넘고 있는 트레커.
ⓒ2004 김남희
10시 15분. 출발.
절벽으로 난 길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지는 길. 한 사람이 겨우 걸어갈 정도로 좁은 길이 산등성이에 위태롭게 걸려있다. 지난 밤 내린 눈이 꽃으로 피어 눈 가는 곳마다 환하다. 한 시간 쯤 절벽 길을 걷고 있자니 산밑에서 구름이 몰려와 길과 길 위의 모든 흔적을 지워버린다. 좁은 벼랑길에는 아무도 없다. 눈꽃 핀 나무와 풀을 뜯고 있는 산양(자랄)떼들만이 가끔 고개를 들어 흘깃 우리를 바라볼 뿐이다.

12시 55분. 포르체(Porche) 도착.
눈에 덮인 마을은 제법 크다.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며 마을의 윤곽이 조금씩 드러난다. 마치 마법이 풀리듯 안개의 손길을 헤치며 깨어나는 마을들. 문을 연 식당으로 가 점심을 주문한다.

2시 15분. 포르체 출발.
점심 먹는 사이 내리기 시작한 눈이 계속 내리고 있다. 길은 점점 눈에 덮여 가고, 바로 앞 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방은 허리를 눌러오고, 발은 무거운데, 길까지 미끄러워 온 신경을 집중해 걸어야 한다. 언니와 기얀드라, 나까지 모두 스틱을 꺼내 쓰고 있다. 가쁜 숨소리와 스틱 찍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포르체에서 계곡까지 내려와 다리를 건너 다시 산을 오른다. 이 오르막 고갯길이 도무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지기 전에, 길이 눈에 덮여 사라지기 전에 돌레에 도착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마음을 짓누른다.

4시 45분. 마침내 돌레(Dole) 도착.
대부분의 집들은 문이 잠겨 있고, 마을에는 사람의 흔적이 없다. 멀리 굴뚝에서 연기가 솟아오르는 유일한 집을 찾아간다. 마을을 내려가 냇가를 건너 위치한 예티 인(Yeti Inn).

▲ 풀을 뜯고 있는 야생 산양떼.
ⓒ2004 김남희
난로가 지펴진 식당으로 가니 중년의 독일인들이 모여 있다. 인사를 나누고, 서로 거쳐온 길을 이야기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도 잠시. 갑자기 독일인 아줌마가 경직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묻는다.
“너희 포터, 저 운동화 신고 칼라파타르에 갔다 왔니?”

그랬다는 내 대답에 고개를 흔들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너흰 당장 남체로 내려가 포터에게 새 신발부터 사줘야 해. 저런 신발로 등산하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 너희 트레킹 시작할 때 포터 장비도 확인 안 했니?”

이건 마치 범인 취조하는 경관의 말투다. 기분이 나빠지지만 그래도 성의 있게 대답을 해준다.

“루클라에서 우리 가이드가 포터를 고용할 때 장비를 충분히 갖췄느냐는 질문을 했었고, 우리가 일행(정 선배님)과 헤어질 때도 다시 한 번 장비가 충분한지 물었어. 그때마다 가이드 대답은 ‘걱정마. 다 준비했으니 문제없어’여서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어. 나중에 우리 포터가 제대로 된 등산화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한참이 지난 후였고.”
전혀 납득을 하지 않는 눈치다.

잠시 후 카메라 건전지가 없어서 큰일이라는 내 중얼거림을 들은 독일인 아줌마가 다시 끼어든다.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큰일은 크게 아니야. 지금 큰일은 너희 포터 신발 문제야” 라고 한다. 두 번째 지적에 기분이 상해 “그건 네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라고 하니 “아니, 이건 우리 모두의 문제야”라며 맞받는다.

기분이 점점 나빠져 나도 말투가 공격적으로 변해간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데? 우린 지금 충분한 시간도 없고….” 말을 가로채며 아줌마가 말한다.
“남체로 내려가야지. 지금이라도 남체로 내려가서 신발부터 사주고 다시 올라와. 안 그러면 동상에 걸려 발가락을 절단하는 사태가 생길 지도 몰라. 트레킹 시작하기 전에 철저히 확인했어야지. 너, 루클라에 Porters' Clothing Bank 있는 거 몰랐니? 거기 가면 무료로 포터들 옷하고 신발 다 빌려줘. 그것도 몰랐단 말이야? 이건 모두 너희 책임이야. 내일 바로 남체로 내려가서 신발을 구입해야 해”라고 못을 박는다.

전후사정을 다시 설명하며 우린 네팔이 처음이어서 잘 몰랐다고 말을 한다. 네팔 가이드들은 다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 잘못이 아니라고 편을 들어주는데 이 부부는 완강하다.

▲ 포르체 마을의 돌담과 돌집들.
ⓒ2004 김남희
망신은 계속된다. 독일팀 가이드가 “너희 포터, 하루에 얼마로 생활하는지 알아?” 묻는다. “우린 가이드한테 포터 비용으로 하루 8불씩 지불했고, 그중 6불(420루피)이 포터에게 가는 걸로 알고 있어”라고 하니 “아니야. 너희 포터 15일간 계약에 2550루피 받았대. 하루에 170루피씩. 그래서 생활비 아끼려고 하루 100~150루피만 쓰면서 다닌대.”

“뭐라구?” 언니와 나는 둘 다 경악을 금치 못한다.

람, 그 자식이 우리를 가지고 놀았다. 이제서야 그동안의 미심쩍던 일들이 다 이해가 간다. 처음에 팍딩에서 포터 한 명이 갑자기 바뀌었던 일(일당을 알고 나서 못하겠다고 그만둔 거였다)도 이해가 가고, 정 선배님과 헤어질 때 포터 한 명을 더 고용하겠다는 우리 제안을 회사에서 알면 곤란하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한 이유도 이제서야 뚜렷해진다. 새로 고용한 포터를 통해 가격이 들통나면 안 되니까. 그 나쁜 놈이 기얀드라에게 겨우 2500루피를 주면서 그랬단다. 우리한테 팁을 받으라고. 요 며칠 기얀드라가 힘겨워하고 자주 쉬던 것도 이제야 원인이 드러났다. 그 적은 돈으로 생활하려니 식사를 부실하게 하거나 건너뛰고, 그러다보니 점점 기운을 잃고 비실거린 거였다.

열 받아 쓰러질 것 같다. 우리를 속인 람은 정말 때려죽이고 싶도록 밉고, 그 돈을 받고 일한 기얀드라에게도 화가 나고, 좀 더 철저히 확인하지 못하고 가이드에게 놀아난 나 자신에게도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게다가 비용을 미리 완불하는 바람에 일을 더 어렵게 만든 정 선배님께도 화가 나고….

▲ 안개와 구름이 만들어내는 진경산수화 한 폭. 돌레.
ⓒ2004 김남희
난롯가에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의 화제는 어느새 포터나 가이드들의 횡포와 사고에 관한 이야기로 바뀐다. 이런 일이 아주 비일비재하단다. 손님 짐을 팽개치고 도망 간 포터, 배낭을 들고 사라진 포터, 선불로 준 돈으로 술 먹고 안 돌아온 포터들, 심지어 고객을 버려두고 도망간 가이드 이야기…. 오랫동안 포터와 가이드로 일했던 이 집 주인 캔의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카트만두에 돌아가 어떻게 복수혈전을 벌일지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하다. 졸지에 포터 안전은 신경도 안 쓰는 무식하고 이기적인 한국인으로 찍힌 오늘,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트레킹 열 한번 째 날
날씨 : 흐리고 눈발 날림.
걸은 구간 : 숙소 앞마당(돌레에서 휴식)
복장 및 위생 상태 : 상당히 불량


7시 기상.
바깥 세상은 온통 하얗다. 아침에 식당으로 가는데 독일 아줌마가 또 앞을 가로막는다.

“나 너한테 충고 좀 해야겠어. 너 오늘 당장 포터 데리고 남체로 내려가. 그게 책임 있는 행동이야. 넌 책임 있는 행동을 할 줄 알아야 해.”

이 아줌마는 어디서 '주먹 안 쓰고 말만으로 열 받게 하는 법' 이라는 강의라도 들은 것 같다. 나도 아줌마 말을 가르며 “충고 고마워"라고 하고 부엌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말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 상대에게 들리기도 하고, 안 들리기도 한다는 걸 이 아줌마는 모르는 걸까. 정말 ‘대화의 기술’ 이라는 책이라도 사주고 싶다.

▲ 탐셀꾸가 저무는 저녁 햇살을 받고 있다. 돌레.
ⓒ2004 김남희
이제는 나도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칼라파타르는 운이 좋아 운동화로 올랐지만, 지금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안 좋은데 정말 저 운동화로 될까 슬슬 불안해진다. 결국 이곳 주인아저씨께 자문을 구한다.

“솔직히 말하면 내 생각에는 남체로 내려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지금은 눈이 많이 와서 상황이 어떨지 모르니까. 이건 네 책임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까 네가 절반 내고, 포터에게 절반 내라고 해서 신발을 하나 새로 사 신고 오르는 게 낫지 않을까?”
“아저씨가 그렇게 말한다면 내려가야겠지요. 그렇게 해야겠네요.”

이 얘기를 듣고 있던 독일팀 가이드가 “나한테 여벌의 신발이 하나 있는데 그 신발을 너희 포터에게 줄 게”라며 나선다. 너무 뜻밖이고 고맙다. “신발값은 얼마를 주면 될까?” 물으니 신발값은 필요 없다며 기어코 사양한다.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좋아하며 방으로 와 짐을 꾸리는데,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또 독일 아줌마다.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가이드가 너희 포터한테 자기 신발을 준 거 알아? 우린 남체로 내려가면 바로 우리 가이드에게 새 신발을 사줄 거야. 너희도 좀 배워야 하지 않겠어?”
“이봐요, 아줌마. 그렇지 않아도 우리 역시 남체로 내려갈까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자기 할 말만 계속한다.
“너희 때문에 우린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해 정말 나쁜 인상을 갖게 됐어. 너희는 정말 서양화되고, 자본주의화 된 물질적인 애들이야. 책임 있는 행동은 전혀 할 줄도 모르고…. 넌 포터를 짐승처럼 생각하나 본데 포터는 짐승이 아니야. 동물로 취급해서는 안 돼.”

아니, 이 아줌마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뭐, 포터를 동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열 받아 정신이 없고 할 말을 잃은 나, 여기서부터 막 나가기 시작한다.

“나도 너희처럼 무례하고 잘난 척하는 독일인은 생전 처음 봤어.”
내 목소리는 떨려오고 눈물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이 때, 갑자기 끼어드는 아줌마의 남편.
“여기서 국적이 무슨 상관이야? 그 얘기는 하지 마.”
“이봐. 당신 와이프가 먼저 한국사람 운운했잖아. 당신들은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어. 독일인들이 늘 그렇게 매사에 경우 바르고, 남을 생각하고, 올바른 일만 한다면 도대체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 때는 뭘 하고 있었는데?”
(주제와는 상관도 없는 남의 지나간 약점을 끄집어 내 공격하다니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한가. 하지만 나의 분노는 이미 이성적 사고가 불가능하고 통제가능 영역을 벗어났기에 어쩔 수 없다.)

“과거 이야기는 하지 말아. 그건 아무 상관없는 거잖아? 너 어제 나한테 귄터 그라스를 좋아한다고 했지? 너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지 생각해봐. 귄터 그라스가 어떤 사람인지도.”

이렇게 말하더니 휙 돌아서 나간다. 어쩌면 이럴 땐 영어도 더 안 되는지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데, 언니가 “우리, 기얀드라 남체로 내려보내자”그런다. 나는 바로 식당으로 뛰어내려가 기얀드라에게 소리 지른다. “너, 당장 신발 벗어. 돌려주고 남체 가서 신발 사와.”

옆에 있던 독인 아줌마가 또 나서서 우리가 어떤 류의 인간들인지 다시 한번 설명해준다. 무책임하고, 잘못을 인정할 줄도 모르고, 남의 말을 들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며. 나도 소리 지른다.

“그만해. 당신이랑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만 하라니까.”
아줌마는 굴하지 않고 계속 말한다.
“입 닥쳐!”

마침내는 “Shut Up!"이라는 극단적인 표현까지 나오고 만다. 영문을 모르는 기얀드라는 어쩔 줄 모른 채 서 있고, 독일인 부부는 한국인들을 싸잡아 욕하며 숙소를 떠난다.

▲ 토담집과 집을 둘러싼 낮은 돌담이 정겹다.
ⓒ2004 김남희
너무도 억울하고 화가 난 나는 드디어 참았던 울음이 터진다. 내 인생에 이렇게 모욕적이었던 적이 또 있었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수영언니 품에 기대어 소리 내어 엉엉 울고 만다. 주인아줌마가 “신경 쓰지 마. 잊어버려. 네 잘못도 아닌데…”라며 뜨거운 차를 내온다. 차를 마시며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언니가 말한다.
“남희야. 저런 애들이랑 싸울 때 흥분하면 네가 지는 거야. 침착하게 평온한 목소리로 따져야지.”

누가 그걸 모르는가. 알면서도 못 하는 이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할 말은 입 안에서 맴을 돌고, 눈물부터 솟구쳐 눈앞은 흐려지고, 목소리는 떨려오고….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이런 면에서는 어린 날 이후 조금의 진보도 없으니 어쩌겠는가. 아무리 애를 써도 ‘포커 페이스’가 되지 못하는 이의 비애를 언니가 어찌 알리.

기얀드라는 고쿄로 올라가자고 하는데, 언니와 나는 오늘 하루 쉬고 이제 그만 산을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이 기분으로 올라간다면 결코 즐거운 산행을 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얀드라가 얻은 신발이 좀 작은 것 같아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가기보다는 빨리 내려가서 ‘람’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한 거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모두에게 화가 난다. 포터의 장비를 철저히 점검하지 못하고 가이드와 포터의 말만 믿은 나에게도 화가 나고, 그런 터무니없는 돈을 받고, 기본 장비조차 없이 4년 째 포터를 하고 있는 기얀드라에게도 화가 나고, 무엇보다 포터의 돈을 떼먹은 사기꾼 람에게 가장 분노가 치민다. 서양인들이 가장 많이 오는 곳이라고 굳이 카트만두 게스트 하우스에서 계약을 맺고, 전액을 선불로 지불한 박사님도 밉고….

그나마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다. 이제 남은 일은 빨리 루클라로 내려가 람을 잡아서 그 사기꾼을 망신 주는 일이다. 이 놈을 어떻게 요리할지가, 지금의 내 최대의 고민거리이자 숙제이다.

하루 종일 난롯가에서 먹고, 책 읽고, 또 먹고, 쉬며 시간을 보냈다. 안개는 종일 몰려왔다 몰려가며 앞산을 희롱한다. 불길이 여위어 갈 때마다 마른 장작을 집어넣고 꺼져가는 불길을 살린다. 타닥타닥 마른 장작 위로 불길이 타오르며 춤추는 소리를 듣고 있다가, 눈을 들어 창 밖의 앞산을 바라보고, 다시 보던 책으로 정신을 집중하고….

마침내 오후 늦게 간디 자서전을 끝냈다. 지금 내 마음에는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의 ‘사티아그라하’ 정신이 가득 하기는커녕, 람에 대한 처절한 복수심이 불타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쿰중에 갔던 캔도 돌아오고, 마첼모로 산책 갔던 기얀드라도 돌아오고, 다시 저녁 시간도 돌아온다.

▲ 바람에 날리는 탈쵸(경전을 적은 깃발) 너머로 초유(8153m)와 고쿄 마을이 보인다.
ⓒ2004 김남희
한 일도 없이 저녁을 배부르게 먹고 방으로 돌아와 잠자리에 든다. 막 잠이 들려는 나를 깨우는 언니의 흥분한 목소리.

“어머, 남희야. 저 별빛 좀 봐.”
사흘 간의 흐린 날씨 끝에 쏟아져 나온 별들이 창가로 바싹 고개를 들이밀고 있다.
“꼭 비박 하는 기분이다. 눈 쌓인 산과 별빛이 다 보이고...”
“침낭 속에 누워 있지, 침낭 바깥 공기는 싸늘하지... 정말 비박할 때 조건이랑 비슷하네.”

잠시 후 잠든 나를 또 깨우는 언니.
“어머, 남희야, 저 달빛 좀 봐.”
겨우 눈을 뜨니 보름달이 방안으로 눈부시게 비쳐들고 있다.
“내 얼굴 달빛 받은 거 보여?”
“응, 언니. 정말 예쁘다. 근데 한 번만 더 나 깨우면 죽어!”

달빛도, 별빛도 무시하고 잠이 드는 무신경한 나.


트레킹 열 두 번째 날
날씨 : 푸른 물 뚝뚝 듣는 하늘
걸은 구간 : 돌레(Dole 4080m)-마첼모(Marchelmo 4450m)-팡가(Fangka 4485m)-고쿄(Gokyo 4750m)
소요 시간 : 5 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몹시 불량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청명하다. 바람도 없고, 햇살은 따뜻하고, 하늘은 새파랗게 개었다. 캔은 이 좋은 날씨에 왜 내려 가냐며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고쿄로 올라가라고 한다. 기얀드라도 여전히 풀이 죽었지만 조심스런 목소리로 올라가자고 채근한다. 결국 우리는 예정대로 산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야채 커리와 밥을 시켜 언니가 가져온 고추장에 비벼 맛있게 아침을 먹는다.

9시 10분, 다시 짐을 꾸려 출발이다. 사흘 만에 보는 파란 하늘이 우울했던 기분까지 상쾌하게 만들어준다. 발걸음도 가볍다. 9시 55분. 라팔마(Rafarma 4417m) 도착. ‘마운틴 뷰 힐 탑 로지’ 라는 길고도 거창한 이름의 숙소가 하나 있다.

10시 45분. 루자(Luza 4360m)에 이어 11시 20분 마첼모(Machhermo 4450m) 통과. 8~9가구가 사는 마을이다. 12시 05분. 팡가(Fangka 4485m) 도착. 이곳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팡가 뷰 포인트 호텔로 들어선다.

이곳 식당 유리창으로는 해발고도 8153m인 초유(Choyoo)가 한 눈에 들어온다. 뭘 먹을까 잠시 고민하다 자그마치 270루피(한화 4800원)나 하는 참치 야채 피자를 주문한다. 지금껏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비싸다. 한 시간을 기다려 나온 피자는 마늘과 양파와 당근과 참치와 치즈가 푸짐하게 얹혀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

네팔인들의 주식인 달밧(렌즈 콩으로 만든 국과 카레를 넣고 볶은 야채, 밥이 함께 나온다)을 먹던 기얀드라가 한 고봉을 다 먹은 후 또 한 고봉을 담아 먹는다. 그 엄청난 양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더니, 가득 솟은 밥을 가리키며 “아마 다블람 봉우리!”라며 웃는다. 오랜만에 보는 그 천진한 미소가 반갑다.

▲ 얼어붙은 고쿄 호수
ⓒ2004 김남희
2시 출발. 다시 산을 넘는다. 눈이 채 녹지 않은 길은 초유(Choyoo)를 마주보며 걷는 길이다. 길은 평탄하게 이어진다.

4시. 고쿄(Gokyo 4750m) 도착. 8~9 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이 고쿄 호수를 둘러싸고 있다. 기름기 있고 느끼한 음식을 먹으면 반드시 시작되는 복통이 마을을 코앞에 둔 곳에서 시작됐다. 결국 바위 뒤에서 급히 일을 보고 눈으로 덮었다. 아깝다. 오랜만에 먹은 그 비싼 피자가 그대로 나왔으니…. 그 사이 호수로 다가가던 언니는 허리까지 눈 속에 빠지는 바람에 달려간 기얀드라에 의해 구조 당한다.

팡가 식당에서 사진으로 본 고쿄 리조트를 찾아서 짐을 푼다. 삼면이 창으로 둘러싸인 식당과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오는 훌륭한 전망! 방에는 제법 큰 침대와 탁자가 놓여 있고 전기도 들어온다. 화장실은 물론 건물 안에 있다! “우와! 5000m에서 이렇게 훌륭한 시설은 처음이다. 그치?” 우리는 마구 감동한다. 짐을 풀고 한 대야에 40루피 주고 더운 물을 사서 세수하고, 발을 씻었다.

저녁 먹으면서 네팔에 네 번째 오는 거라는 영국인 여행 가이드 크리스와 이야기를 나눴다. 얼마 전 BBC 뉴스에 북한이 외국 귀빈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 나왔는데, 그중 나이지리아에서 보내온 박제 악어 한 마리가 한 손에 쟁반과 컵을 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나.

8시에 잠자리에 들다. 언니가 준 소화제 먹고 잠들다.
<네팔 여행기 3>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 산행기 2006/06/13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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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라파타르에서 바라보는 에베레스트와 로체, 눕체. 왼쪽 눈덮인 봉우리가 에베레스트 숄더, 검은 바위봉우리가 에베레스트, 그 오른쪽으로 겨우 드러난 검은 바위봉우리는 로체, 그 옆은 눕체.
ⓒ 김남희
트레킹 여덟째 날
날씨 :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
걸은 구간 : 로부체(Lobuche 4930m)-고락쉡(Gorak Shep.5150m)-칼라파타르(Kalapatthar. 5545m)-고락쉡-로부체
소요 시간 : 7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불량


눈을 뜨니 6시다. 날은 화창하게 개었다. 드디어 결전의 날. 우선 복장부터 새롭게 무장한다. 그동안은 내의 위에 플리스 천을 안으로 덧댄 겨울바지를 입고 다녔는데 오늘은 고소내의 한 벌을 더 입는다. 양말은 세 켤레를 껴 신고, 위에는 플리스 티셔츠 두 개, 그 위에 보온 점퍼, 다시 윈드스토퍼를 입고 마지막으로 점퍼를 걸친다. 보온 모자와 장갑을 끼고, 어젯밤 던킨에게 빌린 바라클라바와 방풍 장갑을 가방에 넣는다.

오늘은 짐을 작은 가방 하나로 줄여 마실 물과 비상 식량, 여벌의 옷
만을 넣고 그 가방을 기얀드라에게 준다. 우리는 각자 카메라 하나씩만 메고 스틱을 들었다.

뜨거운 코코아를 한 잔 마시고 7시 10분에 출발.
계속 굽이도는 바위 언덕 길이다. 페리체를 떠난 지 두 시간 만에 고락셉(Gorak Shep)에 도착한다. 집 두 채가 전부인데 그 중 하나는 문을 닫았다. 스노우랜드 인(Snowland Inn)에서 토스트와 코코아로 아침을 먹고 10시에 다시 출발. 푸모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급한 경사의 언덕길을 오른다.

1시간 넘게 이어지는 흙길. 북소리처럼 울려오는 내 심장 소리. 그 다음은 너덜바위들이 널린 길이다. 30분 쯤 오르니 고갯마루가 나온다. 여기가 정상인가 둘러보는데 기얀드라가 말한다.

“여기가 칼라파타르야. 저 위랑 전망은 똑같아.”

음, 저 위가 정상이군. 이 놈이 이제 잔머리까지 쓰네. 그것도 금방 들통나는 잔머리.

“더 올라가자."

▲ 푸모리를 등지고 칼라파타르를 내려오는 트레커들.
ⓒ 김남희
올라오는 속도가 좀 느리던 언니가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된다.
기얀드라를 내려 보냈는데 가방을 메고 왔다갔다 하게 만들기가 영 미안하다.

“가방은 날 주고 갔다와”라며 호기롭게 건네 받았는데, 그게 결정적 패착이었다. 가방 메고 너덜지대를 이십여 분 간 오르는 동안 도무지 숨이 차서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가방의 무게가 이토록 처절하게 내 어깨를 눌러오기는 처음이다.

이 가방 속에 조국의 생사와 존망이 고스란히 담긴 핵무기의 제조방법, 혹은 남북한 정상회담 비밀 문건이 들어있다 해도 이토록 내 어깨가 무겁지는 않으리라. 두어 걸음 떼고 지팡이에 기대어 쉬고, 다시 두어 걸음 떼고 또 기대어 쉬고.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쿵쾅거리며 뛰고¨. 정말 이 가방이 내 가방만 아니었으면 사정없이 던져버렸을 거다.

마침내 12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길이 끝나고 칼라파타르 정상. 에베레스트(8850m)가 바로 눈앞에, 그 옆으로 살짝 드러난 로체(Lhotse 8501m)와 멋진 자태를 자랑하는 눕체(Nuptse 7864m)가 우뚝 솟아있다. 고개를 뒤로 돌리면 손에 잡힐 듯 가까운 푸모리(Pumo Ri 7165m). 전후좌우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눈 덮인 산 뿐이다.

나 혼자서 저 눈부신 봉우리들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은 역시 조지 맬러리. 왜 산에 가느냐는 기자의 집요한 질문에 “Because it is there*(산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죠)"라는 고전이 되어버린 답을 남긴 등반가. 그는 에베레스트에서 실종된 지 76년 만인 1996년에야 한 등반가에 의해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의 목에는 사진기가 걸려있었지만 세월과 기후로 인해 현상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한다.

결국 그가 정상을 올랐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어버린 셈이다.
1953년 영국 원정대에 속한 뉴질랜드 출신의 모험가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진 셀파에 의해 초등된 후에도 수많은 등반가들의 목숨을 앗아간 산. 그게 에베레스트다.

▲ 칼라파타르 오르는 길.
ⓒ 김남희
수만 년의 침묵을 이고 에베레스트는 따가운 햇살 아래 서 있다. 지칠 줄 모르고 이어져온 모든 도전과 성공, 그리고 참혹했으나 아름다운 실패를 지켜봤을 저 산은 오늘도 말이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산을 오르기 위해 누군가 짐을 꾸리고 있으리라.

나는 그들이 흘렸을 땀의 양을 모른다. 그들이 꾸었을 꿈의 깊이도 모른다. 그들이 견뎌야 했을 고독과 좌절의 높이도 알지 못한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인간을 전진케 하는 것은 ‘격렬한 희망’이라는 것. 격렬한 희망과 그 희망에 대한 치열한 믿음 하나만으로 세상을 버티는 이들의 삶은 아름답다. 비록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그들의 삶은 빛이 되어 꿈 없는 이들의 가난하고 어두운 삶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오늘 나의 경배는 이 산에서 내려온 이들이 아닌, 다시 내려오지 못한 이들에게 바쳐진다.

이곳에 넘치는 건 오직 죽음에의 공포와 막막한 고독. 그리고 희박한 공기. 저 거대한 산에 청춘을 묻고 꿈을 묻고 몸을 묻은 이들의 꿈 한 자락을 잠시 들여다보는 지금,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조금씩 치밀어 오른다.

숙연한 마음으로 서 있는 동안 기얀드라와 언니가 올라온다. 침묵은 깨진다. 사진을 찍고, 초콜릿을 나눠 먹으며 잠시 머물다가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 누군가의 혼이 나를 부르는 것 같아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 칼라파타르에서 내려와 고락쉐로 오는 길에 지나는 바윗길.
ⓒ 김남희
하산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인 1시 15분 고락쉡 도착. 스노우랜드 인으로 다시 돌아와 뜨거운 코코아를 마시며 쉰다. 갈증이 난 언니는 콜라를 마시는데 이곳에선 콜라 한 캔이 250루피(4000원)다.
기얀드라가 머리가 아프다며 테이블에 얼굴을 묻고 있다. 언니가 두통약을 꺼내 건네준다. 어떻게 된 게 우리는 멀쩡하고, 포터가 고소에 걸리는지 모르겠다.

이 식당의 천장과 벽은 온통 트레커들이 남겨 놓은 티셔츠와 팬티, 모자, 손수건으로 가득하다. 그들은 그 천에 자신들의 이름과 날짜, 감상을 적어 놓았다. 우리도 손수건에 “까탈이와 수영, 인내와 겸손을 배우고 갑니다. 2004년 2월 4일 From South Korea‘라고 적어 주인 아저씨께 건네준다. 아저씨는 남체 시장에서 핀을 사와 걸어놓겠다는데 다음에 오면 걸려 있을지 궁금하다.

2시 10분. 페리체로 하산을 시작한다. 한 시간 남짓 바위 언덕길을 오르락내리락 하고 나니 평지가 이어진다. 3시 50분. 페리체 도착.
더운 물에 얼굴을 씻고 저녁은 야채커리와 언니가 싸온 김으로 먹는다. 다 부서진 김이 얼마나 맛있는지!

난롯가에서 랜턴 켜고 책 읽다가 방으로 돌아와 엄마께 엽서를 쓴다. 엄마에게 그랬다. 오늘로써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겠다는 꿈 하나는 확실히 버렸다고. 다른 것 다 떠나서 추위 때문에 도저히 안 되겠다고, 그러니 엄마도 걱정 하나는 내려놓으셔도 된다고.

▲ 로부체 숙소 마당에서 바라본 로체샤. 마침 달은 보름달.
ⓒ 김남희
트레킹 아홉째 날
날씨 : 펄펄 눈이 옵니다.
걸은 구간 : 로부체(Lobuche 4930m)-페리체(Periche 4280m)-팡보체(Pangboche 4252m)
소요 시간 : 4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점차 불량해지고 있음


8시 기상. 푹 잤다. 계란을 넣은 토스트와 코코아로 아침을 먹고 9시 35분에 출발. 한 시간 만에 투글라에 들어선다. 올라올 때 차를 마셨던 집 아저씨가 우리를 보더니 반갑게 인사를 하며 덧붙인다.
“아버님은 결국 고산병 때문에 페리체에서 하산하셨어요!”라고.

아버지가 누굴 말하는지 잠시 헷갈렸는데 알고 보니 정 선배님이다.
연세가 지긋하신 선배님이 우리를 딸과 조카딸이라고 소개하고 다니셨는데, 그새 온 트레일에 소문이 다 났나보다. 나는 언니에게 속삭인다.

“언니, 우리 이러다가 아버지를 버린 매정한 딸들로 소문나는 거 아니야?”

바위산 하나를 넘고 나니 평지가 나온다. 투글라에서 페리체로 가는 길 왼쪽 앞으로는 멀리 아마 다블람이 보이고, 오른쪽 옆으로는 따우체와 촐라체가 따라 온다. 어제 칼라파타르에 오를 때 고소로 인한 두통으로 고통스러워 하던 기얀드라가 오늘도 몸이 좋지 않은 지 자주 쉰다. 사탕을 몇 알 건네니 초콜릿을 달라고 해 초콜릿을 꺼내 나눠 먹었다.

▲ 촐라체와 따우체. 투글라에서 페리체 가는 길. 바위에 기대어 쉬고 있는 트레커들이 보인다.
ⓒ 김남희
멀리 페리체 마을이 보인다. 풀을 뜯거나 햇볕을 쬐고 있는 야크들도 간간이 보인다. 12시. 페리체 도착. 지난 번에 머물렀던 쿰부 로지(Khumbu Lodge)에서 점심. 야채 커리와 코코아를 주문한다. 그 사이 주방장은 카트만두로 휴가를 떠나고 주방 보조가 혼자 요리를 한다. 그래서인지 주문한 지 한 시간이 지나도 음식 나올 기미가 없다. 햇볕 따스한 창가에서 언니는 졸고 있고, 개 한 마리 역시 내 발 밑에서 자고 있다.

한 시간 반 만에 나온 음식을 10분 만에 끝내고 다시 출발. 시간은 두 시가 다 되어 간다. 2시 35분. 오르쇼(Orsho) 경유. 눈발이 날린다. 2시 50분. 소마레(Shomare)를 지난다. 개천을 왼쪽으로 끼고 계속되는 절벽길. 저 멀리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보인다.

물소리와 야크 방울 소리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다. 그사이 눈발은 제법 굵어져 사위를 하얗게 덮는다. 희뿌연 구름과 눈발 사이로 가끔 그림처럼 산봉우리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내가 지금 인간 세상을 걷고 있는 건지, 신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지 모르겠다.

▲ 눈 덮인 산길을 걷고 있는 야크떼.
ⓒ 김남희
팡보체(Pangboche) 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우리는 ‘사원’ 표시가 난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길을 이십여 분 이상 오르니 절과 마을이 보인다. 타쉬 로지(Tashe Lodge)에 짐을 풀다.

건축설계가 직업인 수영 언니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 집 굉장히 재미있는 집이야. 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집을 지었어. 여기 계단 보여? 그리고 저 나무 좀 봐. 집 한 가운데를 뚫고 나가잖아.”

정말 식당에서 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거대한 나무 둥치가 보인다. 자연적인 환경을 그대로 이용해 지어진 집답게 내부 구조가 좀 복잡하다.

이 집에서 화장실을 가는 방법을 소개해 보면 이렇다. 우선 방을 나서서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7-8개쯤 내려가 오른쪽으로 돌아서 첫 번째 나무문을 열고 나가 다시 돌계단을 열 개쯤 내려가면 허리께 쯤 오는 나무문이 나온다. 그 문을 열고 나가 찬 공기와 바람에 어리둥절해진 정신을 추슬러 정면으로 열 두 발자국쯤 걸어가 문을 열면 화장실이다(물론 푸세식이고, 거의 용량이 찼으므로 조심해서 조준해야만 한다. 볼일을 본 후 가득 쌓여 있는 나뭇잎을 뿌려주면 잘 썩은 거름으로 재활용된다).

우리는 우선 뜨거운 우유를 주문한다. 그리고 카트만두에서 만난 여행객에게 덥썩 받아온 미숫가루를 꺼낸다. 정말이지 이 미숫가루를 우리에게 주고 간 ‘미숫가루 소년’에게 축복이 있기를.

뜨거운 우유에 미숫가루를 타서 약간의 설탕과 함께 마시는 이 기분.
이 집 안주인 타쉬가 맛을 보겠다기에 따라줬더니 “아니, 짬파랑 똑같네” 한다. 그렇지. 짬파가 보릿가루 볶은 거니까 비슷하겠지. 미숫가루를 마시고 있는데 기얀드라가 또 “Shop"에 다녀오겠다고 한다. “No!"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못 가게 감시하는 중.

▲ 팡보체 타쉬델레 롯지의 여주인 타쉬.
ⓒ 김남희
이곳 주인인 타쉬는 스물 여섯 살의 이혼녀다. 이혼 후 친정집으로 돌아와 4살 난 아들 장부를 혼자 키우고 있다. 중매로 결혼 한 그녀는 처음부터 남편과 성격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임신을 하면 대부분이 집에서 아이를 낳는데, 그녀는 갑자기 하혈을 시작해 헬기로 병원이 있는 쿰중으로 가야만 했다.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에도 남편은 여전히 불성실하고 무책임한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병원에 혼자 누워 있는 동안 이 남자를 남편으로 믿고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회의를 느껴 퇴원하는 길로 이혼부터 했다고 한다. 네팔에서는 이혼녀가 드물지 않느냐고 물으니 아주 드물다고 한다.

네팔도 인도처럼 카스트 제도가 존재하고, 20여 개의 부족이 있는데 카스트가 낮은 부족과는 결혼하지 않는다고 한다. 네팔에서는 아직 대부분의 결혼이 중매로 이루어진다. 예전에는 부모가 맺어주면 얼굴도 못 보고 결혼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요즘은 많이 민주화(?)되어 직접 만나 보고 “Yes"냐 "No"냐를 결정할 말미를 하루 정도는 준다고 한다.

아버지가 이 동네의 존경받는 라마스님인 타쉬는 이곳의 돈 있는 집의 자녀들이 그렇듯 카트만두에서 유학을 했다. 이곳 산간마을에서 게스트 하우스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녀를 카트만두로 유학 보내고, 겨울이면 엄마가 자식들을 보러 카트만두로 간다.

팡보체 마을에서는 5명이 카트만두에서 공부를 했는데 다들 이곳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카트만두에서는 직장 구하기도 힘들고, 구한다 해도 월급이 적어 이곳으로 돌아와 부모의 게스트 하우스를 물려받거나 가이드나 포터, 고산 셀파 등을 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타쉬의 소원은 미국 같은 외국에 나가 돈을 벌어 아들을 공부시키는 거라고 한다. 그녀에게 그 꿈이 가장 절실한 것이라면 부디 꿈을 이룰 수 있기를….

▲ 돌레 가는 길에서 내려다본 풍경.
ⓒ 김남희
<네팔 여행기 2>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트레킹 | 산행기 2006/06/13 11:40
http://blog.naver.com/hanik1008/60025234070

▲ 팅보체에서 바라보는 로체샤.
ⓒ2004 김남희
▲ 팅보체 사원.
ⓒ2004 김남희
트레킹 다섯째 날
날씨 : 햇볕은 쨍쨍 모래알은 반짝
걸은 구간 :팅보체(Tengboche 4252m)-팡보체(Pangboche 4252m)-딩보체(Dingboche 4350m)
소요 시간 : 4 시간
복장 및 위생 상태 : 아직은 양호


어젯밤 호주 아이들은 새벽 1시까지 음주가무를 즐기느라 소란스러웠다. 나 역시 그 소란을 고스란히 함께 하느라 침낭 속에서 새벽 1시까지 뒤척였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귀까지 예민해진다는 건가. 이제는 조그만 소음에도 쉽게 깨고 뒤척인다. 나이들수록 신경이 무뎌져야 할텐데…. 나는 어떻게 된 게 점점 벼린 칼처럼 날카로워진다.

눈을 뜨니 7시 반이다.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다. 오늘부터는 정 선배와 헤어져 우리끼리 산행을 시작한다. 이미 두통과 불면 등의 고소 증세가 시작된 정 선배는 고도 적응을 위해 최대한 천천히 페리체를 향했다. 우리는 예정대로 추쿵과 고쿄리를 다 돌기로 해 팀을 나누었다.

@ADTOP@
정 선배는 가이드 람과 포터 바뜨라를 데리고 떠나고, 우리는 기얀드라만을 데리고 딩보체로 향한다.

우리 일행은 아침을 먹고, 9시 20분에 출발했다. 길은 눈길이라 미끄럽다. 정면 왼쪽으로는 눕체, 오른쪽으로는 아마 다블람이 보이던 길이 앞으로 나아갈수록 조금씩 사라진다. 철다리를 건너니 아마 다블람이 다시 나타난다. 이곳부터는 흙길이다. 눈은 거의 녹았다.

10시 50분. 팡보체(Pangboche)에 도착했다. 팡보체는 눕체와 아마 다블람 아래의 작은 마을이다. 사위는 고요하다. 새파란 하늘과 햇살과 바람만 충만하다. 나는 말없이 걸을 수 있어 행복하다.

▲ 팡보체 마을 전경.
ⓒ2004 김남희
▲ 소마레 마을의 ‘파상 로지’ 부엌. 장작을 때는 화덕이지만 배기시설까지 갖추었다.
ⓒ2004 김남희
11시 55분. 소마레(Somare)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의 해발고도는 4040m다. 우리 일행은 파상 로지(Pasang Lodge)에서 짜파티와 찐 감자로 점심을 먹었다. 이 동네 주식이 감자라 그런지, 감자 인심 하나만은 후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감자를 소금에 찍어 배불리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1시 출발. 바위와 자갈이 널린 길이 나타났다.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을 반시간 남짓 걷고 나니 페리체와 딩보체로 갈라지는 길이 나온다. 잠시 산을 내려와 나무다리를 건너니 다시 오르막이 시작된다. 전나무는 사라지고 키 낮은 관목만 듬성듬성해 고도가 높아졌음을 말해준다.

2시 30분. 딩보체(Dingboche 4350m)에 도착했다. 히말라얀 롯지(Himalayan Lodge)에 짐을 푼다. 먼저 와 있던 세 명의 호주인 로렌, 사만타, 던킨과 인사를 하고 난롯가에 둘러앉는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You rest. I shopping(당신은 잠시 쉬세요, 전 쇼핑하고 올께요)"하며 나간 기얀드라가 돌아오지 않는다. 호주팀 가이드 프림에게 물어보니 그가 마구 웃는다.

“쇼핑이라고? 그걸 믿었어? 너희 포터는 지금 당구장에서 돈 다 쓰고 있을 걸.”

올해 스무 살인, 기얀드라는 포터 생활 4년 차다. '막내 동생 같아 신경이 쓰였는데, 당구장에서 돈을 다 까먹고 있다고?'

“안 돼! 그럴 순 없어.”

경악하는 나를 위로하며 나간 프림도 한 시간이 넘도록 감감 무소식이다.

기얀드라가 선불로 받은 포터 비를 다 날릴까봐 걱정이 된 나는 어둑해지는 거리를 걸어 당구장을 찾아간다.‘이 깊은 산골에 웬 당구장이람?’당구장 문을 여니, 당구대 하나를 놓고 네팔 젊은이 7-8명이 모여 담배를 피거나 당구를 치고 있다.

눈이 마주친 기얀드라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한 마디하고 돌아선다.

“기얀드라! 빨리 안 돌아오면 너 팁 없다!”

잠시 후 나타난 기얀드라에게 다그치며 물었다.

“뭐? 쇼핑을 간다구? 야! 넌 쇼핑을 당구장으로 가니? 거기서 얼마 잃었어?”

기얀드라는 풀이 죽어 대답한다.

“Me? No Money. My Friend money.(저요? 전 돈 안 잃었어요. 제 친구 돈으로 쳤어요)"

친구 돈으로 쳤다는 그 말을 믿을 수도 없지만 설사 자기 돈 갖고 쳐서 다 잃었다 한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더 이상 잔소리를 하리. 게다가 이제 스무 살이면 한창 놀기 좋아하고, 온갖 종류의 유혹에 약 할 나이가 아닌가? 결코 내가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난다.

저녁을 먹고, 9시까지 난롯가에서 휴식을 취했다. 막힌 코로 숨을 쉬느라 오래 뒤척이다, 겨우 잠이 들었다.

▲ 추쿵 마을의 돌집. 뒤로 아일랜드 피크가 보인다.
ⓒ2004 김남희
▲ 딩보체에서 페리체 가는 고갯길. 뒷산은 탐셸꾸.
ⓒ2004 김남희
트레킹 여섯째 날
날씨 : 오늘도 쾌청
걸은 구간:딩보체(Dingboche 4350)-추쿵(Chukhung 4743m)-딩보체-페리체(Pheriche 4280m)
소요 시간 : 4시간 반
복장 및 위생 상태 : 점차 불량해지고 있음.


7시 기상. 오늘도 쾌청하다. 수프와 오믈렛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딩보체에서 추쿵으로 출발한다. 벌써 9시 10분 전이다. 큰 배낭은 이곳에 두고, 작은 배낭만을 챙겨 나선다. 얼음장 밑으로 경쾌하게 흐르는 물소리가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수영 언니가 힘이 드는지 기얀드라에게 가방을 맡긴다. 그 모습을 보니‘웬만하면 오늘 하루는 기얀드라가 짐 없이 걷게 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서운한 생각이 든다.

고산병 증세 중의 하나가 사소한 것에 집착하고, 판단력이 흐려진다더니…. 나도 고산병인지, 언니가 맡긴 가방에서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내 가방이 훨씬 무거운데, 나는 힘들면 어떡하지.’ 이런 생각과 함께 가방없이 걸어가는 언니의 모습이 자꾸 걸린다.

그러고 보니 산악회 성기형이 해 준 이야기가 생각난다.

“원정을 갔을 때 한번은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지. 고소에 걸린 한 후배가 누룽지 마지막 남은 국물을 선배가 먹었다고 ‘저 자식이 누룽지 한 숟가락 더 먹었지!’하며 그 선배 뒤꽁무니만 노려보며 하루 종일 누룽지 생각만 했다더니 내가 지금 그 꼴이잖아?”

머리를 흔들며, 가방 생각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럴수록 가방은 집요하게 내 머릿속을 파고든다. 내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도 오늘따라 엄청나고….‘아, 치졸하고 유치한 인간 김남희.’

11시 10분 추쿵에 도착했다. 밀크티 한 잔 마신 후, 기얀드라와 뒷산에 오르기로 했다. 추쿵 리(Chukhung Ri)까지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뒷산에 오르기로 한 것이다.

가방을 메고 나서는 내게 언니는 달거리(월경)로 허리와 배가 너무 아파 기얀드라에게 가방을 맡겼다고 말한다.‘아, 할 수만 있다면 땅 속으로 푹 꺼지고 싶다.’

뒷산은 거의 45도로 경사졌다. 치고 올라가는데, 몹시 숨이 차오른다. 헉헉거리는 내게 기얀드라가 “가방을 메겠다”며 달라고 한다. 오전의 내 모습이 용서가 되지 않아 나는 가방을 메겠다며 가방을 들었다. 다섯 발 걷고, 헉헉거리며 쉬고. 다시 서너 발 떼는 내게 기얀드라가 말했다.

“칼라파타르 새임 새임 히얼”

‘음, 다음에 오를 칼라파타르도 여기처럼 힘들다구?’이젠 기얀드라의 영어가 완벽하게 이해된다. 나는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배낭에서 잠바를 꺼내 입고, 벌벌 떨며 사진 몇 장 찍고 산을 내려왔다.

오늘은 처음으로 5000m를 넘게 걸었다. 숙소로 돌아오니, 그새 한 시간이 지났다. 오전 내내 다리에 힘이 없어 고생했기에 계란볶음밥을 시켰다.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볶음밥이었지만 그래도 한 그릇 다 비웠다.

▲ 이우는 저녁해를 받고 있는 탐셸꾸.
ⓒ2004 김남희
▲ 페리체 마을.
ⓒ2004 김남희
1시 15분 출발. 기얀드라는 여전히 언니 가방을 멨다. 가방이 없어서인지, 내려가는 언니의 속도는 놀랍게도 빨랐다. 한 시간 이십분 만에 딩보체에 도착했다. 언니는 머리가 너무 아파 정신없이 내려와 약부터 먹었단다.

3시. 잠시 쉰 후 페리체로 출발했다. 딩보체에서 페리체로 가는 고갯길(지름길)은 놀라운 풍경을 감추고 있다. 로체 샤와 아일랜드 피크가 뒤편으로 보이고, 왼쪽으로는 아마 다블람이, 오른쪽으로는 따우체와 촐라체에 이어 로부체가 이어진다.

아일랜드 피크 위로는 낮달이 떠올랐고, 구름이 몰려와 아마 다블람을 휘감고 있다.‘여기 인간계 맞아?’하는 의문이 절로 들 정도로 풍광이 뛰어났다. 30분이면 넘을 고갯길이지만 너무 아름다워 한 시간 넘게 소요하며 페리체로 내려왔다. 페리체는 그 모든 봉우리들의 발치에 납작하게 엎드린 마을이다.

기얀드라의 친구가 요리사로 있다는 쿰부 롯지(Khumbu Lodge)로 왔다. 이곳은 무엇보다 화장실이 건물 안에 있어 좋았다. 적어도 오늘 밤만은 침낭 속에서 몸을 비비꼬며,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는 승산 없는 전투를 치르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저녁은 모모라 불리는 야채 튀김 만두와 뜨거운 우유에 탄 미숫가루 그리고 공짜로 한 그릇 얻은 야채 카레다. 만두도 맛있었지만 카레의 맛이 일품이다. 지금까지 먹은 물 탄 카레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산 속으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점점 단순해지고 있다. 맛있는 밥 한 그릇에 세상을 얻은 듯 행복해하고, 날마다 변화하는 풍경에 천국에라도 이른 듯 감사해한다.

저녁을 먹고, 따뜻한 물을 받아 세수하고, 그 물로 발을 씻었다. 남체에서 샤워한 후 처음으로 발을 씻는 것이라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 기얀드라 친구 덕에 뜨거운 물은 공짜란다. 이 깊은 산골에서도 ‘빽’은 통한다.

기얀드라는 뜨거운 물이 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갖다 주겠다며 오랜만에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9시까지 난롯가에서 머물다가 방으로 돌아오니, 실내온도는 바깥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추위도 따라와 방에서도 모든 것이 언다. 필요한 물건들을 침낭 속에 넣고 자지 않으면 모두가 언다. 화장품도 얼고, 침대 머리맡에 둔 찻잔의 물도 아침이면 얼어 있고, 물 티슈조차도 꽁꽁 얼어버린다.

카메라 건전지와 물티슈를 침낭 속에 넣고 잠자리에 든다. 내일은 또 어떤 풍경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아침에 대한 기대에 들떠 잠을 청한다.

트레킹 일곱째 날
날씨 : 화창
걸은 구간 : 페리체(Pheriche 4280m)-투글라(Tuglha 4600m)-로부체(Lobuche 4930m)
소요 시간 : 3시간 45분
복장 및 위생 상태 : 비교적 양호


7시가 조금 넘어 일어났다. 기얀드라 친구가 공짜로 준 따뜻한 물에 세수하고 (세상 사람들이 굳이 무거운 ‘빽’을 짊어지려고 하는 이유를 설득력 있게 체험), 부엌에서 아침을 기다리는 중이다. 식당에는 아직 난로가 지펴지지 않아 염치 불구하고, 부엌으로 들어와 화덕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오늘도 날씨가 맑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고생길이 시작된다. 오늘 은 부체에서 머물고, 내일 아침이면 에베레스트를 조망할 수 있는 칼라파타르(Kalapatthar 5545m)에 오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카레라이스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9시 35분에 출발했다. 눈 덮인 산길을 따라 길을 오른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 촐라체와 따우체의 자락에 자리잡은 페리체. 눈 덮인 돌담과 돌집이 보인다.
ⓒ2004 김남희
▲ 투글라에서 로부체로 향하는 고개에서 만난 초르텐(돌탑)과 탈쵸(경전을 인쇄한 깃발).
ⓒ2004 김남희
2시간 남짓 오르니 투글라(Tuglha)가 보인다. 투글라는 집이 딱 세 채인 작은 마을이다. 작은 찻집에서 밀크티를 마시며, 영국에서 온 롭과 안토니와에게 인사를 한다.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코리아”라고 했더니, “South or North?(남 또는 북)"이라며 묻는다.

‘아니, 세계 정세에 아무리 둔감해도 그렇지, 어쩌면 아직도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창 혈기왕성하던 시절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Korea is one!(우리는 하나)"이라고 외치기도 했지만 다 옛말이다. 이제는 부연 설명할 일이 지겨워서라도 그렇게는 대답하지 않는다.

“벌써 몇 번째 똑같은 질문을 듣는지 몰라. 북한 사람들은 외교관과 정부 관리를 제외하고는 해외여행을 못 해. 네가 만약 여행 중인 한국 사람을 만나면 99%는 남한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돼.”

12시. 다시 출발이다. 30분쯤 오르니 길은 수월해지고, 푸모리(Pumo Ri 7165m)가 정면에 보인다. 커다란 플라스틱 물병 하나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오는 푸모리를 바라보며 걷는 길에 걸리적거린다. 모른 척 지나치기엔 너무도 가까운 발치에 놓여있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주워들고 걷고 있자니, 기얀드라가 들고 가겠다며 받는다.

감동은 순간, 잠시 후 바위 틈 사이로 “휙”하니 물병을 던져버리는 기얀드라. 한숨밖에 안 나온다.

1시 45분. 로부체(Lobuche)다. 투글라에서 만났던 영국인 롭과 안토니가 먼저 와 있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고산병 예방에 좋다는 마늘 스프와 오믈렛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올라오는 길에 머리가 약간 아프더니 그 사이 괜찮다.

이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은 16살 된 쥬니와 스무 살 먹은 그녀의 남편이다. 16살에 어떻게 결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네팔에서는 ‘필이 꽂히면’ 바로 결혼한단다. 남편이 가이드, 포터들과 카드 게임을 하는 동안 쥬니는 남편이 지는지, 이기는지 쳐다보며 참견하느라 산만하다.

나는 난롯가에서 간디를 읽으며 건빵을 먹는다. 언니가 카트만두에 도착한 날, 거대한 건빵 봉지 두 개를 본 나는 “웬 건빵? 뭐 그런 걸 다 사왔어?”하며 비웃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건빵 두 봉지를 나 혼자 다 먹었다.

이번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의 뜻하지 않은 수확 하나가 건빵 맛의 재발견이다. 건빵 봉지에는 “배고프던 그 시절. 어머님이 건네주시던 그 손맛 그대로. 추억의 건빵. 별사탕도 들어있어요”라고 적혀있다.

나는 그걸 바꿔 읽는다. “배고프던 그 산행. 언니가 건네주던 그 손맛 그대로.”

딩보체에서 같은 숙소에 머물렀던 호주인 던킨이 우리를 보고 개울을 건너 찾아왔다. 그는 칼라파타르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이란다.

“칼라파타르 어땠어?”
“Tough! Very Tough! 거긴 무지무지 추워서 난 바라클라바(원래는 추위를 막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강도들에 의해 복면으로 오용되는 모자) 쓰고, 가져온 옷 다 꺼내 입고, 이 두꺼운 장갑까지 꼈는데도 추워서 죽을 뻔했어.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말도 못해. 사만타는 끝까지 못 올랐어.”

사만타는 꽤 건강하게 보이는 일본인이다. 그런 사만타까지 못 올랐다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저녁 전에 던킨, 롭, 안토니, 언니와 카드 게임을 했다. 우리가 며칠 전 기얀드라와 던킨에게 가르친‘원 카드’를 하고, 그 다음엔 롭이 가르쳐준 'Ass hole' 이라는 얄궂은 이름의 게임을 했다. 음주가무, 잡기에 서투른 나답게 여기서도 꼴찌는 내 차지다.

롭과 안토니는 아직도 베이스캠프에 갈지, 칼라파타르에 오를지 결정을 못 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칼라파타르에서 보는 전망이 낫다고 하는데도 안토니는 제 주장을 꺾지 않는다.

“칼라파타르는 안돼. 사람들한테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갔다 왔다고 해야 말이 되지, 칼라파타르라고 하면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라고.

카트만두의 한국인 숙소 “짱”의 선미 언니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도 꼭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혹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 등 남들이 알아주는 코스를 선호한단다.

난롯불이 꺼져 가는 시간이다. 8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몇 번의 꿈 빼고는 아주 잘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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