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거리 : 104 km

이동시간 : 2시간 30분























칭헤르 온천

4개의 노천탕이 준비되어 있다. 몽골의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따끈하게 즐기는 온천욕은 제대로된 힐링을 선사해준다.









이동거리 : 276 km

이동시간 : 7시간 10분


아침 일찍 찾아간 주유소는 전기가 공급되지 않아 주유기가 작동하지 않아 기름을 넣을 수가 없었다. 이 때 어디에선가 나타난 주민이 미리 사들인 기름을 들고 달려와 우리 일행에 기름을 팔고 있다.










하르허린

하르허린은 몽골 고원의 중심에 위치하였다.

하르허린은 고대로부터 교통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유목 도시로서 갖추어야 할 지형적인 요소들이 적합하여 유목제국들이 이 주변에 수도를 세웠었다고 한다. 칭기즈 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하여 하르허린에 수도를 세우기로 하였는데, 그 아들인 우구데 칸(오고타이 칸)1235년부터 도시를 넓히고 궁궐을 세웠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왕과 귀족들을 이 도시에 정착하는 것을 금하고 매년 450km 정도를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명령하였기 때문에, 왕과 귀족들은 이곳 수도 하르허린에서는 초봄과 초가을의 며칠만 보냈다고 한다. 이후 중국지역을 통치하던 호빌라이(쿠빌라이) 칸이 몽골 중앙지역을 통치하던 동생 아릭 부케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몽골제국 제4대 칸이 되면서 1266년에 수도를 북경으로 옮겼다. 호빌라이가 수도를 북경으로 옮기면서 하르허린을 약탈하고 떠났기 때문에 수도를 건설한 30년 만에 폐허가 되어버렸다. 

몽골의 칸들은 종교를 평등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하르허린에는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공존했다고 한다. 이 도시가 정치 문화 경제 무역 등의 중심지로서 동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극히 짧은 기간이었다. 1889년 러시아 학자 야드린체브에 의해 하르허린이 몽골제국의 수도였음을 밝혀내고부터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발굴작업을 하고 있다.

<-몽골 몽골인, 어럴저뜨 지음, 도서출판 두르가- 발췌>




엘덴조 사원

몽골제국의 하르허린 옛 궁궐터에 새워진 몽골 최초의 라마불교 사원이다. 엘덴조 사원을 지을 때 하르허린 부근의 파손된 비석과 벽돌 등 옛 몽골제국의 왕궁터의 부재를 사용하였다. 1586년 칭기즈 칸의 21대 후손인 아쁘타이 사잉 칸이 엘덴조 사원의 첫 전각인 걸 조(중앙전각)를 지은 것을 시작으로, 이때부터 불교가 왕실의 지원을 받아 몽골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엘덴조 사원은 외벽에 108개의 불탑과 사방 네 개의 문을 만들고 내부에는 60개의 전각에 천여 명의 승려가 사는 게르와 집으로 구성된 거대한 사원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스탈린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15개의 전각만 남았다. 대부분의 승려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시베리아로 유배되었다. 파괴되어 폐쇄하였던 사원을 1965년에 일부 수리하여 박물관으로 변경하였다가 1990년 초 민주화의 영향으로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면서 다시 사원으로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몽골 몽골인, 어럴저뜨 지음, 도서출판 두르가- 발췌>














인생의 고비에는 고비에 가보기를 권한다. 광활한 고비의 구름이, 손에 닿을 듯한 밤하늘의 별들이 많은 말을 해준다. 나 또한 자연의 한 조각임을 깨닫게 한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삶을 살았는지, 가족과 친구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는지. 고비에 서면 용서를 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지 묻게 된다. 고비의 모래 한 톨 같은 나는 평안을 얻는다. 

이동거리 : 250 km

이동시간 : 3시간

 

 

 

 

 

 

 

 

 

 

 

 

 

 

 

 

 

 

 

 

 

 

 

게르 각 부분

 

하나(하흔): 벽체는 하나라 하며, 부재를 가위의 기능처럼 엮어서 펴면 울타리가 되게 하고 접으면 옮기기에 간단한 부피로 포개진다. ‘하나는 버드나무로 만든다. 여름에는 하나를 높게 하고, 겨울에는 낮게 한다.

       

오니(운흐니): 경사진 지붕면은 긴 장대로 된 서까래를 방사형으로 걸쳐 만드는데 이 서까래를 몽골어로 오니라 한다. 오니는 버드나무로 만들고, 상단은 천창을 이루는 원형의 틀(터너)의 측면에 준비된 구멍에 끼우고 하단은 고리를 만들어 벽체인 하나의 윗 부분에 걸고 가죽끈으로 묶는다. 게르 하나에 81개 또는 72개의 오니가 사용된다. 72란 수는 몽골의 72절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터너(도노, 토우노, 토흔): 게르의 지붕 한가운데에 있는 원형 천창(天窓)터너’(토우노)라 하는데 느릅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 만든다. 원을 이루는 틀 측면에 빙 둘러가며 구멍이 있어 여기에 우산살처럼 서까래 오니를 방사형으로 꽂게 되어 있다. 때로는 오니를 그냥 걸치고 가죽끈으로 고정시키는 방법도 쓰인다.

 

 

바간나(바흐칸): 천창 터너는 보통 두 개의 기둥으로 받쳐지는데 이 기둥은 바간나라 하며, 서까래인 오니가 모두 터너에 집중되므로 결국 지붕의 무게 대부분을 이 기둥들이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게르가 커지면 기둥이 네 개가 사용된다. 부족에 따라 세 개의 기둥을 쓰는 곳도 있다. 게르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 바간나는 우주목(宇宙木)으로서 샤먼도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에스기(이스끼): 게르를 덮고 에워싸 게르의 표피가 되는 펠트재료를 몽골어로 에스기라 한다. ‘에스기는 양털을 펴서 다져 만든다. 겨울에는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여름에는 한 겹으로 덮는다. 에스기 겉에는 에스기가 오래 가도록 광목 같은 천으로 덮는다. 펠트에도 세부 명칭이 있어서 천창 토오노를 덮는 것은 우르호나머지 지붕부분을 덮는 것을 테에베르’, 벽을 감싸는 부분을 토오르라 하며, 출입문을 감싸는 것을 우우드라 한다.

 

 

하알가: 문틀을 하알가라 한다. 문은 하나만 두며, 주로 동남쪽으로 둔다. 흔히 있는 북풍을 피하기 위함이다. 몽골어로 우우드 사이흐라는 말이 있는데 직역하면 문을 지킨다는 의미이나 가정을 지킨다”, “집을 본다는 의미로 쓰인다.

 

 

 

 

 

엉긴 히드 사원, 라마불교의 쇠퇴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었다.

사회주의 혁명 당시, 라마교의 승려들이 탄압을 받아 환속을 강요당하고, 치욕적인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지금 몽골의 전체 인구의 26% 정도가 라마교를 믿고 있으며 계속 부흥하고 있다. 국가 종교로서 불교에 대한 관심은 징기스칸 시대부터 비롯되었다. 징기스칸은 불교를 믿는 위구르인을 선생이나 공직자로 채용했다. 위구르인은 일반인으로부터 크게 존경받았고 몽골에 지대한 문화적 영향을 끼쳤다. 왕위에 있으면서 징기스칸은 또한 주요 불교 지도자들과 회의를 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후계자인 오게데이칸(Ogedei Khan)은 티벳의 라마승을 초대해 하라호룸(Kharakhorum)에서 불교의식을 배웠다. 그리고 여기서 샤머니즘이 결합되어 이러한 다신교적인 샤머니즘이 몽골의 전통적인 신앙이 되었다. 불교가 몽골의 정식 종교로 채택된 것은 쿠빌라 칸(Kubila Khan) 때의 일이다. 쿠빌라 칸은 불교를 원나라의 공식 종교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라마승 로디자틀산(Lodijaltsan)을 몽골 불교의 공식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라마승은 군대의 의무를 공식적으로 면제받았으며 세금도 면제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쿠빌라 칸의 노력에도 불교는 몽골에서 널리 받아들여지는 종교가 되지는 못했다. 불교는 상류층들의 종교였으며 티벳제국이 몰락함에 따라 불교도 그 지지기반을 잃고. 대신 샤머니즘이 16세기 중반부터 왕성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 황모파 불교(Yellow Hat sect Buddhism) 또는 라마교가 몽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라마교는 정치적 사회적 이유에서 몽골에 도입된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라마교는 몽골의 지배계층이 그들의 입지를 종교적 인물을 통해 강화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고, 둘째로, 티벳의 황모파 지지자들이 적모파에 대항해 몽골 지배층과 연합을 꾀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라마교가 몽골에 도입된 세번째 이유는 중국의 명나라에서 호전적인 몽골을 잠잠하게 만들 수단으로 라마교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1577, 알탄 칸(Altan Khan)은 티벳의 수장을 몽골로 초대했다. 알탄 칸은 몽골을 라마교로 하나로 통일하고자 했던 것이다. 알탄 칸은 불교신앙을 법률에 통합하여 샤머니즘의 관행을 제거하는 법적인 근거로 삼았다. 그의 이 같은 시도는 아브타이 사인 칸(Avtai Sain Khan) 에 의해 지속되었다. 아브타이 사인 칸은 1586년 제3 대 달라이 라마를 만났다. 이 만남에서 몽골 라마교의 중심으로 하라호름(Kharakhorum)에 주(Zuu)사원을 설립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라마교의 수장인 자나바자르(Zanabazar)의 지도아래 라마교 절과 학교가 생겨났다. 자나바자르는 상류 계급이나 일반인을 가리지 않고 몽골인들에게 라마교를 전하는 데 열심히 노력했다. 이후 200년간 몽골 인민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라마교는 점점 몽골 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또한 이 기간동안 승려들을 사원 밖으로 내보내 일하게 함으로써 몽골의 노동인구를 늘리기 위한 일환으로 소위 "좌익편향(Left Deviation)" (1929-1932)이라는 이름으로 대략 300개의 사원을 폐쇄했다. 일부 승려들은 처벌이 두려워 떠났다가 1932"새전환운동(New Turn movement)"의 시작으로 다시 사원으로 돌아왔다. 이 운동은 신앙, 교육, 선전을 지향한 운동이었다. 1936년 사원 수는 1929년에서 1932년 사이에 폐쇄당한 300개 이상의 사원을 포함해 모두 767개에 이르렀다. 그리고 "좌익 편향(Left Deviation)" 직후의 기간동안 늘어난 승려의 수는 10,000명 이상으로 전체 모두 100,000명 이상의 승려가 생겨났다. 당시 성인 라마승은 전체 남성 인구의 40%이상을 차지했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의 큰 문제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몽골 공산당은 "사원의 기관화"를 실시했다. 이 같은 정책을 실시한 까닭은 몽골 공산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세력이 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설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승려들은 사원을 떠나 세속의 생활로 돌아갈 것을 매우 강력히 권고 받았다. 1938년 약 20,000명의 승려들이 유목민이 되었으며 5,000명은 정부 지원 인원으로, 나머지 청년은 군대로, 어린이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머지 승려들은 1930년대 중반 사원 방화와 파괴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1937년은 몽골 역사상 최악의 한해로 기록된다. 수백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수천개의 불교서적이 불에 태워졌으며 100,000명 이상의 라마승들은 세속 생활로 돌아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이후 40년 이상, 몽골인들은 공포 속의 종교 생활을 했다. 나이든 신자들은 100여명의 승려가 남은 중심 사원 간단 사원에 나갔으며 혹은 고비 사원으로 갔다. 고비사원에는 약 40명의 승려들이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집에서만 종교생활을 했고 단체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중지되었다. 현재 독립국가인 몽골의 불교는 부흥을 맞이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사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가기도 하고 1930년대 억지로 세상으로 쫓겨 났던 많은 승려들이 다시 사원으로 돌아와 원래 살고자 했던 삶을 살고 있다. 1990, 20여명의 여성 신자들이 세운 여성들을 위한 사원이 울란바트르에 세워졌다. 그러나 종교 분쟁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다. 현재 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전도활동에 나섰으며 몽골인을 서구 종교로 개종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동거리 : 130 km

이동시간 : 3시간 30분

































바얀 자그(불타는 절벽)

8000만 년 전 공룡 서식지다. 세계 최대 공룡 화석 발굴지 투그르깅시레. 1920년대 공룡 화석을 찾아 이곳을 탐험한 미국인 고고학자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가 불타는 절벽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주인공 모델이기도 하다 이 지역은 흔히 외국인들에게 '몽골의 그랜드 캐년'으로 불리운다.

흙으로 된 바위와 빨간색 모래, 내려쬐는 태양 속에서 멋드러진 경치는 가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922년 수많은 공룡뼈와 공룡 알들의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 2번째로 많은 화석 발견지역이며 구석기 시대의 다양한 유물과 암각화 등이 발견된 고고학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바얀 자그는 온통 붉은색의 여러가지 모양의 흙바위 언덕들로 이루어져 있다.

높이는 대략 30~70 m 정도의 높이로 지금도 풍화작용으로 모습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이동거리 : 150 km

이동시간 : 3시간 50분

고비는 몽골어로 ‘거친 땅’이라는 뜻이다.

모래사막이 아닌 풀이 자라는 사막이다. 몽골과 중국에 걸쳐 있는 아시아에서 가장 넓은 사막으로 남서쪽에서 북동쪽으로 1610㎞, 남북 800㎞다. 그 거친 땅, 고비 평원 곳곳에는 부추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낙타 타기




모래로 빛은 예술품 홍그린 엘스는 '고비의 꽃'

고비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홍그린 엘스. 모래가 만든 거대한 예술품이다. 폭 12㎞, 길이 100㎞, 높이 80~300m. 오후 늦은 시간에 올라야 아름다운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해질녘 모래 언덕에 짙고 긴 그림자가 드리우고 노을이 물들기 때문이다. 완만해 보이는 모래산은 한 발 오르면 반 발 미끄러지고 높아질수록 네 발로 기어올라야 했다 거친 모래바람까지 불어 얼굴은 모래로 분칠하고 주머니마다 모래 가득. 카메라 렌즈는 삐걱거렸다. 어렵게 오른 능선에 주저앉아 바라보니 모래폭풍 속에 능선을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숭고해 보였다. 예상치 못한 고난을 맞은 이들의 처절한 모습이랄까. 그랬다. 지나고 보니 고난은 숭고하고 처절하고 아름다웠다.





 사막 오르기



















별 관찰하기



이동거리 : 260 km

이동시간 : 6시간







욜린암 독수리 계곡은 고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욜이라는 수염독수리가 서식하는 협곡이다. 계곡에 들어서면 더위를 식혀 주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 펼쳐진 푸른 초원과 야생화가 반겨 준다.
이곳은 원래 한여름에도 얼음 덩어리를 볼 수 있었는데 최근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얼음을 볼 수 없는 날이 점차 늘고 있다. 2시간여 욜린암 트레킹을 마치고 달란자그가드 출발했다. 여행기간 내내 대부분이 비포장도로고 이정표나 안내판도 보기 어렵다. 내비게이션도 없이 비포장 길을 기사의 눈썰미에 의존해 찾아가야 하는데 그 눈썰미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동거리 : 280 km

이동시간 : 6시간


돈도고브 아이막에는 박 가지링 촐로와 이흐 가지링 촐로가 있다.

박은 작다, 이흐는 크다, 촐로는 바위.

초원을 정신없이 달리다 보면 큰 바위 군락이 나타난다.

이흐 가지링 촐로는 돌이 많은 작은 산이라는 뜻이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 산들이 반경 30 km에 흩어져 장관을 이룬다. 해발 1560 m가 넘는 산맥이지만 몽골이라는 나라가 기본적으로 고원지대다 보니 실제로 보면 높지는 않다.


이흐 가즈링 촐로 화강암산/Ikh Gazriin chuluu 

돈드고비 아이막은 몽골의 남과 북쪽 기류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람이 가장 많이 부는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바람에 의해 생긴 웅장한 기암괴석과 진기하고 이국적인 풍경의 자연의 조각품 천국이다. 또한 몽골 화강암지대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여러 가지 모양의 40여 개의 동굴이 있다. 또는 화강암산 가운데 지름 20m의 야외 무대는 실내음향 상태와 같은 효과를 가진 최대의 음향 상태를 자랑한다고 한다.




























사슴돌











몽골의 그랜드캐니언 차강 소브라가/Tsagaan suvarga

돈드고비 아이막의 울지트군에 위치한 차강소브라가는 과거 바다로 있을 때 퇴적된 석회암이 융기한 후 오랜 세월동안 침식을 받아 만들어진 지형으로 바람과 물의 작용으로 무저닌 해저 퇴적층이 멀리에서 보면 마치 불탑처럼 보인다고 하여 지역주민들에 의해서 차강 소브라가((White Stupa, 하얀탑이란 뜻)라고 불린다.  웅장함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에 비할 수 없지만 직접 올라서고 만질 수 있는 자연이라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고비로 가는 길은 푸른 초원에서 시작된다. 남쪽 고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초원은 점점 생기를 잃어 가고, 마르고 척박해진다. 밤이 찾아오면 고비의 하늘은 별들의 세상이 된다. 또 하나의 아름다운 세상이 열린다. 카메라를 놓을 겨를이 없다. 그 밤 초승달마저 진 고비 하늘엔 지평선에서 자라난 은하수 나무가 초롱초롱 빛났다.


이동거리 : 390 km

이동시간 : 6시간 50분

징기스칸 동상

몽골 건국 800주년인 2006년에 건립을 시작하여 2010년 완공된 높이 10m 건물위에 세워지 40m의 징기스칸 동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기마상으로 기네스에 등재되어 있다.

징기스칸의 동상이 세워진 자리는 징기스칸이 사용하던 황금 채찍을 발견한 곳이라고하며 하늘로부터 몽골 민족을 이끄는 운ㅁㅇ을 받았음을 깨달은 장소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징기스칸 동상의 시선은 고향인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철길 건널목에 가축의 출입을 막는 쇠꼬챙이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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