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의 생애 최대 업적은 1915년에 독일 베를린의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에서 완성한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05년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물리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개념인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논의를 확장시켜 가속도의 경우도 다룰 수 있는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등속도를 가속도로 확장시키는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은 고전역학과 전자기학을 통합시키는 이론에서 중력에 관한 이론으로 발전하였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을 얻어내려는 아인슈타인의 의도는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무척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1907년 12월 아인슈타인은 중력장과 이에 상응하는 기준좌표계의 가속운동이 완전히 물리적으로 동등하다는 '등가 원리'를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는데, 이후 아인슈타인은 등속도 운동만이 아니라 가속운동에도 적용되는 일반 상대성이론을 완성하기 위한 머나먼 학문적 여정을 떠나게 된다. 아인슈타인은 1907년의 이 논문에서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분명하게 언급하는 한편, 아직은 완전한 형태가 아니고 초보적인 형태이지만 중력장 속에서 시간이 천천히 간다는 주장과 중력장 속에서 빛이 휘는 현상에 대한 논의를 시도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뒤 약 3년 반 동안 중력에 관한 논의를 더이상 진행시키지는 않았다.

1909년과 1910년 사이에 아인슈타인은 주로 광양자 가설에 대한 논의에 몰두하고 있었다. 1905년 아인슈타인이 제기한 광양자 가설은 광전효과를 설명하는 데에는 아주 성공적이었지만, 회절과 간섭 현상을 설명하는 데 광양자 가설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중견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1909년을 전후한 시기 아인슈타인은 빛의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을 찾기 위해 몰두하면서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그의 논의는 잠시 중단되게 되었다.

오랜 침묵 끝에 1911년 6월 아인슈타인은 프라하에서 중력에 관한 논의를 재개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선 강한 중력장 속에서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는 것, 다시 말해서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빛에 적색 편이가 생긴다는 것과 강한 중력장 부근에서 빛이 속도가 달라진다는 주장을 1907년보다 훨씬 정확한 형태로 전개했다. 즉 여기서는 특수 상대성이론의 전제가 되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빛의 속도가 강한 중력장 속에서 달라지기 때문에 호이헨스의 원리에 따라 강한 중력장 주변을 지날 때 빛이 휘게 되는 소위 중력 렌즈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다음 해 2월 아인슈타인은 역시 프라하에서 가변적인 빛의 속도를 바탕으로 해서 뉴턴의 중력이론과 푸아송 방정식에 상응하는 정역학적인 중력장 이론을 제안했다. 여기서 그는 로렌츠 변환이 중력을 취급하는 데 일반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과 중력장 방정식은 비선형 방정식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1912년을 전후해서 아인슈타인은 가속운동을 하는 물체가 경험하는 관성력은 전체 우주 우주의 다른 물체들의 양과 분포에 의해 결정되어진다는 소위 '마흐의 원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당시 마흐(Ernst Mach, 1838∼1916)는 원심력은 물체의 절대 회전의 결과라는 뉴턴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거대한 질량에 대한 상대적 회전이 원심력이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우주론을 전개할 때 이 마흐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년에 가서 마흐의 원리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열정은 점차로 식게 된다. 만년에 가서 아인슈타인은 관성이라는 것은 국소적인 측지 방정식(geodesic equation)에 내재되어 있으며, 우주 다른 곳의 물질의 존재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바뀐 것처럼 훗날 과학자들 사이에는 거대 규모의 우주적 전체론과 국소적 작용 원리(local-action principle) 사이에서 어떤 것을 더욱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등장하게 된다.

1912년 8월 연방공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취리히로 돌아온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학창시절 친구였으며 당시에는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의 수학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던 그로스만(Marcel Grossmann)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만들기 위한 공동작업을 시작했다. 그로스만과 공동작업을 하면서 아인슈타인은 중력을 시간-공간 구조와 연결시켰다. 즉 그들은 스칼라 함수로 표현되는 뉴턴의 퍼텐셜을 포기하고 대신 텐서로 표현되는 새로운 중력 방정식을 제안했던 것이다. 그로스만과의 공동작업에서 아인슈타인은 그가 1915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얻은 리만 기학학에 입각한 장 방정식에 아주 근접할 수 있는 단계까지 상대론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었다. 하지만 이때 아인슈타인은 리만 기하학이 뉴턴의 중력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유도해내지 못하자, 리만 기학학이 지니는 물리적 의미를 부정하면서 그 이론을 포기했다.

1913년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의 협동 작업에서 최종적인 중력장 방정식을 얻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전기를 집필한 에이브러험 페이스(Abraham Pais)는 당시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중력 장 방정식을 유도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텐서 방정식을 유일하게 결정하는 데에 필수적인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좌표 조건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나타나는 10개의 텐서 방정식을 풀 때, 질량-에너지 보존 법칙과 연관이 있는 비앙키 일치식(Bianchi identities) 때문에 10개의 자유도가 6개로 주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데, 이때 텐서 방정식의 자유도를 다시 10개로 만들어 주기 위해서 '조화 좌표 조건'(harmonic coordinate condition)과 같은 특정한 좌표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전자기학에서 벡터 퍼텐셜에 의해서 맥스웰 방정식을 표현할 때 '연속 방정식'(equation of continuity) 때문에 4개의 자유도를 가진 전자기 방정식이 자유도 1개를 상실하게 되는데, 이때 이것을 보상하기 위해서 로렌츠 게이지라는 것을 선택해서 다시 4개의 자유도를 만드는 방법과 유사한 것이다. 페이스는 1915년의 아인슈타인 논문에서는 1913년 논문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던 '조화 좌표 조건'에 관한 논의가 분명하게 등장하는 것을 근거로 해서, 1913년 당시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어서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을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리만 기하학에 의한 중력장 방정식을 얻으려는 노력을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현재 아인슈타인의 전집을 편집하고 있는 스태철(J. Stachel)과 특히 존 노튼(John Norton)은 아인슈타인이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근사적으로 얻지 못한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당시 아인슈타인이 생각한 정적인 중력장의 개념이 물리적으로 그릇된 추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노튼은 이런 주장을 뒤받침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이 그로스만과 공동 작업을 했을 시기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공책에 적혀 있는 내용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이 공책에는 아인슈타인이 좌표 조건에 관한 식을 손쉽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 나타나 있다. 사실 역사적인 설명을 할 때, 왜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왜 성공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설명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어내지 못했는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을지라도, 아인슈타인이 당시에 중력 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상당히 헤맨 것만은 분명하다. 20대 젊은 시절의 참신한 기지로 얻어낸 특수 상대성이론과는 달리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이론을 많은 실수와 오랜 방황의 끝에 힘겹게 얻어내었던 것이다.

1914년 4월 아인슈타인은 새로이 설립된 카이저 빌헬름 물리학 연구소의 소장직을 맡기 위해 취리히에서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새로운 연구 환경 속에서도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찾던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계속 찾아나갔다. 1915년 베를린에서 아인슈타인은 1913년 자신이 버렸던 리만 기하학의 방법론을 다시 채택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해 11월 25일 최종적인 장 방정식을 얻는 데 성공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뉴턴의 중력 방정식을 자신의 '등가원리', 에너지 보존 법칙, 물리적 인과성, 뉴턴의 중력 방정식으로의 근사적 접근 등을 만족하도록 확장하는 물리적 추론과 리만 기하학과 텐서 미적분학과 같은 수학적 방법의 도움으로 자신의 완전한 장 방정식을 얻어내었던 것이다.

상대성 이론의 괴팅겐식 전개과정

베른하르트 리만(Bernhard Riemann, 1826∼1866)은 1853년에 행한 교수자격 강연에서 나중에 리만 기하학으로 알려지게 되는 내용을 다루었다. 이 논문은 리만의 사후인 1867년 출판되었는데, 1916년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이런 관심을 반영하듯 이 논문은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인 1919년 헤르만 바일(Hermann Weyl, 1885∼1955)에 의해서 재 출판되게 된다. 하지만 괴팅겐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을 수학적인 불변이론으로 간주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자신들의 논의를 전개했다. 이것은 물리적 추론을 우선으로 했던 아인슈타인의 태도와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최후의 장 방정식을 얻기 5일 전인 11월 20일 괴팅겐 대학의 수학자인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1862∼1943)도 변분법이라는 수학적 방법을 이용해서 아인슈타인과 동일한 중력 장 방정식의 최종적인 식을 얻어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그해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아인슈타인이 괴팅겐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강연을 했었고, 이것에 자극을 받아 괴팅겐의 수학자들이 아인슈타인도 그때까지는 풀지 못했던 일반 상대론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이런 성과가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아인슈타인과는 전혀 다른 관점과 연구 전통 속에서 전자론과 중력의 문제를 접근하고 있었다.

우선 괴팅겐 수학자들은 최소작용의 법칙에 바탕을 둔 변분법의 원리와 사영기하학에 바탕을 둔 변환군론에 이미 보편적인 물리법칙이 내재되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도 괴팅겐의 수학교수였던 리만이 발전시킨 비유크리드 기하학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었던 이론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괴팅겐의 수학자들은 전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물리적인 개념보다는 수학적 측면을 더욱 중시하는 연구 성향을 보였다.

또한 괴팅겐 학파는 비유크리드 기하학과 군론의 일종인 불변이론 분야에서 이룩한 그들의 수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항상 중력과 전자기력을 동시에 다루었다. 이미 1908년에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1864∼1909)는 물질과 에테르 사이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했던 로렌츠의 주장을 비판한 에밀 콘(Emil Cohn)의 입장을 받아들여서 역학의 문제와 전자기학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한 상대론적인 비선형 장방정식을 시도했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광양자 가설과 연관되어 발전해서 파동이론에서 필수불가결한 에테르의 개념은 철저하게 거부되었지만,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광양자 가설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발전했으며, 오히려 연속체론적인 자연기술을 선호하게 되면서 물질과 에테르와의 구분을 비판했던 콘의 입장이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1909년 민코프스키가 맹장 수술 뒤에 갑자기 죽자, 민코프스키가 맡았던 물리학 분야의 연구는 힐베르트가 떠맡게 되었다. 민코프스키의 연구 프로그램을 떠맡은 힐베르트는 중력과 전자기력을 새로운 비선형 전자기 방정식에 의해서 통일하려고 했던 미(Gustav Mie)의 이론에 주목하였고, 이 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장 방정식을 얻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미의 물질이론은 괴팅겐 출신인 헤르만 바일이 고안한 게이지 변환(gauge transformation)과 괴팅겐 학자들이 선호했던 연속체론과 결합되면서 전자기력과 중력을 통일하려는 바일의 통일장 이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괴팅겐을 방문해서 민코프스키와 교류를 가졌으며, 민코프스키가 죽은 뒤에는 그가 추구하던 중력 이론을 발전시킨 필란드의 물리학자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m)의 논의도 아인슈타인과는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즉, 1913년에 발표된 노르드스트룀의 중력이론에 의하면, 중력 현상을 다룰 때에도 특수 상대성이론은 일반적인 유효성을 지녔으며, 중력장 속에서 중력 작용은 항상 빛의 속도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속도로 전달된다. 또한 아인슈타인이 가속운동에 관한 상대론에서 바탕으로 했던 등가원리는 부정되었고,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도 빛은 휘지 않고 직진하며, 중력 퍼텐셜은 텐서량이 아닌 스칼라 양으로 주어졌다. 이 노르드스트롬의 중력이론이 당시에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과 쌍벽을 이루는 중력이론으로서 어느 이론이 경험적 사실과 부합되느냐가 과학자들의 관심거리였다.

일반 상대성이론의 검증과 수용

1916년 3월 20일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이론의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을 검증할 수 있는 세 가지 예들, 즉 수성의 근일점이 1세기에 43" 만큼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 빛의 중력장 속에서 휜다는 것, 중력장 속에서의 빛의 적색 편이가 일어난다는 것을 제시했다. 수성의 근일점이 궤도상에서 돈다는 것은 이미 19세기 중반에 프랑스의 천문학자 르베리에(Urbain Jean Joseph Leverrier, 1811∼1877)가 관측했었고, 따라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이론이 이 르베리에의 관측 결과와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 강한 중력장을 지날 때 생기는 빛의 적색 편이와 굴절 현상은 아직 관측되고 있지 않았다.

태양주변에서 빛이 휘는 현상은 제1차세계대전 직후인 1919년 개기일식 때 영국의 일식 관측대에 의해 처음으로 관측되었다. 사실 영국에서는 20세기초의 전자기학 분야에서 에테르 이론이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특수 상대성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에도 영국 과학자들은 상대성이론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적대적이었며, 심지어는 냉소적이기까지 했었다. 더욱이 1914년에서 1918년까지는 전쟁 중이어서 독일의 학술 잡지가 영국으로 올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영국 과학자들은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내용을 거의 알지 못했다. 영국에서 일반 상대성이론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왕립 천문학회의 간사였던 에딩턴(Arthur Stanley Eddington, 1882∼1944)이었다. 그는 전쟁 중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로부터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입수한 뒤에 1918년 일반 상대성이론에 관한 논문을 영국 물리학회에 기고했다.

에딩턴은 영국 왕립 천문학자로서 영국 천문학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다이슨(Frank Watson Dyson)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있었다. 다이슨은 상대성이론의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에딩턴으로부터 상대성이론에 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는데, 1919년 일식 때 아인슈타인의 예언을 검증하기 위해 관측대를 파견하자고 처음으로 제안했던 인물이 바로 다이슨이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 소위 '아인슈타인 효과'를 확인하기 위한 일식 관측대가 조직되게 되었고, 그 해 5월 29일 두 팀의 일식 관측대들은 아인슈타인 효과의 존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초의 사진들을 얻어내었다. 관측대가 얻은 관측 결과는 실제로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실하게 입증하기에는 너무 오차가 커서 논란의 여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9년 11월 6일 긴급 소집한 영국 왕립학회와 왕립 천문학회 합동 회의에서는 관측 결과를 검토한 끝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 확증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데에는 영국 천문학을 대표하는 다이슨과 특히 에딩턴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써 당시에 대립하고 있었던 노르드스트룀과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승리한 것으로 결판이 났으며, 이에 따라 아인슈타인은 다시금 과학계의 영웅이 되었다. 더구나 11월 7일에는 런던 {타임스}지가 이 내용을 '과학의 혁명/새로운 우주론/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식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에 따라 과학계에서만 알려졌던 아인슈타인은 일약 대중적인 유명 인사가 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19년 11월 7일 20세기를 통해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될 아인슈타인의 신화는 시작되었던 것이다.

한편 중력에 관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이 나온 뒤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전자기 현상과 중력 현상을 포괄하는 새로운 통일장 이론을 계속 갈구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과 전자기 현상을 통일하려는 본격적인 시도는 1918년 괴팅겐의 수학자 헤르만 바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바일은 이 통일장 이론에서 전자를 공간에 연속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물질로 보고 오늘날 우리가 게이지 변환이라고 부르는 기법을 활용해서 리만 텐서를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고 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은 헤르만 바일의 통일장 이론을 거부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도 평생 이 문제에 매달렸지만 죽을 때까지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이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하려는 통일장 이론을 얻어내려고 시도했던 것은 그가 광양자 가설의 통계적 성격을 극복하려고 했던 노력과 연결을 가지고 있다. 1917년 아인슈타인은 요즈음 레이저의 원리를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자연 복사와 유도 복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광양자의 방출이 통계적으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이것을 자신이 전개하고 있는 양자론에 내재하고 있는 커다란 약점으로서 아직 광양자에 관한 논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서 아인슈타인은 1923년 상대론적인 장방정식을 바탕으로 해서 하나의 상위 결정된(berbestimmten) 미분방정식 체계를 유도해보려고 노력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는 연속체 가설과 결정론적 기술이 유지되었는데, 여기에는 양자론에서 나타나는 비결정론적 성격도 상위 결정된 미분방정식 체계에 의해 해결되기를 바라는 아인슈타인의 바램이 담겨 있었다.

1933년 나치가 등장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그해 3월 28일 베를린 아카데미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미국에서 아인슈타인은 과학자로서의 활동보다는 과학 정책이나 평화 운동 등 정치적인 차원에서 더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39년 8월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 부시 등과 함께 나치가 원자탄을 만들지 모른다고 경고하는 서한을 루즈벨트에게 보냈다. 이 건의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39년 10월 핵문제를 자문할 기관인 '우라늄 위원회'를 구성했고, 결국은 맨해튼 계획이라는 미국의 원자탄 개발 계획이 추진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원자탄이 개발된 뒤에 아인슈타인은 반대로 미소 강대국 사이에서 벌어지는 핵무기 개발 경쟁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으며, 러셀과 함께 핵의 위협으로부터 세계를 보호할 세계 정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인 움직임도 보였다. 그는 1950년 1월 31일 트루먼 대통령이 수폭개발을 결정했을 때에도 이 계획에 대해 강하게 반대했으며, 죽는 순간까지 세계 평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태인이었던 아인슈타인 역시 시온주의를 지지했지만, 1952년 이스라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달라는 제안은 거절했다.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는 데 서명한 편지를 버틀런드 러셀에게 보낸 뒤 1주일 후인 1955년 4월 18일 오전 1시 15분 아인슈타인은 세상을 떠났다.

REFERENCES

[1] A. Einstein, Jahrbuch der Radioaktivitt und Elektronik 4, 411 (1907).
[2] A. Einstein, Annalen der Physik 35, 898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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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A. Einstein and M. Grossmann, Zeitschrift fr Mathematik und Physik 62, 225 (1913).
[5] A. Einstein, Annalen der Physik 49, 769 (1916).
[6] A. Einstein, "Bietet die Feldtheorie Mglichkeiten fr die Lsung des Quantenproblems?," Sitzungsberichte der preuß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 (1923), pp. 359-364.
[7]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 The Science and the Life of Albert Einstein (Clarendon Press, Oxford, 1982).
[8] John Norton,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and Biological Sciences 14, 253 (1983).
[9] John Earman and Clark Glymour, Historical Studies in the Physical and Biological Sciences 11, 49 (1980).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10년을 전후해서 물리학계에서는 자연에 존재하는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둘러싸고 두 물리학자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 이후 여기에 참가했던 두 물리학자들은 과학계에서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되었다. 이 논쟁에 참가했던 두 논객 중 한 사람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으나, 다른 한 사람은 전자의 최소 전하량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정신적으로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승리의 주인공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로버트 밀리컨(Robert A. Millikan)이었으며, 패배자로 낙인찍히게 되는 인물이 바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물리학자인 펠릭스 에렌하프트(Felix Ehrenhaft)였다.

밀리컨과 에렌하프트 논쟁은 여러 측면에서 우리의 흥미를 끌고 있다. 우선 밀리컨의 유적실험은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아주 잘 알려진 실험인데 어떻게 해서 중견 실험과학자들 사이에 이렇게 커다란 이견이 나올 수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졌다. 물론 실제로 밀리컨의 유적실험을 해본 사람들은 밀리컨의 실험이 생각한 것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편 20세기 후반에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분수에 해당하는 전하량을 가진 것으로 가정하는 소위 쿼크 가설이 나오면서 많은 사람들은 농담삼아 혹시 에렌하프트가 당시에 이 쿼크의 전하량을 측정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밀리컨의 교육 과정

1868년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태어난 밀리컨은 1886년 오버린 칼리지에 입학했다. 하지만 밀리컨 자신은 처음에 물리학에 그다지 커다란 흥미를 갖지 못했다. 2학년 말에 밀리컨이 그리스어를 잘 하는 것을 본 한 교수가 밀리컨에게 자신이 물리학 개론을 가르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 것이 인연이 되어 밀리컨은 처음으로 물리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91년 오버린 칼리지를 졸업한 밀리컨은 그곳에서 독학으로 물리학을 공부하면서 예비 학생들에게 물리학을 가르쳤다. 1893년 컬럼비아 대학에 유일한 물리학과 대학원생이자 장학생으로 입학한 밀리컨은 그곳에서 마이클 푸핀(Michael I. Pupin)에게 주로 물리학에 필요한 수학적 테크닉을 배웠다. 1894년 시카고에서 마이컬슨을 만난 밀리컨은 그곳에서 여름 동안 실험 테크닉을 배웠고, 마이컬슨이 정해준 학위 제목으로 1895년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1895년 5월 더 많은 공부를 하기 위해 유럽으로 떠난 밀리컨은 당시 물리학계를 뒤흔들었던 뢴트겐의 X-선 발견, 앙리 베크렐의 방사선 발견 등 물리학계의 새로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파리에서 밀리컨은 푸앵카레의 강의를 들었으며, 베를린에서는 막스 플랑크의 강의를 수강했고, 괴팅겐에서는 네른스트와 함께 연구를 했다. 1896년 마이컬슨의 초청으로 시카고 대학 물리학과 조교가 된 밀리컨은 처음에는 이곳에서 주로 물리학 커리큘럼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다양한 교재와 실험 매뉴얼을 집필했다. 1907년 주로 교육 분야에서 이룩한 탁월한 업적 덕분에 부교수로 승진한 밀리컨은 1908년부터는 교육용 교재 집필보다는 순수한 기초 연구에 매진해서 마침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 유적실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밀리컨이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게 된 데에는 시카고 대학에서 마이컬슨이 이룩한 기초 상수에 대한 정확한 측정(precision measurement)의 전통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밀리컨은 1921년 시카고 대학에서 캘리포니아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으로 옮길 때까지 마이컬슨의 뒤를 이어 이곳 시카고 대학의 라이어슨 연구소(Ryerson Laboratory)를 미국 물리학의 중심지로 이끌었으며, 시카고 대학에서의 이런 물리학 연구전통은 밀리컨의 후임인 컴프턴(Arthur H. Compton)에 의해서 계속 이어졌다.

초기의 전자 전하량 측정 실험

밀리컨이 전자의 전하량을 측정하기 이전에 이미 몇몇 물리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전자의 전하량을 측정했었다. 1903년 J. J. 톰슨의 학생이었던 H. A. 윌슨은 과거 톰슨이 사용했던 수증기를 이용한 안개상자 방법을 개량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때 윌슨이 사용했던 방법은 갑작스런 팽창에 의해 이온화된 안개상자에 생성되는 구름이 중력의 영향 아래 하강하는 비율을 측정한 뒤, 이와 유사한 구름에 방향이 반대인 전장을 가해서 구름 방울의 하강 속도 비율을 비교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윌슨은 전자의 하전량으로 2.0×10-10(esu)에서 4.4×10-10에 걸치는 11개의 값을 측정해서 평균 3.1×10-10의 값을 얻었는데, 같은 해 J. J. 톰슨도 유사한 방법을 사용해서 3.4×10-10의 값을 얻었다.

1903년 당시 윌슨이 측정한 전하량 값은 상당히 편차가 심했고, 밀리컨은 이것이 X-선 관에 의한 이온화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1907년부터 밀리컨은 그의 학생 베거먼(Louis Begeman)과 함께 X-선 대신 라듐을 이온화 장치로 사용해서 윌슨의 방법을 개량했다. 이 방법을 이용해서 1908년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으로 3.66에서 4.37에 걸친 값을 얻었는데, 그 평균은 4.06×10-10이었다. 1909년에 들어와서도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하기 위한 자신의 실험 방법을 계속 개량해나갔다. 우선 윌슨의 실험 장치와 그 동안 그와 베거먼이 사용한 실험 장치에서는 물방울을 관찰하는 동안 물방울이 기화한다는 문제점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한계점을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추구되었다. 또한 그 동안의 실험 장치들에서는 중력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과 전기장을 함께 가했을 때 떨어지는 물방울의 질량이 동일한 것으로 가정하고 있었는데, 이 점을 보완하는 것도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는 극복해야만 할 과제였다. 밀리컨은 실험 조건을 다양화하기 위해 물 이외에 알코올을 동시에 실험에 활용해보았다. 물과 알코올 방울 하강 실험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강속도, 반경, 밀도, 유체의 점성도와 관련된 스톡스 법칙의 유효성을 얼마나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물로 포화된 공기와 알코올로 포화된 공기 중에서 점성도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일이었다. 또한 정전기장 내에서 단일하게 하전된 방울들을 만들어내는 것도 실험의 정확도를 유지하는 데 무척 중요한 요소였다.

1909년 가을에 물방울과 알코올 방울로 실험을 한 밀리컨은 기본 하전량의 2배에서 6배에 해당하는 전하량을 측정했는데, 이때 그가 얻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 값은 4.65×10-10이었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을 그 동안 다른 방법으로 얻은 전자의 기본 하전량 측정값과 비교해보았다. 1906년 막스 플랑크가 흑체 복사 이론에서 실험치로부터 이론적으로 얻어낸 값은 4.69×10-10이었으며, 1908년 러더퍼드가 전기적 방법으로 알파입자의 하전량을 측정해서 얻은 값은 4.65×10-10이었다. 또한 1908년 섬광계수기 방법으로 레게너(Erich Regener)가 얻은 값은 4.79×10-10이었으며, 베거먼이 윌슨의 방법으로 밀리컨과 같은 연구소에서 얻은 값은 4.67×10-10이었다. 이런 일련의 값을 종합하여 밀리컨이 얻은 평균값은 4.69×10-10이었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이 다른 사람들이 얻은 값과 오차의 한계 내에서 일치하는 것에 고무되어 물질의 원자론적 견해에 대해 보다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되었으며, 기본적인 하전량이 존재한다는 신념을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에렌하프트의 반론

밀리컨이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하는 실험을 계속 개량하고 있는 동안 유럽 대륙에서도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곧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존재 유무를 놓고 밀리컨과 평생 동안 논쟁을 하게 되는 펠릭스 에렌하프트였다. 에렌하프트는 밀리컨에 비해 11살 아래의 젊은 과학자였지만, 적어도 과학적 연구 경력과 명성에 있어서는 밀리컨에 비해 훨씬 앞선 인물이었다. 1879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에렌하프트는 빈의 대학과 공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다. 1903년부터 빈대학에서 조교와 사강사로 지내면서 그는 펠릭스 엑스너(Felix Exner), 프리드리히 하젠외를(Friedrich Hasenhrl), 슈테판 마이어(Stefan Meyer), 에곤 폰 슈와이들러(Egon von Schweidler), 에른스트 레흐너(Ernst Lechner) 등 빈 대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저명한 과학자들과 교류를 가졌다.

1909년 에렌하프트는 밀리컨과 유사한 방법으로 전자의 '기본양자'를 측정해서 4.6×10-10의 값을 얻었다. 하지만 밀리컨이 전자의 기본 하전량을 측정해서 이를 발표한 것을 본 에렌하프트은 1910년 4월 갑자기 자신이 전자의 하전량보다 더 작은 전하량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1910년 5월 12일 에렌하프트는 빈 아카데미에서 발표한 논문에서 '전자 이하의 하전입자'(subelectron)하는 단어를 만들어냈는데, 이 논문에서 그는 자연계에서 나누어지지 않는 하전량은 1× 10-10(esu) 혹은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그는 금 입자의 전체 하전량이 5×10-11에서 1.75×10-10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에렌하프트와 그의 학생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자의 절반, 50분의 1, 100분의 1, 심지어는 1000분의 1의 양까지 발견했다. 에렌하프트가 이렇게 전자의 기본 하전량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 이면에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를 중심으로 해서 전개되었던 반원자론적 분위기가 부분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었다. 경험비판론이라는 상대주의적 지식관을 주장했던 마흐는 죽을 때까지 원자의 존재를 부정했다.

에렌하프트가 그의 생애 동안 논쟁을 벌인 것은 단지 전자의 기본 하전량 문제 뿐만이 아니었다. 1930년대 중반 에렌하프트는 자신이 자기단극자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한번 학계에서 논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결국 에렌하프트의 생애는 복잡한 물리 현상의 해석과 연관된 미해결의 논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12년 빈대학의 부교수가 된 에렌하프트는 1920년 정교수가 되어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 뒤 그는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미국으로 잠시 망명했고, 전쟁이 끝난 뒤 빈 대학으로 돌아와 교수 생활을 계속하다가 1952년 사망했다.

밀리컨의 유적 실험

에렌하프트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하전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 개선해나갔다. 이미 밀리컨은 1909년 가을부터 1910년 봄 사이에 물이나 알코올 이외에 기름방울에 의한 하전량 측정 실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동차 엔진오일로 사용되는 기름은 상대적으로 휘발성이 낮기 때문에 기름 방울이 오르내리는 것을 30분에서 4시간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 동안 측정할 수 있었다. 물 이외에 기름 방울을 선택한 것은 밀리컨이 기본전하량을 측정하기 위한 실험에서 커다란 전환점을 이룬다.

한편 밀리컨은 기름 방울의 지름이 기체 분자의 평균 행정 거리의 크기에 가까워질 경우에는 기존에 물리학자들이 사용하던 스톡스 법칙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밀리컨은 기존의 스톡스의 법칙에 커닝엄의 이론을 이용해서 교정을 한 소위 스톡스-커닝엄(Stokes-Cunningham) 법칙을 채용했다. 이 새로운 법칙에서는 기체 분자의 행정거리를 방울의 반경으로 나눈 항이 1차 교정 항으로 추가되었다. 이외에도 전하의 하전량을 정확히 계산하기 위해서는 공기의 점성도(coefficient of viscosity)를 아주 정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많은 오차 요소를 제거해나간 끝에 마침내 1913년 6월 2일 밀리컨은 4년에 걸친 그의 실험의 결과를 『피지컬 리뷰』에 발표했다. 당시에 그가 발표했던 기본하전량은 4.774 ± .009 × 10-10(esu)였다. 밀리컨은 자신이 얻은 값을 페랭(Jean Baptiste Perrin) 등이 브라운 운동을 이용해서 얻은 값, 플랑크의 열복사 이론에서 얻은 값, 레게너가 방사선 방법으로 얻은 값과 비교해서 이들의 평균값이 기름 방울 방법에 의해 얻은 값의 오차의 한계 내에 있음을 보였다. 더 나아가 밀리컨은 전자의 기본 전하량이 정확하게 측정됨으로써 분자의 기체상수, 플랑크 상수, 볼츠만 상수 물리학에 기본이 되는 여러 기초 상수들도 새롭게 계산될 수 있었다.

밀리컨과 광전 효과 실험

유적 실험이 마무리되는 동안 밀리컨은 그 동안 자신이 미루어 놓았던 광전 효과에 관한 실험에 새롭게 착수하였다.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은 밀리컨이 이미 1906년부터 하던 실험이었는데, 당시에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논문도 알지 못했으며, 실험 자체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12년 이제는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대한 논문을 알게된 밀리컨은 광전 효과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당시까지 입사선의 진동수와 광전자의 속도와 관련된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한 사람은 아직 없었다. 오히려 1914년 독일의 람사우어(Carl Ramsauer)가 측정한 실험에 의하면 입자 진동수에 따르는 광전자의 최대 에너지가 존재하지 않고, 속도 분포도 입사광의 파장과는 독립적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밀리컨은 우선 고압 수정-수은 램프를 이용해서 자외선을 만들고 그것을 나트륨과 리튬과 같은 알칼리 금속에 가했다. 또한 그는 입사된 복사선의 영역에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 산화구리망으로 된 패러데이 상자(Faraday cage)를 채용하고 금속을 신선하게 유지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서 광전류의 세기를 높여나갔다. 1915년까지의 주의 깊은 실험을 통해서 밀리컨은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의 유효성을 실험적으로 분명하게 입증해낼 수 있었다. 그는 입사광의 진동수와 차단 퍼텐셜 사이에 선형적 관계가 있음을 분명하게 그래프를 통해 보여주었으며, 이 선의 기울기가 플랑크 상수를 전자의 하전량과 나눈 값이라는 것도 확인함으로써 플랑크 상수를 아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방정식이 나타내는 다양한 모습을 다각도로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자체는 믿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이 빛의 파동론을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즉 그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배제한 채로 아인슈타인의 광전효과에 관한 방정식만을 실험적으로 입증했던 것이다.

밀리컨과 칼텍

1917년 미국과 독일의 외교 관계가 단절되면서 미국이 전쟁에 돌입하게 되자 밀리컨은 국립연구회의(National Research Council)의 부의장 겸 연구책임자를 맡아 미국에서 국방 과학에 대한 연구를 지휘했다. 국립연구회의는 제1차세계대전 중에 조지 헤일(George E. Hale)이 국방연구를 도울 목적으로 윌슨 대통령을 설득해서 만든 국립과학아카데미 소속의 민간단체였는데, 전쟁 중 밀리컨은 음파를 사용해서 잠수함의 위치를 발견하는 잠수함 탐지기 개발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도 밀리컨은 헤일의 초청으로 캘리포니아공과대학, 즉 칼텍으로 자리를 옮겨 짧은 시간 내에 이 대학을 미국에서 가장 우수한 소수정예의 공과대학으로 육성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칼텍은 1917년 이름이 바뀌기까지 '스룹공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한해에 약 10여명의 엔지니어를 배출하는 건물 한 채 뿐인 작은 학교였다. 천체물리학자 조지 헤일은 이 허름한 지방 대학에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을 적극 유치해 이 학교를 세계적인 대학으로 변화시켰다. 카네기재단의 기금으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천문대였던 윌슨산 천문대를 설립한 바 있었던 헤일은 윌슨산 천문대와 협동적 연구를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스룹공과대학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위해 물리학, 화학, 천문학 사이의 협동적 연구를 추구한 헤일은 MIT에 있던 노이즈와 시카고에 있던 로버트 밀리컨을 캘리포니아로 불러오려고 노력했다.

노이즈의 경우는 MIT 대학 내에서 불화가 있어 칼텍으로 왔기 때문에 헤일은 노이즈를 비교적 쉽게 초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적 실험과 광전효과 실험으로 이미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밀리컨을 칼텍으로 초빙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헤일은 밀리컨을 데려오기 위해 미국 교수 임용사상 보기 드문 아주 방대한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 밀리컨에게 대학 운영위원회(Executive Council)의 의장직과 노먼브리지물리학연구소(Norman Bridge Laboratory of Physics) 소장직을 맡겼으며, 당시 다른 대학 최고급 교수의 두배에 해당하는 초특급 봉급도 주었다. 1921년 가을 밀리컨은 마침내 시카고 대학에서 칼텍으로 옮겨오게 된다. 칼텍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아 밀리컨은 1923년 전자의 기본 하전량 및 광전 효과에 대한 실험에 대한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해 새롭게 출발한 칼텍에 커다란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자신도 미국을 대표하는 과학자로서 확고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밀리컨은 직책상 대학운영위원회 의장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의 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업무를 수행했다. 우선 그는 대학의 재정 확충과 기금 확보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예를 들어 그는 남캘리포니아 유지 약 100명으로 구성되는 '칼텍 후원회'를 조직했는데, 이 후원회의 역할은 1년에 약 1천 달러씩 10년 동안 후원해주면 대학에서는 그 보상으로 대학의 강연을 포함한 각종 행사들에 그 사람들을 초청해 주는 것이었다. 이 후원회는 불과 1년만에 정원을 다 모을 수 있었는데, 이들이 낸 매년 10만 달러의 기금은 약 2백만 달러의 증여에 해당하는 역할을 했다.

칼텍으로 옮겨온 뒤 밀리컨은 우수한 박사과정 학생과 박사후연구원들을 자기 주변에 모아 빠른 시일 내에 칼텍을 미국 내의 대표적인 연구중심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저온에서 금속 전자의 방출에 대한 연구를 했던 아이링(Carl F. Eyring)과 낮은 원자번호 원소들의 자외선 스펙트럼에 대한 철저한 연구를 해서 곧이어 등장하는 전자 스핀 개념으로 설명되는 다양한 실험적 정보를 얻어냈던 바원(Ira S. Bowen) 등은 모두 대학원생 시절에 밀리컨과 함께 연구를 했던 과학자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밀리컨은 칼텍에서 '우주선'(cosmic ray)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우선 '우주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밀리컨이 만들어낸 말이었다. 1925년 여름 밀리컨은 캘리포니아의 산중에 있는 뮤어호수(Muir Lake)와 애로우헤드호수(Lake Arrowhead)에서 깊이에 따른 이온화의 변화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이온화상자를 이용해 이 두 호수에서의 이온화강도를 측정한 밀리컨은 두 호수에서 깊이에 상관없이 이온화강도가 거의 같음을 발견했다. 이것으로 그는 대기를 이온화시키는 복사선이 지구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서 오는 '우주선'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계속된 실험에서 밀리컨은 '우주선'이 감마선보다도 더욱 강력한 에너지를 가졌다는 것을 확인했고, 이런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고 믿게 된 밀리컨은 우주선인 광자가 지구와 충돌해서 수소, 헬륨, 산소, 규소 등의 원소가 형성되었다는 가설을 제안했다. 원자들이 빛에서 생성되었다는 밀리컨의 주장은 그의 종교적 신념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당시 과학계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우주선이 광자로 되어 있다는 밀리컨의 주장은 1932년 아서 컴프턴이 우주선이 하전입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우주선의 위도효과(lattitude effect)를 발견함으로써 마침내 반박되었다.

컴프턴을 비롯한 많은 과학자들이 위도효과를 확인했지만, 밀리컨 자신은 이 위도효과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역시 1920년대 말부터 1932년까지 위도효과를 확인하려는 실험을 했었지만, 그 자신은 이런 효과를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밀리컨이 위도효과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밀리컨 자신이 우주선이 광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 뿐만이 아니라 밀리컨이 있었던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근교가 위치상 위도효과를 발견하기에는 좋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참담한 실패 이후에는 다시 엄청난 성공의 소식도 들려왔다. 밀리컨 자신은 위도효과에 관련한 우주선 연구에서 실패했지만, 칼텍에서 밀리컨과 함께 연구하던 앤더슨(Carl Anderson)은 이 우주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1932년 양전자(positron)를 발견해 칼텍 출신 학생으로는 최초로 1936년 노벨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밀리컨은 과학 발전에 있어서 혁명적인 변화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더욱 중요시하는 보수적 유형의 물리학자였다. 그는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과 같은 혁명적 이론이 출현하는 것을 과학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실험 장치를 개선하고 물리량을 될 수 있으면 정확하게 측정하는 과정이 곧 과학 발전에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생각했다. 밀리컨이 지닌 이런 과학관은 그가 행한 다양한 대중 강연과 과학사 관련 저술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제2차세계대전 중 밀리컨은 칼텍을 학문적 목적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전환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전쟁 중에 이미 많은 행정적인 업무를 젊은 보직 교수들에게 인계하기 시작한 밀리컨은 1946년 대학교수직과 대학 운영위원회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 밀리컨은 과학과 종교와의 관계와 같은 대중적인 주제로 일반인들을 상대로 강연을 계속하다가 1953년 칼텍이 위치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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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스위스 베른의 젊은 특허국 직원이었던 26세의 무명의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시간과 공간에 관한 새로운 관점, 즉 상대성이론을 제창해서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모습을 출현시켰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살펴보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19세기를 통해서 부상되었던 고전 역학과 고전 전자기학 사이에서의 문제점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타났다. 19세기 후반기에 성장한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현재 우리는 움직이는 물체의 전자기 현상을 설명할 때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의 형태를 바꾸지 않고 적용하고 있으나, 19세기에는 맥스웰 방정식은 다양한 전자기 방정식 가운데 단지 하나에 불과했다. 그런데 고전 전자기 법칙들은 고전 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던 갈릴레오 변환에 대해서 불변이 아니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즉 당시의 전자기 법칙들은 서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관찰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서로 불변으로 유지되지 않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전자기학과 상대성 이론의 맹아

하지만 19세기를 통해서 이것을 문제로 느끼고 새로운 해결점을 제시하려고 했던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19세기에 대다수의 물리학자들은 우주에 꽉 차 있으며 압축이 되지 않는 완전 탄성체인 가상의 물질 에테르를 가정하여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에테르는 빛이 파동이라는 것을 믿고 있었던 19세기 과학자들에게는 꼭 필요한 가상의 물질이었다. 왜냐하면 지구와 태양 사이와 같이 매질이 존재하지 않는 진공 중에서는 파동인 빛이 전파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맥스웰 이후에 활동한 과학자들은 이 에테르의 성질에 대해서 저마다의 다양한 논의를 전개했고, 이에 따라 전자기학 분야에서는 수많은 전자론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미 1851년 프랑스의 과학자 피조(Armand Hippolyte Fizeau)는 움직이는 유체 속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고전 역학적인 속도 합성 공식에서 벗어나는 현상을 관찰한 바가 있었다. 이것 역시 갈릴레오 변환에 대해서 불변으로 유지되지 않는 예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1887년 미국의 마이컬슨(Albert Abraham Michelson)과 몰리(Edward Morley)는 자신들이 고안했던 간섭계를 이용해서 지구의 운동과 에테르와의 상호작용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지구 운동이 에테르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어떤 증거도 얻지 못했다. 당시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고전 전자기학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인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는 마이컬슨-몰리의 실험적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1892년 지구의 운동 방향으로 물체가 제한된 범위 내에서 수축한다는 하나의 미봉가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19세기 중반 이후 과학자들은 강체역학이나 유체역학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유비의 일종으로서 고전역학적인 기계적 모형을 사용하여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고전 전자기 법칙을 정립시킨 맥스웰은 전자기장을 유체의 흐름을 나타내는 편미분 방정식에 의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했다. 전자기 현상을 고전역학적 모형에 의해 설명하려던 견해는 맥스웰 이후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톰슨(J.J. Thomson) 등에 의해서도 공유되었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1897년 톰슨이 음극선의 하전량과 질량 사이의 비례 관계를 밝힌 실험을 계기로 전자기 현상을 역학적인 원리에 의해서 설명하려는 믿음은 서서히 약화되었다. 즉 카우프만(Walter Kaufmann)과 레나르트(Philipp Lenard) 등과 같은 실험 물리학자들은 톰슨의 실험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전자의 속도가 빛의 속도의 1/3에서 1/30 정도로 빠르게 달릴 때 전자의 외견상의 질량이 증가하는 현상을 관찰하게 되었다. 이후 고전역학적 개념이었던 질량이 전자기적인 현상으로부터 유도될 수 있는 가능성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었고, 이에 따라 물리학을 뉴턴의 역학이 아니라 전자기 현상으로 통일하려는 전자기적 세계관이 서서히 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0년 프랑스의 푸앵카레(Henri Poincar)가 전자기 방정식이 뉴턴의 운동 법칙인 작용-반작용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1901년에는 빌헬름 빈이 역학을 전자기적인 토대 위에서 재 규정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면서 전자기적 세계관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더욱이 푸앵카레는 포인팅 벡터에 의해서 표현되는 '전자기적 운동량'과 '전자기적 질량'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는데, 괴팅겐의 사강사였던 막스 아브라함(Max Abraham)은 이런 생각을 더욱 발전시켜서 전자가 강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고전전자기학의 체계 내에서 속도의 증가에 따르는 전자의 질량의 변화를 수학적으로 유도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유도한 식은 후일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유도한 식과는 2차항의 10분의 1정도만 차이가 나는 것으로서 1906년에 행한 카우프만의 실험에서는 아인슈타인의 결과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계산 결과가 실험적으로 일치하는 것으로 판명되기도 했다.

한편 수학을 자연과학과 공학에 응용하는 데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펠릭스 클라인(Felix Klein), 다비드 힐베르트(David Hilbert), 헤르만 민코프스키(Hermann Minkowski) 등을 비롯한 괴팅겐의 수학자들도 로렌츠가 발전시켰던 새로운 전자론에서 자신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은 물리학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수학을 많이 사용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물리학의 수학화는 더이상 물리학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되며, 수학자들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로렌츠가 1903년 12월에 탈고한 원고로서, 클라인이 편집인으로 활동하던 수리과학 백과사전에 출판하기 위해서 집필했던 로렌츠의 전자론에 관한 글을 근간으로 해서 자신들의 연구를 시작했다. 그들이 행한 연구의 주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변분법을 비롯한 수학적 방법을 동원해서 전자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수학자들이 주도한 괴팅겐의 이 세미나에는 수학자들뿐만이 괴팅겐의 천문대장이었던 카를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와 지구물리학 교수였던 에밀 비헤르트(Emil Wiechert), 그리고 클라인의 제자로서 아헨 공대에서 재직하고 있던 아르놀트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도 참가했었다. 이 과정에서 좀머펠트는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오기 바로 직전인 1905년 초에 빛보다 빠른 전자의 운동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으며, 민코프스키도 괴팅겐 학자들과의 협동연구 속에서 후일 나타날 4차원 시공 세계에 대한 수학적 논의를 발전시키게 된다. 민코프스키의 수학적인 4차원 시공 세계의 개념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나타난 배경과는 상당히 달랐던 괴팅겐의 수학적 전통 속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성장 과정

아인슈타인은 1879년 3월 14일 독일의 울름에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이미 아버지가 보여준 나침반에 매료되었으며, 이때의 경험이 후일 자신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12살 때에 이르러 아인슈타인은 유클리드의 평면 기하학에 관한 책을 접했었는데, 이때 유클리드 기하학의 명확성에 아주 깊고도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 12세에서 16세까지 그는 독학으로 미적분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어린 시절 뮌헨의 루이트폴트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권위주의적인 독일 김나지움 교육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그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뮌헨을 떠나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이탈리아로 갔다. 그러나 가족의 전기회사 사업이 실패하고, 또한 가족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전기공학자가 되기 위해 다시 공부를 계속하려고 마음먹었다. 독일 김나지움의 졸업장이 없었던 그로서는 독일의 대학이나 고등기술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독일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의 학교를 선택해야 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은 스위스의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ETH)에 진학하기 위해서 입학시험을 쳤다. 이 시험에서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은 아주 잘 보았으나 현대어, 동물학, 식물학 등 다른 과목에서는 떨어졌다. 그 뒤 교수의 권유로 그는 스위스의 간톤학교를 1년간 다녔다.

스위스 아라우의 아르가우 간톤학교에서 아인슈타인은 독일의 김나지움과는 아주 다른 인상을 받았다. 아르가우 간톤학교는 19세기말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해서 고전어 교육보다는 수학과 실용적 학문을 강조하면서 일어났던 개혁 김나지움 운동의 영향을 받은 학교였다. 아인슈타인은 아라우의 이 아르가우 간톤학교에서 뮌헨의 김나지움과는 전혀 딴판인 상당히 민주적인 느낌을 받았고,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인슈타인 자신은 매우 만족스러운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다. 아라우에서의 교육은 아인슈타인의 사고 형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비교적 자유로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었던 스위스 칸톤 학교 시절인 16세 때부터 이미 물체가 빛과 같은 속도로 달리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 것인가에 대한 생각에 골몰했다고 한다. 이것이 상대성이론과 관련된 그의 최초의 사고 실험이었으며, 그 뒤 10여년 동안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한 끝에 마침내 1905년 자신의 상대성이론을 얻어내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상대성이론은 스위스 아라우에서의 자유로운 교육 환경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기원

아인슈타인의 집안은 발전기나 모터를 만드는 전기공학자의 집안이었고, 아인슈타인 자신도 과학자라기보다는 전기공학자가 되려고 취리히의 연방 공과대학에 들어간 것이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비롯한 위대한 과학 사상을 발전시키는 활동의 이면에서 그의 생애 동안에 냉장고에 관한 것을 비롯해서 몇몇 발명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연방 공과대학에서 아인슈타인은 아돌프 후르비츠(Adolf Hurwitz)와 헤르만 민코프스키와 같은 유명한 수학자들에게 수학을 배웠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직접적인 실험에 더욱 매료되어 대부분의 시간을 물리 실험실에서 보냈으며, 남는 시간은 집에서 키르히호프(Gustav Robert Kirchhoff),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헤르츠 등의 책을 읽으며 보냈다. 특히 그는 1894년 아우그스트 푀플(August Fppl)이 집필한 『맥스웰의 전기론 개론』(Einfhrung in die Maxwellsche Theorie der Elektrizitt)을 통해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대해서 배웠다. 이외에도 그는 마흐(Ernst Mach)의 역학에 관한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로렌츠와 볼츠만의 논문들도 공부했다.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수학자였던 민코프스키에게 수학을 배울 기회가 있었지만, 아인슈타인 자신은 수학 수업을 좋아하지 않았다. 민코프스키의 평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은 민코프스키의 수학 수업시간에 아주 게으른 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미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에서 수학의 역할을 상당히 낮게 평가했으며, 수학적 형식주의에 대해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았는데, 이런 태도는 그가 죽을 때까지 유지되었다.

한편 1887년 볼데마르 포크트(Woldemar Voigt)는 비압축 탄성 매질 속에서의 도플러 효과에 관한 논문에서 후일 로렌츠 변환식으로 일컬어지는 변환식을 이미 언급했었는데, 포크트에게 배운 바 있는 민코프스키가 이 사실을 1908년의 4차원 시공 세계에 관한 역사적인 강연에서 언급하면서 상대성이론 출현 이후에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이와는 별도로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설명하기 위해서 1892년부터 임시방편의 수축가설을 도입했던 네덜란드의 로렌츠는 1904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서 보다 일반적인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소위 로렌츠 변환식을 유도했다. 그렇지만 아인슈타인이 로렌츠의 이 작업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아직도 불확실한 점이 많다. 우선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는 로렌츠의 이 논문이 인용되고 있지도 않았고, 또한 아인슈타인은 로렌츠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변환식을 유도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 이전에 마이컬슨-몰리 실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 그의 상대성이론의 형성에는 어떤 역할을 했느냐 하는 것도 아인슈타인 자신의 진술이 여러 곳에서 엇갈리고 있기 때문에 과학사적으로 많은 논란을 야기시켰던 문제였다. 우선 아인슈타인은 1949년 출판된 그의 자서전의 그 어디에서도 마이컬슨-몰리 실험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1905년 전후에 나타난 논문에서도 마이컬슨-몰리 실험은 언급되고 있지 않으며, 이 시기를 전후해서 쓰여진 편지 속에서도 그 실험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1931년 미국 칼텍에서 열린 만찬에서 아인슈타인은 마이컬슨의 작업이 자신의 상대성이론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했으며, 1922년 12월 14일 일본 교토에서 행한 '나는 어떻게 상대성이론을 창안했는가' 라는 강연에서 그는 학창 시절에 이미 마이컬슨의 실험을 알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아인슈타인은 1905년 이전에 마이컬슨의 실험에 대해서 그 존재 자체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에테르와 지구와의 상대 운동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마이컬슨의 실험 자체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 큰 역할을 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마이컬슨의 실험보다도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창안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 실험적 증거는 어떤 것이었을까? 1899년 아인슈타인이 그의 첫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Mileva Mari)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을 살펴보면 피조의 실험이 마이컬슨의 실험보다도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51년 피조는 움직이는 액체 속을 지나는 빛의 속도가 액체의 굴절률의 역제곱에 비례하는 양만큼 고전역학적인 속도의 합성 공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현상은 1907년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에 의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입각한 새로운 속도합성 공식을 바탕으로 해서 처음으로 성공적으로 설명되었는데, 19세기를 지나는 동안 이것은 고전역학적인 방식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아인슈타인은 이 피조의 실험과 1728년 제임스 브래들리(James Bradley)가 발견한 별의 광행차에 대한 관측만으로도 빛과 물체의 운동과 관련해서 현상을 고전물리학 체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새로운 운동학 체계를 모색했던 것이었다.

특수 상대성이론의 형성과 그 수용과정

전기공업 회사 집안에서 자랐으며, 전기공학자로서 특허국에서 일하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움직이는 도체의 전자기 현상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피조의 실험과 별의 광행차 관측에서 나타나듯이 움직이는 물체를 다루는 전자기학에서는 뉴턴의 역학과 전자기 법칙이 서로 모순되는 측면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아인슈타인은 자석과 움직이는 도전체 사이의 상대 운동으로 발생하는 전기 유도에서 나타나는 비대칭성에 대해서 많은 불만을 느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이 비대칭성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자석이 움직이고 도체가 정지해 있으면 자석 주위에 특정한 에너지와 함께 전기장이 발생한다. 하지만 자석이 정지하고 도체가 움직이면 자석 주위에는 상응하는 에너지가 발생하지 않는 채로 기전력만이 발생한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비대칭성 문제는 지구와 에테르와의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없었던 실험과 마찬가지로 역학과 전자기학 내에 문제를 야기시키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아인슈타인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내재하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1905년 6월 30일에 제출한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관해서'(Zur Elektrodynamik bewegter Krper)라는 논문에서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바탕으로 등속도로 움직이는 모든 관측자들에게 고전 전자기 법칙이 불변으로 유지되는 새로운 시공 개념을 제시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광속도 불변의 원리를 채택하면서 고전 전자기학이 가정하고 있던 가상적인 물질이었던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했다. 빛이 파동일 경우 꼭 필요했던 매질인 에테르를 부정한 아인슈타인은 이미 그해 3월 17일에 완성한 논문에서 진공 중에서도 빛이 전달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빛의 입자성을 나타내는 광양자 가설도 새로이 제안했었다. 후일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빛에 관한 파동-입자 이중성 개념으로 일반화되었고, 그가 제안한 빛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현대 양자론의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학계에서 널리 퍼지게 만드는 데에는 독일 물리학계의 거물인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역할이 컸다. 플랑크는 당시 무명의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표했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의 편집인이었을 뿐만이 아니라, 베를린 대학에서 여러 유능한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던 독일 과학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열열히 옹호하며, 학생들로 하여금 이 주제를 선택하도록 독려했는데, 1906년부터 1914년까지 플랑크 밑에서 나온 학위 논문 가운데 무려 3분의 1은 상대론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1906년 발터 카우프만의 실험이 로렌츠-아인슈타인의 이론식이 아니라 자신의 제자인 아브라함의 식에 더욱 가깝게 나왔을 때에도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옹호했다. 무엇보다도 플랑크에게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물리학에서의 보편성과 단순성을 뒤받침해준다는 의미에서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이론이었다. 막스 플랑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이런 공개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자신도 1906­7년 사이에 최소 작용의 원리에 바탕을 둔 상대론적 역학을 발전시키는 등 초창기의 상대성이론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908년 괴팅겐의 수학자였던 민코프스키는 상대성이론에 수학의 불변 이론과 함께 4차원 시공 좌표를 도입했다. 물론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전자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되는 4차원 좌표를 사용한 사람이 있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과학자였던 푸앵카레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는데, 하지만 그는 4차원의 비유크리트 기하학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상대주의적인 지식관에 따라 기하학에 대한 규약주의적인 입장만을 견지했었다. 반면에 민코프스키의 상대론에서는 4차원 세계가 절대적이고 실재적인 의미를 지니며, 아인슈타인 역시 4차원 시공 세계의 절대성을 받아들였다. 후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특히 비전문가들에 의해서 왜곡되어 아인슈타인이 세계를 상대화했다고 와전되기도 했다. 더구나 철학자들조차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푸앵카레나 에른스트 마흐의 상대주의적 철학관과 같은 주장으로 이해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마치 지식의 상대성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철학적·과학적 입장을 전적으로 잘못 이해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단순히 전자의 운동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통상의 물체에도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논의라는 것은 상대론적인 강체의 존재에 관한 논쟁을 통해 확립되었다. 1909년 괴팅겐의 사강사 막스 보른은 소위 로렌츠 수축가설을 만족하는 '상대론적 강체 개념'을 제기했다. 보른은 이 개념을 이용해서 전자를 고전역학적인 강체로 보고 고전전자기학에 입각한 전자론을 전개했던 1902년의 아브라함의 이론을 상대론적으로 재해석하려고 했었다. 보른의 이런 시도에 대해서 에렌페스트(Paul Ehrenfest)는 보른의 상대론적 강체 정의는 물체가 회전을 할 경우 모순에 봉착한다고 지적하면서 비판을 하고 나섰다. 즉, 원통의 물체가 회전을 할 경우 회전 방향으로 로렌츠 수축이 일어나지만, 강체 자체의 원둘레는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당시 과학자들은 에렌페스트 역설이라고 불렀다. 그 뒤 이 논쟁에는 헤어글로츠(Gustav Herglotz), 프리츠 뇌터(Fritz Noether), 발데마르 폰 이그나토프스키(Waldemar von Ignatowski), 막스 플랑크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참여했는데, 이 과정에서 상대성 이론이 단순히 전자의 운동에만 적용되는 이론이 아니라 통상의 물체에도 적용가능한 일반적인 운동학 논의라는 것이 많은 과학자들에게 인식되게 된다. 1911년 플랑크의 제자인 막스 폰 라우에가 상대론에 의하면 강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 더 나아가 헤어글로츠가 유체역학적인 방정식을 동원해서 이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에렌페스트 역설과 관련된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결국 1911년 막스 폰 라우에가 집필한 최초의 상대성이론에 관한 교과서가 출판되는 것을 전후해서 특수 상대성이론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분명한 형태로 이해되면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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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rthur I. Miller, Albert Einstein's Special Relativity (Massachusetts, Addison-Wesley, 1981).
[3] G. Holton, The Thematic Origins of Scientific Thought (Cambridge, (Mass.): Harvard Univ. Pr., 1988)
[4] Lewis Pyenson, The young Einstein, The advent of relativity (Bristol, Adam Hilger, 1985).
[5] Abraham Pais, "Subtle is the Lord ...": The Science and the Life of Albert Einstein (Oxford, Clarendon Press,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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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과학에 대한 시대 구분을 할 때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은 1895년을 그 기점으로 잡는다.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뢴트겐이 X-선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을 발견한 해였다. 뢴트겐이 이 새로운 광선을 발견한 뒤에 이에 자극되어 그 이듬해 프랑스의 베크렐은 우라늄에서 최초로 방사선을 발견했으며, 1897년에는 영국의 J. J. 톰슨이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해서 1899년경에는 음극선의 입자성이 강력하게 부각되게 된다. 톰슨에 의한 음극선의 입자성 발견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상대성이론이 출현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X-선의 본성에 대한 논쟁에서 파동-입자 이중성이라는 빛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나타나게 된다. 빛에 대한 이중성 개념은 물질파 개념과 함께 양자역학이 성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또한 방사선의 발견은 핵변환의 발견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핵분열이 발견되어 우리는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결국 20세기 과학은 X-선의 발견을 계기로 해서 그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이다.

음극선 실험과 X-선

1850년대부터 독일과 영국의 과학자들은 전기 방전관에서 나오는 음극선을 이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해나가고 있었다. 초기 이들의 실험은 주로 음극선 자체의 성질에 대한 연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음극선의 성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과학자들은 음극선을 다양한 물체에 충돌시켜 여기서 나타나는 모습을 분석하는 실험을 하게 되었다. X-선의 발견은 바로 이런 실험 과정에서 얻어졌던 것이다.

1892년 본 대학의 헤르츠(Heinrich Rudolf Hertz, 1857­1894)는 음극선이 얇은 금박을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현상을 발견한 헤르츠는 그의 제자인 레나르트(Philipp Lenard, 1862­1947)에게 이 실험을 계속해 볼 것을 권유했다. 레나르트는 음극선 관의 한쪽 끝에 얇은 알루미늄 판('레나르트 창문')을 대어서 여기에 음극선을 쏜 다음 이 금속 창문을 통과해서 나오는 광선의 성질을 여러 기체들 속에서 면밀하게 점검했다. 이 실험에서 레나르트는 음극선에 관한 여러가지 중요한 성질들을 관찰했다. 만약 레나르트가 여기서 금속판을 투과해서 나오는 음극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반대편에도 감광판을 대었더라면 레나르트는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X-선 발견의 영광은 레나르트가 아니라 레나르트가 이런 실험을 하는 방법을 알려준 뢴트겐에게 돌아가 버린 것이다.

뢴트겐(Wilhlem Conrad Rntgen, 1845 ­1923)은 독일의 레네프에서 독일인인 아버지와 네덜란드인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어려서 그는 네덜란드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1865년 입학시험을 통해서 취리히의 연방공과대학(ETH) 기계공학과에 입학했다. 1869년 그곳에서 박사학위를 한 그는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물리학자인 아우구스트 쿤트(August Kundt, 1839­1894)의 조교가 되어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 뒤 쿤트를 따라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1874년 교수자격과정(Habilita- tion)을 이수하고, 그 이듬해 뷔템베르크의 작은 학교에서 잠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 대학을 거쳐 1879년 기센대학 교수가 되었다. 기센대학에서 10여년간 교수로 재직한 그는 1888년 마침내 프리드리히 콜라우시(Friedrich Kohlrausch)의 후임으로 그가 과학자로서의 경력을 처음으로 쌓기 시작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정착하게 되었다. 50세가 넘은 1895년초까지 뢴트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48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발표한 논문 하나로 그는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1894년 5월 5일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서 음극선을 금속 박판에 쏘기 위한 실험장치에 관한 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이 때 레나르트는 뢴트겐에게 '레나르트 창문'에 사용되는 금속 박편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레나르트의 도움을 받아 뢴트겐은 레나르트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실험을 하던 중 뢴트겐은 대학의 학장으로 뽑혀서 당분간 자신의 음극선 실험을 할 수가 없었다. 1895년 10월 말 임기를 마친 뢴트겐은 1년 전에 자신이 한 실험을 다시 한번 반복해 보았다. 1895년 11월 8일 저녁 뢴트겐은 놀라운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후일 신문기자와 행한 인터뷰에서 그는 그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그날 나는 검은 종이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히토르프-크룩스 관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금시안화바륨 종이 한 묶음이 놓여 있었다. 관에 전류를 흘려보내고 나자, 종이 위에는 이상한 검은 선이 비스듬하게 생겼다. 당시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빛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그러나 전기 아크등에서 나오는 빛조차도 이렇게 뒤덮인 종이는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관에서 빛이 나온다는 것인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 때 히토르프-크룩스 관에서는 륌코르프 고전압 발생장치에 의해서 음극선이 유리관의 금속벽에 빠른 속도로 충돌해서 새로운 종류의 광선인 X-선이 검은 종이를 뚫고 나와서 백금시안화바륨을 감광시켰던 것이었다. 이 놀라운 현상을 목격한 뢴트겐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실험을 계속해나갔다. 12월 22일 그는 자신의 처를 실험실로 불러서 그녀의 손을 X-선으로 찍어보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살아있는 사람의 뼈를 사진으로 찍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12월 28일 뢴트겐은 그간의 실험을 정리해서 뷔르츠부르크 물리·의학 학회지에 '새로운 종류의 광선에 관해서'라는 논문을 접수시켰다.

이 짧은 논문은 곧 인쇄되어 1896년 신년에 이미 뢴트겐은 논문의 별쇄본을 X-선 사진과 함께 자신의 친구들에게 보낼 수 있었다. 1월 4일에는 독일 물리학회 50주년 기념 학회가 있었는데, 뢴트겐의 발견은 이때 전 독일 과학자들에게 알려졌다. 의학자들은 X-선의 의학적 중요성을 발 빠르게 알아차리고 뢴트겐에게 강연을 요청했다. 학계뿐만이 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의 언론들도 이 놀라운 발견을 대서특필해서 뢴트겐은 일약 세계적인 유명 인사가 되었다. 1월 9일에는 카이저 빌헬름 2세로부터 이 새로운 발견을 치하하는 축전이 날아왔다: "본인은 우리의 조국 독일에 인류를 위한 커다란 축복이 될 새로운 과학의 승리를 안겨준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는 1896년 1월 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는데,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인 그해 2월 24일에 베크렐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 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하게 된다. X-선 발견은 영국 과학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특히 J. J. 톰슨은 X-선 발견의 소식을 듣고 이에 관련된 실험을 하다가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했다. 그 뒤 톰슨은 음극선의 본성에 대한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 즉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X-선의 발견은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뢴트겐은 발견 당시 노벨의 유언에 따라 제정된 노벨상의 물리학 분야의 첫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당시에 뢴트겐이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모든 과학자들에게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X선은 뢴트겐 이전에 여러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었을 것이다. 18세기에 많이 만들어졌던 정전기 발생 장치에서 나오는 스파크에서도 이미 X-선이 발생했었을 것이고, 1879년 크룩스 자신도 음극선 주변에서 사진 건판이 흐려지는 것을 불평하곤 했었다. 더구나 레나르트를 비롯한 몇몇 독일 물리학자들은 크룩스 관 주변에서 발생하는 발광현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들은 음극선의 성질을 연구하는 데 그들의 관심을 집중하는 바람에 발견의 기회를 놓쳤다. 특히 레나르트의 창문 실험은 X-선 발견에 가장 근접했던 실험이었으며, 실제로 레나르트는 뢴트겐이 히르토프-크룩스 관을 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레나르트는 자신이 이 중대한 발견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매우 애석하게 생각했으며, 특히 뢴트겐이 X-선 발견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도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X-선의 본성에 대한 초창기의 해석

뢴트겐이 새로운 종류의 광선의 발견에 대해서 발표한 뒤 많은 과학자들은 투과력이 강한 이 광선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을 내렸다. 즉 뢴트겐의 발견 직후 과학자들은 이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 입자, 에테르 내의 와동, 높은 주파수를 지닌 음파 혹은 중력파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했다. 하지만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의 본성에 대한 논의는 곧 전자기파로서 통상의 빛, 종파, 충격파 등 3가지 유형의 해석으로 좁혀졌다. 우선 초창기 유행하던 X-선 본성에 대한 해석으로는 1900년까지 주로 독일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선호되던 해석으로 X-선을 매우 높은 진동수를 지닌 통상의 빛으로 보는 견해가 있었다. 뢴트겐이 발견한 새로운 광선은 빛과 같이 직진을 하며, 자기장이나 전기장에 의해 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뢴트겐 자신과 루트비히 볼츠만 등은 X-선을 19세기를 통해서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찾아왔던 에테르의 압축에 의해서 생기는 종파(longitudinal wave)로 해석했다. 당시에 빛은 압축가능한 매질에서 전파되는 소리와는 달리 횡파(transverse wave)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만약 에테르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압축이 불가능한 완전탄성체라는 극히 이상적인 매질로서 존재해야만 했다. 그런데 만약 에테르가 조금이라도 압축이 가능하다면 소리와 같이 빛의 종파 성분이 존재할 수 있고, 바로 이것이 뢴트겐이 발견한 X-선이라는 것이다.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 J.J. 톰슨 등은 X-선을 에테르 내에서 순간적으로 불연속적으로 전파되는 충격파(impulse)로 이해했다. 우선 독일의 비헤르트는 1896년 5월 X-선이 불규칙적인 빛의 충격파라고 제안했다. 뢴트겐이 제안한 압축파의 가설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던 영국의 스톡스는 1896년 11월 X-선이 기본적으로는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횡파로서 개별 음극선이 아주 빠르게 충돌함으로써 생기는 일종의 충격파라고 주장했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대가인 J.J. 톰슨은 이 스톡스의 가설에 대한 자세한 계산을 했다. 톰슨도 처음에는 종파 가설에 대해 고려했지만, 스톡스 가설에 대한 엄밀한 점검을 하는 과정에서 1897년 12월부터 스톡스 가설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국의 켈빈 경은 처음에는 X-선이 물질에 잘 흡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X-선을 아주 높은 주파수를 지닌 종파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1899년에 이르면 켈빈도 암묵적으로나마 X-선이 충격파라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이미 1899년에도 X-선이 회절된다는 사실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1899년 2월 네덜란드의 윈드(C.H. Wind)와 하가(H. Haga)는 격자에 의해서 X-선이 회절되는 사진을 찍었다. 당시 괴팅겐 대학의 사강사였던 좀머펠트(Arnold Sommerfeld, 1868­1951)는 이 회절 사진에 대해서 충격파 가설에 입각해서 X-선 펄스의 간격을 계산하기도 했다. 이어 1904년 영국의 바클러(Charles G. Barkla, 1877­1944)는 X-선이 편광이 된다는 현상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X-선의 본성에 대한 충격파 가설을 지지하는 간접적인 증가로 받아들여졌다. 이로써 1905년까지 충격파 가설은 X-선의 본성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견해가 되게 된다.

레나르트의 방아쇠 가설과 그 문제점

1905년경부터 충격파 가설이 널리 퍼지게 되었지만, 이 해석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선 X-선의 이온화 성질에 관한 이해가 진전되면서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에 문제가 있음이 서서히 제기되었다. 우선 X-선이 모든 기체 원자들을 이온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극히 통과하는 원자들의 극히 일부만을 이온화시킨다는 것이 설명되어야만 했다. 또한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크다고 하는 특이한 성질도 설명되어야만 했다. 1902년 레나르트는 광전효과에 관한 실험을 하던 중 자외선에 의해서 방출되는 전자의 속도가 빛의 강도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때 그는 이런 광전효과 현상을 원자 속의 전자는 이미 원자 속에서 퍼텐셜 에너지에 해당하는 속도를 얻고, 빛은 단지 전자를 방출시키는 방아쇠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방아쇠 가설(triggering hypothesis)를 제기했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X-선에 의해서 생성되는 2차 전자의 속도가 매우 큰 이유도 이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것이다.

한편 방아쇠 가설이 옹호하고 있는 X-선에 대한 충격파 해석 이외에 이와는 전혀 다른 입자론적 해석도 등장했다. 1907년 오스트레일리아에 있던 윌리엄 H.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는 X-선이 강한 투과력을 갖는 것은 X-선이 펄스라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X-선이 두 하전입자가 같은 평면에서 회전하는 중성쌍(neutral pairs)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해야만 보다 잘 설명된다고 주장하면서 기존의 파동론적 견해와는 다른 입자론적 해석을 제기했다. 브래그는 훗날 결정 격자에 의해 X-회절이 생긴다는 것을 발견해서 결과적으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적어도 1907년 이후 몇 년 동안 그는 X-선이 입자로 되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과학자였다. 그리하여 1908년을 통해서 기존의 펄스 가설을 옹호하던 바클러와 입자론적인 중성쌍 가설을 새로이 제기한 브래그 사이에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광양자 가설의 등장

한편 1905년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광양자 가설에 입각해서 광전효과를 설명한 이후부터는 독일에서 X-선에 대한 다양한 양자론적인 해석들이 나타났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광양자라는 국소적으로 독립된 에너지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무엇보다도 그는 레나르트가 방아쇠 가설로 설명했던 광전 효과 설명을 이 새로운 광양자 가설을 바탕으로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광양자 가설에 의하면 빛에 의해 튀어나오는 광전자의 최대 속도는 빛의 세기와 무관하고, 빛의 진동수만이 전자가 받는 에너지의 양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 광양자 가설은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과학자들에 의해서 널리 수용되고 있었던 빛의 파동설은 빛과 관련된 아주 많은 현상을 성공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은 광전 효과는 잘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빛의 간섭 현상을 비롯한 몇몇 현상들을 당시 과학자들에게 납득이 갈 정도로 설명하지는 못했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와 유사한 양자론적 해석은 독일의 과학자 사회에서 서서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특히 빌헬름 빈(Wilhelm Wien, 1864­1928)과 요하네스 슈타르크(Johannes Stark, 1874­1957) 등과 같은 실험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 논문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지만, X-선의 성질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양자론적 관계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등 자신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광양자 가설을 전개해나갔다. 1905년 양극선에서 나오는 양이온선(canal ray)의 도플러 효과를 발견한 슈타르크는 이 양이온선에서 관찰된 현상과 연관하여 광양자 가설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X-선의 성질을 광양자 가설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테르 파동설'과 광양자 가설을 동시에 적용해 본 슈타르크는 전통적인 연속체 물리학의 무비판적인 적용을 반대했으며, 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많은 이유를 독일의 과학자들의 구미에 맞게 제시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에서 빛에 대한 양자론적 해석이 서서히 수용되면서 레나르트에 의해 제기된 방아쇠 가설은 점차로 힘을 잃어갔던 것이다.

X-선 회절 실험: 라우에 반점과 브래그 부자의 실험

광양자 가설이 등장하고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가설이 대두되었지만 1911년까지도 X-선이 전자기파인가 아니면 입자인가 하는 것은 좀처럼 분명한 형태로 결판이 나지는 않았다. 한편 X-선 발견으로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뢴트겐은 1900년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뮌헨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 소장 겸 물리학 교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뢴트겐은 이 뮌헨에서 대학의 엄청난 지원 속에서 거대한 연구 시설을 갖춘 연구소를 꾸려나갔다.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는 이보다는 규모가 작은 이론 물리학 연구소가 하나 있었는데, 1906년 좀머펠트는 뢴트겐의 추천으로 이곳의 교수로 오게 되었다. 결정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실험에 성공해서 X-선이 파동이라는 것을 결정적으로 밝힌 곳은 X-선을 발견한 뢴트겐이 꾸민 거대한 연구소가 아니라, 바로 이 거대한 연구소 옆에 있었던 좀머펠트의 작은 이론 물리연구소였다.

좀머펠트 역시 X-선의 본성에 대해 연구한 학자였는데, 그는 특히 우수한 학생들을 발굴, 교육, 육성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좀머펠트 연구실에는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라는 사강사가 있었다. 그는 베를린 대학의 막스 플랑크 밑에서 상대성 이론과 광학에 대한 연구를 한 뒤 1909년부터 이곳에서 사강사 생활을 하면서 격자에서 나타나던 회절에 관한 것을 연구하던 이론 물리학자였다. 또한 좀머펠트의 연구소 내에는 이론 물리학 분야 이외에 작은 실험 분과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교로 일하던 사람이 바로 발터 프리드리히(Walther Friedrich, 1883­1968)였다.

라우에의 X-선 회절 실험을 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준 또 하나의 인물은 에발트(Peter Paul Ewald, 1888­1985)였다. 1912년 그는 좀머펠트 연구소에서 결정 속의 입자들의 규칙적인 공간 배열을 기본 가정으로 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막스 폰 라우에는 바로 이 에발트와 대화를 하는 가운데 X-선을 결정 격자에 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 것인가 하는 결정적인 착상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즉 그는 만약 X-선이 아주 짧은 파동이라면 아주 규칙적인 원자 배열로 이루어진 결정 격자를 통해서 나오는 밝고 어두운 회절 무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막스 폰 라우에의 이 같은 생각에 대해서 정작 뢴트겐과 좀머펠트와 같은 뮌헨 대학의 물리학 교수들은 강한 의문을 내비치며 회의를 표명했다.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의 이 생각을 실험실에 있던 발터 프리드리히에게 개진해보았지만, 좀머펠트의 반대에 눌려 프리드리히도 회의를 표명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막스 폰 라우에는 파울 크니핑(Paul Knipping, 1883­1935)이라는 젊은 박사과정 학생에게 이 실험을 감행해보자고 설득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1912년 4월 21일 막스 폰 라우에, 발터 프리드리히, 파울 크니핑은 X-선 회절 실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황산구리 결정격자에 X-선을 쏘는 실험을 통해서 좀머펠트 연구소의 젊은 과학자들은 X-선이 결정 격자를 통과할 때 회절과 간섭을 일으켜 사진 건판에 소위 라우에 반점이라는 여러 반점이 만들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이것으로 그들은 X-선이 아주 짧은 파장을 지닌 전자기파라는 것을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결정격자의 존재를 실험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게 해주었다. 5월 4일 프리드리히, 크니핑, 막스 폰 라우에는 자신들의 발견에 대한 우선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자신들이 그 동안 자신들이 행했던 실험에서 얻은 내용을 바이에른 아카데미에 전했다. 6월이 되자 막스 폰 라우에는 감격에 젖어 최초의 X-선 회절에 의한 반점 사진을 그의 동료들에게 보냈고, 이에 따라 결정 격자에 의한 X-선 회절 소식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6월 10일 아인슈타인은 막스 폰 라우에에게 "당신의 실험은 물리학이 경험한 가장 아름다운 것에 속합니다."라는 내용의 축하 엽서를 보냈다.

뮌헨의 젊은 과학자들이 얻어낸 놀라운 실험은 곧 영국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이와 관련된 실험을 하도록 자극했다. 특히 영국의 윌리엄 H. 브래그와 그의 아들 W. 로렌스 브래그(William Lawrence Bragg, 1890­1971)는 선택적 반사 방법을 활용함으로써 결정 격자에서의 X-선 회절 실험을 더욱 간단하고 분명한 형태로 진행시켰다. 본시 윌리엄 H. 브래그는 X-선에 대한 입자론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지만, 1912년 말까지는 X-선의 파동적 해석에 대한 반감을 상당 부분 완화시키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브래그 부자는 3차원 결정 격자를 이용한 폰 라우에 연구팀과는 달리 평형면 반사를 이용해서 X-선 회절 법칙을 얻어냄으로써 결정 격자를 매우 간단한 수학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리하여 이들의 실험은 X-선결정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성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명 현상에 대한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줌으로써 분자생물학의 성립에도 많은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1912년에서 1913년에 걸쳐 이룩한 X-선 회절 실험에 대한 노벨상 위원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1914년 막스 폰 라우에는 자기의 스승 막스 플랑크보다 먼저 노벨상을 받게 되었고, 그 이듬해에는 브래그 부자도 X-선 회절 실험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참 고 문 헌

[1] W. C. Rntgen, "Uber eine neue Artvon Strahlen," Wrzburger Berichte (1895), pp. 132-141.
[2] W. Friedrich, P. Knipping and M. Laue, "Interferenzerscheinungen bei Rntgenstrahlen," Ann. d. Phys. 41 (1913), 971-988.
[3] W. H. Bragg and W. L. Bragg, "The reflection of X-rays by crystalls," Proc. Roy. Soc. London A 88 (1913), pp. 428-438.
[4] Bruce R. Wheaton, The tiger and the shark (Cambridge, Cambrige Univ. Pr., 1983).
[5] E. Segr, From X-ray to quarks (San Francisco: Freeman,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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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4월 30일 영국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J. J.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지난 4개월간에 걸친 음극선에 대한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자신이 음전하를 띤 원자 이하의 미립자(corpuscle)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알아냈다고 했는데, 톰슨이 발견한 이 미립자를 훗날 사람들은 전자(electron)라고 부르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전자는 물성과학 분야는 물론 전자공학, 의공학 등 다양한 응용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하지만 음극선에 대한 연구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전자라고 부르는 개념이 나오기까지는 여러 과학자들의 수많은 실험과 이론적 작업이 복합적으로 진행되었다.

음극선 연구의 시작

전자들의 흐름인 음극선에 대한 연구는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여러 과학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838년부터 영국의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는 다양한 기체로부터 스파크의 형태로 나타나는 전기 방전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는 대기압 하에서의 기체 방전뿐만이 아니라 압력을 낮추었을 때 나타나는 방전의 모습도 관찰했다. 그는 기체의 기압이 낮아지면서 양극에서 음극까지 다소 지속적인 발광이 나타나다가 기압이 아주 낮아지면 전극의 중간 지점에서 어두운 지역이 나타나면서 발광이 중단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을 흔히들 패러데이 암부(Faraday dark space)라고 부른다.

자장이 방전관에 미치는 영향은 독일의 본 대학의 율리우스 플뤼커(Julius Plcker, 1801­1868)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본래 그는 해석기하학 분야가 전문인 수학자였고 1836년부터 1847년까지 본 대학 수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플뤼커는 1847년 본 대학의 물리학 교수로 옮기면서 이론물리학이 아닌 실험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본의 유리기구 제작자인 하인리히 가이슬러(Heinrich Geißler, 1814­1879)는 플뤼커에게 전기 방전에 필요한 유리관을 만들어주었는데, 플뤼커는 그 관을 가이슬러관이라고 불렀다. 전기 방전을 연구하던 플뤼커는 1858년 자력이 기체 방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실험을 하던 중 자석 근처에서 기체 방전이 어느 정도 휘는 것을 관찰했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이듬해 방전관의 음극 근처에서 밝은 녹색의 발광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나 당시 그가 사용했던 '진공관'의 진공도는 그다지 높지 않아 더 이상의 정밀한 실험은 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가이슬러는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되는 가이슬러관 뿐만이 아니라 고진공을 만들 수 있는 진공 펌프도 발명했다. 그는 1855년 개스킷이 필요 없는 수은 진공펌프를 발명했는데, 이것으로 기체 방전관 내의 진공도를 대기압의 만분의 1 정도로 낮추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1864년에는 독일 태생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던 기구제작자인 륌코르프(Heinrich Daniel Rhmkorff, 1803-1877)는 불꽃 유도 코일을 개발해서 1피트 이상의 거리에서 불꽃을 일으킬 수 있는 고전압을 발생시킬 수 있게만들어 주었다.

플뤼커의 제자였던 빌헬름 히토르프(Johann Wilhelm Hittorf, 1824­1914)는 가이슬러의 수은 진공펌프와 륌코르프의 고전압 발생장치를 이용해서 1869년 고진공 방전관을 만들고 그 속에서 소위 '글로우 광선'(Strahlen des Glimmens)을 발견했다. 그는 이 광선이 고체 뒤편에 그림자가 생기게 하는 것을 볼 때 음극에서 직선으로 전파된다고 생각했고, 이 광선이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고 유리에 닿으면 발광을 한다는 것도 관찰했다. 1876년 독일 베를린 대학의 헬름홀츠 밑에서 연구하던 골트슈타인(Eugen Goldstein, 1850­1930)은 플뤼커와 히토르프의 실험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았다. 플뤼커와 히르토프의 실험을 반복해본 골트슈타인은 자신이 관찰한 광선에 '음극선' (Kathodenstrahle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크룩스의 발견

1878년 영국의 크룩스(William Crookes, 1832­1919)는 훗날 크룩스관(Crookes tube)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는 고진공관 속에서 나타나는 전기 방전 현상을 연구하여 방전관 내에서 소위 '크룩스의 暗部'(Crookes dark space)의 두께가 방전관 내의 분자의 압력이 감소함에 따라 넓어지는 것을 발견했다. 독일에서 가이슬러라는 기구 제작자가 플뤼커를 도운 것처럼 영국에서는 찰스 김밍엄(Charles H. Gimingham)이라는 사람이 크룩스에게 유리 기구를 비롯한 각종 기구를 만들어주었다. 이듬해까지 계속된 실험에서 크룩스는 음극선이 고체를 통과할 때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자장에 의해서 휘어지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일련의 연구를 종합해서 크룩스는 1879년 왕립학회의 베이커 강연에서 자신이 관찰한 것을 발표했다. 이 때 그는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고, 이것을 보통의 기체, 액체, 고체 상태와는 다른 물질의 '제 4 상태'라고 불렀다.

독일의 반응

음극선이 하전된 분자의 흐름으로서 물질의 제 4 상태에 해당한다는 크룩스의 주장에 대해서 음극선을 에테르적인 파동으로 해석했던 독일의 과학자들은 강한 비판을 가했다. 우선 1883년 킬 대학에 있던 하인리히 헤르츠(Heinrich Hertz, 1857­1894)는 글로우 방전에 관한 자신의 실험을 바탕으로 해서 음극선이 정전기장에 의해서는 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헤르츠는 음극선이 빛과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음극선이 자장에 의해서 휘는 것도 빛의 편광면이 자장에 의해서 회전되는 광자기회전 효과와 유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헤르츠의 이런 생각은 하인리히 비데만(Heinrich Wiedemann, 1826­1899), 골트슈타인 등과 같은 독일의 다른 과학자들도 받아들였던 생각이었다.

슈스터와 톰슨의 실험

한편 영국에서는 아서 슈스터(Arthur Schuster, 1851­1934)라는 과학자가 방전관 내에 있는 음으로 하전된 입자가 자장에 의해서 휘는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실험을 행했는데, 이런 일련의 실험의 결과로서 1890년 그는 글로우 방전관 내에서 음으로 하전된 입자들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 즉 e/m를 측정해서 이것이 103과 106 e.m.u. g?1사이에 있음을 발견했다. 만약 그가 극대치인 106을 고려했다면 그는 1897년 J. J. 톰슨이 측정한 양인 전자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에 가까운 값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극대치를 고려하지 않고 분자의 이온에 해당하는 중간의 양만을 신뢰했다. 그 이유는 그의 관심은 음극선의 본성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체에 있어서의 패러데이 전해질 법칙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슈스터의 이 실험은 방전현상을 연구하던 당시의 영국 과학자들에게 거의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J. J. 톰슨도 분명히 이 논문을 읽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그가 슈스터의 영향으로 나중에 음극선의 전하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게 된 것은 분명 아니었다. 톰슨이 이 실험을 하게 된 데에는 1895년의 X-선 발견과 그 이듬해의 방사선 발견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X-선 발견의 영향

뢴트겐의 발견이 알려진 직후 프랑스의 수학자인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1912)가 1896년 1월 20일 인간의 뼈가 찍힌 뢴트겐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에서 회람시켰다. 이에 따라 프랑스 학계에서 이 새로운 광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뒤인 1896년 2월 24일에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은 아카데미에서 강한 투과성을 지닌 우라늄 화합물의 감광현상에 대해서 처음으로 발표했다. 실상 베크렐 집안은 3대째 대대로 자연사 박물관에서 우라늄 화합물을 포함한 여러 물질들의 형광 현상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발견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톰슨의 전자 발견 역시 X-선에 대한 영국 과학자들의 반응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이 음극선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은 당시 크룩스 이래로 영국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지니고 있던 입자적 해석의 전통을 계승해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톰슨은 그 이전에 기체 방전, 개별 전하(discrete electric charge), 분할가능한 원자(divisible atom) 등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X-선 발견 이후 톰슨이 X-선 이온화 현상을 발견하게 되면서 다시금 음극선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음전하를 띤 미립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측정하게 된 것이다.

톰슨(Joseph John Thomson)은 1856년 12월 18일 영국 맨체스터 근처 치덤 힐(Cheetham Hill)에서 태어났다. 1871년 맨체스터 대학의 오웬스 칼리지에 입학한 그는 1876년까지 그곳에서 물리학, 수학, 공학 등을 공부했다. 1875년 톰슨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이듬해 그는 다시 한번 트리니티 칼리지에 도전해서 마침내 입학에 성공하게 된다. 1876년부터 1884년까지 그는 이 트리니티 칼리지를 중심으로 자신의 연구 활동을 했다. 1879년 석사학위를 한 그는 곧바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상근 펠로(Resident Fellow)가 되었고, 1881년에는 조교수(Assistant Lecturer)가 되었다. 1884년 톰슨은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과 레일리(Lord Rayleigh, John William Strutt, 1842?1919)에 이어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겸 제 3대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 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기존의 수학 트라이퍼스(Mathematical Tripos) 이외에 자연과학 트라이퍼스(Natural Science Tripos)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케임브리지 실험과학의 전통을 확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특히 그는 '전자' 발견을 비롯한 음극선에 관한 연구를 한 공로로 1906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톰슨은 케번디시연구소의 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연구소에는 수많은 유능한 과학 인재들이 몰려들었는데, 1884년에서 1918년 그가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으로 있을 때 길러 낸 과학자들 가운데 7명의 노벨상 수상자와 27명의 왕립학회 회원(Fellow of the Royal Society), 그리고 수십 명의 물리학 교수가 나왔다. 1918년 자신이 과거에 몸담고 있던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Master)이 되면서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직을 자신의 제자인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에게 물려주었다. 그 뒤 1940년 8월 30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기 몇 달 전까지 톰슨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학장직을 아주 잘 수행했다.

톰슨은 젊은 시절부터 통일 과학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즉 그는 기계적 철학과 유추 개념을 이용해서 물질, 전기, 에너지를 통일할 수 있는 에테르 개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는 화학 원소를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원자 모형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이런 시도의 일환으로 1882년 소용돌이(vortex) 원자 모형을 제안하기도 했다. 톰슨은 이 모형으로 화학원소의 주기율표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는데, 화학원소의 주기율적 성질에 대한 그의 관심은 20세기 초에도 이어져 심지어는 그의 원자 모형을 반대하고 러더퍼드의 원자 모형을 선택했던 닐스 보어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톰슨은 1884년부터 X-선 발견 소식이 있기 직전인 1895년까지 주로 기체 방전과 화학 작용에 관한 연구를 했다. 이 분야에 대해 그가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물질, 전기, 에테르 등에 대해 통일적인 이해를 갖기 위해서였으며, 이 과정에서 그는 물질을 통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 전하(discrete electric charge)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뢴트겐에 의해 X-선이 발견된 이후인 1896년부터 톰슨은 X-선의 이온화 성질에 대해 연구했고, 이 과정에서 분할가능한 원자(divisible atom)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면서 음극선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톰슨의 음극선에 관한 연구는 미립자 가설에 대한 톰슨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체 방전, 개별 전하, 분할가능한 원자 등에 대한 톰슨의 관심에서 시작된 연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96년 말부터 음극선의 성질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톰슨은 다음 해인 1897년 4월 30일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자신의 미립자 가설을 최초로 발표했다. 이 발표에서 그는 음극선이 수소 원자의 1/1000 정도의 질량을 지닌 음으로 하전된 미립자이며, 원자들은 바로 이 미립자들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입자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톰슨은 무엇보다도 1883년 헤르츠가 했던 실험, 즉 정전기 장에서 음극선이 휘지 않는다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톰슨 역시 헤르츠가 했던 실험을 반복해 보았는데, 그 역시 처음에는 헤르츠와 동일한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그는 계속된 실험을 통해 정전기장 속에서 음극선이 휘지 않는 이유는 음극선에 의해 희박화된 기체에 주어지는 전도성(conductivity)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톰슨이 음극선관 내의 진공도를 더욱 높이자 이 전도도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마침내 헤르츠의 실험과는 달리 정전기장에서도 음극선이 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음극선이 전기장과 자기장에서 모두 휘는 것을 확인한 톰슨은 이 미립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전기장과 자기장 모두에서 다양한 기체를 넣고 측정했다. 다양한 기체를 넣고 측정한 결과 음극선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는 기체와 상관없이 거의 일정했다. 자기장을 이용해서 측정한 하전량과 질량의 비, 즉 e/m는 1.0?107에서 3.12?107 e.m.u g?1로서 평균 1.96?107 e.m.u g?1로 나타났으며, 전기장을 이용해서 측정한 값은 0.67?107에서 0.91?107 e.m.u. g?1로서 평균 0.78?107 e.m.u. g?1로 나타났다. (톰슨의 논문에는 m/e로 값이 나와 있으나 편의상 e/m으로 기술한다.) 이렇게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107 크기라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톰슨은 음극선이 음으로 하전된 입자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일 수 있었다. (현대적인 e/m 값은 (1.7588028 ? 0.0000031)?107 e.m.u g?1이다.) 음극선에 관한 톰슨의 완전한 논문은 1897년 8월 7일 『필로소피컬 매거진』(Philosophical Magazine)에 제출되어 그해 10월에 출판되었다.

1897년 당시에 톰슨은 자신의 논문에서 단순히 미립자의 존재에 관한 언급만을 했을 뿐 음극선 입자 가설에 대해서는 그리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톰슨이 음극선 입자 가설을 진지하게 생각한 것은 1899년 이후의 일이며, 자기 자신은 평생 동안 '전자'(electron)라는 개념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따라서 톰슨이 말한 미립자가 오늘날 우리가 의미하는 전자가 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좀더 깊은 역사적 탐구를 필요로 한다.

1890년대에 라모(Joseph Larmor, 1857- 1942)와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 1853­1928)는 전자기학에 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소위 전자론(electron theory)이라는 이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들의 논의에서 나오는 전자 개념은 전적으로 전자기학 내의 이론적인 수준에서 다루어진 개념이었지, 아직 구체적인 실험에 의해서 전자 그 자체의 존재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음극선 연구가 주로 자유 하전입자에 초점이 모아져 있었다면 분광학적 연구는 원자 내에서 움직이는 속박된 하전입자에 대한 논의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온네스(Heike Kammerligh onnes, 1853- 1926)가 이끄는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의 물리학 연구소에서 사강사(Privatdozent)로 일하던 제만(Pieter Zeeman, 1865­ 1943)은 속박된 하전입자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내게 되는 새로운 현상을 발견했다. 즉 1896년 12월 분광학을 연구하던 제만은 자기장에서 나트륨 D-선들의 스펙트럼 선이 갈라지는 소위 제만 효과를 발견했던 것이다. 당시에 전자기학 분야의 대가이며 역시 네덜란드 과학자였던 로렌츠는 제만이 발견한 이 현상을 개별 원자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전자론으로 해석하여 역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계산했다. 제만의 실험과 로렌츠의 해석으로 계산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 즉 e/m는 107 e.m.u. g?1 크기로서 몇 달 뒤에 톰슨이 측정한 결과와 상당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톰슨의 음극선 실험이 나오고 몇 달 뒤에 피츠제럴드(George Francis FitzGerald, 1851­1901)는 음극선이 자유 '전자' (electron)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이리하여 자유 전자와 속박된 전자는 서로 같은 차원에서 논의될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1896년 베크렐이 우라늄 방사선을 발견한 이래 퀴리 부부와 러더퍼드 등에 의해서 진행된 방사선에 관한 연구 역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원자 구성입자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확산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1898년 이후 카우프만(Walter Kaufmann, 1871­1947)과 비헤르트(Emil Wiechert, 1861­1928)는 아주 정밀하게 톰슨이 측정한 전자의 하전량과 질량의 비를 아주 정확히 측정하여 톰슨의 실험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더 나아가 카우프만은 1901년 전자의 속도가 빛의 속도의 1/3에서 1/30 정도로 빠르게 달릴 때 속도 증가에 따라 전자의 겉보기 질량이 증가하는 속도를 목격했는데, 이런 관측 결과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전자기적 세계관이 부상하고 결과적으로 특수 상대성 이론이 등장하는 촉발 역할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실험 결과가 나오면서 1899년 이후 현대적인 의미의 전자 개념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정착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톰슨은 자신이 과학자로 활동하는 동안 '전자'(electron)라는 단어를 쓰기를 꺼려했다. 사실상 '전자' 발견 공로로 노벨상을 받을 때에도 그는 전자라는 말 대신에 '미립자'(corpuscle)라는 말을 사용했다. 톰슨은 소위 전자론에 대해 저항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이 발견한 미립자의 전기적 특성도 물질 입자와 에테르와의 상호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흔히들 이야기하는 것처럼 톰슨을 전자의 발견자라고 할 수 있을까? 전자를 발견한 후보자들로는 톰슨 이외에도 실험적인 차원에서는 제만과 비헤르트를 들 수 있고, 이론적 차원에서는 전자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로렌츠와 라모 등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톰슨이 유일한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1897년 그가 제창한 미립자 이론이 원자 구조의 해명과 전자 개념의 출현에 기여한 바가 크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톰슨이 당시에 실험 과학의 중심지였던 캐번디시연구소 소장이었다는 것도 톰슨이 전자 발견자로 기록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캐번디시연구소를 중심으로 한 톰슨의 학파가 과학계 여러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고, 톰슨의 제자들이 톰슨이 발견한 전자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성공적으로 계승, 전파했다는 것도 전자 발견자로서 톰슨의 이미지가 부각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실제로 톰슨은 당시 어떤 다른 과학자들보다도 전자의 발견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가장 잘 홍보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톰슨이 전자가 실재함을 실험적으로 잘 보였기 때문에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철학자 핵킹(Ian Hacking)은 과학적 실재론을 논의함에 있어서 실험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핵킹의 주장에 입각해서 보면 톰슨이 전자의 발견자로 기록된 이유는 그가 전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실험적 현상을 정확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즉 전자를 분리해내고, 측정하고, 조작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보여줌으로써 전자가 실재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톰슨이 전자를 발견했다고 본다는 것이다.

1900년 이후 전자의 속성은 계속 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서서히 발견되어 나갔다. 타운전트(John Sealy Edward Townsend, 1868-1957)는 이온화 작용에 관한 연구를 통해 전자의 움직임을 탐구해나갔으며, 1903년 해럴드 윌슨(Harold A. Wilson)---구름상자를 창안한 윌슨과는 다른 사람임---은 톰슨의 구름 방법을 개량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했다. 윌슨은 급작스런 팽창에 의해 이온화된 구름상자 속에서 형성되는 구름이 중력에 의해서 떨어지는 비와 전기장에 의해 떨어지는 비를 측정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측정했다. 마침내 1913년 밀리컨(Robert A. Millikan, 1868­1953)은 자신의 유명한 유적 실험을 통해서 전자의 하전량을 아주 정확히 측정함으로써 분명한 의미에서 단일 전자의 실재가 실험적으로 증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

REFERENCES

[1] J. J. Thomson, "Cathode Ray," Philos- ophical Magazine 44 (1897), pp. 293-316.
[2] Isobel Falconer, "Corpuscles, Electrons and Cathode Rays: J. J. Thomson and the 'Discovery of the Electron',"British Journal for the History of Science 20 (1987), pp. 241-276.
[3] Per F. Dahl, Flash of the Cathode Rays: A History of J. J. Thomson's Electron (Institute of Physics Publishing, Bristol,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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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립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거품 상자(bubble chamber)의 원조인 윌슨의 구름상자(cloud chamber), 혹은 안개상자(Nebelkammer)는 1930년대 이후 우주선(cosmic ray) 분야에서 원자구성입자를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장치였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원자물리학 실험 분야가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윌슨 자신은 원자물리와는 거리가 먼 기상학에서 활동했던 과학자였다. 70여년에 걸친 긴 학문 여정 속에서 윌슨은 항상 날씨와 관련된 분야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원자물리학 분야에서 쓰이는 구름상자가 기상학을 연구하던 윌슨에 의해서 등장하게 된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윌슨이 성장하던 빅토리아 시대의 학문적 특성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그 어느 시대의 과학자들보다도 자연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데 열광적이었다. 빅토리아인들에게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것은 비단 과학자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탐험가들은 사막, 정글, 남극과 북극의 빙산 등을 탐험했으며, 화가들은 폭풍우, 산림, 절벽, 폭포 등을 화폭에서 재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기상학과 광학 분야에서 자연 현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모방실험(Mimetic experimentation)에 열중했다. 즉 그들은 푸른 하늘, 먼지, 구름, 안개, 비, 천둥, 번개 등의 기상학 현상을 실제로 실험실에서 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빅토리아 시대의 이런 모방 실험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원자물리학 분야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형태의 윌슨의 구름상자는 1911년이 되서야 등장하게 되지만, 윌슨의 이 작업은 1890년대에 그의 기상학 분야에서 추구했던 모방 실험의 결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윌슨(Charles Thomson Rees Wilson, 1869-1959)은 15세에 맨체스터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의 오웬스 칼리지에 의대 학생으로 입학해서 1887년 18세의 나이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뒤 그는 약 1년여 동안 철학, 라틴어, 그리스어를 공부하다가 케임브리지에서 장학금을 얻어 입학한 뒤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었다. 1888년부터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한 윌슨은 1892년 케임브리지 대학의 자연과학 분야 졸업 시험인 자연과학 트라이퍼스(Natural Science Tripos)를 마쳤다.

오웬스 칼리지 시절부터 윌슨은 방학을 이용해서 스코틀랜드 산악 지역을 탐험했다. 스코틀랜드의 수려한 산하를 답사하면서 윌슨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술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소위 훔볼트식의 과학 연구 방식에 심취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다른 많은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그의 형제들과 함께 사진기를 가지고 이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구름에 대해서 사진을 찍곤 했다. 1927년 아서 컴프턴(Arthur Holly Compton, 1892-1962)과 함께 고에너지 광양자 산란 연구에 대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윌슨은 당시 북부 산악 지대에서 느낀 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894년 9월 나는 벤 네비스(Ben Nevis) 정상에 있는 기상대에서 몇 주를 보냈다. 태양이 언덕 마루 주변의 구름 위에 비출 때 보였던 놀라운 광학 현상, 특히 태양 코로나 주변이나 언덕 마루에 드리워진 그림자 주변의 컬러 고리, 혹은 안개나 구름 위의 후광 등에 대한 관찰 등은 내 관심을 크게 자극했고, 나로 하여금 그것들을 실험실에서 흉내내도록 만들었다." 벤 네비스를 여행하는 동안 윌슨이 관찰했던 광학적, 전기적 현상은 그 뒤 윌슨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그것은 그가 이 이후 평생 동안 하게 될 과학 연구 목표가 되었다. 1959년 윌슨이 죽기 직전까지 기상 광학과 대기 전기는 그의 핵심 연구 과제였던 것이다.

물리 실험조교와 튜터를 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젊은 윌슨은 케임브리지에서의 어려운 생계를 이어나갔으나,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하기 위한 시간을 낼 수는 없었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요크셔의 브래드퍼드 그래머스쿨(Bradford Grammar School)에서 몇 달간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오히려 전보다도 자유시간을 갖기가 더 어려웠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그는 캐번디시연구소에 등록한 의학도를 위해 물리학을 가르치는 실험교수(demonstrator)로 일하면서 캐번디시연구소와 다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 때 캐번디시연구소에는 톰슨(J.J. Thomson, 1856-1940)의 지도 아래 러더퍼드(Ernest Rutherford, 1871-1937), 타운전트(John Sealy Edward Townsend, 1868-1957) 등 우수한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었고, 윌슨은 휴식 시간을 이용해 이들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윌슨 이전에도 몇몇 과학자들이 구름을 형성시키는 실험을 했는데, 그 가운데에서 스코틀랜드 물리학자 에이트킨(John Aitken, 1839-1919)의 실험이 윌슨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에이트킨은 윌슨과 마찬가지로 스코틀랜드 인으로서 벤 네비스에서 연구했던 사람이었다. 당시 에이트킨은 구름 실험을 통해서 과포화 상태의 공기 중에서 먼지 입자가 물방울을 응결시키는 핵으로 작용한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그는 1888년 과포화 공기의 응결을 연구하기 해서 공기 중의 먼지 입자의 수를 세는 소위 먼지 상자(dust chamber)를 고안해내었는데, 에이트킨의 이 먼지 상자가 윌슨의 구름상자의 원형이 되었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서 기상학 현상에 강한 인상을 받고 돌아온 윌슨은 구름의 광학적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윌슨은 에이트킨과 유사한 팽창 장치를 이용해서 수증기를 응결시켜 자신이 벤 네비스에서 보았던 컬러 고리 모양의 광학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1895년 3월에는 먼지 없는 공기 속에서 수증기가 응결하는 최초의 실험장치를 만들었다. 이 실험에서 윌슨은 응결을 위한 팽창비(expansion rate)---여기서 팽창비는 팽창 후의 부피와 팽창 전의 부피의 상대적 비율로 정의된다--를 찾아내려고 노력했고, 초기 온도가 16.7 °C일 때 임계 팽창비가 1.258이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이보다 낮은 팽창비에서는 먼지가 없는 공기 중에서 응결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발견했다. 이렇게 임계 팽창비를 정확하게 측정해가는 과정에서 곧이어 대륙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광선'들도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윌슨이 구름상자를 연구하던 캐번디시연구소에서는 1884년부터 J.J. 톰슨이 소장으로 이끌면서 물질의 근본 구성을 연구하는 분석적 연구 전통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이런 분석적 연구 전통은 훔볼트적이며 형태론적인 모방 실험 전통과는 상당히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윌슨이 기상학적 전통에서 개발한 실험 장치는 캐번디시의 분석적인 연구 전통에 속했던 과학자들이 사용하게 되었고, 결국 구름상자는 원자 세계를 연구하는 장치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훗날 원자 물리학 분야에서 훌륭하게 사용되게 될 윌슨의 구름상자는 물질의 구성에 대해 연구하는 캐번디시연구소의 분석적 연구 전통과 자연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시키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방 실험의 전통이 합쳐져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윌슨은 1888년부터 1892년까지 케임브리지 학생으로서, 그리고 1895년부터는 케번디시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물질의 구조를 연구하는 물리학자들의 연구 스타일을 배웠다. 더구나 당시 케임브리지 대학은 이온과 같은 기본적인 전하량을 가정해서 물질을 연구하던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이리하여 케임브리지의 이온 물리학 전통은 자연스럽게 윌슨의 구름상자 발명과 궤를 같이 하게 된 것이다.

1896년 새해 전세계 과학자들은 독일의 뢴트겐(Wilhelm Konrad Rntgen, 1845-1923)이 발견한 새로운 종류의 광선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뢴트겐이 찍은 반지를 낀 자기 처의 사진은 논문 발표와 함께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수많은 과학자들이 소위 '광선' 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는 앙리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1912)가 뢴트겐이 찍은 사진을 파리의 아카데미 회의에서 회람시켰고, 이런 일이 있은 뒤 얼마 안되어 1896년 3월 베크렐(Antoine Henri Becquerel, 1852-1908)은 우라늄에서 나오는 방사선을 발견했다. 뢴트겐의 새로운 발견은 캐번디시연구소의 과학자들로 하여금 음극선 연구에 다시 지대한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고, 결국 이듬해인 1897년 4월 30일 J. J. 톰슨은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의 금요 저녁 회의에서 음의 전하를 띤 원자 이하의 미립자, 즉 전자를 발견했다고 발표하게 된다.

뢴트겐의 새로운 광선 발견 소식에 접합 윌슨은 이 새로운 광선을 자신이 만든 구름상자에 쏘아보기를 바랬다. 윌슨은 1896년 톰슨의 조수인 에버릿(Ebenneezer Everett)에게 X-선 관을 빌려 이것을 자신의 구름상자에 투사했다. 이 실험에서 윌슨은 X-선에 의해 형성된 핵 주위에 응결이 생기는 팽창비가 1.25임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1896년 3월에 발견된 우라늄선도 X-선과 마찬가지로 팽창비 1.25에서 응결을 증가시키는 것을 발견했다. 우라늄선과 X-선에서 모두 같은 팽창비에서 짙은 안개가 생기는 것을 확인한 윌슨은 응결핵이 이 새로운 광선에 의해 생기는 이온들의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898년까지의 실험에서 윌슨은 구름상자에서 나타나는 응결 현상을 몇몇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찾아냈다. 우선 먼지가 없는 공기에서 팽창비가 1.25 이하일 때는 응결이 생기지 않는다. 그 뒤 1.25에서 1.31 사이에는 분명한 형태의 빗방울이 생겨나다가 팽창비가 1.31일 때 빗방울의 수가 급격히 증가한다. 마지막으로 팽창비가 1.37 이상일 때는 짙은 안개만이 형성된다. 또한 이 때를 즈음해서 윌슨은 응결핵의 전하가 차이가 나면 빗방울이 생기는 팽창비가 차이가 나는 것도 발견했다. 즉 두 배의 전하량을 가진 응결핵은 팽창비가 1.25에서 빗방울이 생기게 만드는 반면, 단위의 전하량을 지닌 응결핵은 팽창비가 1.31이 되야 빗방울이 생기게 된다.

1898년 말 윌슨은 그 동안의 실험을 정리해서 {철학연보}(Philosophical Transac- tions)에 하나의 긴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윌슨은 X-선, 우라늄선, 자외선, 그리고 그 외 다른 기작에 의해 기체 속에서 응결핵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윌슨은 이런 체계적인 실험이 자신이 본래 의도했던 연구 방향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즉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체계적으로 실험을 하는 동안 윌슨의 장치는 대기 현상을 재현하는 장치가 아니라 이온들의 성질을 연구하는 장치로 전락해버렸던 것이다. 훗날 윌슨의 구름상자가 원자구성입자를 연구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연구 방향의 변화는 과학 발전에 있어서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상학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이 있었던 윌슨에게는 이것은 원래 자신이 목적한 바가 아니었다. 결국 윌슨은 구름상자가 천둥과 번개와 같은 자연 현상을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구름상자를 포기하고 이온화를 측정하는 전기적 장치인 검전기를 자신의 새로운 실험 장치로 채택하게 된다. 이후 윌슨의 주요 관심사는 대기 전기를 연구하는 것이 되었고, 1910년 12월까지는 그는 구름상자와는 거리가 먼 곳에서 연구 활동했다.

실제 비가 형성되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비의 형성과정을 실제로 사진을 찍어 보는 것도 중요하다. 윌슨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름과 같은 자연 현상을 사진으로 찍곤 했다. 1908년 윌슨은 당시에 워딩턴(A.M. Worthington)에 의해 출판된 『물튀김 연구』(A Study of Splashes)에 나오는 물방울과 물이 튀기는 모습에 대한 고속촬영 사진에 많은 흥미를 느꼈다. 윌슨은 다시금 구름 현상을 실험실에서 재현해서 그것을 촬영하고 싶어했다. 즉 사진기를 이용해서 음전하 입자와 양전하 입자가 서로 결합해서 구름이 형성되는 과정을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결국 사진 기술을 이용해서 비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사하려는 윌슨의 의도로 말미암아 윌슨은 기상학에서 다시 이온 물리학을 연구하는 방향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고, 이런 연구 테마의 변화 과정에서 윌슨의 구름상자가 입자의 궤적을 촬영하는 장치로 이용되게 된 것이다.

1910년 12월 윌슨은 다시 자신의 구름상자 장치로 돌아왔다. 그는 이온화된 입자들을 이용해서 구름이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했고, 이 과정에서 이온화된 입자들의 궤적을 실제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구름상자가 탄생되었다. 1911년 4월 윌슨은 알파 입자, 베타 입자, 감마선, X-선 등이 지나가는 모습에 대한 희미한 사진을 발표했다. 이어 다음 해인 1912년 윌슨은 이들 입자들의 궤적에 대한 아주 선명한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알파 입자가 물질과 충돌해서 휘는 모습을 잘 보여준 선명한 사진은 당시 브래그(William Henry Bragg, 1862-1942)가 예측했던 알파 입자 궤적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많은 과학자들에게 구름상자의 잠재적인 위력을 인식하게 만들어 주었다.

윌슨의 구름 상자가 과학자들 사이에서 급속도로 퍼지게 된 데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과학 실험 장치를 제작, 판매해왔던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The Cambridge Scientific Instrument Company)의 역할도 컸다. 윌슨의 구름상자가 나온 바로 이듬해인 1913년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는 상업용 구름상자를 판매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이 이 장치를 쉽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발전해나갔다. 1919년 러더퍼드는 톰슨의 후임으로 맨체스터에서 캐번디시 연구소로 옮겨왔는데, 거기에는 다케오 시미츠(Takeo Shimizu)라는 일본 학생이 있었다. 현재의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연구소에는 1920년에 찍은 당시의 학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학생 사진 가운데 나타나 있는 유일한 동양인 사진의 주인공이 바로 다케오 시미츠이다. 러더퍼드는 다케오 시미츠에게 윌슨의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알파 입자와 질소 원자핵의 충돌을 점검해 볼 것을 권유했고, 1921년 다케오 시미츠는 빠르고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제작했다. 다케오 시미츠는 단순조화운동으로 움직이는 피스톤으로 압축과 팽창을 하게 함으로써 적정 시간 내에 많은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구름상자를 개선해주었다. 당시 케임브리지 과학기기회사는 시미츠가 자동 구름상자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도록 도와주었고, 그에게 로열티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타게오 시미츠는 가정 문제로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고, 그 뒤 소식이 끊겨 향후의 구름상자의 개선 과정에는 참가하지 못하게 된다.

다케오 시미츠가 일본으로 떠나 더 이상 구름상자를 개량하는 작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핵반응을 실험하는 작업은 1921년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캐번디시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던 패트릭 블랙킷(Patrick M.S. Blackett, 1897-1974)의 몫이 되었다. 블랙킷은 다케오 시미츠의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개량하는 과정에서 단순 조화 운동으로 움직이는 피스톤을 포기하고 갑작스럽게 팽창시키는 윌슨의 원래 장치로 다시 복귀했다. 물론 문제는 갑작스럽게 팽창시키면서도 어떻게 하면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자동화된 장치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블랙킷의 새로운 자동화된 구름상자는 약 10-15초에 한번씩 사진을 찍을 수 있었는데, 1924년 그는 이 실험 장치로 질소 원자가 붕괴하는 과정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1925년 이후 블랙킷은 계속 구름상자를 개선해 나갔다. 정확한 과포화 상태에서 알파 입자를 투사하고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블랙킷은 아주 복잡한 행정 경로를 지닌 피스톤 운동으로 유지되는 자동화된 구름상자를 고안해야만 했다. 1920년대의 구름상자에는 아직 전자공학적 장치가 이용되지 않았으며, 피스톤의 운동과 사진의 셔터도 복잡한 기계 장치에 의해서 조절되었다. 이외에도 블랙킷은 두 개 경사 렌즈 카메라를 이용해서 가장 최적의 촬영 조건을 만들기 위해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1926년 막스 보른(Max Born)이 양자역학적인 충돌 이론을 제창한 이래로 양자물리학자들은 충돌 현상과 연관된 다양한 양자역학적 산란식을 유도해냈다. 하지만 당시 러더퍼드를 비롯한 중진 과학자들은 알파 입자의 산란과 같은 핵 현상에 양자역학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충돌 현상과 연관된 양자역학적 논의는 막스 보른, 디랙(Paul Adrien Maurice Dirac, 1902-1984),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1904-1967), 모트(Nevill Francis Mott, 1905-1996) 등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됐는데, 특히 모트는 다양한 충돌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양자역학적 논의를 전개했다. 그는 1929년 보스-아인슈타인 통계에 따르는 알파 입자들 사이의 충돌 과정을 양자역학적으로 기술하면서 새로운 양자론적 산란과 고전적인 러더퍼드 산란 사이의 비를 계산했는데, 그 비율은 산란각이 45˚일 때 최대값이 2로 나타났다. 양자역학적 산란과 고전적 산란의 비인 이 2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기만 하면 충돌 과정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었다.

1930년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과 블랙킷은 이 문제의 비율인 2를 실험적으로 확인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충돌 과정에서 양자역학적 기술이 유효함을 결정적으로 증명했다. 당시 채드윅은 이 과정을 자신이 러더퍼드와 오랫동안 함께 사용해오던 섬광계수기 방법을 통해 입증했으며, 블랙킷은 자신이 1920년대를 통해 개량을 거듭해오던 구름상자에 의한 사진 촬영에 의해 이 사실을 입증했다. 채드윅과 블랙킷의 이 두 실험은 양자역학의 유효성을 분명하게 입증했다는 것 이외에 이 실험들이 그들에게 있어서 전자 장치를 이용하지 않은 마지막 실험이었다는 역사적 의미도 있다. 우선 채드윅은 이 실험 이후 섬광계수기 방법을 버리고 새로운 전자공학적 장치를 도입함으로써 1932년 새로운 중성자를 발견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931년부터 블랙킷도 자신의 구름상자에 전자공학적 장치를 도입했다. 케임브리지의 구름상자에 전자공학적 장치가 결합하게 되는 데에는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주세페 오키알리니(Giuseppe P. S. Ochialini)가 커다란 역할을 했다.

1924년 한스 가이거(Hans Geiger, 1882-1945)와 발터 보테(Walther Bothe, 1891-1957)는 광양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한 실험을 위해 새로운 동시계수법에 의한 실험 장치를 고안했다. 동시계수법은 1928년 가이거와 뮐러가 개발한 더욱 민감한 계수기와 결합되면서 우주선 분야에서 핵심적인 장치로 부상되었다. 1930년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브루노 로시(Bruno Rossi)는 2중 동시계수기보다 발달된 형태인 3중 동시계수기를 개발했는데, 그의 전자공학적 기법은 오키알리니에게 전수되었다. 1931년 오키알리니는 케임브리지에 도착해서 블랙킷을 도와 전자공학적인 동시계수 장치를 구름상자와 결합시켰다. 이리하여 우주선이 구름상자에 도착하면 이 신호를 전자공학적 장치가 감지해서 정확한 시간에 구름상자를 팽창시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블랙킷과 오키알리니는 이 새로운 전자공학적으로 조절되는 새로운 구름상자를 이용해서 칼 앤더슨(Carl David Anderson, 1905-1991)이 양전자를 확인한 직후에 바로 우주선에서 양전자의 존재와 디랙의 이론의 유효성을 확인했다. 이리하여 윌슨의 구름상자는 블랙킷의 개량과정을 거쳐 오키알리니의 전자공학적 기법이 결합되면서 우주선 및 고에너지 분야의 연구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장치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1947년 블랙킷은 구름상자의 개량과 우주선 분야에서의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윌슨의 구름상자는 원자 구성 입자의 연구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수많은 캐번디시 연구자들이 이 장치를 활용했다. 하지만 정작 구름상자를 개발한 윌슨 자신은 캐번디시 연구소 동료들이 갔던 연구 방향을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이 날씨에 대한 연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기상학에 많은 관심이 있었다는 것 이외에도 지리적인 요인도 함께 작용했다. 즉 그는 캐번디시연구소가 원자 물리학 연구에 열을 올리고 있는 동안 캐번디시연구소로부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양물리연구소(Solar Physics Laboratory)로 자신의 실험 장치를 옮겼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90세에 뇌우에 관한 논문을 마지막으로 쓰기까지 기상학 연구에 몰두했다.

참 고 문 헌

[1] C.T.R. Wilson, on the Condensation Nuclei produced in Gases by the Action of Rontgen Rays, Uranium Rays, Ultra-violet Light, and other Agents," Philosophical Transations 192 (1899), pp. 403-453.
[2] C.T.R. Wilson, on a Method of making Visible the Paths of Ionising Particles,"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85 (1911), pp. 285-288.
[3] C.T.R. Wilson, on an Expansion Apparatus for making Visible the Tracks of Ionising Particles in Gases and some Results obtained by its Use,"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87 (1912), pp.277-292.
[4] P.M.S. Blackett and G.P.S. Occhialini, "Some Photographs of the Tracks of Penetrating Radiation,"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139 (1933), pp. 699-727.
[5] Peter Galison, Image and Logic: A Material Culture of Microphysic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Chicago,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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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왜 푸른가 하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해왔던 질문이었다. 높은 고도에서 천정(zenithal) 방향의 하늘은 분명하게 푸른빛을 띠며, 중간 고도에서도 대개의 경우 하늘은 푸른빛을 나타내곤 한다. 예로부터 하늘이 푸른 이유에 대한 다양한 유형의 설명이 있어 왔다. 우선 근대 과학의 초창기에 많은 과학자들은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해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하늘이 푸른 이유가 빛의 산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은 19세기 말에 와서야 분명한 형태로 밝혀졌다. 1871년 영국의 존 윌리엄 스트럿, 즉 제 3대 레일리 경(John William Strutt, from 1881 the third Lord Rayleigh, 1843-1919)은 빛의 산란 이론을 바탕으로 해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처음으로 이론적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레일리의 산란 이론에 의하면, 하늘이 푸른 이유는 대기 중에서 빛이 빛의 파장의 약 1/10 이하의 미립자를 통과할 때 생기는 산란의 세기가 파장의 4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즉 태양 빛이 대기 중을 통과할 때 짧은 파장의 빛일수록 더 많이 산란되기 때문에 하늘이 푸른빛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푸른빛(파장의 길이 400 nm)의 산란율은 붉은빛(파장의 길이 640 nm)에 비해 약 6배 가량 크기 때문에 푸른빛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다. 같은 원리로 해질 무렵과 해뜰 무렵 하늘이 붉은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해질 무렵과 해뜰 무렵에 태양 빛은 더욱 먼 거리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푸른빛은 거의 다 산란되고, 지구에 직접 도달하는 빛은 붉은색이나 주황색을 띠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뉴턴의 초기 해석

서양에서 하늘이 푸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이미 르네상스 시대부터 있어왔다. 르네상스 시대의 장인이자 예술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대기 중의 미세하고 혼탁한 물체에 의해 대기 중에 푸른빛이 생긴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현대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리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런 설명 이상의 더 자세한 이론적인 논의는 전개하지 않았다.

1672년 경 뉴턴(Isaac Newton, 1642- 1727)은 그의 광학에 대한 글에서 하늘이 푸른 이유는 물방울 같이 투명한 물질로 이루어진 얇은 막에서 빛이 반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즉 필름이 얇을 때는 검은 색으로 나타나다가, 두꺼워지면서 점점 푸른색을 띠게 되고, 계속 흰색, 노란색, 붉은색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뉴턴은 하늘에서 나타나는 푸른색을 자신의 소위 "뉴턴의 고리" (Newton's Ring)에 중앙에 생기는 검은 점에서 가장 가까운 푸른빛이라는 뜻에서 "첫번째 푸른색"(the blue of the first order)이라고 불렀다.

람베르트의 법칙과 괴테의 색깔이론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푸른 하늘에 대한 설명과는 별도로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서 빛이 대기 중에서 흡수되는 비율에 대한 정량적인 연구가 행해졌다. 1729년의 프랑스의 과학자 피에르 부게르(Pierre Bouguer, 1698-1758)는 그의 {광학론} (Essai d'optique sur la gradation de la lumire)에서 균일한 투명 매질 속을 투과하는 빛의 세기는 매질의 경로 길이에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한다는 것을 밝혔다. 이와는 독립적으로 1760년 스위스-독일 과학자인 람베르트(Johann Heinrich Lambert, 1728-1777)는 광도계(photometry)를 비롯한 몇몇 실험 장치를 이용해서 부게르의 결과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이후 사람들은 빛이 대기 중에서 강도가 지수함수적으로 감소하는 것을 '람베르트 법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하늘의 푸른 이유를 빛의 굴절과 반사에 의해 설명하려는 뉴턴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독일에서는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뉴턴의 생각에 대한 낭만적 반발도 나타났다. 뉴턴의 색깔 이론에 반발을 들었던 독일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의 색깔이론(Farbenlehre)을 들 수 있다. 괴테는 하늘의 색을 근원현상(Urphnomen)으로 해석했는데, 그는 이 근원 현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 현저한 혼동을 불러일으켜서 하늘에 보이는 푸른색이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클라우지우스의 대기 상층부 기포설

19세기 중반 뉴턴의 입장을 받아들여 뉴턴의 설명에 대한 엄밀한 수학적 분석을 했던 사람은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47-1853)였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으로 유명한 그는 젊었을 때 하늘이 푸른 이유와 황혼 현상, 그리고 대기 중에서의 빛의 산란 및 흡수에 대한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을 전개했다. 그가 이와 같은 일을 했었다는 것은 과학계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1847년부터 클라우지우스는 대기 중을 통과하면서 반사된 빛의 세기와 대기 중에서의 빛의 산란에 대한 일련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초창기 논문에서도 훗날 열에 관한 그의 논문에서 보여지는 것과 같은 분명한 연구 스타일이 나타나고 있다. 그는 분명한 물리적 사실들을 선택한 뒤 미시적 모형을 이용해서 현상에 적합한 수학적 방정식을 전개했다. 클라우지우스는 푸른 하늘을 비롯한 대기의 굴절과 반사 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기본적으로는 뉴턴의 입장을 따랐지만, 하늘이 푸른 이유가 구형의 물방울에 의해 빛이 반사되어 생긴다고 하는 뉴턴과 존 허셜(John Herschel, 1792-1871)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했다. 아주 엄밀하고 긴 수학적 취급을 한 뒤 클라우지우스는 뉴턴과 허셜의 주장과는 달리 하늘이 푸른 이유는 대기 상층부에 안쪽에 공기가 가득 차 있는 빈 물방울 기포가 존재하고 이것에 반사되어 푸른빛을 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클라우지우스 이론에 대한 반론

클라우지우스의 주장대로 대기 상층부에 기포가 존재할 수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해 몇몇 영국 과학자들은 기상학적인 관찰과 실험을 통해서 클라우지우스의 견해를 반론을 제기했다. 우선 영국의 포브스(James David Forbes, 1809-1868)는 하늘이 푸른 이유는 가스 상태와 액체 상태 사이의 아주 '특별한' 상태에 의해 나타난다고 주장했었다. 1853년 영국의 필립스(Reuben Phillips)는 1844년의 헨리의 실험과 1846년 월러(Augustus Waller)의 관찰을 근거로 클라우지우스의 주장에 들어있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1844년 헨리는 미국철학회에서 공기가 들어 있는 비누 방울에 대한 실험에 대해서 발표했는데, 당시 그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서 비누 방울의 두께가 일정할 경우 내부 공기에 대한 압축력은 지름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이를 근거로 필립스는 지름이 아주 작은 물방울의 압축력은 대기압의 약 2-3 배가 되기 때문에 내부의 공기를 밀어내고, 이에 따라 대기 기포가 생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클라우지우스가 주장하는 대기 상층부의 물방울 기포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1846년 영국 켄싱턴(Kensington)에서 활동하던 월러는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관찰한 다양한 물방울의 모습에 대한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현미경을 가지고 수증기, 농무(fog), 구름, 연무(mist), 우박 등에 기상현상에 대해서 정밀한 관찰을 했는데, 그의 실험에서도 수증기의 기포 구조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 월러의 관찰 결과에 따라 필립스는 대기 상층부에 기포가 존재한다는 클라우지우스의 주장은 신빙성이 희박하다고 주장했다.

브뤼케의 카멜레온과 푸른 하늘

1850년대부터 굴절과 반사에 의해 하늘이 푸른 현상을 설명하려는 뉴턴과 클라우지우스의 주장과는 다른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다. 그것은 미립자 산란에 의해서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이었다. 1853년 독일의 에른스트 브뤼케(Ernst Wilhelm von Brcke, 1819-1892)는 카멜레온의 색 변화에 대한 연구로부터 혼탁한 매질 속의 밝은 색소에서 산란되는 빛이 카멜레온의 색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런 현상을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는 데 활용했다. 원래 그는 동물 생리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 현상을 발견했지만, 물리학 분야의 독자를 의식해서 동물생리학 학술 잡지가 아닌 물리학 잡지에 이 발견 사실을 출간했다. 브뤼케의 주장과 필립스의 반론이 나온 뒤 클라우지우스는 이들 주장에 자신의 종합적인 의견을 개진한 뒤, 이후 그는 대기 상층부의 기포의 존재를 가정해서 푸른 하늘을 설명하려는 자신의 논의를 중단하게 된다.

한편 브뤼케는 독일의 유명한 생리학자 요하네스 뮐러(Johannes Mller, 1801-1858)의 제자였다. 요하네스 뮐러는 1833년 베를린 대학에 자리잡은 뒤 그곳에서 생리학, 해부학, 동물 분류, 병리학 등의 연구 전통을 세운 학자였다. 브뤼케는 베를린 대학에서 헤르만 헬름홀츠(Hermann Helmholtz, 1821-1894), 뒤 부아-레몽(Emil Du Bois-Reymond, 1818- 1896), 카를 루트비히(Carl Ludwig, 1816- 1895) 등과 친교를 맺었는데, 그들은 유기체를 물리화학적으로 이해하려는 기계론적 생각을 가지고 연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연구 프로그램에서 눈은 아주 좋은 연구 소재였다. 브뤼케는 광학 매질, 잔상, 척추동물 눈의 배경으로부터의 빛의 반사와 같은 주제를 연구해서 1847년 [인간 눈의 해부학적 기술]이라는 인간의 눈에 대한 표준적 저작을 남기기도 했다.

브뤼케의 영향을 받아 헤르만 헬름홀츠도 1851년부터 눈과 생리광학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1856년부터 {생리광학 편람} (Handbuch der physiologishcen Optik)이라는 방대한 저작을 집필한 그는 사람이 눈이 푸른 까닭은 눈 속의 부유 입자들의 작용 때문이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실제로 서양의 어린아이의 눈은 어른에 비해 훨씬 강한 푸른빛을 띠게 되는데, 어린아이는 아직 황색에서 짙은 갈색에 이르는 멜라닌 색소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아 검은 배경의 눈 속에서 푸른빛만이 보이기 때문이다.

틴들 효과와 푸른 하늘

오늘날에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대기중의 미립자에 의한 빛의 산란 현상으로 하늘이 푸른 까닭을 설명하려는 구체적인 실험은 1868년 영국의 존 틴들(John Tyndall, 1820-1893)에 의해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틴들은 과학 분야의 연구는 물론 과학 교육 및 강연 활동과 같은 과학 대중화에도 많은 공헌을 한 과학자였다. 1853년 틴들은 런던의 왕립연구소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왕립연구소의 책임자인 마이클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와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패러데이의 뒤를 이어 1867년부터 1885년까지 왕립연구소의 책임자로 일하면서 이곳에서 대중을 상대로 과학 실험과 강연을 하는 등 과학 연구 및 과학 대중화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당시 틴들은 몇몇 유기 물질에 강한 빛을 쪼일 때 푸른빛이 발생하는 것에 주목했다. 특히 그는 부틸질산염(butyl nitrite)에 약간의 염산을 혼합한 기체의 경우 이런 현상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남을 확인했다. 이 부틸질산염 증기는 약간의 염산과 혼합될 때 태양이나 강한 전기 아크등에 의해서 쪼여지면서 화학적 분해 작용을 일으키고 구름을 형성시키는데, 1-2분 뒤 이 구름들은 푸른빛을 발산시킨다. 틴들은 이 때 나오는 푸른빛은 이탈리아의 푸른 하늘과 견줄 만하다고 지적했다.

이외에도 틴들은 이 유기 물질을 투과한 푸른빛이 완전 편광된 빛임을 확인했는데, 이것은 태양 빛이 완전 편광이라는 당시의 관찰 결과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이론에 의하면 태양 빛이 완전 편광되는 것은 브루스터 법칙(Brewster's law)에 의해서만 설명이 되었다. 1811년 스코틀랜드의 브루스터(David Brewster, 1781-1868)는 빛이 굴절 표면을 어떤 각도, 즉 편광 각도로 입사하면 반사된 빛은 완전 편광됨을 발견했다. 더 나아가 그는 이 편광 각도의 탄젠트가 접촉하고 있는 두 매질 사이의 굴절률의 비와 같다는 수학적 관계도 도출했다. 틴들은 자신의 실험에서 빛이 완전 편광된 것은 브루스터 법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즉 태양 빛이 완전 편광인 것은 굴절과 반사에 의해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틴들은 자신이 행한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역사상 최초로 분명한 형태로 하늘이 푸른 현상을 실험실 상에서 재현하는 데 성공했고, 이런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대기중의 미립자에 의해 빛이 산란되는 현상을 '틴들 효과'(The Tyndall effect)라고 부르게 되었다. 강한 아크등 불을 먼지 입자에 쪼일 때, 빛이 산란되는 것을 연구한 뒤 틴들은 공기 중에 떠 있는 유기 물질을 파괴하기 위해 열을 사용하게 되었다. 열로 유기체를 파괴하는 실험 장치를 사용한 것이 계기가 되어 틴들은 1870년 이후 생명체의 자연발생설에 반대하면서 파스퇴르의 입장을 지지하게 된다.

레일리와 푸른 하늘에 대한 이론적 설명

틴들의 실험 결과가 발표된 직후 곧바로 하늘이 푸른 이유에 대한 이론적 설명이 존 스트럿에 의해 제안되었다. 1871년 존 스트럿은 틴들 효과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이 논문에서 존 스트럿은 빛의 산란의 세기가 파장의 4제곱에 반비례함을 수학적으로 증명하여,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이에 따라 뉴턴과 클라우지우스 이론은 푸른 하늘을 설명하기 위한 이론의 대열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존 스트럿이 하늘이 푸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은 현재 우리가 하는 설명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그는 현재의 우리처럼 맥스웰의 전자기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설명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에 전자기학을 설명할 때 많이 통용되던 고체의 탄성 이론을 이용해서 이 현상을 설명했던 것이다. 1881년 이제는 제 3대 레일리가 된 존 스트럿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수용해서 자신이 고체 탄성 이론에 의해 전개했던 이론을 맥스웰의 전자기학으로 대체했다.

1890년 덴마크의 물리학자 로렌츠(Ludvig Valentin Lorenz, 1829-1891)는 구형 입자에 의한 빛의 산란에 대한 논문을 덴마크어로 발표했다. 로렌츠도 단일한 구형 입자에 의해 산란된 빛의 세기가 파장의 4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1899년 레일리가 유도한 대기 중에서의 빛의 투과도도 계산했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레일리나 네덜란드의 로렌츠(Hendrik Antoon Lorentz, 1853-1928)와 거의 접촉을 하지 않았으며, 레일리도 덴마크의 로렌츠의 산란 이론을 모른 채로 1899년의 산란 이론을 전개했다.

후기 레일리 이론

초기의 레일리 설명에 의하면 빛이 푸른 이유는 대기중의 먼지와 같은 작은 부유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즉 초기 레일리의 설명에는 부유 물질이 없으면 대기는 푸른빛을 띠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암묵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부유 물질이 없는 청명한 하늘도 푸를 것인가? 이에 대한 이론적 설명은 역시 레일리에 의해 주어졌다. 1899년 레일리는 먼지, 수증기 등 부유 물질이 없어도 산소와 질소의 대기 분자들에 의한 산란에 의해서도 하늘이 푸른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즉 레일리의 후기 이론에 의하면 아주 깨끗하고 맑은 대기도 빛의 산란에 의해서 푸른 하늘을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더욱이 레일리의 후기 이론은 초기 이론과는 달리 현대적인 맥스웰의 전자기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레일리는 자신의 후기 산란 이론에서 부유 물질이 없는 공기 분자들만으로 대기의 투명도를 설명하는 데 충분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했다. 1906년 이후 부유 물질이 없는 대기 중에서도 푸른 하늘을 나타낼 수 있다는 레일리가 후기에 주장한 내용을 입증하는 몇몇 관측 자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1906-7년 미국 스미스니언 연구소는 워싱턴과 윌슨 산에서 다양한 파장에 걸쳐서 대기의 투명도에 대해 관측했다. 결국 과학자들은 해수면뿐만이 아니라 아주 높은 고도에서 측정한 관측을 통해서 부유 물질이 없을 때도 레일리 산란 이론에서 유도되는 이론적 예측이 유효함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푸른 하늘의 실험실 상의 재현

푸른 하늘을 실험실 상에서 재현하는 것은 빅토리아 시대에 만연했던 모방 실험(Mimetic experimentation)의 전통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자들은 기상학과 광학에서 자연 현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실험을 많이 행했다. 기상학에서의 모방 실험이란, 예를 들어 먼지, 구름, 안개, 비, 천둥 번개 등을 실제로 실험실에서 재현하는 것으로, 소립자의 궤적을 추적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는 윌슨(Charles Thomson Rees Wilson, 1869-1959)의 구름 상자(cloud chamber)도 이런 전통에서 나온 것이었다. 윌슨의 구름 상자는 1911년이 되어서야 개발됐지만, 윌슨의 이 연구는 이미 1890년대에 이루어진 그의 기상학 분야에서의 모방 실험의 결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푸른 하늘을 실험실에서 재현하고자 하는 실험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프랑스의 카바네(J. Cabannes), 폴란드의 마리안 스몰루초프스키(Marian Smoluchowski, 1872 -1917), 그리고 존 스트럿(John William Strutt)의 아들이며 아버지가 죽은 1919년부터 제4대 레일리가 되는 로버트 스트럿(Robert John Strutt, 1875-1947)에 의해 체계적으로 실시되었다. 1870년대에 틴들도 실험실에서 푸른 하늘을 재현했지만, 그의 실험은 미세한 부유 물질이 존재해서 하늘이 푸르다는 것을 재현한 것이었다. 부유 물질이 존재하지 않은 공기에서도 산소와 질소 분자에 의한 산란에 의해서도 하늘이 푸른 것을 실험실 상에서 재현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와서야 분명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915년 카바네는 사진 광도계 방법을 사용해서 레일리의 식을 정량적으로 입증하려고 시도해서 레일리 식에 해당하는 몇몇 결과를 얻었다. 1916년에는 스몰루초프스키 역시 푸른 하늘에 관한 레일리 이론을 확증하는 몇몇 실험 결과를 얻었다. 미세한 부유 물질이 없는 순수한 공기에 빛이 투과해서 푸른색을 나타낸다는 것을 실험실에서 가장 확실하게 재현한 사람은 로버트 스트럿이었다. 로버트 스트럿은 진공관 내의 기체 방전의 잔광(afterglow), 밤하늘에 나타나는 야광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학자였다. 이런 연구와 연관해서 스트럿은 1918년부터 푸른 하늘을 복원하는 일련의 실험 결과를 발표했다. 우선 그는 항공기의 움직임을 추적하기 위해 사용하는 탐조등 빛에서 아주 청명한 밤과 지상에서 높은 고도에서도 빔의 궤적에 따라 매우 여리지만 분명한 푸른빛의 산란 현상이 나타나는 것에 주목했다. 틴들의 실험에서는 먼지가 없는 공기에서 빛이 산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먼지가 없는 공기에서는 강력한 빔의 궤적이 아주 어두워지기 때문이었다. 이런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로버트 스트럿은 용기 벽에서 빛이 퍼져나가는 것을 최대한 막고, 가능하면 가장 어두운 배경에서 공기를 통과한 빛을 관찰하도록 만들었다. 맑은 날의 조도는 보름달의 밝기에 비해 약 550,000배가 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로버트 스트럿은 약 5 마일로 추정되는 대기의 높이의 550,000분의 1에 해당하는 0.58 인치 두께로 실험실의 공기 층을 축소시키고, 조도를 보름달의 밝기로 유지해 실험을 했다. 이런 일련의 실험 조건을 만족시킨 뒤 마침내 스트럿은 먼지가 없는 공기로 가득 찬 실험실 내에서 푸른 하늘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스트럿은 이어 계속된 실험에서 빛의 산란도 조사했는데, 공기를 통과하고 나온 빛이 완전 편광에서 약간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완전 편광에서 벗어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산소나 질소 분자가 완전히 구형이 아니라 방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1920년대 초에 이르러 과학자들이 하늘이 푸른 현상을 실험실에서 완전히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하늘이 푸른 이유가 레일리 산란에 설명된다고 믿게 되었다. 결국 푸른 하늘에 대한 과학적 설명 및 실험실 상에서의 재현은 레일리 부자의 대를 이은 연구를 통해 이룩된 업적이었다.

참 고 문 헌

[1] John Tyndall, Philsophical Magazine 37, 384-394 (1869).
[2] J. W. Strutt, Philsophical Magazine 41,107-120; 274-279 (1870).
[3] Lord Rayleigh, Philsophical Magazine 47, 375-384 (1899).
[4] R. J. Strutt, 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of London A 94, 453-45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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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순의 과학산책]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원소는?

원자번호는 19세기 멘델레예프가 주기율표를 제안한 이래로 원소를 구별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는 원자번호가 1이며 자연 상태에서 존재하는 가장 무거운 원소인 우라늄은 원자번호가 92번이다. 원소의 발견은 과학자들 사이에 아주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되어 많은 과학자들이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 원소 주가율표와 이를 만든 러시아 화학자 멘델레예프.
처음에 멘델레예프는 원자량에 따라 원소를 구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1902년 러더퍼드와 소디가 원소 변환을 발견하고 새로운 방사성 물질이 출현하면서 과학자들이 저마다 자신들이 새로운 원소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혼선이 빚어졌다. 다행히도 1913년 방사성 원소와 그의 주기율 법칙과의 관계를 연구하던 소디가 핵의 전하량은 같지만 원자량이 다른 ‘동위원소’ 개념을 제기하고, 뒤이어 헨리 모즐리가 X-선 분광학을 이용하여 원자번호를 원자량이 아닌 핵의 전하량에 의해 재정의하면서 논란은 점차 해소되었다.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원소도 속속 발견되기 시작했다. 이는 원자탄 개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1940년 5월 버클리대학의 에드윈 맥밀런과 필립 에이블슨은 원자번호 93번인 넵튜늄을 발견했으며, 이어 1941년 2월 버클리의 젊은 화학자 글렌 시보그는 세그레와 함께 원자번호 94번인 플루토늄을 발견했다. 플루토늄은 우라늄과 함께 현재 중요한 핵에너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자번호가 94번 이상인 초우라늄도 계속 발견되어 미국, 퀴리, 버클리, 캘리포니아, 아인슈타인, 페르미의 이름이 붙은 새로운 원소들이 주기율표를 채워나갔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미국, 독일, 구소련의 과학자들은 101번 멘델레븀(Md), 102번 노벨륨(No), 103번 로렌슘(Lr), 104번 러더퍼듐(Rf), 105번 더브늄(Db), 106번 시보규ㅁ(Sg) 107번 보어륨(Bh), 108번 하슘(Hs), 109번 마이트너륨(Mt) 등 원자번호 100번 이상의 원소들을 계속 합성해 내었다.

초우라늄 원소들은 그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많은 논쟁이 야기되기도 했다.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면 새로운 원소의 발견자가 그 원소의 이름을 정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1994년 국제 순수 및 응용 화학연맹(IUPAC:International Union of Pure and Applied Chemistry)이 원자번호 106번의 명칭을 시보규ㅁ으로 정하는 것을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미국화학회와 IUPAC는 서로 다른 이름을 사용하다가 1997년 중반에야 논란이 해소되었다.

과학자들은 110번이 넘는 새로운 원소도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 1994년 다름슈타트 중이온연구소의 연구팀이 원자번호 110번과 111번 원소를 발견한 것이다. 이어 1996년 이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납과 아연을 충돌시켜 원자번호 112번의 원소도 합성해냈다.

다른 초우라늄 원소와 마찬가지로 원자번호 112번 원소도 생성 즉시 순식간에 붕괴하지만, 이것이 발견됨으로써 과학자들은 원자번호 114번의 새로운 원소도 합성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이론상 원자번호 114번부터 이어지는 주기율표상의 원소들은 ‘안정된 원소군’에 해당된다. 즉 이 부분의 원소들은 상대적으로 긴 수명을 지녀서 과학자들이 물질의 조성과 성질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99년 러시아의 듀브나 핵연구소 연구원들은 플루토늄과 칼슘 이온을 충돌시켜 양성자가 114개인 원자번호 114번의 원자를 만들어냈다. 이보다 한달 앞서서 미국 로렌스 버클리연구소의 연구팀들은 납과 크립톤 이온을 충돌시켜 원자번호 116번과 118번의 물질의 존재도 확인했다. 아직 원자번호 113번, 115번, 117번의 존재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과학자들은 최고 150번까지 원소가 존재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미래의 주기율표는 서울의 지하철 노선만큼이나 복잡해질 것 같다.

(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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