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국내 10대 과학뉴스
한국과학기술총연합회 ‘핵융합 실험로 ‘KSTAR’ 본격 가동’ 1위
2007년 12월 24일 | 글 | 편집부ㆍ |
 

1. 핵융합 실험로 ‘KSTAR’ 본격 가동
순수 국내 기술로 설계, 제작된 실험용 핵융합로 KSTAR가 지난 9월 완공돼 시험 가동을 시작했다. 계획부터 완공까지 꼬박 12년이 걸린 ‘대공사’다. KSTAR는 세계 최초로 고성능 초전도 자석만으로 핵융합의 원료인 플라스마를 가두는 ‘토카막 장치’를 제작해 국제 핵융합계의 주목을 받았다. 앞으로 KSTAR는 핵융합 상용화를 위해 장시간 운전(300초 이상)과 제어기술을 실험하는 기반으로 활용될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KSTAR 건설 과정에서 얻은 기술과 노하우를 살려 미국, 일본, 유럽연합 등이 추진하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개발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2. 세계 최초 ‘용광로 없는’ 파이넥스 공법 상용화
지난 5월, 포스코는 용광로 없는 파이넥스 공법의 상용화 설비를 세계 최초로 준공하는데 성공했다. 파이넥스 공법은 가루형태의 철광석과 일반 유연탄을 가공하지 않고 바로 사용하는 철강제조 방법. 파이넥스 공법을 사용했을 때 배출되는 환경오염 물질의 양은 용광로 공법의 1~3% 수준이며 먼지 발생량도 28%에 불과하다. 원료를 따로 가공할 필요가 없어 설비투자비도 절감된다. 이번 성공으로 포스코는 세계 철강기술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세계 최초 30나노 64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
삼성전자는 지난 10월 30나노미터(nm, 1nm=10-9) 공정으로 제작한 64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30나노미터는 머리카락 굵기의 4000분의 1 수준이다. 지금까지 개발된 장비로는 반도체 회로 선폭을 40나노미터까지만 좁힐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기존에 있던 60나노미터 반도체 제작 설비를 이용해 회로 사이에 또 하나의 회로를 그려넣는 방법으로 선폭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이 제품 16개를 모은 128Gb 메모리카드에는 종이신문 800년치, MP3 음악파일 3만2000곡을 담을 수 있다.

4. ‘와이브로’ 기술 3G 국제표준 채택
순수 국산 기술로 개발된 휴대 인터넷 ‘와이브로’(WiBro)가 지난 10월 3세대 이동통신의 국제표준으로 채택됐다. 이는 국내 독자개발 이동통신 기술 가운데 최초다. 현재 미국, 일본, 영국, 대만 등 40여 개국에서 와이브로 서비스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와이브로를 개발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은 향후 5년간 약 94조 원 규모의 세계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보고 있다.

5. 청소년 과학 실력 추락과 이공계 대학 개혁 바람
OECD가 발표한 ‘학업성취도국제비교 2006’에서 우리나라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의 과학 성취도가 57개국 가운데 11위를 차지했다. 이는 2000년 1위에서 10계단이나 추락한 것. 또 최상위 5%이내 학생만 비교한 순위는 세계 17위에 그쳐 국내 이공계 위기론이 재확인됐다.
이공계 위기와 관련해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서울대 공대의 개혁이 주목받고 있다. KAIST는 종신교수직을 뽑는 ‘테뉴어 심사’에서 신청자 35명 가운데 15명을 탈락시켜 사회에 충격을 안겼다. 서울대 공대도 학부생에서 필요한 기초 과목 위주로 교과 과정을 전면 개편하며 이공계 개혁에 동참했다.

6. 장기기억 형성 단백질 발견
서울대 강봉균 교수팀은 지난 5월 뇌가 기억을 오랫동안 저장하는 데 필요한 단백질 ‘CAMAP’을 발견, 역할을 규명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CAMAP은 평소 신경세포 사이의 틈인 시냅스에 있다가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핵으로 이동해 장기 저장에 필요한 유전자들을 움직인다. 이 연구 결과는 기억 형성 과정에 대한 시야를 넓히고 기억 조절 기술의 발판을 제공한 점을 인정받아 생명과학분야 최고 학술지인 ‘셀’ 5월호에 실렸다.

7. 한국 온난화 심화와 기상 오보 논란
지난 100년간 우리나라의 기온 상승량은 세계 평균의 2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한반도가 아열대로 바뀌고 있다는 우려가 수치로 나타난 것. 기온과 더불어 올라가는 기상청의 오보율도 우려를 불러왔다. 기상청은 올초 대설과 황사 예보를 연달아 틀리며 기상 예보에 대한 불신을 늘렸다. 지난 2004년 세계 최고 수준인 슈퍼컴퓨터 2호기를 도입하고도 운용 능력 부족으로 인해 예보 정확도를 낮추기만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기상청의 신뢰도는 또 한번 추락했다.

8. 세계 최고 효율 태양전지 개발
지난 7월 광주과학기술원 이광희 교수팀은 세계 최고 효율성의 플라스틱 태양전지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연구팀이 개발한 태양전지는 에너지 전환효율이 6.5%로 현재까지 개발된 유기물 플라스틱 태양전기 가운데 가장 높은 효율성을 자랑한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 휘거나 접을 수 있고 제작비용이 저렴하다는 점도 장점으로 손꼽힌다. 이 연구 결과는 ‘사이언스’에 실렸다.

9. 기술유출 논란과 기술유출방지법 시행
올해 대형 기술유출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KAIST 교수가 학교의 특허를 자신 소유의 벤처기업에 넘긴데 이어 대우조선해양, 기아자동차, 포스코 등 굵직한 대기업의 간부나 전직 연구원이 핵심기술을 중국으로 유출하려다 적발됐다. 정부는 국가를 먹여살릴 핵심기술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지난 4월부터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을 시행하고 있다.

10. 최다 안드로메다은하 구상성단과 퀘이사 발견
지난 8월 한국천문연구원 김상철 박사와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이명균 교수팀은 10년에 걸친 관측자료를 분석해 안드로메다 은하에 있는 113개의 구상성단을 새로 발견했다. 이는 안드로메다 은하 연구사상 최다 갯수다. 이 연구 결과는 천문 학술지 ‘애스로노미컬 저널’에 표지 논문으로 게재됐다.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임명신 교수팀은 먼 우주연구의 ‘장벽’으로 불리는 은하수에서 퀘이사 40개를 새로 찾았다. 퀘이사는 우리 은하에서 멀리 떨어져있지만 블랙홀 주변의 에너지에 의해 태양 같은 항성처럼 밝게 빛나는 특이한 천체. 연구팀이 발견한 것 가운데 13개는 천체등급 18등급 이상의 ‘밝은 퀘이사’로 이는 지금까지 은하수에서 발견된 밝은 퀘이사 전체 갯수(10개)보다 많은 양이다.
크리스마스에 관한 Q&A
엉뚱한 질문, 과학적 답변
2007년 12월 21일 | 글 | 김상연 기자ㆍdream@donga.com |
 
루돌프 코는 표피 밑에 빛을 내는 기관에서 효소가 산소와 루시페린이라는 화학물질을 결합해 빨간 빛을 낸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마다 아이들은 엉뚱한 궁금증에 곧잘 빠져든다. 산타는 그 많은 착한 어린이에게 어떻게 선물을 전달해 줄까. 루돌프는 잠도 자지 않고 날아다닐 수 있는 걸까. 예수 탄생 때 떴다는 별은 과연 무엇일까. 과학자들이 크리스마스 철마다 나오는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답하고 있다.


Q. 산타는 크리스마스에 정말 바쁘겠어요. 얼마나 바삐 돌아다녀야 하는 거죠?

A. 스웨덴 기술 컨설팅 회사 스웨코가 최근 재미있는 분석을 내놓았어요. 종교에 상관없이 지구의 모든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려면 24, 25일 이틀 동안 25억 가구를 방문해야 해요. 계산 결과 산타는 한 집에 도착한 뒤 34마이크로초 만에 굴뚝을 통해 내려가 양말 안에 선물을 넣어야 한대요. 1마이크로초는 100만분의 1초죠. 썰매를 끄는 순록도 1초에 5800km를 날아야 하죠.


Q. 산타도 산타지만 루돌프도 장난이 아니네요. 잠잘 틈도 없는데 어떻게 견디죠?

A. 노르웨이의 트롬쇠대 카를 아르네 스토칸 교수가 2005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순록의 생체시계를 조사해 발표했어요. 동물은 24시간에 맞춰 자고 깨는 생체시계를 가져요. 하지만 극지에 사는 순록은 생체시계가 특이해서 빛이 있으면 오랫동안 자지 않을 수 있대요. 산타가 왜 순록 중에서 특히 루돌프를 선택했는지 이해가 되네요. 빨간 코가 항상 빛나니까 잠을 더 안 잘 수 있겠죠. 미국의 온라인 출판사 하우스터프웍스는 최근 루돌프 코가 빨갛게 빛나는 이유를 소개했어요. 루돌프 코의 표피 밑에 빛을 내는 기관이 있는데 이곳에서 효소가 산소와 루시페린이라는 화학물질을 결합해 빨간 빛을 낸다는 거예요.


Q. 제 친구는 산타와 사진 찍는 걸 싫어해요. 이상하지 않나요?

A. 결코 친구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미국 뉴욕시립대를 은퇴한 존 트링카우스 교수는 2003년부터 백화점의 산타 도우미 품에 안긴 어린이들의 표정을 조사해 매년 ‘심리학 보고서’에 발표했어요. 그 결과 6%의 어린이만 신나거나 행복해했을 뿐 90%의 어린이가 심드렁해하거나 내키지 않아 했어요. 3%는 울상을 지으며 산타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했죠. 반면 보호자의 87%는 즐거워했대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요.


Q. 예수가 태어났을 때 나타났다고 하는 ‘베들레헴의 별’은 무엇이죠?

A. 기독교 성경에 따르면 그 별을 보고 동방박사 셋이 찾아와 예물을 바쳤다고 하죠. 1999년 미국 프린스턴대 마크 키드거 교수는 ‘베들레헴의 별’이라는 책에서 “기원전 5세기 봄 중국 천문 기록에 나타난 염소자리의 혜성이나 신성”이라고 주장했어요. 미국 럿거스대 마이클 무어 교수는 2001년 고대 로마의 천문 기록을 근거로 “기원전 6세기 봄에 달이 목성을 부분적으로 가린 현상이 베들레헴의 별”이라고 주장했어요. 당시 이 현상은 새로운 왕의 탄생을 뜻했다고 해요. 어느 쪽이 맞든 예수는 겨울이 아니라 봄에 태어난 셈이네요.


Q. 크리스마스에 태어나면 운이 좋다는데 정말인가요?

A. 실제로 물리학자 뉴턴이 크리스마스에 태어났어요. 미국 데이비스 캘리포니아대와 이스라엘 기술연구소의 공동 조사에 따르면 국경일, 특히 크리스마스에 태어난 유명인사가 꽤 있대요. 어떤 날에 특별한 기운이 있다기보다는 기념일에 태어났다는 기대감이 자라면서 성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해석이 가능해요. 또 신앙이 강한 사람일수록 생명이 위급해도 종교적인 기념일을 지나 사망하는 경향이 있대요.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상의 변혁으로 촉발되기 시작한 근대 과학혁명은 뉴턴에 이르러 그 완성을 이루었다. 뉴턴의 역학은 영국에서 대륙으로 확산되었고, 18세기를 통해 세련된 발전을 이루었으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고전역학의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뉴턴은 만유인력이라는 힘과 몇 개의 운동법칙에 바탕을 두고, 수학적 방법을 사용해서 지구를 비롯한 여러 천체의 운동을 성공적으로 기술했다. 이 과정에서 뉴턴은 그 동안 분리되어 발전하고 있었던 천체 역학과 지상의 역학을 종합했으며, 중세 과학이 고집하고 있던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분을 부수고 세상을 단일한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뉴턴의 과학은 경험과 이론의 종합에 의해 완성되었다고도 말하는데, 이런 모든 성과를 일컬어 흔히들 뉴턴의 종합이라고 부른다. 결국 고전 역학은 갈릴레오, 데카르트, 호이헨스를 거쳐 뉴턴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뉴턴의 생애와 과학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율리우스력으로는 1642년 12월 25일, 신력으로는 1643년 1월 4일 영국 소지주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뉴턴의 어머니는 생후 2년만에 재가해서 그의 곁을 떠났고, 그는 할머니의 손에 의해 길러졌다. 이리하여 뉴턴은 그의 의붓아버지가 죽어서 어머니가 다시 그에게 돌아올 때까지 9년 동안 어머니와 떨어져 지냈다. 어린 시절의 이런 모성 결핍이 그의 심리적 성장 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즉,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그가 보인 심리적 불안감과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가 보여주었던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격렬한 반응 등은 어린 시절의 모성 결핍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1661년 뉴턴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는데, 이때를 즈음해서 그는 과학혁명에 근간이 되는 다양한 생각에 접하게 되었다. 우선 그는 데카르트의 기하학과 기계적 철학, 가상디의 원자론, 보일의 화학을 공부했으며, 케임브리지 플라톤주의자 헨리 모어(Henry More, 1614­1687)를 통해 연금술사와 마술사들이 주로 믿었던 신비주의 사상인 헤르메티시즘도 접했다. 뉴턴이 평생 연금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원격작용에 의한 힘인 보편중력을 생각해내게 된 데에는 신플라톤주의와 헤르미티시즘 사상의 영향이 부분적으로 작용했다. 1665년 흑사병으로 대학이 문을 닫게 되어 2년간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이 기간 동안 미적분학, 색깔에 관한 이론, 역제곱 법칙 등 훗날 자신의 주요 업적의 바탕이 되는 핵심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1669년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루카스좌 수학교수 (Lucasian professor of Mathematics)가 된 그는 광학에 대해서 강의했다. 이때부터 그는 이미 빛이 단색광이 아니라 혼합광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시기에 반사망원경을 발명해서 학계에서 과학자로서도 명성을 분명하게 쌓게 되었다. 1672년 빛과 색깔에 관한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한 뉴턴은 당시 왕립학회에서 영향력이 있던 후크(Robert Hooke, 1635­1703)와 격한 논쟁을 벌였다. 후크와 벌인 논쟁 이후 뉴턴은 외부와 관계를 끊고 격리 생활을 하면서 헤르메티시즘과 연금술과 같은 신비주의 전통의 학문에 탐닉하기도 했다.

1679년경 후크로부터 역제곱 법칙에 관한 편지를 받고, 뉴턴은 이것이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과 유사하다고 느꼈고, 이 역제곱 법칙을 행성운동에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핼리(Edmond Halley, 1656­1742)는 후크와 함께 역제곱 법칙을 이론적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작업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뉴턴이 역제곱 법칙을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 문제를 해결했다는 소문에 접한 핼리는 1684년 8월 케임브리지의 뉴턴을 방문했다. 핼리는 뉴턴의 이 '발명'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이것을 작은 책으로 출판하도록 뉴턴에게 권유했다. 핼리의 권유를 받은 뉴턴은 처음에는 『운동에 관해서』라는 작은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립학회로부터 출판 약속을 받은 뒤 뉴턴은 이보다 더 긴 분량의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 18개월 동안 집필에 전념한 뉴턴은 1687년 고전역학의 완성판이라고 불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혹은 『프린키피아』라는 3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1686년 왕립학회에 『프린키피아』 제 1권의 완성된 원고가 접수되었을 때, 후크는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당시 쇠락해가던 후크로서는 뉴턴이 자신의 책에서 후크도 역제곱 법칙에 관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을 인용해주는 정도로도 만족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학에 관한 글에서 후크와 격렬한 논쟁을 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뉴턴은 이 정도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았다. 후크의 표절 주장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자신의 원고를 계속 집필해갔으며, 심지어 자신의 원고에서 후크에 대한 거의 모든 인용을 삭제해버렸다. 후크에 대한 뉴턴의 분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뉴턴은 후크가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미 집필한 광학에 관한 책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왕립학회의 회장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린키피아』 초판은 라틴어로 씌어진 510쪽 분량의 방대한 책이었다. 이 책에서 뉴턴은 마치 에우클레이데스의 저서인『원론』의 책 형식처럼 운동에 관한 논의를 정의, 공리, 법칙, 정리, 보조정리, 명제 등으로 분류해서 체계적이고 이론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제 1권은 진공 중의 입자의 운동을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앞 부분에 관성의 법칙, 힘과 가속도에 관한 뉴턴의 운동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 등 뉴턴의 유명한 운동의 3법칙이 등장하고 있다. 뉴턴은 이 운동의 3법칙과 역제곱의 힘을 바탕으로 삼체 문제를 위시한 다양한 물체의 운동에 대해서 기술했다. 제 2권은 유체역학 분야에 해당하는 것으로 저항이 있는 매질 내의 운동을 다루고 있다. 나중에 틀린 이론으로 판명된 이 책의 내용에서 뉴턴은 소용돌이 운동의 원심력에 의해서 행성의 운동을 설명했던 데카르트의 이론을 간접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제 3권은 천체 역학에 관한 내용이다. 여기서 뉴턴은 경험 법칙이었던 케플러의 법칙을 역제곱에 비례하는 힘을 가정함으로써 증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구의 세차운동, 달의 운동의 불규칙성, 조석운동, 혜성의 운동 등을 기하학적으로 설명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출판과 동시에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이 책은 복잡한 기하학적 서술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문 학자들도 읽기 힘든 대단히 어려운 책이었다. 더구나 대륙에서는 '인력'이라는 개념이 문제가 되었다. 인력과 척력과 같이 원격 작용에 의한 힘 개념은 당시에 주로 연금술사나 마술사들이 쓰던 용어였는데, 특히 데카르트 철학의 영향 아래에 있던 곳에서는 이런 원격작용에 의한 힘을 인정한 뉴턴 역학에 대해서 강한 반발을 보였다. 아무튼 이 책은 학계에 커다란 충격을 줌과 동시에 뉴턴에게 국제적 명성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학문적인 활동 이외에도 뉴턴은 1696년부터 조폐국에서 일하면서 위조지폐 방지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조폐국에서 일하던 뉴턴이라는 존재는 당시 런던의 위조지폐범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실제로 그가 재직하던 동안 많은 위조지폐범들이 교수대로 보내졌다. 뉴턴의 과학은 신학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만년에 뉴턴은 성경의 해석에 관심을 가지고 다니엘과 요한의 예언서를 해석했는데, 이 저작들은 오랫동안 비밀로 내려오다가 뉴턴이 죽은 지 한참 뒤에야 출판되었다.

뉴턴은 라이프니츠와 미적분학 발견의 우선권을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에는 추종자들의 부축임에 못이겨서 시작한 논쟁이 이성을 잃어버리는 추잡한 싸움으로 변했다. 결국 이 둘 사이의 싸움은 두 사람이 죽으면서 끝나게 되었다.

『프린키피아』와 쌍벽을 이루는 뉴턴의 저작으로는 빛의 다양한 성질에 대해 논의한 『광학』(Opticks, 1704)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1672년 경에 이미 거의 완성된 논문으로 1703년 왕립학회에서 힘이 있던 후크가 죽고 자신이 1703년 왕립학회의 회장이 된 다음 자신의 권위가 커질 때 출판한 것이었다. 수학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이 강했던『프린키피아』와는 달리 이 책은 실험적인 성격을 강하게 지녔다. 뉴턴은 이 책에서 빛을 입자로 보고, 새로운 실험 도구인 프리즘을 이용해서 빛의 반사, 굴절, 분산을 비롯해서 색에 대한 다양한 성질에 대해 연구했다.

이 책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는 뉴턴은 이 책에서 데카르트와는 달리 색깔에 대한 거시적 현상만을 언급하고 미시적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태도는 그가 중력이 실제로 존재함을 강조하기 위해『프린키피아』에서 언급한 "나는 가설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로 연관시켜 생각할 수 있다. 뉴턴은 데카르트주의자들이 가정했던 빛에 대한 미시적 메커니즘은 그 존재론적 근거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자신은 실험적으로 분명히 입증할 수 있는 거시적인 메커니즘만을 논의하려 했던 것이다.

뉴턴의 과학 방법론을 한마디로 표현하지면 수많은 현상들 속에서 힘을 설정하고, 이것으로부터 수학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현상을 다시 설명해내면, 그 힘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들로부터 힘을 도출하는 과정은 다분히 가상적, 상상적, 사색적인 측면이 강한 것으로 수많은 임의성이 존재했다. 실제로 『광학』의 질문(Query) 31번을 보면 뉴턴이 빛의 굴절과 힘의 관계, 다양한 화학물질에서 나타나는 여러 힘을 도출하려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뉴턴이 시도했던 것은 뉴턴의 사후에 나타날 18세기의 과학의 모습에 굉장히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조프루아(Etienne-Francois Geoffroy, 1672­1731)가 집필한 『친화력 표』(Affinity Table, 1718)에서 보여지는 화학적 친화력에 관한 논의는 뉴턴의 사색적 전통을 이어받아 전개한 것이었다. 무게가 없는 입자를 가정한 칼로릭 이론이나 전기학, 자기학에서 역제곱 법칙을 도출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모두 뉴턴의 영향을 받아 추진된 것이었다.

일단 도출된 힘으로부터 수학적으로 현상을 다시 얻어내는 과정은 경험적이고 사색적인 과정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발전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프린키피아』와 『광학』의 차이를 반영한다고도 볼 수 있는데, 뉴턴에 의해서도 완전히 융합되지 않았으며, 뉴턴주의자들도 시기와 분야에 따라서 서로 다른 쪽을 강조했다. 따라서 18세기에 다양한 '인력'에 바탕을 둔 추측이나, 사색적 연구가 많이 나오는 한편 해석역학 등과 같이 이론적이고 수학적인 측면도 동시에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이중적인 문제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18세기 뉴턴주의 과학과 뉴턴의 과학방법론은 내용이나 구체적인 방법상으로 영향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과학"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에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즉 뉴턴의 과학은 많은 사람들에게 분야는 서로 다르더라도 단일한 방법, 관점 등으로 과학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는 비전을 갖게 해주었던 것이다.

뉴턴과학의 수용과 주요 논쟁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출판되었을 당시 데카르트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던 프랑스에서는 뉴턴의 과학에 대해 아주 적대적이었다. 또한 당시의 국제 정치적 상황도 뉴턴의 사상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해협을 건너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1713년 스페인 계승 전쟁이 마무리되고 위트레히트 조약이 체결되면서 국제정치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이 결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학술 교류가 허용되었고, 이에 따라 뉴턴의 과학이 프랑스에도 퍼질 수 있는 정치적 조건도 마련되었다.

위트레히트 조약 체결 이후의 시기에도 프랑스에서는 퐁트넬(Bernard Le Bovier, sieur de Fontenelle, 1657­1757) 등과 같은 학자들이 데카르트주의를 계속 옹호했었다. 하지만 말브랑슈(Nicolas Malebranche, 1638­1715)와 그의 추종자들은 데카르트 철학의 요새의 첫 장벽을 붕괴하여 1730년 이후 모페튀(Pierre-Louis Moreau de Maupertuis, 1698 ­1759), 클레로(Alexi Clairaut, 1713­1765), 볼테르(Voltaire, 1694­1778) 등의 급진적 뉴턴주의자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정치적 사건에 연류가 되어 영국에서 도망쳐 망명 생활을 한 뒤 귀국한 볼테르는 프랑스에 돌아와 일반인들을 상대로 뉴턴 역학을 소개하는 데 많은 정열을 바쳤다. 그가 집필한 『뉴턴철학의 요소들』(Elments de la philosophie de Newton)은 프랑스에서 일반지식인들을 대상으로 뉴턴에 관해 씌어진 최초의 책이었다. 볼테르는 뉴턴 역학을 프랑스 사회에 소개함으로써 18세기 계몽사조의 확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볼테르의 동거 애인이었던 샤틀레 부인(Madame du Chatelet, l706­1749)은 『프린키피아』를 프랑스어로 훌륭하게 번역했다. 1731년 아카데미 회원이 된 모페튀는 곧 열렬한 뉴턴주의자가 되어 뉴턴철학의 확산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는 1744년 고전역학의 문제를 변분법과 관련된 일반 법칙으로 공식화한 '최소작용의 원리'를 천명하였고, 1850년 『우주론 에세이』(Essai de cosmologie)에서 이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다루었다.

뉴턴의 과학이 프랑스로 전파되면서 뉴턴의 과학을 입증하기 위한 다양한 논쟁이 벌어졌다. 18세기에 뉴턴의 이론을 확증하려는 시도는 대략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제일 먼저 터져 나온 논쟁은 지구의 형태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데카르트의 소용돌이(vortex) 이론에 의하면 지구의 적도부분이 평평해야만 했다. 반면에 뉴턴의 이론은 적도지방보다는 극 부분이 평평하다는 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이들 둘 사이의 논쟁은 영국과 프랑스의 자존심을 건 일종의 국가적 논쟁이었다. 프랑스로 뉴턴 역학이 수용된 이후인 1732년 모페튀와 클레로는 데카르트의 주장이 아닌 뉴턴의 견해를 옹호하였고, 이것이 국가적으로 커다란 논란이 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1730년대를 통해 극지방과 적도지방의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기 위한 일련의 지구 측정 탐사를 계획했는데, 이 결과로 뉴턴의 이론이 확증되게 되었던 것이다.

달의 운동과 핼리 혜성의 운동에 관한 것도 뉴턴 역학의 유효성을 둘러싸고 벌였던 대표적인 논쟁이었다. 1747년 클레로는 달의 불규칙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뉴턴의 역제곱 항 이외에도 역 4승의 항이 추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턴의 역제곱 법칙의 유효성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자, 파리, 베를린, 상크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는 앞을 다투어 이와 연관된 문제를 현상 경쟁(Prize competition)에 올렸다. 이 현상 경쟁에는 장 달랑베르(Jean Le Rond d'Alembert, 1717­1783),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 라그랑주(Josph Louis Lagrange, 1736­1813) 등이 당대의 천재적인 학자들이 참가했다. 이 현상 경쟁은 오일러와 달랑베르 등 많은 탁월한 수학자들이 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등용문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삼체 문제를 비롯한 천체역학의 계산 테크닉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741년에 아카데미 회원이 된 달랑베르는 1743년 26세의 나이로 '달랑베르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는 『동역학론』(Trait de dynamique)을 출판했다. '달랑베르의 원리'란 뉴턴의 운동 제2법칙을 변형한 것으로서 동역학의 문제를 마치 정역학적 문제로 변형시켜 일발적인 해법을 구할 수 있다. 동역학 이외에 그는 유체역학에 대한 논의도 전개했으며, 여기서 그는 편미분 방정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스위스 바젤 태생의 오일러는 베를린 아카데미와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에서 활동했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였다. 18세기에는 뉴턴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빛에 대한 입자론을 선호했지만, 오일러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호이헨스의 파동설을 받아들였던 사람이었다. 오일러 역시 다른 아카데미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태양, 지구, 달 사이에 작용하는 삼체 문제를 다루면서 달의 운동에 관한 더욱 완벽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오일러의 해석 역학적 방법을 계승하여 더욱 발전시킨 사람은 라그랑주였다. 라그랑주는 지구에서 바라보는 달의 표면 모습의 위치가 약간씩 변화하는 달의 칭동(libration)에 관한 시론으로 1764년 파리 과학아카데미로부터 상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8년 라그랑주는 변분법을 이용해서 뉴턴 이래의 역학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해석역학』(Mchanique analytique)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그는 좌표계의 선택에서 독립된 '일반화된 좌표'를 이용해서 오늘날 우리가 고전역학계를 위한 라그랑주 방정식(Lagrangian Equation)이라고 부르는 해석학적인 역학 방정식을 발전시켰다. 결국 역학의 난제 가운데 하나인 삼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페튀, 달랑베르, 오일러, 라그랑주 등의 탁월한 수리과학자들의 노력으로 뉴턴의 고전역학은 고도의 해석적인 도구를 갖춘 역학으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과학의 제도화와 뉴턴주의의 발전

제도적인 차원에서 볼 때 유럽에서 뉴턴주의가 전파되는 데에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했던 과학아카데미 운동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 18세기를 통해서 프랑스에서는 과학아카데미의 회원수가 증가하면서 활발한 과학활동을 전개했다. 아카데미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파리뿐만이 아니라 지방에도 아카데미가 생겨나 1760년에는 그 수가 무려 60여개에 이르게 되었다. 이들 지방 아카데미는 중앙의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지방분회 형식으로 밀접한 연결을 맺으면서 활동했다.

프랑스 이외의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18세기를 통해 과학아카데미가 계속 만들어져 뉴턴 과학의 확산을 도왔다. 프로이센에서는 베를린 아카데미가 설립되었고, 오일러의 노력에 의해서 러시아에는 상크트 페테르부르크 아카데미가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여러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도 과학아카데미가 만들어졌는데, 파리의 과학아카데미는 이들 아카데미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과학아카데미 이외에도 프랑스에서는 정부가 지원하는 많은 과학 관련 기관들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천문대, 경도국(Bureau des Longitudes), 성인교육 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Collge de France) 등은 모두 정부의 지원 아래 과학자들이 아주 활발한 연구활동을 했던 기관들이었다. 특히 프랑스에는 그랑제콜(les Grandes Ecoles)이라는 고등교육기관이 속속 설립되면서 아주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 연구가 진행되었다. 포병 및 공병학교(Ecole de l'Artillerie et du Gnie), 광산학교(Ecole des Mines), 토목학교(Ecole des Ponts et Chausses) 등은 모두 프랑스가 자랑하던 그랑제콜의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토목학교는 토목공학의 출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당시 유명한 과학자들 가운데에는 토목공학자가 많았는데, 전기 및 자기 연구로 유명한 쿨롱(Charles-Augustin de Coulomb, 1736­1806)도 토목공학자였다.

고전역학은 최초의 전문적인 공학 교육기관이었던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의 설립과 함께 더욱 세련되게 발전하면서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된다.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 기간 동안에는 교육제도 개혁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전문 교육 기관이 생겨났다. 무엇보다도 1794년 전문 기술교육을 목적으로 창립된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뉴턴주의 과학과 수리과학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개교 당시 400명의 학생으로 출발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는 당대 일류의 과학자들이 교수진이 되어 학생들에게 과학과 수학 분야에서 아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1749­1827), 화법기하학을 창시한 가스파르 몽주(Gaspard Monge, 1746­1818), 라그랑주, 베르톨레(Comte Claude-Louis Berthollet, 1748­1822), 결정학자 아위(Ren Just Hay, 1743­1822) 등이 모두 당시에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교수였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수많은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을 배출하면서 뉴턴 과학의 고도화와 그 동안 수리과학과는 다른 전통 속에서 성장해온 경험과학 분야의 수학화에 기여했다. 푸아송(Simon-Denis Poisson, 1781­1840), (Jean-Baptiste Biot, 1774­1862), 푸리에(Joseph Fourier, 1768 ­1830) 뒬롱(Pierre-Louis Dulong, 1785 ­1838), 아라고(Francois Arago, 1786­1853), 프레넬(Augustin-Jean Fresnel, 1788 ­1827), 카르노(Sadi Carnot, 1796­1832), 게이뤼삭(Joseph-Louis Gay-Lussac, 1778 ­1850) 등 19세기 초 프랑스 과학계를 이끌었던 대부분의 우수한 과학자들이 바로 이 에콜 폴리테크니크 출신이었다.

라플라스 프로그램의 흥망

보편 중력의 문제를 검증하기 위해 발전했던 삼체 문제에 관한 논의는 라플라스에 이르러 그 정점에 이르렀다. 라플라스는 1798년부터 1827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5권의 책으로 된 방대한 저작인 『천체역학』(Mcanique cleste)을 출판했다. 뉴턴 역학의 결정판으로 일컬어지는 이 책에서 라플라스는 모든 행성이 지니는 고유의 불규칙성은 뉴턴의 역제곱 법칙을 유지한 채로 장기적인 주기적 불규칙성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로써 뉴턴의 역제곱 법칙은 그 유효성이 분명히 유지되었으며, 태양계의 안정성을 분명히 설명함으로써 뉴턴 역학이 지니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확고한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뉴턴역학을 바탕으로 천체역학의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한 라플라스는 천체역학을 넘어선 문제에도 이 뉴턴주의를 적용하려는 체계적인 프로그램을 진행시켰다. 라플라스는 베르톨레와 함께 열, 빛, 전기, 자기, 모세관현상, 화학적 친화력 등의 다양한 현상들을 물질입자 내지 '무게가 없는 입자'들과 그것들 사이의 인력과 척력과 같은 근거리 힘을 사용해서 수학적으로 설명해내려는 웅대한 계획을 추진했다. 이 계획은 라플라스 프로그램이라는 이 계획은 나폴레옹의 적극적인 후원 속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나폴레옹은 과학을 프랑스 문화국민의 탁월성을 과시하는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으며, 자기 자신도 수학, 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라플라스 프로그램을 정력적으로 추진하던 대표적 라플라스주의자로는 비오, 푸아송 등을 들 수 있다. 1820년 비오는 사바르(Flix Sarvart)와 함께 흐르는 전류에 의해 발생하는 자기장의 세기가 뉴턴의 중력의 법칙과 유사하게 도선으로부터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함을 발견했던 과학자였다. 라플라스와 라그랑주 밑에서 공부했으며 평생 그들과 절친한 관계를 유지했던 푸아송도 1811년 오랜 동안 역학 분야의 표준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는 『역학론』(Trait de mchanique)을 출판한 당대의 학자였다. 그는 천체역학에 관한 라플라스와 라그랑주의 작업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모세관 현상과 정전기 현상에 대한 이론적 작업을 전개했다. 1812년 확률 분포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던 라플라스와 마찬가지로 푸아송도 확률론에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푸아송은 1837년에는 확률에 관한 책을 출판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표본의 수가 아주 많은 때 적용되는 푸아송의 분포에 관한 법칙을 처음으로 언급했다.

하지만 라플라스 프로그램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 이후 10년 동안 서서히 몰락해 나갔다. 라플라스 프로그램의 몰락과 함께 나타났던 과학 사상의 변화로는 빛의 파동설 부각, 새로운 전자기학과 열역학 부상, 또한 콩트의 실증주의 부상 등을 들 수 있다. 실험적 전통 속에서 발전하던 다양한 분야가 수학화되면서 뉴턴주의적 접근의 한계도 동시에 발현된 것이다. 당시에 라플라스 물리학에 대한 반역을 주도한 인물은 공교롭게도 푸리에, 뒬롱, 프티(Alexis-Thrre Petit), 아라고, 프레넬 등과 같이 주로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라플라스주의 물리학을 배웠던 젊은 사람들이었다.

이집트학자, 행정가, 수리물리학자인 푸리에는 1822년 『열 해석론』(Thorie analytique de la chaleur)을 집필했다. 이 책에서 그는 칼로릭 이론과 훗날 푸리에 급수로 알려지게 되는 무한 수열 분석 방법을 사용해서 고체에서 열이 전도되는 이론을 정립했다. 1819년 프티와 함께 원자량을 결정하는 데 매우 유용한 비열 법칙을 발견한 뒬롱도 뉴턴의 냉각 이론이 지니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라플라스 프로그램에 비판을 가했다. 프레넬은 영국의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1829)과 함께 빛에 대한 파동론을 전개하여 광학 분야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아라고는 프레넬의 파동 이론을 옹호하였고, 프레넬과 함께 편광 빛의 간섭 현상에 대한 연구를 하여 편광 현상에 대한 이해를 높여 주었다. 간섭 현상은 빛의 입자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었기 때문에 19세기를 통해 뉴턴의 입자론은 그 영향력을 상실하고 빛의 파동론이 물리학계를 지배하게 된다.

라플라스 프로그램이 쇠퇴하자, 비오는 잠시 파리 과학계에서 은퇴하였다가 1835년 편광면의 회전 현상을 다루면서 빛에 관한 뉴턴의 해석에서 멀어졌다. 푸아송은 마지막까지 라플라스 프로그램을 옹호한 철저한 라플라스주의자였다. 하지만 푸아송은 과학계에서 점점 고립되어 갔고, 그의 몰락과 함께 라플라스 프로그램은 완전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라플라스 프로그램은 몰락해갔지만, 10여년에 걸쳐 집요하게 추진된 이 프로그램이 과학의 향방에 미친 영향을 엄청나게 크다. 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고전 역학 체계의 발전은 그 절정에 달하였고, 광학, 열역학, 전자기학 등 그 동안 경험에 입각한 실험 과학의 영역에 있던 분야가 급속도로 수학화되었다. 결과적으로 라플라스 프로그램은 20세기에 들어서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이론물리학이 출현하는 데 분명한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아일랜드에서는 라플라스의 천체역학 전통인 새롭게 부상하던 광학과 결합한 새로운 동역학 체계가 발전되었다. 라플라스의 천체역학에 탐닉했던 아일랜드 수리물리학자인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1805­1865)은 동역학과 광학을 통일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논의했다. 그는 1820년대에서 1830년대에 이르는 작업을 통해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1665)에 의한 논의된 '최단 시간의 원리'(principle of least time)를 보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다룸으로써 뉴턴 역학과 광학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바지했다. 해밀턴은 프레넬이 시작한 복굴절에 대한 논의를 더욱 발전시켰으며, 일반 동역학에 관한 논의를 통해 위치와 운동량의 이중성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동역학 방정식을 도출해냈다. 해밀턴의 정준 방정식(canonical equation)은 무척 풀기 힘이 들었다. 야코비(Karl Gustav Jacob Jacobi, 1804­1851)는 해밀턴 방정식과 같은 형태의 방정식을 더욱 일반적이고 유용한 형태로 발전시켜 많은 사람들은 이 방정식을 역학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본적인 방정식으로 활용하게 되었다. 해밀턴-야코비 방정식(Hamilton-Jacobi equation)라고 불리는 이 방정식은 훗날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이 출현하게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해밀턴의 동역학 논의에서 위치와 운동량의 이중성이 차지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이 관계는 1세기가 지난 뒤에 양자역학이 출현되면서 그 숨은 진가가 발휘되어 양자역학의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기본 관계식으로 부상되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1] 김영식, 임경순, 과학사신론 (다산출 판사, 1999).
[2] Richard S. Westfall, Never and Rest: A Biography of Issac Newton (Cam- 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0).
[3] Thomas L. Hankins, Science and the Enlightenment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5).
현대 우주론에 의하면 우주는 아주 먼 옛날에 한 점에서 대폭발을 일으켜 팽창, 냉각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에 처음으로 제안된 우주 팽창론은 그 뒤 여러 유형으로 발전했는데, 오늘날 우주론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대폭발이론은 1940년대에 와서야 처음으로 등장했다. 1948년 대폭발 이론을 제기하여 현재 우주론이 등장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이 바로 러시아의 과학자 조지 가모브(George Gamow, 1904­1968)였다.

팽창우주론의 등장

1916년에 발표한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우주론 분야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에 바탕을 둔 초창기 우주론은 현재의 팽창 우주와는 다른 정적인 우주론이었다. 우선 상대성 이론을 주창한 장본인인 아인슈타인은 우주론에서 물리적이며 정적인 우주론을 선호해서 자신이 발견한 장 방정식에 우주상수를 추가해서 우주를 정적인 것으로 해석했다. 아인슈타인과 연결을 가지고 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드 지터(Willem de Sitter, 1872­1934)는 아인슈타인의 물리적인 우주와는 다른, 물질이 없고 가상적인 또다른 우주 모형을 제한했다. 드 지터의 모형은 많은 천문학자들에 의해 선호되었지만, 그의 우주 모형 역시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정적인 것이었다.

1920년대를 통해 몇몇 과학자들에 의해서 정적인 우주론과는 다른 팽창우주론이 제안되었다. 1922년 러시아의 지구물리학자이며 기상학자인 프리드만(Alexandr Alexandrovich Friedmann, 1888­1925)은 아인슈타인과 드 지터가 제안했던 정적인 우주론과는 다른 새로운 팽창우주론을 수학적으로 전개했다. 하지만 프리드만의 이론은 주창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계속적인 발전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1925년 프리드만은 기상 관측용 대형 기구를 타고 자유 비행을 하다가 혹한을 겪은 뒤 페렴에 걸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프리드만과는 독립적으로 1927년 벨기에의 가톨릭 신부이며 천체물리학자였던 조르주 르메트르(Abb Georges Edouard Lematre, 1894­1966)는 2년 뒤에 나타나게 되는 허블(Edwin Powell Hubble, 1889­1953)의 속도-거리 관계와 유사한 적색편이와 거리와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보다 물리적이고 실제적인 의미의 새로운 팽창우주론을 제안했다. 하지만 당시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선구자적인 작업은 천문학자들 사이에서 커다란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한편 1929년 미국의 허블은 윌슨 산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은하들 사이의 거리와 적색편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해서 이 팽창우주론을 지지하는 중요한 천문학적 증거들을 발표했다. 허블 자신은 자신이 얻은 데이터를 팽창우주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사용하는 데에는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하지만 1930년 에딩턴과 드 지터 등과 같은 영향력 있는 천문학자들은 정적 우주론이 새로운 천체 관측 결과와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신 새로운 우주론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프리드만과 르메트르의 작업이 '재발견' 되었다. 이리하여 1930년을 기점으로 해서 천문학자들 사이에서는 정적인 우주론에서 팽창우주론으로의 인식의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가모브와 대폭발 이론의 등장

팽창우주론은 1940년대 중반 이후 대폭발 이론(Big Bang theory)과 정상 상태 우주론(Steady-state cosmology)이 등장하고 이 두 이론들이 서로 경쟁을 하면서 더욱 세련된 형태로 발전했다. 대폭발 이론에서는 초기 우주에서 중성자 포획에 의해 원소가 형성되는 과정을 우주의 팽창 과정과 연결했다. 대폭발 이론은 러시아 출신의 미국 과학자인 가모브에 의해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가모브는 1904년 3월 4일 러시아 영화 '전함 포템킨'의 배경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항구 도시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레닌그라드 대학에 입학한 가모브는 팽창우주론의 창시자였던 프리드만에게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접했다. 이 때 가모브는 프리드만과 함께 상대론적 우주론을 연구하려고 했으나, 프리드만이 갑자기 죽는 바람에 양자론에 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1928년 대학을 졸업한 가모브는 괴팅겐으로 가서 높은 에너지 장벽을 낮은 운동에너지로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양자투과 개념을 기초로 하는 핵붕괴에 관한 논문을 집필했다. 그 뒤 그는 닐스 보어가 있는 코펜하겐 이론 물리학 연구소와 케임브리지의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연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원자핵에 관한 '액체 방울' 모형을 제안하여, 핵분열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마련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별 내부의 열핵 반응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다.

구 소련을 떠난 가모브는 1934년부터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 워싱턴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1936년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와 함께 베타 붕괴에 관한 연구를 했다. 그 뒤 가모브는 별의 진화와 열핵 반응에 대해 연구했는데, 별의 진화에 대한 가모브의 연구는 이후 대폭발 이론에 관한 연구로 이어졌다.

전쟁 중 많은 과학자들은 핵무기 개발에 동원되었고, 이에 따라 별의 진화 및 열핵 반응에 관한 연구는 핵무기 개발과 연결되어 진행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연구들은 순수 우주론 연구로 이어졌다. 1948년 조지 가모브, 그의 제자 랠프 알퍼(Ralph Asher Alpher) 그리고 한스 베테(Hans Bethe)는 자연계에 존재하는 수많은 원자핵들은 특정한 온도와 밀도의 평형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기보다는 원초적 물질이 팽창하고 냉각되는 연속적인 형성과정을 통해서 단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가모브는 자신의 논문을 발표할 때 자신의 이름이 감마와 유사하고 자신의 제자 이름은 알파와 유사한 것을 보고, 베타에 해당하는 이름을 가진 한스 베테에게 자신들의 논문에 공동 저자로 참여해 달라고 부탁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당시 베테는 대폭발 이론의 창안에 직접적인 관여는 하지 않았지만, 가모브는 자신의 논문의 저자들의 이름에 알파-베타-감마가 포함되게 하기 위해 베타에 해당하는 베테를 공동 저자로 초빙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대폭발 이론을 창안한 논문은 알퍼-베테-가모브 이론, 즉 알파-베타-감마 이론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원소 형성 과정과 우주 팽창에 관한 논의는 서로 연결을 맺으면서 발전해 나갔다.

케임브리지의 정상상태 우주론

한편 194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의 천문학자들은 가모브의 팽창우주론과는 전혀 다른 정상 상태 팽창우주론을 제기했다. 이 또다른 우주론은 허먼 본디(Hermann Bondi), 토머스 골드(Thomas Gold)가 제안해서 프레드 호일(Fred Hoyle)에 의해 대폭발 이론의 대안으로써 제기된 우주 모형이었다. 이리하여 1950년대를 통해 196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천문학계에서는 대폭발 이론과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서로 대립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했다.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소위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perfect cosmological principle)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 원리에 의하면 물리 법칙들은 우주 구조에 독립적일 수 없으며, 반대로 우주 구조는 물리 법칙에 의존해야 한다. 따라서 물리 법칙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주가 안정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 또한 우주는 모든 곳에서 균일해야 하며 거시적 규모에서 변화가 없어야 한다. 따라서 우주는 항상 팽창하되 지속적으로 새로운 물질이 탄생해서 일정한 평균 밀도를 유지해야만 한다. 18세기 영국의 지질학자 제임스 허튼은 지구는 정상 상태이며 지질학적 현상은 과거 뿐만이 아니라 현재도 작은 정도나마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지질학적 과정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지질학적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 theory)을 제창했다. 정상상태 팽창우주론은 이 허튼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 일종의 '우주론적인 동일과정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학철학적 근거로 본다면 대폭발설은 격변론(Catastrophe theory)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대폭발 우주론의 발전

대폭발 이론은 1948년부터 1953년까지 가모브, 알퍼, 로버트 허먼(Robert C. Herman), 제임스 폴린(James W. Follin) 등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하지만 1953년 이후 대폭발 이론에 관한 논의는 학계에서 급격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대폭발 이론에 대한 논의가 쇠퇴하게 된 데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우선 당시 핵물리학의 지식으로는 중성자 포획에 의해 가벼운 원소들이 형성되는 비율을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인 우주배경 복사의 존재는 1948년에 처음으로 예언됐으며, 1956년까지 최소한 7회에 걸쳐 그 존재에 대한 예언이 반복되었지만, 당시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논의는 천문학이나 물리학계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대폭발 이론은 가모브라는 물리학자 자신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오히려 1950년대에 대폭발 이론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 나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1950년대에 들어와서 가모브 자신이 대폭발 이론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1956년 콜로라도 대학으로 옮긴 뒤에는 학문적으로 아주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가모브는 엄청난 술고래였는데, 종종 이 주벽 때문에 학회에서 눈꼴사나운 상황을 연출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결국 그의 이런 특이한 행동이 물리학 공동체에서 자신의 위치를 몰락시키는 데 기여했고, 대폭발 이론의 창시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서 대폭발 이론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가모브와 함께 연구하던 알퍼와 허먼 역시 1950년대 중반 이후 기업체 연구소에 자리를 잡으면서 천체 물리학이나 핵물리학 분야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알퍼는 제너럴일렉트릭(General Electric) 회사의 연구소에서, 그리고 허먼은 제너럴모터스(General Motors) 회사의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면서 우주론 분야보다는 유체역학이나 고체물리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폭발 이론에 형성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 우주론 분야에서 멀어지면서 대폭발 이론은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1960년대에 대폭발 이론이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했을 때 이 우주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창시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세대의 과학자들이었던 것이다.

정상상태 우주론과 철학적 논쟁

본디, 골드, 호일 등에 의해서 1948년 제창된 정상상태 우주론 역시 만들어진 지 10년 동안은 내용상 크게 변하지 않는 상태로 발전되었다. 1950년대에 정상상태 우주론의 발전에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한 사람은 대폭발 이론을 창시한 사람들이 아니라 1951년 정상상태 우주론의 새로운 버전을 제안한 맥크리아(William Hunter McCrea)였다. 그는 호일의 이론을 에너지 보존 법칙과 일반 상대성 이론에 더욱 부합되도록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맥크리아는 연속적인 물질의 창조와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을 서로 부합되게 만들기 위해 음의 우주압력(negative cosmic pressure) 혹은 음의 에너지 우주 스트레스(negative- energy cosmic stress)의 존재를 제안하기도 했다.

1959년 본디와 라이틀턴(Raymond Arth Lyttleton)은 이러한 음의 스트레스에 대한 물리적 근원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에 초과 전하의 형성을 바탕으로 하는 전기적 우주(Electrical Universe)를 제안했다. 즉 물질이 생성됨에 따라 아주 작은 양의 우주 초과 전하(universal charge excess)가 형성되어 이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우주의 팽창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전기적 우주론은 곧이어 실시된 실험실 상의 정밀한 실험에 의해 반박되어 1960년 이후에는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정상상태 우주론 역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의심을 받게 되었다.

한편 1960년을 전후해서 우주론을 둘러싼 과학철학적 논쟁도 나타났다. 1961년 옥스퍼드의 철학자 하레(W.H. Harr)는 완전한 우주적 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상상태 우주론이 지닌 과학적 성격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하레는 본디와 골드가 제안한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와 같은 균일성 가정에 기초를 둔 연역적 방법을 불명확한 일반화 방법(the method of indefinite generalization)이라고 불렀다. 하레의 목적은 우주 생성론에 관련된 모든 이론들은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반증이론으로 유명했던 포퍼(Karl Raimund Popper, 1902­1994)의 과학철학 역시 우주론적 논쟁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미 1934년 『탐구의 논리』(Logik der Forschung)라는 이름으로 독일어로 출판된 포퍼의 책은 1959년 『과학적 발견의 논리』(The 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라는 이름으로 영어로 번역 출판되면서 영미 철학계에 급속도로 소개가 되었다. 포퍼의 이론에서는 반증가능성의 유무 여부가 과학과 비과학을 구분하는 중요한 구획기준이 된다. 정상상태 우주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우주론이 다른 우주론에 비해 우주에서 반박가능한 관찰 증거를 제시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포퍼의 프로그램을 환영하였다.

포퍼 자신은 1950년대에 우주론과 관련된 철학적 논쟁에는 끼여들지 않았다. 포퍼는 본래 프리드만과 드메트르의 우주론에 대해 배우면서 대폭발 이론에 매료됐었다. 하지만 시간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많은 보조 가설 때문에 반박 불가능한 이 대폭발 이론을 싫어했다. 포퍼는 대폭발 이론보다는 정상상태 우주론을 더욱 선호하게 되었지만, '완전한 우주론적 원리' 자체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헬륨 문제, 우주 배경복사, 대폭발 이론의 부상

1961년 브란스(Carl Brans)와 디키(Robert Henry Dicke, 1916­1997)는 일반상대성 이론보다는 마흐의 법칙의 관점에 더욱 충실한 새로운 중력이론을 시도했다. 헝가리 물리학자 롤란드 폰 외트뵈슈(Roland von Etvs, 1848­1919)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1888년에서 1922년까지 행한 정밀한 실험을 통해 중력 질량과 관성 질량의 비를 108의 비율까지 정확하게 측정했다. 브란스와 디키는 이 비율에 대한 측정을 1011 이하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무엇보다도 브란스와 디키는 여기서 중력 상수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고 주장한 폴 디랙의 주장을 다시 부활시켰다. 1937년 디랙(P.A.M. Dirac, 1902­1984)은 우주의 질량, 중력 상수, 우주의 허블 나이 등의 세 기본 우주 상수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하고 이 거대 수 가설(Large Number Hypophesis)에 바탕을 둔 우주론을 언급하면서 중력상수를 비롯한 물리의 기초상수들이 시간에 따라 변한다고 주장했었다. 브란스와 디키는 디랙의 논의를 더욱 발전시켜 중력 상수가 우주가 팽창하면서 1년에 1,000억분의 2의 비율로 아주 조금씩 작아진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브란스와 디키의 이론은 일종의 대폭발 이론이었지만, 르메트르와 가모브의 이론과는 다른 전통에 속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브란스와 디키는 1961년의 논문에서 가모브, 앨퍼, 허먼 등이 행했던 과거의 연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브란스와 디키의 이 비정통 이론은 태초의 우주에서 발생하는 복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줌으로써 대폭발 이론이 부상되는 것과 간접적인 연결을 맺고 있었다.

한편 우주 속의 헬륨의 분포에 대한 논의는 정상상태 팽창우주론과 대폭발 이론 사이에서 대폭발 이론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964년 호일과 테일러(R.J. Taylor)는 은하에 존재하는 헬륨의 비율이 정상적인 별에서 생성되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많다는 것에 주목했다. 즉 무거운 원소들은 전체 원소들의 질량의 약 2 % 정도 되기 때문에 별의 내부에서 핵반응에 의해 생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헬륨의 경우는 우주상에 정상적인 별에서 생성되었다고 하기엔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호일과 테일러는 헬륨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 아주 극적인 상태에서 만들어졌다고 가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즉 우주가 고온, 고압 단계를 거쳤거나 혹은 아주 거대한 물체가 지금까지 생각되던 천체 물리학적 진화 과정에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고 가정해야 이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정상상태 우주론을 지지했던 호일은 거대한 물체의 존재를 선호했고, 테일러는 고온, 고압의 초기 단계를 선호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가모브의 대폭발 이론을 입증하는 우주 배경 복사가 발견되면서 대폭발 이론이 정상 상태 우주론을 누르고 우주론 분야에서 지배적인 학설로 부상되었다.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이론적인 차원의 논의는 1948년부터 몇 번 있었지만, 1950년대를 통해서 우주 배경 복사를 찾으려는 연구 프로그램은 사실상 중단되었었다. 우주 배경 복사는 우주론과는 직접적으로는 연관 없이 발전했던 전파천문학 분야에서 발견되었다. 1965년 미국 뉴저지 주 벨 전화 연구소에 있는 아노 펜지어스(Arno Penzias)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은 극히 예민한 잡음을 제거하기 위해서 마이크로파 탐지 시험을 하던 중 우주의 모든 방향에서 밤낮과 계절이 상관없이 관측되는 복사선을 발견했다.

1964년 여름과 1965년 2월 프린스턴 대학의 디키는 뉴저지 주 크로포드 힐에 있는 벨 전화 연구소에서 이미 우주배경복사와 관련된 측정을 하는 것을 모른 채로 자신의 동료들인 제임스 피블스(James Peebles), 피터 롤(Peter Roll), 윌킨슨(Wilkinson) 등에게 우주배경복사를 측정해보라고 제안했었다. 1965년 3월 초에 제출한 논문에서 디키와 피블은 뚜렷한 실험적 증거가 없이 단지 정성적으로 논의를 전개했다. 이 프린스턴 연구팀이 실험적 결과를 얻기 전에 그들은 자신들이 찾으려는 복사에 관한 증거를 프린스턴 연구소 근처에 있는 벨 전화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당시에 디키는 우주배경복사를 확인할 이론은 있었지만, 그것을 뒷받침해줄 증거를 얻지 못한 상태였고, 펜지어스는 이론에 대해서는 모르는 채로 실험 결과만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린스턴 연구팀의 이론적 해석 도움으로 벨전화연구소의 연구팀이 발견한 복사선은 초기의 우주 팽창 과정에서 생겨나서 우주의 팽창과 함께 변화되어 현재의 마이크로파로 지구에서 관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결국 디키, 피블즈, 롤, 윌킨슨 등이 펜지어스와 윌슨의 측정을 대폭발 이론에 입각해서 해석함으로써, 벨전화연구소에서 아무 생각없이 발견한 우주 배경 복사는 가모브의 대폭발 이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증거로 대다수의 천문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1981년 앨런 구스(Alan H. Guth)는 초기 표준 팽창 우주론이 지니는 문제점으로 보완하기 위해서 인플레이션 시나리오라는 새로운 우주 모형을 발표했다. 구스가 표준 팽창우주론의 문제점으로서는 첫째, 당시의 표준 우주론은 인과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우주 내의 여러 지역들이 거의 동일하며, 특히 동시에 같은 온도라는 것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우주가 현재 우리가 관찰하는 것처럼 균일하기 위해서는 우주 초창기의 허블 상수가 무지무지하게 정확하게 조절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스는 표준 우주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은 우주가 초창기에 팽창할 때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해서 1028제곱이나 그 이상으로 과냉각되었다는 것을 가정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스의 이 시니리오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우주는 초기 대폭발이 있을 때 아주 극적인 사건을 겪은 뒤에 오늘과 같이 팽창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학대중화와 가모브

가모브는 물리학 연구를 벗어나 생물 과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1954년 그는 유전정보의 암호화 이론을 전개하여 DNA 분자의 정보가 단백질을 형성하는 20종류의 아미노산 서열로 번역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돌파구를 마련해주었다. 즉 그는 세 쌍의 염기 서열이 결합하여 20개의 염기 삼중쌍(triplet)을 형성하고 이것이 20 종류의 아미노산과 1대 1로 대응됨을 처음으로 밝혔던 것이다.

가모브는 일반 대중을 위한 과학책을 무려 20여권이나 출판하여 과학 대중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그가 집필한 최초의 대중과학서는 1937년에 나온 『이상한 나라의 톰킨스씨』(Mr. Tomkins in Wonderland)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톰킨스는 그가 집필하는 대중과학 책의 주인공으로 계속 등장하여 나중에는 아예 톰킨스 시리즈로까지 출판되었다. 이외에도 그는 『하나, 둘, 셋 ... 무한』(One, Two, Three ... Infinity, 1947)『우주의 창조』(The Creation of the Universe, 1952), 『지구라고 불리는 행성』(A Planet Called Earth, 1963), 『태양이라고 불리는 별』(A Star Called Sun, 1964) 등과 같은 많은 대중 과학책을 집필하여 복잡한 과학 개념을 대중에게 알기 쉽게 소개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과학 대중화에 대한 공로로 1956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수여하는 칼링거 상(Kalinga Prize)을 수상하기도 한 가모브는 1968년 8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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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조지 가모브,『조지 가모브 자서전』 (사이언스북스, 2000).
1930년대는 인류가 핵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게 만드는 일대 전기를 마련한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에 영국 케임브리지의 제임스 채드윅(James Chadwick, 1891­1974)은 중성자를 발견했으며, 프랑스 파리의 졸리오-퀴리 부부는 인공 방사성 원소를 합성하는 데 성공하여 방사성 추적자법을 이용한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로마의 페르미 연구팀은 중성자를 이용해서 수많은 원소의 핵변환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1938년 말에는 독일 베를린의 오토 한(Otto Hahn, 1879­1968)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n, 1902­1980)에 의해 우라늄 핵분열이 발견되어 인류는 바야흐로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중성자 발견

인류로 하여금 핵변환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고 핵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만든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1932년 채드윅에 의한 중성자의 발견이었다. 1930년 독일 베를린의 제국물리기술 연구소에서 일하던 발터 보테(Walter Wilhelm Georg Bothe, 1891­1957)와 벡커(H. Becker)는 폴로늄에서 나오는 알파입자를 베릴륨에 쏘았을 때, 다른 원소에서는 볼 수 없는 강력한 '감마선'이 나오는 것을 관찰했다. 프랑스에서도 퀴리 부인의 딸인 이렌 졸리오-퀴리(Irne Joliot-Curie, 1926년까지 Irne Curie, 1897­1956)와 그의 남편 프레데릭 졸리오-퀴리(Frdric Joliot-Curie, 1926년까지 Jean-Frdric Joliot, 1900­1958)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이 강력한 감마선으로 실험하던 중 역시 놀라운 현상을 목격했다. 그들은 파라핀, 물, 셀로판 등과 같이 수소를 포함한 물질을 알루미늄 창 앞에 삽입시키고, 여기에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투과력이 강한 감마선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이 경우에 이온화 상자로 측정한 이온화의 강도는 통상의 감마선처럼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들은 이것이 수소 함유 물질에서 나오는 양성자 때문이라는 것을 실험적으로 밝혔다. 그러나 만약 이 현상을 감마선에 의해서 나타나는 컴프턴 효과에 의해서 양성자가 튀어나온 것으로 해석한다면, 그 감마선은 엄청난 규모의 에너지와 작용 단면적(cross section)을 가져야만 했다. 이 놀라운 현상은 이렌 퀴리가 1931년 12월 28월 과학아카데미의 주례 회의에서 처음으로 발표했으며, 1932년 1월 18일 남편과 함께 공동으로 더욱 자세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들의 발표문은 파리의 과학아카데미 논문집인 『콩트 랑뒤』(Comptes Rendus)에 실려 이것이 1월말에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도착했다.

퀴리의 첫 번째 논문이 나오고 이어 두 번째 논문이 나오는 사이에 케임브리지에서는 채드윅의 지도 아래 보테와 벡커가 관찰한 현상에 해당하는 실험을 2년간 계속하던 웹스터(H.C. Webster)가 왕립학회지에 자신의 실험 결과를 기고했다. 웹스터는 자신의 실험에서 아주 수수께끼와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즉 알파 입자의 빔이 베릴륨 표적 위에 쏘아질 때 알파 입자의 입사 방향으로 방출하는 방사선이 반대 방향으로 방출하는 방사선에 비해 훨씬 투과력이 강했다. 만약 이 방사선이 감마선이라면 이것은 이해하기 아주 힘든 현상이었다.

채드윅은 웹스터의 지도 교수로서 자신의 실험실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에 대해 주목하는 한편, 파리에서 전해오는 소식도 면밀히 검토하였다. 특히 그는 1920년 러더퍼드의 베이커 강연의 영향을 받아 핵 내부에 중성 입자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또한 채드윅은 미국 볼티모어에 있는 존스 홉킨스 대학 병원으로부터 양질의 폴로늄을 얻을 수 있었으며, 1920년대를 통해 발전한 새로운 전자공학적 실험 기법과 정교한 계수기를 이용할 수 있었다. 1932년 2월 17일 채드윅은 '중성자의 가능한 존재'(Possible existence of a neutron)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네이처』지에 보냈으며 이것은 열흘 뒤에 출판되었다. 이 논문에서 채드윅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매우 강력한 '감마선'이 감마선이 아니라 수소원자와 질량이 비슷하고 중성을 띤 새로운 입자인 '중성자'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많은 과학자들은 보테와 베커가 관찰한 투과력이 강한 '감마선'이 복사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채드윅의 기발한 발상과 치밀한 추론에 의해 여기에는 감마선과 아울러 새로운 소립자인 중성자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었다.

인공방사선 원소의 발견과 방사선 추적자법의 발전

1932년 중성자가 발견되고, 곧이어 우주선에서 양전자가 발견되면서 과학자들은 핵과 관련된 현상을 더욱 분명한 메커니즘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중성자 발견의 근처까지 갔었던 파리의 졸리오-퀴리 연구팀도 이 연구 프로그램을 통해 1934년 방사성 원소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1933년 졸리오-퀴리 팀은 가벼운 원자들에 알파 입자를 쏘면 양전자가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 성과를 그 해 10월에 열린 솔베이 회의에서 보고했다. 이 실험을 계속하던 중 파리 라듐 연구소의 졸리오-퀴리 팀은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폴로늄 시료 위에 알루미늄 판막을 갖다 놓으면, 시료를 제거하여도 양전자의 방출이 급격히 감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즉 알루미늄 판막이 방사성을 띠면서 마치 통상의 방사성 물질처럼 지수적으로 방사선 붕괴의 방출이 감소하였다. 이런 현상은 보론과 마그네슘과 같은 가벼운 원소에서 발견되었는데, 반감기가 보른은 14분, 마그네슘 2분 30초, 알루미늄은 3분 15초였다. 결국 졸리오-퀴리 팀은 이 실험에서 질소, 규소, 인의 동위원소에 해당하는 인공 방사성 원소를 처음으로 얻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 실험 결과는 1934년 2월 10일 『네이처』지에 출판되었는데, 다음 해 졸리오-퀴리 부부는 새로운 방사성 원소를 합성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인공 방사성의 합성 성공은 무엇보다도 과학 연구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게 되는 방사선 추적자법의 보편화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미 1913년 헝가리 태생의 과학자 에베시(Gyrgy Hevesy, 1885­1966)는 납의 동위원소인 라듐D가 보통의 납과 화학적으로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라듐D를 보통의 납과 섞어서 방사성을 추적하는 '방사성 지시자'(radioactive indicator)로 사용하는 방법을 고안해내었다. 오늘날은 '방사성 추적자'(radioactive tracer) 방법이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하지만 당시에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그리 많지 않아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1931년부터 사이클로트론을 비롯해서 여러 입자 가속 장치가 고안되었고, 1932년 채드윅에 의해서 발견된 중성자를 이용해 보다 용이하게 새로운 원소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인공 방사성 원소의 합성에 성공하면서 방사성 추적자 방법은 물성 과학은 물론, 생명 과학, 생태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중요한 연구 수단으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

한편 영국의 채드윅이 중성자를 발견한 뒤 수많은 과학자들은 이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서 핵변환을 일으키는 실험을 했다. 중성자는 전하가 없기 때문에 쉽게 원자핵 가까이까지 접근할 수 있었고, 따라서 핵을 쉽게 변환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과학자들에게 이 중성자는 아주 유용한 연구수단이 되었다. 1930년대에 중성자를 원자에 충돌시켜 원자핵이 변환되는 것을 연구하던 수많은 과학자들 가운데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한 것은 독일의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었다. 그들은 1938년 말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면 바륨이 생성되고, 여기서 두세 개의 중성자가 나와서 이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우라늄을 연구하고 있던 여러 연구팀 가운데 왜 하필이면 베를린의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 팀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하게 되었을까? 당시 우라늄의 핵변환을 연구하던 팀 가운데에는 베를린 팀 이외에도 그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던 연구팀이 많았다. 우선 졸리오-퀴리 팀은 1934년 붕소, 마그네슘, 알루미늄 등에 폴로늄에서 나오는 강력한 알파선을 충돌시켜, 최초로 인공적으로 방사성 원소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런 실험을 본 로마의 페르미는 졸리오-퀴리가 사용한 고에너지 알파입자 대신에 채드윅이 발견한 느린 중성자로 인공적으로 원소 변환시켜 방사성 물질을 만들려는 착상을 했다. 결국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1901­1954)와 아말디(E. Amaldi), 다고스티노(O. D'Agostino), 라세티(F. Rasetti), 세그레(Emilio Gino Segr, 1905­1989) 등으로 구성된 로마의 연구팀은 1934년 중성자를 쏘아서 인공 방사성 물질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때 이들은 수많은 원소에 중성자를 쏘아서 원소변환을 했었는데, 마지막으로 우라늄에도 중성자를 쏘아서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초우라늄을 만들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또한 파리 팀도 1934년부터는 우라늄과 토륨에 중성자를 쏘아 핵의 변환과정을 연구하고 있었다.

학제간 연구조직의 중요성

우선 베를린 팀이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하게 된 가장 커다란 요인 가운데 하나는 베를린 팀의 특이했던 연구조직을 들 수 있다. 당시 파리의 이렌 퀴리를 중심으로 한 연구팀과 로마의 엔리코 페르미 연구팀은 주로 물리학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던 반면에 베를린의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Lise Meitner, 1878­1968), 슈트라스만 연구팀은 물리학자와 화학자들로 구성된 완벽한 학제간(interdisciplinary) 연구팀이었다.

우선 팀장인 오토 한은 유기화학자 출신으로 핵 현상을 연구한 경험이 있었던 방사화학자였다. 1897년 마르부르크 대학에 들어간 오토 한은 대학 당시에는 주로 맥주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공부에는 그다지 뜻이 없던 학생이었다. 1901년 박사학위를 한 뒤 그는 병역을 마친 뒤 1904년 9월 자비로 영국으로 건너가 비활성 기체의 연구로 유명한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의 윌리엄 램지(William Ramsay, 1852­1916) 연구실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시 램지는 방사능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 한에게 100 그램의 바륨염을 주면서 마리 퀴리의 방법을 이용해서 라듐을 추출하라고 부탁했다. 방사화학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았던 오토 한은 이것을 추출하는 연구를 하다가 운이 좋게도 방사토륨(radiothorium)을 발견했다.

뜻밖의 중대한 발견을 한 오토 한은 유기화학보다는 방사화학을 하기로 마음먹고, 보다 넓은 경험을 쌓기 위해 1905년 9월 몬트리올의 맥길 대학에 있던 러더퍼드를 찾아갔다. 이곳에서도 그는 방사악티늄을 발견하는 재능을 발휘했다. 1906년 가을 오토 한은 베를린의 에밀 피셔(Emil Fisher, 1852­1919) 연구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는 여기에서도 메조토륨(mesothorium)을 분리해내는 등 방사화학 분야에서 계속 좋은 연구 업적을 냈다. 1910년에 베를린 대학 화학과 교수가 된 그는 이곳에 있던 루벤스, 네른스트, 제임스 프랑크, 막스 폰 라우에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과 친하게 지냈다. 물리학자 가운데 오토 한에게 있어 가장 중요했던 인물은 그와 평생을 같이 연구했던 리제 마이트너였다. 물리학자였던 리제 마이트너는 당시 독일에서는 드물었던 여성과학자였는데, 한과는 이미 1907년부터 함께 연구를 했었다.

1912년 말 베를린에 카이저 빌헬름 화학연구소가 설립되자 오토 한은 1913년부터 1944년까지 줄곧 이 연구소에서 방사성 분과를 이끌었다. 카이저 빌헬름 화학 연구소가 설립되자 리제 마이트너도 처음에는 한의 연구실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1917년부터는 자신의 연구실을 얻어서 한과 계속 공동연구를 했다. 화학자 오토 한과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와의 오랜 공동 연구의 성과는 우라늄 핵분열 발견으로 나타나게 된다.

페르미 팀과 졸리오-퀴리 팀의 작업을 검토한 뒤 1934년 가을 중성자를 이용해서 우라늄을 변환시키는 실험을 한에게 제안했던 것은 물리학자였던 마이트너였다. 한과 마이트너는 핵변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새로운 원소를 분석할 전문적인 분석화학자를 찾았는데, 그가 바로 슈트라스만이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경험을 쌓은 과학자들의 협동적 연구가 베를린 팀이 우라늄을 발견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파리 팀과 로마 팀에는 우수한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없었다는 것이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라듐과 바륨이 원소의 주기율표상에서 같은 2A족에 속해서 그것들의 화학적 성질이 비슷했다는 것도 이 연구에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필수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주기율표상에서 2번째 세로축에 해당하는 제 2A족 원소들은 원자주위를 돌고 있는 최외각 전자들이 모두 2개씩이어서 다른 물질과 화학결합을 할 때 비슷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서로 유사한 화학적 성질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아주 꼼꼼한 분석화학자가 아니고서는 이것을 구별해내기가 대단히 힘이 들었다. 1930년대까지 과학자들이 얻은 원자변환 지식에 따르면, 원자번호가 92번인 우라늄은 자연붕괴를 하여 알파선과 베타선을 방출하면서 당시까지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커다란 초우라늄 원소로 변환되거나, 혹은 원자번호 91번인 프로탁티늄, 90번인 토륨, 89번인 악티늄, 88번인 라듐 등과 같은 여러 원소로 변하다가 마침내는 안정한 납으로 되어 방사성 원소로서의 일생을 마치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원자핵에 변환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이런 작은 범위에서 일어나지 우라늄이 절반으로 쪼개져서 원자번호가 56번인 바륨으로 변화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얻어낸 생성물 속에는 분명히 바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과학자들은 이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한편 1937년 파리 라듐 연구소의 이렌 퀴리와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공동연구자인 사비치(Paul Savitch)는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서 3.5시간의 반감기를 갖는 방사성 물질을 발견했다. 이렌 퀴리와 사비치는 애초에 그것을 원자번호 90번인 토륨의 동위원소라고 생각했다. 베를린 팀은 이 토륨의 동위원소를 찾으려고 했으나 좀처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이 부정적인 결과를 파리 팀에게 알렸는데, 이후 계속된 실험에서 파리 팀은 이번에는 그것이 원자번호 89번인 악티늄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처럼 전문적인 분석화학자가 없었던 파리 팀은 자신들이 발견한 새로운 방사성 물질을 확인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바로 이 3.5 시간의 반감기를 갖는 방사성 물질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오토 한, 마이트너, 슈트라스만으로 구성된 베를린 연구팀은 우라늄의 핵분열을 발견했던 것이다.

베를린 팀의 승리

1938년 7월 중순 외국인 신분이었던 마이트너가 나치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서 베를린을 떠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이상적이던 베를린 연구팀이 깨어졌다. 이제는 마이트너가 빠진 상태에서 방사화학자 오토 한과 분석화학자 슈트라스만이 그들이 하던 연구를 계속해야만 했다. 베를린 팀의 분석화학자였던 슈트라스만은 기존의 핵 물리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선입관이 없이 오직 생성물의 화학조성을 분석화학 방법으로 정확하게 분석해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도 처음에는 마이트너의 추측대로 우라늄에 중성자를 쏘아서 만든 생성물에서 라듐을 찾기 위해 실험을 계속했다. 그러나 실험을 하면 할수록 자꾸 자신이 찾고자 했던 이 라듐이 바륨과 같이 행동한다는 느낌이 분석화학자인 그에게 와 닿았다. 물리학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바륨이 분석화학자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슈트라스만의 이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한과 슈트라스만은 함께 '화학자의 입장'에서 실험을 다시 한번 꼼꼼하게 반복했다. 이 실험을 행한 다음 주 월요일인 1938년 12월 19일 그들은 마이트너에게 놀라운 결과를 전하게 된다. "우리는 점점 더 우리의 라듐 동위원소가 라듐처럼 행동하지 않고, 바륨처럼 행동한다는 놀라운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마침내 마이트너가 떠난 지 불과 5개월 뒤인 1938년 12월 베를린 팀은 중성자의 충돌에 의한 우라늄 핵변환의 생성물이 바륨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라늄은 약간 작아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이다.

일단 우라늄이 중성자에 의해 분열된다는 착상이 확인된 뒤에는 나머지 메커니즘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커다란 문제는 아니었으며, 마이트너와 그의 조카인 오토 프리시(Otto Robert Frisch, 1904­1979)의 해석에 힘입어 거의 순식간에 대략의 우라늄 분열 메커니즘이 나타나게 되었다. 즉, 우라늄은 바륨과 크립톤으로 분열된 뒤 두세 개의 중성자를 방출하고, 또한 심한 질량 결손에 의해서 막대한 에너지가 연쇄적으로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으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원자탄의 기본 원리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결국 현대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될 우라늄 핵분열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인 핵물리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핵물리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분석화학자에 의해 그 발견의 실마리가 잡혔던 것이다.

페르미 팀이 핵분열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는 연구조직의 차이 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과학외적인 요인도 작용했다. 페르미 팀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변화로 인해서 사분오열되어 연구에 단절이 생겼다. 1938년 파시스트 인종법안은 페르미 처에게 영향을 미쳤는데, 1938년 12월 페르미는 중성자를 사용해서 방사성 물질을 만든 공로로 노벨상을 받으러 스톡홀름에 갔다가 이탈리아로 돌아오지 않고 그냥 미국으로 건너가 버렸다.

핵분열의 발견과 핵에너지 시대의 진입

오토 한과 슈트라스만에 의한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으로 우리 인류는 새로운 핵에너지 시대에 진입하게 되었다. 1933년 핵물리학자인 러더퍼드는 우리 시대에 원자에너지를 산업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은 요원하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이렇듯이 1939년 봄까지도 원자에너지를 산업적이나 군사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게 보였다. 그러나 1938년 말에 독일의 한과 슈트라스만이 우라늄 핵분열의 산물인 바륨을 발견하고, 다음해 1월 6일 이것을 발표하면서 사태는 돌변했다. 우라늄 핵분열 소식은 발견되자마자 급속히 퍼지면서 과학자들은 곧바로 이와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한과 오랫동안 함께 연구했다가, 우라늄 핵분열 발견 직전에 독일을 떠나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던 리제 마이트너는 한에게 핵분열 발견 소식을 듣고 크리스마스 휴가를 이용해 그녀를 방문한 오토 프리시와 함께 1월 16일에 공동으로 이에 관련된 글을 『네이처』지에 보냈으며,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머물고 있던 보어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1월 20일에 역시 『네이처』지에 핵분열과 관련된 글을 발표했다. 불과 한 달도 안된 사이에 핵분열 소식은 지구를 완전히 한바퀴 돈 셈이었다.

우라늄 핵분열에 관한 연구가 급속도로 진척되면서 우라늄235 외에도 자연에 보다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는 우라늄 238을 이용해서 만들 수 있는 또 다른 핵 물질이 미국의 과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1940년 5월 버클리 대학의 맥밀런(Edwin M. McMillan, 1907­1991)과 에이블슨(Philip M. Abelson) 우라늄보다 원자번호가 큰 원자번호 93의 넵튜늄을 발견했고, 이어서 1941년 2월 버클리의 젊은 화학자인 시보그(Glenn T. Seaborg, 1912­1999)는 세그레와 함께 연구하여 플루토늄을 발견했다. 세그레와 시보그가 1941년 5월 느린 중성자에 의한 플루토늄의 단면적이 우라늄 235의 1.7배라는 사실을 계산해내면서 플루토늄은 주요 핵연료로 부상되었다.

핵분열과 새로운 핵연료의 발견에 따라 핵에너지의 산업적, 군사적 응용 가능성이 급속도로 현실화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페르미는 1942년 역사상 최초로 원자로를 건설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맨해튼 계획에 참가한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에 의해서 1945년 원자탄은 제조되었다. 원자탄은 완성되자마자 곧바로 전쟁에 사용되었다. 우라늄의 핵분열이 발견된 지 겨우 6년만의 일이다.

1945년 오토 한은 독일 핵 개발에 관한 전후 조사 때문에 영국으로 잡혀가 억류되어 있는 상태에서 우라늄 핵분열을 발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독일이 항복한 뒤인 1945년 7월 3일 연합국 정보 요원들은 전쟁 중에 독일이 어느 정도까지 핵 개발을 진행시켰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1901­1976),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1879­1960), 발터 게를라흐(Walther Gerlach, 1889­1979), 발터 보테, 카를 폰 바이츠제커(Carl Friedrich von Weizscker), 오토 한 등 핵 개발과 관련된 핵심적인 과학자들을 독일에서 납치하여 케임브리지에서 약 25마일 떨어진 한 농가에 억류해 놓았다. 알소스 특명(Alsos Mission)으로 이름 붙여진 이 군사 활동을 통해 연합국 정보 요원들은 독일 과학자들을 외부와 차단시켜 놓고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 내용을 비밀리에 조사하고 있었다. 노벨상은 유명한 과학자들의 업적을 인정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억류된 과학자들을 풀려나게 하는 데에도 부분적으로 기여했다. 1945년 11월 16일 오토 한은 자신이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것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되었으며, 이듬해 그는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가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우라늄 핵분열의 발견에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했던 슈트라스만은 노벨상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편에서 1980년 생애를 마감했다.

참 고 문 헌

[1] J. Chadwick, Nature 129, 312 (1932).
[2] J. Chadwick, "The Existence of a Neutron," Proc. Roy. Soc. London (1932), Vol. 136, pp. 692-708.
[3] O. Hahn and F. Strassmann, Naturwiss, 27, 11-15 (1939).
[4] O. Hahn and F. Strassmann, Naturwiss, 27, 89-95 (1939).
[5] John Hendry, Cambridge physics in the thirties (Bristol, Hilger, 1984).
[6] William R. Shea (ed.), Otto Hahn and the rise of nuclear physics (Dordrecht, Reidel, 1983).
[7] Fritz Krafft, Im Schatten der Sensation: Leben und Wirken von Fritz Straßmann (Weinheim, Verlag Chemie,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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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뜨거움과 차가움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감각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온도라는 개념이 실제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열에 대한 최소한의 정량적인 개념은 온도계가 발명되면서 가능하게 되었지만, 온도계의 발명만으로 열에 대한 학문 분야가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열에 관한 분야가 열역학이라는 체계적인 이론 체계로 발전한 것은 에너지 보존법칙과 엔트로피 법칙 등 열역학의 기본 법칙이 정립된 19세기 이후의 일이었다. 19세기말 클라우지우스, 맥스웰을 거쳐 볼츠만은 열역학의 기본 법칙을 정립하고 열에 대한 현상을 통계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 성공했고, 결과적으로 통계 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출현과 칼로릭 이론의 발전

온도계는 1592년 갈릴레오에 의해 처음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갈릴레오는 온도 측정을 위한 팽창 매질로 공기를 사용했는데, 갈릴레오가 발명한 이 기체 온도계는 구체적인 온도 단계가 없어 체계적인 정량적 측정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당시의 온도계는 기압계와 같은 맥락에서 발전했다. 이 기체 온도계가 점차로 액체 온도계로 대체되면서 비교적 정확한 온도 측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온도계가 발명된 뒤 과학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온도계를 고안해냈다. 이에 따라 18세기 초에 이르면 무려 35 종류나 되는 다양한 온도 체계가 창안되었다. 그 가운데에서 스웨덴의 천문학자였던 셀시우스(Anders Celsius, 1701­1744), 네덜란드의 가브리엘 파렌하이트(Gabriel Fahrenheit, 1686­1736), 프랑스의 레오뮈르(Ren-Antoine Ferchault de Raumur, 1683­1757) 등이 제안한 온도 체계가 비교적 널리 사용되었다. 18세기 초 파렌하이트는 오늘날 우리가 화씨라고 부르는 온도 체계를, 그리고 1742년 셀시우스는 수은을 사용해서 섭씨 온도 스케일을 창안했다. 파렌하이트는 애초에 물의 빙점을 30, 체온 90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32와 96으로 바뀌었다가 최종적으로 빙점은 32, 체온은 98.6으로 정해졌다. 오늘날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1730년 프랑스의 레오뮈르는 물의 빙점을 0, 비등점을 80으로 정한 온도 스케일도 제안했었다. 이 체계는 창안 당시에는 다른 체계에 비해 아주 널리 사용되었지만, 19세기 말에 다른 체계들로 흡수, 교체되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현재 물의 빙점을 32로 하고 비등점을 212로 하여 그 사이를 180 등분한 화씨 온도 체계와, 물의 빙점을 0으로 하고 비등점을 100으로 하여 그 사이를 100 등분한 섭씨 온도 체계를 사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등장과 함께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열에 대한 정량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특히 물리학자인 라플라스와 화학자인 라부아지에는 열량계를 이용해서 열에 대한 정량화 작업을 추진했다. 이들이 전개한 열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열을 무게가 없는 입자로 생각하는 칼로릭 이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당시에 칼로릭은 화학 원소와 마찬가지로 근본 물질로 간주되었다. 근대적인 원소의 개념을 확립했던 라부아지에가 열거한 원소 가운데에는 빛과 함께 열의 양을 나타내는 칼로릭도 포함되어 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이공학 교육기관이었던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공학자들은 칼로릭 이론을 기반으로 해서 열 현상에 대한 수학적 논의를 전개시켜 나갔다. 푸리에(Joseph Fourier, 1768­1830)와 같은 사람들은 칼로릭 이론에 입각해서 열 전달 현상을 수학적으로 다루었으며, 사디 카르노(Sadi Carnot, 1796­1832)는 열 효율 문제를 수학적으로 다루었다. 전문가로서의 분명한 경력을 쌓은 이들은 열의 전도도, 온도 변화, 기울기 등과 같은 열과 관련된 수학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824년 사디 카르노는 '열의 동력에 관한 고찰'(Rflexions sur la puissance motrice de feu)이라는 글에서 열기관의 열효율은 그 열기관의 구성물질에 관계없이 그 열기관을 구성하는 두 온도만의 함수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카르노는 물이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떨어지면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물의 양과 한 일의 양의 비가 두 위치의 차이만의 함수로 표현되는 데에 주목했다. 물의 낙차와 마찬가지로 열도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내려가면서 일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열의 양과 그 과정에서 한 일의 비, 즉 열효율은 두 온도의 차이만의 함수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이 카르노의 핵심적 주장이었다.

하지만 열기관의 효율을 이론적으로 다룬 카르노의 이 논문은 출판 당시에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고 학자들에 의해 거의 무시되었다. 우선 이 논문은 아주 적은 수량만 복사되었고 따라서 문헌의 전파 속도도 느릴 수 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에 증기기관 기술의 중심지는 영국이었기 때문에 무명의 프랑스 저자가 쓴 이 책이 영국으로 전파되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다. 이외에도 이 논문은 공학자들이 주로 읽는 공학 전문잡지에서 출판되었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욱이 논문의 내용도 열기관에 관한 실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론적인 문제를 취급했기 때문에 공학자들마저 이 논문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에너지 보존 법칙의 동시 발견

한편 1840년대에 들어와서 여러 형태의 에너지들, 즉 역학적 에너지와 열, 화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같은 종류의 물리적 양이고, 이것들이 서로 바뀔 수 있다는 생각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에너지가 서로 변환가능하다는 생각이 퍼지게 된 데에는 프랑스의 계몽사조에 대한 반발로 독일에서 유행하던 자연철학주의(Naturphilosophie)의 영향이 컸다. 셸링, 노발리스를 비롯한 자연철학주의들은 18세기에 프랑스에서 성장한 분석적, 기계적, 실험적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에 다시 조화와 감성을 부여했다. 자연친화적이며 유기체적인 자연관을 선호했던 자연철학주의자들은 자연의 여러 가지 다양성의 밑바탕에는 통일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조의 영향 아래 1840년대에 열역학 제1법칙에 해당하는 에너지 보존법칙이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동시에 발견되었다.

본래 의사였던 로버트 마이어(Robert Meyer, 1814­1878)는 음식물이 몸 속에 들어가서 열로 변하고, 이것이 몸을 움직이게 하는 역학적 에너지로 변한다는 생각을 기초로 해서 모든 종류의 에너지들이 서로 변환가능하며, 전체 에너지의 양은 보존된다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즉 화학 에너지, 열 에너지, 역학적 에너지 등이 서로 같은 종류의 물리적 양이며, 자연에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예로서 열과 일의 변환 계수를 계산하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물리 분야의 전문학술지인 『물리학 및 화학 연보』(Annalen der Physik und Chemie)에 보냈다. 하지만 당시 '새로운 물리-화학 잡지'를 표방하며 학술잡지를 새롭게 개편하려던 편집인 포겐도르프(Johann Christian Poggendorff, 1796­1877)는 마이어의 논문이 너무 사색적이고 전문적인 물리학 논문이 되기에는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수록을 거절했다. 마이어의 논문이 수록을 거부당한 것은 당시 독일 과학이 초기의 낭만주의적인 단계를 벗어나 과학 방법에서 분석적이고 수학적인 강조하는 형태로 제도화되어 기존의 자연철학주의에 영향을 받은 낭만적인 과학활동에 대해 반발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한 예에 해당한다. 마이어는 할 수 없이 자연철학주의에 대해 그나마 호의적이었던 구스타프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가 운영하는 화학저널인 『화학 및 약학 연보』(Annalen der Chemie und Pharmacie)에 자신의 논문을 기고했다.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1842년에 마이어가 한 작업을 모른 채로 1847년 생체의 열은 생명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음식물의 화학에너지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을 내어놓았다. 그는 여러 형태의 에너지들이 서로 변환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역학적 에너지에만 적용되던 에너지 보존법칙을 다른 에너지까지 확장시켰다. 헬름홀츠는 이런 생각이 담긴 논문을 포겐도르프의 『물리학 및 화학 연보』에 투고했지만, 마이어와 마찬가지로 편집인으로부터 수록을 거부당했다. 헬름홀츠도 할 수 없이 이 내용을 물리학회 강연집인 『에너지 보존 법칙에 관해서』(Uber die Erhaltung der Kraft, 1847)라는 소책자로 출판하게 되었던 것이다.

에너지 보존법칙에 관한 생각은 독일뿐만이 아니라 실험적 전통이 강했던 영국에서도 등장했다. 영국의 제임스 줄(James Prescott Joule, 1818­1889)은 1840년대의 여러 작업을 통해서 에너지는 보존되고 또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줄은 자신의 실험을 정리해서 1850년 '열의 역학적 등가에 관해서'(On the mechanical equivalent of heat)라는 논문으로 출판하고 여기서 772 파운드가 1피트 내려갈 때 생기는 역학적 에너지로 물 1파운드(453그램)를 화씨 1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클라우지우스와 엔트로피 개념의 출현

1834년 철도 공학자였던 에밀 클라페롱(Emile Clapeyron, 1799­1864)은 그때까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카르노의 이론을 수학적으로 다시 정리해서 물리학자들과 공학자들에게 소개하면서 카르노의 열기관 효율에 관한 이론은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847년 6월 훗날 켈빈 경(Lord Kelvin)이 되는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은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모임에서 에너지 보존법칙에 관한 실험을 하고 있던 줄을 만났다. 이 때 톰슨은 에너지 보존법칙을 입증하려는 줄의 실험에 대한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줄의 발표를 들은 뒤 톰슨은 칼로릭 이론을 사용한 카르노의 법칙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이 서로 모순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카르노와 클라페롱의 견해에 의하면 칼로릭이라는 열 입자는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떨어지면서 일을 할 때 칼로릭의 양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은 열과 일이 같은 종류의 양이기 때문에 일을 할 때에는 칼로릭 양에 변화가 생겨야만 하고 따라서 이 두 주장 사이에는 서로 모순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톰슨은 카르노 법칙과 줄의 법칙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1854년 열에 관한 동역학적 이론을 정립하기도 했다.

1850년 당시 베를린의 공병 및 공업학교 교수였던 루돌프 클라우지우스(Rudolf Clausius, 1822­1888)는 '열의 동력에 관해서'(Ueber die bewegende Kraft der Wrme)라는 논문에서 카르노의 원리와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열효율은 두 온도만의 함수라는 카르노의 원리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과 부합되게 하기 위해서는 열에서 일이 나올 때는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내려가야 한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열은 항상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흐르고, 외부의 일의 작용이 없이는 낮은 온도에서 높은 온도로 올릴 수 없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2법칙을 초보적인 이해가 가능한 형태로 나타낼 수 있었다.

1851년 톰슨은 '열의 동력학적 이론에 관해서'(On the dynamical Theory of Heat)라는 논문에서 한편으로는 클라우지우스의 우선권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카르노의 이론과 줄의 에너지 보존법칙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을 해결하는 방안, 즉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안했다. 톰슨은 외부의 도움 없이는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스스로 옮겨갈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열은 낭비(dissipation)가 되기 때문에 일단 일이 열로 바뀐 뒤에는 그 열이 모두 일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톰슨은 이렇게 열이 낭비되는 과정을 비가역적(irreversible) 과정이라고 말하고 "현재의 물질 세계는 역학적 에너지가 낭비되는 일반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

클라우지우스는 1857년 '우리가 열이라고 부르는 운동에 관해서'(Ueber die Art der Bewegung, welcher wir Wrme nennen)이라는 글에서 기체에 대한 운동학적 이론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클라우지우스는 분자를 당구공으로 간주할 뿐만이 아니라 병진 운동, 회전 운동, 진동 운동 등 복잡한 분자 운동을 고려하여 기체 운동을 다루었다. 클라우지우스의 이 논문은 19세기 기체 분자 운동론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1850년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정성적인 논의를 제기한 이후 클라우지우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수학적 표현을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 경주했다. 이런 일련의 작업의 결과 클라우지우스는 엔트로피라는 새로운 물리량을 정의하게 되었다.

1865년 클라우지우스는

라는 방정식(S는 엔트로피, T는 온도, Q는 열의 양)을 기술하면서 엔트로피(entropy)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때 그는 열 현상을 지배하는 두 개의 일반적 법칙을 제안했다. 우선 그 하나는 열역학 제1법칙으로 '우주의 에너지는 항상 일정하다'는 것이 다.

다음으로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수학적 표현이다. 하지만 당시에 클라우지우스가 수학적으로 전개한 엔트로피 개념은 에너지 개념에 비해 직접적으로 이해되기 힘든 것이었고, 또한 개념 자체도 모호한 점이 많아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열에 대한 통계적 접근과 맥스웰의 악령

한편 열역학은 대개의 경우 수많은 입자로 구성된 계를 다루기 때문에 통계적인 취급을 해야한다는 생각도 등장하게 되었다. 열에 대한 통계적 접근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은 맥스웰(James C. Maxwell, 1831­1879)이었다. 1855년과 1859년 사이에 맥스웰은 애덤스 상(Adams Prize) 문제인 토성 띠의 역학적 체계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많은 물체에 대한 상호작용을 다루었고, 이 과정에서 역학에 대한 통계적 취급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맥스웰은 1859년부터 많은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기체 동력학의 문제를 다루면서 열역학의 문제를 통계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주로 속도의 분포에 관한 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1866년과 1868년에 발표한 '기체의 동력학 이론에 관해서'(On the Dynamical Theory of Gases)라는 논문에서 맥스웰은 분자들의 속도 분포가 최소 제곱(Least Square) 이론에서 관찰 오차의 분포를 나타내는 것과 같은 형태를 띤다고 간주하고, 기체의 확산, 점성, 열전도도 등과 관련된 여러 열역학적 문제를 통계적으로 다루었다.

기체들의 운동을 통계적으로 취급하였지만, 맥스웰 자신이 결정론을 포기하고 비결정론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법칙이 아니라 확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있었다. 1867년 맥스웰은 피터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에게 보낸 편지에서 후일 톰슨에 의해 '맥스웰의 악령'(Maxwell's Demon)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는 유명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별 분자의 운동을 탐지하고 이에 반응할 수 있는 가설적인 지적 존재, 말하자면 맥스웰의 악령이 있다면 열역학 제2법칙이 위배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맥스웰은 열역학 제2법칙이 자연계에서 절대적인 법칙이 될 수 없고, 단지 통계적인 확실성을 지닌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이 가상적인 장치를 고안했다. 탐지 능력 자체에는 정보가 들어 있고 따라서 악령의 행위 자체가 엔트로피를 감소시키고 있기 때문에 정보 자체도 엔트로피와 관련이 된다. 하지만 맥스웰이 이 문제를 제기했던 당시에는 이런 이해가 없었고, 따라서 맥스웰 악령 이야기는 정보 엔트로피 개념이 분명하게 확립된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해결하기 힘든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볼츠만 통계역학의 출현

맥스웰에 의해 논의되기 시작한 기체에 대한 동역학적 이론을 더욱 발전시켜 오늘날 우리가 통계역학이라고 부르는 일련의 역학 체계를 완성한 사람은 오스트리아 물리학자인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1844­1906)이었다. 빈에서 태어난 볼츠만은 1866년 빈 대학의 요제프 슈테판(Josef Stefan, 1835­1893) 밑에서 기체 운동론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볼츠만은 우리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역마살'이 아주 강하게 낀 사람으로 기질상 어느 한 지역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25세의 나이로 그라츠 대학의 수리물리학 교수가 된 볼츠만은 그 뒤 그라츠(1869­73; 1876­79), 빈(1873­76; 1894­1900; 1902­06), 뮌헨(1889­93), 라이프치히(1900­02) 등 아주 여러 대학을 돌아다니며 수학 및 물리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렇게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는 동안에도 볼츠만은 기체 운동론에 대한 자신의 연구만은 항상 지속적으로 수행했다.

볼츠만이 맥스웰의 기체 운동론을 처음으로 접한 증거는 1868년에 출판한 열평형에 관한 논문에서 나타난다.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맥스웰이 논의한 분자의 속도 분포에 관한 논의를 더욱 확장시켜 오늘날 우리가 맥스웰-볼츠만 속도 분포함수이라고 부르는 식과 모든 통계역학의 계산에서 기본이 되는 '볼츠만 인수'를 얻어냈다.

맥스웰과 볼츠만은 평형 상태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평형 상태로 가는 과정도 설명할 수 있어야 비로소 평형 상태의 분포 법칙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맥스웰의 작업을 더욱 확장시키려던 볼츠만은 수송 방정식(transport equation)으로 알려지게 되는 보다 일반적인 해법을 찾아나갔다. 우선 그는 열역학적 엔트로피를 분자 짜임새(configuration)의 통계적 분포와 연결시켜 엔트로피의 증가가 분자 수준의 무질서도 증가에 해당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여기서 열역학 제2법칙을 해석하는 것으로 '볼츠만의 최소 정리' 혹은 '볼츠만의 H-정리'로 알려지는 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엔트로피의 증가의 법칙을 역학의 법칙과 확률의 방법을 사용해서 유도해 낸 것이었다.

H-정리를 둘러싼 논쟁들

1872년 볼츠만은 기체 분자가 열 평형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기체 내의 일반적인 수송 과정에 관한 논의를 전개했다. 기체 운동론 역사상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업적 중에 하나인 이 논문에서 볼츠만은 일반적인 수송 방정식으로부터 기체의 확산, 점성, 열전도 계수를 계산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볼츠만의 수송 방정식에 대한 정확한 해를 구하는 것은 특별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 볼츠만은 비평형 상태에서도 엔트로피의 정의를 확장해서 사용할 수 있는 볼츠만의 H-함수에 관한 논의도 전개했다. 1872년 논문에서는 H-함수는 E-함수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1890년대에 와서 E는 H로 표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리하여 비평형 상태에서 H-함수는 항상 감소한다는 볼츠만의 H-정리가 등장하게 되었다.

볼츠만의 H-정리로 열역학 제2법칙의 통계적인 처리가 어느 정도 해결한 듯이 보였으나, 1876년 빈 대학에서 볼츠만과 함께 연구하던 요제프 로슈미트(Joseph Loschmitt, 1821­1895)가 볼츠만의 해석을 비판함으로써 이 둘 사이에는 치열한 논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로슈미트는 가역적인 뉴턴 역학의 법칙으로는 비가역적인 엔트로피 증가 법칙을 유도해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지닌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 뉴턴 역학으로 비가역적인 열역학 제2법칙을 유도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윌리엄 톰슨에 의해서도 지적된 사항이었다.

로슈미트의 반론에 대해 볼츠만은 처음에는 실제 세계 내에서 과정의 비가역성은 운동 방정식이나 분자 사이의 힘의 법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초기 조건의 문제 때문에 야기된다고 대응했다. 로슈미트와의 논쟁을 통해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확률적인 것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논쟁 과정을 통해 1877년 볼츠만은 열역학 제 2법칙과 열 평형 상태에 관한 확률 계산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그간의 논의를 정리함으로써 자신의 통계역학의 대체적인 골격을 완성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엔트로피와 확률 사이의 관계인 S=k log W라는 유명한 관계식에 해당되는 식을 확률 방법을 써서 유도했다. 여기서 W는 체계의 주어진 거시 상태에 상응하는 미시상태의 가능한 분자의 배열수이고, S는 엔트로피를 말하며, k는 볼츠만 상수이다.

1890년 푸앵카레(Henri Poincar, 1854 ­1912)는 삼체 문제를 다루는 현상 논문에서 일정한 전체 에너지를 갖고 유한한 부피 내에서 움직이도록 제한된 임의의 역학 체계는 종국적으로 특정한 초기 짜임새로 되돌아온다는 정리를 발표했다. 영원 회귀의 원리는 이미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에 의해 예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관점에서 제기된 적도 있었다. 이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엔트로피는 시간에 따라 무한정 증가할 수는 없고, 언젠가는 초기 값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이 회귀 정리를 볼츠만의 통계역학에 적용할 경우 볼츠만의 H-정리는 항상 유효하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1895년 12월 베를린의 젊은 수학자로서 당시 플랑크의 학생이었던 체를레모(Ernst Zerlemo, 1871­1953)는 이 회귀 정리를 이용하면 열역학 제2법칙에 위배되는 역학 모형을 만들 수 있고, 따라서 열역학 제2법칙이 경험적으로 유효한 것이라면 결정론적인 역학적 관점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를레모의 주장은 1896년 『물리학 연보』에 발표되었고, 이어 볼츠만과 체르레모 사이에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명한 것이지만, 제를레모는 그것을 열 이론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는 자신의 H-정리에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완전히 조화될 수 있으며, 서로 양립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선 평형 상태는 단일한 짜임새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가능한 짜임새의 집단이다. 특정한 초기 상태가 회귀하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나타나는 하나의 요동으로서 이것이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 따라서 볼츠만은 푸앵카레의 회귀 정리를 받아들이더라도 엔트로피의 증가를 의미하는 자신의 H-정리의 유효성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볼츠만은 열역학 제2법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통계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라는 것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볼츠만의 최후

1894년 슈테판이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으로 옮겨 그의 후임이 되었으며,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에 『기체론 강론』(Vorlesungen ber Gastheorie)을 출판하면서 기체 운동 이론을 포함한 통계물리학의 일반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볼츠만의 통계 역학이 수용되는 과정은 현대 양자론이 등장하는 과정과 간접적으로 연결을 맺고 있다.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새로운 복사이론을 제기하면서 볼츠만의 논의를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그 이후 과학자들 사이에서 볼츠만의 통계 역학은 서서히 받아들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원자의 실재를 부정하던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 1838­1916)와 그의 추종자들은 볼츠만의 통계역학이 바탕으로 하고 있는 원자론에 대해 계속 끈질기게 비판을 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볼츠만은 심각한 학문적 고립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06년 여름 볼츠만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주요 항구였으며 아드리아 해 북동부에 위치한 트리에스테 근처의 아름다운 두이노 만으로 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해 9월 5일 볼츠만은 갑자기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 자살 당시 그의 부인과 딸은 밖에서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볼츠만이 자살한 실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가 이룩한 평생의 업적이 과학자 공동체에 의해 계속 거부되는 고립감이 그로하여금 자살로까지 이르게 만든 한 원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볼츠만이 세상을 떠난 때를 전후에서 브라운 운동과 같은 요동 현상에 관한 분자 운동에 관한 비평형 통계 이론이 1905년 독일의 아인슈타인, 1906년 폴란드의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Marian von Smoluchowski, 1872­1917)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1908년 경 프랑스의 장 페랭(Jean Perrin, 1870­1942)은 브라운 운동에 관한 아인슈타인과 마리안 폰 스몰루초프스키의 이론을 입증하는 실험을 하여 원자의 실재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데 성공했다. 이와 아울러 1905년 이후 흑체복사 이론과 연관된 양자론이 점차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수용되어 갔으며, 핵 및 원자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사실이 등장했다. 이처럼 볼츠만의 사망을 전후해서 볼츠만이 이룩한 통계역학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것은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 고 문 헌

[1] J. C. Maxwell, Phil. Mag. 32, 390- 393 (1866); Phil. Mag. 35, 129-145, 185-217 (1868).
[2] L. Boltzmann, Wiener Berichte 66, 275-370 (1872).
[3] L. Boltzmann, Wiener Berichte 76, 373-435 (1877).
[4] L. Boltzmann, Vorlesungen ber Gastheorie (Leipzig, 1896-1898).
[5] W. E. Knowles Middleton, A History of the Thermometer and its Use in Meteorology (Baltimore, 1964).
[6] Stephen G. Brush, The Kind of Motion We Call Heat (Amsterdam: North- Holland, 1976).
[7] P. M.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Cambridge, 1982).
인류는 오래 전부터 마찰시킨 물질들이나 자석들이 서로 끌리거나 밀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신비한 작용을 하는 전기와 자기에 관한 지식은 오랜 동안 경험 과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졌다. 전기, 자기, 빛 등에 관한 지식이 수학적 테크닉의 도움으로 이론 물리학과 만나게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1864년 스코틀랜드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은 전기와 자기 현상에 대한 통일적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리 법칙을 정립해서 전자기학이라는 새로운 통합 학문 분야를 탄생시켰다.

자기학의 기원

자석은 이미 기원전부터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나, 자석이 남북 방향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기원 전후로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풍수가들은 자석을 택지나 묘소의 방향을 잡는 데에 이용하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물에 자침을 띄워 방향을 찾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11세기에 이르면 이 방법을 항해에도 사용하게 된다. 나침반의 원조인 이 장치는 당시에 중국에 왔던 아랍 상인들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유럽 선원들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씌어진 것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자석에 관한 문헌은 1269년 프랑스 천문학자 페레그리누스(Petrus Peregrinus de Maricourt)가 집필했다고 하는 『자석에 대한 편지』(Epistola de magnete)이다. 이 책자에서 그는 자석을 지구의 본을 딴 작은 천체 모형으로 간주하면서, 자석의 극성, 나침반 등 자석의 다양한 성질에 대해 언급했다. 페레그리누스는 체계적인 실험을 바탕으로 그 때까지 유럽에 알려진 자석에 관한 지식을 종합하여 서구 자기학에 대한 학문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페레그리누스의 이 선구적인 논의는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유럽에서 잊혀졌다.

300여년이 지난 뒤인 1581년 영국의 선원이자 기계제작자인 노먼(Robert Norman)은 『새로운 인력』(The Newe Attractive)이라는 책에서 자석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다. 이 책에서 노먼은 지자기의 방위각과 복각에 대해 언급하는 등 나침반의 성질에 대한 논의를 전개했다. 당시에 몇몇 지식 계층은 실제 생활에 종사하는 장인 계층과 접촉하여 그들로부터 지식을 얻기도 했다. 즉 지식 계층에 속하는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는 노먼과 같은 장인계층의 사람들이 실제 생활에서 경험적으로 얻은 자기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자기학에 대한 체계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길버트는 1600년 『자석에 관해서』(De Magnete)라는 책에서 자석에 관한 지식을 정리하여 자기에 대한 이론적 체계를 세웠다. 그는 자기 현상을 지구의 균질한 부분들이 서로 일정한 방향으로 향하려는 성질로 자석이 전체 지구의 근본적 형상에 부합하려는 충동이라고 생각했다. 길버트는 자석을 살아있는 지구의 작은 분신이라는 뜻으로 'Terrella'라고 불렀다. 길버트는 자기력을 살아있는 영혼과 유사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의 작업은 근대적인 기계적 철학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기본적으로 물활론적 성격의 르네상스 자연주의 전통 내에 있는 것이었다.

『자석에 관해서』에서 길버트는 지자기의 요소를 상호인력(Coition), 남북방향의 정향성(Direction), 방위각(Variation), 복각(Declination), 회전운동(Revolution) 등으로 구분하였다. 훗날 가우스(Carl Friedrich Gauss, 1777-1855)는 지자기를 연구할 때 방위각을 Declination이라고 명명하고, 복각을 Inclination이라고 명명했는데,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지자기의 요소는 이런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전기학의 발전

이미 고대 그리스인들은 호박(琥珀)을 모피에 문지르면 깃털 같은 가벼운 물체들을 끌어당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영어의 electricity라는 단어도 그리스어로 '호박'이라는 뜻의 엘렉트론(elektron)에서 비롯되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전기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도 역시 길버트에 의해 시작되었다. 길버트는 『자석에 관해서』라는 책에서 자기 이외에 전기에 대해서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책에서 전기와 자기를 철저히 구별하여 다루었다. 그는 전기력은 자기력과는 달리 전기소(electrical effluvium)라는 극히 희박한 액체, 즉 수분에 의해 매개된다고 생각했다.

길버트 이후 전기에 관한 연구는 예수회(Jesuit) 관련 과학자들과 이탈리아에서 실험을 주로 하던 치멘토 아카데미(Accademia del Cimento)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우선 왕립학회의 '실험 책임자'(curator of experiment)였던 프랜시스 혹스비(Francis Hauksbee, ca.1666 ­1713)는 수은 기둥 위의 진공에서 발생하는 빛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전기를 연속적으로 발생시키는 기구를 제작했다. 그는 회전하는 유리공이나 원판을 이용해서 전기를 발생시킨 뒤 이 전기로부터 발생하는 다양한 섬광현상에 대해 연구했다.

아마추어 실험가로서 왕립학회지『철학 회보』(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자주 기고했던 스티븐 그레이(Stephen Gray, 1666-1736)는 1729년 정전기 현상이 접촉에 의해서 아주 멀리 전달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실험은 여러 사람이 다양한 물질을 잡고 있을 때 전기력이 전달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대중적인 흥미를 끌며 유럽과 일본을 비롯한 전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로 재현되었다. 젊은 보병장교였던 뒤페(Charles- Francois de Cisternai Dufay, 1698-1739)는 1733년 그레이의 실험을 더욱 체계적으로 확대해서 금속을 제외한 거의 모든 물질을 비벼서 전기를 발생시키는 데 성공했다. 뒤페는 다양한 물질들로부터 전기를 발생시킨 뒤 이를 종합하여 전기가 수지성(resinous)과 유리질(vitreous)이라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주장했다. 유리병과 같은 유리성 물질을 마찰시켜 만든 전기는 호박과 같은 수지성 물질을 마찰시켜 만든 전기를 끌어당기고, 같은 종류의 전기들은 서로 밀친다는 것이다. 한편 뒤페의 동료이며 계몽사조기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전기학자인 아베 놀레(Abb Jean Antoine Nollet, 1700-1770)는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전기를 띤 물체에서 나오는 전기적 유체의 흐름이 서로 반대인 것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뒤페와 놀레가 전기가 두가지 형태의 유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데에 반해서 충실한 뉴턴주의자였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전기가 한 종류의 유체로 이루어졌다는 일 유체설(One-Fluid Theory)을 주장했다. 그는 뉴턴의 중력 에테르에 대한 설명과 유사하게 압력에 의해 인력과 척력을 나타내는 단일한 정적인 전기 '대기' (atmosphere) 이론을 제안했다. 무엇보다도 프랭클린은 1749년 번개 실험을 제안하고 1752년 실제로 연을 날리는 실험을 하여 번개가 일종의 전기적 작용이라는 것을 보인 것으로 유명하다. 프랭클린이 했던 연날리기 실험은 실제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는데, 1753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의 유능한 물리학자였던 리치만(George Wilhelm Richmann)은 이와 유사한 실험을 하다가 사망하기도 했다.

한편 전기를 저장할 수 있는 일종의 축전지로서 전기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던 라이덴 병(the Leyden jar)은 독일의 클라이스트(Ewald Georg von Kleist, ca. 1700-1748)와 Leyden의 무센부룩(Pieter van Musschenbroek, 1692-1761)에 의해 발명되었다. 1746년 1월 무센부룩은 온도계의 척도를 창안한 것으로 유명한 프랑스 파리 과학아카데미의 레오뮈르(Ren-Antoine Ferchault de Raumur, 1683-1757)에게 라이덴 병을 이용해서 얻어내 자신의 놀라운 실험 결과에 대해 알렸다.

1767년 조지프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는 뉴턴의 중력 법칙과 같이 전하도 거리에 반비례하는 인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뒤 글래스고의 조지프 블랙의 학생이었던 존 로빈슨(John Robinson, 1739-1805)의 실험(1769년), 헨리 캐번디시(Henry Cavendish, l731-1810)의 실험(1771년), 군사공학자이자 토목공학자였던 샤를 오귀스탱 드 쿨롱(Charles Augustin Coulomb, 1736-l806)의 실험(1785년) 등을 통해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정량적인 법칙이 얻어지게 되었다. 결국 18세기를 거치는 동안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다양한 실험적 사실이 발견되고 전기와 자기에 대한 지식이 누적되면서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났으며, 전기, 자기에 대한 정량화도 함께 진행되었던 것이다.

동전기의 발견과 전기화학의 발전

1780년대에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였던 루이기 갈바니(Luigi Galvani, 1737-1798)는 금속을 개구리 신경에 접촉했을 때 개구리가 움츠리는 것을 보고 동물에서 전기가 발생하는 소위 동물전기 현상을 발견하고 이것을 1791년 세상에 발표했다. 당시 갈바니는 이것이 동물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하고 동물전기라고 불렀지만, 실상 전기는 쇠와 구리가 접촉해서 발생한 것이었으며, 개구리는 이 실험에서 단지 검출기 역할만을 했었다. 물론 갈바니도 두 금속의 접촉에 의해서만 전기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해부학자였기 때문에 전기 현상에 대한 설명보다는 생리학적인 측면에 더욱 많은 관심을 집중했다.

갈바니의 친구였던 볼타(Allesandro Volta, 1745­1827)는 갈바니와는 달리 동물의 생리학적 현상보다는 전기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1794년부터 금속만을 가지고 전기를 발생시키는 실험을 한 끝에 갈바니 실험에서 개구리는 단지 검출기 역할만을 한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즉 서로 다른 금속들이 젖은 도전체를 사이에 두고 접촉할 때 흐르는 전기가 발생하고, 이것을 여러 개를 쌓아 기둥으로 연결하여 강한 전류를 얻어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인공 전기 발생 기관인 볼타 전지의 효시가 된다.

금속 전기를 옹호하는 볼타의 주장에 대해 동물전기 옹호자들은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에 따라 이들 사이에는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1797년 볼타는 동물 전기 이론을 제압하고 자신의 접촉 이론을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를 얻어냈다. 3년 뒤인 1800년 볼타는 최초의 전기 배터리를 대중 앞에 선을 보이면서 자신의 배터리가 지닌 증거 효과를 극대화시키며 동물 전기 옹호자와의 논쟁에서 마침내 대중적인 차원에서도 승리했다. 이 소식은 곧 당시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전해져 이듬해 볼타는 나폴레옹 앞에서 배터리에 의해 전기가 발생하는 것을 시연함으로써 학문적 명성과 아울러 정치적인 힘도 얻었다.

전기화학의 출현

볼타의 배터리 발명 소식은 곧 유럽의 여러나라에 전달되어 새로운 여러 학문 분야들이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우선 볼타의 연구가 영국의 왕립학회지에 발표된 뒤 험프리 데이비(Humphry Davy, 1778-1829)는 전기 분해에 관한 연구를 통해 나트륨(sodium)과 칼륨(potassium)과 같은 새로운 화학원소를 발견했다. 전기화학은 영국보다도 독일에서 더 많은 각광을 받았다. 특히 당시 독일에서는 자연철학주의의 영향을 받아 낭만주의적인 과학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화학 물질과 전기의 상호 작용을 다루는 볼타의 전기화학은 이 사조에 속했던 과학자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독일의 과학자 리터(Johann Wilhelm Ritter, 1776-1810)는 자연적 힘의 단일성 및 변환가능성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과학자였다. 그는 자연철학주의 사조의 전도사들인 노발리스, 셸링 등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 화학적 에너지, 전기적 에너지, 빛 에너지 등이 서로 변환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에너지 변환 가능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그는 갈바니 전기에 대해 좀더 알기 위해 이탈리아에 있는 볼타를 방문하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자연철학주의의 이런 전통은 동력학주의(Dynamismus)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무게가 없는 입자를 바탕으로 자연을 수학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원자주의(Atomismus)와 대립되는 개념이었다. 1800년 항성 천문학과 성운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허셀(William Herschel, 1738-1822)은 열 작용과 관련되고 가시광선 영역에서 벗어나 있는 적외선을 발견했다. 독일의 낭만주의적 과학 전통 속에서 리터는 그 이듬해 자연철학주의의 중요한 철학 원리 가운데 하나였던 양극성(Polaritt)의 원리에 입각해서, 적외선의 반대편에 있으며 강한 화학적 작용을 보이는 자외선을 발견하기도 했다.

전자기 효과의 발견

전자기 효과를 발견한 외르스테드(Hans Christian Oersted, 1777-1851)도 바로 독일의 낭만주의 과학자들과 밀접한 연결을 맺고 있던 덴마크 과학자였다. 외르스테드가 전기의 흐름이 자석의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는 전자기 효과를 발견한 것도 그가 자연의 통일된 힘을 찾으려는 자연철학주의적인 전통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터와 교분을 가지면서 서로 긴밀한 서신 연락을 하던 그는 이미 1813년에 전자기적 효과를 예견하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었다. 1820년 7월 21일 코펜하겐에 있던 외르스테드는 "전류가 자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실험"이라는 라틴어로 씌어진 책자를 전 유럽의 친구들에게 보냈다. 이 책은 매우 모호하고 사변적인 형태로 서술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 유럽의 과학자들은 저마다 이 놀라운 현상을 재확인하려는 다양한 실험을 반복하게 되었다.

외르스테드의 발견 소식이 프랑스에 처음 전달되었을 때 비오(Jean Baptiste Biot, 1774-1862)와 푸아송(Simon-Denis Poisson, 1781-1840)과 같은 프랑스 과학자들은 이 발견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이 과학적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적대적인 입장을 지녔던 프랑스 과학자들도 이 현상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면서 수학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로 이 현상을 다시 주목하게 되었다. 1920년 9월 4일 아라고(Francois Arago, 1786-1853)는 아카데미에 이 사실을 발표하고 11일에는 이 실험을 재현해 보였다. 그 뒤 앙페르(Andr Marie Ampre, 1775-1836)는 9월에서 11월 사이에 전류가 흐르는 두 평행 도선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발견하는 한편 전자기 효과와 관련된 현상을 수학적으로 정리하였다. 이리하여 1820년에서 1825년을 거치는 동안 앙페르는 외르스테드의 발견을 전류가 흐르는 두 도선 사이의 작용으로 일반화하는 수학적 이론을 전개하는 데 성공했다.

패러데이와 전자기 유도의 발견

전류가 자기에 미치는 영향을 수학적으로 전개한 앙페르의 작업은 패러데이(Michael Faraday, 1791-1867)에 의해 전자기 유도 법칙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난 패러데이는 13세의 나이에 학업을 포기하고 서적 판매 및 제본공으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어려서 그는 브리태니커 백과 사전에 나오는 전기에 관한 127쪽의 글을 읽고 과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12년 왕립연구소(Royal Institution)에서 전기화학자 험프리 데이비의 강연을 듣게 되었는데, 데이비와의 만남은 패러데이의 인생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1813년 데이비의 조수가 된 그는 이때부터 1861년 사임할 때까지 평생동안 왕립연구소와 인연을 함께 했다.

패러데이는 1824년 벤젠과 부틸렌을 발견했으며, 벤졸을 분리하는 등 화학자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전기화학과 전자기학 분야에서 보다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내었다. 패러데이는 영국에 있었지만 데이비 등의 작업을 통해 자연의 통일적인 힘을 찾으려는 독일 자연철학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이런 영향 아래서 그는 1820년 10월 1일 외르스테드의 발견을 스스로 확인해 보기도 했다. 그가 1831년 전자기 유도 법칙을 발견하고, 1849년, 결국에는 실패했지만, 중력이 다른 종류의 힘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적으로 확인하려고 시도한 것도 바로 이런 영향 때문이었다.

서로 다른 힘들이 상호 영향을 미치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패러데이는 1825년에서 1828년 사이에 이미 전자기 유도를 확인하려는 초보적인 실험을 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패러데이가 사용했던 측정 장치의 한계로 말미암아 전자기 유도 현상을 확인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1831년 8월 29일 패러데이는 오늘날의 변압기와 유사한 장치를 고안하는 데 성공했다. 패러데이는 이 변압기를 이용해서 자신의 실험을 더욱 정교하게 진행시켜 마침내 10월 17일 전자기 유도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11월 왕립학회에서 발표했다. 이때 패러데이는 전자기 유도 현상을 설명하면서 전압에 의해 극성화된 입자선의 기하학적 표현인 유도력선(line of inductive force)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1845년 패러데이는 자기장에 의해 편광면이 회전하는 광자기 회전효과를 발견했으며, 비스무트와 유리와 같은 물질이 반자성의 성질을 보임을 실험을 통해 발견했다. 광자기 회전 효과와 반자성에 대한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기력선(Magnetic Field)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기장 개념을 더욱 발전시킨 패러데이는 1852년 '자기력선의 물리적 특성'(The physical character of the lines of force)이라는 논문에서 힘들은 주위 공간을 통한 굽어진 역선에 의해서 서로 매개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자기력선을 단순한 설명의 도구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실재라고 믿게 되었던 것이다.

패러데이의 자기력선과 장의 개념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패러데이가 제창한 장의 개념을 받아들이게 되면서 전자기력이 무한한 속도가 아니라 유한한 속도로 전파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1845년 3월 19일 가우스는 자신의 공동연구자였던 빌헬름 베버(Wilhelm Weber, 1804-1891)에게 빛과 유사한 속도로 전달되는 전자기 전달 현상에 관한 생각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유한한 전파 속도를 지닌 전자기장 개념이 담겨 있는 가우스의 이런 선구적인 생각은 당시에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고, 가우스가 죽은 뒤에 출판된 가우스 전집에 수록되어 맥스웰의 전자기 법칙이 완성된 뒤에 맥스웰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1892년부터 켈빈 경(Lord Kelvin)이 되는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1824-1907)도 1840년대에 열현상과 전기현상의 수학적 유추를 이용해 전기현상에 대한 수학적 체계화를 시도했다. 1847년 그는 스톡스(George Gabriel Stokes, 1819-1903)가 발전시킨 연속매질 속에서의 회전 및 변형력에 관한 수학적 방법을 채용하고 탄성 고체의 직선 및 회전 변형과 같은 용어로 사용하여 전기력과 자기력의 전파 과정에 대한 수학적 설명을 제안했다. 이후 톰슨은 패러데이의 자기장 개념을 수학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전자기 현상을 에테르 속에서의 소용돌이(vortex) 운동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맥스웰의 학창시절

앙페르, 패러데이, 톰슨 등에 의해 발전한 전자기학을 수학적으로 체계화하여 전기 및 자기 현상에 대한 통일적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태생의 물리학자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1831-1879)이었다. 맥스웰은 1847년 16세의 나이로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여 광학과 열역학 분야에서 활동하던 물리학자인 포브스(James David Forbes, 1809-1868)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philosophy of common sense)으로 유명한 형이상학자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9th Baronet, 1788-1856)---광학과 동력학을 통일한 것으로 유명한 아일랜드 수리물리학자인 해밀턴(William Rowan Hamilton, 1805-1865)이 아님---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에든버러 대학 시절 맥스웰은 기하학과 강체 문제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850년부터 맥스웰은 스코틀랜드를 떠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우등졸업생 제조기(wrangler maker)라는 명성을 갖고 있었던 튜터(tutor) 윌리엄 홉킨스(William Hopkins) 밑에서 공부했다. 맥스웰 이외에도 사원수(quaternion)의 연구로 유명한 수리물리학자 테이트(Peter Guthrie Tait, 1831-1901), 점성 유체의 행동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영국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스톡스, 열역학 및 전자기학 연구로 유명한 윌리엄 톰슨, 매트릭스와 공간 기하학 연구로 현대 순수 수학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아서 케일리(Arthur Cayley, 1821-1895), 고전역학의 권위자이며 탁월한 케임브리지 대학 선생이었던 라우스(Edward John Routh, 1831-1907) 등도 모두 홉킨스의 지도 아래 과학자로 성장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외에도 맥스웰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귀납 이론으로 유명한 철학자 윌리엄 휴얼(William Whewell, 1794-1866)과 스톡스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맥스웰이 공부하던 시절 케임브리지 대학에서는 수학 트라이퍼스(Mathematical Tripos)라는 졸업 시험 제도가 있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들은 졸업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철저한 수련 생활을 하게 되는데, 시험 문제의 출제 경향 자체가 이곳을 졸업한 사람들의 학문적 경향에 영향을 주었다. 당시 케임브리지에서는 무엇보다도 혼성 수학(mixed mathematics)의 전통이 매우 강했다. 또한 수학 트라이퍼스 시험 제도 내에서 물리학은 해석 동력학의 형태로 수학 교과 과정의 한 부분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케임브리지 수학자들은 기하학적이고 역학적인 유비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나중에 물리학자로서 활동하게 되는 과학자들도 전기 동력학을 다루면서 해석학적인 수학 도구를 많이 사용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출현하게 되는 데에도 이런 기하학적이고 기계적인 유비의 전통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맥스웰은 1854년 수학 트라이퍼스 시험에서 라우스에 이어 차석 우등졸업생(second wrangler)으로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고, 아울러 라우스와 공동으로 첫 스미스 상(Smith's Prize)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맥스웰 전자기학의 성립

맥스웰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로 선출되었지만,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된 관계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1856년 맥스웰은 애버린(Aberdeen)의 매리셜 칼리지(Marischal College)의 자연철학 교수가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신의 전자기학의 개념의 형성에 있어서 중요한 작업을 하게 된다. 학창시절부터 기하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맥스웰은 전자기력의 작용을 기하학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패러데이의 역선 개념에 주목했다. 아울러 맥스웰은 열과 전기 현상 사이의 기하학적 유추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톰슨의 논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1856년에 발표한 '패러데이의 역선에 관해서'(On Faraday's Line of Force)라는 논문은 초기 맥스웰의 학문적 성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물리적 가설과 이론의 방법을 일단 유보하고 유추의 방법을 사용해서 패러데이의 역선과 관련된 문제를 접근했다. 여기서 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역선을 물리적 표현으로 보지 않고 단지 기하학적 유추 표현으로 보았다. 한편 같은 해 톰슨은 패러데이가 발견한 광자기 회전효과를 자기의 소용돌이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맥스웰은 톰슨의 논문을 접한 뒤 패러데이 자기력선을 물리적으로 취급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후 패러데이의 역선을 이해하는 데 소용돌이 메커니즘을 과감하게 도입했다.

1860년 런던의 킹스 칼리지 교수가 된 맥스웰은 보다 물리적인 관점에서 패러데이의 자기력선을 바라보게 된다. 우선 그는 1861-2년에 출판한 '물리적 역선에 관해서'(On the Physical Lines of Forces)라는 논문에서 전자기장을 가설적이고 유추적인 차원을 넘어서 물리적이고 역학적인 관점에서 다루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톰슨과 랭카인(William Rankine, 1820-1872) 등에 의해 제안된 분자 소용돌이(molecular vortices) 모형을 도입했다. 또한 맥스웰은 유체역학적이고 기계적인 유비를 이용해서 전자기 장을 "자기-전기 매질"을 꿀벌집 모양의 세포 에테르로 묘사했다. 여기에서 각 세포는, 그것들의 운동이 불균일한 자장 내의 전류의 흐름에 해당하는, 일종의 '공전 입자'(idle-wheel particle)의 층에 의해서 둘러싸인 분자 소용돌이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런 설명이 가상적이고 유추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맥스웰은 이 모형이 어디까지나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가설이라는 것을 일관되게 강조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가 여기서 비탄성 유체의 탄성 변위 뒤틀림(elastic displacement distortion) 현상에 대한 유추로서 전기적인 변이전류(displacement current) 개념을 도출해내었다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기계적인 형태에서 나온 것으로 전류, 전하를 중심으로 하는 전자기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했다기보다는 유체역학적인 유비에 의한 전기장을 중심으로 서술된 것이었다.

맥스웰은 이 논문에서 탄성체의 속도를 피조(Armand Hippolyte Louis Fizeau, 1819-1896)가 측정한 빛의 속도와 비교해본 뒤 광학과 전자기학의 통합가능성을 시사했다. 이런 통일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는 마침내 "빛은 전기적, 자기적 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매질의 종파로 구성되어 있다"(light consists in the transverse undulations of the same medium which is the cause of electric and magnetic phenomena.)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은 기계적인 모형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는 형태로서 일종의 '빛에 대한 전자기계 이론'(electro-mechanical theory of light)이라고 할 수 있다.

1865년 '전자기장의 동력학 이론' (Dynamical theory of the electromagnetic field)이라는 논문에서 맥스웰은 비로소 앙페르 법칙과 변이전류에 바탕을 둔 진정한 의미의 빛에 대한 전자기론(electromagnetic theory of light)을 분명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873년 맥스웰은 그 동안 자신이 얻은 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전자기론』(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이라는 책으로 출판했는데, 이 책으로 맥스웰의 전자기학 체계는 완전한 모습을 띠고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헤르츠와 전자기파의 발견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에 의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맥스웰의 전자기학의 성립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톰슨은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죽을 때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특히 독일의 과학자들은 맥스웰의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전자기학 체계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완성하던 무렵 독일에서는 베버의 전자기학 전통에 따라 쿨롱 법칙과 앙페르 법칙을 포괄하는 전자기학을 전개했다. 앙페르가 발견한 전자기 법칙은 독일의 빌헬름 베버를 비롯한 추종자들에 의해서 원격작용에 의한 전자기 역제곱 법칙으로 발전되었다. 즉 베버의 영향을 받은 많은 독일 과학자들은 전자기력이 무한대의 속도로 전파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독일에서 맥스웰의 전자기학이 수용되어 결과적으로 상대성 이론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데에는 헤르츠가 전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확인한 것이 분수령이 되었다. 당시 독일 과학의 대부였던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 1821­1894)는 베버의 전자기학을 더욱 세련된 발전시켜 나가고 있었다. 1879년 베버의 이론틀 내에서 매질의 극화 개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던 헬름홀츠는 베를린 아카데미에서 유전성 극화에 의한 전자기 효과를 검출하는 내용을 현상 공모 문제로 출제했다. 그는 자신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헤르츠(Heinrich Hertz, 1857 ­1894)에게 이 문제를 풀도록 격려했으나, 헤르츠는 당시에 이 전자기 효과를 실험적으로 검출하는 데에 실패했다.

결국 헤르츠는 전자기 효과 검출 실험이 아닌 다른 주제로 박사학위를 하게 되었다. 그 뒤 헤르츠는 베를린, 킬 등을 전전하다가 1885년 카를스루에 고등기술학교(Technische Hochschule Karlsruhe)의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바로 여기서 그는 1887년 10월에서 1888년 2월 사이에 전기스파크를 이용해서 행한 유명한 전자파 발견 실험에 성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헤르츠는 전체적으로는 헬름홀츠의 이론틀 내에서 실험을 진행시켰으나, 결과적으로 그의 실험은 베버의 전자기학을 더욱 발전시킨 헬름홀츠의 이론을 부정하고 맥스웰의 전자기 이론을 검증한 셈이 되었다. 헤르츠가 전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입증하고 난 뒤 독일에서는 맥스웰 전자기학이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마침내 로렌츠의 전자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참 고 문 헌

[1] W. D. Niven, (ed.), The Scientific Papers of J. Clerk Maxwell, 2 vols. (Cambridge, 1890; repr. New York, 1952).
[2] J. C. Maxwell, Treatise on Electricity and Magnetism, 2 vols (Oxford, 1873).
[3] P. M. Harman, Energy, Force, and Matt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2).
[4] Thomas L. Hankins, Science and the Enlightenme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5).
파동역학은 행렬역학과 함께 양자물리학이 형성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역학 체계이다. 파동역학은 행렬역학보다 약간 뒤에 출현하기는 했지만, 과학자들은 편미분방정식으로 기술되는 파동역학을 더 선호했다. 오스트리아 과학자 슈뢰딩거가 창안한 이 파동역학 체계는 오늘날 양자화학, 고체물리학, 양자통계역학, 양자광학 등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면서 일반성을 인정받고 있고 적용영역 또한 계속 확장되고 있다.

슈뢰딩거의 학창시절

에르빈 슈뢰딩거(Erwin Schrdinger)는 1887년 8월 12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났다. 슈뢰딩거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모습인 복합적인 성격을 그대로 간직하며 성장했다. 슈뢰딩거의 일생은 상호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삶으로 점철되어 있다. 슈뢰딩거에 관한 대표적인 전기 작가인 월터 무어는 슈뢰딩거의 생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에르빈 슈뢰딩거는 현대물리학의 위대한 창시자들 가운데 가장 복잡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불의에 대해서는 열정적으로 싸웠지만, 모든 정치적 행동은 경멸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허세와 형식을 혐오했지만, 영예를 얻고 상훈을 받는 것을 어린애처럼 즐겨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동료라는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 개념에 몰두했지만, 모든 종류의 협동적 작업을 멀리했다. 그의 지성은 명확한 추론에 바쳐졌지만, 그의 기질은 프리마돈나처럼 폭발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무신론자라고 공언하고 다녔지만, 항상 종교적 상징을 사용했으며, 그의 과학적 작업은 신성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모든 면에서 그는 진정한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Moore, p.4) 슈뢰딩거의 인생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겉으로 보기에 모순된 수많은 모습들, 말과 행동이 서로 따로 노는 듯한 것들은 모두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특유한 기질에서 배태된 것이었다.

1898년 슈뢰딩거는 11세의 나이로 김나지움에 입학했다. 이 김나지움은 루트비히 볼츠만(Ludwig Boltzmann),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등이 다니던 곳이었는데, 빈에서 가장 덜 종교적인 학교였다. 김나지움 당시부터 반에서 항상 일등을 하는 수재였던 슈뢰딩거는 1906년 빈 대학에 들어가 물리학을 공부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물리학과에서는 크리스티안 도플러(Christian Doppler), 요제프 슈테판(Josef Stefan), 요제프 로슈미트(Josef Loschmidt), 루트비히 볼츠만, 프란츠 엑스너(Franz S. Exner), 하젠뇌를(Friedrich F. Hasenrhrl) 등으로 이어지는 화려한 물리학 연구 전통이 분명하게 확립되어 있었다.

빈 대학의 물리학 전통은 1850년 이 대학의 물리학과 학과장이 된 도플러부터 시작된다. 그는 광원과 관찰자 사이의 상대적 운동이 광원에서 나오는 빛의 파장에 미치는 영향을 밝힌 과학자였다. 1863년부터 물리학과 학과장을 맡은 요셉 슈테판은 1879년 온도에 따른 열복사의 관계를 실험적으로 발견한 과학자였다. 1884년 당시 그라츠에 있던 볼츠만은 슈테판이 실험적으로 발견한 이 실험식에 맥스웰의 전자기학을 적용하여, 전체 복사 에너지가 절대온도에 4제곱에 비례한다는 슈테판-볼츠만 법칙을 이론적으로 유도했다. 슈테판의 조교였다가 교수가 된 로슈미트는 우리에게 아보가드로 수로 알려진 수를 밝히는 등 기체 분자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과학자였다.

1894년 슈테판이 죽자 볼츠만은 빈 대학으로 옮겨 그의 후임이 되었으며, 바로 이곳에서 기체 운동 이론 분야를 비롯한 통계물리학 체계를 창안했다. 볼츠만의 영향 아래 빈 대학에서는 강한 통계 물리 전통이 수립되었고, 이런 전통은 프란츠 엑스너, 슈뢰딩거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원자론을 주장하던 볼츠만은 원자의 실재를 비판하던 에른스트 마흐의 추종자들의 끈질긴 비판 속에서 슈뢰딩거가 빈 대학에 입학하기 몇 달 전인 1906년 여름 목을 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 안타까운 불의의 사고로 슈뢰딩거는 거장인 볼츠만과 함께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슈뢰딩거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슈뢰딩거에게 가장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은 실험 물리학 분야의 엑스너와 이론 물리학 분야의 하젠뇌를이었다. 특히 슈뢰딩거는 하젠뇌를 교수의 이론물리학 강연에 많은 매력을 느꼈고, 그에게 역학, 전자기학, 열역학, 광학 등의 과목을 수강했다. 하지만 그가 존경했던 하젠뇌를 교수는 이탈리아 남부 티롤 지방의 플라우트 고지 전투에서 이탈리아 군의 공격으로 수류탄에 맞아 전사하고 만다. 실험물리학자였던 엑스너는 비인과적 자연기술을 선호하였으며, 볼츠만이 전개했던 통계적 생각을 더욱 발전시켰던 사람이었다. 자연법칙을 통계적으로 바라보는 엑스너의 철학적 관점은 슈뢰딩거의 지적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4년 3월 5일 슈뢰딩거는 「물리학 연보」에 '탄성적으로 결합된 점계의 동역학에 관해서'(Zur Dynamik elastisch gekoppelter Punktssysteme)라는 논문을 보냈다. 이 논문은 그가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출판한 가장 탁월한 것이었으며, 향후 슈뢰딩거의 학문적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 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이 논문에서 그는 수리물리학에서 사용하는 편미분방정식은 원자론적 입장에서 볼 때 엄밀한 의미에서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미분방정식에서 사용되는 극한은 단지 '유사극한'(Pseudogrenzwerte)으로 순수 수학자들이 생각하는 극한과는 다르다. 또한 연속체에 바탕을 둔 미분방정식은 물질이 실제로는 원자론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결론에 도달할 수 밖에 없다. 전쟁으로 징집하기 직전에 완성한 이 논문에서 슈뢰딩거는 원자 모형에 기반을 둔 계에 있어서 초기 값의 명시화에 대해 심도 깊은 분석을 함으로써, 볼츠만이 탐구했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슈뢰딩거가 여기서 보여준 학문적 스타일은 훗날 물리학의 혁명을 가져올 파동역학에서 등장하는 파동 운동에 대한 미분방정식을 기술하는 작업으로 이어졌다.

전후의 슈뢰딩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슈뢰딩거는 포병 장교로 이탈리아 전선에 배치되었다. 1915년 10월에서 11월 사이에 있었던 제3차 이손초 전투에서 거둔 공로로 무공훈장을 받기도 했던 슈뢰딩거는 1917년 봄 빈으로 배치되어 다시 학문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슈뢰딩거는 빈의 근교 장교 학교에서 기상학 및 물리학 실험 등을 가르쳤다. 이 때 그는 원자열과 분자열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양자론에 대한 논문을 처음으로 집필했다. 또한 그는 브라운 운동에 관한 연구로 유명한 마리안 스몰루코프스키(Marian Smoluchowski)의 영향을 받아 방사선 붕괴률에 관한 재멋대로 요동(random fluctuation)에 관한 완전한 분석인 슈바이들러 요동(Schweidler fluctuation)을 포함하는 통계 물리 분야의 논문을 집필했다.

한편 슈뢰딩거는 전선에 있는 동안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처음으로 접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을 접하자마자 그는 이 이론이 지닌 중요성을 즉각 간파했다. 빈으로 돌아온 그는 빈 대학의 루트비히 플람(Ludwig Flamm), 한스 티링(Hans Thirring) 등과 같은 물리학자들도 이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곧 그 자신도 이 문제에 뛰어들었다. 이때 슈뢰딩거는 일반상대성 이론을 공부하면서 광학에서 나오는 호이헨스의 원리와 역학에서 나오는 해밀턴 방정식을 연결시키는 시도를 했는데, 이 주제는 훗날 그가 파동역학을 만드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전후에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와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에 심취했다. 슈뢰딩거가 당시에 이런 철학에 심취하게 되는 데에는 전후에 등장한 사조로서 결정론적 세계관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비합리주의적이고 낭만적 분위기도 한 몫을 했다. 칸트의 진정한 후계자로 자처한 쇼펜하우어는 칸트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단지 감각 인상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현상을 시간과 공간의 범주에 짜맞추는 능동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정신과 의지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칸트보다도 더 나아갔다. 즉 칸트는 물자체는 인간의 사유나 경험으로부터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했지만, 쇼펜하우어는 칸트와는 달리 물자체가 의지와 동일하다고 주장했다. 의지는 현상도 표상도 아니며 직접적으로 경험된 실제라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정신과 의지가 물질 세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인도의 베단타 철학도 접하게 되었다. 1918년 당시 슈뢰딩거는 여러 저자들이 쓴 인도철학에 관한 책을 주석까지 달면서 열심히 탐독했다. 슈뢰딩거가 훗날 파동역학을 창안하고 생명과 정신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는 데에는 인도철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슈뢰딩거가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자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 힘든 것처럼 인도 철학이 그의 파동역학 형성에 미친 영향을 분명한 형태로 파악하기는 무척 힘들다.

파동역학 출현 이전의 슈뢰딩거

1918년에서 1920년까지 빈 대학에서 머무는 동안 슈뢰딩거는 색채이론에 대한 논문을 집필했다. 1920년 잠시 슈트트가르트 대학에서 교수를 하던 슈뢰딩거는 슈트트가르트에서 외각 전자가 궤도 내부로 침투하는 개념을 바탕으로 해서 좀머펠트의 고전양자론을 교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양자론 분야에 뛰어들었다. 1921년 10월 슈뢰딩거는 마침내 자신의 최대의 업적을 이루게 될 취리히 대학의 이론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하지만 취리히 초창기 시절인 1922년부터 1923년 사이에 슈뢰딩거는 주당 11시간이나 강연을 하는 힘든 생활을 했으며, 결과적으로 1923년은 그의 학문적 생산력에 있어서 최저를 기록한 시기가 되었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에는 뛰어난 교수들이 대부분의 강의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1922년 12월 9일 슈뢰딩거는 물리학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대중들 앞에서 보여주는 교수 취임 강연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는 자신의 스승인 엑스너의 철학적 견해를 열광적으로 소개했다. 1919년 엑스너는 『자연과학의 물리적 기초에 관한 강연』이라는 책에서 자연 법칙의 통계적 기초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이 책에서 그는 통계적인 총체를 포함하는 개별 분자적 사건은 인과적 법칙을 따르지 않고 완전히 무질서하게 일어나며 어떤 인과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슈뢰딩거는 당시에 파동-입자 이중성 문제에 대해 골치를 앓으면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을 파기하는 것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1922년 11월 8일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과 복사 과정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파울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말하기 두려운 일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방출 과정에서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파기된다고 믿는다." 즉 원자에서 복사선이 구면파로 방출됨에도 불구하고 마치 바늘 모양의 운동량을 원자에게 주어 원자가 뒤로 밀려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에너지-운동량 법칙이 거시적으로만 유효한 통계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파동역학을 완성하기 이전에 슈뢰딩거는 자연법칙이 통계적일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1924년 보어를 중심으로 한 코펜하겐의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대체하는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기했을 때 이들의 생각에 매우 동조적이었다. 당시 보어, 크라머스, 슬레이터 등 코펜하겐의 과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복사 이론을 제안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원자세계의 기술에 있어서는 에너지와 운동량이 통계적으로만 보존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이 새로운 복사 이론이 지닌 통계적 성격이 비인과적 자연법칙을 주장하던 엑스너의 주장과 서로 통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 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 아주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파동역학을 완성하기 전에는 슈뢰딩거가 비인과적 자연법칙에 대해 무척 호의적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그가 양자역학에 관한 철학적 해석인 코펜하겐의 견해를 거부했다는 것과 연관시켜 볼 때 참으로 놀랄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파동역학의 탄생

1925년부터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의 기체 이론과 연관시켜 이상기체의 통계학적 열역학에 관한 연구를 했다. 1924년 6월 인도 다카 대학의 물리학자 보즈(Satyendra Nath Bose)는 아인슈타인에게 기체 운동 이론에 관한 한 논문을 보내왔다. 이 논문은 보제가 이미 영국의 물리학 저널인 〈필로소피컬 매거진〉에 보냈다가 거절당했던 것이었다. 보즈가 쓴 논문을 본 아인슈타인은 이 논문의 중요성을 금방 알아차렸고, 스스로 번역하고 개인 의견을 첨부해 독일 물리학회 저널로 보냈다. 이리하여 훗날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양자 통계역학의 두 기둥이 되게 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가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다.

1924년 이상기체 이론을 연구하던 프랑스의 물리학자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는 물질이 파동적인 성질을 나타낸다는 물질파 이론을 제안했다. 슈뢰딩거와 드브로이는 각각 파동역학과 물질파 이론을 창안하기 직전에 모두 이상기체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25년 11월 3일 아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와 11월 16일 알프레드 란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슈뢰딩거는 자신이 드브로이 논문을 면밀히 읽었으며, 그 의미를 이제 완전히 파악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슈뢰딩거는 드브로이-아인슈타인 이론에 의하면 움직이는 입자는 세계의 기초를 형성하는 파동 복사 위로 솟아 나온 거품산등성이(Schaumkamm)일 뿐이며, 이런 관점이 자신이 그 동안 추구해왔던 기체 통계학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1926년 마침내 기존의 행렬역학과는 전혀 다른 파동역학이라는 새로운 양자역학 체계를 만들어 냈다. 슈뢰딩거가 드 브로이의 물질파 개념에서 자신의 파동방정식을 얻어내는 과정에 대해서는 슈뢰딩거 자신이 확실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 과정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들이 상당수 없어져서 무척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그가 처음에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으로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설명하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슈뢰딩거의 첫 시도는 이론적 결과가 실험치와 맞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갔다. 그 뒤 슈뢰딩거는 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포기하고 비상대론적인 파동방정식을 전개하여 이것으로 수소의 발머 계열을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드 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이 상대성이론을 전제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엉성한 비상대론적인 식이 실험치와 일치한다는 문제는 있었지만, 슈뢰딩거는 이 비상대론적 파동방정식을 첫 논문으로 1926년 1월에 발표했던 것이다. 첫 번째 논문에서 슈뢰딩거는 고전역학의 해밀턴-야코비 방정식에 변분법을 적용해서 파동방정식을 유도했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이 방정식을 유도하기 전에 여러 추측을 통해서 파동 방정식의 형태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슈뢰딩거는 원자 내의 전자가 정상적인 에너지 준위들 사이를 마치 도약을 하듯이 순간적으로 상태가 전이된다는 양자비약(quantum jump) 개념에 대해서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런 괴이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는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을 연속체적인 자신의 파동역학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때 그는 자신의 파동함수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슈뢰딩거의 이런 연속체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프랑크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이 여러 실험을 통해서 양자비약을 실험적 사실로 믿고 있었던 보른은 슈뢰딩거 방정식을 충돌과정을 설명하는 데 이용하면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를 통계적이고 비인과적으로 해석했다. 즉,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의 제곱은 실제 전자의 밀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다른 입자들과 서로 충돌해서 나타날 수 있는 가능한 상태, 즉 확률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비인과적 세계관을 선호하는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슈뢰딩거의 전체 인생을 통해 볼 때 그는 자연 법칙의 통계적 성질에 대해 아인슈타인처럼 철저하게 부정적이지는 않았다. 슈뢰딩거가 양자이론에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양자론의 비결정론적 성격이라기보다는 정상적인 에너지 준위들 사이를 마치 도약하듯이 순간적으로 상태가 바뀌는 양자비약을 인정한다는 점이었다. 양자비약에 대한 그의 비판은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계속된다.

슈뢰딩거의 파동역학과 드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은 데이비슨(C.J. Davisson)의 전자 산란 실험과 톰슨(George Paget Thomson)의 전자 회절 실험을 통해 그 실험적인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데이비슨은 당시에 벨전화연구소에서 연구하던 과학자였다. 그는 1926년 여름 영국으로 휴가를 갔다가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학술회의에 참가했는데, 여기서 보른의 강연을 통해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과 슈뢰딩거 파동역학을 접했다. 보른의 강연에 자극을 받은 그는 이미 1923년에 한 바 있던 전자산란에 관한 초보적인 실험을 다시 한번 정교하게 반복해보기로 마음먹었다. 1927년 3월 데이비슨과 저머(Lester H. Germer)는 니켈 단결정을 이용한 전자 산란 실험을 통해 드브로이 물질파를 실험적으로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한편 스코틀랜드 애버딘 대학의 자연철학 교수였던 G.P. 톰슨도 1926년에 열린 영국과학진흥협회 학술회의에 참가한 뒤 보른의 강연에 흥미를 갖고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을 실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1925년 7월 보른의 학생이었던 엘자서(Walter Elsasser)는 카를 람사우어가 실험하던 느린 전자의 투과현상을 이용해서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을 실험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엘자서는 보른 밑에서 이론 물리학으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의 실험 계획을 포기했다. 1926년 9월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다이몬드(E.G. Dymond)는 헬륨에서 전자 산란 실험을 통해 엘자서가 찾고자 했던 간섭 유형을 지지하는 실험적 증거를 얻어냈다. G.P. 톰슨은 다이몬드의 실험이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에 대한 정성적인 검증이라고 믿었으며, 자신은 고체 표적을 사용해서 보다 정량적인 실험적 증거를 얻어내려고 했다. 1927년 11월 G.P. 톰슨은 알루미늄, 금, 셀룰로이드 등의 고체 표적에 음극선 빔을 발사해서 전자가 회절하는 모습을 사진 건판에 담는 데 성공했다. 데이비슨과 톰슨의 실험으로 드브로이 물질파 이론과 슈뢰딩거의 파동역학은 분명한 실험적 증거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슈뢰딩거는 아인슈타인과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에 대한 정통 해석으로 자리잡은 코펜하겐 해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1935년 코펜하겐 해석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포돌스키(Boris Podolsky), 로젠(Nathan Rosen) 등과 함께 파동함수에 의해서 주어지는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은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의 비판에 자극을 받은 슈뢰딩거는 같은 해 관찰자의 측정행위가 대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의 해석에 대해 강한 비판을 가했다. 이때 그가 했던 논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 역설'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양자역학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한 한 예로 여러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한편 인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슈뢰딩거는 생명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44년 말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 책은 훗날 생명과학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될 젊은 과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책에서 그는 유전자를 하나의 정보운반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생명체는 지금까지 확립된 물리법칙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또다른 새로운 물리법칙'도 포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슈뢰딩거의 사생활

슈뢰딩거는 자신의 왕성한 학문적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여인과 정사(Love Affair)를 나눈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김나지움 시절부터 슈뢰딩거는 연극을 좋아했으며, 세기말인 아방가르드 시대에 빈에서 만연했던 에로틱한 미술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학자로서의 일생에 첫발을 내딛던 순간이었던 25세 때 슈뢰딩거는 넘을 수 없었던 신분의 차이로 사모했던 사람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경험했다. 그 뒤 슈뢰딩거 생애의 무대에는 수많은 여인들이 등장한다.

슈뢰딩거는 잘츠부르크의 평범한 여인과 결혼하였지만 그들 사이의 결혼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결혼 한 뒤 슈뢰딩거는 수많은 여인과 염문을 일으키고 다녔으며, 자신 역시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몇 번이고 이혼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부인인 안네마리 베르텔-슈뢰딩거(Annemarie Bertel-Schrdinger)는 슈뢰딩거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혼을 하지 않고 평생 그와 함께 살았다. 어린 이란성 쌍둥이 가운데 한 명인 이타 융거(Itha Junger), 슈뢰딩거 친구의 아내이며 슈뢰딩거의 첫 번째 딸을 낳았던 힐데그룬데 마르히(Hildegrunde March), 무대 배우로서 맹렬 여성인 유부녀 세일러 메이(Sheila May) 등은 그가 사귀었던 대표적인 연인들이었다. 심지어 슈뢰딩거는 대학의 동료 교수인 헤르만 바일(Hermann Weyl)이 자신의 부인과 공공연한 관계를 맺는 것을 묵인할 정도로 기이한 생활을 했다. 평생 식지 않는 학문적 열정과 끝없는 여성 편력을 동시에 과시했던 슈뢰딩거는 1961년 1월 4일 고향인 빈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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