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일(촘롱→히말라야호텔.2870m)
  08시에 출발했다. 가파른 수 백 개의 계단을 내려가서 여울의 다리를 건너 다시 엄청나게 가파른 길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 일행 중 익중이가 간밤의 간식에 체했는지 얼굴이 창백하다. 아버지 김용국씨가 가시를 구해서 손가락을 땄다. 영 시원치 않은 모양이어서 걱정이다.
3시간을 걸어서 도착한 곳이 Sinuwa다. 11시면 이른 시간이지만 점심을 먹기로 하였다. 이후로는 롯지가             <트레킹이란....>
철수를 해서 히말라야 호텔까지는 4시간 정도 가야 한단다. 눈 산을 보며(이 곳에서 보는 마차푸차례의 경치는 일품이다) 먹는 떡 라면의 맛이 일품이다. 자파티(정말로 옛적 우리 어머니가 주시던 국수꼬리 구운 것 같다)도 맛이 좋았다. 도중 남원에서 왔다는 처녀들을 둘 만났는데 김치가 너무 그립단다. 대단한 처녀들이었다.
  오늘의 일정은 대부분 아열대의 계곡을 걷는 샘이다. 대나무와 활엽수가 무성하고 인간의 접근이 어려운 가파른 계곡이라 인적이 드물다. 멀리서 보니 가파른 바위벽 옆을 한 줄로 가는 일행이 개미떼가 철모를 타고 기어올라가는 모습처럼 보였다. 익중이의 체증이 더욱 심해져서 용감한 우리의 총무 이영식(윽!!! 나 아니야) 선생의 마사지 솜씨와 침 솜씨를 유감 없이 발휘하여 그를 구해(?)냈다.
  트레킹 도중의(Bamboo-히말라야호텔) 수많은 대나무가 죽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밀생해서 토양 침식을 방지하고 경사진 비탈의 길을 보호하던 대나무가 집단으로 괴사한 것이 참 이상하다. 음수림의 침입으로 그런 것인지 기후의 이변(異變) 때문인지 궁금하다. 굴곡이 많아 상당히 어려운 구간이다. 2500m 가량 올라가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기온도 상당히 떨어진 것 같다. 대부분 힘들도 많이 소진된 듯 말없이 그냥 걷는다. 이윽고 도착해서 카레로 칼칼하게 저녁을 먹고 나니 약간의 고소 증세가 나타나는 듯 머리가 무겁고 숨도 약간 가빠진다. 치약의 뚜껑을 여니 기압이 낮아서인지 그냥 나온다. 1회용 커피 봉지도 안에서 팽창하여 팽팽하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다. 금세 어둠이       <아열대성 밀림>    밀려왔다. 좁은 협곡이라 옆의 계곡은 빙하 녹은 물이 으르렁거리며 흐른다. 지금도 저렇게 크게 들리는데 여름은 어떨까? 석유 램프를 밝혀 놓고 닭도리탕 내기 나이롱 뻥을 하다가 각자 취침에 들어갔다. 칠흑 같은 밤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일게다. 하루의 피곤함에 깊은 잠에 빠졌는데 얼마쯤 되었을까? 또 오줌 얘기를 해야 하나? 이 깜깜한 밤에 왜 오줌이 또 마렵단 말인가? 침낭을 겨우 빠져나와 밖으로 나왔는데 비몽사몽간 앞뒤 구분도 안 되고 계단에서 넘어졌다(아이쿠우!!!) 겨우 정신을 차려 좌우를 살펴보니 시꺼먼 양쪽의 절벽은 천길 낭떠러지로 서 있고 북쪽을 보니 희미하게 허연 안나푸르나가 엄청나게 가로막고 있지 않은가? 위를 보니  좁은 틈새로 까만 하늘에서는 수없이 깜박거리는 별들이 가득하다. 무서웠다. 어디에다 오줌을 누어야 하나? 좌우도 아니! 북쪽은 더욱 아니다! 진짜 무서워 롯지 벽에다 냅다 갈기고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가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여기 히말라야 호텔은 말이 호텔이지 히말라야라는 지명에 롯지가 있을 뿐이다. 좁은 협곡에 천길 높이의 절벽이다. 낙석도 많아 눈이 많은 해는 위험할 수도 있단다. 몇 년 전에는 낙석 사고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제 일행은 그냥 걷는 무리가 되어 있는 듯 하다.
제 5일(란드룽→촘롱.2140m)
   어제 밤은 지금까지의 여정 중에서 가장 잘 잔 밤 같다. 고지대의 걷기, 기후와 지형, 음식 등이 다른 곳에서 적응 기간이 왜 필요한가를 우리는 체험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긴 트레킹에서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초반의 오버페이스는 절대로 조심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산기슭을 따라 가다가 내려가서 강을 건너고 다시 촘롱까지 올라가는 오늘의 여정은 만만치 않다. 전날 마신 양주 기운이 남아 있어 머리가 약간은 무겁지만 눈부신 경관과 시원한 공기에 마음은 상쾌하다. 트레킹이란 등반(Mountaineering)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결정적인 차이는 산을 정복하거나 정상을 탐하는 법이 없이 산길을 마냥 걷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산과 대화를 나누는 등산인 셈이라 할까?
  지금까지 걸으면서, 이러한 급경사 지대에 계단식 경작지를 일구며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조건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쉽게 토양화(土壤化)되는 암석 구조와  아주 조밀한 퇴적층의 함수력(含水力)이 가파른 경사 때문에 물의 유출이 쉬운 이곳을 인간의 거주가 가능하게 하는 이유가 아닐까? 또한 열대식물, 대나무, 이끼류와 작은 초본류(草本類)가 경사도가 큰 이곳의 토양을 지지(支持)하는 작용을 할 것이고, 거기에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고도와 기압과 포화 수증기압 등등 물리, 화학적 이유가 있을텐데..???) 양말을 빨아 널어도 잘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면 그만큼 수분의 증발량이 적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물이 부족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그냥 또 걸어간다.
  저 멀리 눈 덮인 안나푸르나의 남봉과 주변 아열대 경관과 경사진 산비탈에 인간들이 자연에 새겨놓은 문화경관(文化景觀)을 보며 걷는 상쾌함이란 이곳을 걸어볼 수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Landrung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오다가 Modi Khola 강을 건너(New Bridge) Ghinu Danda까지 오는데 땀이 흠뻑 났다. 차와 점심(수제비국과 현지에서 만든 만두를 먹었는데 여기에서 생산되는 밀로 만들었다는데 아주 구수한 맛이었다)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계곡 쪽으로 한 15분쯤 내려가니 Hot Spring(1780m)이 있어서 노천 온천욕을 했다. 옆에는 차디찬 융빙수(融氷水)가 흐르는데 따뜻한 온천욕을 하니 피로가 확 풀리고 아주 색다른 느낌이었다.
  Chomrong까지의 구간은 눈에 빤히 보이는데도 가시거리가 멀어서인지 보기보다 훨씬 멀었고 지금까지의 구간 중 가장 가파른 곳이다. 오광범 선생님이 현저하게 체력이 떨어진 듯 했다. 대부분은 많이 적응된 듯 보이나 좀 힘들어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조금 올라가다가는 쉬고, 또 올라가곤 했다. 기압이 70밀리바로 낮아졌다. 도중에 10여 마리의 나귀가 나무토막을 싣고 힘겹게 내려오고 있었다. 이곳 고지에서는 인간이나 가축이나 삶이 힘든 것 같다. 또한 인간과 가축이 공생해야만 삶이 가능한 곳이기도 하다.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힘겨워했다. 드디어 촘롱에 도착했다. 이제 제법 많이 적응된 듯 찌야(이곳의 차)의 맛이 구수하다. 촘롱은 어쩌면 전망대 같은 곳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안나푸르나와 마차푸차례는 장관(壯觀)이다. 짐을 정리하고 저녁 준비중인데 역시 먹는 일은 대단히 즐거운 일 중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제 쿡 덴지의 솜씨를 인정해야만 한다. 오늘 저녁엔 미역국에다 잡채, 오이무침에 깍두기까지 준비되어 있어 이곳이 어디 낯선 외국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그의 한식 요리 솜씨   <나무운반하는 당나귀>  는 일품이다. 그리고 구수한 숭늉까지....
  촘롱은 ABC(Annapruna Base Camp)와 MBC(Machhapuchhre Base Camp)로 가는 요충지로 전망도 좋고 아주 깨끗하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란드룽과 간두룽 쪽의 경관(景觀)과  위쪽 ABC로 가는 길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트레킹 신고소(The Annapruna Sanctuary Trekking Check-Post)가 있다. ABC와 MBC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를 거쳐야 하며 신고를 해야 하는 곳이다. 사무실 안에 들어가 보니 영어를 잘하는 중년 여자 한 사람이 근무하며 다양한 이정표와 지도가 벽에 제시되어 있다.(약간의 통계 수치를 적어 왔는데 후반부에 참고로 기록할 예정임) 그리고 이곳에서부터는 롯지의 가격이 협정가격이란다. 마을 사람들끼리 협정을 해서 그것을 어기면 엄청난 벌금을 물린단다. 그래서 협상보다는 깨끗한 집을 고르는 편이 좋다고 한다. 저녁 후 식탁에 둘러앉아 아이들의 재기 발랄한 재롱과 웃음꽃이 핀다. 저녁 먹기 전에 이곳에서 생산된 감자를 쪄 왔다. 설탕을 찍어 먹으니 맛이 좋다. 그런데 '우리의 호프' 남기표가 피곤한 우리들을 위하여 또 연변 시리즈를 한다. "여러분 우리 옌벤에서는 이 정도의 감자는 감자축에 끼지도 못합니다.  <촘롱에서 본 마차>
거져 이 정도는 아이들 공기놀이감 밖에 안 됩네다. 500년 묵은 감자 보셨습네까???...........와쌈네다!?!!! ㅎㅎㅎ.....폭소 대잔치!!! 그리고 또 하늘에서는 예의 그 별들이 쏟아진다.
  현저하게 떨어진 기온 탓인지 롯지도 좁고 천정도 낮고 문을 봉쇄하여 열관리를 철저히 한 모습이 지혜롭다. 히말라야의 해는 일찍도 지는구나. 저녁을 먹고 나니 겨우 6시 30분인데 전기 사정이 안 좋아 대부분 7-8시면 잔다고 한다. 전기가 보급되기 전 지금의 이곳 사람들은 긴 밤을 어찌 보냈을까?
도중에 춘천, 인천 등에서 왔다는 용감한 한국인 처녀들을 만났다. 시원한 김치와 고추장이 그립다고 했다.

제 3일(카트만두→담푸스.1770m)
  5:30 기상. 일정이 바쁜 하루라서 일찍(07:00) 메케한 네팔의 아침 공기를
가르며 포터들은 짐을 챙기고 우리들은 포가라를 향해서 출발했다.
카트만두에서 포가라로 가는 길은 네팔의 제 1고속도로라고 하는데, 우리
수준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중앙 분리선도 거의 없고 길이 좁을뿐더러 갓길은 물론 없어다. 게다가 중고차를 수리한 버스는 거의 곡예
운전   <담푸스 가는길 유채꽃과 우리>  을 하면서 달리는데 이건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타고가기 어려울
정도이다. 어찌나 험하게 운전을 하는지 불안해서 아예 자리를 뒤쪽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곤 아예 체념해 버렸다. "네 맘대로 해라! 너도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도중에 점심을 먹었는데 이름인즉 "달밭"이란다. 이곳의 보통 점심 식사 메뉴인데 강낭콩 삶은 국물에 감자
카레에 인디카 쌀 예의 그 바람에 쌀알이 날리는 밥. 꼬작지그레한 작은 아이가 연신 더 먹으라고 하는데 꼬작지그레한 그 손에 내 마음이 아직 안
열린 듯.............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140㎞ 밖에 되지 않는 길인데 버스는 무려 
7시간을 달린다. 마침내 도착한 곳이 페디(15시). 여기서부터 이제 우리의 진정한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쳐다보니 이거
장난이 아닌걸? 지레 겁을 먹은 우리 일행은 단단히 채비를 하고 걷기 시작했다. 2시간이 지나야 담푸스(1715m)에 도착한단다. 가파른
계단상으로 된 산을 오르기를 30여분. 환하게 시야가 터지면서 언덕배기에 올라앉은 자그마한 티하우스(tea house)가 나타났다. 티하우스를
출발하여 논과 밭을 지나 산골마을을 통과하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동네다. 노란 유채꽃밭과 푸른 보리밭이 원색의 대비를 이루며 군데군데 짚더미나
옥수수더미를 타원형으로 세워놓은 모습은 황토로 벽을 세우고 넓은 나뭇잎으로 지붕을 얹은 집들과 너무도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이런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서 모였는지 동네 꼬마들이 졸졸 따라오면서 "Hello!"를 외친다.
"나마스테(Namaste:안녕하세요)" 라고 대답하자 그저 천진한 얼굴로 웃는다. 확 트인 아래를 바라보니 속이 후련하다. 맑은 공기에 주변의
경관도 아주 일품이다. 버팔로, 염소, 닭(달걀을 부화해서 많은 새끼 병아리를 데리고 다님) 등의 가축과, 400∼500m 높이에 이르는 계단식
논과 밭, 활엽수의 아열대 식물들, 이런 것들은 아주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 나의 유년시절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1960년대 한국의 농촌을
생각나게도 했다.


  30㎏이 넘는 짐을 지고 급경사를 오르는 포터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냥 오르기도 힘든데.....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하는 그들이 어쩜 부럽다. 처음 묵는 담푸스의 롯지이다. 짐을 정리하고 밖에 나온 우리에게 해 지는 히말라야의 선경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석양의 마차푸차례와 안나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든 신성함이 깃들어 있어 너무나 숙연하고 고요하다. 아니 오히려 두렵기까지
하다.                  
<산비탈의 병아리집과 농촌>


  처음 걷는 히말라야의 험한 산길일뿐더러 무려 7시간을 버스로 와서 모두는 상당히 피곤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을 풀기로
했다. 요가를 했다고 했다는 김용국씨 부부의 시범에 따라 실시한 저녁의 요가 몸풀기는 몸의 긴장을 늦추어주고 지친 몸을 유연하게 하는데 아주
유용했다. 고지의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하기 때문에 머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대장 김영식이 이야기했다. 고산에서는 오리털 파카와 털모자로 몸을
보온하는 것도 아주 유익했다.
  쿡(Cook : 덴지셀파)의 요리 솜씨는 아주 대단했다. 롯지에서의 첫 저녁 식사는 김치,
깍두기, 오이, 마늘, 고추, 양파, 된장국 등등.... 이것을 누가 이국에서 트레킹의 저녁 식사라고 하겠는가? 식사 후 구수한 숭늉까지!
포만감에 어느 한국 식당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주 친절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이 고맙게 느껴졌다.
  별이 쏟아진다는
말씀 들어 보셨나요? 담푸스에서 히말라야의 밤별을 잊을 수가 없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고 했던가? 내가 어린 시절 어느 때인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나는 겨울밤에 오줌이 마려워 무릎이 헤진 내복차림으로 덜덜 떨면서 시골집 뒷간까지 뛰어갔고, 진저리를 치고 나서, 아래위
이빨이 부딪치는 추위 속에서 하늘을 보았을 때 그 무수한 별을 보고 "야아--정말 하늘에는 별이 무지무지하게(졸라게?) 많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별들을 오늘 여기 히말라야에서 다시 보았다.


  식당에서 네팔 소주 '럭시'를 마시고 방에 들어와 쉬려고 하는데 어디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뒤뜰에서 포터들이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서 합류해서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같이 흥얼거리고 같이 춤을
추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레삼삐리리∼레삼삐리리∼' '심심해' 등등 후렴구만 귀에 들렸는데 그들의 애환이 담긴 토속적 노래와 춤
같았다. 우리 아리랑과 같은 곡이라고 하는데 언어는 낯설지만 음악은 만국 공통 언어라는 느낌을 다시 갖게 되었다. 더 어울리고싶었지만 내일의
본격적 걷기를 위해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제 3일(카트만두→담푸스.1770m)
  5:30 기상. 일정이 바쁜 하루라서 일찍(07:00) 메케한 네팔의 아침 공기를 가르며 포터들은 짐을 챙기고 우리들은 포가라를 향해서 출발했다.
카트만두에서 포가라로 가는 길은 네팔의 제 1고속도로라고 하는데, 우리 수준에서 생각하면 안 된다. 중앙 분리선도 거의 없고 길이 좁을뿐더러 갓길은 물론 없어다. 게다가 중고차를 수리한 버스는 거의 곡예 운전   <담푸스 가는길 유채꽃과 우리>  을 하면서 달리는데 이건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타고가기 어려울 정도이다. 어찌나 험하게 운전을 하는지 불안해서 아예 자리를 뒤쪽으로 옮겨 앉았다. 그리곤 아예 체념해 버렸다. "네 맘대로 해라! 너도 죽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도중에 점심을 먹었는데 이름인즉 "달밭"이란다. 이곳의 보통 점심 식사 메뉴인데 강낭콩 삶은 국물에 감자 카레에 인디카 쌀 예의 그 바람에 쌀알이 날리는 밥. 꼬작지그레한 작은 아이가 연신 더 먹으라고 하는데 꼬작지그레한 그 손에 내 마음이 아직 안 열린 듯.............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140㎞ 밖에 되지 않는 길인데 버스는 무려  7시간을 달린다. 마침내 도착한 곳이 페디(15시). 여기서부터 이제 우리의 진정한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이다. 가파른 비탈길을 쳐다보니 이거 장난이 아닌걸? 지레 겁을 먹은 우리 일행은 단단히 채비를 하고 걷기 시작했다. 2시간이 지나야 담푸스(1715m)에 도착한단다. 가파른 계단상으로 된 산을 오르기를 30여분. 환하게 시야가 터지면서 언덕배기에 올라앉은 자그마한 티하우스(tea house)가 나타났다. 티하우스를 출발하여 논과 밭을 지나 산골마을을 통과하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동네다. 노란 유채꽃밭과 푸른 보리밭이 원색의 대비를 이루며 군데군데 짚더미나 옥수수더미를 타원형으로 세워놓은 모습은 황토로 벽을 세우고 넓은 나뭇잎으로 지붕을 얹은 집들과 너무도 예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이런데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서 모였는지 동네 꼬마들이 졸졸 따라오면서 "Hello!"를 외친다. "나마스테(Namaste:안녕하세요)" 라고 대답하자 그저 천진한 얼굴로 웃는다. 확 트인 아래를 바라보니 속이 후련하다. 맑은 공기에 주변의 경관도 아주 일품이다. 버팔로, 염소, 닭(달걀을 부화해서 많은 새끼 병아리를 데리고 다님) 등의 가축과, 400∼500m 높이에 이르는 계단식 논과 밭, 활엽수의 아열대 식물들, 이런 것들은 아주 신기하기도 하고, 한편 나의 유년시절 경제적으로 가난했던 1960년대 한국의 농촌을 생각나게도 했다.

  30㎏이 넘는 짐을 지고 급경사를 오르는 포터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그냥 오르기도 힘든데.....그래도 미소를 잃지 않고 묵묵히 제 일을 하는 그들이 어쩜 부럽다. 처음 묵는 담푸스의 롯지이다. 짐을 정리하고 밖에 나온 우리에게 해 지는 히말라야의 선경은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석양의 마차푸차례와 안나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든 신성함이 깃들어 있어 너무나 숙연하고 고요하다. 아니 오히려 두렵기까지 하다.                   <산비탈의 병아리집과 농촌>

  처음 걷는 히말라야의 험한 산길일뿐더러 무려 7시간을 버스로 와서 모두는 상당히 피곤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몸을 풀기로 했다. 요가를 했다고 했다는 김용국씨 부부의 시범에 따라 실시한 저녁의 요가 몸풀기는 몸의 긴장을 늦추어주고 지친 몸을 유연하게 하는데 아주 유용했다. 고지의 밤에는 기온이 급강하하기 때문에 머리를 따뜻하게 해야 한다고 대장 김영식이 이야기했다. 고산에서는 오리털 파카와 털모자로 몸을 보온하는 것도 아주 유익했다.
  쿡(Cook : 덴지셀파)의 요리 솜씨는 아주 대단했다. 롯지에서의 첫 저녁 식사는 김치, 깍두기, 오이, 마늘, 고추, 양파, 된장국 등등.... 이것을 누가 이국에서 트레킹의 저녁 식사라고 하겠는가? 식사 후 구수한 숭늉까지! 포만감에 어느 한국 식당 부럽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아주 친절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이 고맙게 느껴졌다.
  별이 쏟아진다는 말씀 들어 보셨나요? 담푸스에서 히말라야의 밤별을 잊을 수가 없다. 어둠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빛난다고 했던가? 내가 어린 시절 어느 때인가는 기억이 잘 안 나지만 나는 겨울밤에 오줌이 마려워 무릎이 헤진 내복차림으로 덜덜 떨면서 시골집 뒷간까지 뛰어갔고, 진저리를 치고 나서, 아래위 이빨이 부딪치는 추위 속에서 하늘을 보았을 때 그 무수한 별을 보고 "야아--정말 하늘에는 별이 무지무지하게(졸라게?) 많구나"라고 생각했던 그 별들을 오늘 여기 히말라야에서 다시 보았다.

  식당에서 네팔 소주 '럭시'를 마시고 방에 들어와 쉬려고 하는데 어디서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뒤뜰에서 포터들이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모닥불을 피워 놓고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서 합류해서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같이 흥얼거리고 같이 춤을 추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레삼삐리리∼레삼삐리리∼' '심심해' 등등 후렴구만 귀에 들렸는데 그들의 애환이 담긴 토속적 노래와 춤 같았다. 우리 아리랑과 같은 곡이라고 하는데 언어는 낯설지만 음악은 만국 공통 언어라는 느낌을 다시 갖게 되었다. 더 어울리고싶었지만 내일의 본격적 걷기를 위해서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제 2일(카트만두 시내 全日 관광)
  아침 6시. 눈을 뜨니 온 몸에 한기가 스며온다. 그런데 아침의 정적을 깨는 웬 까마귀 소리가 수없이 들린다. 그것도 한 나라의 수도인 카트만두 한 가운데서 까마귀 소리라니....

  밤새 룸메이트(?...60세의 안병남 선생님)인 안병남 선생님께서 콧물 감기에 걸리셨다. 호텔 투숙에 감기라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웬걸 아침에 확인해 보니 우리는 창문 하나를 열어놓고 잠을 잤던 것이다. 나는 김영식 선생이 준 오리털 침낭을 그냥 무심코 깔고 잤는데 그것이 도움이 되었나 보다. 호텔이라 별 생각 없이 잤는데 카트만두의 호텔이었던 것이다. 난방도 아니 되었고 온수도 약간 나오다 마는데다가 건조한 이곳의 겨울 일교차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아주 달랐다. 아침이, 새벽이 제법 춥다.
   08:30. 아침(계란, 빵, 찌야-홍차에 우유를 섞은 것)은 남자 요리사의 엉성한 대접에다가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 부족 때문인지 아니면 너무 잘 해주기를 기대해서인지 썰렁했다. 아침을 먹고 우리는 시내 관광에 나섰다. 시내 곳곳에 현수막(Hearty Wellcome to Head of State/Government of SAARC Nation)이 붙어 있었다. 서남아시아 정상회담이 여기서 열린다고 했다. 그런 관계로 거리는 청소를 해서 아주 깨끗한 모습으로 변했고, 교통도 통제를 했고 군인들의 경비서는 모습도 많이 보였다.(우리가 서남아 정상들인 듯 신이 났다. 외래 관광객은 통행을 용인한단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시내 큰길을 소가 어슬렁거리며 다니는 것이 아닌가? 이곳의 한국인 가이드가 하는 말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힌두교를 믿는 이곳에서 소는 시바신과 동격이라고 했다(교통사고가 났을 때 사람을 치면 합의가 가능하지만 소를 치면 대사관으로 피신하란다).

 파슈파시나트 사원(네팔 힌두교의 성지)에서....
'목조의 절’이라는 뜻을 지닌 카트만두에서는 어디를 가도 사원과 마주친다. 우리는 먼저 네팔 힌두교의 성지 파슈파티나트 사원을 가기로 했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동쪽으로 5㎞ 지점에 위치한 이 황금빛 2층 사원은 힌두교도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는 곳이다. 정면에는 시바신이 타는 성스러운 소 '난디’상이 수호신처럼 웅크리고 있다. 이곳은 힌두교의 성인(聖人) 사두(sadhu)나 신자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네팔 힌두교 성지>
파슈파티를 한층 성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원을 휘감고 흐르는 바그마티 강이라고 하는데 건기라 그런지 물이 많지를 않아 작은 시냇물 같았다. 이 강은 흘러 흘러 인도의 강가(Ganga,갠지스강)와 만난다. 그러니까 여기는 갠지스 강의 상류 쪽인 셈이다. 바그마티 강 역시 갠지스 江처럼 가트(ghat,화장장-火葬場)로 성역시 된다. 나무, 볏짚, 시신 타는 냄새 등 매캐한 화장 연기 속에서 태연히 머리를 감는 여인, 식기를 닦는 아낙, 이빨을 닦는 모습까지 보인다.

 

                                                                <화장장>
볏짚에 물을 적셔서 태우는데 그러면 오래 타고 더 많은 열을 낸다고 한다. 이들에게는 사람의 삶과 죽음이 큰 의미를 지니는 것 같지를 않았다. 그냥 그렇게 있는 것 같았다. 화장시 3000루피(1달치 월급)의 돈이 든다고 하는데 다리의 경계선 윗쪽은 상류층이 죽으면 화장을 하는 곳이라 했다. 얼마 전 죽은 국왕도 다리 위에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삶과 죽음에 초연하면서도 계층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잘 모르겠다. 그것에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기념품 사라고 야단법석이다. 타임머시인을 타고 아주 먼 옛날로 되돌아 간 느낌이다.

 

 보드나트 사원(티벳의 불교 사원)
  이곳은 중국이 티벳의 독립을 무력으로 탄압하자 히말라야를 넘어 하나씩 둘씩 티벳인들이 망명해서 집단으로 사는 곳으로, 일종의 티벳 난민촌인 셈이다. 마니차를 돌리며 끝없이 오른쪽으로 돈다. 옴마니반메훔........... 사방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굵은 음성과 곡조가 어우러져 참으로 경건하게 느껴진다. 한참을 돌아다며 나도 모르게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하고 흥얼거리 다 보니 웬지 마음이 편해진다. 이곳은 석류, 바나나, 사과의 주산지라고 했다. 빨간 석류의 맛이 새콤하다. 수많은 외국인을 접해서 그런지               <불탑>         티벳 수공예품 판매장은 호객 행위도 없고 무덤덤 그저 정직하다. 온갖 수공예품과 생활 용품, 불교 용품 등이 줄 서 있는 바자르 같은 재래 시장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카펫공장.......등. 사원의 규모가 아주 크다.

 

● 수와얌부나트(TEMPLE OF SWAYAMBHUNATH : 일명 몽키 템풀) 사원
  히말라야의 백색 설봉을 우러러보고 있는 네팔왕국의 수도 카트만두. 네팔 사람들은 지금도 카트만두에 가는 것을 "네팔로 간다”고 말한다 한다. 산간 오지의 네팔 인들에게 카트만두 분지는 곧 동경의 땅인 것이다. 그 곳에는 깎아지른 듯한 계단식 밭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농사지을 땅이 있고 유서 깊은 사원들 또한 즐비하다. 전설에 따르면 카트만두 분지는 원래 하나의 커다란 산정 호수였는데 만주슈리, 즉 문수보살이 나타나
 ‘지혜의 칼’로 산허리를 자르고 물을 퍼낸 뒤 육지로 일궈냈다는 것이다.(본인의 생각으로는 카트만두 분지(盆地)가 융빙수(融氷水)로 차인 아주 큰 호수였었는데 지각 변동에 의해서 어느 한쪽이 함몰(陷沒)하면서 물이 빠져서 생긴 분지가 아닌가 사료됨 : 이곳이 신생대 3기의 대습곡(大褶曲) 작용에 의해 형성된 곳이므로 지각변동이 잦음) 
  그때 맨 처음 수면 위로 빛을 내뿜으며 떠오른 곳이 바로 카트만두의 성지 스와얌부나트이다. 스와얌부나트는 지금부터 2천여년 전에 세워진 불교사원이다. 카트만두 시내에서 서쪽으로 2㎞쯤 떨어진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사원 입구에 가루다 상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을 보면 힌두 사원도 겸하고 있다고 가이드는 이야기한다. 가루다는 힌두교의 신 비슈누가 타고 다닌다는 상상의 새이다. 사원 주변에는 야생 원숭이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멍키 템플’이라고도 한다. 스와얌부나트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 약간의 다리 운동도 되겠다 싶었다. 갑자기 현란하게 치장된 거대한 탑이 눈에 들어 왔다. 바로 스와얌부나트사원이다. 사원에서는 온통 초와 각종 향 타는 냄새가 진동했고, 여러 순례자들과, 개, 원숭이, 보시한 식품을 열심히 쪼는 비둘기 등이 어울려........ 정신이 없을 지경이다. 우리네 성황당에서와 같은 만장이 휘날리고 있었는데 부처님 말씀이 온 사방에 전파되라고 불경을 적은 것이란다.
  네팔 불교에서 룸비니 동산 다음으로 신성시되는 것은 스와얌부나트 스투파라고 하는 탑이다. 솔도파(率堵婆)라고도 불리는 스투파는 불(佛) 사리를 봉안하거나 절의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해 쌓은 탑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의 스와얌부나트 스투파는 여느 스투파와는 달랐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스투파 상단부 4면에 새겨진 사방을 응시하는 부처의 눈이었다. 그 눈이 어찌나 그럴 듯 하게 그려놓았는지 바라보는 순간 마음이 섬�했다. 만물을 꿰뚫어 본다는 뜻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올 싱 아이즈(all-seeing eyes)’라고 부른단다. 대승불교에서는 과거 겁(劫)과 현재 겁, 그리고 미래 겁에 걸쳐 각각 1천명의 부처가 출현한다고 한다. 이곳의 스투파는 과거 겁의 한 부처인 본초불(本初佛)을 위해 세워진 것이란다. 스투파 주변은 참배객들로 복잡했다. 특히 부처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은 스투파의 둘레를 몇번이고 돌았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스투파를 한바퀴 돌면 불경을 1천 번 읽는 것만큼의 공덕을 쌓는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스투파 옆에 죽 늘어서 있는 '마니차’주위에도 순례자들의 행렬은 이어졌다. 그들은 라마교의 진언(眞言)인 ‘옴마니반메훔’이 새겨진 원형의 마니차를 연신 돌리고 있었다. 마니차를 돌리는 것은 불경을 외우는 것과 같은 공덕행(功德行)이라고 믿기 때문이란다.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모습들이다. 이것이 문화의 차이라는 걸까?
불교적 색체가 강하나 힌두교와 복합된 사원이라고 가이드가 이야기한다. 점심은 시내에서 아주 좋은 곳으로 네팔식 양고기를 먹었다. 약간의 땀이 날 정도의 점심 날씨였는데 이때 마신 한잔의  맥주는 진짜 가슴이 시이--------원했다.
 오후에 네팔의 번화가 NEW Road를 관람하다....... 여기도 어김없이 새 물결의 등장하고 있었다. 다양한 전자 제품, 카메라, 대우, 삼성, 엘지 등등......젊은이들의 모습도 이미 자본주의의 돈이 들어와 있었다. 新文明과 완전히 옛날 그대로가 공존하는 곳이다.

● 쿠마리 바히이 (KUMARI BAHEE)---- 살아 있는 현신
 카트만두 시내의 남쪽 뉴 로드라 불리는 신생 거리를 지나 바산트풀 광장으로 가면 쿠마리 바히이 모습을 볼 수 있다. 작은 창이 달린 3층의 낡은 목조건물이 세월을 말해준다. 고대 경전을 보면 쿠마리의 신체 조건은 대단히 까다롭다고 한다. 쿠마리의 신체는 반얀(banyan,벵골 보리수의 일종)나무와 같고, 허벅지는 사슴의 그것과 같으며, 눈꺼풀은 소의 그것과 같아야 한다는 등 조건이 까다롭단다.
        쿠마리 바이히        쿠마리 바이히에서는 쿠마리를 볼 수 있지만 사진촬영 만큼은 엄격히 금한다고 했다. 우리는 시간이 맞지 않아 실재의 쿠마리는 볼 수 없었다. 12세 이하의 네와르족 어린 소녀 중에서 선발되는 쿠마리는 힌두교 탈레주 여신의 현신(現神)으로 여겨지지만 종교를 초월해 두루 숭배받는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초경(初經)을 치르면 쿠마리는 사원을 떠나야 한단다.
 한참을 가다 보니 하누먼더카 사원(HANUMAN DHOKA)이 나타났다. 옛날에 왕궁이었던 곳으로서, 하누먼(원숭이)신을 모신 것으로 유래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새빨간 원숭이의 좌상과 함께 건물의 외관을 장식하는 에로틱한 수많은 힌두 조각이 관광객의 인기를 모으고 있다. 내 눈에는 이런 것만 잘 띄는 것일까? 지나가는 박종익 선생을 보고 저 목각 멋진데!!! 한 컷 부탁할까? 이건 외설도 아니요 소위 왕궁이 있었던 곳이 아닌가? 어쩌면 이곳 사람들도 파워풀한 정력과 왕성한 출산을 원했던 것이 아닐까?(나를 보고 너무 호색한이라고는 하지는 말기 : 문화재를 보는 통찰력이니까--- 어흠!!!)
  목각의 정교함과 규모가 아주 크고 전통과 현재가 뒤섞인 공간이다. 
              

                                                                                                                                 <사원의 목각상>


  (따온글임)카트만두의 바잔트푸르 나바르에 있는 한 사원의 처마 밑을 쳐다보면서 나는, 프로이드가 만일 이곳에 올 수만 있었다면 그의 이론을 좀더 일찍, 좀더 자신 있게 정립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부질없는 공상을 해본다.       
  카트만두 시내뿐만 아니라 네팔의 어느 곳을 가더라도 힌두 사원과 밀교 사원이 나란히, 그리고 사이좋게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세계 여러 사회에서 금기시 되고 있는 성적 표현들이 이 사원의 곳곳에 아주 진하고 원색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작게는 자그마한 조각에서부터 민화, 탄트라, 탑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받침대에 이르기까지 성과 관계되지 않은 것이 없다. 밀교에서 특히 성을 중시하는 근원도 남성 에너지와 여성 에너지의 집약과 합일, 그것이 곧 우주와의 만남이요, 자신의 진정한 본질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한 데에 있다. 이러 만남은 결코 지식으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며, 감각적인 체험을 통해 성을 본질화 함으로써 자신을 깨치게 된다.
탄트라 라는 말은 이런 감각적 합일을 통해 깨달은 지혜를 확신하고 자족하고 번식시켜 나간다는 뜻이다. 이런 놀라운 지혜는 근대의 정신분석학이 뛰어넘지 못한 여러 장벽을 허무는 데 상당히 기여했다.
  1세기의 지혜와 20세기의 의학이 만나는 감회는 카트만두의 곳곳, 아니 네팔의 구석구석에서 맛볼 수 있다. 그들은 남성 에너지의 근원적 원형을 시바라고 부르지만 시바는 남성적 특성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시바의 조각들을 보면 보기에 따라선 남성 같기도 하고 여성 같기도 한 양면성을 보여 주고 있다. 샥티 또한 여성 에너지의 원형으로 설명되지만 시바와 같이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현대의 융 학파에 속하는 정신분석가들이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 란 말로써 남성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여성, 여성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남성의 개념을 설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룬다.
  이 두 원형의 조화, 집합, 합일은 시바나 샥티, 아니마나 아니무스의 이중성을 초월함으로써 완전히 하나가 될 뿐 아니라 육체를 뛰어넘어 정신적인 승화를 통해 구도적 수준에까지 이른다. 그래서 성은 본질로 향하는 열려진 문이며, 성적 갈망은 그 문을 통하여 만나고 합일하려는 욕구이며, 그 본질과의 만남은 바로 자아와 비 자아의 합일이며 완성이며 신과의 만남이다.
  카트만두에서 보는 성은 어느 것이나 추하게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음화나 외설 조각 물에서는 느낄 수 없는 명상적 분위기 속에 오래도록 젖어 내려온 탓일까? 단지 감탄의 탄성이 저절로 나올 뿐 하나도 저항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시바와 샥티의 조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조화는 바로 이 성적 행위를 통해 만나고 합일하고 깨닫고 탄트라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래서 성은 그 지혜를 깨닫는 첫 문이 된다는 뜻일까? 어쨌든 인간의 기본 에너지가 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일찍부터 깨달은 이곳 사람들의 지혜는, 아직도 성적 억압을 통해 자신을 왜곡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에 비해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근후박사의 히말라야 민속기행 중에서)  
 
  주변에서는 또 시장이  헐리고 새 건물의 등장하고...... 옛 건물이 아주 망가져 가고 있고 예사롭지 않은 옛 불상과 탑들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작정 상경자, 노숙자, 개들........하염없는 걷는 자. 남루한 사람들, 도인 같은 사람들, 무표정한 사람들 ---- 신호등 없는 거리에 오토바이와 자동차의 크락션 소리, 자전거와 사람들의 뒤섞임.......이 알기 어려운 도시를 보고 다니느라고, 지저분한 먼지와 알 수 없는 향 타는 냄새, 기름 냄새, 음식 냄새, 사람 냄새 등등.......오늘 하루 다른 물질문명과 문화의 향내 때문에 내 몸과 마음이 아주 지치고 혼란스러워 내 정신이 아니었다. 오직 필요한 것은 맑은 공기와 편안한 잠이 필요할 뿐이었다.(카트만두 분지의 대기 오염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이더의 말이 이곳 젊은이의 꿈은 군인이란다. -지원병제이고 7년 후 용병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제 1일(인천공항→홍콩→카트만두)

  03:00 충주문화회관에서 버스로 인천 공항으로 이동
  오전 03:00. 약속 시간에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행 21명은 올해 들어 가장 춥다는 우리나라의 혹독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인천 공항으로 출발했다. 설렘으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일행의 대부분은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쯤 지났을까 버스 운전사는 인천 공항이 초행인지 인천 시내에서 헤매다가 06:30분 경 공항에 도착했다. 처음 본 인천 공항은 규모나 시설 면에서 아주 훌륭했다. 화물은 부치고 08:30분 홍콩 발 비행기에 탑승(대한항공)하여 얼마간 비행을 한 후 홍콩 공항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4시간을 기다렸다(시차 1시간 늦추다). 홍콩 공항은 깨끗했고 사람들도 친절했다. 아시아 제1의 물류 기지답게 긴 탑승 구간을 이동하기 위해 공항 열차까지 있었다. 홍콩 공항 시간으로 16:50분 카트만두로 출발했다. 우연히도 항공기 내에서 십 수년만에 친구 동생 윤여신 선생을 만났다. 세상이 좁다더니.... 네팔 행 비행기는(네팔 로얄 항공)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너무 낡아 보여 불안감을 주었고 비행기 안의 분위기도 주로 여행객과 소수의 네팔 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뭇 한 단계 아래로 느껴졌다(나의 판단임-기내식이나 기타 서비스). 스튜어디스는 인도 사람같이 보였다.
  네팔 공항의 입국수속은 전산화가 되어 있지 않고 手作業으로 진행하는데다가 전혀 급할 것이 없다는 듯 너무 시간을 지체하는 것 같았다.
  공항에 도착하자 셀파 덴지가 노란 생화로 만든 꽃 목걸이를 하나씩 목에 걸어주며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메케한 카트만두의 매연에 곧바로 목이 따가와 져서, 말로만 듣던 카트만두의 공해를 실감할 수 있었다.(카트만두의 매연은 악명 높다. 내륙국이라서 대형 공업단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전형적인 분지 지형이라 주변 히말라야 산지의 찬 공기가 산록을 타고      <네팔공항에서 >       내려와 기온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적은 매연이라도 공기가 안정되어 상층으로 날아갈 수가 없다)
버스로 韓人 식당인 '비원'으로 옮긴 후 저녁은 김치찌개를 곁들인 한식으로 아주 맛있게 먹었다. 그러면서 오늘은 잘 먹었는데 내일부터 음식 적응을 어떻게 할까 은근히 겁이 났다.
  인천에서부터 동행한 여행사를 운영한다는 한왕룡 씨는 히말라야 8000m급 산을 10개나 등정한 베테랑 등산가라고 했다. 차분한 인상에 선한 사람이라 느껴졌다. 저렇게 순박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그 험한 등산을 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식당집 사람들이나 처음 접한 네팔 인들은 아주 착해 보였다.
카트만두 TIBET Holiday INN에서 첫 여장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전기와 상수도 시설도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고 난방도 되지 않았다. 여기의 개념으로써 특급 호텔을 이해해야 했다. 오늘 하루는 새벽부터 긴 여정이었고 여러 시간대(時間帶 : 카트만두는 서울보다 3시간 15분 늦음)와 기후대(氣候帶)를 지난 탓인지 몹시 피곤함에도 잠은 쉽사리 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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