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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침에 비하면 이곳은 완연한 봄날이다. 텐트 안 기온이 10도를 가리키고 있다. 남쪽으로 터진 계곡 위로 설산이 보인다. 람중히말(Lamjung Hima, 6986m)이다. 그 오른쪽에 뾰족하게 튀어 나온 봉우리는 안나푸르나 2봉(7939m)이다. 2000년 가을,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시작 마을인 베시사하르에서 처음 본 설산이 바로 람중히말이었다. 그때 생전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히말라야의 설산을 보고 감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포카라에서 보면 제일 오른쪽으로 보이는 설산이다. 다들 뽀리지를 싫어해 마지막 남은 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이유는 너무 달다는 것이다. 우유에 설탕을 더 넣었는지 모르지만 웬만하면 음식에 입맛을 맛추기로 작정한 나 혼자뽀리지를 먹었다. 모두 단 음식을 전혀 안 먹는 사람처럼 손사래를 치는 것이 이상하다. 요즘 먹을거리에 설탕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평소 크림빵은 잘 먹으면서 뽀리지가 조금 달다고 싫어하다니... 외국에 나와서도 꼭 한식을 고집하는 노인네들이 아니라면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특히 히말라야에 들어와서는 더 그렇다. 식성이 까다로와 잘 먹지 않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밉다. 트레킹 때는 더 밉다. 에너지 부족으로 당사자가 고생하게 되니 옆에서 왈가왈부할 일은 아니다 하더라도 운행에 '민폐'를 끼칠 수 있다. 7시 15분 출발. 롯지 바로 아래에 있는 카니를 지나니 바로 현수교가 나온다. 빔탕 이후 처음으로 강을 건넜다. 대나무와 무성한 잡목 숲으로 이어진 산허리길이다. 얼마 후 언덕에 오르니 멀리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의 주 트레일이 지나는 마을 다라빠니(Dharapan)가 보였다. 그 아래 보이는 마을은 톤제(Thoje, 2015m)다. 톤제 아래로 강을 가로지르고 있는 현수교가 보인다. 그곳까지 가려면 한참 내려가야 한다. 출발한지 1시간 지난 8시 20분 경 출렁다리 앞에 도착했다. 힘룽히말과 체오히말에서 발울한 두드콜라의 최하류를 가로지르는 다리로 아주 길다. 안나푸르나 지역은 강폭이 넓어 다리가 항상 길다. 이곳에 비하면 마나슬루 지역의 다리는 높고 짧다. 다리를 건너다 중간쯤 되는 지점 난간이 뻥 뚫려 있어 무심코 지나가다 깜짝 놀랐다. 톤제 마을 입구의 카니는 티베트 초르텐의 모양을 하고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지금까지의 마을과는 다른 전형적인 안나푸르나 트레킹 롯지 마을의 깔끔한 모습이다. 마당에는 백일홍이 한창이고 길가 담장에는 장작을 많이 쌓아두었다. 지나가던 한 집 마당에는 어미 염소가 풀을 먹고 있는데 새끼는 그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정겨운 모습이 보인다. 톤제에서 다시 강을 건넜다. 이번은 마르샹디 강이다. 강을 건너 조금 오르니 바로 다라빠니가 나온다. 안나푸르나 주 트레일로 접어든 것이다. 띨제에서 1시간 30분 걸렸다. 속도가 빠른 팀이라면 빔탕에서 다라빠니까지 당일 바로 올 수도 있겠지만 특별한 상황이 아닌 한 지나친 속도는 트레킹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다. 골목을 빠져 나와 안나푸르나 주 트레일과 만났다. 7년 만이다. 입구에는 마낭과 라르케로 가는 안내판이 있다. '주의!(Notice)'라는 말을 세 번이나 써 놓아 처음에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하는 사람이 빔탕 쪽으로 가려면 따로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말을 써 놓은 줄 알았다.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다. 빔탕까지는 안나푸르나 보존지역에 해당하므로 마나슬루에서 이곳으로 내려오는 사람은 따로 안나푸르나 지역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안나푸르나 허가서만 있으면 빔탕까지 갈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 삼거리에 체크포스트가 있다. 우리는 이미 카트만두에서 ACAP허가를 받았다. 타시가 체크하러 간 사이 잠시 그 앞에서 쉬었다. 몇몇 사람은 허가서를 카고백에 깊이 넣어 둔 상태라 보여줄 수 없었지만 단체로 움직이는데 빼 먹을 일이 있겠느냐고 말해 그냥 넘어갔다. 세 가지나 되는 트레킹 허가서는 나눠주지 말고 처음부터 타시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좋았다. 조금 내려가니 우리가 내려 온 두드콜라 계곡이 왼편으로 보였다. V자 계곡 아래 꼭지점에 하얀 설봉이 조금 보인다. 마나슬루는 아닐 것이고 라르키아 피크 근처 쯤이나 될 것이다. 지난 16일 동안 저 산군 건너편에서 빙 돌아 깊고 깊은 계곡과 눈덮인 높은 고개, 그리고 다시 골짜기를 지나왔다. 언제 다시 또 그 길을 걷게 될런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이다. 아래에서 서양 노인네 단체팀이 올라오고 있다. 안나푸르나의 길은 역시 넓다. 그리고 전체 규모가 크다. 마르샹디 강도 마나슬루 지역의 부리 간다키 강과는 비교를 불허한다. 골짜기도 깊다. 마을도 자주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다. 조랑말 행렬은 일상적인 풍경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티베트와의 무역로였다는 관록이 길에 나타나 있다. 이곳에서 티베트로 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다. 토롱 라를 넘어 묵티나트로 간 후 상무스탕을 경유하는 길과 차메(Cheme)에서 오른쪽 꼬또(Koto)로 가는 나르콜라로 들어가 피상피크 동북쪽의 나르(Naar)와 푸가온(Phugaon)에서 바로 티베트로 넘어 가는 길, 그리고 마나슬루 지역의 라르키아 라를 넘어 가는 길이 있다. 반대로 말하면 그곳에서 넘어 온 티베트 상인들이 모두 이곳 다라빠니에서 만난다. 그래서 이 지역의 티베트 이름은 갸숨도(Gyasumdo)로 '세 길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은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의 메카라고 할 수 있다. 넓고 깊은 장대한 계곡과 5416m의 설산 고개, 그리고 티베트 고원 풍의 황량한 들판과 넓고 바람이 거센 깔리 간다키 강, 수백 년간 티베트와의 교역으로 다져진 마을, 저지대의 힌두 문화와 계단식 논밭.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이다. 이런 생태계와 풍경을 동시에 볼 수 있는 트레킹 코스는 네팔에서 이곳 말고는 없다. 경작지를 찾아 강 양쪽으로 마을이 있으니 계속 이쪽 저쪽으로 건너갔다 건너와야 한다. 7년 만에 만난 길이라 그런지 영 낯설다. 그 때는 히말라야 트레킹이 처음이었으니 제대로 주변을 감상할 정신이 없었을 것이고 지금은 마나슬루 '깡촌' 마을을 본 직후여서 더 그럴 것이다. ABC, 쿰부, 랑탕 트레킹은 이런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지만 최근 방문한 곳이 공교롭게도 네팔에서도 오지인 무스탕과 마나슬루라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다리빠니에서 다시 현수교를 건너 왼편으로 넘어간 후 카르테(Karte)에 도착했다. 새로 신축중인 롯지가 몇 채 보인다. 이곳에 도나(Dona) 빙하호수로 가는 길이 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다라빠니의 안내판도 그렇고 이 안내판도 7년 전에는 본 기억이 없다. 도나 호수로 가려면 이곳 동쪽 도나콜라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마헨드라왕 자연보호재단(KMTNC)의 홈페이지에는 아래와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도나 호수는 마나슬루 남서쪽, 해발 4700m 지점에 있는 호수로 마나슬루 호수로도 알려져 있다. 마낭지역에서 틸리초 호수 다음으로 높은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호수로 점차 방문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곳까지는 이틀이 걸린다. 가는 길은 나체(Nache) 마을을 통과하여 빽빽한 푸른 소나무 숲과 다양한 색의 랄리구라스 숲, 그리고 초지를 지난다. 이 지역은 사슴, 사향노루, 꿩, 붉은 판다 같은 야생동물들의 좋은 서식지이며 가축들의 방목지로도 이용되고 있다. [주의] 이 호수로 가는 길은 야생 상태라 여행자들을 위한 시설이 없다. 방문자들은 경험많은 현지 가이드를 고용하고 장비와 식량을 가져가야 한다. 방문시기는 7-8월과 4-5월이 가장 좋다. 구글어스에서 찾아보니 도나 호수는 길이 2300m, 폭 400m의 직사각형 모양이다. 같은 고도에서 틸리초외 비교해 보니 틸리초가 두 배 정도로 더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호수는 4000m 이상의 높이에 있는 히말라야 호수 중 제일 큰 호수에 속한다. 쿰부의 고쿄 호수, 촐라초, 임자초도 이들보다 작다. 트레킹 초심자는 이런 코스까지 챙길 여유가 없다. 그러나 네팔 3대 메이저 트레킹 코스를 마치고 캠핑이 필요한 코스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 이런 코스도 '땡기기' 시작한다. 안나푸르나 서키트를 캠핑트레킹으로 할 경우 이곳에서 도나 호수를 방문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곳에 다녀오면 자연스럽게 고소적응이 된다. 그리고 다시 틸리초 호수를 다녀오면 더 좋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금을 더 많이 모아야 한다. 카르테를 지나가는데 한 롯지 식당 입구에 "맛있는 김치 있어요"라고 쓰여 있는 나무판이 놓여 있다. 금년부터 인천-카트만두 직항 정기노선이 생기면서 한국 사람들이 이곳을 점점 더 많이 방문하고 있다는 증거다. 롯지촌을 벗어나니 바로 강을 건너는 현수교가 나와 다시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왔다. 10시 경에 나타난 작은 마을 코또에서 점심을 먹기로 하고 롯지 식당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조금 이르긴 해도 다음 마을인 딸(Tal)까지 가려면 여기서 1시간 이상 더 가야 한다. 이미 주방팀이 먼저 도착하여 음식을 준비했기 때문에 얼마 후 바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11시 15분에 다시 출발했다. 계속 트레커들이 올라오고 있다. 중년 이상의 트레커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최근의 경향이다. 골이 깊은 안나푸르나 서키트 길은 초반 계곡길에 폭포가 많다. 마나슬루도 폭포가 많지만 이곳도 그에 못지 않다. 규모도 엄청 나 처음 보는 사람은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카르테 아래의 폭포는 지그재그 다단계형의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쏟아지는 물의 양도 굉장하다. 골짜기 풍경이 웅장하다. 다시 현수교를 건너 강바닥으로 내려섰다. 원래는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지만 건기에는 강바닥을 이용할 수 있으니 힘을 덜 수 있다. 위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길이다. 잠시 후 오르막을 오르고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가 강바닥 길을 걷는다. 그러나 곧 오르막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안다. 계곡은 항상 이런 식이어서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히말라야 트레킹을 절대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나도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다. 롯지가 중간에 많아 언제든지 쉬어 갈 수 있다는 말에 현혹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아주 많아 하루 서너 시간 운행으로 만족할 때의 일이다. 그런 식의 운행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최소한 오후 두세 시까지 운행하게 되는데 일주일만 지나면 체력이 많이 소모되어 힘들다. 거기에 4000m 가까이 가면 고소의 영향으로 한 걸음이 천근같다. 그러므로 트레킹을 가기 전 근력과 지구력 강화훈련을 차분히 해 두어야 덜 고생한다. 절벽길에 올라 코너를 도니 멀리 딸(Tal, 1707m)이 보인다. 이 절벽길도 바닥의 흙과 축대를 보니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다시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상계에서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12시 25분 도착한 딸 마을도 그동안 많이 변했다. 좋게 보면 세련되었고 아쉬운 마음으로 보면 자본주의화 되었다. 자본주의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가치관은 인심을 각박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런 도시 문명을 벗어나 히말라야에 왔는데 다시 이곳에서 그런 분위기를 접하는 일은 썩 기분좋은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곳은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코스에 있는 마을 중 유일한 강변마을이며 가장 목가적인 분위기를 지닌 마을이다. 주변의 산이 높고 계곡이 넓다. '딸'이란 '호수'를 뜻하는 네팔말이다. 한때 이곳은 호수였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아래쪽으로 침식작용이 일어나 물이 많이 빠지자 넓은 터가 생겼고 그곳에 마을이 들어섰다. 안나푸르나 서키트를 한다면 이곳에서 하루 묵는 일정을 고려할 만하다. 네팔 행정구역에서 이곳 딸까지 마낭지역이다. 이 아래부터는 람중지역이다. 안나푸르나 산군의 동쪽지역은 크게 람중(Ramjung) 지역과 마낭(Manang) 지역으로 나눈다. 딸 이전의 마을은 람중 지역이다. 람중 지역은 낮은 지대여서 산에 계단식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지만 마낭 지역은 험한 산악 지대여서 계단식 논을 잘 볼 수 없다. 쉽게 티베트 풍의 마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람중 지역은 힌두문화권이고 마낭 지역은 불교문화권이다. 딸은 마낭 지역의 가장 남쪽 마을이다. 마을은 제법 큰 편이다. 롯지와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다. ACAP 체크포스트도 있다. 큰 마을답게 우체국도 있고 보건소도 있다. 그러나 약품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 이곳 사정이다. 마을을 벗어나니 길이 왼편 산기슭으로 급하게 오른다. 작년 몬순 때 홍수로 마을이 고립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물길이 바뀌어 원래의 길을 덮쳤고 그 물길이 고착되어 원래의 길은 물 속에 잠겨 버렸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도도한 물길을 이 낙후된 지역에서 인위적으로 바꾸기는 어렵다. 차라리 새로 길을 내는 것이 더 쉽다. 그래서 만든 길이 이 산기슭 길이다. 기계가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서는 쉽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래도 수작업으로 완성시켰다. 길이 완성되기 전에는 건너편 기슭으로 난 길로 다녔다고 한다. 그 길은 현지인들이 다니는 높은 길이다. 트레커들은 딸을 생략하고 바로 높은 산기슭을 넘어 다라빠니로 가느라 힘이 훨씬 들었을 것이다. 작년(2006년) 여름 마나슬루 트레킹을 마치고 우리처럼 내려가는 길에 이곳을 지난 김지나 씨의 글에는 그 길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있다. 산중턱에서 보니 멀리 앞쪽으로 원래의 길이 보인다. 카니에서 강바닥으로 내려오는 길을 강물이 막고 있다. 카니 아래로 보이는 현수교가 바로 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산중턱에 있는 가랑(Gharang)이라는 마을을 지나 다라빠니로 가는 길이다. 산기슭길을 한참 지나 입구에 도착하니 마오바디들이 책걸상을 갖다놓고 통행세를 받고 있다. 우리는 이미 마나슬루 지역에서 냈기 때문에 그냥 통과했다. 그곳에서 보이는 가야할 길이 가물가물하다. 한참 내려갔다가 다시 정신없이 올라가야 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트레킹이다. 그래서 체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험한 히말아야 트레킹 길도 산악자전거를 타기 위해 오는 친구들도 있다. 서양인 친구나 앞에 오고 뒤에 네팔인 친구가 따라 온다. 짐을 진 포터는 뒤에 따라 올 것이다. 어쩌면 이들보다 앞에 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을 디스커버리 채널인가 내셔널지오그래픽 채널인가에서 본 적이 있다. 대단한 친구들이다. (나도 일주일만 더 젊었으면 산악자전거를 탔을텐데... 아깝다, 일주일!) 멋지고 웅장한 폭포를 향해 강 아래쪽으로 내려 갔다. 긴 폭포가 아주 인상깊다. 폭포를 지나면 곧 다리가 나오고 다리를 건너 오른편 기슭으로 오르니 참제(Chemhe)가 나왔다. 막 오후 3시를 지나고 있다. 마을 중간에 있는 큰 롯지 3층짜리 목조 건물인 라사(Lahsa) 호텔에 짐을 풀었다. 우리 방은 3층에 있는 방이다. 방은 갈수록 좋아졌다. 복도를 돌아가니 화장실 겸 샤워장도 있다. 미지근한 물에 땀을 씻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물을 데우기 때문에 이 시간까지 미지근한 물이나마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다. 옷가지를 빨아 발코니 빨랫줄에 널었다. 바람이 세게 불어 잘 마를 것 같았다. 빨래집게가 줄에 몇 개 있었다. 빨랫줄은 준비했는데 빨래집게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빨래집게도 다음부터는 꼭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숙소에는 빨래집게가 없었다. 사소한 것이지만 현지에서는 요긴하게 쓰인다. 여기서 한국사람들을 만나게 될 줄은 생각을 못했다. 3층에 올라가니 안쪽 방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반가웠지만 짐을 풀고 씻는 것이 급선무라 나중에 확인을 하기로 했다. 내가 씻고 나서 덕문스님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 한 청년이 왔다. 양평에 산다는 남기범(23세)이라는 친구였다. 세 사람이 같이 왔는데 스님도 한 분 있다고 한다. 그 친구가 가고 잠시 후 선일이라는 스님이 왔다. 초면이었다. 그러나 내가 덕문스님과 같이 왔다고 하니 깜짝 놀란다. 알고 보니 덕문스님과는 수계도반이며 여러 철 같이 살았다고 한다. 이번 여름에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정진했다고. 잠시 후 덕문스님과 반가운 해후를 했다. 덕문스님도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라 무척 반가워 한다. 또 한 사람은 서울에서 온 이정숙양(여, 29). 세 사람은 각기 따로 인도를 여행하고 네팔로 들어와 포카라에 있는 인드라 호텔에서 만났으며 호텔 분위기가 트레킹을 하는 분위기여서 덩달아 트레킹에 나섰다고 한다. 파카 등 장비도 포카라에서 빌렸다는데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준비한 우리보다 엉성했다. 신발도 운동화를 신고 있다. (붓다아이, <2000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day 3) 원래는 이곳 참제에서 오늘 운행을 마칠 생각이었다. 시간상으로도 적당하다. 그런데 점심 때 밍마가 참제에는 캠프사이트가 좋지 않다고 자갓으로 가자고 한다. 사실은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도 자갓까지 하루 일정으로 나와 있지만 일정을 짤 때 지도상으로 너무 멀어보여 참제로 정한 것이다. 캠프사이트가 좋지 �다면 주저할 이유가 없어 밍마의 의견을 따라 자갓까지 가기로 했다. 조금 더 걷겠지만 그만큼 내일 일정은 단축될 것이라고 피곤해 하는 동포들을 위로했다. 아닌게 아니라 유일한 캠프사이트인 마을 끝에 있는 학교 마당은 길보다 지대도 낮고 분위기도 영 아니다. 길가로 하수도도 흐르고 있다. 하수도보다 낮은 곳에서 잠을 자고 싶지는 않다. 그대로 통과한 것은 잘한 일이다. 자갓(Jagat) 에 도착한 시각은 4시 20분. 참제에서 1시간 20분 걸렸고 중간에 두 번 쉬었다. 폭포도 지나고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오르기를 몇 번 반복했다. 연 3일간의 강행군으로 다들 많이 지쳤다. 체력이 좋은 젊은 사람이라면 5:30~6시간 걸린다고 레이놀즈는 말하고 있다. 우리는 8시간(-점심시간 1시간 15분) 걸렸으니 어지간히 느린 속도로 움직였다. 자갓은 톨게이트(toll gate)라는 뜻이라고 이미 마나슬루 지역의 자갓을 지날 때 이야기 했다. 즉 이곳은 티베트를 오가는 상인들에게 세금을 거두던 곳이다. 그런 까닭에 이곳 주민들은 티베트계인 보티아(Bhotia)족이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지던 소금무역은 1959년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하고 국경을 폐쇄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다. 대신 1975년 안나푸르나가 일반 트레커들에게 개방되면서 관광업이 주 산업이 되었다. 아담한 롯지 정원에 스테프들이 캠프를 치고 있다. 바나나 나무도 보이고 꽃이 만발해 있다. 이곳 고도가 1314m이니 이제 따뜻한 중산간 지역으로 내려왔다. 라르키아 라와는 고도차가 4000m 가까이 되는 곳이다. 오늘은 뜨거운 샤워를 할 수 있으려니 기대를 했다. 그러나 늦게 도착한 탓인지 따뜻한 물은 잠시 나오더니 아예 찬물까지도 잘 나오지 않아 여성동포들은 주방에서 데워 준 물로 간단하게 �었다. 나는 오늘도 물수건의 신세를 졌다. 모처럼 분위기 있는 정원 식탁에서 바나나를 사 먹었다. 저녁은 여행사에서 서비스로 준비한 특식이란다. 한국식으로 요리하기 위해 두 분이 주방을 다녀왔다. 무진행 보살님이 요리법을 설명하고 영어가 전공인 보명화 보살님이 통역했다.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생애 최고로 맛있게 먹은 음식"이라고 찬탄했다. 어쩌면 '말짱 도루묵'의 일화와 같은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그동안 '배가 고팠다'는 반증일 것이다. 저녁을 잘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힘든 트레킹이 거의 끝나는 시기여서 그런지 동포들의 얼굴이 한결 여유롭고 좋아보인다. 내일이면 실질적인 트레킹은 끝나기 때문에 내일 묵을 나디에서 쫑파티를 준비하라고 타시에게 150불 주었다. 포근한 밤이다. |
trek 16. 띨제 - 자갓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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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차탐사대] 다딩베시 점심시간 (0) | 2010.02.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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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 - 빔탕 (0) | 2008.02.01 |
trek 13. 삼도 - 다람살라 (0) | 2008.02.01 |
어제보다 훨씬 포근한 아침이다. 밖으로 나오니 살얼음이 얼어 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쌀쌀하다. 어제 안개로 보지 못한 주변 경치를 보기 위해 모레인 제방으로 올라갔다. 티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설산의 모습이 뚜렸하다. 내려다 보니 넓은 빔탕의 전체 모습이 잘 보인다. 일출이 시작되었다. 남동쪽에 있는 마나슬루로 해가 비친다. 이곳에서 보는 마나슬루는 지금까지 보던 모습과 전혀 다르다. 두 개의 뾰족한 봉우리를 보고 마나슬루임을 짐작할 뿐이다. 가이드북과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가 아니었다면 마나슬루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북쪽으로는 힘룽히말과 체오히말 봉우리에도 해가 비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햇빛이 산의 측면을 비추기 때문에 붉게 타오르는 장엄한 모습은 볼 수 없다. 모레인 제방 아래에는 에메랄드빛의 작은 빙하 호수가 하나 있지만 특별히 가까이 가서 볼 만한 호수는 아니다. 아래에서 무진행 보살님이 아침 산책 중이길래 사진을 찍어 줄테니 올라 오시라고 했다. 20여 미터만 오르면 아주 다른 풍광을 즐길 수 있으니 숨이 차더라도 구경할 수 있을 때 구경하는 것이 좋다. 빔탕에서 하루 더 여유가 있다면 위쪽 힘룽히말과 체오히말에서 내려온 빙하수가 고여 있는 제법 넓은 빙하호수를 방문하는 반나절 소풍을 즐길 수 있다. 또는 아래쪽으로 내려가다 왼편 숲이 돌출되어 있는 곳으로 오르면 전망대가 나오는데 에델바이스 자생지인 그곳에서 보는 설산의 풍광이 멋지다고 한다. 레이놀즈의 말이다. 그러나 그런 여유 있는 일정을 가진 팀은 그리 많을 것 같지 않다. 빔탕은 빔타코티(Bimtakhoti)라고도 하며 '모래의 평원'이라는 뜻이다. 빙하 모레인 제방과 산 경사지 사이의 넓은 분지인데 모레인 땅이라 경작은 불가능하다. 옛날에 이곳은 라르키아 라 동쪽의 바북과 더불어 티베트와의 중요한 교역장소였다. 1950년에 틸먼이 처음 방문했고 1956년에는 스넬그로브가 방문하고 각각 기록을 남겼다. 빔타코티에는 조(zo)와 양들이 라르키아 고개 또는 톤제(Thonje)에서 빈번하게 오가고 있다. 10여 마리 이상의 조 무리의 목에 달린 종소리는 끊이지 않고 우리의 캠프를 지나 짧은 초지를 향하곤 했다. 모두 둔중한 소리의 종을 달고 있는데 무리의 리더는 밝은 진홍색 야크털 장식 술과 함께 작은 종을 달고 있다. 이곳 창고 담당자는 우리에게 짧은 교역시즌 동안 그는 3000마리 이상의 조가 싣고 온 짐의 무게를 잰다고 했다. 이곳에서 쌀과 소금의 교환비율은 16:25인데 라르키아 라를 넘어가면 소금 25를 사기 위한 쌀은 12면 충분하다. (H. W. Tilman, 빔탕은 라르키아 라 동쪽에 있는 바북처럼 단지 여름철 교역장소로 쓰이고 있다. 티베트에서 야크 등에 실려 바북을 거쳐 이곳으로 물건은 소금과 모직물이 오고 네팔에서는 쌀과 곡물, 면제품 옷, 담배, 성냥 그리고 다른 유용한 물건이 온다. 이곳에서 무역을 통한 이익을 얻기 위해 티베트 국경을 넘어 오거나 갸숨도(Gyasumdo) 또는 누프리에서 온 티베트인들을 만날 수 있다. (David. Snellgrove, 틸먼이나 스넬그로브도 언급하고 있듯 이곳은 경작지로는 쓸 수 없는 땅이다. 풀이 조금 나 있기는 해도 조금만 파면 마사토 같은 빙하 모래가 나와 작물의 재배가 불가능하다. 냇물도 가까이 흐르는 좋은 조건이지만 모래땅이라 농사를 짓지 못하니 사람이 살지 않는다. 티베트와의 교역이 뜸해진 지금은 서너 채의 롯지만 트레커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침 식사 때 타시가 와서 어제의 일을 정식으로 사과했다. 자기의 가이드 생활에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아주 좋은 지적이어서 감사하다는 내용이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더 훌륭한 가이드가 되기를 축원해주었다. 그런 의미에서 적당하게 넘어가기보다는 그때그때 필요한 지적을 해 주는 것이 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7시 20분 출발했다. 내리막길이긴 하지만 앞으로 3일 동안의 일정은 매일 8시간 이상 운행을 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다. 처음부터 중간에 하루를 더 늘이면 편하기는 하나 너무 늘어지는 감이 있다. 2주간의 트레킹으로 피곤하기는 해도 이럴 땐 오히려 조금 졸라매야 긴장감으로 잘 견딘다. 일단 고소로부터 자유로우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길은 개울물 곁을 지나 빙하를 건너기 위해 언덕으로 향하고 있다. 그리고 빙하 제방 7부 능선길을 빙 돌아 간다. 따뜻한 햇볕이 비치는 길이다. 앞쪽으로는 마나슬루 서쪽에 있는 캄풍히말(Kangpung Himal)에서 제일 높은 풍기(Phungi, 6538m)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오늘이 설산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라 내내 눈을 맞추며 걸었다. 언덕을 넘으니 강을 가로질러 다리가 하나 있다. 빙하지대이기는 해도 얼음이 없는 골재채취장 같은 곳을 흐르는 작은 개울 수준의 강이다. 이 강의 이름은 두드콜라이며 이곳이 최상류에 해당한다. '두드'란 '우유'라는 뜻의 네팔말이다. 강물의 빛깔이 우유같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쿰부에도 고쿄의 고줌파 빙하에서 시작하여 루클라 아래로 이어지는 강 이름도 두드코시다. 코시는 콜라와 같은 뜻(작은 강)이다. 다리를 건너 빙하 제방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 다시 작은 다리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곳까지 길이 무너져 있어 보울더 바위 사이를 타고 가느라 조금 성가셨다. 나중에 보니 위쪽으로 새로운 길이 나 있다. 이 다리는 난간도 없다. 다리 위로 서리가 내려 미끄럽다고 타시가 모래를 집어 뿌려주었다. 이곳은 물살이 제법 세다. 북쪽으로 힘룽히말과 체오히말의 모습이 보인다. 이 산의 모습을 보는 것도 여기가 마지막이다. 강물은 빙하 모래층 아래에서 갑자기 꽐꽐 솟아 나오고 있다. 다리를 건너 빙하의 서쪽 제방 꼭대기로 올라가 잠시 쉬었다. 첫 번째 휴식시간이다. 출발한지 1시간 되었다. 이제 빙하지대는 끝났다. 그곳부터는 내리막길인데 갑자기 우람한 나무들이 있는 숲속으로 들어간다. 풍경이 이렇게 갑자기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나무에는 이끼와 실 같은 지의류가 많이 붙어 있어 이제 수목한계선으로 내려왔다는 것이 실감났다. 네팔의 국화인 랄리구라스도 보인다. 레이놀즈의 책에는 이 길가에 (ABC 트레킹 코스의 데우랄리 못미처 나오는 힌쿠 동굴 같은 모양의) 동굴이 있다고 나와 있지만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숲속에서 가끔 툭 터진 곳으로 나오면 캄풍히말이 반겨주었다. 기온도 많이 올라갔다. 즐거운 숲 길이다. 큰 전나무가 탄 모습이 보인다. 먼 산에는 산불로 고사목이 되어 불에 탄 전봇대처럼 흉물스럽게 서 있다. 그 너머로 마나슬루 서쪽면의 빙하가 보인다. 쿰부에도 남체바자르에서 텡보체 가는 도중에 이런 산불 흔적이 있다. 히말라야에서 산불이 나면 대책이 없다. 이 험한 산에 올라가 불을 끌 방법이 도저히 없다. 헬기로 불을 끄는 시스템은 먹고 살 만한 나라나 가능하다. 1994년 9월 하순에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도 이런 산불에 탄 수많은 고목나무들을 본 적이 있다. 미국은 산불이 나도 끄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낙뢰 등 자연적으로 발생한 현상을 자연의 순환현상으로 보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막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관련기사) 계곡에 들어서니 숲길이지만 평지만 있는 것이 아니어서 오르막과 내리막을 계속 반복한다. 8시 30분, 울창한 숲 속에서 휴식. 그리고 잠시 계곡 위로 난 전망이 좋은 양지녁 오솔길을 걸었다. 마나슬루 정상의 둥근 빙하가 왼편으로 보인다. 1950년 5월 23일, 마낭에서 안나푸르나에 접근할 수 있는 계곡과 빙하를 탐사하기 전 틸먼 탐사대는 이곳 두드콜라 위쪽 마나슬루와 그 주변 봉(체오히말과 힘룽히말)을 먼저 탐사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 그리고 빔탕으로 가는 도중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에서 마나슬루를 똑똑하게 보고 감동을 받는다. 이 전망대에서 우리는 어두운 숲에서부터 그 너머 마나슬루에서 흘러 나온 둥근 빙하까지 바라보았다. 오른쪽으로 하늘을 찌르는 두 개의 바위탑과 얼음은 우리에게 경이로움을 주었다. 마나슬루는 거친 모양을 거의 감추고 조용하고 영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낮은 스노우콜(snow col)로부터 마나슬루의 긴 북쪽 능선은 가볍게 25000피트를 오르고 1000피트를 내려간 후 눈의 고원에 날카롭게 솟아 있다. 그리고 잘 받쳐져 있는 받침대 위에 정상의 피라미드가 서 있다. (H. W. Tilman, 위의 책, p.820) 계곡은 이제 많이 넓어졌다. 산사태의 흔적으로 강물 속에 큰 나무가 넘어져 있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10시 15분, 롯지가 하나 있는 넓은 캠프사이트가 나왔다. 마나슬루 지역에서의 롯지는 주방과 캠프사이트만 제공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롯지 문은 잠겨 있다. 주인이 있다면 이곳에서 점심을 지어 먹고 갈 수도 있지만 문이 잠겨 있으니 주방팀은 이곳을 그냥 통과했다. 강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등 굳이 번거로운 이곳을 주방팀이 택할 까닭이 없다. 왼편으로 터진 계곡 사이로 탐스러운 설산이 보인다. 이곳은 하루 묵고 싶은 평화로운 풍경이 있는 곳이다. 지도에는 이런 카르카가 몇 개 표시되어 있다. 급경사 내리막길을 통해 숲으로 다시 들어가다가 얼마 후 길은 계곡 바닥으로 내려갔다. 우기 때 생긴 산사태로 길이 끊어져 바닥에 새로 만든 험한 길이다. 아름드리 나무가 가로로 쓰러져 있고 그 아래로 길이 난 곳도 있다. 강으로 쓸려 내려온 흙과 돌더미 사이를 헤치고 오르내리는 길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위쪽에 있는 바위가 언제 또 무너질 지 모르는 일이라 긴장이 되었다. 레이놀즈의 책에도 언급되어 있으니 이 산사태는 적어도 10년 전에 일어난 것이다. 물건을 실은 말이 이런 길을 통해 빔탕까지 다니고 있다. 이 길은 오늘 일정에서 가장 난코스라고 할 수 있다. 산사태 길을 지나 다시 숲속 언덕으로 올라가 작은 지류에 놓인 다리를 나왔다. 돌과 나뭇가지를 교묘하게 얽어 기초를 만든 독특한 다리다. 이런 다리는 처음보았다. 다리를 건너니 바로 점심 먹을 장소인 카르체(Karche)가 나왔다. 이곳에 한 가족이 살고 있는 티하우스가 하나 있다. 주변에 제법 넓은 경작지가 보이는 것으로 보아 농사를 짓는 모양이다. 시간이 11시 40분을 지나고 있어 배가 고팠다. 이제 고도는 3000m 이하로 내려왔다. 집 뒤마당에 넓은 캠프사이트가 있다. 바람은 불지만 햇볕은 따뜻하다 못해 뜨겁다. 계곡 사이 푸른 숲 위로 설산의 봉우리가 깨끗하게 보인다. 점심을 기다리는 동안 오랜만에 머리를 감으니 개운하다. 이 집의 꼬맹이가 호기심을 보이며 우리 주변과 주방을 차례로 들락거린다. 점심 먹고 1시에 출발했다. 길은 완연한 저지대 숲길이다. 가끔 계곡 바닥으로 내려가기도 하면서 오르막 언덕을 우회하여 오르내린다. 물건을 싣고 오르는 조랑말 무리도 만났다. 카르체 이후부터는 경작지와 흩어져 있는 집들이 자주 나온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이 시작된 것이다. 경작지가 있는 곳은 짐승의 출입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아 놓았다. 염소와 양이 떼지어 풀을 뜯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길가 밭에서 감자를 캐고 있는 있는 아낙네들과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새로 롯지를 만들고 있는 곳도 있다. 이곳도 이제 트레커들이 많이 오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마니월도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초우따라가 있는 고개에서 한숨 돌린 후 가족이 메밀 수확을 하는 곳을 지나자 곧 오늘의 목적지 띨제(Tilje)가 멀리서 보였다. 오른쪽 산비탈로 계단식 밭이 보이고 전깃줄도 보이는 큰 마을이다. 마니월과 텅빈 학교를 지나 마을 입구에 있는 카니를 통과했다. 여자 아이 둘이 검은 소를 몰고 와 소를 밭으로 내 쫓은 후 우리를 따라 마을로 돌아왔다. 오후 3시 40분, 띨제에 도착했다. 띨제는 구릉족이 사는 이 근처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틸먼이나 스넬그로브 시대에는 이 두드콜라 계곡의 유일한 마을이었다. 캠프장이 있는 집 마당에는 백일홍과 다알리아가 한창이다. 꽃 구경도 오랜만이다. 뎅에서 보고 처음이니 8일만이다. 오늘은 하루만에 풍경이 이렇게 달라졌다. 주방팀은 차 준비를 하고 다른 스태프들은 텐트를 치느라 바쁘다. 어제부터 긴 운행으로 조금 지치긴 했지만 다시 아이들이 놀고 닭이 활개짓하는 마을로 돌아오니 마음이 편해진 한편 섭섭하기도 하다. 트레킹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오늘 아침까지 눈이 시리도록 보았던 설산은 더 이상 가까이에서 볼 수 없다. 그저 가끔 먼 산 계곡 사이에서 바라 볼 수 있을 뿐이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피로를 풀고 저녁 먹기 전 등산화를 수선(끈 교체)했다. 지금까지 별 탈없이 버텨준 것이 고맙다. 내일은 마나슬루 지역을 벗어나 안난푸르나 라운딩 코스로 접어드는 일정이다. 7년 만에 그 길을 다시 가는데 그동안 어떻게 변해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
trek 15. 빔탕 - 띨제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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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 빠진 로켓발사사업 | ||||||||||||||
‘액체로켓’ 기술확보 실패 | ||||||||||||||
2008년 02월 01일 | | 글 | 박근태 기자ㆍkunta@donga.co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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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감 탓인지, 아니면 황홀한 달밤을 본 탓인지 잠을 푹 자지 못했다. 텐트 안은 0도로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텐트 안이 영하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물통의 물에 살얼음이 어는 경우는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침낭속에서 모닝콜을 기다렸다. 짐은 대부분 어제밤 미리 싸두었다. 잠시 후 밖이 조금 소란스러워지더니 빠상이 어김없이 "띨레리~"하며 차를 가지고 왔다. 오늘 아침 세숫물은 생략이다. 뜨거운 홍차로 속을 덥힌 후 짐을 챙겨 식당텐트로 갔다. 밖으로 나오니 아주 춥다. 영하 10도는 될 것 같다. 사람들이 하나 둘 들어왔다. 다행히 모두 어제보다 컨디션은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식욕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인지 음식을 잘 먹지 못하고 있다. 오늘 긴 일정을 생각한다면 잘 먹어야 한다고 독려했다. 새벽 운행이 추울 것에 대비해 어제 잘 때 입은 브린제 악틱(Brtnje Arctic) 고소내의는 그대로 입었다. 어제까지는 잘 때만 입었다. '고소내의계의 지존'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내의는 원래 남극이나 북극 등 세계 오지탐험을 위해 노르웨이의 브린제사에 의해 개발되었다. 제품 설명에 의하면 안감은 브린제 고유의 메라클론 망사조직으로 되어 있어 내부의 땀을 신속하게 배출하고 겉감은 100% 메리노울로 직조하여 외부 한기를 차단할 뿐 아니라 내부 발산열을 가두어 보온력을 높혀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옷에도 결점이 있으니 그것은 부피와 무게가 다른 고소내의에 비해 부담이 된다는 점이다. 원정대처럼 고산에서 오래 머무는 사람들은 몰라도 15일 트레킹 중 이삼일 정도만 고산에 머무는 코스에는 굳이 무게와 부피에 대한 부담이 큰 이런 장비까지 가져갈 필요가 없을 것 같다. 4000m 이상에서 제법 오래 머무는 쿰부 서키트 트레킹 때는 좋을 것이다. 나는 이 옷을 2년 전부터 토굴에서 입고 있다. 겨울이 되면 내가 거주하는 방안은 기온이 10도 내외에 머물고 있다. 그동안 난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심초사했지만 큰 효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내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난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땅이 거칠어 다니기 불편하다고 모든 땅에 부드러운 가죽을 깔 수 없다. 너의 발만 가죽으로 싸면 온 세상을 가죽으로 싼 것과 마찬가지다." 이말은 원래 현상계는 자기의 마음 상태에 따라 보이므로 모순되어 보이는 세상을 바꾸려 하지 말고 자신을 바꾸어야 한다는,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치는 비유의 말씀이다. 그 말에 힌트를 얻어 나도 넓은 공간의 난방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난방이 필요한 내 몸을 직접 따뜻하게 하는 옷에 신경쓰기로 했다. 보온 기능이 뛰어난 등산복은 그 목적에 제격이다. 토굴에서 브린제 내의와 폴라텍 파워스트레치 상하의는 기본이다. 등산양말을 신고 상의는 우모복을 하나 더 걸친다. 목에는 네팔의 특산물 파슈미나 목도리를 두른다. 그리고 빵모자로 마무리 하니 천하가 태평하다. 히말라야 트레킹 경험은 추운 산골살이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아무리 방이 춥다해도 히말라야 4천 고지의 페리체 롯지보다 따뜻하니 견딜만하다. 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먹고 샤워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매일 짐을 싸지 않아도 되고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 침낭에 들어가지 않는 잠자리는 편안하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집에 머무는 것이 제일 편하다. 돈도 들지 않는다. 짐을 챙기느라 몇 날 며칠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공항까지 끙끙대며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아도 된다. 고소도 없고 두통이나 식욕부진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춥고 힘든 히말라야를 가고 싶어 할까? 사람마다 각자 이유가 있을 것이나 인간사를 관통하는 다음의 한 마디 말은 트레킹에도 당연히 해당된다.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 코 아래 얼굴 전체를 가려주는 안면마스크(face mask)와 머리 전체를 뒤집어 쓰는 바라클라바(balaclava)도 이번에 준비했다. 오늘 새벽 단 몇 시간만 필요한 장비지만 없으면 고생이다. 2000년 안나푸르나의 토롱 라를 넘을 때와 2002년 쿰부의 촐라패스를 넘을 때 추워서 혼이 난 경험을 한 이후로 트레킹할 때마다 추위에 대한 신경을 많이 쓰고 있다. 그런데 바바클라바는 써보니 너무 답답해 안면마스크를 쓰고 고소모자를 눌러썼다. 몸은 추위를 느끼면 자동적으로 가장 중요한 심장을 보호하기 위해 심장에서 먼 손끝이나 발끝의 말초혈관으로 가는 혈액을 줄인다. 그 결과 그곳은 체온이 떨어진다. 만일 추운 상태가 계속되면 몸은 에너지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해 말초혈관으로 가는 혈액공급을 줄이다가 마침내 중단시킨다. 혈액이 중단되면 세포가 괴사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동상이다. 그러니까 동상은 문자그대로 '수뇌부'가 생명을 조금이라도 더 유지시키기 위한 최선의 조치로 생기는 현상이다. 손발이야 잘라도 살 수 있지만 심장이 멎으면 바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텐트에서 나오자마자 세르파들과 포터들이 텐트를 철수시키기 시작한다. 어둡고 추운 새벽에 철수작업을 하느라 고생이 많다. 장갑도 없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정말 그들은 아무리 임금을 받고 고용된 사람들이지만 레이놀즈의 말대로 '인간트럭'이 아닌 '전문노동자'로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 짐을 지고 고산을 오르는 일만큼은 지구상에서 네팔사람을 따라 갈 종족이 없다. 세계의 지붕인 히말라야를 터전으로 살고 있으니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몇 달 전 우연히 디스커 버리채널에서 방영한 <에베레스트, 한계를 넘어서(Everest, Beyond the limit)>를 보았다. 2006년 봄 뉴질랜드인 러셀 브라이스가 지휘하는 상업등반대의 에베레스트 등정 상황을 기록한 내용이다. 6부작이라는데 다 보지는 못하고 점심시간에 어쩌다 나오면 보았다. 내용은 등반 도중 악천후로 동상을 입어 두 다리를 잃었지만 의족을 달고 나선 사람, 암수술을 받고도 참가한 사람, 오토바이 사고로 온 몸의 뼈를 쇠로 이어붙이 사람, 무산소 등정을 시도하는 천식환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인간승리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 편에서는 등반대원 중 한 명이, 하산 때 죽어가는 등반가를 발견하지만 구하지 못하고 그냥 내려오는 장면이 있다. 실제로 그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그 사람을 그대로 두고 지나가는 등반가들이 비정하다는 여론이 있지만 그 상황에서는 자기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든 8000m 고도에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으로 오르는 길 가에는 그렇게 죽은 사람의 시신이 많이 있다고 한다, 7년 전쯤 <산>지에서 그런 시신이 방치되어 있는 비인간적인 모습의 사진을 보고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프로에서 내가 받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의지의 군상들이 벌이는 인간한계에 대한 도전이 아니었다. 캠프 2인지 3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곳에 캠프를 차리고 대장이 세르파 6명에서 2km의 로프를 주고 정상까지 로프를 설치하라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참 지난 후 무전이 날아온다. "대장님, 모두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나는 그 대목에서 웃음이 나왔다. 정상에 한 번 올라가보겠다고 아래에서 고소 등으로 갖은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세르파들은 이웃집 마실 가듯이 가볍게 정상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무거운 로프와 산소통을 매고. 원정대원들이 할 일은 그들이 깔아 둔 로프를 잡고 오르는 일이다(물론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히말라야 세르파들의 강인함과 위대함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래서 진정한 등반은 알파인 스타일의 단독 등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히말라야 14좌를 처음으로 완등한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 1944~)가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메스너는 1975년 가셔브룸 1봉을 등정하면서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루트로 등정을 한다. 게다가 산소용구, 고소포터, 중간캠프, 고정로프를 쓰지 않는 순수한 알파인 스타일로 올라간다. 그는 알프스의 4000m 급 산을 오르는 방식으로 8000m 급 고봉을 사흘 만에 올랐다. 이런 등반방식은 전통적인 방법보다 몇 배나 더 어렵고, 죽음을 무릅쓴 도전이기에 메스너의 성공이 더욱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로부터 8000m 고봉에 대한 도전 방식이 바뀌게 된다. 메스너는 8000m 급 고봉 14개를 처음으로 모두 오른 사람이다. 게다가 그것도 쉽게 오른 것이 아니라 알파인 방식으로 올랐고, 또 한 시즌에 8000m 이상의 고봉 3개를 등정하는 해트트릭도 한 사람으로 20세기 최고의 등반가라고 한다. (향기로운 책글방 1163호, <알피니즘, 도전의 역사(마운틴북스)>에서 인용 ) 등반의 세계에는 등정주의(登頂主義)와 등로주의(登路主義)가 있다. 등정주의는 루트에 무관하게 정상 등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등로주의란 보다 어렵고 험난한 루트를 택해 정상을 향해 오르는 것이다. 세계적인 등반가들은 당연히 등로주의를 추구해왔고, 한국 산악인들 역시 등정주의에서 점차 등로주의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 메스너도 네팔 세르파들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 산악인과 비교할 때 출중할 뿐이다. 2002년 쿰부트레킹 때 남체바자르 서쪽 타미(Thame)의 서미트 롯지에서 머물 때 롯지 주인인 압빠 세르파(Appa Sherpa, 1962~ )를 만난 적이 있다. 그의 롯지 식당 벽에는 얼마 전 에베레스트를 12번을 올랐다고 해서 기네스북에서 수여한 세계기록증이 식당에 걸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원정대와 트레킹 팀의 포터 일을 해온 그는 1990년 뉴질랜드 팀의 세르파로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2007년 5월 17번째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았다. 따져보니 17년 동안 매 년 한 번씩 오른 셈이다. 만일 그가 원정대처럼 스폰서의 후원을 받아 마음먹고 오른다면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가장 빠른 기간 내에 마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는 항상 알파인스타일로 오른다. 왜냐하면 그는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원정대가 정상에 잘 오르도록 로프를 깔고 대원들을 안내하기 위해 고용한 세르파이기 때문이다. 네팔에는 그와 같은 세르파들이 부지기수다. 압빠 세르파는 2006년 미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가족(아내와 네 자녀)이 모두 유타주의 드래퍼(Draper)로 이주해서 살고 있다. 그곳에서 그는 현지 등산점에서 일하고 강의도 하며 필요하면 에베레스트를 안내하는 세르파 일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신기록은 계속 진행중이다. 말을 하다보니 잘 알지 못하는 등반에 대한 이야기로 흘렀는데, 결론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세르파와 포터가 없으면 히말라야 등반도 없고 트레킹도 없다. 그러니 항상 그들의 노고에 감사하자." * * *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4시에 출발했다. 오늘 구간이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제일 힘든 구간이다. 그리고 히말라야 트레킹에서 몇 안되는 최고의 풍광을 볼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다. 다람살라에서 라르키아 라까지 763m 올라간 후 그곳에서 빔탕까지 1493m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트레킹이든 고개를 넘는 구간은 다 비슷한 상황이니 특별할 것은 없다. 아무리 어렵다 해도 야크와 말이 넘을 수 없는 촐라패스보다는 쉬울 것이다. 촐라패스와 고쿄 사이에는 초오유에서 내려오는 고줌파 빙하를 횡단하여 건너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 토롱페디 하이캠프(4800m)에서 토롱 라까지 616m 올라갔다가 묵티나트까지 1616m 내려간다. 쿰부 트레킹에서 촐라패스를 넘자면 닥락에서 고개까지 720m 올랐다가 종라까지 570m 내려간다. 랑탕에서 헬람부로 넘어가는 고개인 로우레비나 패스는 5000m 이하라 조금 수월한 편이지만 그곳도 4321m의 고사인꾼드에서 383m 오른 후 고개 넘어 로우레비나 페디까지 1060m를 내려가는 일정이다. 고개를 안 넘으면 모를까(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넘으려면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고개를 넘지 않는 4000m 이하의 히말라야 트레킹은 아무래도 설산의 멋진 풍광을 멀리서 보기 때문에 웅장한 느낌이 떨어진다. 예외가 있다면 ABC 트레킹처럼 장엄한 안나푸르나 남벽의 일출을 코앞에서 보는 경우인데, 그 경우 역시 막다른 골목으로 갔다가 되돌아 내려오는 하산길은 큰 재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길은 바로 오르막이다. 어두운 새벽에 반딧불 같은 헤드렌턴 불빛이 날아다니고 있다. 타시가 앞장서고 내가 제일 뒤에서 불을 밝혔다. 이번에 오면서 강력한 헤드랜턴을 하나 마련했다. 지금까지 쓰던 프랑스의 페츨(petzl) 헤드랜턴은 작년 무스탕 벽화 감상 때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 좀 더 강력한 후레시가 필요했다. 그래서 여기저기 뒤진 끝에 독일제 헤드랜턴 루시도를 발견했다. 이 헤드랜턴은 정말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자동차의 하이빔처럼 120m 전방을 강력하게 비추는 서치라이트 기능은 압권이다. 트레킹 첫날 밤중 아루갓바자르를 가는 구불구불한 찻길에서 나는 이 랜턴을 든 손을 창문밖으로 내밀어 길을 비춰주었다. 차에서 내려 숙소로 가는 어두운 밤길에서도 불도 없이 미끄러운 비탈길을 내려가는 포터들을 뒤에서 비춰주었다. 평소에는 2단 정도면 족하다. 그러나 오늘 같은 달이 진 후의 어두운 새벽에는 뒤에서 서치라이트로 비춰주면 앞에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내가 살 때인 2006년 8월에는 74,000원 했는데 최근 새 모델이 나오면서 값이 많이 올라 108,000원이나 한다. 그래도 등산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사 둘만하다). 트레커들은 각자 헤드랜턴이 있으니 알아서 잘 가지만 얼마 후 따라 온 포터들은 어두운 길을 불도 없이 추월해 간다. 포터들에게도 오늘 새벽은 헤드랜턴이 필요하다. 그러나 개인별로 가져오지도 않고 여행사에서도 지급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네팔의 현실이다. 한참 비춰주며 따라갔다. 속도가 빠른 포터들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두꺼운 고소장갑을 껴도 손이 시럽다. 안면마스크가 없었다면 얼굴이 고생했을 것이다. 모레인 언덕길을 오르는 시작부터 모두들 힘들어 한다. 라르키아 라까지 가는 길 전반부는 라르키아 피크에서 내려오는 빙하 모레인지대를 따라 거슬러 오르는 길이다. 오늘부터 보명화 보살님의 배낭은 타시가 맡고 무진행 보살님의 배낭은 밍마가 맡았다. 이 두 분의 컨디션이 제일 좋지 않다. 고소와 식욕부진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다. 뒤에서 보니 계속 발걸음이 늦어진다. '쉬면서 오르기' 주법을 따라하도록 내가 앞장을 섰는데 얼마나 잘 따라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출발한지 1시간 지나자 서서히 여명이 밝아온다. 왼편으로 빙하호수가 보였다. 타시가 돌맹이를 던지니 호수 위에서 팅겨 나간다. 꽁꽁 얼어 있다. 6시 40분, 일출이 시작되어 해가 서쪽 산 꼭대기를 비추기 시작했다. 이미 만년설 지대로 들어와 주변에 눈이 쌓여 있다. 오르막이라 30분 이상 계속 운행하기 어려워 틈나는 대로 쉬면서 운행했다. 제법 많이 쌓인 눈길로 접어들었지만 얼어 있고 러셀이 잘 되어 있어 체력이 문제지 운행하기에는 어렵지는 않다. 햇볕 속으로 들어오니 일단 추위는 가셨다. 오전 7시, 돌집이 있는 대피소에 도착했다. 키친보이 푸르바가 점심을 가지고 동행하고 있다. 배는 고프지 않고 오직 목이 말라 보온병에 담아 온 레몬 티 한 잔씩 마셨다. 5000m 가까운 고도의 눈길에서 3시간 운행을 한 탓에 모두들 지쳐 양지녁에 돌 위에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다. 아직 정신이 말짱한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나도 두통이 조금 있지만 참을 만하다. 앞으로 두 시간만 가면 고개가 나올 거라고 격려를 했다. 고소를 느끼는 사람은 다이아목스를 먹고 두통이 있는 사람은 두통약을 먹었다. 그곳에서부터 라르키아 라까지는 예상보다 40분 늘어난 2시간 40분 걸렸다. 2시간 40분이라고 하니 가벼운 운행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4000m 이하라면 그렇게 힘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5000m 고도에서 두 시간 이상 오르막을 오르는 일은 평지의 10시간처럼 느껴진다. 예전 기록을 보니 2000년 토롱페디 하이캠프에서 토롱 라까지 2시간 30분 걸렸다. 그 때도 무척 힘들었다. 2002년 쿰부의 촐라패스는 출발하여 고개까지 점심시간 포함하여 무려 7시간 15분 걸렸다. 제일 춥고 힘들었다. 2004년 랑탕 헬람부에서는 3641m의 로우레비나 페디에서 4700m의 로우레비나 패스까지 4시간 50분 걸려 올라갔는데 그 때는 중간 모레인 지대에서 간식을 먹고 오르는 등 그리 힘들었다는 기억은 없다(그래도 현장에서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라르키아 라로 가는 길은 낮은 언덕을 계속해서 넘는 일이다. 이정표로 언덕에 세워 놓은 말뚝을 보고 저곳에 가면 고개가 보이려나 하는 기대를 갖는데 막상 올라가면 또 다른 말뚝이 멀리서 "나 잡아 봐라~" 하며 서 있다. 그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시야가 너무 탁 터진 것도 걷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기운을 빠지게 만든다. 그러나 그만큼 풍광이 좋다. 끝없이 이어진 넓은 설원과 주변 설산의 풍경은 과연 밥(Bob)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해주었다. 라르키아 라에 대한 그의 글은 이번 마나슬루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나는 히말라야의 많은 고개를 넘었다. 그러나 라르키야 라는 히말라야에서 가장 장엄한 고개 중 하나이다. 아마 가장 장엄할 것이다. 우리 너머로 고개는 빙하로 가파르게 내려가고 있고 빙하 위로는 거칠 것 없는 수 천 미터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대부분 7000m미터 급(힘룽 히말 등)이다. 물론 그 가운데는 마나슬루와 안나푸르나도 있다. 안나푸르나는 앞으로 계속 보게 될 것이다. (Bob Rosenbaum, Bob's explores the Manaslu and Nar-Phu region, 2004) 눈표범의 발자국을 본 것은 뜻밖이었다. 눈표범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영광이 없겠지만 은밀하게 움직이는 눈표범을 직접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BBC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위장막을 치고 몇 주씩 기다려서 겨우 찍었다. 우리에게 이런 행운이 온 것은 눈이 내린 덕분이다. 그런데 이 높은 곳까지 어슬렁거리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결론은 만년설로 뒤덮여 있는 이곳에도 산양 등이 서식한다는 말이다. 추위는 가셨다. 바람이 불지 않아 이제는 오히려 더워 고소모자를 넓은 챙의 운행모자로 바꾸어 썼다. 장갑도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아윈드 스토퍼도 벗었다. 폴라텍 파워스트레치 차림만으로도 충분한 날씨다. 그리고 안면마스크도 벗으려다 설면에 반사되어 오는 복사열이 엄청 뜨거워 그대로 착용했다. TV에서 원정대들의 얼굴(특히 코)이 시커멓게 탄 것이 이 복사열에 의한 화상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나 뜨겁길래 저 정도일까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니 실감이 난다. 설원에서는 설맹의 위험도 크다. 설맹이란 눈에서 반사되는 햇빛 때문에 각막이나 결막에 일어나는 염증으로 일시적으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선글라스를 껴도 눈이 부실 정도다. 도대체 눈에 반사되는 햇빛이 얼마나 강한지 궁금해서 선그라스를 슬쩍 내려보았다. 그랬더니 어마어마하게 밝은 빛이 들어오는데 마치 예리한 칼이 눈을 찌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타시가 선글라스가 없는 포터들을 위해 일찍 넘자고 한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말 마세요. 얼마나 두통이 심한지 빨리 고개를 넘어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죽자사자 걸었습니다." 이곳에 걸려고 보드나트에서 산 타르초와 카타를 카고백에 넣는 바람에 허공만 쳐다보고 말았다. 어제 저녁 식당텐트에서 '카고백에 있는 타르초를 배낭에 옮겨야지' 하는 생각을 했지만 돌아서서 잊어버렸다. 산소가 부족한 고산이 뇌에 미친 영향이다(나중에 타르초와 카타는 토굴에 걸었다). 산 아래쪽으로 지붕이 미완성인 대피소용 돌집이 하나 있다. 안드레스는 "아마 이 건물은 삼도 사람들이 지었는데 이곳을 지나가던 어떤 상인들이 나무를 뜯어 화목으로 썼을지 모른다."라고 쓰고 있다. 갑자기 라르키아 피크 상단부에서 연기가 나더니 구름으로 변한다. 눈사태임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처음에는 아주 약한 연기처럼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구름이 몰려 내려오는 모습으로 변한다. 사실은 모두 눈이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눈사태를 보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운행중이었다 해도 길과 산 사이에 낮은 계곡이 완충지대로 있어 위험하지는 않다. 그래도 눈 바람은 피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열흘 전 내린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오늘 오전 10시, 햇볕에 녹은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쓸려 내려온 것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중 눈사태 위험이 있는 곳은 ABC와 다울라기리 트레킹인데 그 구간을 통과할 때는 반드시 햇볕에 눈이 녹기 전인 오전 일찍 지나가야 한다. 이번 트레킹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마모트에 산양에 눈표범 발자국에 눈사태까지. 마나슬루는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티의 발자국까지 보았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2004년 이곳에서 밥은 예티의 발자국을 보았다고 한다. 사진이 없으니 증명할 수는 없으나 그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예티라는 말은 티베트어 '예'(yeh-눈의 계곡)와 '테'(teh-사람)에서 왔다. 고산지대에 사는,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포착하기 어려운 동물에 대한 개념은 다른 많은 문화권에서도 적용되어 왔다. 티베트 사람들은 그것을 예테(ye-teh), 마테(mah-teh) 혹은 메턴 캉미(mehton-kangmi)라고 부르는데 메턴 캉미는 '설인'으로 번역된다. 예티 발자국 사진은 1951년 에릭 쉽턴이 에베레스트에서 찍은 것이 가장 유명하다. 20여 분 쉰 후 모두 아이젠을 착용하고 15분 거리의 두 번째 고개로 갔다. 이 두 고개 사이는 거의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첫 번째와 두 번째로 나누는 것은 편의상 붙인 것이고 실제로는 라르키아 라의 서쪽 끝과 동쪽 끝이라고 해야 한다. 전망은 빔탕 방향인 동쪽이 좋다. 서쪽 고개는 북쪽의 산비탈이 전망을 비스듬하게 가로막고 있다. 동쪽 고개에서 본 풍광은 과연 소문대로 굉장하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서쪽인 삼도쪽 풍경은 줄곳 보던 모습이라 이젠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러나 동쪽은 새로운 풍경이다. 강인한 인상을 주는 검은 바위 연봉인 키치게(Kichke) 히말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데 그 뒤 왼편으로 람중히말과 안나푸르나 2봉(7937m)이 머리를 내밀고 있다. 오르편으로는 강구루(Kang Guru, 6981m)와 힘룽(Himrung) 히말(7125m)이 고깔모양의 머리를 보여주고 있다. 히말라야는 역시 이런 호쾌한 파노라마를 보는 기분이 제일이다. 일단 동쪽과 서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조금 쉬다가 10시 35분 하산을 시작했다. 그래도 두 고개에서 머문 시간이 1시간 가까이 된다. 급경사 내리막길이라고 하지만 오르막길 보다는 쉽다. 잠시 완만한 내리막길이 나오더니 말 그대로 고꾸라지는 듯한 비탈길이 나왔다. 눈도 이제 많이 녹은 상태라 발이 빠진다. 아이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차라리 눈길이 낫다.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미끄러운 모래길이라 운행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동쪽 경치는 고개보다 내려오는 도중이 더 좋다. 고개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오른쪽 체오체오히말(Cheo Himal, 6912m)까지 파노라마로 보인다. 아래쪽으로는 빙하지대와 파란 빙하호수도 보인다. 가파른 비탈길을 조심스레 걸어야 하니 경치를 제대로 감상할 여유는 없지만 잠시 서서 쉴 때마다 마음껏 풍광을 즐겼다. 길은 지그재그로 끝없이 내려가고 있다. 이제는 눈이 질퍽하여 가끔 미끄러지기도 한다. 멀리 앞에 가던 보명화 보살님이 미끄럼을 타며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잘못하면 빙하 계곡으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까이 가 보니 정말로 그랬다. 얼마 전 통화를 할 기회가 있어 그 때 왜 미끄럼을 탔느냐고 물어보았다(네팔에서 물어볼 생각이었는데 이 역시 깜박했다). 대답은 일부러 미끄럼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도 힘들어서"였으며 곧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체력이 바닥난 상태에서는 내리막길도 힘든 법이다. 12시 15분, 눈밭이 끝나고 모레인지대가 시작되었다. 앞에 가던 타시는 쏜살같이 내려가 이미 모레인 아래에 앉아 있다. 힘이 드니 슬며시 짜증이 났다. 고개에 오를 때에도 먼저 가 버려 따라가던 사람들의 기운이 빠졌다. 각자 자기의 속도로 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웬만하면 속도를 비슷하게 해야 뒤에 따라가는 사람의 힘이 덜 빠진다. 하물며 가이드라는 작자가 손님들은 내팽개치고 혼자 휭하니 가 버리다니. 제일 먼저 내려가 인상을 잔뜩 쓰며 앉아 있는 타시를 불렀다. "타시, 당신은 트레커입니까, 가이드입니까?" 일단 알아들었을 것이라 더 이상 추궁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어떤 식으로 가이드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2004년 랑탕 헬람부 트레킹 때 삼툭도 오늘과 비슷한 일로 나에게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내가 까다로워 그런 것이 아니다. 짐만 나르는 포터라면 상관없지만 가이드는 항상 고객을 밀착수행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임금도 더 많이 주는 것 아니겠는가. 시간을 보니 12시 30분이다. 현재 고도는 4600m. 2시간 동안 줄기차게 내려왔지만 고도를 보니 600m밖에 내려오지 못했다. 이곳의 고도는 다람살라와 비슷하다. 목적지 빔탕이 3720m니 아직도 1100m를 더 내려가야 한다. 풍경은 이곳도 굉장하다. 바로 오른편에 있는 장엄한 산과 빙하는 다른 어느 곳과 견주어도 자랑할 만하다. 마나슬루 트레킹을 "네팔 트레킹에서 가장 장엄한 풍광을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로 칭송하는 이유를 알겠다. 이곳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세 개의 거대한 빙하가 하나로 합쳐진다. 풍광은 좋다. 그러나 갈 길이 멀고 몸은 지쳤다. 이곳에서 늦은 점심을 펼쳤지만 모두 식욕이 없어 삶은 계란만 먹는둥 마는둥 한다. 보온병에 담아 온 레몬티도 다 마시고 없다. 물통의 물도 달랑거리고 있다. 타시가 밍마를 먼저 보내 주방팀에게 누룽지와 물을 가져오게 하는 것은 어떨지 묻는다. 여기서 빔탕까지 얼마 걸리느냐고 물으니 1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그렇게 가깝다고! 그렇다면 여기서 기다렸다가 누룽지를 먹고 힘을 내어 내려가도 될 것 같다. 밍마가 임무를 지니고 내려갔다. 동포들은 모두 편안한 자세로 쉬었다. 실제로는 쓰러진 모습이다. 에너지 고갈인 상태인데다 아직 고소의 영향권에 있어서 제정신이 아니다. 조금 쉬다가 문득 기왕이면 내려가다가 만나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오후 1시 경 모두 깨워 출발했는데 결과적으로 잘 한 결정이었다. 네팔리들이 말하는 시간은 항상 자기들 기준으로 말한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느긋했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하다면 1100m 하강을 한 시간에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은 적어도 두 시간 이상 걸린다. 길은 한결 수월했다. 키치케 히말은 여전히 앞에서 멋진 풍경을 보여주었다. 작은 고개에서 잠시 쉬면서 체오 히말과 빙하를 마지막으로 보았다. 이제부터는 빙하 모레인 언덕 아래쪽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빙하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내리막길이 완만하여 도대체 4000m 이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며칠 전만 해도 언제 수목한계선으로 올라가나 조바심을 냈다. 이제는 반대로 언제 수목한계선 아래로 가나 하는 생각이 든다. 라르키아 라는 운무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슬슬 운무가 낄 시간이 되었다. 2시 30분이 되어서야 처음 나무를 만났다. 이제야 수목한계선으로 내려온 것이다. 아직 목재는 아니고 '관목 형님뻘' 정도의 가는 가지가 있는 나무다. 가지마다 실 같은 모양의 이끼류 식물이 붙어 있다. 오후면 어김없이 올라오는 운무의 습기로 생긴 현상이다. 산 아래 작은 개울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곳에서 쉬는데 모두 물이 떨어져 목이 말랐다. 각자 지니고 온 1리터의 물이 모자랐다. 대부분 고개에 올랐을 때 이미 3분의 2를 마셨다. 목은 타는데 물이 없으니 난감하다. 그제서야 이 지점에서 쉴즈부부 팀이 정화제 아이오다인을 이용해 냇물을 마셨다는 대목이 기억났다. 약 2시간 후 우리는 포터들이 자기들의 점심을 짓고 있는 작은 평지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우리는 배낭을 풀고 1시간 가량 쉬었다. 우리는 고산병과 싸우고 다이아목스를 먹느라 물을 많이 먹은 탓에 모두 물이 떨어졌다. 톰이 아이오다인 정제를 찾아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근처 개울물을 물통에 채우고 아이오다인을 넣었다. 빌도 중화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계속 내려가는 도중에 맛있는 물을 마실 수 있었다. (Tom & Louisa Shields,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정화제를 사용한 적이 없다. 롯지트레킹 때는 끓인 물을 사먹을 수 있으니 굳이 물값을 아끼느라 정화제를 쓸 일이 없었다. 타시에게 물병을 주며 냇물을 좀 떠오라고 부탁했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계곡의 물을 몇 번 먹은 적이 있고 별 탈이 없었다. 이곳은 빙하에 가까운 물이나 지류 계곡이라 그런지 물이 맑다. 랑탕의 랑시샤 카르카에서는 맑은 물이었어도 석회냄새가 진하게 났다. 다행히 이곳은 물맛이 좋다. 모두들 한 모금식 마셔 목을 축였다. 그 때 물은 잘 먹었지만 돌아와 레이놀즈의 글 <트레킹 중 건강문제(On-Trek Health Matters)>를 보다가 그것은 위험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위경련, 설사, 탈수를 일으키는 불결한 기생충인 편모충은 빙하에서도 살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그런 모험을 하지 않고 정화제 아이오다인을 준비할 생각이다. 길은 점점 넓어졌다. 몇 군데 넓은 초지도 지났다. 운무가 점점 올라와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오후 2시 40분, 주방팀인 빠상과 푸르바가 기다리고 있는 풀밭에 도착했다. 어찌나 반가운지 저절로 "만세~"하는 소리가 나왔다. 멀리 모레인 언덕 아래 끝으로 빔탕이 보였다. 그곳까지는 아직 한참 더 가야 한다. 중국제 보온병에 누룽지를 끓여 담아오고 감자를 삶아와 맛있게 먹었다. 무진행 보살님은 아직도 식욕이 없어 누룽지는 별로 먹지 않고 숭늉만 마신다. 모두들 지쳐 있지만 이제 목적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한결 느긋한 표정이다. 가장 어려운 코스를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수고한 빠상과 푸르바에게 팁으로 100루삐씩 주었다. 안주어도 당연히 제공하는 서비스지만 기분이 좋으면 가끔 특별팁을 주는 것도 좋다. 아주 넓은 초지가 있는 빔탕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 20분. 소박한 롯지가 몇 개 보인다. 긴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새벽 4시에 다람살라를 출발했으니 11시간 20분 걸렸다. 웬만한 사람은 9시간 걸린다는데 노약자가 대부분인 우리팀의 +2시간 20분은 그런대로 양호한 성적이다. 이미 텐트는 다 쳐 놓았다. 넓은 초지는 오늘도 우리팀의 독무대다. 타시에 의하면 우리를 추월했던 포터들은 대부분 오전 10시 30분 경에 도착했다고 하니 얼마나 빨리 고개를 넘었는지 알 만하다. 한 포터는 오전 8시에 도착했다고 해서 혀를 내둘렀다. 사고도 있었다. 한 친구가 눈길에서 넘어져 굴러 떨어졌다고 한다. 다행히 무릎에 약간의 타박상만 입어 절뚝거리는 정도다. 이 친구는 다람살라에서도 감기로 고생해서 약을 타갔다. 무진행 보살님이 가지고 온 한방파스를 붙여주고 진통제를 주었다. 여분의 파스를 주어 내일 또 붙이라고 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나머지 4일간의 일정을 마칠 때까지 문제가 없었다. 라르키아 라를 넘었으니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어려운 구간은 이제 다 마쳤다. 내일부터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라르키아 라를 넘은 기념으로 맥주 두 병(한 병에 270루삐)을 사서 건배를 했다. 3700고지라 밤이 되니 쌀쌀했지만 오랜만에 고소에서 벗어나 편안한 잠을 잤다. 감기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 - 빔탕 (top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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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6. 띨제 - 자갓 (0) | 2008.0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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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k 15. 빔탕 - 띨제 (0) | 2008.02.12 |
trek 13. 삼도 - 다람살라 (0) | 2008.02.01 |
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0) | 2008.02.01 |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0) | 2008.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