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k 13. 삼도 - 다람살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3,680m

3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 티베트 국경 방문

4,2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20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순례자들의 휴식처 다람살라

2007. 10. 25(목)


 

어제 밤 마을에서 밤새도록 쿵쿵거리는 소리가 났는데 아침 6시인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쇳소리는 아니고 무슨 통나무 같은 것을 마루바닥에 두드리는 소리다. 어제 보았던 의식이 없는 노인을 위한 푸닥거리일지도 모르겠다. 의사가 없는 이곳에서 병자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다.

텐트 안 기온은 0도를 가리키고 있다. 지금까지는 콧물이 말썽을 부리더니 이제는 코 속이 너무 건조하다. 코피가 묻어 나오는 것은 낮은 기압으로 실핏줄이 터져서 그렇다고 한다. 차고 건조한 기후도 한 몫 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고산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며 몸은 현재 부지런히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칼스텐의 여행기를 보니 삼도에서 히말출리의 일출이 훌륭하다고 쓰여 있는데 우리는 놓쳤다. 팡푸치 뒤로 떠오르는 해가 눈이 부시기 때문에 아예 일출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칼스텐의 여행기를 프린터해 와 매일 반복해서 보는 데도 놓칠 정도니 과연 고산은 고산인 모양이다. 고산에 오면 판단력이 흐려진다. 고소에 걸리면 더 그렇다. 그래서 고소에 걸린 사람을 혼자 내 버려 두는 일은 절대 안되는 일이다.

오늘은 짧은 일정이지만 600m를 올라가야 하니 가벼운 소풍길은 아니다. 그러나 오전에 운행을 마칠 수 있는 거리라 시간 여유가 있으니 천천히 가면 된다. 이 구간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도 어렵다는 말은 없고 오히려 찍은 사진이 멋있어 기대가 되었다. 어제 밤에 다시 본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는 이 구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이 짧고 아주 쉬운 구간은 라르키아 고개로 가는 도중 대강 중간쯤 되는 곳에 있는 경사진 초지로, 다음날 고개를 넘기 위한 완벽한 베이스캠프를 제공한다. 그곳은 풍광이 장엄한 곳이지만 해가 지면 아주 춥기도 하고 고도도 아주 높아서 고산병이 올 수 있다. 길은 전 구간이 좋다. 오직 한 두 계류를 건널 때 바위에 얼음이 언 상태에서 신중하게 건너야 한다. 메마른 산사태 지역은 노출되어 있어 주의해야 한다. 길을 걸으며 융단이 깔린 듯한 산의 풍경을 즐기고 물을 많이 마셔라. (Kev Reynolds, , pp.75-76)

7시 40분 출발. 아직 해가 비치지 않는 아침이라 고소장갑을 꼈어도 손이 시리다. 어제 티베트 국경으로 가던 갈림길까지 다시 가야 한다. 마을에서 내려와 돌담으로 막아둔 경작지를 따라 가다가 마니월과 카니를 통과하여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넜다. 곧 갈림길에 도착했다. 햇볕 아래에 들어오니 추의는 한결 가셨다.

강바닥 넓은 모레인 지대를 지나 오르막을 오른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바위산이 위협적이다. 언덕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우람한 팡푸치 아래 더욱 작아 보이는 삼도 마을에는 오늘 아침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다. 출발한지 1시간 지나자 길은 산허리길로 바뀌었다. 짧은 산사태 구간을 지나니 다시 오르막이 나온다. 어쨋든 오늘부터 내일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까지 내리막은 없다. 그것이 차라리 낫다. 저지대 계곡을 지날 때처럼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 반복되면 오히려 더 피곤하다.

길을 가는데 이정표 역할을 하는 장대가 중간중간에 서 있다. 지금은 길을 잃을 염려가 없지만 눈이 내릴 경우를 대비한 이정표다. 이 장대는 라르키아 라를 다 넘을 때까지 계속 서 있다. 오르막을 지나니 잠깐 평지가 나온다. 평지는 땅바닥에 풀이 융단처럼 깔려 있다. 이런 모습은 쿰부의 페리체 근처와 비슷하다. 멀리 마나슬루 노스(6416m)가 보이기 시작하고 그 아래로 빙하가 내려오고 있다.

9시 15분 첫 번째 휴식. 해가 어느정도 올라온 탓에 뒤쪽의 팡푸치가 잘 보인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라 잠간 동안의 운행에도 모두 힘들어 한다. 고도가 점점 높아지니 운행이 쉽지 않다. 그러나 풍광은 좋다. 무진행 보살님이 힘들어 하자 밍마가 배낭을 대신 지겠다고 해서 넘겨주었다. 힘들 때는 단 1kg도 엄천난 무게로 다가온다.

마나슬루 노스가 점점 더 크게 보이고 빙하도 전체가 다 보인다. 산허리길에는 작은 계류도 자주 나온다. 불모지 같은데 어디서 이런 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고도는 이미 4000m를 넘어섰다. 길은 완만한 산허리 비탈길이 대부분이라 고도가 높아 숨이 찬 것을 제외하면 운행이 그리 어려운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 근처에 있다는 바북(Babuk=Larkya Bazar)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에는 삼도에서 다리를 건너면 바로 나오는 것으로 표시되어 있ㅈ;민 오는 도중 전혀 그럴 만한 곳이 없었다. 바북은 10시 15분, 출발한지  2시간 35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남형 씨가 계곡 아래쪽을 가리켜 내려다 보니 무너진 돌집들이 넓은 초지에 흩어져 있다. 바로 바북이었다. 바북은 티베트와 정기적인 교역이 이루어졌던 시장이다.

1956년 9월 8일,  여섯 달 동안의 돌포와 무스탕과 마낭 지역을 여행을 마친 스넬그로브 일행(스넬그로브, 네팔인 대학생, 가이드 빠상, 포터 6 등 모두 9명+빔탕에서 고용한 짐 운반용 조 몇 마리)은 빔탕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는다. 그는 라르키아 라가 지금까지 넘었던 고개 중 제일 쉬운 고개였다고 한다.

빔탕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는 것은 토롱 라를 묵티나트에서 넘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넬그로브는 이미 묵티나트에서 토롱 라를 넘어 마낭으로 왔다. 돌포 지역에서 많은 5천 미터급 고개를 넘으며 산전수전 다 겪은 스텔그로브에게 여행의 마지막 고개인 라르키아 라를 넘는 일은 대수롭지 않았을 것이다.

때는 바야흐로 몬순이 절정을 이룰 때였다. 비를 흠뻑 맞으며 라르키아를 넘은 그들은 유목민 텐트를 발견하고 그 옆에 캠프를 친다. 비는 다음날 아침에도 오락가락했다. 아침에 그들은 조금 더 내려가 바북(인도측량국 조사에는 Larkya로 표기되어 있다고 한다)에 도착한다. 그곳에는 20여 채의 돌 오두막집과 몇 채의 천막이 쳐져 있었다.

바북은 7월부터 10월까지 티베트와 네팔의 교역이 이루어지는 계절시장이다. 우리가 잠시 머물 때 가장 피크를 이루었다. 티베트에서는  소금, 모직, 버터가 오고 네팔에서는 쌀과 곡물이 왔다. 또 세르파 무역상들도 몇 명 있는데 그들은 조(야크와 소의 교배종)를 팔기 위해서 (쿰부에서 낭파라를 넘어 티베트쪽으로 해서 넘어)왔다. 그들은 큰 항아리에 창(티베트 술)과 버터차를 가지고 와 빠상과 세르파말로 즐겁게 소식을 교환했다. (David L. Snellgrove, <Himalaya Pilgrimage>, p. 243)

그곳에서 조금 오르자 마나슬루 북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꼭대기에 구름이 신비한 모습으로 휘감겨 있다. 이곳이 마나슬루를 볼 수 있는 마지막 구간이다. 나중에 빔탕에서도 마나슬루 북서면이 조금 보이기는 하지만 꼭대기만 조금 보이는 데다 너무 이상한 모습이라 마나슬루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Manaslu_trek13_pano1.jpg계속 오르막을 오르며 작은 계류를 건너 작은 고개마루에서 뒤를 돌아보니 바북이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제 계곡은 저만치 아래로 내려가 있다. 10시 35분, 멀리 다람살라 전경이 보이는 마지막 고개에 도착했다. 4300m 고지다. 다람살라의 고도는 4450m이니 앞으로 고도를 150m 더 올려야 한다. 돌집 하나가 개미처럼 보이는 거기까지 가는 길이 가물가물하다. 한참 더 가야할 것이다. 그곳에서 쉬면서 마나슬루의 마지막 모습을 감상했다. 이곳을 지나면 앞 산에 가려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우리와 동행하고 있는 밍마 세르파와 겔루 세르파는 반팔 차림이다. 무스탕의 로바나 쿰부의 세르파들은 모두 거친 히말라야를 터전으로 살고 있는 강인한 티베트 사람들이다. 밍마 세르파는 나중에 라르키아 라에서도 반팔차림이었다. 그 때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찍은 사진을 보고 알았다. 밍마 세르파는 2006년 2차 무스탕 트레킹 팀의 주방장이었다,

캠핑 트레킹의 주방팀은 포터들보다 일을 더 많이 하면서도 보수는 더 적다. 그 이유는 포터들처럼 따로 식량을 가져와 밥을 지어 먹지 않고 트레커, 가이드, 세르파들과 같은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또 한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키친보이를 하며 요리를 익히면 테이블 세팅을 담당하는 '부주방장'을 거쳐 주방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주방장을 거쳐야 세르파로 승진이 가능하다. 세르파가 되려면 반드시 주방부터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영어공부가 필수다. 키친보이 때는 영어를 몰라도 되지만 테이블 세팅을 담당하는 키친보이는 트레커들과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므로 영어를 할 줄 모르면 시키지 않는다. 요리를 익히고 트레커들과 가까이 접촉하고 세르파들과 함께 움직이며 노하우를 익힌 다음에 비로소 관리자급인 세르파 대열에 오른다. 그것이 주방팀이 단지 요리만 하지 않고 캠프에 도착하면 세르파들을 도와 텐트를 설치하는 까닭이다. 레이놀즈의 책에는 이들에 대한 설명이 잘 되어 있다.

히말라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캠핑 트레킹을 부드럽게 진행하는 스태프들의 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유용하다. 본국의 트레킹 회사를 대표하는 리더에게 전체적인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과 스태프들을 지휘를 하는 사람은 서다(Sirdar)이다.

서다는 현지 트레킹 여행사에서 고용하며 현지 여행사는 본국 여행사 또는 모험적인 여행사에서 고용한다. 서다는 주방요원들과 포터들의 '우두머리'를 뽑으며 트레킹 중 필요에 따라 인원을 고용하고 해고한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있는 곳이라면 리더와 상의하여 캠프사이트를 고르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도록 트레킹의 리듬을 지휘할 것이다.

트레킹에서 서다 바로 아래는 주방장이다. 보통 이 자리는 장래 서다가 될 목표를 가진 '고참' 세르파가 맡는다. 그는 보조요원으로 몇 명의 '키친보이'들을 둔다. 그리고 이 주방요원들이 트레킹에서 일을 가장 많이 한다. 그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긴 하루를 마친 후 코를 골고 있을 때까지 남은 일을 한다.

그 다음은 세르파들이다. 그는 에베레스트 산 아래 있는 솔루 쿰부에서 태어난 고산족인 세르파족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소문자 s로 표기하는 세르파들은 일반적으로 잡일을 한다. 그들은 가이드, 텐트설치, 캠프철거를 한다. 그들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지나치게 아부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고객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들을 존중해주고 그들의 우정을 즐겨라. 왜냐하면 그들과의 인간적 교류는 전체 여행에서 가장 좋은 경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포터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짐을 나르는 남자 또는 어떤 경우 여자 포터들을 단지 인간트럭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노동이 당신의 휴가를 가능하도록 만드는 노동전문가로 생각해야 한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면, 그리고 비록 당신이 그의 고향이나 가족에 대한 질문을 할만큼 충분한 네팔어를 모른다하더라도 감사의 미소와 "나마스테" 한 마디는 유대감을 줄 것이다. 그리고 트레킹을 마치고 당신은 그들에게 감사의 말과 함께 팁을 줄 기회를 갖는다(팁은 모든 스태프들에게 주며 그룹의 리더가 그 일을 한다). (Kev Reynolds, 앞의 책, pp> 26-27)

고참 세르파의 필수품 중 하나가 피켈(Pickel)이다. 피켈은  눈, 얼음 위에서 사용하는 괭이, 도끼, 지팡이의 세가지 기능을 갖춘 장비다. 매일 화장실 구덩이를 팔 때 필요하며 높은 고개를 넘을 때 얼어 있는 구간이 있으면 세르파는 전체 트레킹 팀이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얼음을 파 계단을 만든다. 세르파는 한 팀에 두어 명씩 있다.

우리팀은 가이드 타시가 앞장서고 밍마 세르파는 제일 뒤에 오는 사람을 수행하고 있다. 보통은 사진을 찍는 내가 제일 뒤에 쳐진다. 제일 앞에 가더라도 사진을 찍으려고 잠시 멈추면 뒤에서 따라오던 사람들이 모두 통과한다. 제일 뒤에 오던 밍마는 걸음을 멈추고 내가 출발할 때까지 기다린다. 어떤 때는 내가 밍마 세르파를 데리고 다니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앞 사람을 추월해 밍마를 넘겨주곤 한다.

P0004927.jpg11시 15분, 돌오두막이 한 채 있는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완만한 구릉이 내려와 펼쳐진 넓은 초지다. 오두막 조금 못미처 맑은 개울이 바닥에 그냥 흐르고 있다. 다람살라는 '순례자들의 휴식처'라는 뜻이다. 티베트 망명정부가 있는 인도의 다람살라도 그런 뜻이다. 라르키아 페디(Larkya Pedi), 레스트하우스(Resr House)라고도 한다. 이곳에 오기 전 쉴즈 부부가 찍은 다람살라 풍경 사진이 마음에 들었고 기대가 컸다.

실제로 전형적인 고산의 풍경이 있는 다람살라는 삼도에서 가는 도중의 풍광도 좋고 다람살라 풍광도 좋아 대만족이었다. 삼도에서 이곳까지 빠른 사람은 두 시간 30분, 웬만한 사람은 3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우리는 3시간 35분 걸렸다. 그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문제는 동포들의 상태가 지쳐 있다는 점이다. 보명화 보살님이 힘든지 오는 도중 동생이 배낭을 받아들었다.

무진행 보살님은 이틀 전 저녁 삼도에서 먹은 야크고기에 또 걸려 어제부터 음식을 잘 먹지 못해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다. 야채와 야크고기를 섞어 볶은 '야크볶음'을 먹고 다시 비위가 상한 것이다. 2002년 쿰부 트레킹 초반에 타미에서 야크 고기가 든 모모를 먹고 걸려 트레킹 내내 식욕부진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이 보살님은 야크와 전생에 원수가 졌는가 보다. 이 글을 쓰면서 당시 녹음(2002.11.22)을 들어보니 새삼스럽다.

나는 머리가 약간 띵하긴 해도 힘든 상태는 아니다. 나머지 사람들 중 몇 명은 두통 등 고소증상이 있다. 남형 씨는 어제 호기있게 찬물로 머리를 감은 것이 좋지 않았다. 어제는 컨디션이 좋아 머리를 감았지만 고산에서는 아무리 머리가 간지럽다 하더라도 머리를 감지 않아야 한다. 그렇긴 해도 천천히 오르는 이런 스케줄에 사라들이 헤매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고산원정대는 물론 트레킹 역시 대부분 5000m 이상을 오르는 일이라 고산병은 누구나 피할 수 없다. 무리한 운행을 하지 않고 천천히 오르는 것이 나의 트레킹 스타일이지만 그래도 고산병은 피할 수 없는 일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출국과 입국의 일정이 제한되어 있는 단체 패키지 팀의 경우 종종 무리한 일정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준비를 소홀히 한 사람들은 패키지를 따라갔다가 혼이 나곤 한다. 모든 것을 여행사에서 알아서 잘 해주겠거니 하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직장인들처럼 휴가기간이 제한되어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를 떠날 때까지 2-3일 여유를 두는 것이 좋다. 그리고 산에 들어가기 전 고산병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것은 장비 준비와 체력훈련 과 함께 반드시 숙지하고 있어야 할 중요한 일이다.

2004년 1월에 마나슬루 트레킹을 했던 한국의 한 팀은 사마가온을 출발, 삼도에서 점심 먹고 이곳 다람살라까지 하루만에 올라갔다. 3530m에서 4450m까지 920m를 하루에 올랐으니 무리한 일정이었다. 랑탕의 컁진(3900m)에서 키모슝리(4984m)까지는 1000m 이상 오르는 일이지만 문제가 안된다. 왜냐하면 꼭대기에 오른 후 바로 내려오기 때문이다. 또 그곳을 오르고 안오르는 것은 선택사항이므로 힘들면 도중에 그냥 내려온다 해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다.

그러나 다람살라는 내려오는 고개가 아니라 머무는 곳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5213m의 라르키아 라까지 763m를 더 올라가야 한다. 3500m 이상의 고산에서 이틀 동안 무려 1685m를 올리는 일이다. 이 팀은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 눈보라를 만나 조난의 위험에 처했다. 악전고투 끝에 천우신조로 모두 무사히 넘어왔지만 자칫 대형사고를 당할 뻔했다.

물론 이들이 고생한 것은 예상치 못했던 악천후 탓이 가장 크지만 고산병 때문에 몸이 지친 것도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도 다른 모든 팀처럼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을 가졌다. 그러나 다음날 삼도에서 멈추어야 하는 일을 간과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을 갖지 말고 삼도까지 오는 것이 고소적응에 더 낫다.

전문여행사들의 일정은 모두 사마가온에서 삼도까지만 운행한다. 아니면 일정을 조금 변경해 전날 시얄라(3500m)에서 운행을 멈추고 다음 날은 사마가온을 통과하여 삼도까지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고소적응일을 가진다. 이것은 전문가들의 오랜 경험을 토대로 짠 일정이다. '무리한 운행을 하지 않는 것'은 고산트레킹의 필수다. 내 생각으로는 한국의 이 팀은 마나슬루 트레킹 팀 중 삼도를 그냥 통과한 유일한 팀이 아닐까 생각된다.

12시 10분에 점심이 나왔다. 밀가루 빵과 소세지 그리고 야채가 나왔다. 모두들 입맛이 없어 먹는둥 마는둥 한다. 차라리 라면이 낫겠다 싶어 라면을 다시 끓여달라고 하니 라면과 누릉지가 든 음식가방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한다. 포터들도 각자 속도가 달라 일찍 온 포터도 있고 늦게 오는 포터도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텐트는 모두 도착해 설치하고 있는데 내 텐트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짐도 몇 개는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다.

제일 심한 사람은 보명화 보살님이다. 어제까지 말짱하던 양반이 갑자기 헤메고 있다. 이번 트레킹을 위해 하드트레이닝을 했다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단다. 작년 무스탕 트레킹 때 체력이 딸려 혼난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이번에는 작정하고 단련을 했다. 출발 전 가끔 전화로 "무스탕에서 체력도 안되는 사람들 때문에 제가 고생 좀 했지요."라고 놀리면 "어디 이번에는 누가 더 잘 가나 한 번 볼겁니다."라며 자신 만만하게 대답하곤 했다. 그만큼 열심히 관악산 등반으로 몸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보람이 없다.

잠시 후 음식가방이 도착해 주방에서 라면을 끓여왔다. 그러나 정작 먹고싶다던 사람은 국물 한모금 먹고는 더 이상 먹지 못하고 텐트로 들어가더니 곧 다시 나와 토하기 시작한다. 동생 남형 씨가 등을 두드려 준다. 그 장면을 보니 문득 <남매는 단 둘이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4일 전 사마가온에서 동생이 고소로 고생할 때 누나가 걱정했고, 오늘은 누나가 고소로 고생하니 동생이 걱정하고 있다.

구토까지 하여 걱정이 되지만 아직 시간이 있으니 몇 시간 고도에 적응되면 괜찮아지리라는 기대를 했다. 일단 모두 다이아목스를 복용했다. 두통이 심한 사람은 두통약을 먹었다. 늦은 오후까지 두고보다가 그래도 좋지 않으면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주방에 이야기 하여 여성동포들에게는 뜨거운 세숫물을 갖다주라고 했다. 이럴 땐 세수를 하고 손발을 씻고 물을 많이 마시며 누워 쉬는게 보약이다.

나도 땀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시원하게 씻고 싶었다. 칼스텐은 이곳에서 시원하게 흐르는 계류에 몸을 씻고 햇볕에 몸을 뎁히며 풍광을 즐겼다고 한다. 나도 그렇게 하려고 이 대목은 잊지 않고 기억에 잘 담아두었다. 그의 여행기는 간결하면서도 감성이 풍부하여 재미가 있다.

경작지를 지나 다람살라를 향해 천천히 오르니 마을은 점점 작아졌다. 나는 가끔 뒤로 돌아서서 마을에서 가졌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했다. 마을은 이제 아주 작아져 그 옆의 거대한 팡푸체와 비교가 되었다. 길은 숨어 있는 마나슬루 산괴로부터 내려온 모레인 위로 나 있다. 산괴 위로는 솟아 있는 바위벽은 너무 가팔라 눈조차 '오직' 능선과 정상에만 있다. 붉은 관목, 마니월 그리고 초르텐들이 풍경을 더욱 장엄하게 만들고 있다. 올라갈수록 더 많은 봉우리들이 나타났다. 가장 인상적인 봉우리는 처음 나타난 라르키야 피크로서 마나슬루의 두 봉우리를 압도한다.

아침 내내 풍경이 매혹적이다. 왼편에는 거대한 산들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작고' 메마른 언덕들이 있다. 캠프사이트에서 보는 풍광이 장엄하다. 다람살라까지 삼도에서 3시간 걸렸다. 짧은 운행은 고소적응과 오후의 '게으른 휴식'에 충분한 시간을 준다. 나는 계류에서 발을 �었다. 이미 얼어붙는 추위를 느끼고 있었으나 나는 계속해서 면도와 함께  '온몸�기'를 했다. 물가에 있는 얼음조각들이 나의 자부심을 증가시켰다. 햇볕은 뜨거�지만 산들바람은 그 뜨거움을 아주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햇볕 아래에서 몸을 다시 덥히자 멀리 아래에서 농무가 올라왔다. 기온은 빠르게 떨어졌다. 가장 편안한 곳은 뜨거운 물병이 발치에 있는 침낭이다. 내 몸은 잘 조절되어 있다. 밤에 춥지 않았다. 그리고 한시간 동안 글쓰기를 한 후 손가락을 만져보니 아주 차가워 놀랐다. 글 쓰는 동안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멍든 손은 이제 다 나았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바로 침낭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잠이 들기까지 보통 3분 걸리는데 오늘은 더 걸렸다. 아마 고도 때문이리라. 그날 밤 우리는 거의 유럽 최고봉 높이에서 잤다.(칼스텐 네벨, <2000 마나슬루 트레킹> day 15)

나도 칼스텐처럼 계류에서 세수도 하고 발도 씻고 가능하면 상반신이라도 냉수마찰을 하리라 생각했다. 햇볕에 뎁혀진 텐트 안은 따뜻했다. 그런데 런닝 차림으로 밖으로 나오자 사정없이 몰아치는 찬 바람에 도저히 씻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잘못해서 감기가 도지면 큰 일이다. 그래서 칼스텐은 젊은 친구여서 그런 모험이 가능했을 거라는 생각으로 위로를 하고 객기를 참았다. 대신 물수건으로 간단하게 몸을 닦았다.

카메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일 갈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갔다. 조금만 올랐는데 숨이 턱에 찬다. 내일은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하므로 지금 이곳을 오르지 않으면 풍광을 감상할 기회가 없다. 다른 사람들은 절대 오를 생각이 없으니 "잘 다녀오세요."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볼 수 있듯이 높은 언덕에 올라 전체 풍광을 조망하는 맛은 상쾌하다. 삼도 쪽의 팡푸치가 깨끗하게 보인다. 트레커들은 캠프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스태프들은 땡볕 아래에서 오늘도 열심히 카드를 치고 있다.

생각같아서는 맞은 편 오두막 뒤쪽 능선으로 올라가고 싶다. 그곳에 오르면 남쪽으로 마나슬루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라르키아 라가 보인다고 한다. 동쪽의 팡푸치는 여기서도 잘 보이니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빤히 보이는 그곳까지 두 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몸이 자신 없다고 더 이상 오르기를 거부한다. 돌아와 생각하면 "기왕에 간 거 거기까지 올라갔다 왔으면 좋았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 항상 남지만 실제로 그곳에서는 힘든 상태라 오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이 현실과 상상의 차이다.

오늘 이곳에는 우리 팀만 있어 한가하다. 어제는 우리팀만 뺀 나머지 팀들이 모두 올라왔으니 무척 붐볐을 것이다. 우리 팀만 9동의 텐트를 치는데 30명의 트레커들이 왔다면 얼마나 복잡했을지는 안보고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마 텐트 칠 자리도 잡기 힘들었을 것 같다. 이런 곳에서는 한가한 풍경이 제일 좋다. 결과론이지만 삼도에서 하루 더 머문 것이 아주 잘 된 일이 되었다.

늦은 오후가 되자 연무가 몰려와 천지사방이 어두워졌다. 기온은 급강하한다. "띨레리"의 소리를 듣고 모두 식당텐트에 모여 차를 마시며 내일의 일정을 살펴본다. 보명화 보살님은 아직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나타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 때가 되니 은근히 걱정이 된다. 따로 누릉지를 끓이라고 하고 남형 씨에게 가 보라고 했다. 다행히 잠시 후 조금 회복된 모습으로 나타나 한숨을 돌렸다.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내일은 이번 트레킹의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이제는 왔던 길로 돌아가는 일이 더 힘들기 때문에 웬만하면 넘는 것이 좋다. 5213m의 고개를 넘는 일이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여행기를 보면 한국팀들은 모두 죽을 고생을 하면서 넘었지만 서양팀들은 모두 어렵지 않게 넘고 있다. 2000년 라르키아 라를 넘은 칼스텐은 "평범한 운행일"이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역시 2000년 11월 이곳을 지나간 쉴즈 부부 일행은 오전 5시에 출발하여 9시 고개에 도착하여 1시간 동안 놀다가 내려갔다고 한다. 2004년의 밥이나 2005년 중늙은이 남자 네 명이 한 팀이 되어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의 글에도 특별히 어렵다는 말이 없다.

쉴즈부부팀이 4시간 걸렸다니 우리는 5시간이면 충분히 고개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도 그들처럼 4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5시에 출발하려고 생각했다. 그런 일정을 타시에게 말하니 적어도 4시에는 출발하자고 한다. 그 이유는 포터들이 선글라스가 없어 설사면에 햇빛의 반사가 심해지기 전에 고개를 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정을 조정해 내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4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모두 미리 아이젠을 잘 챙겨 배낭에 넣어두라고 말했다. 스패츠는 현재 눈이 굳은 상태라 굳이 착용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타시가 말해서 그대로 카고백에 두었다. 라르키아 라를 넘은 다른 사람들의 여행기를 읽어주며 별로 힘들지 않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고소만 아니면 라라키아 라를 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무진행 보살님은 제일 연장자이기는 하지만 5년 전 5420m의 촐라패스를 넘은 경험이 있으니 걱정이 덜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아직 5000m를 넘어본 사람이 없다. 두 사람은 아예 히말라야 자체가 초행이다. 그러나 선행자들의 "평범하다"는 기록이 모든 근심을 잠재웠다. 더구나 몇 달 전 봄에는 비록 고생은 많이 했지만 한국의 74세의 할머니가 눈밭에 빠져가며 넘었다는 사실은 은연 중 자극이 되어 분발심을 일으켰다. 문제는 식욕부진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체력이다.

한 밤 중 화장실을 가기 위해 텐트 밖으로 나오니 안개는 다 사라지고 적막강산에 밝은 달빛이 가득하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음력 9월 보름이다. 4450m의 고지에서 보는 보름달은 너무나 황홀하다. 내 생애 이렇게 높은 곳에서 다시 또 보름달을 볼 기회가 있을까? 얼마나 밝은지 달이 아니라 해의 사촌동생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어제 밤 삼도의 밝은 달을 바라보며 보명화 보살님이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아, 달이 너무 밝아. 문글라스(moon glass)가 필요 해!"

오늘 밤은 더욱 문글라스가 필요한 밤이다.
 

trek 13. 삼도 - 다람살라  (top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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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를 향해 출발. 얼마 후 언덕에서 삼도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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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에서 다람살라 가는 오늘 일정은 고산트레킹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구간이다. 모레인과 설산과 융단처럼 펼쳐져 있는 초지가 어울려 멋진 풍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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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휴식. 4000m를 넘어서자 동포들이 힘들어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늘 일정은 길지 않으니 쉬엄쉬엄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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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모습의 마나슬루 노스와 빙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풍광을 가까이에서 보며 걷는 네팔 히말라야 트레킹은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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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 노스를 마주하며 운행 중인 트레커들. 산허리길은 중간중간 작은 계류가 여러 개 있다. 불모지에 가까운 곳인데 어디서 물이 흘러나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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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만한 산비탈 허리길을 따라 계속 코너를 도는 운행이다. 출발한지 2시간 35분이 지난 10시 15분, 왼편 아래로 바북의 무너진 돌집들이 보였다. 바북은 라르키아 바자르라고도 하며 티베트와 네팔의 계절적 교역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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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마나슬루 북면도 보이기 시작한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다. 지친 보명화 보살님의 배낭은 동생 남형씨가 받아 앞에 매고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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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무진행 보살님의 배낭도 밍마 세르파가 대신 지고 갔다. 두 사람은 그래서 맨 몸이다. 그림은 좋지만 당사자들은 힘들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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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고개에서 뒤를 돌아보니 바북이 안온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앞쪽으로는 오늘의 목적지 다람살라가 개미만하게 보인다. 그 너머가 라르키아 가는 길이다. 반팔로 누워 있는 친구는 세르파 보조인 겔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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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으로 당겨 본 다람살라 돌오두막. 그곳 오른편 설산은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는 산이다. 고개에서 본 마나슬루와 정상 구름의 모습이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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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출발하고 포터들은 남았다. 뒤쪽으로 보이는 팡푸치가 우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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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마나슬루 모습을 보며 운행을 계속하여 11시 15분, '순례자들의 휴식처'라는 뜻의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4450m의 고도라 바람이 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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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도착하여 스태프들이 텐트를 치는 동안 점심을 기다리고 있다. 고소와 체력저하로 모두 피곤한 상태지만 주변 풍광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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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람살라에서 보는 팡푸치는 6335m가 훨씬 넘어보인다. 점심 먹고 앞 쪽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 보았다. 스태프들은 카드를 하고 트레커들은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다. 피곤한 상태라 아무도 더 이상 올라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두막 뒤쪽 능선을 오르면 멋진 풍광을 볼 수 있지만 아무도 그곳에 오를 생각이 없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숨이 차는 고도다. 보기에는 가까워 보이지만 그곳까지는 두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순례자들의 휴식처 다람살라


고도적응과 고산병(AMS-급성 산악병)

3000m 이상 되는 곳을 트레킹 또는 등반하는데 있어서 고도가 몸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희박한 공기는 당신에게 여러 가지 영향을 준다. 만일 당신이 너무 빨리 올라가면 죽을 수도 있다. 어떤 것을 하지 않아야 하는지 다음을 꼭 읽어라!

보통 고산병이라고 하는 이것은 2500m 이상부터 모든 트레커들에게 잠재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당신의 몸은 공기 중의 산소가 적어지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5500m에서는 공기의 압력이 해수면에 비해 거의 반밖에 되지 않아 산소(그리고 질소)도 반밖에 되지 않는다. 이 높이는 에베레스트 지역의 칼라파타의 정상과 안나푸르나 라운딩의 토롱라와 거의 같은 높이다.

 

트레커들에게 3000m 이하의 고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산병은 높은 지역을 너무 빨리 오르기 때문에 생기며 모든 증상을 무시한다면 치명적일 수도 있다. 높은 고도에 이르렀을 때 고산병이 문제가 되는 것은 높이 때문이 아니라 속도 때문이다.

 

고산병은 막을 수 있다. 천천히 올라 가라. 당신의 몸에 적응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라. 대다수의 트레커들에게 해당되는 '안전'한 속도가 있다. 2000m에서 3000m 사이에서 더 높이 오르기 전 2일 내지 3일을 보내라. 3000m 부터는 하루에 300m 정도 오른 지점에서 잠을 자라. 매 1000m 오를 때마다 하루를 쉬어라. 결국 증상을 아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오직 증상이 상대적으로 감소할 때만 올라 가라.

일반적인 증상

3000m 이상의 고도에서 느낌이 완전하기를 바라지 말라. 당신에게 예상되는 일반적인 고산병의 증상이 있다. 그러나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 증상은 아무리 천천히 오른다 하더라도 모든 트레커들이 일부 또는 모두를 경험한다. (이 정보는 제이미 맥기네스가 쓴 Trailblazer사의 제 3판에서 가져온 것임)

수면시간 -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수면시간. 종종 10시간 또는 그 이상

식욕감퇴

생생하고 거친 꿈 - 2500m-3800m 정도에서

밤과 낮의 예상치 못한 순간적인 �은 호흡곤란. 가끔 당신을 깨우는 정기적인 호흡곤란 - 다이아목스 복용을 고려하라.

트레킹 중 자주 호흡을 안정/조절할 필요성을 느낌 - 특히 4000m 이상에서.

당신의 코가 하루종일 콧물공장으로 변함

소변량 증가 - 많은 트레커들이 밤중에 한번은 가야 한다(당신의 몸이 고도에 적응하고 있는 좋은 표시다 : 고쿄에서 카나다에서 온 Sean은 하루에 18번 소변을 본 기록이 있다).

가벼운 증상

당신의 증상이 아래 증상 모두가 아니라 단 한가지에 해당된다 하더라도 고산병에 걸린 것이다.

두통 - 트레커들에게 흔하다. 종종 두통이 저녁에 찾아와 항상 밤에는 더 심해진다. 잠 자기 전 머리와 어깨를 들어올리면 어떤 때는 부분적으로 완화된다. 상태가 심하면 진통제(아스피린, 타이레놀 등)를 먹을 수 있다. 절대 수면제를 먹지 말라. 또한 다이아목스를 먹어도 된다. 아래를 보라. 두통의 원인은 여러 가지(예를들면 탈수)이지만 점점 심해지면 고산병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매스꺼움 - 이것은 다른 증상없이 일어난다. 그러나 자주 두통을 동반한다. 만일 아침에 좀 나아지면 하루 쉬어라. 여전히 아프면 내려가라.

현기증(가벼운) - 트레킹 도중 현기증이 나면 햇볕을 피해 쉬고 물을 마셔라. 가장 가까운 티하우스에 머물러라.

식욕부진 또는 일반적인 나쁜 느낌   - 보통 높은 고도를 너무 빨리 오르면 나타난다.

고통스러운 기침 또는 마른 기침

다시 말해서 설사와 목이 아픈 것 외 모든 것이 고산병일 수 있다. 이것을 생각하라. 만일 당신이 탈수로 인해 두통이 생겼다면 계속 올라가도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만일 고산병 때문이라면 결과는 매우 심각할 수 있다.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 당신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조심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자신을 속이려 하지말고 당신의 몸이 더 많은 적응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여라.

기본 규칙

가벼운 증상이라도 절대로 더 이상 오르지 말라.

만일 당신이 트레킹 도중 가벼운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느낀다면 트레킹을 멈추고 머리를 그늘에 두고 물을 마셔라. 증상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으면 그 고도에서 머물러라. 만일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면 내려가라. 고도를 조금만 낮추어도(100-300m) 느낌과 수면에 큰 차이가 있다. 당신의 기분이 괜찮았던 가장 최근의 지점까지 내려가라.

만일 증상이 아주 빠르게 나빠지지 않는 한 밤에 심해지더라도 증상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고 아침에는 기분이 어떤지 살펴보라. 만일 아침 먹은 후까지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하루 쉬든지 아니면 내려가라. 증상이 사라졌다면 하루를 쉬든지 아니면 무리가 되지 않는 일정을 고려하라.

쉬지 않고 계속 오르면 증상이 심해진다. 고산병은 증상이 가벼울 때 높이 오르면 반항하여 확실하게 악화될 것이다. 당신의 트레킹을 즐기면서 하라. 아픔을 느끼면서 하지 말라. 높은 고도에 도착했을 때 증상이 늦게 오기도 한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고지대에 도착한 첫날보다 둘째날에 가벼운 증상으로 고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심한 증상

계속되는 심한 두통

계속되는 구역질

비틀거림 - 균형을 잃어 똑바로 걷지 못함. 술에 취한 것처럼 보임

의식불명 - 깨어있지 못하거나 상황을 잘 알지 못함

폐에서 액체소리가 남

끊임없이 계속되는 기침

호흡이 아주 어려움

빠른 호흡 또는 쉴 때 호흡정지의 느낌

피, 핑크빛 액체 또는 많은 양의 맑은 액체를 동반한 기침

얼굴과  입술에 명백하게 핏기가 없음

아주 빠른 심장박동 - 1분에 120 이상 

심한 혼수상태, 졸림

겨벼운 증상의 빠른 악화

비틀거림은 가벼운 증상이 심한 증상으로 변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표시이다. 이것은 직선을 발뒤꿈치를 든 채 걷게하는 것으로 쉽게 테스트 할 수 있다. 증상이 없는 사람과 비교해 보라. 24시간이 지난 후에야 혼수상태에 이르는 비틀거림이 따라올 수도 있다. 내려가지 않는 한 죽음이 뒤따를 것이다.

기본 규칙

심한 증상이 오면 즉시 그리고 빠르게 내려가라.

설사 한밤중이라 하더라도 가능한한 멀리 내려가라(에베레스트 지역 : 만일 당신이 페리체 위에 있다면 그곳에 있는 HRA-히말라야 구조협회-로 가라. 토롱페디 혹은 그 근방 : 마낭에 있는 HRA로 가라). 환자는 여러 사람들 또는 포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그녀)의 상태는 좋아지기 전에 더 나빠질 것이다. 휴식을 취한 후 환자는 의사에게 가야 한다. 심한 증상의 사람은 스스로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느낌이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좋지 않다.

의학적 상태

뇌수종(HACE) - 이것은 뇌주위로 액체가 모이는 것이다. 이것의 원인은 가벼운 증상의 첫 4개와 심한 증상들 때문이다.

폐수종(HAPE) - 이것은 폐주위로 액체가 모이는 것이다. 당신이 물고기가 아닌 한 이것은 심각하다. 원인은 나머지 가벼운 증상과 심한 증상들 때문이다.

주기적인 기침 - 높은 고도는 신체의 호흡 매카니즘에 영향을 미친다. 쉬거나 잠을 잘 때 당신의 몸은 갑자기 깊은 숨을 쉬어 회복할 지점에 이를 때까지 호흡을 점점 더 줄일 필요를 느낀다. 이 주기는 당신이 숨을 완전하게 쉬는 것을 놓치게 되면, 점진적인 주기로 바뀌기 위해 몇 분 동안 서서히 호흡이 길어져 단순하고 규칙적인 호흡으로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이 잠을 자는 동안 그것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것은 대부분의 트레커들이 남체에서 겪는 일이다. 5000m에서는 비록 그들 중 몇몇에게만 문제를 일으키기는 해도 모든 트레커들이 그것을 경험한다. 연구는 이것이 직접 고산병과 관계 없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손발, 얼굴과 아랫배의 부종 - 반지를 빼라. 히말라야구조협회의 한 연구에 따르면 보통 심하지는 않지만 18%의 트레커들에게 부종이 일어난다고 한다. 여성들은 확실히 더 예민하다. 붓는 것이 심하지 않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으므로 계속 올라가도 좋다.

고산 면역성 감소 - 베이스캠프에서는 상처와 감염의 치유력이 아주 느리므로 심각한 감염이 있으면 남체 정도의 고도로 내려 가야 한다. 치유가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아직 잘 모른다.

약품-다이아목스(Diamox)

이 약은 가벼운 이뇨제(소변량을 늘인다)로 호흡에 자극을 주는 피를 산화시킨다. 당신이 아주 급하게 오르거나, 피할 수 없거나(예:라싸로 비행기로 가거나 구조활동에 참여할 때) 혹은 이전에 높은 고도에서 고산병으로 문제가 된 적이 없는 한 고산병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먹을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현재 몇몇 의사들은 심각한 고산병을 겪는 경우를 감소시킨다는 논리로 3500m 이상 올라가는 트레커들은 먹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위험부담을 줄인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아직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다이아목스는 설파제 약품으로 이런 류의 약품에 알레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먹지 말아야 한다. 신장(콩팥)에 문제가 있는 사람도 먹지 말아야 한다(그것은 또한 맥주와 청량음료의 맛도 떨어뜨린다). 부작용은 소변량이 많아지고 입술과 손가락 또는 발가락이 저리는 것이지만 이런 증상이 약물복용을 멈추라는 표시는 아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가벼운 증상이었지만 괴로웠던 경험, 특히 주기적인 호흡곤란으로 잠을 설친 경험이 있다면 다이아목스를 준비하고 있다가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용법은 125mg에서 250mg(반알에서 한알)을 매 12시간마다 먹는다.

다이아목스는 실제로 문제의 뿌리를 해소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만일 약의 복용으로 느낌이 좋아졌다면 건강도 좋아진 것이다. 이 약은 단순히 문제를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말은 당신이 보통 이상의 속도로 빨리 올라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며 고산병의 증상을 무시하라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이아목스를 복용하는 중에도 여전히 고산병이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

가장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오르기 전 복용하는 것를 권장하고 있음을 주의하라. 이것은 필요한 일은 아니지만 도움을 준다.

고산병의 실제

고도적응의 속도

고도적응에 대한 개인차는 모두 다르지만 아주 급하게 올라가 그곳에 머물면 항상 문제가 생긴다. 세르파족이라 하더라도 카트만두에서 사는 세르파사람은 쿰부에서 종종 고산병에 걸린다. 연구에 의하면 중간 정도의 고도(1000-2000m)에 사는 사람은 그런 고도에 적응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3000m 정도의 고도(예: 남체)에 오를 때 고산병에 예민하지 않다.

그렇지만 한번 높이 오르면 그런 이점은 감소하고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고도적응 프로그램을 따라야 한다. 이것은 카트만두에서 일주일 혹은 2주일을 보내는 사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들은 그 고도에 점점 적응을 하게 된다.

트레커들은 해수면 고도에서 카트만두로 날아와 바로 남체까지 걸어 올라가기 때문에 아무런 이점이 없고 고산병에 고통받기가 더 쉽다. 불행하게도 이들은 보통 높이 올라가기에 급하다. 이것이 바로 단체 트레커들이 지리에서부터 걸어 올라 오거나 카트만두에서 시간을 보낸 개인 트레커들 보다 고산병에 더 민감한 이유이다.

고도적응의 과정

시간이 지나면 당신의 몸은 산소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재빨리 깨닫고 먼저 호흡을 빠르게 하는 반응을 보인다. 이것은 더 많은 산소(O2)를 들이키지만 더 많은 이산화탄소(CO2) 역시 배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의 산소와 이산화탄소의 불균형은 혈중 PH농도를 바뀌게 한다.

당신의 몸은 PH 농도(주로 혈액 속에 용해되어 있는 이산화탄소)에 따라 얼마나 깊은 호흡을 할 것인가를 결정한다. 해수면 고도에서 아주 많은 힘을 썼다는 것은 당신의 근육이 많은 이산화탄소를 생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호흡은 어렵고 빨라진다. 휴식을 취하면 에너지 소비가 적기 때문에 이산화탄소의 생산도 적어져 당신의 호흡도 가늘어진다.

고도가 높은 지대에서 이런 균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신의 몸이 종종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호흡이 더 적게 필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며칠이 지나면 당신의 몸은 소변에 들어 있는 중탄산염(물 속에 있는 이산화탄소)의 보정하는 성질에 의해 이러한 불균형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많은 양의 물을 마시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중탄산염은 용해가 잘 되지않기 때문이다.

다이아목스는 콩팥이 이러한 일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도록 돕는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고도적응의 능력을 강화시킨다. 게다가 하루나 이틀이 지난 후 몸은 헤모글로빈 응축을 효과적으로 증가시키기 위해 얼마간의 용액을 혈액 밖으로 이동시킨다.  4,5일 후 보통 때보다 더 많은 적혈구가 새로 형성된다.

개별적인 고도적응의 속도는 본질적으로 당신의 몸이 변경된 혈중 PH 농도를 보정하는 작업을 얼마나 빠르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미 효과에 잘 적응이 되어 종종 주목을 끌지 못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천천히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다이아목스는 유쾌한 출발을 하게 한다.

만일 당신이 여러 주 동안 고산에서 지낸다면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근육의 미토콘드리아(근육에서 에너지를 변하게 함)가 증가하고 조밀한 모세관 조직도 발달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당신의 최대 작업률도 천천히 증가하게 된다. 원정대들은 종종 흥미로운 결과를 도출한 의학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베이스캠프에서 주기적인 호흡곤란(대다수)을 경험한 등반가들은 결코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며 그들의 보통 체중을 유지하는데 아주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근육은 강해지고 지구력은 증가하지만 근육 자체가 증가한 것은 아니다. 고산지대에 상주하는 세르파족들은 결코 주기적인 호흡곤란을 겪지 않으며 실제로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여 체중을 유지할 수 있다.

고도적응은 얼마나 지속될까?

그것은 다양하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고산지대에서 한달 혹은 그 이상 머물렀어도 작업능률의 개선이 여러 주 동안 계속된다면 당신은 여전히 고도적응이 필요하다. 만일 며칠 내로 해수면 고도로 돌아올 예정이라면 여전히 보통 속도 이상의 빠른 속도로 올라가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폐수종에 걸릴 위험이 있다.

만일 당신이 5000m 고도에 도달한 후 며칠 내 3500m로 내려왔다면, 다시 5000m를 빠르게 다녀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를들어 로부제를 거쳐 칼라 파타를 오른 후 남체로 돌아와 이틀을 쉰다면 아무 문제없이 고쿄를 빠르게 올라갈 수 있다.

해수면 고도와 비교하여 고도에 따른 산소량과 적혈구의 산소침윤 상태

고도

산소 %

산소침윤( %)

해수면

100%

 

1000m

88%

99%

2500m

73%

 

3000m

68%

 

3500m

64%

93%

4000m

60%

 

4500m

57%

88%

5000m

53%

 

5500m

50%

80%

6000m

47%

 

6500m

44%

75%

7000m

41%

 

8000m

36%

 

8848m

33%

 


고산지대에서의 잠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잠을 자는데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매일 바뀌는 환경에서는 더 그렇다. 고도는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산소량의 감소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거친 꿈을 꾼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주로 3000m 정도의 높이에서 일어난다. 이와 함께 몇몇 사람은 두통, 욕지기, 화장실 애용, 코골음, 그리고 호흡곤란을 동반한다.

큰 기숙사형 방에서는 속담에 나오는 통나무(혹은 아주 피곤한 트레커들)처럼 자는 사람은  그날 밤 일어나는 모든 일을 무시하게 된다. 작은 방은 확실히 개선된 것이며 텐트는 방음이 안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처리 될 것이다.

식욕

다소간의 사람들이 식욕을 잃고 먹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비록 좋은 징후이기는 해도 어떤 때는 식욕이 과다하여 걱정을 끼친다. 당신의 에너지 소비량은 쉬는 동안이라고 해도 보통 때보다 현저하게 증가한다. 왜냐하면 신체는 끊임없는 추위에 맞서  열을 내기 때문이다. 특히 잠을 잘 때 더 그렇다. 원기왕성한 트레커는 아무리 많이 먹는다 해도 종종 엄청나게 소비된 에너지를 원래대로 보충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루의 일정과 해야할 일

일반적으로 권장되는 사항은 낮에는 높이 올라가고 밤에는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자라는 것이다. 수면고도는 가장 중요하다. 어쨋든 트레커들이 고산병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며 아마 고소적응에 도움을 줄 것이다. 에베레스트 지역의 예를들면 딩보체나 페리체에서 추쿵을 올라가거나 아니면 남체에서 타미를 방문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만일 당신이 현재 가벼운 혹은 아주 가벼운 고산병 증상이 있다면 이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그보다도 당신의 몸이 이미 심한 고산병을 겪고 있다면 더 높은 고도를 올라가는 추가적인 일이 필요없으며 차라리 현재의 고도에 머무르는 것이 좋다.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것보다는 가벼운 운동을 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쉬는 날에 하라. 만일 당신이 가벼운 고산병으로 고생하고 있다면 몇 시간 내려가는 것이 더 이롭다. 예를 들어 보자.

두 친구와 그룹을 만들어 아일랜드 피크/임자체를 등반할 예정인 피터는 먼저 고소적응을 위해 칼라파타에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페리체에서 가벼운 고산병을 느껴 현명하게 혼자 그곳에서 며칠 머물기로 했다. 그의 친구들이 돌아왔을 때 그는 나아지기는 했어도 여전히 100% 회복이 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들 모두는 추쿵으로 갔고 그곳에서 피터는 고산병이 심해져 절망에 빠졌다.

베이스캠프까지는 하루면 가능한 코스였으므로 그는 다이아목스 복용과는 별도로 모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딩보체로 가서 점심을 먹으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딩보체에 도착했을 때 즉시 상태가 좋아져 점심을 먹고 다리 아래까지 내려가 오후늦게까지 보내는 좋은 방법을 썼다. 피터는 그날 아주 늦게 추쿵으로 돌아왔지만 루클라 이후 가장 편한 잠을 잤다. 그리고 다음날 밤 베이스캠프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비행기로 친구 한사람과 함께 루클라에 온 다음날 남체에 도착한 힐버트는 바로 두통과 현기증 그리고 식욕감퇴가 심해졌다. 다음날에도 증세가 나아지지 않았고 3일째날 아침까지 잠을 못자 아주 걱정스런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날 스위스 다리 바로 아래에 있는 두드코시 강의 아래까지 내려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그와 그의 친구는 고쿄까지 천천히 트레킹을 했다. 힐버트는 여전히 수면장애가 계속되어 고쿄에서 두 번째 밤까지 다이아목스를 먹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상태가 양호해져 더 이상 복용하지 않았다. ( 출처: <트렉인포(trekinfo.com)>, 번역 buddhaeye)

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3,680m

3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 티베트 국경 방문

4,2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20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티베트 국경으로 소풍가다

2007. 10. 24(수)


 

캠프장이 초지에 있는 탓에 어젯밤 야크와 말들의 움직이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녀석들끼리 알력이 있는지 "푸르르~" 콧김을 불며 투닥거리는 소리가 자주 난다. 설마 텐트로 밀고 들어오지는 않을테지만 뛰어다닐 때마다 땅이 울리니 깊은 잠을 자지 못하겠다. 밤 12시에 녀석들의 소란에 잠이 깨어 텐트 안 온도를 보니 영상 1도다. 곧 다시 잠이 들었다.

CIMG0905.jpg오늘은 티베트 국경쪽으로 하이킹을 다녀오는 날이다. 보통은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을 가지면 삼도는 다음날 바로 다람살라로 떠난다. 아니면 사마가온 대신 삼도에서 고소적응일을 가진다. 처음부터 사마가온은 물론 삼도에서도 하루 더 머무는 일정을 짜는 팀도 적지 않다. 그것은 삼도에서는 티베트 국경으로 가는 하이킹이 풍광도 좋고 고소적응을 확실하게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잇점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원래 삼도에서 바로 다람살라로 가는 일정이었지만 오는 도중 일정이 변경되면서 하루 더 여유가 생겼다. 삼도에서 바로 다람살라로 가는 일정을 택하면 여행이 하루가 단축된다. 만일 그 하루를 내려가는 일정에 보탠다면 하산길 운행은 한결 여유가 있다. 그러나 내려가는 길은 안나푸르나 라운딩길과 겹치는 길이라 복잡하다. 또 히말라야 설산을 벗어난 중산간 지방은 특별한 매력이 없다. 전체 일정을 하루 단축할 경우를 택하지 않은 이유는 이미 앞 장(trek.1)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어제 도착했을 때 삼도에 말이 많이 보이길래 저녁 식사 때 타시에게 말을 한 번 알아보라고 했다. 기왕에 가는 소풍길이니 말을 타고 가는 조랑말 여행(pony trekking)도 나쁘지 않다. 말들도 무스탕에서 보던 말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건장하다. 말 이야기에 제일 얼굴이 밝아지는 사람은 보명화 보살이었다. 무스탕에서 말타는 데  재미를 붙인데다 지금 몸이 약간 지친 상태라 기대가 큰 모습이다. 말을 타보지 않은 사람들은 '과연 내가 말을 잘 탈 수 있을까?'하는 표정이다.

오늘 아침 타시가 보고하는데 말 한 필당 하루 4000루삐를 달라고 해서 조랑말 여행은 무산되고 말았다. 4000루삐면 우리 돈 6만원이다. 무스탕 지역이 1100루삐이니 비싸도 많이 비싸다. 이 지방 마을발전위원회(VDC)에서 정한 정찰가격이므로 흥정의 여지가 없다. 그것을 어기면 벌칙이 내려지기 때문에 주민들도 어기지 못한다.

그 가격은 여기서 문제가 생긴 트레커들의 후송을 위해 말을 빌릴 때 가격이다. 2002년 쿰부의 텡보체(3860m) 아래 계곡 마을인  푼기텡가(3250m)의 롯지 앞에는 "텡보체까지 말을 타고 가는데 편도 50달러"라는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다.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그 코스의 가격 비한다면 하루종일 66불은 비싼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상시도 아닌 지금 그 정도 돈을 들여서까지 말을 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옵션이라 자기들 호주머니에서 지불해야 하는동포들도 실망스럽지만 동의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을 타지 않았기 때문에 라운딩 코스를 돌 수 있어서 멋진 설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말을 탔더라면 갔던 길로 돌아오는 단조로운 일정이되었을 것이다.

짐을 싸지 않아도 되는 날은 여유가 있다. 아침밥은 라면에 밥을 말아 먹었다. 8시경 출발. 주방에서 점심으로는 도시락을 준비해 키친보이 푸르바가 보온병과 함께 들고 따라나섰다. 다람살라로 가는 다른 팀들은 캠프를 철수하고 있다.아직은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팡푸치에 햇살이 가려 춥다. 그늘을 걷다가 손이 제법 시려 얇은 장갑을 끼고 나온 것을 후회했다. 오늘은 고소장갑을 끼고 출발하는 것이 좋았다. manaslu_google_map_d12.jpg

삼도에서 티베트로 가는 고개는 네 개 있다. 동북쪽 팡푸치 옆 계곡으로 가는 길은 마을 동쪽 계곡을 따라 가고 나머지 세 길은 북쪽 계곡을 따라 올라간다. 우리는 라운딩 코스가 있는 북쪽 계곡을 택했는데 마나슬루를 볼 수 있는 동북쪽 계곡 왕복도 괜찮을 것 같다. 두 코스 중 하나만 갈 수 있으니 선택은 알아서 할 일이다.

야크들이 풀을 뜯고 있는 산비탈 길을 지나 부리 간다키 강바닥으로 내려가니 넓은 경작지가 있다. 어제 뒷동산에서 보았던 풍경의 직접 대면이다. 마니월을 지나고 강을 건너 조금 올랐다. 곧 오른쪽으로 길이 하나 갈라진다. 티베트로 가는 길이다. 다람살라는 직진길이다. 앞에 가던 다른 팀의 포터들과 트레커들은 직진을 한다. 우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언덕을 올랐다. 언덕에 올라 가쁜 숨을 고르며 돌아보니 멀리 삼도 마을이 햇살 아래 아침 연기를 뿜고 있다.

계속 북진하여 9시 경 돌무지가 있는 산비탈 초지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뒤돌아보니 계곡이 아득하고 히말출리와 보우다까지 잘 보인다. 햇볕이 따뜻한 완만한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진다. 이미 4000m를 넘은 터라 사방이 고산 불모지의 황량한 풍경이다. 인적이라고는 오직 수 백년 동안 사람들이 다니고 있는 길과 중간 중간 초지에 허물어져 있는 돌집 뿐이다.

멀리 뒤쪽으로 전개되어 있는 설산과 아래쪽 계곡의 물 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이런 풍경은 태고의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롯지 트레킹에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풍경이다. 쿰부 트레킹에서는 촐라패스 넘는 길과 추쿵에서 임자체 베이스캠프 가는 길, 랑탕에서는 컁진에서 랑시샤 카르카 가는 길, 그리고 안나푸르나 라운딩에서는 틸리초 호수 가는 길에서나 이런 맛을 볼 수 있다.

12_Himalaya_Marmot.jpg30분 후 허물어진 돌집이 몇 개 있는 초지에 도착했다.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설산의 연봉이 뒤쪽으로 보이고 큰 바위 옆에는 티베트로 갈 예정인 목재들이 다발로 묶여 세워져 있다. 타시가 왼편 초지를 가리킨다. 멀리 산비탈 초지에 굼실거리며 움직이는 동물이 두 마리 보인다. Manaslu_0932-2.jpgNGC(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TV에서 보았던 히말라야 마못(Himalayan Marmot)이다. 히말라야 마못은 네팔과 인도 그리고 티베트 고산지대에 살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서식하는 동물 중 하나로 4000~5500m 사이에 살고 있는 쥐과에 속하는 설치류다.

갑자기 방울 소리가 뒤에서 들려와 돌아보니 두 사나이가 말을 타고 오고 있다. 티베트로 가는 중이다. 인사를 나누며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우리도 저렇게 타고 갈 수 있는데....우리를 보자 신이 난 듯한 사나이는 말을 재촉해 빠르게 달려 나간다. 우리는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갔다.

10시 30분, 나무로 만든 다리를 건너고 그곳에서 20분 더 오르다 안온한 분위기의 초지가 있는 모레인 지대  멈추었다. 점심을 먹기위해서다. 오늘 티베트 국경까지 가지는 않고 점심 먹고 돌아오는 일정이다. 국경까지 걸어서 가는 것은 하루 종일 걸리기 때문에 무리다. 소풍은 가벼운 것이 좋다. 꿀을 곁들인 티베트빵과 삶은 달걀과 야크치즈가 점심으로 나왔다. 차는 홍차를 가지고 왔다.

점심을 마치고 황량한 풍광을 즐기다가 11시 30분 일어났다. 돌아가는 길은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건너편 삼도 마을 뒤쪽 산허리길로 가기로 했다. 왔던 길로 되돌아 가는 것은 싱겁다. 강바닥으로 내려가니 따로 길은 없다. 일단 강을 건너야 하는데 좁은 강폭이지만 신발을 벗지 않으면 안되었다. 빙하수 상류의 물이 얼마나 찰지 생각만해도 오싹하다. 무스탕에서 두 번 건넌 경험이 있다. 그 때는 비교적 하류쪽인데도 발이 어는 듯햇다. 이곳은 최상류, 빙하에서 바로 내려오는 물이다.

'과연 이 차가운 물을 신발 벗고 건널만한 가치가 있을까, 차라리 되돌아 갈까?' 갈등하고 있는데 이리저리 건널 곳을 찾던 타시가 한 곳에서 신발을 벗고 한 번 건너보더니 돌아와 우리에게 업히라고 한다. 자기가 업어 건네 주겠단다. 혼자 스틱 짚고 건너기도 쉽지 않은 물길을 업히라고 하니 의구심이 들었지만 타시는 자신 있게 말한다. 그래서 모두 타시의 도움을 받아 물을 건넜다.

타시는 그 찬물을 여덟 번 왕복했다. 처음 테스트로 한 번, 우리 여섯,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진행 보살님의 배낭과 스틱을 가지고 나왔다. 쉽지 않은 일이다. 타시보다는 우리가 업혀본지 하도 오래되어 익숙하지 않은 탓에 자세가 엉성한 것이 타시에게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타시는 왼손은 우리를 잡고 오른손은 지팡이로 균형을 잡고 건넜다. 물살은 세고 찬데 바닥은 고르지 않으니 균형잡기가 쉽지 않을 것이 뻔하다. 덩치와 키가 작은 편인 사람은 그나마 나은 편인데 180cm의 키에 80kg의 체중을 지닌 남형 씨를 업고 건널 때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다.

키가 큰 편인 혜명화 보살은 업힌 채 균형을 잘 잡지 못해 신발이 거의 물에 닿아 빠질 것 같아 보는 이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행여 물에 빠진다면 낭패다.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만 등산화가 젖으면 문제가 커진다.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 젖은 등산화는 치명적이다. 다행히 비틀거리면서도 무사히 물을 건넜다. 과연 타시는 무스탕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로바(Loba,  무스탕 사람)다웠다. 수고한 타시에게 특별 보너스로 10불을 주었다.

강은 건넜지만 능선으로 오르는 길도 만만치 않다. 위쪽으로 보이는 산허리길이 까마득하게 높아 보인다. 거기까지 길이 없으니 무성한 관목을 헤치고 가야 한다. 중간에 잠시 평탄한 초지가 나오더니 다시 오르막이다. 강은 점점 멀어지고 티베트쪽 설산이 솟아났다. 설산이 참 예쁘다. 그 앞에 있는 모레인 지대는 마치 큰 성처럼 보인다. 1시가 되어 산 중턱 길에 들어섰다. 넓은 야크방목지이고 티베트 국경 가는 길 중 하나라 길이 잘 나 있다. 아무리 탁 터진 민둥산이라도 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운행할 때 천지차이다.

햇볕 아래  넓은 초지에서 편안하게 쉬었다. 그 때 타시가 산중턱을 가리킨다. 히말라야 타르(Himalayan Tahr, 산양) 무리다. 세어보니 모두 일곱 마리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면서 산양을 가까이에서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녀석들은 우리가 고함을 지르며 아는 체 했으나 모르쇠로 일관하며 풀을 뜯고 있다. 거리가 멀어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히말라야에는 세 가지 종류의 산양/사슴류가 서식하고 있다. 청양(靑羊, Blue Sheep)은 바랄(Bharal) 이라고도 부르며 납작한 털이 푸르고 가슴이 검다. 주로 3500~4000m 고산 절벽 근처에서 5~20마리의 무리가 산다.

히말라야 타르(Himalayan Tahr)는 양의 일종인 산양으로 5000m 고산의 가파른 절벽에 산다. 숫컷은 거칠고 어두운 색의 긴 털을 가지고 있으며 무게는 100kg까지 나간다. 20-30마리가 무리지어 산다.

사향노루(Musk Deer)는 사슴과에 속하지만 뿔은 없다. 숫컷은 위턱에 송곳니가 아래로 내려와 있다. 다른 사슴들과는달리 사향노루는 배에 독특한 혹주머니가 발달되어 있는데 그곳에 사향이 만들어진다. 히말라야에서는 제일 낮은 곳에 서식하고 있는데 값비싼 사향을 구하기 위한 인간들의 사냥으로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이다. 산양이 있으니 여기도 산양의 천적인 눈표범(snow Leopard)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말라야 고산의 맹주는 눈표범이다. 고양이과에 속하는 눈표범은 험난한 산악 지대에서 조용히 살아가기 때문에 현지인들도 좀처럼 보기가 힘든 환상의 동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생태 부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많다. 1970년 미국의 동물학자 조지 섈러에 의하여 야생 상태의 사진이 처음으로 촬영되어 주목을 받았다. 눈표범은 아주 희귀한 동물이라 직접 보는 것만 해도 영광(?)으로 여길 정도다.

Himalaya_Snow_Leopard.jpg눈표범의 꼬리는 가파른 바위를 오르내릴 때 균형을 잡아주며 아주 추운 날에는 입과 코를 감싸 추위로부터 보호한다. 이것이 다른 표범과 구별되는 점이다. 눈표범의 털복숭이 발은 눈신발 역할을 한다. 여름에는 수목한계선 초지에서 살며 산악 바위지역에서는 6000m까지 올라가며 겨울에는 2000m 숲지대까지 내려온다(2006년 조사에 의하면 랑탕 계곡에서도 발자국 등 눈표범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헤밍웨이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은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킬리만자로는 그 산봉우리가 늘 눈에 덮여 있는데, 표고 1만 9천 7백 10피트로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서쪽 꼭대기는 마사이어로 '느가이예 느가이' 즉 '신의 집'이라 불린다. 이 꼭대기 가까이에 말라빠지고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가 하나 있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길이 없다."

작가는 왜 표범이 눈덮인 산 정성까지 올라와 얼어 죽었을까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그 표범이 눈표범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곳이 그들의 서식지가 그곳이기 때문이다. 굶으면 단연히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불변의 진리다. 물론 작가는 생태학적인 면이 아닌 다른 의미에서 표범의 죽음을 조명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영감을 얻은 한 작가(양인자)가 가사를 썼고 음악가인 그 남편(김희갑)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가수 조용필이 불러 많은 인기를 얻었다.

대부분의 날을 혼자 독립생활을 하는 눈표범은 현재 전세계에 약 600마리 정도만 서식하고 있는 희귀동물로 모피가 매우 비싸게 팔리는 까닭에 밀렵이 성행했다. 또 아시아에서는 눈표범의 뼈가 호랑이 뼈와 쌍벽을 이루는 귀한 약재로 취급되어 왔기 때문에 뼈를 노리는 밀렵꾼에 의하여 사냥되기도 하고, 티베트 유목민들에게는 가축을 해치는 동물이라 하여 제거되기도 한다.  그들의 먹잇감인 야생 초식 동물이 감소하는 것도 개체 수 감소의 한 원인으로 생각된다.

세계자연보호연합(IUCN)의 적색자료목록(Red Date Book)에서는 ‘EN’(절멸 우려종)으로, 워싱턴 협약(CITES:멸종 위기에 처한 야생 동물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에서는 부속서의 I(멸종 위험이 높은 종)로 지정되어 국제거래가 금지되어 있다.

Himalaya_Snow_Leopard_Chharang.jpg얼마 전 NGC에서 방영한 BBC제작 <히말라야의 동물들>에 나오는 눈표범을 보니 생김새와 움직임이 아주 귀엽다. 무스탕의 짜랑과 로만탕의 왕궁에 눈표범 박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쪽 황량한 티베트 고원에도 눈표범이 서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페셀의 책에 보면 삼둘링 곰빠를 방문하고 로만탕으로 돌아왔을 때 눈표범을 등에 진 한 농부를 보았다고 쓰고 있다. 40년 전만 해도 무스탕에서 자주 만나는 동물인 것 같다.

우리가 바람으로부터 자유로워 진 것은 오직 마을 출입문에 들어섰을 때였다. 주광장에서 우리는 한 농부가 큰 눈표범 가죽을 등에 지고 가는 것을 보았다. 가죽은 검은 점이 있는 하얀색이고 길이는 9피트였다. 그 사람은 구식 보병총으로 조금 전 표범을 쏘았다. 그리고 가죽 일부분을 벗기고 속에 짚을 채웠다. 그는 지금 뉴곰빠로 가는 중이었다. 스님들은 그것을 악마의 방어책으로 곰빠에 매달아 둘 것이 틀림없다. (Pessisel,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p. 191)

눈표범을 야생상태에서 보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2004년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planet earth diary>를 보면 눈표범을 영상에 담기 위해 2004년 라닥 히말라야와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돌아다니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결국 세계 최초로 눈표범 촬영에 성공한다. 우리는 이틀 후 라르키아 라를 넘을 때 눈밭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눈표범 발자국을 보았다. 그것만 해도 만나기 어려운 행운이라고 할 수 있다.

Manaslu_0983.jpg따뜻한 햇살 아래 넓은 초지에서 설산을 감상하며 쉬었다. 앉아 있는 사람도 있고 빗듬하게 누운 사람도 있다. 각자 자기 스타일대로 편한 자세를 취한다. 아무리 봐도 뒤쪽 티베트 설산은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다시 길을 나서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무리의 산양들이 보였다. 오늘 TV에서만 보았던 히말라야 고산 동물들을 자주 보니 기쁘다. 원숭이는 랑탕에서 많이 보았지만 산양은 5년 전 ABC 트레킹 때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가는 도중 아주 멀리서 본 것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하루에 두 무리를 보기도 쉽지 않다.

넓은 초지는 곧 산허리길로 바뀌었다. 산허리길이란 중간 중간 골이 있기 때문에 빙빙 돌아야 한다. 오후 3시에 오른편으로 다람살라로 향한 계곡이 보이는 곳에 도착했다. 멀리 앞쪽으로 높은 제방 같은 언덕 위의 캠프장이 보인다. 거기까지도 한참 더 가야할 것 같다. 실제로는 20분밖에 안걸렸지만 점심 후부터 거의 4시간 가까이 운행중이라 마지막 20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마을 위 언덕에 도착하여 내려다 보니 어제 이맘 때 울굿불굿하던 텐트들은 모두 사라지고 캠프장이 텅 비어 있다. 우리팀 텐트 뒤쪽으로 오늘 새로 온 팀의 노란 텐트 두 동이  보인다. 두 사람이 온 모양이다(나중에 부부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식당텐트와 화장실텐트 등 있을건 다 있다. 자세히 보니 마을 입구 롯지 옆에도 텐트가 살짝 보인다. 무척 한산한 분위기다.

주방에서 내 온 뜨거운 차를 마시며 잠시 쉬다가 나머지 오후는 마을 방문으로 보냈다. 어제는 못느꼈는데 오늘 보니 집집마다 하얀 룽다가 펄럭이고 있다. 오늘은 주민들이 많이 보인다. 아이들은 어른들 곁에서 놀고 있거나 혼자 밭에서 놀고 있다. 골목길 응달은 아직 덜 녹은 눈이 남아 있어 진창이다. 마을은 아무리 봐도 인도나 네팔의 빈민촌을 연상시킨다. 집집마다 쌀아 둔 건초더미가 더욱 그런 느낌을 부추키고 있다. 무스탕 마을과 비교가 되어 내 눈이 너무 높아진 모양이다.

작년까지 여섯 번 트레킹을 하면서 이렇게 현지인들이 사는 곳을 몇 번이나 방문한 적이 있을까 생각해 보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있다면 오직 작년 무스탕 트레킬 때 뿐이었다. 안나푸르나 지역, 랑탕 지역 그리고 쿰부 지역에서는 항상 롯지 촌에서 머물렀다. 어쩌다 현지인들이 사는 집을 지나치긴 했지만 주변 분위기는 롯지와 티하우스가 장악하고 있다.

롯지촌은 새로 생긴 마을이다. 피상(Pisang)도 트레커들이 머무르는 로우(Lower)피상은 롯지촌이고 그 위쪽 산비탈에 있는 어퍼(Upper)피상이 현지 주민들이 사는 올드빌리지다. 마낭(Manang)은 그나마 현지인들의 집과 롯지촌이 같이 있어 티베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곳에 비하면 마낭은 그야말로 대도시격이다. 그만큼 이곳이 오지임을 실감한다.

척박한 환경이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얼굴을 찡그린 사람을 보기 힘든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인간인 이상 희로애락의 감정이 없을 수 없다.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불교에서는 탐진치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중생의 선한 마음을 해치는 가장 근본적인 3가지 번뇌를 독에 비유한 것이다.

탐냄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고 성냄은 좋아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반감·혐오·불쾌 등의 감정이다. 어리석음은 불교에서 말하는 바른 도리에 대한 무지를 말하며 무명(無明)과 같다. 그것은 자기에 대한 강한 집착에 의해 바른 도리를 보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이나 분별을 일으켜 온갖 번뇌의 근원이 된다.

인간의 삶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런 삼독심의 발로가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것의 기준을 '돈'으로 삼는 현대문명사회에서는 더욱 삼독심이 치성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이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역으로 생각하면 그만큼 현재문명의 때가 덜 묻은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골목길을 돌아나오는데 한 집에서 두 여인네가 늙은 노인을 담요에 싸서 방으로 들어간다. 잠깐 보았지만 노인은 임종이 다가온 듯 의식이 거의 없다. 생로병사는 예외가 없는 일이니 새삼스러울 것이 없지만 행여 고칠 수 있는 병도 의료시설이 없어 죽음을 속수무책으로 맞이하는 것은 아닐까 저어했다.

맞은 편 담장에서 그 광경을 보던 할아버지가 나를 보더니 목을 콜록거리며 뭔가를 달라고 한다. 느낌으로는 감기약을 달라는 것 같다. 약품가방을 가지고 왔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함부러 줄 수는 없는 일이다. 타시와 같이 왔으면 통역이 되어 필요한 약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냥 초코바만 하나 주었다.

지금 생각하니 종합감기약 정도는 부작용이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감기약을 주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날이 저물기 시작하는 시간이 되어 식당텐트로 가 저녁이 나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타시가 들어왔다. 어제 주문한 대로 마을 촌장을 모시고 왔느냐 물으니 자기가 알아 온 마을 사정을 이야기 한다.

삼도는 아래의 사마가온과 함께 하나의 VDC(마을발전위원회)에 속하는데 사마가온에는 4개의 워드(Ward), 삼도에는 3개의 워드로 또 나누어져 있다. 워드란 구역을 뜻하는 말로 우리의 통이나 반의 개념과 비슷할 것이다. 보통은 한 마을이 한 워드가 되는데(무스탕은 7개 VDC에 33개 마을이 있다) 불과 30여 채의 집이 있는 삼도에 3개 워드가 있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각 워드의 대표 3인에게 나누어 줄테니 그 사람들을 불러달라고 하니 타시가 다시 고개를 젖는다. 한 사람에게 주면 혼자 다 가지기 때문에 개인별로 달라는 것이 대중의 뜻이라고 한다. 순박한 사람들이라 사이좋게 나누어 가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시간이 조금 걸리는 일이지만 마을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이니 따를 수밖에 없다.

이미 밖에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이 와 있다. 마을 잔치라도 하는 듯 아이 어른 할 것없이 다 모였다. 우선 타시를 통하여 항생제 사용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설명한 후 뒤쪽 둔덕에 서 있는 남형 씨에게 어른이 몇 명이나 되어 보이는가 물어보았다. 30명 쯤 된다고 한다. 450정이니 15정씩 나누어 주려는데 다시 남형씨가 다시 정정한다. "아니, 더 오는데요. 50명은 되겠습니다." 그래서 9정씩 주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족 수가 많은 집이 유리하다. 한 사람씩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약을 받는 사람마다 만병통치약을 받는 표정이다. 심지어는 그 자리에서 캡슐을 열고 쓴 분말을 입에 털어 넣는 사람도 있다. 곰빠의 스님도 대열에 동참했다. 이곳에서 이렇게 약을 단체로 배급받은 일은 드물다고 한다.

타시가 정확을 기하려고 종이에 동그라미를 치고 찢어 마을 사람에게 준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종이를 나에게 내밀고 약을 탔다. 약을 주며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손 바닥에 체크를 하면 모를까 종이를 주면 나중에 버리고 다시 탈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누가 누구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래도 순박한 사람들이라 이중으로 약을 타려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오늘 도착한 세 명의 독일 팀도 가까이 와서 구경한다. 거기서 이런 행사를 벌였다면 우리도 구경하러 갔을 것이다. 불구경과 사람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다. 한 사나이가 와서 남형 씨에게 물어본다. 뭘 주느냐. 페니실린 같은 항생제다. 의사가 왔나. 아니다. 대충 옆에서 들은 내용이다.

곧 한 통이 바닥났다. 남은 통에 있는 것을 더 가져와 덜어 타시에게 나누어주라고 했다. 조금 전 마을 골목길에서 만났던 사나이가 나에게 한 아낙에게 업혀 있는 아이를 보여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다. 아이를 보니 오른쪽 볼이 퉁퉁 부어있다. 잇몸이나 입 안에 염증이 생긴 것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의사가 아닌 내가 알 리 없다.

제법 아플 것 같은데 이력이 났는지 꼬맹이는 울지도 않고 멀뚱멀뚱 나를 쳐다본다. "왜 이런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리고 약도 없다. 가능하면 빨리 병원에 가 보는 것이 좋겠다."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말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병원에 가는 것을 몰라서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 아이를 치료할 병원은 여기서 최소한 5일 걸리는 아루갓바자르에도 있을 것 같지 않고 카트만두까지 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못가는 것 아니겠는가!

이럴 때는 내가 의사였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환자의 증상은 알고 약을 줄 수는 있을 테니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약상자를 뒤져보았다. 작은 통에 들어 있는 어린이용 소염진통제가 있다. 이거라도 혹 도움이 될지 모르니 하루에 두 알씩 먹이라고 통 채로 다 주었다. 보름치 쯤 된다. 계속 먹이지는 말고 한 사흘만 먹여보라고 해야 했는데 깜박 잊었다. 설마 보름 내내 다 먹이지는 않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곳 아이들은 대체로 야생마처럼 체력이 강하니 잘 견디어 냈으리라 생각한다. 
 

trek 12. 삼도(티베트 국경으로 소풍)  (top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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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크 국경으로 가는 언덕에서 삼도를 돌아보다. 아침 짓는 연기가 피어나고 있다. 다람살라 쪽으로는 다른 팀의 포터들과 트레커들이 줄지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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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경 룽다가 펄럭이는 돌무지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설산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열심히 올라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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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베트로 갈 목재 다발. 이곳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얼마 후 운행 도중 티베트로 말을 타고 가는 두 사나이가 우리르르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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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바닥으로 내려 간 후 그곳에서 나무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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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따뜻한 양지녁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강을 건너 건너편으로 넘어오다. 타시가 우리 모두를 업어 건너주었다. 그는 빙하에서 바로 내려오는 찬 얼음물을 8번 왕복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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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관목 사이로 오르다. 높은 고도에 따로 길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조금 힘이 들었다. 뒤쪽(북쪽)의 티베트 국경을 이루는 설산을 배경으로 오른다. 거대한 요새처럼 보이는 모레인 아래에서 점심을 먹고 1시간 동안 오르막을 오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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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는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설산 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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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넓은 초지에 이르러 휴식.  그곳에서 한 무리의 히말라야 산양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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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을 마치고 넓은 야크카르카를 계속 내려오는데 얼마 후 다시 산양 무리가 보였다. 오늘 하루에 히말라야 마못과 산양을  두 무리나 보았으니 소풍 나온 보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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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다람살라 가는 계곡이 보이는 곳에 도착하다. 고산으로 향한 길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열심히 마지막 구간을 따라 오고 있는 동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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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쪽으로 우리의 안식처 삼도 캠프장이 보인다. 마을 바로 위 언덕에서 내려다 본 캠프장. 오늘 새로 온 팀의 노란 텐트가 왼편과 오른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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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 마을 풍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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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 마을 풍경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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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 마을 풍경 3. 오른쪽 사진에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영감님이 그 앞을 지나가는 내게 약(내 짐작으로)을 달라고 했지만 어떤 약이 필요한지 몰라 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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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쪽에서 본 삼도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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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만난 이 사나이가 나중에 한 아낙이 업고 있는 볼이 퉁퉁 부어 있는 아이를 보여주며 약을 좀 달라고 했다. 아들로 보이는 이 아이는 건강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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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사람들에게 항생제를 나누어 주다. 나누는 기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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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캠프와 삼도 마을을 수호하는 듯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팡푸치의 일몰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3,680m

3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 티베트 국경 방문

4,2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20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옛날의 금잔디 -  삼도 가는 길

2007. 10. 23(화)


 

오늘은 모두 상태가 좋다. 하루 쉬었더니 컨디션이 좋아진 모양이다. 오늘 일정도 3시간 짜리라 부담이 없다. 8km 거리에 평지길이 대부분이고 고도는 170m만 오르니 룰루랄라 일정이다. 나는 아직 콧물이 나오고 코를 풀면 피가 섞여 나오기는 해도 전체적인 느낌은 나쁘지 않다.

어제 저녁 식사 후 다시 단체로 다이아목스를 먹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손끝이 저릿저릿하는 증상은 다이아목스가 몸에서 잘 분해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런 단체 트레킹에서는 한 사람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팀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므로 각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열심히 체력도 단련해 두어야 민폐를 끼치지 않는다.

혼자 아니면 두 사람이 움직였던 첫 네 번의 트레킹까지는 다이아목스를 먹지 않았다. 돌아갈 날을 여유 있게 잡았기에 여차하면 운행을 중지하고 증상이 개선될 때까지 푹 쉬었다 갈 수 있었다. 다이아목스를 준비한 것은 2005년 가을 5명이 한 팀이 되어 떠났던 ABC트레킹 때부터였다. 이 때는 출입국 시간에 제약이 있어 여유가 많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증상의 조짐이 보이면 약을 먹었다.

ABC는 고산병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덜하긴 해도 마지막 이틀은 3000m 이상에서 1000m를 올리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있다. ABC에서 1박하며 멋진 안나푸르나의 일출을 잘 보고 왔지만 우려했던 대로 세 명이 고산병 증세를 보여 다이아목스의 도움을 받았다. 다이아목스는 카트만두나 포카라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다.

다시 멋진 일출을 구경하고 배낭을 매는데 근처에 사는 한 꼬마가 일찍부터 구경을 왔다. 몽골리안 계통의 모습으로 옷만 빼면 영락없는내 어린 시절 모습이다. 추운 날씨인데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내가 "타시뗄레" 하자 공손히 합장하며 "타시뗄레' 한다. 마침 카메라 가방에 넣어 둔 어린이 양말이 있어 선물로 한 컬레 주었다.

7시 20분 출발. 마을을 벗어나자 마나슬루가 전신을 보여주며 반긴다. 어제보다 이른 시간이라 구름이 거의 없는 깨끗한 모습이다. 오늘은 바람이 서에서 동으로 불어 '연기'의 방향이 어제와 반대방향이다. 마나슬루 빙하에서 흐르는 계류를 건너 다시 관목숲 지대로 들어갔다. 마나슬루는 계속 우리를 따라왔다.

너무 멋진 마나슬루의 모습에 취해 길을 가면서 눈을 떼지 못하고 계속 사진을 찍으며 걸었다. 8시 경, 어제 빙하에서 내려오며 보았던 서양팀 캠프 옆을 지났다. 이들도 막 곧 출발할 모양이다. 제복을 입은 포터들이 부지런히 짐을 싸고 있다. 이곳에서 보는 일출은 그야말로 장관일 것이다.

314-manaslu_sunrise_3.jpg어제 잘 보았기에 오늘 아침은 대충 보고 말았는데 이곳을 지나가면서 생각하니 후회가 막심이다. 어제는 산 정상부근만 보였다. 이곳은 빙하와 주변의 산까지 한 눈에 다 보이는 파노라마다. 황금빛이 전신에 퍼지는 장관을 상상하니 전율이 일어났다. 돌아와 2000년 가을 이곳을 방문했던 칼스텐 네벨의 사진을 다시 보니 내 짐작이 맞았다. 이 사진을 출발 전에도 보기는 했지만 장소가 이곳인줄은 당연히 알지 못했다. 산만 보았지 전체 풍경까지 눈여겨 볼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다음에 오실 분들은 부디 이곳을 놓치지 마시길...

P0004897.jpg10여 분 후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긴 마니월이 있는 넓은 초지인 케르모 카르카(Kermo Kharka)를 통과했다. 대충 보아도 200m는 될 것 같다. 그리고 곧 돌맹이가 많은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내려갔다고 해도 고도차는 거의 없다. 아직 햇볕이 비치지 않는 그늘이라 조금 쌀쌀했다.

내려오는 한 무리의 소떼들을 지나 해가 비치는 초지에 도착했다. 마나슬루는 이제 앞 산에 가려 꼭대기만 조금 보인다. 대신 남쪽 사마가온 쪽으로 거대한 히말출리가 나타났다. 북쪽으로는 브이자 계곡 사이로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설산이 보인다. 계곡 아래쪽 강 건너로 한 무리의 야크 떼가 내려오고 있다.

그쪽 위 역시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는 6천미터 급 산들의 연봉이다. 설산 아래에 줄을 지어 내려오는 야크 떼의 모습은 영화 <히말라야>의 한 장면이 연상되는 풍경이다. 그곳부터는 길은 넓은 초지와 완만한 산비탈 경작지를 반복한다. 햇볕은 이제 계곡 바닥까지 비추어 따뜻했다.

사마가온에서 삼도 가는 이 구간은 마나슬루 트레킹 중 아주 인상적인 구간 중 하나였다. 왼편의 마나슬루를 비롯하여 뒤돌아보면 웅장한 모습을 보이는 히말출리의 주변 풍경은 장엄하다. 거기에 더욱 나의 가슴속 깊이 울림을 준 것은 따뜻한 햇살 아래 넓은 초지와 산비탈 경작지 옆길, 그리고 간혹 나타나는 가는 개울물이었다. 그 길은 그 옛날 내 어린시절 봄날의 산골 모습이다. 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향수를 느끼게 하는 길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보고 듣고 먹고 즐기며 다른 나라 사람들과의 친교를 하는 여행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본질에 대한 성찰, 자신의 깊은 내면을 일별 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40대 이상의 사람에게는 네팔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서 오래 전 우리의 유년시절, 곤궁했던 상황은 제거하고 아련한 추억은 한결 여유롭게 되새길 수 있는 그런 시간여행의 즐거움이 있다.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매기의 추억> 이라는 노래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예전 소싯적에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매기'를 민물고기인 '메기'로 생각하여 '왜 물고기와 같이 앉아서 놀지?'라는 의문을 품곤 했다. 매기가 사람 이름인 줄은 한참 후에 알았다.

존슨(G. W. Johnson, 1839~1917)이라는 한 청년은 20세 때인 1859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 해밀턴(Hamilton)에 처음 교사발령을 받아 부임했다. 그리고 곧 17세의 제자 마가렛 클라크(Margaret Clark)와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자주 마가렛의 집 근처 개울가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매기(Maggie)는 존슨이 부른 애칭이다. 5년 후인 1864년에 존슨은 서정시집 <Maple Leaves>를 냈는데 거기에 수록된 시 중 하나가 ' When You and I Were Young, Maggie'이다. 그들은 그해 10월 결혼한다. 그러나 매기는 질병으로 다음해인 1865년 5월,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영국 출생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음악가인 버터필드(J.C. Butterfield)는 1866년 이 시에 곡을 붙였다(두 사람이 친구사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곡이 오늘날 전세계인이 널리 부르는 애창곡 중 하나인 <매기의 추억>이다. 현재 우리가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대부분의 번안곡이 그렇듯 원래의 가사를 많이 줄여 단순하게 만든 것이다.

큰 계곡 두 개가 합수되는 지점의 언덕에서 두 번째 휴식시간을 가졌다. 멀리 삼도 마을을 알리는 초르텐 하나가 조그맣게 보인다. 삼도에 다 왔다는 말에 모두 기뻐한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려면 계곡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가파른 언덕을 올라야 한다. 계곡으로 내려가 다리를 건너 오르막을 오르니 카니가 나왔다. 멀리서 볼 때는 언덕에 오르면 바로 초르텐이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언덕에 올라선 후에도 마니월을 지나 초르텐까지 한참 걸었다. 그래보았자 15분 정도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른 후라 제법 먼 느낌이 들었다.

10시 40분 히말출리를 마주 바라보며 서 있는 삼도의 큰 초르텐에 도착했다. 다른 팀 포터들이 그 옆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초르텐 내부에는 나무판자에 아름다운 불화가 그려져 있는데 칠이 많이 벗겨져 있다. 나무가 귀한 무스탕에서는 천장을 제외한 나머지 사방벽은 흙으로 고르고 불화를 그렸다. 이곳은 나무가 흔해 나무판으로 벽을 막고 그 위에 그렸다. 비바람의 풍화작용으로 현재 두 지역 모두 낡아 있다는 점은 같다.

Manaslu_05-10_HPS2_P0750.jpg초르텐을 통과하니 산자락 아래 모여 있는 삼도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입구에는 쿰부지역 롯지와 비슷한 형태의 2층짜리 롯지가 두 채 있다. 2년 전 안드레스가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단층짜리 소박한 롯지밖에 없었다. 지금은 이층까지 올렸지만 아직도 공사중이라 새 목재들이 롯지 주변에 많이 쌓여 있다.

Manaslu_0847.jpg불과 2년 사이에 풍경이 많이 변했다. 마나슬루도 점점 트레커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증거다. 체력이 좋아 15kg 정도의 배낭을 매고 가벼운 텐트를 지참하기는 하되 웬만하면 기본적인 롯지에서 숙식을 해결하겠다는 각오만 있다면 반드시 여행사를 통하지 않아도 마나슬루 트레킹을 할 수 있다. 2005년 안드레스 팀이 그 경우다.

그들은 네 명의 트레커에 여섯 명의 스태프들만 대동하고 마나슬루 트레킹을 했다. 음식은 현지식 아니면 트레커들이 돌아가며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니 �은 사람들이 아닌 중늙은이들이다. 모험적인 서양 사람들의 전형적인 스타일이다. 나는 체력도 안되지만 설사 된다 하더라도 네팔의 경제에 일조를 한다는 마음으로 그런 스타일은 피하고 있다. 그래서 혼자 하는 롯지 트레킹의 경우라도 반드시 가이드와 포터를 고용한다.

롯지 근처 캠프사이트에는 어제 온 다른 팀의 텐트가 몇 동 있다. 이들은 여기서 고소적응일을 가진 모양이다. 마을 앞은 넓은 경작지가 있어 추수가 끝난 이맘 때 쯤에는 모두 캠프장으로 이용할 수 있다. 우리는 마을과 제일 가까운 산기슭 바로 아래 제일 넓은 마당에 캠프를 쳤다. 마당에 펼쳐놓은 깔개에 앉아 점심을 기다렸다. 햇볕은 쨍쨍하지만 바람이 세게 불어 추위를 느꼈다.

사마에서 올라오는 트레킹 팀들이 계속 하나 둘 도착하더니 금새 넓은 캠프사이트가 울긋불긋한 텐트의 베이스캠프촌 모습이 되었다. 우리를 보더니 마을 아이들이 구경삼아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우리 캠프가 마을 바로 앞에 있어서 아이들이 놀러오기 제일 좋다.

이번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좋은 참고가 된 안드레스의 여행기에서 아이들게 풍선을 선물로 주었다는 대목을 읽고 괜찮은 아이디어라 생각하고 나도 50여 개 준비했다. 내가 풍선이 든 봉지를 꺼내자 아이들이 모두 내게 몰려왔다. 그래도 먼저 달라는 아우성은 없다. 모여 있는 동포들을 보고 여기 저기서 아이들이 달려왔다. 안드레스는 여기 아이들이 풍선을 푸(phu)라고 한다는데 밸룬이라는 말을 쓰는 아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영어를 배운 모양이다.

풍선을 받은 녀석들도 손짓을 하며 멀리 있는 다른 아이들을 부른다. "야, 여기서 풍선 주니 빨랑 와!" 티베트어는 모르지만 척 하면 삼척이다. 너댓명 아이들이 순식간에 10명으로 불었다. 그리고 계속 달려온다. 간난쟁이를 업고 온 녀석들은 영문도 모르고 흔들리며 업혀 온 동생에게도 주라고 몸을 틀어 보인다. 당연히 주어야 한다. 풍선을 받은 녀석들은 즉시 불어제끼며 희희낙락한다.

Manaslu_0860.jpg일단 배급을 마치고 아이들을 돌려 보냈는데 백산스님이 꼬맹이를 하나를 데리고 왔다. 캠프 주방 옆 수돗가에 갔다가 이 녀석이 "헬로~" 하고 말하는 것이 귀여워 풍선 하나 주려고 손 잡고 왔다. 뭔 일인지도 모르고 엉겁결에 따라 온 꼬맹이는 우리를 보자 무서운지 달아나려고 "이잉~"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손을 빼다가 내가 풍선을 주자 그제야 좋아한다.

아이에게 풍선을 건네주다가 아이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왼손 검지와 중지 사이에 고름이 잡혀 있다. 놀다가 상처가 났고 그쪽으로 침투한 세균을 맞아 지금 백혈구의 치열한 소탕작전이 전개되는 중이다. 고름은 양측 전사자들의 시신이다. 처음 상처가 났을 때 요드팅크만 발라주었어도 이런 상태까지 오지 않았을텐데 약품이 귀한 이곳에서는 그저 수수방관 한다.

무스탕에 관해 쓴 페셀의 책에는 이들에게도 페니실린 대용으로 쓰는 약품이 있다고 한다. 무스탕 사람들은 정초에 문설주에 벽사용으로 야크 버터를 덩어리로 붙여 놓는데 그들은 이 묵은 버터를 상처 치료에 쓴다고 한다. 버터가 오래 되면 그 속에 푸른곰팡이인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이 생긴다. 페니실린은 모르지만 살면서 얻은 경험일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이 여행을 떠날 때 어른들이 떠나는 사람의 머리에 버터를 찍어주며 장도를 축원하는 풍습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런지 모르겠다.

Manaslu_0581_1.jpg아이의 손에 버터가 묻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그런 치료법이 없는 것 같다. 오면서 아이들 머리에 버터를 발라 놓은 것을 보기는 했다.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나오는 강렬한 자외선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틀 전 운행 중 쉬는 시간에 어린 두 형제가 집 밖에서 노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동생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가 끈적거려 기겁을 했다. 아이들 머리에 야크 버터를 발라두었던 것이다.

그동안 가지고 다녔던 약을 이곳 마을 사람들에게 주기로 했다. 오는 도중 머무른 곳에서는 마땅히 줄 만한 마을이 없었다. 사마가온은 제일 큰 마을이라 양이 부족하다. 보건소가 있으면 보건소장에게 주면 될텐데 그런 곳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삼도는 제일 위쪽 마을이라 약품을 구하기 가장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저녁식사 시간 때 타시에게 내일 마을 촌장을 불러달라고 했다.

촌장에게 항생제 한 통(500캡슐)을 주고 마을에서 필요한 사람이 생기면 3일분(9캡슐) 씩 나누어 주라고 할 생각이다. 이번에 항생제 세 통과 관절염약을 가지고 왔다. 항생제 중 한 통은 무스탕 남걀 마을 사람들을 위해 쓰라고 삼툭에게 주었다. 한 통은 삼도 마을 사람들에게 주었다. 나머지 한 통은 운행 중 필요한 스태프들과 현지인들에게 주고 남은 것은 타시에게 주었다.

카트만두 삼툭의 집이 남걀 사람들의 베이스 캠프라면 포카라 타시의 집은 남돌 사람들의 베이스 캠프다. 원래 무스탕에 가지고 갈 예정인 약이었으니 두 마을을 대표하는 두 사람에게 주었다. 관절염 약은 무거운 짐을 지는 스태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항생제는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다음 트레킹 때도 가지고 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다. 주방요원 빠상은 며칠 간의 항생제 복용으로 이제 발이 다 나아 불편없이 잘 걸어 다니고 있다.

Samdo_3Valley.jpg삼도는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북쪽에 있는 마을이자 가장 늦게 생긴 마을이다. 세 개의 큰 계곡이 합쳐지는 지점에 우연히 생긴 넓고 평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칼스텐에 의하면 삼도라는 지명은 티베트로 셋이라는 뜻의 'sum'에서 나왔다고 해서 타시에게 확인해보니 맞다고 한다.

Tibetan123.gif레이놀즈의 책을 보면 삼도는 중국이 티베트를 침공한 1959년 이후 티베트 국경 가까운 곳에 있는 무역 마을인 리우(Riu)에서 넘어 온 사람들이 세운 마을이라고 한다. 1956년 스넬그로브가 방문했을 때는 마을이 없었고 위쪽 라르키아 라로 가는 계곡 입구에 바북(Babuk=Larkya Bazar)이라는 계절 시장만 있었다. 마을은 북쪽 산기슭 아래 마당이 있는 집 30여 채가 연달아 붙어 있는 형태다.

CIMG0897.jpg점심을 먹고 마을 전체 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북쪽 가파른 언덕을 올라 타르초가 시작되는 지점에 도착했다. 바람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거세게 분다. 바람이 센 지역이라 집 지붕은 모두 판석으로 덮었다. 캠프사이트에 각자 한 자리씩 차지한 그룹의 텐트가 보인다. 트레커용 텐트만 30여 동이다. 보통 트레커의 3배수가 스태프로 따라오니 30명의 트레커라면 90명의 스태프들이 있고 합하면 120명이 된다. 트레커들은 대부분 이 산 저 산에 흩어져 있고 스태프들은 해바라기를 하거나 카드판을 벌이고 있다.  

계곡이 열려 있는 남쪽으로 히말출리의 장대한 모습이 보인다. 왼편으로는 삼도를 대표하는 산인 팡푸치(Pang Puchi, 6338m)가 우뚝 솟아 있고 그 옆 계곡을 따라 티베트로 가는 길이 보인다. 오른편으로는 라르키라 라로 가는 길이 산허리를 따라 크게 원호를 그리며 사라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다. 무진행 보살님은 여기서 내려가고 나는 위쪽으로 계속 이어진 타르초를 따라 더 올라갔다. 타르초가 시작되는 곳의 고도가 4000m이고 이곳 언덕 꼭대기 높이가 4600m라고 하니 가파르긴 하나 두 시간 정도만 오르면 이를 수 있는 고도다. 고소적응에도 좋고 그곳에서 보는 풍광은 더욱 좋을 것이다.

Manaslu_0883.jpg그러나 4천 고지에서의 가파른 오르막 운행은 힘들다. 그리고 앞으로 며칠 간 오를 고도가 만만치 않으므로 힘을 비축할 필요가 있어 무리하지 않고 4200m 지점까지만 오르기로 했다. 그곳에서 잠시 쉬면서 풍광을 감상하다가 등산화를 보니 아직 별 탈없이 잘 견디고 있다. 닳아진 끈은 그동안 두 번 고쳐맸다.

언덕을 내려와서는 마을로 들어가 어슬렁거렸다. 골목 그늘진 곳은 아직도 눈이 녹지 않고 있다. 지붕 위에는 건초더미가 어수선하다. 보리를 터는 아낙도 있고 아들과 함께 하릴없이 해바라기를 하는 사내도 있다. 마당에는 야크와 말이 서성거리고 있다. 곰빠는 마을 가운데 하얀 칠을 한 건물이다. 모두 무스탕의 간결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와 대조가 된다. 한 무리의 트레커들이 동북쪽 계곡 탐사를 마치고 내려오고 있다.

삼도에 대해서는 2004년 <프로젝트 히말라야>의 마나슬루 트레킹 팀의 일원이었던 밥(Bob)의 여행기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멋진 풍광에 너무나 큰 감동을 받았다...."라는 단순한 감상문보다 이런 구체적인 사실에 근거한 인문사회학적 접근은 그곳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한다. 마나슬루로 떠나기 전 나는 그의 글을 번역하고 자세히 읽어 도움을 얻었다.

우리는 삼도로 올라갔다. 짧은 운행이다. 발 아래 전인미답의 눈이 밟히는 뽀드득 소리가 감미롭다. 삼도에 도착하자 우리는 마을 가에 있는 길 옆 주막에서 이미 로빈과 주디가 쉬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엘 역시 롯지 주인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잠시 주방에서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롯지 바로 옆에 텐트를 쳤다. 뒤돌아보니 사마가온과 단순하고 장엄한 풍경이 보인다. 조엘은 그의 친구 클린트 로저스(Clint Rogers)가 삼도에서 여러 달 째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칼 버클리(Cal Berkeley)의 재정지원을 받아 삼도의 경제와 풍속을 연구하고 있다(그의 경험에 관해서는 아래를 보라). 나는 카트만두에서 클린트를 한 번 아주 잠깐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 캘리포니아 친구로부터 '속 이야기'(inside story)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오래 머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야크를 잡아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최근 마을 야크 한 마리가 다쳤다. 야크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아무도 짐승의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도축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불교도로서 그들은 그런 일이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도가 아닌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마을의 한 집에서 머물고 있는 클린트는 그의 대학원 공부가 야크 목을 찢는데 필요한 기술과는 거의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탁을 거절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저녁 식사 시간 때까지 볼 수 없었다. 그가 반갑게 우리에게 왔을 때 그가 가져온 것은 야크도 아니고 주 음식인 참파도 아니었다.

클린트는 현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 주었다. 삼도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티베트인이다. 그리고 중국과의 조약의 한 부분으로 그들은 티베트와 자기네 마을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들은 또 비불교도 촌장들이 이끄는 사마가온 사람들과 가축의 방목과 경작지 재배에 관해 계속 다투어왔으며 종종 돌맹이를 던지는 싸움도 했다.

저녁 식사 전 앨리스와 나는 삼도 마을로 산책을 갔다.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금 올라간 곳에 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나왔던 길에 있는 마나슬루의 풍경과 그 아래 능선들, 우리 앞 빙하 위에 솟아 있는 봉우리들이 정말 멋있다. 우리는 기쁨에 넘쳐 서로 껴안았다. 땅거미 질 무렵 돌아오는 길은 조금 낮았다. 오래된 잿빛 돌집들 사이에 있는 좁고 가는 길은 진창과 야크똥으로 차 있다. 클린트와 저녁을 같이 하기 위해 텐트로 돌아오는 길에 그 두 가지를 피하기는 어려웠다.(Bob Rosenbaum, <Bob's explores the Manaslu and Nar-Phu region 2004>)

이런 오지의 작은 마을조차 연구를 하는 서양인들의 학문적 접근이 놀랍다. 우선은 이 연구를 하고자 하는 학자가 있어야 한다. 이런 오지에 현지인들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몇 달씩 머문다는 일은 보통의 열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들의 연구를 위한 경제적 재정적 지원이 있어야 한다. 서양은 그런 제도가 잘 되어 있다.

어제 사마가온에서 저녁 먹을 때 다음날 일정을 브리핑하면서 밥의 여행기에 나오는 삼도에 관한 이야기도 같이 했다. 그리고 팀 리더로서 열흘 동안의 여행으로 사람들의 많이 지쳐 있어 뭔가 영양보충이 필요할 것 같아 의견을 물어보았다. 동네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닭이 가장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말했다.
"밥의 여행기에 나오는 클린트의 보고서에는 삼도 마을사람들은 야크가 발을 다쳐 더 이상 살 가능성이 없어 도축을 해야 할 때 자기들은 불교도라서 직접 그 일을 못하고 이교도인 클린트에게 시켰다고 합니다. 닭을 원하는 분이 있는 것 같은데 우리는 모두 불교도라서 어떻게 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러자 혜명화 보살이 남형 씨를 보고 말했다.
"저기... 동생 분은 불교도가 아니잖아요?"
모두 박장대소했다. 남형 씨는 혹시 정말로 자기가 닭을 상대해야 하는가 해서 잠시 멍한 표정이다. 그러나 곧 요리는 주방에서 알아서 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안도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삼도에 와서 타시가 알아보니 닭은 모두 산란용으로 쓰기 때문에 팔지 않는다고 해서 이제까지의 궁리는 자동적으로 없었던 일이 되었다.

 

trek 11. 사마가온 - 삼도  (top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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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 멋진 파노라마 일출을 볼 수 있는 곳. 캠프사이트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이곳 들판에 나와 감상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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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크의 전송을 받고 마나슬루 빙하 계류를 건너 관목숲으로 들어서다. 마나슬루가 한 눈에 다 보이는 이곳에 캠프를 친 팀이 은근히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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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쪽으로는 히말출리의 멋진 모습이 보이고 계곡 건너편으로 야크 행렬이 내려오고 있다. 영화 <히말라야>의 한 장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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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 볕이 비치는 초지에서 휴식. 이곳부터 삼도까지는 봄날 나물캐러 가는 정다운 산골 풍경이다. 길을 걸으니 '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노래가 절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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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 마을 입구의 초르텐이 멀리 보이는 언덕. 물을 건너 숨가쁘게 언덕을 오르니 초르텐은 다시 뒤로 물러나 있어 한참 더 걸었다. 뒷산 꼭대기 높이는 4600m로 점심 먹고 오후에 고소적응차 조금이라도 오르면 좋다. 그곳에서 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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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신품'을 구경 나온 현지 아이들. 풍선을 주니 좋아하며 신나게 불고 다시 바람을 빼는 놀이를 반복한다. 시끄럽다고 야단치려다가 'I ♡ YOU'라는 의사표시가 있어 참았다. 그러나 곧 타시와 밍마 세르파에게 쫓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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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 마을 풍경. 건초와 보릿단이 지붕과 마당에 널려 있어 어수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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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앞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부자. 동쪽 팡푸치 설산을 배경으로 한 아낙네가 지붕에서 보리를 털고 있다. 제일 오른쪽 사진은 동네에서 본 히말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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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뒷산으로 올라가 내려다 본 마을 풍경. 타르초는 위로 계속 연결되어 있다. 정상까지 가면 좋겠지만 거센 바람이 부는 가파른 경사면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조금만 더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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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에 있는 히말출리가 장엄하다. 위에서 본 삼도 마을과 히말출리의 모습. 설산은 구름 위에 떠 있으면 더 신비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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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팡푸치 계곡과 서쪽 라르키아 계곡. 다람살라로 가는 길이 크게 원호을 그리며 산허리에 나 있다. 오른쪽으로 향한 계곡은 부리 간다키 강의 최상류로 티베트로 연결되어 있다.


클린트의 마나슬루 무역상들 연구를 위한 체류
Clint's Manaslu traders research sojourn

마을 사람들은 얼마나 어렵게 살고 있을까? 클린트가 우리에게 말한다!

클린트는 우리들의 좋은 친구로서 여러 해 동안 네팔에 머물며 조사해왔다. 여기 우리가 왜 캠프를 치는 지에 대한 통찰력 있는 견해가 있다.


나는 산에서 좋은 가을 시즌을 보낸 후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나는 샤워를 하고 면도를 하고 피자를 먹었다. 이제 나는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사회로 다시 입장하는 의식을 완성할 때이다. 나는 당신이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내가 8월에 마지막으로 이메일을 보낼 때 나는 앞으로 몇 달간 "내가 그들의 야크 캐러밴에 동행하여 그들의 사업에 끼이는 것을 허락해 준, 기울어진 오래된 무역상들을 따라 다닐 것"이라고 썼다. 나는 당시 나하고는 전혀 친근하지 않은 네팔의 한 지역에서 새로운 조사 프로젝트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대해 이해해야 했다. 그렇지만 운이 좋게도, 그곳에서 무역상들과 야크 캐러밴들을 발견하는 것은 버클리 대학에서 자유주의자나 히피들을 발견하는 것만큼 쉬웠다.

내가 네팔과 티베트 간의 국경무역 조사를 위해 선택한 마을은 국경에서 단 몇 시간 거리에 있는 주요 캐러반 루트에 자리잡고 있다. 보리 수확이나 감자를 캐지 않을 때 그들은 마을에서 야크에 물건을 싣고 국경을 넘는다. 이것은 눈덮인 고개를 넘기 위해 여러 날 걷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오전 중에 해발 5100m의 고개를 넘는다. 그리고 항상 마지막 사람은 당신에게 지난 40년 동안 교역했던 모든 물건의 값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의 차의 값을 말할 것이다. 교역을 마쳤을 때 이가 하나밖에 없는 할아버지 마을 족장은 빠르게 웃으며 나를 초청해 그의 집에 머물게 했다. 나는 천상에 있었다. 아니면 그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해발 3900m에 있는 마을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지저분한지 알지 못했다. 그곳은 목욕이나 옷을 빨 때 결코 충분하게 따뜻하다는 느낌을 얻을 수 없는 곳이다. 두 달 반 동안 내 몸 중 물과 접촉했던 곳은 오직 얼국과 손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옷을 (빨기 위해) 갈아입지 않았다. 나는 단지 따뜻하게 머물기 위한 노력으로 하루 24시간 단 한 벌의 옷을 입는 것이 필요했다.

다행히 나의 새 이웃들 대부분은 일년에 오직 한 번만 목욕했으며 결코 머리를 자르지 않아 비듬에 완전히 익숙해 보인다. 그것들이 한 번 내 옷깃에 떨어지거나 그들이 머리나 어깨를 내게 기대는 모습은 마치 TV광고와 같았다(그들은 결코 그 광고를 보지 못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비듬은 정말로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이 말은 비듬은 이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당신의 몸에 이가 기어다닐 때까지(아시아에서 제일 크다) 그리고 당신의 옷에 셀 수 없이 많은 서캐들이 들끓을 때까지, 또 당신이 1.5m 짜리의 촌충(내가 머물며 음식을 먹었던 집 사나이에게서 나왔다)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하지 않는 한, 또는 편모충증(鞭毛蟲症-편모충의 기생으로 생기는 장 질환)으로 고통받지 않는 한 당신은 정말로 불결하다는 말의 뜻을 모른다고 나는 주장한다. 나는 마을에서 생활했다.

불결한 원생동물은 불결한 환경에서 나오는 것이 확실하다. 나는 내가 그동안 경험했던 것과는 달리 모든 복통에 대하여 할아버지의 처치를 받았다. 나는 여러 날 고통에 시달렸다. 여러 시간 동안 손으로 배를 눌러 팽창한 복부에서 유황 가스를 뺐다. 끝날 때는 벽들이 내 주위에서 빙빙 돌았다. 장말 끔찍했다. 내가 약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왜냐하면 마을에서 하는 치료행위에는 닭의 머리를 자르고 신선한 피를 마시는 것을 수반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것으로 치료 되지 않으면(결코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스님들을 초청해 고대 티베트 만트라를 염송하며 보리가루로 환상적인 세 머리 용(반짝이는 눈, 갈라진 혀, 행동하는 모습의)의 조각을 만든다. 마지막으로 세 머리 용은 여러 조각으로 잘려져 마을 밖으로 던져진다. 그것은 그 병의 원인을 가져 온 나쁜 영을 �아내는 의식이다.

닭의 피를 마시도록 강요되었던 것을 제외하고 위장의 호된 시련을 극복하는데 가장 좋았던 부분은 다시 현지의 맛있는 음식을 먹는 일이었다. 나는 이 마을에서 나는 감자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확신한다. 감자는 삶은 후 녹은 야크 버터, 티베트 소금, 그리고 티베트 야생에서 채취한 짐부(zhimbu)라고 하는 향신료와 섞어 완성된다. 그리고 나면 당신은 이미 열반의 세계에 도착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이 입에 살살 녹는 감자를 신선한 야크 커드curd-응유凝乳 치즈의 원료)에 실짝 담근다. 아!!!!!!!!

내가 아침 점심 저녁에 먹는 음식은 소금 버터 차와 섞은 한 컵의 보리가루이다. 당신이 손으로 이겨 반죽을 만들고 야크 버터를 첨가하면 정말로 맛있다. 그들은 그것을 tsampa(발음은 "샴파sahm-pa")로 부르는데 나는 그것을 내가 좋아하는 음식인 부리토, 피자 그리고 우리 엄마의 초콜릿칩 쿠키에 새로 추가했다.

* [역주] 부리토(burrito)-고기와 치즈를 토티야(tortilla-옥수수 가루를 반죽하여 얇고 둥글 게 구운 것)로 싸서 구운 멕시코 요리.

야크 고기는 형편만 된다면 즐겁게 먹는다. 그러나 살생은 불교 교리에서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마을의 헌신적인 불교도 중 유일한 이교도여서 배고픈 가족들이 나에게 그런 지저분한 실제 작업을 시키기 위해 부르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이러한 의무(연구의 이름으로)에 동의하는 것이 주저되었다. 그러나 발을 다친 문제의 그 야크는 도축되어도 도축자가 그리 많은 업을 짓지 않는다고 해서 나는 빠르고 조용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며칠 후 두 번째 동물을 죽여달라는 압력을 받았을 때 그것은 악몽이었다. 모든 사람이 대경실색하고 무서워하리만큼 그 짐승은 죽기를 거부했다. 나는 그 짐승의 머리를 큰 망치로 계속 내리쳤다. 그 짐승은 갈색의 큰 눈으로 슬프게 나를 계속 주시했다.

내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빠르게 그 짐승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목을 벤 후에도 그 불쌍한 짐승은 여전히 죽기를 원치 않았다. 죽음의 고통을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나는 내 생애에 있어서 그 야크가 죽으려 하지 않던 날이 가장 기분이 좋지 않았던 날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 지었던 나쁜 업을 소멸키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마을 곰빠에 버터 램프를 밝힐 것이다.

가장 나쁜 업을 지은 사람은 2004년 마을 학교에서 꾀를 부리며 근무했던 실패한 교사라고 생각한다. 그는 2002년과 2003년에도 근무했으며 기억에 의하면 다른 해에도 근무했다. 그곳은 아주 추운 오지이기 때문에 네팔정부로부터 월급을 받고 그 작은 방 하나짜리의 학교를 운영하는 그 저지대 사람은 마을에서 자신의 정체를 폭로하기를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교사가 없는 아이들은 하루종일 밖에서 뛰어 놀 뿐이어서 황폐화 되고 있다. 소년들은 어린 불량배가 되어 돌멩이를 아무 데나 던지거나 때묻은 작은 손으로 뭐든지 훔치고 있다. 나는 아이들의 이를 잡아주었다.

이들 마을사람들의 삶에서 더욱 마음에 이끌리는 것은 지극한 단순성이다. 예를 들어, 각 집은 단지 하나의 방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가족이 중앙의 난방용 겸 요리용 화로에 빙 둘러 모여 먹고 잔다. 하루 종일 그런 단순성에 둘러싸여 있으며 마을 어느 집에도 의자 하나 또는 탁자가 없었다.

그것들은 내가 그 마을을 떠날 때까지 없었다. 그리고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일주일 간의 여정 도중 나는 한 곳에서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것을 보고 비로소 내가 그곳에 머무는 몇 달 동안 의자에 앉거나 테이블에서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을에서는 모든 사람이 항상 바닥에 다리를 교차한 자세로 앉아 역시 바닥에 놓인 그릇과 컵의 음식과 차를 먹고 마신다. 교차 다리 자세를 나는 빨리 익혔다. 그러나 두 달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무릎에 고통이 오기 전까지인 단 45분 만 그 자세로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리를 뻗어도 아무도 뭐라하지 않았다.

그곳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추수할 곡식과 무역 여행이 있는 곳이다. 또한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는 근처 산을 탐사할 많은 기회가 있다. 그 마을은 세계 8위봉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티베트와 네팔을 연결해 주는 네 개의 고산 고개로 둘러싸여 있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의 꿈이 실현되는 곳이다.  

나는 내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봄에 그 마을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한편으로 나는 겨울에 지낼 수 있는 장소로 거주비가 싸고 노트북을 충전할 전기가 충분한 그런 곳을 결정하려고 한다. 나는 히말라야 무역 마을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왔고, 작업은 시작되었다...

© Clint Rogers, 2004 

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3,680m

3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 티베트 국경 방문

4,2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20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7고소적응일 - 빙하호수와 사마곰빠 방문

2007. 10. 22(월)


 

아침에 잠이 깨어 풀어 둔 고도계의 온도를 보니 2도다. 어제만 해도 7도였는데 상당히 기온이 내려갔다. 그렇지만 우모복에 모자까지 쓰고 자니 침낭속에서는 춥지 않았다. 마나슬루의 일출을 보기 위해 텐트밖으로 나왔다. 캠프장에서는 산이 조금밖에 보이지 않아 먼저 나와 있던 무진행 보살님과 함께 바깥 길 건너편 언덕으로 올라갔다. 날이 쌀쌀하다.

세계 10위 봉인 안나푸르나(8091m)를 중심으로 서쪽 34km 지점에는  세계 7위 봉인 다울라기리(8167m)가 있고 동쪽 72km 지점에는 세계 8위 봉인 마나슬루(8156m)가 있다. 마나슬루 동쪽으로는 가네시 히말과 랑탕 히말이 연봉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은 그레이트 히말라야산맥(Great Himalayas)을 따라 거의 일직선으로 서 있어 네팔 히말라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곧 일출이 시작되었다. 희미하던 마나슬루 왼편 봉우리가 연분홍빛으로 물들더니 차츰 진해진다. 그쪽이 동쪽이다. 일단 해가 뜨자 변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불과 5분이 지나지 않아 두 봉우리 모두 오렌지빛으로 변한다. 모두들 탄성을 지르며 멋진 일출을 바라보았다. 어제 저녁 헤매던 남형 씨도 컨디션이 회복되어 일출을 구경한다. 기초체력이 튼튼하니 회복도 빠른 것 같다. 나는 콧물이 여전하다. 며칠 전부터는 입술이 말라 입술연고를 바르고 있다.

사마가온은 마나슬루가 가장 잘 보이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마나슬루 정상까지는 불과 9km밖에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다. 마나슬루 등반도 이곳에서 시작한다. 마나슬루를 어떤 이들은 왕관 모양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악마의 이빨로 묘사한다. 아무런 선입관 없이 보면 왕관이고 많은 희생자를 낸 한국 산악인들에게는 악마의 이빨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부르는 이름인 풍겐은 '팔찌'라는 뜻이다.

한국은 마나슬루 원정에 많은 희생을 치뤘다. 1971년 첫 번째 원정에서 김기섭 대원의 추락사로 실패했다. 1972년 두 번째 시도에서는 북동릉 7250m 지점에서 눈사태로 5명의 대원과 세르파 10명이 사망하는 히말라야 등반사상 유례가 없는 대참사를 당했다.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80년 4월 동국대 원정대의 서동환이 세르파 2명과 함께 북동릉을 통해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해가 산을 비추자 산 서편으로 연기같은 것이 바람에 휘날린다. 사실은 연기라 아니라 뜨거운 햇볕에 달구어진 눈이 기화되어 깃발처럼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다. ABC에서 보는 안나푸르나의 일출은 군불지피는 연기나 나듯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습이었다.

넓은 광장에는 30여명의 트레커들이 일출을 기다리고 있다. 날씨는 꽤 쌀쌀하다. 영하 5도는 되는 것 같다. 이윽고 일출이 시작되었다.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 위로 레이저쑈가 시작된 것이다. 빛은 제일 높은 안나푸르나 1봉 끝에 반사되었다. 빛이 닿는 순간 어둠 속에서 설산의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변했다. 황금빛이란 바로 이런 색을 말하는 것이리라. 가공되지 않은 천연의 황금빛.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햇빛이 닿자마자 봉우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열을 받아 기화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옛날 시골집에서 다 식은 구들장을 뎁히기 위해 어머니가 새벽 군불을 땔 때 아련히 피어나던 연기같았다. (붓다아이, <2002 ABC트레킹> day 8)

히말라야의 일출은 어느곳이든 황홀하다. 지금까지 구름 때문에 못 본 나가르코트를 제외하고는 어느 히말라야의 일출이든 실망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히말라야에서 일출을 본 사람은 다른 곳의 일출은 눈에 차지 않는다. 두 발로 며칠씩 땀흘리며 걸리적거리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4000m 고지에 오른 후, 추운 아침 8000m급 순백의 설산이 황금빛으로 물드는 모습은 바라보는 감동은 히말라야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장엄한 풍광이다.

오늘은 짐을 싸지 않아도 되는 고소적응일이라 한결 여유가 있다. 그것은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여서 이런 날은 하루종일 빈둥거리며 피곤한 몸을 추스릴 수 있다. 주방팀은 여전히 음식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들 역시 오늘은 주방도구를 옮기지 않아도 된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반드시 3500m 지점에서 고소적응일을 둔다. 안나푸르나 지역의 마낭, 쿰부 지역의 남체바자르가 3500고지 전후여서 그곳에서는 하루 더 머물여 고소적응을 한다. ABC나 랑탕의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따로 고소적응일을 두지 않는데 그것은 최종목적지가 4000m 정도로 히말라야에서는 비교적 낮은 고도이기 때문이다. 여차하면 바로 내려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안나푸르나 라운딩이나 쿰부 트레킹은 3500m 지점을 통과한 후에도 5000m를 향하여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 그래서 고소적응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을 무시하고 운행하다가는 도중에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 고소가 심해지면 땀께나 흘리며 오라갔던 길을 다시 내려가 고소을 완화시킨 후 올라가거나 아니면 아예 하산을 해야 한다. 그것을 무시하고 머뭇거리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통계에 의하면 히말라야 트레킹 중 해마다 두 명이 고소로 죽는다고 한다. 8만 명 중 두 명이니 확률은 아주 적다. 그러나 규칙을 무시한다면 당신은 그 두 명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고소는 적응될 때까지는 누구에나 예외가 없다. 히말라야 8000m 원정을 수십 번 다녀 온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대장 같은 '히말라야의 귀신'들도 마찬가지다. 고산병은 제로섬(zero sum)게임과 같아 6000미터의 베이스캠프에서 지내다가 2000m 이하로 내려와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몸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이 때는 '저산병'이라는 증상이 나타나는데 갑자기 많아진 산소량으로 인해 졸음이 쏟아지는 행복한 증상이다. 따라서 2주 이상 저지대에서 머문 후 고산으로 가면 몸은 다시 고소적응이 필요하게 된다. 이전의 적응은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 쓸모가 없다.

3천 미터는 고산병이 시작되는 높이다. 4천 미터만 되면 공기 중 산소는 평지의 60%밖에 되지 않고 5천 미터가 되면 53%로 뚝 떨어진다. 기압도 마찬가지로 낮아진다. 높이 오를수록 기압이 낮아지고 바다 밑으로 깊이 내려갈수록 기압이 높아진다는 책에서 배운 과학 지식을 바로 체험하게 된다. 그에 따라 우리 몸의 충격은 엄청나다. 산소가 없으니 피의 흐름이 저하된다. 적혈구의 운반을 산소가 하기 때문이다.

피가 잘 돌지 않으니 몸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 마치 주행 중 자동차 연료가 제대로 분사되지 않고 아주 조금씩 분사되는 것과 같다. 그 상태에서 자동차는 쿨럭거리며 비틀거릴 것이다. 가슴에 통증이 오기도 한다. 산소부족으로 혈액농도가 높아져 피가 잘 흐르지 못하는데다 심장도 팽창하여 박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이 없는 사람을 일러 '박력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혈액농도가 높으니 피를 걸러주는 콩팥에 부담이 간다. 소변색이 진한 갈색으로 변하는 이유다.

걸죽해진 혈액농도를 묽히려면 물을 많이 마셔야 한다.  부족한 산소를 보충하려고 호흡이 가빠진다. 또 낮은 기압으로 온 몸의 세포가 팽창하게 된다. 그래서 손발과 얼굴이 붓는 부종이 생긴다. 이것이 심하면 뇌나 폐에 물이 고이는 뇌수종, 폐수종으로 발전하여 치명상을 입는다.

2002년 겨울, 쿰부 트레킹 중 4750m의 추쿵에서 잘 때 호흡곤란으로 고통을 경험했다. 숨이 막히는 고통이었다. 산소가 부족하면 보통 폐에서 호흡을 빨리하여 산소를 보충하게 되어 있다. 달리기를 하면 호흡이 가빠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5천 미터 가까운 곳에서는 평지와는 달리 공기 중 산소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두 배는 빨리 호흡을 해야 한다. 그렇게 열심히 호흡을 한 후에 비로소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러나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게 되어 있다. 전문가들은 3천 미터 이상의 높이에서 우리 몸의 이상적인 1일 적응한계를 300m로 잡고 있다. 즉 하루 300m만 오른다면 별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것은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수많은 현장 경험을 토대로 연구한 것이다.

결국 히말라야에 오른다는 것은 이런 높이에 따르는 몸의 현상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가 제일 큰 관건이다. 추위와 폭설 같은 날씨문제는 2차적인 문제다. 추위는 장비를 잘 준비하면 되고 날씨는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러나 고도적응에 실패하면 무조건 내려가야 한다. 두통과 구토를 동반한 기력상실증이 오면 속된 말로 '히말라야고 나발이고' 아무 생각 없어진다. (붓다아이, <2004 랑탕 헬람부 트레킹> day 2)

마나슬루의 경우 3500 고지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8일이 걸린다. 그만큼 천천히 오르기 때문에 고소적응이 잘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 2000m 고도에서는 기압이나 산소량이 우리 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산병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운항 중인 비행기 기내 기압은 2000m 고도의 기압에 맞춘다.

고산병은 산소량이 해수면의 78%에 불과한 2500m부터 증세가 나타난다. 2500m 지점부터 '고산병미터기'가 작동한다. 제법 오래 2000m 지점에서 지냈으니 고산에 올라가도 고산병이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6일간 올라왔던 고도는 별 의미가 없고 이틀 전 2540m의 남룽을 지나면서부터 '미터기' 작동이 시작되었다. 그곳에서 이틀만에 3530m까지 올라왔으니 고도를 1000m 가까이 올렸다. 고소적응을 위한 조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마가온은 '마나슬루의 마낭'이다.

고소적응일이라고 하루종일 빈둥거리는 것은 좋지 않다. 가까운 곳이라도 고도가 조금 더 높은 곳에 올라갔다 오는 것이 좋다. 고소적응을 위한 불변의 원칙은 "낮에는 높은 곳을 오르고 밤에는 낮은 곳에서 잔다."이다. 높은 곳과 낮은 곳을 번갈아 오르내리면 우리 몸이 고소에 더욱 잘 적응한다는 것이다.

오늘 일정은 마나슬루 빙하 아래의 비렌드라  빙하호수 방문으로 정했다. 사마가온에서 고소적응일에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세 곳이 있다.  풍겐곰빠와 마나슬루 베이스캠프 그리고 비렌드라 빙하호수이다. 풍겐곰빠는 왕복 6시간 이상 걸리는 조금 힘든 곳이다. 그곳에서 보는 마나슬루와 마나슬루 동면의 풍겐 빙하는 멋있다고 하지만 그런 풍경만 보러 가기엔 너무 멀다. 풍겐곰빠는 1953년 겨울 산사태로 무너진 후 다시 재건되었기 때문에 특별히 오래된 유물이 없다. 이곳에 온 스넬그로브도 그래서 방문하지 않았다.

마나슬루 베이스캠프 역시 다녀 온 사람의 여행기를 보니 6시간이 걸리는 만만치 않은 코스다. 체력보충을 위해 쉬는 날인데 그렇게 힘든 운행을 할 필요까지는 없다. 빙하호수는 마을 바로 위에 있어 짧은 시간에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마나슬루의 주 빙하에서 흘러나온 물이 만든 호수다. 호수 위 서쪽 능선으로 오르면 마나슬루와 호수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아침에 보명화 보살님과 무진행 보살님이 롯지 뒤로 흐르는 맑은 개울에서 빨래를 했다. 트레킹 중 빨래다운 빨래를 한 유일한 곳이다. 휴식일이기에 가능했다. 이 마을 위로는 시간이 있어도 추워서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다. 내 빨래 몇 가지는 무진행 보살님이 같이 빨아주었다. 물은 예상대로 얼음물이라 고무장갑을 껴도 손이 시리다. 그러므로 히말라야에서는 고무장갑과 함께 내피용 장갑이 필요하다.

마을 주변에도 방목하는 야크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다. 물가 초지에도 많이 보인다. 정말 이 마을은 야크가 많다. 이상하게 염소나 양은 보이지 않고 있다. 야크가 이렇게 많으니 야크치즈 공장이 있지 않을까 해서 타시에게 물어보니 치즈공장은 없다고 한다. 가끔 나오는 야크치즈는 카트만두에서 미리 준비해 온 것이었다.

텐트 꼭대기에 빨래줄을 연결해 빨래를 널었다. 빨래줄은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필수품이다. 기왕이면 넉넉하게 7-8m 길이가 좋다. 마트에서 파는 기성제품보다 등산용품점에서 파는 가는 등산용 줄이 더 가볍고 부피가 적다. 양쪽 끝에 작은 알미늄 캬라비너를 묶어두면 설치에 편리하다. 등산점에 가면 그렇게 만들어 준다.

오전 8시, 침낭도 펼쳐 담장에 널고 하이킹에 나섰다. 롯지 바로 앞에 있는 마니월을 지나 마을을 벗어나니 관목숲 지대가 나왔다. 키가 큰 나무는 드문드문 보일 뿐이다. 수목한계선에 가까이 왔다는 증거다. 그동안 언제 수목한계선까지 오르나 했는데 운행을 계속 하니 결국 도착했다. 수목한계선이란 날씨가 추워 그 위로는 더 이상 큰 나무가 자라지 않는 고도를 말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목재용 나무를 뜻하는 팀버(timber)라는 말을 써 팀버라인(timber line)이라고 한다. 몇 번의 트레킹에서 살펴보니 히말라야의 수목한계선은 3800m 정도이다.

그곳 관목 지대에서 장엄한 모습의 마나슬루가 파노라마로 보였다. 이곳이야말로 마나슬루 일출을 가장 보기 좋은 곳이다. 캠프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곳이라 추운 아침에 움직이기가 쉽지는 않다. 캠프 근처에서 보는 모습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사진작가라면 당연히 이곳까지 왔을 것이다.

그러나 첫날은 그렇다치고 다음날도 그러지 못했다. 그럴 생각이 나지도 않았다. ABC는 롯지 바로 뒤가 안나푸르나 전망대여서 힘들지 않다. 랑탕에서 가장 멋진 일출을 볼 수 있는 로우레비나 야크도 롯지 위 길을 조금만 오르면 된다. 쿰부에서는 에베레스트 일출을 볼 수 있는 고쿄리나 칼라파타르에 오르기 위해 새벽 4시부터 5000m가 넘는 정상을 향해 2시간 올라가는 운행은 거의 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곳에서 일출을 보았다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고도가 높아 운행이 힘들 뿐더러 무지무지하게 춥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마나슬루 파노라마 일출은 조금만 수고하면 된다. 고도도 높지 않고 길도 거의 평지길이다. 그러나 10여일 간 운행으로 지치기 시작한 상태라 그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산이라 판단력이 떨어진 것 같다. 체력이 떨어지고 뇌에 산소공급이 부족한 고산지대에서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래서 항상 트레킹을 마치고 정상으로 돌아오면 아쉬움이 남곤 한다. 이런 여행기를 쓰는 이유도 다음에 방문할 사람에게 그런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코스에 대한 정보가 없는 곳은 현지에서 스스로 판단해야 하므로 항상 바쁘다.

CIMG0877.jpg곧 부리 간다키 강바닥으로 들어서 작은 통나무 다리를 건넜다. 우리 앞에는 어제 고소정을을 마친 서양팀이 삼도를 향해 가고 있다. 강바닥 돌이 특이하게 둥근 모양이 많고 모두 하얗다. 오래 전 빙하기 때는 이곳이 모두 얼음으로 뒤덮여 있었을 것이다. 주변의 바위들은 모두 빙하에 의해 운반된 빙퇴석이다. 빙퇴석을 영어로는 모레인(moraine)이라고 한다. 히말라야의 고산은 모두 이런 모레인 지대이다.

조금 가다가 빙하 호수가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나슬루가 바로 앞에 떡 버티고 있다. 그곳에서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독사진과 단체사진을 찍고었다. 타시에게 부탁한 사진은 역시 구도가 시원치 않다. 삼툭이나 타시나 못 찍기는 마찬가지다. 평소 카메라를 다룰 일이 없는 사람에게 좋은 구도를 요구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 이제는 증명사진으로 만족하고 있다.

관목숲을 헤치고 능선을 향해 오른다.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대충 능선을 목표로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갔다. 그런데 내려올 때 능선을 타고 내려오니 길이 있어 힘이 덜 들었다. 처음부터 오르막이 시작되는 능선 초입으로부터 올랐으면 관목을 헤치는 고군분투가 필요 없었다. 타시도 마나슬루가 이번이 두 번째라 미처 그 길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가려면 마을에서 나와 강바닥 길을 오르다가 중간에 만들어 둔 출입문을 통과하자마자 출입문과 연결되어 있는 왼편 돌담을 따라 빙하가 내려오는 계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된다. 우리는 조금 빙 돈 셈이다. 강바닥에 횡으로 긴 돌담을 쌓아 막아 둔 것은 야크들이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능선에 올라 바라보는 마나슬루와 빙하호수가 절경이다. 빙하에서 녹은 물이 작은 폭포가 되어 바위 절벽을 타고 내려온다. 가끔 빙하가 부숴져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왔다. 위에서 보면 작게 보여도 호수는 길이 950m, 너비 250m인 직사각형 모양으로 작은 호수는 아니다. 돌담이 호수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위성사진에서 확인해 보니 돌담의 길이가 약 1km다. 엄청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스탕에 흔히 있는 2-3km 짜리 돌담에 비하면 명함을 내밀지 못한다.

히말라야의 모든 빙하 옆 능선이 그렇듯 이곳도 무른 흙이 아슬아슬하다. ABC나 MBC 절벽 만큼 높지 않지만 자칫 흙이 허물어지면 한참 미끄러질 판이다. 칼스텐은 이곳에서 미끌어졌을 때 "얼음물 목욕을 하지 않기 위한 성공적인 노력의 결과 " 손에 가벼운 찰과상만 입었다고 한다.

바람부는 따가운 햇살 아래에서 마나슬루와 빙하와 진한 에메랄드빛 호수를 감상했다. 북쪽으로는 날카로운 능선을 지닌 쿠탕 히말의 연봉이 달리고 있다. 30분 정도 쉬면서간식도 먹고 햇볕을 쬐기도 하며 놀다가 9시 30분에 하산을 시작했다. 내리막길에서 보니 건너편 길가에 노란 텐트가 여러 동 있다.

캠프사이트가 모두 차는 바람에 저 팀은 어제 마을 바깥까지 밀려났다.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덕분에 멋진 일출을 감상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일출 한 번 편하게 보려고 일부러 캠프를 버리고 야외로 나가자고 할 수는 없다. 스태프들에게는 잠자리와 주방시설이 갖추어진 캠프사이트가 훨씬 편리하다. 트레커들이 산책 삼아 아침에 30분 걸어 일출을 감상하는 것이 여러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다.

천천히 걸어 캠프로 돌아오니 11시가 되었다. 이쪽 길에도 야크들이 많이 방목되어 있다. 돌담은 이녀석들의 '북진탈출'을 막는 수용소 담장이다. 빙하호수 왕복에 3시간 걸렸으니 가벼운 하이킹이다. 오는 도중 내친 김에 사마곰빠까지 방문하고 싶었으나 점심시간이 되어 오후 일정으로 돌렸다. 타시에게 오후에 곰빠 참배가 가능한지 알아보라고 했다. 잠시 후 돌아 온 타시에 의하면 법당은 하루 두 번, 오전 7시와 오후 6시 예공 때만 개방한다고 한다. 2005년 이곳을 방문한 안드레스의 말과 다르다.

우리는 사마가온에 11시 30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삼도(Samdo)까지는 3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지만 이미 오늘 로에서 고도를 350m 올렸다. 삼도까지 가면 다시 250m를 더 오른다. 라르키야 라를 오르려면 고소적응을 잘 해야 한다. 고산에서 하루에 500m 이상 오르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리고 어쨌든 사마가온은 멋진 마을이어서 그냥 통과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오후 전체를 쉬면서 전망 좋은 마을 주변을 돌아다녔다.

대부분의 마나슬루 원정대는 사마가온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사마가온에는 세 개의 롯지와 두 개의 캠프사이트가 있다. 원정대가 몇 주 후 돌아오면 보통 사마의 모든 맥주는 동이난다. 독일 등반가 디터 포르쉐(dieter Porsche)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등정에 성공하고 사마로 돌아와 그들이 묵고 있는 롯지는 물론 다른 롯지의 맥주까지 다 마셔 버렸다. 사마의 맥주가 떨어지자 로에서 사가지고 왔다. 그 결과 윗 계곡의 모든 맥주는 사라졌다. 타격을 받은 사람은 다음날 내려 온 다른 원정대 사람들이었다. 남은 것은 물과 콜라뿐이었으니...

사마가온 옆 작은 언덕에는 오래된 곰빠가 있다. 우리가 그곳에 갔을 때 마지막 햇빛이 비치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능하면 크게 소리쳤다. "오 라마, 오 라마, 어디 있나요." 그러자 5분 후 젊은 라마가 나타났다. 우리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는 100m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자다가 우리의 소릴 들은 것이다. 그는 즐거이 아름다운 곰빠를 보여주었다.(안드레스, <2005 마나슬루 트레킹> day 9)

점심을 먹고 쉬다가 오후 1시 30분 사마곰빠로 올라갔다. 마을 북쪽 작은 언덕에서 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사마곰빠는 누프리 계곡에서 제일 역사가 깊은 곰빠다. 주지스님(head lama)은 마을에 살고 있고 주법당 주변에 있는 30여 채의 토굴에 비구, 비구니 스님들이 정진하는 독특한 형태의 토굴촌이다.

CIMG0880.jpg비록 법당은 들어갈 수 없지만 안드레스의 여행기에서 내부 사진을 다 보았으므로 불만은 없다. 사진을 보니 지금까지 보았던 다른 지역의 곰빠와 별 차이가 없다. 독특한 점이라면 주불을 무스탕의 로게까르 곰빠처럼 빠드마삼바바를 모시고 있는 점이다. 가장 독특한 점은 법당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스님네들의 토굴이다. 토굴답게 아주 소박한 모습이다.

집 앞에서 곡식을 털며 겨울 준비를 하는 비구니 스님 등 몇몇 스님들이 보였지만 많은 집은 주인이 출타 중인지 나뭇가지로 대문을 걸어 두었다. 칼스텐의 여행기에는 스님의 초청을 받아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고 해서 나도 혹시 누가 불러줄까 싶어 어슬렁거렸으니 그나마 보이는 스님들도 일에 열중할 뿐 별 반응이 없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캠프로 내려오는 길에 마을에서 올라오는 한 노비구니 스님과 "타시델레" 인사를 나누었다. 그렇게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하지는 않게 사마가온 곰빠 참배를 마쳤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불교가 낮설지 않은 한국인 트레커들의 기록에는 사마곰빠를 방문했다는 글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서양인 트래커들의 기록을 보면 예외없이 곰빠를 방문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히말라야 트레킹을 단순한 자연을 즐기는 것에 만족하는 반면 서양인들은 자연은 물론 그 지방의 문화를 아우르는 경험을 추구한다. 서양인들의 그런 적극적이고 여유 있는 사고방식이 오늘날 그들의 문화와 학문을 더욱 다양하고 풍부하고 심도있게 발전시킨 원동력이다.

무스탕에 대한 연구의 지존이 미셸 페셀이라면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정보는 스넬그로브가 꽉 잡고 있다. 그의 책은 전체를 개관하는 도입부분에 32쪽, 돌포 지역에 130쪽, 깔리 간다키와 무스탕 지역에 40쪽, 마낭과 나르 푸 가온 지역에 37쪽, 그리고 마나슬루 지역에  24쪽, 카트만두 귀로에 10쪽을 할애하고 있다. 그의 책에서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비중은 그리 크지 않지만 그의 기술은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이자 가장 전문적인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도 무스탕에 대한 정보가 여전히 페셀의 책에 근거를 두고 있듯 마나슬루 지역에 대한 정보는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에 근거를 두고 있다.

snellgrove_route_00.jpg1956년 9월 9일 늦은 오후, 스넬그로브는 비를 맞으며 사마가온에 도착한다. 3월 1일 카트만두를 출발했으니 벌써 여행기간이  6개월이 넘었다. 그는 빔탕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어 내려오는 중이다. 이제 그가 쓴 사마가온 대목을 번역하려고 한다. 어차피 이번 기회가 아니면 스넬그로브의 글을 번역할 일도 없을 뿐 아니라, "~라 카더라" 식의 간접화법 보다 글쓴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가장 명료하다.

우리는 늦은 오후 사마가온a)에 도착하여 사원으로 올라갔다. 우리의 텐트가 아닌 다른 어떤 대피소를 찾기 위해서다. 사원은 주 법당과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30채의 단층 집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비구니 스님들의 처소다. 모두들 집에 거주하고 있으며 그 중 한 스님이 우리를 초대하여 자기 집에서 그날 밤을 보낼 수 있도록 했다. 그 스님은 이 집은 마을에 살고 있는 라마의 확실한 소유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혹시 라마가 화를 낼 지도 모르니 하룻밤 이상 머물지 말기를 간청했다.

그래서 우리는 임시 거처를 얻어 물에 흠뻑 젖은 상자들을 풀고 내용물을 텅 빈 방 가운데에 펼쳐놓았다. 방은 어두웠으나 편안했다. 천장의 덮개가 달린 연통은 아주 커서 방에 연기가 차지 않았다. 우리는 불가에 둘러앉아 차를 마시고 우리의 마지막 가리발디(Garibaldi, *건포도를 넣고 살짝 구운 비스킷) 비스킷을 먹으며 인생은 어쨌든 즐거운 것임을 느꼈다. 더구나 빠상은 바북(Babuk, *라르키아 바자르)에서 반 마리 분의 양고기를 사왔으므로 우리는 카레로 양념한 신선한 고기와 무로 벌일 축제를 기대할 수 있었다.

다음날도 여전히 비가 왔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크고 밝은 사원 주방으로 옮기고 사원 전체에 대한 조사를 했다. 건물들은 돌로 지었다. 곰빠는 마낭 동쪽의 모든 다른 곰빠와 마찬가지로 하얀색을 칠했다. 다른 건물은 자연 돌색 그대로 회색이다. 특별히 주목할 점은 두껍게 묶은 관목덤풀이다. 그것들은 곰빠 담장 위 뿐만 아니라 출입문과 창문 위 차양에도 놓아두었다.

곰빠 내부에서 우리는 테라코타로 크게 조성한 '연꽃에서 태어난 자'(빠드마삼바바)가 중앙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큰 청동상이 왼편에 있다. 이 청동상은 최근 네팔 밸리의 파탄에서 온 장인이 조성한 것이다. 그곳에는 또 작은 조형상도 셋 있는데 그것은  '연꽃에서 태어난 자', 11면(eleven-headed)  '관세음보살', 그리고 수퇘지 머리를 한 여신 바즈라바라히(Vajravarahi)다.

왼편 벽에는 16나한과 '연꽃에서 태어난 자'의 8현신, '죽음의 왕' 그리고 다른 사나운 모습의 신장들이 그려져 있다. 오른편 벽에는 여러 불보살들의 상이 그려져 있다. 이 사원은 닝마파로 프레스코 벽화는 나무판에 그려져 벽에 부착되어 있다. 나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지역 모든 곰빠의 특징이다. 근처의 작은 곰빠에는 경전이 있다.

오후에 마을에서 라마가 올라왔다. 우리는 그가 전에 무스탕의 로게까르 곰빠에서 잠깐 몇 마디 말을 나누었던 그 순례 라마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이전의 그 인연으로 현지에서 우리는 힘을 얻었다. 그것은 우리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스님들과 마을 사람들은 라마를 따라 방으로 들어온 후 곧 우리에게 전에 이곳을 방문했던 다른 '갸미'(gya-mi, * 사악한 종족)와 세르파들의 나쁜 행위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 경우 '갸미'는 1953년부터 1956년까지 네 번에 걸쳐 마나슬루에 원정을 온 일본 등반대들이다.

마을 주민들은 전염병이 돌아 가축과 양들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죽은 직접적인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심한 피해는 18명이 죽은 풍겐 사원의 파괴다. 풍겐(dpung-brgyan=팔찌)은 마나슬루의 현지 이름이며 그곳에 거주하는 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 신은 첫 '갸미' 등산가들이 돌아간 그 해 겨울, 무례한 그의 성소 침입의 대가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알 수 없는 규모의 무시무시한 산사태로 그의 분노를 보인 것이 확실하다고  마을 사람들은 주장했다.

사원은 사실상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리고 비구니들이 대부분이었던 그곳에서 살던 스님들은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조금 주저하며 그들에게 만일 그것이 진짜 이유라면 신은 일본등반대에게 그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 보였다. 사마와 로의 주민들은 곰빠의 관리자로서 모르는 외국인들의 접근을 금지시키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이것은 그들이 다음 해 일본인들이 다시 왔을 때 적의를 표출하며 근처 어느 산도 등반을 허락하지 않은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들의 이러한 완강한 태도 때문에 일본 등반대는 1956년에야 마나슬루에 올랐다. 그들의 성공은 이런 쓴 맛을 대가로 치룬 후에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다른 곳을 등반하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민들은 일본이 잃어 버린 사원 재건에 가장 많은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일본은 불교국가이며 그곳에서 번창하는 교리는 티베트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믿지 않았다. 그들은 티베트어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아무도 불교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b) 티베트어를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신성한 경전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그들은 티베트어 불경 외에 다른 경전은 알지 못한다).  

우리는 그들과 논쟁하는 것이 피곤하므로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척 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 축복 속에 함께 하기를 확실히 원했다. 그 회의에서 조용히 있던 라마는 나중에 우리에게 왜 외국인들은 산에 오르기 위해 오는가 물었다. "그들은 정말로 어떤 사람들이 추측하고 있듯이 정상에 있다는 보물을 발견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단지 카트만두에 있는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고 싶어하는가?"

우리는 등반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라마에게 그의 개인 법당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즉시 우리를 안내했다. 그 방은 25평방피트 정도의 낮은 방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다시 장식되어 있었다. 조각이 아름다운 서가가 맞은편 벽에 진열되어 있고 그곳에는 닝마파의 중요한 특별 경전인 63권의 고귀한 보전(Precious Treasury)이 들어 있었다.c) 

왼편 벽의 나무판에는  사나운 신인 카갸(Ka-gyä)와 그의 여섯 호위자들이 그려져 있다. 그 오른쪽에는 닝마파의 주요 네 가지 의례를 대표하는 신들과 라마들의 네 가지 다른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경우에서 '연꽃에서 태어난 자'는 중앙신이다. 그림들은 모든 현대 티베트 그림과 마찬가지로 밝은 색이며 확실히 잘 그려졌다. 화가와 조각가는 로의 사람이다. 그의 이런 멋진 작품을 본 후 우리는 새로 재건된 풍겐 사원 방문을 하지 않기로 했다. 완전히 파괴된 후라 그곳에는 역사적이고 흥미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마곰빠조차 과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라마는 오래 전 화재로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설명했다.(David L. Snellgrove, <Himalaya Pilgrimage>, pp. 244-247)

그곳을 다녀 온 지금 이 글을 읽으니 50여 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이 든다.


<각주>

a) 사마가온의 현지 티베트 이름은 Rö이다. (back)

b) 1952-3년 한 학자 그룹이 이들 등반대를 따라 왔다. 그들은 조사결과를 세 권의 책으로 냈다. <네팔 히말라야의 동식물(Fauna and Flora of the Nepal Himala)>(1955), <네팔 히말라야의 땅과 작물들(Land anf Crops of the Nepal Himalaya)>(1956) 그리고 <네팔 히말라야의 사람들(peoples of the Nepal Himalaya)>(1957), ed. H. Kihara, Japan society for the Promotion of Science, Tokyo. (back)

c) 이것의 유럽본은 로마에 있는 투치 교수 서재(Professor Tucci's library)와 런던의 동양학부(the School of Oriental Studies)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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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안드레스가 찍은 사마곰빠 내부 사진

trek 10. 사마가온(고소적응일-빙하호수 방문)   (top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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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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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슬루 빙하

개울 찬물에 빨래를 하다

텐트 사이에 빨래를 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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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면 관목숲이 나온다. 가는 도중 혜명화 보살이 티베트 가족을 만나 사진을 찍고 액정화면을 보여주자 아주 신기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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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서 본 마나슬루 파노라마. 이곳에 나와 일출을 보면 정말 멋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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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 팀과 같이 강바닥을 걷다. 그들은 어제 고소적응을 마치고 삼도로 가는 중이다. 우리는 다시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빙하호수 능선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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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향하던 중 마나슬루를 배경으로 처음으로 '마나슬루 트레킹 증명사진'을 찍었다. 뒤쪽 관목숲 능선으로 올라가야 빙하호수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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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렌드라 빙하 호수 능선에서 본 마나슬루와 빙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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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능선에서 본 북쪽 풍경. 오른쪽은 설산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쿠탕 히말 연봉이다. 삼도에서는 왼쪽 산에 가려 마나슬루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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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에서 내려오면서 보니 야외 캠프가 보였다. 저곳에 캠프를 치면 아침에 멀리 나갈 것 없이 최상이 마나슬루 일출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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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 오는 길에 만난 방목 하는 야크들. 어느 동물이건 하얀색은 길조로 알려져 있는데 우연히 하얀 야크를 두 마리나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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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가온 곰빠. 주 법당을 중심으로 30여 채의 토굴이 둘러싸고 있다. 이를테면 토굴촌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은 자급자족한다. 한 비구니 스님과 신도가 곡식을 털고 있다. 오른족 하단 사진은 곰빠에서 본 사마가온 마을 모습. 초르텐이 많이 보이는 큰 마을이다.

스웨덴서 얼굴인식 SW 등장
국내선 “색깔 등 폭넓은 이미지 검색에 주력”
2008년 01월 31일 | 글 | 이정호 기자 ㆍsunrise@donga.com |
 
스웨덴의 한 소프트웨어 기업이 동영상에 등장하는 사람의 얼굴을 검색할 수 있는 서비스를 조만간 인터넷에서 제공할 것이라고 밝혀 화제다. 얼굴 인식기술은 테러 방지 등 보안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주로 개발돼 왔지만 이번 기술은 영화와 같은 동영상 콘텐츠를 찾는 데 이용될 예정이어서 일반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 관련 업계에서도 이 같은 기술이 차세대 검색의 핵심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외국에 비해 기술 수준은 아직 낮지만 얼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진과 동영상을 검색하는 데 개발의 초점을 맞추고 있어 향후 활용의 폭은 더 넓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국내에서 불고 있는 손수제작물(UCC) 열풍에 대응하는 것은 물론 인터넷 쇼핑몰 등 특화된 시장에서도 쓸 수 있는 제품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스웨덴서 2분기에 ‘얼굴 검색’ 기술 나와

로이터 통신은 스웨덴의 영상인식 기술 기업 폴라 로스의 니콜라이 니홀름 대표가 올해 2분기 중에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얼굴인식 서비스를 제공할 뜻을 밝혔다고 최근 보도했다. 검색 대상은 얼굴이 등장하는 동영상이다.

이 기술이 주목받는 것은 현재와는 전혀 다른 검색 방식 때문이다. 지금은 동영상 제공업체가 특정 얼굴이 등장하는 동영상에 일종의 ‘전자 꼬리표’를 붙인다. 눈으로 각각의 동영상을 일일이 확인해야 하는 것이 필수다. 로이터는 이런 방식으로는 6~7개월마다 두 배씩 늘어나는 동영상을 감당하는 것이 역부족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비해 폴라 로스사가 내놓은 소프트웨어는 동영상의 순간적인 정지 영상을 2차원 사진처럼 스캐닝한 뒤 이를 3차원으로 바꾼다. 이런 방식으로 모아 놓은 데이터 가운데 사용자가 원하는 인물의 얼굴을 골라서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과정은 소프트웨어가 자동으로 진행한다. 사용자는 지금처럼 ‘리차드 기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그대로 치면 되지만 수집되는 동영상의 양과 정확도는 지금보다 훨씬 향상된다. 꼬리표가 달린 한정된 수의 동영상이 아니라 인터넷 공간의 모든 동영상이 검색 대상이 되는 데다 꼬리표 부착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오류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국내선 다양한 이미지 검색에 힘 쏟아

UCC 바람이 불고 있는 국내에서도 이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다. 그러나 국내 업체들은 얼굴뿐만 아니라 다양한 동영상과 사진, 그림을 망라해 검색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데 역점을 둔다.

국내 검색 소프트웨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 기술이 실용화되면 사용자는 ‘사랑’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해 멜로 영화나 드라마, 연인들의 프러포즈 동영상을 지금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수집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실생활에 이용될 수 있는 폭도 얼굴 인식에 한정되는 기술보다 넓다. ‘스키 강습’이라는 검색어를 통해 내려 받은 동영상으로 가정에서 활강 자세를 연습할 수 있다. 또 ‘온천’을 입력해 일본 현지 온천의 시설과 주변 경치를 미리 확인할 수도 있다. 이런 검색은 지금도 일정 수준 가능하긴 하지만 사용자는 정확한 정보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얻을 수 있다.

동영상의 순간적인 정지 화면을 사진처럼 인식해 검색어와 부합하는 영상을 찾는 것이 이 기술의 핵심인 만큼 사진과 그림 또한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검색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꼬리표가 달리지 않은 자료는 검색 범위에서 원천적으로 제외하는 지금의 검색 시스템이 일대변화를 일으키는 셈이다.

하지만 국내 제품의 기술력이 아직 소비자를 만족시킬 정도는 아니다. 예를 들어 현재 기술로는 사진 10만장을 검색하는 데에도 최대 20초가 걸린다. 동영상을 검색할 때에는 이보다 훨씬 오랜 기다림을 각오해야 한다.

국내 업체들은 일단 소프트웨어가 특정 색깔을 구별하는 기술을 상용화의 1차 후보로 삼고 있다. 모니터 위에 팔레트처럼 생긴 메뉴판을 띄운 뒤 사용자가 원하는 색을 클릭하도록 하고, 그것과 가장 유사한 색을 띤 물건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영상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검색 기술의 초보 단계라 할 수 있다. 업계에서는 이 기술이 의류나 구두 등 색깔이 큰 의미를 지닌 품목을 찾을 때 요긴하게 쓰일 것으로 기대한다.

검색 소프트웨어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동영상을 포함한 국내의 이미지 검색 기술은 아직 소비자 요구를 100% 맞출 정도는 아니다”며 “일단 인터넷 쇼핑몰 등 데이터가 비교적 적은 곳을 목표로 연구개발과 제품 구축 노력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산다는 것

"난 아플 때 의사를 찾아갑니다.
왜냐하면 의사들도 살아야 하니까요.
의사는 내게 처방전을 써 줍니다.
그러면 나는 그것을 가지고 약사에게 갑니다.
약사에게 기꺼이 돈을 지불합니다.
약사도 살아야 하니까요.
약을 타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하수구에 던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나도 살아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 오쇼 라즈니쉬의《배꼽》중에서 -


* 요즘 감기가 유난히 심하다네요.
우리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입니다.
우리 몸이 아플 때는 나쁜 세균을 무찌르고 있을 때니까요.
감기약을 먹을수록 치료가 늦어진다는 보고를 본 적이
있습니다. 감기약은 나쁜 세균을 빨리 무찔러주지만,
좋은 균들의 힘을 약화시키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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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추억이 많은 아이


좋은 추억, 특히 어린 시절
가족 간의 아름다운 추억만큼 귀하고 강력하며
아이의 앞날에 유익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간직한
아름답고 신성한 추억만한 교육은 없을 것이다.
마음속에 아름다운 추억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사람은
악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추억들을
많이 가지고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삶이 끝나는 날까지 안전할 것이다.


- 도스토예프스키의《카라마조프의 형제들》중에서 -


*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은 이야기가 되고,
그 이야기는 다시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되고,
종국에는 그 아이의 삶이 됩니다. 꿈이 없고 정서가 메마른 것은
가슴에 품은 추억과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최고의 가정 교육은 추억을 만들어 주는 것이며,
최고의 사랑은 그 추억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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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녀 사이


어느 가정에도
좋은 일과 궂은 일, 견디기 힘든 순간
그리고 난처한 사건들이 있게 마련이다.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만큼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도 없다. 그러나 이 관계처럼 아름다운 것도
없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우리에게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꼭 붙잡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중에서 -


* 부모와 자녀 사이...
참으로 어려운 관계입니다.
정답도 해답도 지름길도 없습니다.
늘 고심하고 잘 다지면서 가야 하는 운명의 관계입니다.
자녀에게 존경받는 부모, 부모에게 자랑스런 자녀!
행복의 최우선 조건입니다. 그래야 어려울수록
견줄 수 없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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