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k 8. 갑 - 남룽 - 리히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고산 트레킹이 시작되는 누프리 계곡

2007. 10. 120(토)


 

며칠 째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 기침은 나오지 않는데 콧물이 끊이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차콜라에서 땀을 잔뜩 흘린 후 찬물에 목욕한 것이 원인인 것 같다. 무진행 보살님이 주는 감기약을 먹고 있지만 쉽게 나을 기미가 안 보인다. 그래서 주머니에는 여차하면 코를 풀 수 있도록 휴지를 준비하고 있다.

출발 전 1리터짜리 물통에 뜨거운 물을 2/3 정도 받고 차를 조금 넣는다. 둥글레차와 우롱차(烏龍茶), 녹차를 가져왔는데 우롱차가 제일 인기가 있다. 둥글레차 티백은 바로 먹어야지 물병에 오래 넣어두면 흐물흐물해져 지꺼기가 나오고 맛도 별로다. 우롱차의 향은 히말라야의 물 맛을 먹기 좋게 바꾼다. 이 차가 물이 좋지 않은 중국에서 발달된 이유를 알겠다. 녹차는 물이 나쁘면 무용지물이어서 그냥 생으로 먹는 편이 나았다. 우롱차는 차잎이 물에 풀리면 아주 커지므로 10알 정도만 넣어야 한다. 말린 잎이 작다고 조금 많이 넣으면 병의 반이 차잎으로 찬다. 찻물도 너무 진해진다.

7시 15분 캠프를 출발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숲길이다.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 계곡에 놓인 나무다리가 보였다. 저 다리를 건너가는가  했는데 계속 직진한다. 그 다리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건너편 마을로 가는 길이란다. 무성한 숲길이 계속되었다. 자주 보이는 마니월과 수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마니차만 없다면 이곳이 히말라야가 아니라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 요세미티 계곡을 걷는 기분이다. 경사도 완만한 오르막이라 힘들지 않았다.

맞은 편 계곡 우람한 절벽을 바라보며 산길을 돌아가다가 8시 경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갔다. 이곳은 강이라기 보다는 계곡 수준이다. 상류로 올라갈수록 계곡도 좁아지고 수량도 적다. 한 곳은 병목현상이 있어 물이 우렁차게 흐른다. 양쪽 바위가 물에 닳아 반들반들하다.

이곳은 앞 장에서 소개했던 스넬그로브의 글 초반부의 "우리는 불어난 급류 위에 놓인 단단한 나무다리를 건너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곧 천연 바위다리를 통해 오른쪽 사면으로 되돌아 왔다. 아래쪽 깊은 계곡에는 부리 간다키가 포말과 세찬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에 해당하는 곳이다. 스넬그로브는 위에서 내려왔고 우리는 위로 올라가고 있다. 지금은 천연다리 대신 작은 다리가 있다. 그 옆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무너진 외나무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 무성한 숲 사이 바위 옆에서 휴식. 랄리구라스(로도덴드론) 나무와 대나무, 전나무, 호랑가시 나무가 함께 섞인 숲이다. 가이드북을 보니 남룽 까지는 이런 길이며 원숭이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끔 답답한 숲 속을 빠져나와 멋진 풍광을 볼 수 있다니 다행이다.  그리고 곧 스넬그로브의 책에 나온대로 바위 위에 걸쳐진 나무다리를 통해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갔다.

무성한 숲 길이 계속되고 있다. 산기슭 전체가 큰 나무들의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무성한 숲이 있는 서쪽 능선 위로 설산의 이 봉우리가 보이고 있다. 위치상으로 볼 때 마나슬루 능선은 아니고 나디출리와 히말출리, 보우다히말 연봉 같다. 수풀이 무성하니 길 가 바위에 석이(石耳) 버섯이 가끔 보인다. 야생화에 일가견이 있는 무진행 보살님과 보명화 보살님이 운행을 멈추고 열심히 딴다. 드물기도 하고 운행 중이라 양이 많지는 않다.

이곳 사람들도 석이 버섯을 먹는지 모르겠다. 6년 전 칠불사 살 때 대중공양 들어온 것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쫄깃쫄깃한 것이 정말 맛이 좋았던 기억이 났다. 히말라야의 석이는 어떤 맛일까 궁금하다. 마나슬루에서 석이 버섯이 날 만한 곳은 숲이 무성해 그늘이 져 이끼가 많은 이곳이 유일할 것 같았는데 나중에 빔탕에서 띨제 내려가는 길도 나무에 이끼가 많은 숲이어서 그곳도 가능성이 있다.

9시 10분 현재 계속 오르막이다. 고도계는 2540m를 가리키고 있다. 30분 후 남룽(Manrung) 마을을 알리는 이정표가 나타났다. 마을로 들어 가는 초입에서 마을에서 나오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만났다. 그 중 한 사람인 체왕 도르제 라마는 3년 전 한국에서 일하고 왔다해서 깜짝 놀랐다. 옷을 보니 스님인 것 같다. 이름 뒤에 붙은 라마라는 것도 그렇다. 네팔 사람들의 제일 뒤에 오는 이름은 그들의 종족을 표시한다. 네팔에서 라마족은 없다.  삼툭 구릉 라마처럼 환속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이 깊은 마나슬루 산중에 사는 사람이 한국에 일하고 왔다는 것이 신기하다. 과연 티베트 종족은 유목민답게 국제적이다. 젊은 사람도 가기 힘든 형편인데 40세는 넘어보이는 이 아저씨가 갔다는 것도 놀랍다. 영어나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고 더듬거려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했다. 어쨌든 반가운 마음에 가지고 있던 커피사탕 몇 개를 만난 기념으로 주었다.

남루(Namru)라고도 하는 남룽에는 10시에 도착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을이 협소하다. 롯지에서 운영하는 식당 안에 가게도 하나 있고 등유를 판다는 간판도 있지만 별로 머물고 싶은 분위기는 아니다. 하루의 운행을 멈추기엔 너무 이른 시각이라 원래의 계획을 변경하여 여기서 점심 먹고 다음 마을인 리히까지 가기로 했다. 그러다보니 처음 계획했던 갑-남룽-로-사마가온의 일정은 갑-리히-사마가온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하루의 여유가 더 생겼다. 사마가온에서는 하루 휴식일이 있으니 남는 하루는 마지막 마을인 삼도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했다. 고소적응일은 많이 둘수록 좋다.

마을 길가 담장 위로 장작이 많이 쌓여 있다. 티베트나 무스탕에는 나무가 귀해 평평한 지붕 가에 장작을 빙 둘러 많이 쌓는 것으로 부를 과시한다고 하는데 이곳은 흔해빠진 것이 나무라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지붕도 판석이 아닌 판자로 얹은 너와지붕이다. 마을 자체는 앞 뒤의 높은 산 때문에 답답한 느낌을 준다.

식당은 그런대로 괜찮다. 입구쪽 진열장에는 콜라, 라면, 사탕, 맥주 위스키 등이 잔뜩 있다. 2500고지에서 운행을 멈추고 있자니 춥다. 도착하자마자 배낭을 열고 자켓을 걸쳤다. 출입문에서 찬 바람이 들어왔고 깨진 창문에서도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얼마 후 안드레스의 여행기에 나오는 술취한 사우지(남자 주인)가 들어오더니 아무 말없이 종이를 내미는데 초등학교를 위한 기부금 권선문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영수증을 불쑥 내미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100루삐만 기부했다. 말 한마디에 천량빚을 값는다고 좀 더 친절하게 설명을 하고 도움을 청했다면 500루삐는 기부받았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11시 15분 출발했다. 주방팀들이 미리 도착해서 요리를 준비하므로 점심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지류에 걸쳐 있는 전형적인 히말라야 스타일의 나무다리를 건너니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경찰 한 명이 길가에 책상을 내놓고 기다리고 있다. 타시가 등록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 전진했다.

마을을 벗어나는 오르막을 올라 무성한 소나무 숲 사이에 있는 마니월을 지나니 시야가 툭 터졌다. 12시 경 반짬(Bhanzam)이라는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둔덕에 올랐다. 마을 이정표는 반짬인데 트레킹 지도에는 바르참(Barchham)으로 표기되어 있다. 넓은 운동장과 돌집이 있는 마을인데 운동장은 자세히 보니 보리밭이다. 아직 추수 전인 누런 보리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따뜻한 햇살을 받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마을이다.

그러나 마니월이 있고 돌담이 정겹게 쌓여 있는 마을에 인적이 없으니 어쩐지 슬쓸하다. 이런 곳은 아이들이 뛰놀고 있어야 그림이 완성된다. 사람이 살고 있는 마을인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정말 넓은 보리밭이다. 뒤를 돌아보니 설봉이 보인다. 가네시 4봉이다. 마을을 지나니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고도는 점점 높아져 본격적인 고산 트레킹이 시작되었다.

춤 계곡 입구에서 시작되는 쿠탕 계곡은 남룽을 지나면서 누프리(Nupri) 계곡으로 이름이 바뀐다(쿠탕을 하누프리[lower Nupri]로 부르기도 한다). 누프리는 '서쪽 산들'이란 뜻이다. 그르므로 누프리 계곡은 '서쪽 산들의 계곡'이라는 뜻이다. 이 계곡이 마나슬루, 라르키아 피크 등 서쪽에 있는 산에서 내려와 쿠탕 계곡까지 계속 동진하는 모양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히말라야에 가는 사람은 원정대는 말할 것도 없고 트레커들도 필연적으로 티베트어를 접하게 된다. 그래서 몇 가지 말의 뜻을 알고 가면 좋다. 티베트어로 동쪽은 샤르(shar), 서쪽은 눕(nup), 남쪽은 로(lho), 그리고 북쪽은 창(chang)이다. 세르파라는 말은 샤르-파(Shar-pa)라는 티벳어에서 나온 말인데 파(pa)가 '~지방 사람'이란 뜻이므로 '동쪽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무스탕에서 중국에 대한 저항 게릴라 활동으로 유명했던 캄파는 '캄 지방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티베트에서도 용맹하기로 유명한 캄 지방 사람들이다.

에베레스트 서쪽에 눕체(Nuptse,7855m )가 있고 남쪽에는 로체(Lhotse, 8516m)가 있다. 로체와 거의 붙어 있는 동쪽 봉우리는 로체샤르(Lhotse Shar, 8400)다. 로체샤르는 세계에서 네번째로 높은 산인 로체의 위성봉으로 세계에서 7번째로 높은 봉우리인데 8,000m가 넘으면서도 흔히 8,000m 이상의 고봉을 의미하는 14좌에는 들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독립봉의 성격이 강하다고 보아 8,505m의 얄룽캉과 함께 16좌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또 에베레스트 북쪽에는 북쪽에는 창체(Changtse, 7553m)가 있다. 이 산들을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눕체는 서산, 로체는 남산, 로체샤르는 남동산, 창체는 북산이다.

'탕'은 티베트어로 '평원'이란 뜻이다. 무스탕의 수도 로만탕의 원래 이름은 '만탕'으로 '기원의 평원'이란 뜻이다. 마나슬루 트레킹에서 라르키아 라를 넘어 이르는 곳 이름은 빔탕인데 '모래의 평원'이란 뜻이다. 그곳에는 정말 빙하에서 부서져 나온 마사토 같은 모래가 많다. 따라서 티베트 북부에 있는 고원인 '창탕(Changtang)'이 '북쪽 평원'이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창탕에서 발원하여 히말라야와 평행선을 이루며 동진하다가 나중에 뱅골만으로 빠지는 강 이름인 창포(Changpo)의 창도 북쪽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티베트계 사람들의 이름은 종종 그가 태어난 요일을 취한다. 티베트어로 일요일은 니마(Nima), 월요일은 다와(Dawa), 화요일은 밍마(Mingma), 수요일은 락빠(Lhakpa), 목요일은 푸르바(Phurba), 금요일은 빠상(Pasang), 토요일은 �바(Pemba)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이다. 락빠는 영화 <히밀라야>에서 죽어서 돌아오는 틴레의 아들 이름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바로 야크 등에 실려 오는 남편을 보고 그의 아내 뻬마가 "락빠!"하고 소리치며 우는 장면이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를 두어 번  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런 이름을 가진 세르파족의 가이드나 포터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아주 흔한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 무스탕의 로만탕에서 만난 니마는 일요일생이고, 지금 우리의 주방팀에 있는 빠상과 푸르바, 그리고 밍마 세르파의 출생요일은 각각 금요일과 목요일, 화요일임을 알 수 있다.

'행운(good luck)'을 뜻하는 타시(Tashi)라는 이름도 티베트에서는 아주 흔한 이름이다. '장수(long life)'을 뜻하는 이름은 체링(Tsering)이고 '행운'을 뜻하는 이름은 소남(Sonam)이다. 이렇게 기복적인 이름을 선호하는 것은, 삶이란 끝없는 고통이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불확실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한 인간의 보편적인 소망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다고 소망대로 모든 이들이 무병장수를 이루기는 어렵다. <보살의 37가지 수행>을 가르친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톡메 상포 스님(1285-1369)은 병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병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나쁜 업의 영향으로 생긴 아프다는 느낌에서 온 착각된 경험일 뿐이다. 그것은 원인과 결과의 확실한 특질을 보여준다. 또 병이란 마술적인 환영(幻影)이어서 느끼긴 하지만 여전히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병은 윤회계의 성질을 보여주는 정신적 스승이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참을성을 연마하는 것,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이 바른 대처법이다. 이런 면에서 병은 지난 생에 저질렀던 나쁜 행위와 무지를 정화하는 가장 뛰어난 방법이다. 나는 병을 일부러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설령 내가 이 병으로 죽는다 할지라도 나는 깊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병든 몸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없다. (<Life and Teaching of Ngulchu Thogme Sangpo>(Translated from Tibetan) Translated By Erik Pema Kunzang, 대원 한글역)

반짬 마을을 뒤로 하고 다시 오르막을 오르니 큰 나무는 없고 낮은 관목이 있는 산길이 나온다. 중간중간에 집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 역시 계곡 건너편으로도 마을이 보인다. 조금 더 오른 후 뒤를 돌아보니 가네시 히말 4봉(7102m)이 더욱 뚜렷하게 보인다. 얼마 후 계곡이 넓어지고 마을을 알리는 리히(Lihi, 2905m) 마을의 카니가 나타났다. 제법 큰 마을이다. 집들이 넓은 경작지를 중심으로 그룹을 이루며 여기 저기 모여 있다.

카니 앞에는 마을환영위원회(?) 위원들이 마중나와 있다. 새로운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마중은 이들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동생을 업고 있는 녀석도 둘이나 된다. 40대 이상이라면 대부분 겪었던 전형적인 우리의 어린 시절 모습이다. 마중나온 '위원님'들에게 사탕 하나씩 주고 싶은 유혹을 느꼈으나 마음을 굳게 먹고 참았다. 만일 그런 식의 보답이 계속 된다면 순순한 아이들의 마음은 트레커들이 나타날 때마다 뭔가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굴해지고 만다.

카니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니 사람들이 옥수수 대를 모으고  있다. 옥수수 수확은 다 끝났지만 보리는 아직 추수 전이다. 마을 중앙의 마니차 담장 옆을 지났다. 캠프장은 마을을 벗어나 있다. 초르텐 카니를 지나는데 또 다른 환영인파가 기다리고 있다. 이 아이들은 노골적으로 사탕을 달라고 한다. 이렇게 뭘 달라고 하는 아이들에게는 더더욱 주어서는 안된다.

오후 1시, 카니를 지나 캠프장에 도착했다. 우리 보다 먼저 온 부부 트레커가 마당 탁자에서 차를 마시며 쉬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제 우리 뒤에 도착해 아랫집에 캠프를 친 팀이다. 이들은 잠시 후 다음 목적지로 떠났다. 아직 시간이 많으니 여기서 1시간 거리인 쇼(Sho)나 2시간 거리인 로(Lho)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등산화를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젖은 옷은 잠깐이라도 바람에 말린다. 발목은 이제 많이 나아졌다. 3일 동안 운행했는데 끈으로 묶은 등산화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다. 끈은 닳아 곧 떨어지겠지만 다른 끈으로 매면 된다. 늘 가지고 다니던 비상용 끈을 7번째 트레킹에서 처음 쓰면서 7년간 가지고 다닌 보람을 느꼈다.

등산장비점에서 파는 가는 줄이었으면 더 질기겠지만 그나마 이런 허접한 끈이라도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포터들은 아직도 슬리퍼로 운행하고 있다. 아무리 습관이 되었다 해도 그것은 힘든 일이다. 등산화를 신으면 신발이 알아서 발을 고정시켜 주니 발을 디딜 때마다 발까락에 힘 줄 일이 없다. 슬리퍼는 매 번 균형을 잡기 위해 신경을 쓰므로 쉬 피로해진다.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오후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정북 방향의 맞은 편 계곡 절벽 위로 6천미터 급 산들이 줄지어 티베트와 국경을 이루고 있다. 쿠탕 히말이다. 꼭대기에 눈은 그리 많지 않다. 텐트를 다 친 포터들은 카드놀이에 열중이다. 우리 같으면 고스톱 쯤 될 것이다. 40세의 밍마 세르파도 합류해 있다. 도대체 이 친구들은 틈만 나면 카드놀이다. 단순하게 즐기는 거라면 좋은데 외상장부까지 기재하는 것을 보니 단순한 재미로만 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들에게 트레킹 중 유일한 오락거리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짐만 나르는 일이라 일찍 운행을 마치면 할 일이 없다. 히말라야에 오는 것도 우리처럼 히말라야가 그리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생계를 위해 들어오는 것이다. 수없이 보아 온 히말라야가 특별하게 다가오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포터들이 그러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나잇살 먹은 타시와 밍마까지(둘 다 40세다)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별로 보기 좋지 않다.

타시는 운행 때는 물론 아침 일찍부터 텐트 안에서 늘 진언을 외우며 염주를 돌리는 독실한 불자인데 카드놀이 할 때는 영락없이 포터 수준으로 내려간다. 하루 일정이 빡빡하면 스태프들이 한가하게 카드놀이를 할 여유가 없다. 도박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러면 이번엔 대원들이 피곤해 죽겠다고 아우성 칠 것이다. 차라리 그들의 '여가선용'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속 편하다.

2층 주방으로 가니 컴컴한 방안에서 우리 주방팀과 포터 몇 명이 화톳불을 쬐고 있다. 주인 아주머니와 할머니도 있다. 마나슬루 지역의 롯지 주방은 다른 메이저 트레킹 코스에 있는 마을의 주방과는 천지차이다. 그런 곳은 주방이 모두 정갈하다. 조금 엉성한 쿰부 윗지역(특히 닥락)이라도 화로주변이나 찬장은 정돈되어 있다. 이곳은 현지인들 용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어수선하다. 마침 콩을 볶아 먹고 있어 뜨거운 콩을 호호 불어가면 얻어 먹었다.

저녁은 언제나 그렇듯 진수성찬이다. 밥에 수프에 빵에 한국산 밑반찬까지 푸짐하다. 저녁에는 촛불을 켠다. 트레킹 둘째날 저녁 소티콜라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주방에 가보니 어두운 곳에 촛불을 켜고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빠상에게 식당텐트에도 촛불을 켜달라고 하니 그후부터 매 번 저녁마다 받침대로 쓸 돌을 골라와 촛불 세 개를 켜 준다.

등유를 압축하여 쓰는 밝은 랜턴이 있지만 시끄럽기도 하고 너무 밝아 쓰지 않고 있다. 촛불 세 개가 어두울 것 같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 눈에 익숙하면 잘 보인다. 무엇보다 부드러운 분위기가 좋다. 92년 여름 독일 갔을 때 제일 인상 깊었던 것 중 하나가 그곳 사람들이 저녁 식사 때는 항상 촛불을 켜고 먹는 것이다. 집에서는 물론 식당에 가도 그랬다. 환한 형광등 조명 아래서 시끌벅적하게 먹는 우리와는 정서가 많이 달랐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 어쩌면 호롱불을 켜고 밤을 보냈던 유년시절의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궁핍한 삶이었겠지만 어린 아이 때는 그런 절박함을 알 리가 없다. 다만 항상 배부르게 먹고 싶었다는 기억은 있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면 지난 일 중 어려웠던 일보다는 즐거웠던 일이 추억이라는 포장과 향수(鄕愁)라는 간판을 달고 나타난다.

타시가 이곳에서 들은 소식에 의하면 며칠 전 비가 내렸을 때 라르키아 라에는 폭설이 내려 3일간 길이 막혔다는 소식이다. 지금은 통행이 재개되었다고 한다. 비가 일찍 내린 것이 천만다행이고 앞으로는 내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날씨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일이라 인솔자인 나로서는 신경이 많이 쓰인다.

오늘까지 8일간의 일정을 마쳤다. 슬슬 체력이 떨어질 때가 되었다. 다행히 혜명화 보살의 상태는 많이 좋아졌다. 오늘은 백산스님과 남형씨가 고소 조짐이 있어 다이아목스를 주었다. 나는 여전히 콧물을 달고 있다. 두 노장 보살님들은 아직 멀쩡하다. 저녁을 먹은 후 내일의 일정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찍 각자의 텐트로 돌아갔다. 감기도 걸렸고 3000m 가까운 고지라 조금 추워 우모복을 입고 잤다. 내일부터 본격적이 고산 트레킹이 시작된다.
 

trek 8. 갑 - 남룽 - 리히 (top으로)

 Manaslu_trekmap_08.jpg

manaslu_map_T.jpg

nupri_map.jpg

Manaslu_0466.jpg

좁은 바위 수로를 흐르는 부리 간다키 강물. 바위가 물에 닳아 반들반들하다. 스넬그로브의 글에 나오는 장면 그대로다.
 

Manaslu_0468.jpg

무성한 숲 사이에서 첫 번째 휴식.
 

Manaslu_0474.jpg

경전의 말씀이 새겨진 마니월. 불상조각이 없는 마니월은 오랜만이다.
 

Manaslu_0476.jpg

무성한 삼림이 있는 능선 뒤로 마나슬루 히말 연봉이 나타났다.
 

Manaslu_0477.jpg

9시 15분 두 번째 휴식. 이 구간에서 가끔 바위 위에 붙어 있는 석이 버섯을 보았다. 숲 속이라 습도가 많다는 뜻이다.
 

Manaslu_0478.jpg

남룽까지 이런 울창한 이런 숲속길이 계속 이어진다.
 

Manaslu_0480.jpg

남룽 마을 들어서기 직전 만난 마을 사람들. 한 사나이가 먼저 "꼬레아?"하고 물었다.
 

Manaslu_0481.jpg

한국에서 3년 일하고 돌아온지 3년 되었다는 체왕 도르제 라마. 붉은 색의 옷이 승려풍이다. 한국말은 영 못한다. .
 

Manaslu_0482.jpg

남룽 마을 입구 길가에 있는 장작더미. 나무가 흔한 곳이라 연료는 걱정이 없겠다.

 

Manaslu_0486.jpg

남룽의 롯지 식당. 그늘이고 찬 바람이 불어 쌀쌀했다.

 

Manaslu_0490.jpg

남룽의 꼬마. 장작 더미에 말리고 있는 것은 야크가죽이다.
 

Manaslu_0492.jpg

전형적인 히말라야의 나무다리. 깊은 협곡에 놓여 있으면 아찔할 것이다.

 

Manaslu_0494.jpg

다리를 건너면 바로 체크포스트가 나온다. 경찰관 모습이 서양사람 같다. 저지대에서 파견 나온 브라민족이다.  

Manaslu_0498.jpg

 곧 시야가 넓어졌다.

 

Manaslu_0500.jpg

갑자기 나타난 반짬 마을. 좁은 계곡을 다니다가 만난 넓은 보리밭과 돌집이 인상적이었다.
 

Manaslu_0512.jpg

반짬을 벗어나는 조그만 둔덕에 올라 아래쪽(동쪽)을 바라본 풍경. 설산은 가네시 히말(4봉)이다.
 

Manaslu_0513.jpg

계곡 건너편에도 이런 마을이 자주 나타난다.
 

Manaslu_0514.jpg

리히 마을 입구의 카니. 포터들은 아직도 슬리퍼를 신고 짐을 나르고 있다.
 

Manaslu_0516.jpg

리히 마을환영위원회 멤버들.

 

Manaslu_0517.jpg

카니를 지나자 넓은 경적지가 있고 집들이 그룹을 이루며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왼편 탑은 마을 동쪽 초르테 카니다. 야영장은 그곳을 지나 있다.  

Manaslu_0519.jpg

제일 위로 곰빠가 있다. 곰빠 지붕은 항상 뾰족한 급색 탑을 세워두었기 때문에 일반 집과 쉽게 식별이 된다.
 

Manaslu_0520.jpg

마을 중심의 마니차 담. 마니차까지 있는 걸 보면 제법 큰 마을임을 알 수 있다.
 

 

Manaslu_0525.jpg

마을을 벗어날 즈음 두 번째 환영인파를 만났다. 뭔가를 달라고 조른다.
 

Manaslu_0526.jpg

불쌍해 보인다고 주어버릇하면 아이들 습관을 나쁘게 만든다. 가난해도 떳떳한 것이 비굴하며 여유 있는 것보다 낫다.
 

Manaslu_0528.jpg

비히의 캠프장. 오른쪽 탁자에 어제 보았던 중년 부부가 먼저 와 차를 마시며 쉬는 모습이 보인다.
 

Manaslu_0529.jpg

캠프장까지 따라와 구경하는 아이들. 혹 뭔가 얻을 것이 있는가 해서 오기도 하지만 집에서 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 구경 나오는 것이 당연하다.  

 Manaslu_0531.jpg

휴식을 마친 후 다시 운행을 시작하는 중년부부팀. 가이드가 한 아이와 장난을 치고 있다.
 

Manaslu_0536.jpg

쿠탕 히말을 마주한 캠프장 풍경.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Manaslu_0535.jpg

틈만 나면 카드판을 벌이는 스태프들. 그것밖에 낙이 없으니 말릴 수도 없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사는 것이다.
 

Manaslu_0538.jpg

주막집 주방 내부 모습. 현지 주민용이라 어수선하다. 트레커들이 많이 찾는 다른 지역의 주방과의 차이가 확연하다. 녹색 옷을 입은 총각은 주방 수석보조요원 빠상이고 빨간 옷을 입은 총각은 주방장 노르지다. 

Manaslu_0542.jpg

저녁식사는 항상 촛불을 켜고 만찬을 즐긴다. 매 끼니마다 주방장이 정성들여 만든 요리가 너댓 가지 나오니 롯지 트레킹처럼 입맛이 없어 힘들 일은 없다. 이번 여행에서 달밧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석이(石耳) 버섯

석이버섯은 깊은 산속의 바위 표면에 발생하는 지의류(地衣類, 이끼)의 일종으로 석이과에 속하는 버섯이다. 형태는 잎과 같은 것 껍질 같은 것 아교와 같은 것 나무와 같은 것이 있는데 이중에서 잎모양의 것을 먹는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석이는 성질이 차고 평(平)하다고도 한다. 맛이 달며 독이 없다. 속을 시원하게 하고 위를 보하며 피나는 것을 멎게 한다. 그리고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하고 얼굴빛을 좋아지게 하며 배고프지 않게 한다. 높은 산의 벼랑에서 나는 것을 영지(靈芝)라고 한다.또 중국에서는 강정제로 노인이 상용하면 젊어지고 눈이 밝아진다고 한다.

김시습은 석이버섯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푸른 벼랑 드높아서 올라갈 엄두 못내는데
우뢰와 비 이 돌 위의 석이버섯 키웠구려
안쪽은 거칠거칠 바깥쪽은 매끈매끈
캐어다가 비벼대니 깨끗하기 종이같네
양념하여 볶아 놓으니 달고도 향기나서
입에 좋은 쇠고긴들 아름다움 당할소냐?
먹고나자 제모르게 속마음이 시원하니
그대가 송석(松石)속에 배태함을 알겠도다
이걸로써 배 버리어 푸른 산에 서식하니
거(居)하며 양(養)함이 기(氣)와 체(體)에 옮기었네
십년 동안 틀린 행적 벌써 모두 잊고나니
오장육부 가끔 나가 씻을 필요 없어라. (Daum 백과사전)
 

<달라이 라마가 설법한 37 수행법>
-깨달음으로 이끄는 티베트 불교의 전통 수행법-
Commentary on the Thirty Seven Practices of a Bodhisattva
이창호 옮김 (정우사)

이 책은 티베트 불교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수행서 중 하나인 톡메 상포 보살의 원전 <보살의 37수행법>을 달라이 라마가 1974년 보드가야에서 3일에 걸쳐 설법한 것이다. 달라이 라마는 이 책의 원전을 정확하고도 쉬운 말로 실생활의 이모저모를 수행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낮은 단계부터 높은 단계까지 일상에서 수행해야 할 가르침 37가지를 설법하고 있다. 모든 중생을 윤회에서 벗어난 진정한 행복으로 이끌고자, 깊은 사랑과 대자비심으로 설법한 이 책은 올바른 삶의 방향을 제시하는 조언서이자 일상에서 적용할 수 있는 수행서이다.
 

trek 7. 뎅 - 갑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trek


 

쿠탕 계곡과 스넬그로브와 항생제

2007. 10. 19(금)


이번 트레킹에서는 아침과 점심 식사 때마다 식염포도당 두 알씩 먹었다. 식염포도당은 지금까지 한 번도 먹은 일이 없었는데 우연히 인라인 스케이트 동호회에서 전국일주를 계획하며 준비한 준비물품에 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알고보니 마라톤 등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많이 복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철 더운 환경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작업장은 물론이고 요즘은 군대에서도 혹서기 훈련 때 필수품으로 준비해 둔다고 둔다고 한다, 지금까지는  단순하게 땀을 흘린 후 염분만 보충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전해질 균형이 필요하다고 한다. 전해질이란 우리 몸의 체액을 이루는 중요한 성분이라고 한다. 이심전심이었는지 마침 아는 분이 마나슬루 가는 것을 알고  식염포도당 한 통(천혜당제약, 1000정)을 보내와 100정 정도 가지고 갔다. 준비물 목록에도 넣어 동행자들에게도 가져오라고 했지만 대부분 가져오지 않았다. 내가 가져 온 것을 권유해도 어쩌다 한 번 먹는 시늉만 한다.

나는 이번에 운동을 별로 하지 못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토굴 앞마당을 하루 50분 동안  '뺑뺑이 도는 일'도 두어 달밖에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트레킹 준비에서 가장 부실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은근히 일정을 여유 있게 짠 덕을 좀 볼 수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런데 걱정과는 달리 이번 트레킹에서는 덜 피곤했고 다람살라에서 가벼운 두통이 한 번 왔을 뿐이다. 운행 중 식염포도당을 계속 먹은 나와 무진행 보살님은 고소가 오지 않았다. 쿰부트레킹 때와는 달리 얼굴도 전혀 붓지 않았다.

Na_01.jpg그것이 식염포도당 덕분이라는 것을 100% 확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무진행 보살님이 막판에 조금 지쳤던 것은 고소 때문이 아니라 60대 중반의 나이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체력저하 현상 탓일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정기적인 산행으로 체력훈련을 많이 했는데도 나중에 힘들어 했고 대부분 고소로 고생을 조금 했다.

아침은 야외식탁에서 먹었다. 자리는 그대로이고 텐트만 걷은 상태다. 약간 쌀쌀하지만 아직은 2000m 아래여서 그리 춥지는 않다. 식사하러 텐트에서 나오는 즉시 우리의 텐트도 기다리고 있던 스태프들에 의해 걷힌다(영어로 쓴 글을 보면 이 대목에서 항상 무너진다-collapsed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출발 전 타시와 함께 동네 소년가 이 왔다. 발 한쪽에 상처가 나 있고 곪아 있다. 항생제가 필요한데 구급약이 든 가방은 모두 카고백에 넣었고 포터는 이미 출발한 상태다.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약에는 항생제가 없다. 우선 급한 대로 관절염 약을 3일분 주었다. 어쨌든 염증약이니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내일부터는 구급약 가방을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전 7시 출발. 해가 비치는 시링기 히말을 보며 걸었다. 좁은 협곡에 있는 길은 강바닥을 향해 내려가고 있다. 출발한지 30분 쯤 지나자 동쪽 사면으로 건너는 허름한 다리가 하나 나왔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급경사 오르막인데 보통이 아니다. 산사태가 난 듯한 지역은 사다리를 설치해 놓았다. 이런 곳은 말도 다니기 어려울 것 같다.

8시에 1980m의 라나(Rana)에  도착해 잠시 쉬었다. 라나는 스넬그로브의 책에는 코야(Koya)로 나온다. 자매로 보이는 아이 둘이 마중(?)나와 있다. 이곳 아이들은 매일 지나가는 트레커들을 보는 게 심심한 산골생활의 유일한 구경거리일 것이다. 아이들이 아주 수줍어 한다. 네팔말로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이다. 이곳은 티베트계 방언을 쓰기 때문에 티베트어도 잘 안통한다고 칼스텐은 말했다.

라나를 지나 잠시 후 다시 작은 다리를 두 개 더 건너 절벽길로 접어들었다. 두 번째 다리 아래에는 수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방앗간이 있다. 절벽길 중 한 곳은 산사태가 나 아슬아슬하다. 길이 거의 무너져 있다. 다행히 8시 45분 비히(Bihi)에 도착한 후부터 강바닥에서 한참 올라 온 평범한 산길이다(마나슬루 트레킹 지도에는 비히의 위치가 잘못되어 있다 ). 비히에서 오늘의 목적지 갑(Gap)까지 3시간이 걸린다고 마을 이정표에 쓰여 있다. 여기서부터 사마가온까지는 계속 서쪽을 간다.

햇볕이 들어와 따뜻한 한적한 산길을 걷는다. 비히를 넘어서니 산기슭 좁은 경작지를 찾아 마을이 군데군데 흩어져 있다. 계곡 건너편에도 협곡을 끼고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인다. 마니월 하나를 지나자 제법 깊은 지류 계곡이 하나 나오고 그 위에 바닥을 나무로 깔아놓은 멋진 다리가 놓여 있다(지도 상단 중앙의 Mani Walls라고 쓰여진 곳). 이 계곡은 이곳 쿠탕콜라에서 제일 높은 시링기 히말에서 내려오는 빙하수가 만든 시링기 콜라다.

여기서 길이 갈라진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다리는 부리 간디키 강을 건너 왼쪽 사면으로 가는 다리다. 그쪽으로 가면 프록(Prok)이 나온다. 그 길로 가도 갑에서 만나지만 길이 험한 편이라 트레커들은 잘 이용하지 않는다. 1056년 9월 중순(14일 전후) 스넬그로브는 남루(남룽)에서 갑(Ghap)으로 내려온 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 프록으로 간다. 잠시 그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쿠탕(Kutang)

다음 날 우리는 남루(남룽) 마을을 통과하여 점점 좁아지는 협곡을 향해 내려갔다. 길은 이제 무성한 수풀에 둘러싸여 있고 우리의 등산화는 미끄러운 바위와 진흙에 위험스럽게 미끄러졌다. 우리는 불어난 급류 위에 놓인 단단한 나무다리를 건너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곧 천연 바위다리를 통해 오른쪽 사면으로 되돌아 왔다. 아래쪽 깊은 계곡에는 부리 간다키가 포말과 세찬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우리는 이제 쿠탕으로 들어가고 있다. 1마일 정도 떨어진 곳부터 계곡이 넓어졌다. 길은 협곡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가파른 계단식 경작지로 둘러싸여 있는 높은 산기슭에 있는 마을이 보였다. 우리는 첫 번째 마을 착(Tsak, 지금의 갑)으로 가는 다리에 이르렀다. 우리의 포터들은 그곳으로 갔다. 왼편 사면으로 내려가는 길이 더 쉽기 때문이다. 빠상과 나는 가파른 경사를 오르는 다른 길을 따라 오른쪽 사면의 프록(Prok) 마을로 갔다. 우리는 그 마을에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절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우리는 절벽 꼭대기 근처에 그려진 훌륭한 '연꽃에서 태어난' 붓다상을 보기 위해 멈추었다. 그 후 입구 초르텐을 통과하여 수확이 끝난 옥수수 대가 있는 밭 사이의 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마을 중심에 이를 때까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마을 길가에 티베트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한 작은 소년 옆에 있던 작고 사나운 개가 우리를 보더니 짖으며 달려왔다. 소년은 놀라는 눈으로 우리를 응시했다. 우리는 소년에게 절로 가는 길을 묻자 소년은 주저하지 않고 길을 가리켰다.

"순례자들이니?" 우리가 물었다.
"예, 우리는 키이롱(Kyirong)에서 왔어요. 그리고 네팔로 순례 가는 중이에요." 소년이 대답했다.
" 아저씨들은 어디서 오는 길이에요?" 소년이 물었다.
한 여인이 텐트 입구에 나타났다. 그녀는 개가 짖는 것을 멈추도록 돌을 던졌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우리는 인도에서 왔단다."' 우리가 대답했다.
"아저씨들도 순례자들이에요?."
"'응, 우리들도 순례자들이야."
"안녕히 가세요."
"잘 있있거라."  우리는 대답을 하고 절을 향해 올라갔다. 비록 아주 판에 박힌 말이었지만 어린 티베트 소년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절 앞 넓은 베란다는 옥수수 알갱이가 든 통과 옥수수 더미로 가득차 있었다. 그 곳에 두 남자가 옥수수 알갱이를 까며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나타나자 바라보았다. 우리는 절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입니다. 제 아내가 안내해 줄 겁니다." 나이 많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불러 열쇠를 가지고 오라고 했다. 우리는 간단하게 우리가 어디서 왔으며 한 스님이(그는 유명한 라마다) 만일 우리가 가는 도중 낙챠(Naktsa) 곰빠를 방문하면 참배하라고 했다는 것을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아주 좋아했다. 그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 사원 아래 마을인 롱(Drong)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잠시 후 그의 아내가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어주었다. 법당 안에는 완벽한 티베트 경전 세트가 왼편 벽 선반에 있었다. 오른편 벽에는 1천 좌의 부처님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있었다. 가운데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있고 좌우에는 '무량광(Boundless Light, 아미타불)과 '자비의 눈(Glancing Eye, 관세음보살) 상이 있다.

그 라마는 우리가 불상들을 알아보는 것을 보자 더욱 기뻐했다. 그리고 그의 아내에게 볶은 옥수수를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는 버터 램프 두 개를 사서 공양올리고 발코니에서 쉬면서 그에게 건너편 계곡에 있는 마을 이름을 묻고 춤(Tsum)으로 가는 높은 길을 가리켰다. 옥수수는 내 치아에는 너무 딱딱했지만 빠상의 방앗간에서는 잘 갈렸다. 비록 그가 위쪽 절로 오르는 가파른 길에서 목이 탄다는 불평은 했지만.

경사면 꼭대기에 정원으로 둘러 싸인 몇 채의 집들이 서 있었다. 우리가 부르자 한 비구니 스님이 나와 반갑게 절 안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평화와 분노의 신들'의 프레스코 벽화가 있고 불단 위에는 '연화생(빠드마삼바바)'과 그의 두 여신 아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그리고 석가모니 조상이 모셔져 있다.

우리는 버터 램프를 공양 올리고 비구니 스님을 따라 방 두 개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스님은 우리에게 음료수 한 대접과 정원에서 따 온 채소 한 다발을 주며 우리의 순례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미안해했다. 스님은 우리에게 자기가 오랬동안 순례길을 다녀보았기 때문에 자주 잠잘 곳과 음식을 구하는 것이 아주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전에 우리는 그것을 슬픔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꺼이 감수했다.

우리는 존경스런 이 스님 앞에서 거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스님은 순례길에서 필요한 모든 물품을 등에 지고 다녔을 것이다. 반면 우리는 8명의 튼튼한 남자들이 우리의 짐을 지고 천천히 계곡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그러나 다른 호화로운 원정대에 비하면 우리는 확실히 궁핍했다. 그것은 비단 10명의 대원으로 이루어진 마나슬루 원정대가 600명의 포터를 쓴 일본 팀의 경우와 비교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신선한 채소에 감사했다. (David L. Snellgrove, pp. 251-253)

협곡이 가파른 지형에 놓인 다리는 계곡의 하단부에 설치하기 때문에 다리가 있으면 다리를 향해 내려갔다가 다리를 건넌 후에는 다시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그래서 시링기 콜라를 가로지른 다리를 건넌 후에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평탄한 산길이다. 건너편으로 긴 폭포가 보였다.

10시 15분 경 이름모를 작은 마을을 지났다. 트레킹 지도에도 없고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마을에서 나오던 두 여자아이에게 보명화 보살님이 무언가 선물을 준 모양이다. 아주 신이나서 달려오는 표정이 산골 소녀의 순수한 모습 그대로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라 입성은 허름해도 어린 아이들과는 달리 깨끗한 얼굴이다.  

협곡에서 떨어진 산길을 계속 가다보면 또 어느새 절벽길이 나왔다. 그렇게 몇 구비 돌다 밭 가운데 두 채의 집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인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주방팀들이 보인다.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다. 이곳에서 갑(Ghap)이 멀지 않다는 사실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초르텐형 카니가 보이는 것을 보고 알았다.

마을 입구에 있는 카니는 보통 돌을 독립문 모양으로 쌓은 것이 대부분이다. 쿰부의 팡보체 마을 입구에는 돌 대신 나무로 만들어 놓은 카니가 있다. 초르텐형 카니는 고급스러운 카니다. 그것은 조성하려면 돈이 많이 드니 곧 마을이 부유하다는 뜻이다. 모양은 위쪽은 초르텐이고 기단부에는 사람이 지나가는 통로를 만들어 놓았다. 안쪽 사방 벽에는 불보살상 벽화가 그려져 있고 천장에는 만달라가 그려져 있다. 좀솜 위 까그베니와 무스탕의 짜랑에도 초르텐형 카니가 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있는 마당에는 추수를 끝낸 옥수수 알갱이를 덕석에 말리고 있다. 그 한쪽에는 죽은 까마귀를 매단 장대를 세워놓았다. 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한 것 같은데 과연 약아빠진 새들이 무서워할지는 의문이다. 이 집 꼬맹이 둘이 말없이 우리 곁에 와서 구경한다. 이곳 아이들은 대체로 수줍은 편이다. 정신없이 활개치고 돌아다니는 녀석은 별로 보지 못했다. 우리는 이곳 사람들을 구경하고 이곳 사람들은 우리를 구경한다. 아주 공평한 일이다.

점심 먹고 12시 10분 출발했다. 오늘은 점심을 빨리 먹은 셈이다. 트레킹 이래 처음 만난 초르텐 카니를 통과했다. 많이 낡아 있다. 내부의 불상 벽화도 마찬가지다. 이곳 마을의 경제력이 처음 조성했을 때보다 약해졌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40분 후 부리 간다키 강을 가로지른 트러스트 철교를 지나 왼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서진을 하고 있는 지금부터 사마가온까지 왼쪽 사면은 남쪽이 된다. 다리를 건너 오르니 바로 마니월이 나온다. 경전이나 진언을 새긴 마니석은 많이 보았는데 이곳은 불상을 많이 조각해 놓았다.

오후 1시 갑(Ghap)에 도착했다. 스넬그로브의 책에는 착(Tsak)으로 나오는 마을이다. 이곳에서 야영을 할 계획이었는데 이미 캠프사이트에 다른 팀이 와 있어 조금 더 가기로 했다. 다시 마니월과 몇 채의 민가를 지나고 산사태 길을 지나 에 도착했다. 갑에서 15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늘까지 2000m 돌파하는데 7일 걸렸다. 7일이며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는 3500m의 마낭, ABC 트레킹 때는 4100m의 베이스캠프, 쿰부 트레킹 때는 4410m의 마체르모, 랑탕 트레킹 때는 로우레비나 패스(4700m)와 고사인꾼드(4321m)를 넘어 4026m의 로우레비나 야크, 그리고 작년 무스탕 트레킹 때는 3800m의 남걀에 도착했다. 마나슬루가 얼마나 천천히 고도를 올리는 코스인지 알 만하다.

롯지 앞 초우따라에서 포터들이 쉬고 있다. 캠프사이트가 넓고 좋아 이곳에서 캠프를 치기로 했다. 계곡 아래쪽(동쪽)으로 어제 보지 못했던 가네시 히말이 보인다. 텐트를 다 설치하고 세수도 하고 빨래도 널며 한가한 오후를 보냈다. 나중에 또 다른 중년의 서양인 부부가 도착했다. 이곳에 넓기는 하나 8동(트레커용 6, 세르파용 1, 식당용 1, 화장실용 1)의 텐트가 있으니 아무래도 복잡하다. 그들도 4동을 쳐야 한다. 잠시 서성이며 가이드와 상의하더니 아랫집으로 돌아갔다.

심심해서 주방용 움막으로 구경가니 주방 수석보조요원 빠상이 약이 있느냐고 묻는다. 어제 바위에서 미끌어져 발 뒤쪽 바닥이 벗겨져 있다. 슬리퍼를 신고 오다가 미끌어지니 속수무책이다. 딱지가 앉기는 했지만 주변에 고름이 보인다. 소독약을 발라주고 반창고를 붙여주었다. 그리고 가지고 간 항생제 7일분을 주었다.

이번에 오면서 약을 많이 가지고 왔다. 지난 봄 무스탕을 다녀온 양혜숙님이 보내준 약이다. 원래 같이 가기로 했으나 가지 못하게 된 어떤 의사선생님이 무스탕 갈 때 가져가라고 보내준 것을 다시 내게 보내온 것이다. 제역회사에서 병원에 주는 관절염 약과 항생제 샘플이다. 제일 반가운 약이 항생제다. 이런 오지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약 중 하나가 항생제다.

이곳에서는 약이 없어 상처가 나면 어떻게 치료할 방법이 없다. 그리고 약을 거의 먹지 않는 이곳 사람들에게 항생제는 기적의 약이다. 페니실린이 처음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오남용으로 박테리아의 내성이 강해져 오히려 건강에 해롭게 되자 선진국에서는 반드시 의사의 처방을 받도록 하고 있다.

페니실린이란 페니실리움속(屬)곰팡이에서 만들어지는 항생제로 가장 먼저 발견되었으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항생제 중의 하나이다. 1927년에 알렉산더 플레밍은 우연히 푸른곰팡이로 오염되어 있는 배지에 황색포도상구균(화농균)이 자라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이 곰팡이를 분리하여 액상 배지에 배양해 이 곰팡이에서 인체에 감염을 일으키는 일반 세균들을 죽일 수 있는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발견했으며 1940년에 다른 연구자들이 치료용 주사제로 만들었다.

이 페니실린은 세계 2차대전 때 전쟁의 총상으로 신음하던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건졌다. 감기약을 제외하면(이상하게 트레킹 때마다 감기가 걸린다) 이제는 웬만해서는 양약을 먹지 않기 때문에 '항생제계'를 떠난 지도 10년이 넘지만 나도 한 때는 테라마이신 연고와 캡슐의 애용자였다. 당장 눈에 보이는 효과가 있으니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히말라야 트레킹을 나설 때마다 몇 가지 약품과 함께 항생제를 가지고 가고 싶었지만 처방이 없어 구할 수 없었다.

감기는 바이러스가 원인이다. 세균감염은 박테리아가 원인이다. 그러므로 감기에는 항생제가 필요없고 써도 듣지 않는다. 최근 의약품 오남용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사이언스 TV>를 보니 사람들이 감기에 항생제를 써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의사와 약사 포함) 의외로 많고 처방도 그렇게 내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벨기에가 가장 심해서 약국에서 자유롭게 항생제를 구입할 수 있단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그 프로그램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페셀의 책에는 북쪽 계곡 투어 마지막 날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가 실려 있다. 재미있고도 슬픈, 그러나 해피엔드로 끝나는 이야기다. 항생제로 한 주민을 치료하는 이야기이다.  이 글은 인터넷에 올린 무스탕 트레킹 연재 때 번역해 올렸는데 책으로 만들면서는 '잡설'로 분류되어 삭제되었다. 그러나 번역한 공력과 내용이 아까워 인터넷에 올린 사진 <13.바람부는 광야> 편에 다시 첨부했다.  

페셀이 로만탕 북동 쪽 깊은 계곡에 있는 삼종(Sam Dzong)까지 탐사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멀리서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말이 달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협곡에서 돌아왔을 때 타시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는 작은 먼지구름을 가리켰다. 그것은 누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말갈기와 함께 말을 탄 사람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은 정말 낭만적이었다. 나는 그가 캄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에게 도착하자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빠르게 말했다. 나는 처음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그가 이틀 동안 나를 찾아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우리에게 줄 땔나무를 로만탕에 가져다 놓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땔나무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로만탕에서 우리를 만나지 못한 그는 우리가 서쪽 계곡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서쪽으로 갔다가, 지금 우리가 계곡을 탐사하고 돌아온 이 동쪽 계곡에서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가 우리를 찾은 이유는 약품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로만탕에 가져다 놓은 땔나무는 약값이었다. 얘기가 좀 복잡하다. 그러나 이 불쌍한 사내의 끔찍한 상처를 보았을 때 나는 거의 토할 뻔했다. 그리고 이 불쌍한 사내가 이런 상처로 이틀이나 나를 찾아다닌 사실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는 짜랑 근처에 사는 부유한 농부였다. 어느 날 밤 그는 고주망태가 되어 땅바닥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수로에 발이 담가져 있는 것을 알았다. 그 물이 밤사이에 얼었다. 그가 나를 만나기 6개월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동상이 걸린 이 불쌍한 사내의 발은 상당 부분 떨어져 나갔다. 오직 감염된 그의 상처부위를 먹고 있는 구더기들이 살이 썩는 것과 죽음을 막아주고 있었다.

나는 주사 맞는 것을 싫어해서 치과의사에게 가느니 차라리 치통으로 죽는 것을 택할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상처와 피를 보면 나는 아주 메스꺼워진다. 내가 의사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은 오직 아무것도 모르는 무스탕의 사람들 속에 있을 때다. 지금 나는 빈약한 약품 분배자의 기능을 넘어서야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내 의료 능력을 신뢰하여 이틀간 말을 몰고 찾아다닌 이 사내를 돕기 위해 나는 의학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수술용 마스크를 쓰고 고무장갑을 끼고 마취된 환자의 깊은 곳을 자르는 장면이다!

우리 세 사람은 내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을 끓여 달라고 했다. 그리고 붕대로 쓸 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가지고 온 얼마간의 탈지면은 로만탕에 두고 왔다. 나는 결국 세 장의 의식용 스카프를 가지고 이 남자의 상처를 씻기로 했다. 나는 큰 가위로 썩은 피부와 감염으로 딱딱해진 부위를 도려냈다.

나는 이 사내가 이 상태로 어떻게 6개월을 견뎌냈는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로바들의 뛰어난 체력과 높은 고도에 따른 춥고 건조한 날씨로 부패가 아주 더디게 진행된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른 기후나 다른 나라였다면 그는 몇 달 전에 죽었을 것이다.

1시간 동안 나는 락시를 알코올로, 의식용 스카프를 붕대로, 큰 부엌칼을 외과용 메스로, 그리고 무엇을 할지는 상상력을 동원하여 수술을 했다. 유일한 의약품은 작은 페니실린 연고제 하나였다. 마침내 이 가여운 상처는 붕대에 감겨졌다. 발의 일부분이 잘리고 피가 흐르기는 했지만, 그가 만든 특별히 큰 장화 속으로 그의 발이 다시 들어갈 때 나는 그 발이 충분히 깨끗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환자의 첫 진료는 끝났다. 그리고 치료비로 로만탕에는 엄청난 양의 땔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3주 동안 그는 계속 나를 따라다녔으며 나는 그에게 붕대를 6번 더 감아 주었다. 그리고 한 달 후 내가 로만탕을 떠날 때 그의 상처는 아물었다고 나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Michel Pessel,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pp. 233-235)

그 의사선생님 덕분에 이번에 가지고 온 항생제 양은 500mg 짜리 1500 캡슐이다. 관절염약도 가지고 왔지만 그것보다는 항생제가 더 유용하다. 트레킹 도중 필요한 주민들과 스태프들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그 하이라이트는 트레킹 12일 째인 삼도에서였다.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니 다음 네팔 방문 때도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네팔에서, 특히 히말라야에서 유통기한은 큰 의미없다. 기한이 지난 것이라도 없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삼도에서 마을 주민들에게 나누어 줄 때 구경 온 옆집 독일 팀의 한 사나이가 무엇을 나누어 주느냐고 물었다. 항생제를 영어로 무어라 할까? 그때는 잘 몰라 "안티바이러스, 예를들어 페니실린 같은 거"라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돌아와 찾아보니 안티바이오틱(Antibiotic)이다. 바이러스와 박테리아가 다르니 안티바이러스(Antibirus)라고 하면 틀린 말이다. 그러나 그 친구도 비영어권 사람의 말이라 대충 항생제를 그렇게 표현했으리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혜명화 보살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이제 겨우 2140m인데 고소증상을 보인다. 보통은 3000m 가까이 올라야 나타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일찍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체력이 저하되면 더 쉽게 나타날 수 있다. 고소가 와 두통이 오고 식욕이 떨어진 혜명화 보살은 저녁을 먹지 않고 일찍 텐트로 들어갔다. 가지고 간 다이아목스를 12시간 마다 1정씩 먹으라고 주었다.

트레킹이 처음인 사람은 국토도보종단이나 군대에서 행군 등을 하지 않는 한 지금까지 이렇게 많이 걸을 일이 없다. 하루 평균 5시간 이상 7일을 걸었으니 슬슬 지칠 때도 되었다. 마니슬루 트레킹은 고도를 천천히 올리기 때문에 고소적응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실제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라르키아 라를 넘기 전 기간이 너무 길어 일찍 체력이 바닥나게 된다.  평소 체력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힘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트레킹 중에는 음식을 가리지 말고 잘 먹어야 하고(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지만) 염분 보충과 전해질 균형을 위한 식염포도당 섭취도 중요하다.
 

trek 7. 뎅 - 갑   (top으로)

 Manaslu_trekmap_07.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374.jpg

아침 햇살을 받고 있는 북쪽의 시링기 히말

 

Manaslu_0375.jpg

오전 7시, 좁은 협곡을 향해 출발하다.
 

Manaslu_0378.jpg

엉성한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넘어가다. 마나슬루 지역은 이런 다리가 많다.

Manaslu_0382.jpg

다리를 건너 산사태 지역을 오르는 길. 사다리까지 있다. 말이 다니기엔 많이 어려워 보인다.
 

Manaslu_0383.jpg

8시에 라나 도착. 아직 그늘 속이다.

 

Manaslu_0384.jpg

라나의 두 자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이곳에서 쉬면서 사이좋게 사탕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Manaslu_0392.jpg

작은 지류도 자주 나온다. 왼편의 집 지붕은 수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방앗간이다.
 

Manaslu_0397.jpg

절벽길이 무너져 있는 곳도 가끔 있다.

 

Manaslu_0398.jpg

이런 길을 지날 때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떨어지면 아래로 한참 미끄러져 내려간다.
 

Manaslu_0402.jpg

계곡 양편으로 군데군데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햇볕이 따사로운 건너편 양지녁에 자리잡고 있다.
 

Manaslu_0403.jpg

깊은 협곡을 돌아보다. 멀리 작은 마을이 보인다.

 

Manaslu_0407.jpg

마니월 하나를 지난 후 시링기 콜라에 놓여 있는 낭만적인 다리를 건너다.
 

Manaslu_0410.jpg

다리를 건너면 바로 오르막계단이 나온다.
 

Manaslu_0416.jpg

맑고 순수한 모습의 산골 소녀들. 쿠탕 계곡에는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 않은 집들이 많이 있다.

 

Manaslu_0418.jpg

협곡은 여전히 좁으나 계곡 전체는 많이 넓어졌다.
 

Manaslu_0420.jpg

다시 협곡을 돌아가는 절벽길이 나왔다.
 

Manaslu_0422.jpg

갑에서 가까운 작은 집에서 점심을 먹다. 갑은 여기서 30분 거리다. 멀리 보이는 초르텐형 카니가 갑의 마을 입구 표시이다.
 

Manaslu_0427.jpg

뜨거운 햇살 아래 옥수수 알갱이를 말리고 있다. 스넬그로브의 여행기에도 이 지역 옥수수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절벽쪽 장대에 죽은 큰 새를 매달아 두었다.  

Manaslu_0428.jpg

수확이 끝난 옥수수밭에는 다 못 거둔 콩도 있다.
 

Manaslu_0432.jpg

이 집의 수줍은 두 아들내미. 하루종일 무엇을 하며 놀까? 그나마 둘이라서 덜 심심할 것이다.
 

Manaslu_0433.jpg

초르텐형 카니. 많이 낡았다. 중간에는 불경을 새긴 마니석을 올려놓았다.
 

Manaslu_0437.jpg

카니 내부 벽화. 이런 스타일의 카니는 무스탕 지역에 많이 있다.
 

Manaslu_0441.jpg

처음 나타난 철제 트러스트 다리를 건너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다. 역;사부터 사마가온까지 계곡이 동서로 나 있으므로 왼쪽 사면은 남쪽이 된다.
 

Manaslu_0448.jpg

다리를 건너 언덕을 오르면 초르텐과 마니월이 함께 있는 산길이 나온다.
 

Manaslu_0445.jpg

불상을 조각한 마니석으로 조성한 마니월.

 

Manaslu_0450.jpg

갑을 지나자 바로 산사태 길이 나왔다.

 

Manaslu_0451.jpg

오늘의 목적지로 삼은 갑의 캠핑장은 다른 팀이 먼저 차지하고 있어 우리는 갑에서 15분 거리인 <마나슬루 탁쿨리 호텔> 야영장에서 여장을 풀었다.

Manaslu_0456.jpg

캠프사이트. 오른쪽 엉성하게 보이는 움막이 주방용 움막이다.
 

Manaslu_0459.jpg

캠프를 친 후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스태프들. 카드놀이를 하는데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돈 내기를 한다.
 

Manaslu_0457.jpg

캠프 모습. 나중에 온 서양의 중년 부부는 다시 아랫집으로 돌아가 캠프를 쳤다.
 

Manaslu_0452.jpg

아래쪽(동쪽) 계곡 풍경.
 

박테리아는 독립적인 생물체다. 박테리아는 우리 몸에 이로운 특성을 가진것도 많고, 스스로 세포분열을 통해 증식한다. 물론 콜레라 처럼 인체에 해로운 대사물질을 배출하는 박테리아도 있다. 인간의 소화기간 내에서는 약 1kg에 해당하는 천억마리의 세균이 증식하고 있고, 인체의 생리작용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크기는 몇 마이크로미터 정도다.

바이러스는 독립된 생물체로 인정받지 않는다. 박테리아에 비해 100배 이상 작아 전자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다.  바이러스는 유전자 가닥(DNA)와 단백질로 구성된 외피로 이루어져 있다. 대사작용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물이나 영양분이 필요없다. 바이러스의 유일한 목표는 숙주의 몸에 침투해 다량으로 증식하고 퍼지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세포내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며, 이렇게 생성된 바이러스는 결국 세포를 파괴한다.  바이러스는 세포막이 없어서 항생제가 아무 효과가 없고, 예방 주사만 효과가 있다. (마르틴 보레, 토마스 라인톄<나는 왜 이런게 궁금할까>)
 

시간이 멈춘 곳… 神의 언어를 듣다
카트만두 북쪽 170㎞ 거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눈 덮인 웅장한 풍광에 경탄


랑탕히말은 네팔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제1의 트래킹(tracking) 코스로, 엄청난 규모의 숲과 동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코스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문 등반가들의 베이스캠프까지 올라가 8000m급 고봉을 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는 대신 입구까지 도로가 연결되는 등 인공적 요소도 많다. 114달러만 주면 경비행기를 타고 에베레스트 정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요즘 세상에 험한 길을 스스로 걷고자 선택하는 이들로선 그런 인공적 요소가 달갑지는 않다.

수도 카트만두에서 북쪽으로 170㎞ 거리(절반 이상이 비포장 험로라서 자동차로 9시간 걸린다)에 있는 랑탕히말은 1949년 영국인 탐험대가 답사하기 전까지 지도상에 공백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이곳을 탐험했던 영국인 틸만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카트만두에서 새벽에 떠나 둔체(해발 1950m)를 지난 뒤 저녁 무렵 계곡 입구인 샤부르벤시(1460m)에 도착, 숙박을 한 뒤 트래킹은 시작된다. 1월 10일 충주시 청소년수련원 주최로 구성된 히말라야 오지학교탐사대(대장 김영식 충주 칠금중학교 교사)와 함께 찾았다. 교사와 화가, 시인, 농민 등으로 구성된 팀이다. 우리는 트래킹과 함께 학교를 방문해 네팔의 교육문화를 체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0일간 20명의 대원은 랑탕히말의 핵심 구간 60㎞를 도보로 답사했다.

선인장~전나무 숲까지 다양한 식물

전반부는 출발지인 샤부르벤시에서 림체(2440m)-랑탕마을(3300m)-캉진곰파(3800m)-캉진리(4550m)에 이르는 계곡 트래킹 코스. 되짚어 나오는 구간까지 30㎞에 불과한 거리지만 3일간 고도를 3000m 이상 올려야 하기 때문에 고소 적응에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

물길을 거슬러 계곡 상류로 올라가는 동안 북쪽으로 이름 없는(?) 4000m급 봉우리들이 있고 그 뒤로 랑탕Ⅱ(6561m), 랑탕리룽(7234m) 등 험준한 봉우리가 만년설로 단장한 채 우뚝 솟아 있다.

아열대 기후에 속한 이곳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선인장부터 침엽수인 전나무 숲까지 시시각각 식물군이 변한다. 트래킹 중 만나는 인종도 다양하다. 카트만두 부근에선 네왈리족, 둔체에선 타망족, 계곡 안쪽으로 들어가면 우리와 많이 닮은 티베트족, 고산 등반의 길잡이로 잘 알려진 셰르파족의 문화를 경험하게 된다. 네팔은 크게 36부족, 세분하면 70개 이상의 언어를 사용하는 다민족 국가다. 힌두교를 국교로 삼고 있으면서 불교 등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아 다양한 문화를 선보인다.

해발 2500m를 넘어서면 고산증(high altitude sickness)이 트래커들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대부분 가벼운 두통으로 끝나지만 극심한 구토와 복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고도를 1000m 올린 뒤엔 한나절 정도 쉬면서 적응기를 가지면 대부분 문제가 해소된다. 체온을 잘 관리하고 물을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것이 도움이 된다.
캉진곰파(‘곰파’는 절을 의미한다)에 이르는 계곡에 과거 영화로웠던 티베트불교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석판에 불경이나 문양을 새겨 탑으로 쌓은 마니차가 길 한가운데 중앙분리대처럼 길게 이어진다. 네팔인은 마니차를 만나면 반드시 왼쪽으로 지나간다. 돌아올 때 반대편을 거치면 불경을 한 번 읽은 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언제 새겨진 것인지 끝없이 이어지는 마니차의 행렬은 우리의 팔만대장경에 비견할 정도로 길다. 길 가는 동안에도 스스로를 깨우치는 수도자의 마음으로 트래커들은 계곡을 오른다.

캉진곰파에서 트래커들은 각자의 일정과 고소 적응능력에 따라 3가지 코스를 택할 수 있다. 마을 뒤편 빙하를 감상하는 것이 손쉽고 해발 4550m 캉진리 산에 올라 랑탕히말의 웅장한 풍광을 감상할 수도 있다. 한나절 정도 투자하여 설산이 양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랑시사 마을의 커르커(야크 방목장)까지 다녀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반군들도 관광객은 건드리지 않아

랑탕히말 트래킹 코스는 후반부가 극적이다. 랑탕계곡의 오르막길을 되짚어 내려오다가 대나무가 많은 뱀부마을(1960m)에서 남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택해 코사인 쿤드(호수)에 이르는 구간은 아름다움의 절정이다.

잿빛 털을 가진 네팔원숭이 무리가 노니는 아열대숲을 지나 겨울에도 푸른 대나무 숲을 만난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무렵 믿어지지 않을 만큼 갑작스럽게, 신비로운 툴루샤부르 마을(2210m)이 나타난다. 40~60도 경사의 산비탈을 해부라도 하듯 겹겹이 다락밭으로 만든 사면을 지나면 칼 같은 능선 위에 마을이 있다. 지금은 싸구려 페인트로 칠한 롯지들이 볼썽사납게 섞여 있지만 과거 티베트불교의 중심지답게 고색창연한 문양의 창틀로 가득한 고가(古家)가 트래커의 숨결에 평온을 불어넣는다.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히말라야 고봉의 옆구리로 붉게 스미는 저녁노을과 까마득한 계곡의 전망을 보여주는 아침을 맞이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충분히 정화된다.

툴루샤부르에 이르면 최근 네팔 정부를 난처하게 만드는 공산반군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카트만두의 신문들은 이틀이 멀다하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의 교전 소식을 전한다. 가끔 별도의 입장료(?)를 요구하는 것 외에 반군은 절대로 관광객을 건드리지 않는다. 관광객이 줄면 그만큼 네팔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는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내심 그들을 만나길 기대했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래도 반군 때문에 최근 네팔을 찾는 관광객의 수는 현저히 줄고 있다. 경제난의 여파로 석유와 설탕 등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면서 카트만두 시내에서 이에 항의하는 시위대 행렬을 자주 볼 수 있다. 2001년, 당시 국왕과 친형 가족을 몰살시키고 정권을 잡은 현 갸넨드라 국왕은 국민의 존경도, 정치권의 지지도 받지 못한 채 철권통치를 이어가고 있다. 그렇게 해서 잡은 권력조차 카트만두를 벗어나 트래킹 코스에 오르면 한낱 부질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툴루샤부르에서 싱곰파(3350m)에 이르는 구간은 3시간30분 정도의 짧은 코스. 그 중 1.5㎞ 구간은 아득한 감동을 연출한다. 100~300년생 전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난 숲길을 걷다가 지친 듯 멈추어보자. 섬광처럼 한 줄 가슴을 스치고 지나는 시 구절이 없다면 더 올라가도 소용이 없다. 마침 눈까지 내려 마음 저 안쪽에 남아 있던 흉터마저 가려주었다.

고사인쿤드(4380m)는 힌두교 성지. 해발 4300m 지점에 고사인쿤드를 비롯해 번뇌의 숫자와 일치하는 108개의 호수가 있다. 우리는 108이라는 숫자를 불교의 상징으로 알고 있지만 힌두교에선 부처를 수많은 힌두의 신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으니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싱곰파에서 고사인쿤드까지는 하루 트래킹 코스. 맑은 날 안나푸르나(8091m), 마나슬루(8163m), 거네스(7429m) 등 히말라야의 고산준봉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지만 1월 중순엔 무릎까지 차오르는 폭설이 발목을 잡았다. 남녀의 성기인 링거와 요니를 모신 사당만이라도 보고 싶었으나 결국 중간 기착지인 라우레미나야크(3930m)를 조금 지나 4000m 지역까지 갔다가 철수해야만 했다. 시간이 멈춘 듯한 눈보라 속에서 들려온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다시 싱곰파로 돌아온 일행은 ‘부정 탄 사람’은 없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기에 바빴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신은 모든 것을 용서한 듯 아침 하산길에는 더없이 맑은 풍경을 허락했다. 네팔 트래킹 정보(www.nepaltour.pe.kr)

글·사진= 장창락 자유기고가

trek 6. 필림 - 뎅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티베트 마을로 들어서다

2007. 10. 18(목)

필림의 현지 이름은 필론(Philön) 또는 도당(Dodang)이라고 한다. 좀솜의 옛 이름은 종삼(Dzongsam)이다. 네팔의 지명은 대부분 표기가 다른 몇 개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 그런데 이번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를 보고 비로소 그 동안의 의문이 풀렸다.

인도를 식민지배했던 영국은 1808년 측량조사국(the Survey of India)을 세워 전 인도대륙의 지도를 만드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다른 열강을 제치고 제국을 더욱 확장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다. 1830년까지 조사는 네팔과 티베트 국경까지 이루어졌는데 에베레스트 산의 측량과 산 이름의 명명도 이 때 이루어졌다. 그리고 네팔과 티베트를 포함한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그 지도를 바탕으로 현재의 네팔 트레킹 지도가 만들어졌다. 지명이 다른 것은 그런 제국주의의 산물이다. 무스탕 지역의 길링(Ghiling)도 원래는 겔링(Geling)이고 이곳 마나슬루의 라르키아(Larkya)도 원래 이름은 바북(Babuk)이다. 새로운 이름이 전혀 다른 뜻은 아니지만 원래의 이름과는 다르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마나슬루 히말을 최초로 본 유럽인은 영국의 유명한 등반가이자 탐험가인 빌 틸먼(W. Tilman) 일행이다. 그들은(동료 3명과 유명한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 1949년 5월부터 9월까지 두 번에 걸쳐 랑탕 지역의 가네시 히말과  랑탕 계곡을 거쳐 강자 라로 넘어 주갈 히말까지 탐사했다. 랑시샤 카르카에서 주갈로 넘어 오는 능선 이름은 그래서 틸먼즈 콜(Tilman's Col)이다. 가네시 히말에서 그는 팔도르(Paldor, 5996m)를 올랐다.

이듬해인 1950년 봄 그는 <네팔-영국 안나푸르나 원정대> 대장으로  안나푸르나 4봉 등정을 위해 마낭 지역으로 간다. 당시는 포카라까지 가는 도로가 없었기 때문에 카트만두에서부터 걷기 시작해 트리술리 바자르-다딩베시-아루갓바자르-칸촉-고르카-베시사하르-마낭으로 갔다. 칸촉의 능선에서 그들은 처음 하늘 높이 걸려 있는 마나슬루 히말의 웅자를 보았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는 북쪽으로 거의 30마일 떨어져 있는 히말출리(7893m)를 똑똑히 보았다... 쌍안경과 망원경으로 보니 히말출리의 번쩍이는 꼭대기가 잘 보였다. 비록 30마일이나 떨어져 있어도 대부분의 산들이 쉽게 등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저 산이 과연 히말출리가 맞는가 의심했다. 히말출리 바로 남쪽에 있는 아름다운 설봉을 지닌 보우다(Baudha, 6672m)가 우리가 보기엔 더 오르기 쉬운 능선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우리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지 지나가며 바라보기만 했다. 몇 달 후 우리가 오를 수 있는 봉우리를 찾을 때 로버츠(J.O.M. Roberts 소령)와 나는 그것을 그냥 지나친 것을 후회했다. 우리는 아무도 보우다가 보기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은지 아니면 오르지 못할 것 같은지를 기억하지 못했다.( 중 -Nepal Himalaya, p. 815)

네팔 히말라야를 논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텐징 노르가이나 힐러리 그리고 메스너 같은 등반가는 일단 논외로 한다. 여기서 말하는 네팔 히말라야는 등반이 아닌 문화적 접근으로 네팔 히말라야 학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들이다. 일본의 가와구찌 스님, 영국의 산악인 빌 틸먼, 이탈리아의 티베트 학자 지우제페 투치, 영국의 티베트 학자 데이비드 스넬그로브,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이 그들이다.

학자적 분위기와 다른 등반가인 틸먼이 다른 유명한 등반가들을 제치고 이 그룹에 들어간 것은 그가 최초로 랑탕 지역을 방문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랑탕과 안나푸르나, 그리고 에베레스트 지역의 원정을 통해 사료적 가치가 있는 자세한 탐사 기록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의 책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은 산악문학의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일본의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 1866-1945) 스님은 당시 일본의 승려 사회에 염증을 느껴 티베트에 들어가서 참된 불법을 구하고 불경을 구해 오겠다고 결심하고, 1897년 6월 하순 일본 고베 항을 떠나 싱가포르를 거쳐 인도의 캘커타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르질링에서 그곳에 거주하던 찬드라 다스나 티베트인들로부터 1년 5개월간 티베트어를 배운 뒤 1899년 1월 중국 승려로 칭하고 네팔에 잠입, 카트만두에 머무르면서 무스탕을 경유해 티베트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티베트와 중국은 모든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라사 여행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스탕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서북쪽의 오지를 통해 카일라스 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한 그는 그 해 3월 초순 카트만두를 떠나 포카라를 거쳐 뚝체에서 한 동안 머무르면서 잡입할 경로를 모색했다. 이곳에서 무스탕 짜랑(Tsarang)의 한 승려와 교분을 맺은 그는 그 인연으로 묵티나트를 거쳐 무스탕 계곡을 따라 올라가 짜랑의 곰빠에서 거의 1년 가까이 머무르면서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서북의 오지 돌포로 우회하여 티베트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카일라스를 순례하고 라사까지 여행한 뒤 라사의 세라 사원에서 1년 넘게 머무르면서 공부하다가, 시킴 쪽의 국경을 넘어 다르질링으로 내려와 캘커타로 갔다. 그는 네팔과 티베트에 들어간 최초의 일본인으로 이후 일본 티베트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티베트 여행기>(초판 1907년)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이 여행 과정을 소상히 기술했다. 좀솜의 무스탕 박물관에는 가와구치 스님의 사진과 무스탕 여정이 전시되어 있고 마르파에는 기념관이 있다.

이탈리아 티베트 학자 투치 교수가 쓴 는 무스탕에 관한 책이라기 보다는 네팔 전반에 관한 책이다. 1952년 9월  15일 카트만두를 걸어서 출발한 원정대는 고르카, 포카라, 고라빠니를 거쳐 10월 20일 까그베니에 도착한다. 그리고 짧은 무스탕 방문을 마치고 베니에서 룸비니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포카라로 되돌아와 비행기로 카트만두로 돌아왔다. 65일 간의 원정이었다. 그의 책에는 무스탕 부분을 포함하여 네팔 여러 지방의 문화, 특색, 풍속을 전문가의 안목으로 기술하고 있다.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 학부(Oriental and African Studies)의 데이비드 스넬그로브(David L. Snellgrove) 교수는 1956년에 돌포에서 카트만두까지 네팔 서부에서 북부를 횡단했는데, 돌포에서 까그베니로 내려와 깔리 간다키 강을 따라 축상에서 뚝체 근처까지 오르내린 다음 다시 올라가 무스탕의 로게까르와 짜랑을 돌아보고 로만탕은 직접 방문하지 않은 채 묵티나트로 갔다.

그는 묵티나트에서 토롱 라를 넘어 마낭의 나르 계곡을 방문 한 후 다라빠니에서 빔탕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라르키아 라를 넘어 부리 간다키 계곡으로 내려왔다(지금의 안나푸르나 라운딩과 마나슬루 트레킹 코스의 역방향이다). 그는 이 여행에 대해 <히말라야 순례(Himalaya Pilgrimage)>라는 책을 썼다.

1964년 봄에는 프랑스의 인류학자 미셸 페셀(Michel Peissel)이 무스탕에 들어가 몇 달 간 머무르면서 무스탕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고 <무스탕, 잃어버린 티베트 왕국(Mustang-A Lost Tibetan Kingdom)>을 썼는데, 지금까지 나온 무스탕에 관련 문헌 중 가장 탁월한 책이다.

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사람은 스넬그로브이다. 그는 최초로 돌포지역을 탐사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고 있는 쿠탕(마나슬루) 지역을 서양인으로는 처음 답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의 책 <히말라야 순례>(초판 1958년) 후반부는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보고서라 할 수 있다. 1981년 보스톤 샴발라출판사에서 발행한 <히말라야 순례> 뒤표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학자의 예리한 안목과 경험많은 여행자의 따뜻함을 지닌 스넬그로브는 수 백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네팔 오지 마을의 삶의 방식을 재창조했다. 그와 그의 셰르파 가이드는 인도 국경에 가까운 저지대 평원에서부터 시작하여 티베트어를 쓰는 오지인 돌포의 고산 고개를 넘고 무스탕을 지나 마나슬루 지역을 거쳐 카트만두에 내려 오기까지  7개월 동안 1600km 이상을 여행했다. 여행 중 그들은 승려들과 라마들, 야크지기와 마을 주민들, 사원과 사당 그리고 불교 사원에서 행해진 종교적 비밀 의식과 수련을 목격했다. 사원은 이 외진 지역의 문화적 중심지이다. 스넬그로브 교수의 불교와 히말라야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에 이 책은 다양한 여행자들은 물론 학자들과 학생들에게 매우 가치있는 자료이다. 데이비드 스넬그로브는 런던대학의 동양-아프리카 학부의 명예교수이며 영국 학술원 회원이다. 그는 두 권의 인도-티베트 불교를 포함하여 많은 티베트 문화와 종교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항상 아쉬운 것은 이런 고전들이 아직 번역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투치의 , 스넬그로브의 <Himalaya Pilgrimage>, 틸먼의 <The Seven Mountain-Trabel books>, 페셀의 <Mustang-A Lost Tibetan Kingdom> 이 네 권은 네팔 히말라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볼 만한 책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인문사회학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꼭 필요한 기초자료다.

위의 책들은  1967년에 나온 페셀의 책을 제외하고 모두 초판이 1950년대에 나왔다. 한 나라 학문의 성숙도는 이런 기초자료의 번역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느냐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지만 정작 그 속에 든 정신을 들여다 보면 빈 깡통인 것이 많다. 그저 돈 버는 방법을 쓴 책만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그 런 책을 보면 부자가 된다고 믿는 바보들이 의외로 많다).

팔리지 않는 책은 출판사에서 내기 어렵다. 출판사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전 <대우학술총서>처럼 기업에서 후원해 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권 당 번역비와 출판비로 300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 해마다 반복되는 히말라야 원정에 기꺼이 수 억씩 부담하는 기업이 있는데 한 번쯤은 원정대 후원 대신 이런 책 번역에 후원한다면 한꺼번에 네 권을 다 번역할 수 있고, 그 가치는 조금 과장한다면 히말라야 원정 100번 이상의 가치가 있다.

히말라야 관련 글을 쓰는 사람마다 참고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옛 영어책을  이리저리 들춰야 하는 수고를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네팔 히말라야가 우리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 지역이라면 모르겠지만 해마다 1만 명 이상의 여행자와 수 십 팀의 원정대가 찾는 곳이다. 아프리카의 어느 오지와는 다른 곳이다.

물론 이런 책들의 번역을 위해서는 단순히 영어만 잘 해서는 부족하다. 네팔과 히말라야 그리고 티베트 문화와 언어, 역사  등에 대한 다방면의 지식이 필요하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지금은 티베트 불교와 티베트어에 대한 전문가들이 많이 있다. 이제는 한 번 생각해 볼 문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은 계속 인문학의 변방국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  *  *

어제 분실사고가 생겼다. 백산 스님의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카고백 속에 든 작은 손가방이 열려 있고 그 안에 넣어 둔 지갑이 통째 사라진 것이다. 백산 스님의 텐트는 제일 후미진 곳에 있었다. 누군가 텐트에 들어 간 모양인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지인은 아닐 것 같고 가능성은 포터들이다. 그러나 주변에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상황에서 감히 텐트 속으로 들어갔다면 보통 강심장이 아니다. 단단히 마음 먹고 한 일이다.

지갑에는 신용카드와 운전면허증 그리고 한국돈 10만원밖에 없으니 큰 피해는 아니다. 신용카드는 신고하면 보름 전까지 보상이 가능하고 운전면허증은 다시 발급받으면 된다. 사나흘 후면 도착하는 남룽이나 사마가온은큰 마을이라 전화가 있을 것이니 거기서 카드를 정지시키면 된다고 위로했다. 여권을 모두 삼툭에게 맡긴 것이 다행이다.

여권은 처음부터 맡길려고 한 것이 아니라 트레킹 허가를 위해 맡겨 둔 것이다. 원래는 우리가 도착한 다음 날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우연히 그날이 네팔 축제일이라 관공서가 휴일이었다. 다음 날은 토요일(우리의 일요일에 해당)이라 역시 휴무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정대로 먼저 출발하고 셰르파 보조인 겔루 셰르파가 트레킹 2일째인 10월 14일 트레킹 허가를 받아 우리를 뒤따라왔다. 겔루는 어제 오후 우리와 합류했다.

네팔 사람들은 비교적 착하다. 그러나 100% 믿으면 안된다. 그래서 여권과 비행기표, 돈이든 지갑 등은 항상 몸에 달고 다녀야 한다. 트레킹을 떠날 때 여권과 항공권은 트레킹 여행사에 맡겨 두는 것이 제일 안전하다. 개별 여행자는 그럴 수가 없다. 작은 어깨걸이 가방이 그래서 필요하다. 나는 그 가방은 밤에 잘 때만 벗어놓을 뿐 화장실 갈 때도 가지고 간다. 그것은 트레킹 전후 카트만두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내 경우는 카메라 가방까지 두 개나 되어 번거롭기 짝이 없다. 그래도 분실할 경우의 난감함을 생각한다면 기꺼이 감수한다.

보통 때처럼 7시에 출발했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둡고 쌀쌀하다. 길은 이미 강에서 멀리 올라와 있어 강물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만 들린다. 폭포를 위에서 보며 간다. 곧 해가 맞은 편 산 위에 비치기 시작했다. 멀리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건너편으로 큰 구릉 마을인 팡싱이 보인다.

필림 바로 동쪽에는 가네시 히말(7163m)이 있다. 3년 전 랑탕의 로우레비나 야크에서 본 코끼리 뒷모습처럼 생긴 가네시 히말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물론 필림에서는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랑탕에서는 늘 가네시의 뒷모습만 보인다. 우리 여정에서는 가까운 산이 가리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2000년 이곳을 지나간 칼스텐이 오른쪽 춤 계곡을 경유한 여행기에는 그곳에서 본 가네시 1봉(7,406m) 서벽 사진이 있다.

Img_4574.jpg사진의 오른쪽이 가네시 히말 산군이다. 왼쪽 두 번째 크고 작은 두 개의 봉우리가 뭉쳐 있는 것이 마나슬루다. 마나슬루 왼쪽은 히말출리, 오른쪽 평평한 봉우리 다음 뾰족한  봉우리는 확실치 않으나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시링기 히말이 유력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manaslu_from_Laurebina_yak.jpg 지금 그 사이 계곡을 여행 중이다. 가네시 히말 산군은 제1봉(7406m)부터 5봉(6950m)까지 있다. 1949년 랑탕 지역을 탐사한 영국의 틸먼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고, 주봉은 1955년 10월 프랑스·스위스합동등반대가 처음으로 등정했다.

출발한 지 30분 후 작은 마을에 이르니 프랑스 팀이 출발준비를 하고 있다. 이곳은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다. 어제도 필림에서 우리가 먼저 캠프사이트를 차지한 까닭에 이곳까지 온 것이다. 이곳도 그리 나쁘지 않다. 곧 '한 채의 찻집'이라는 뜻의 에클레바티(Ekle Bhatti)가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대여섯 채 되는 마을이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마을 뒤쪽으로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멋진 폭포가 보인다.

마을을 지나 언덕에 오르니 북쪽 계곡 모습이 훤하게 드러난다. 양쪽 산이 가파르니 북쪽으로 가는 계곡은 점점 좁아진다. 오른쪽 사면 산꼭대기에서 떨어지는 폭포는 길이가 수 백 미터는 됨직하다. 그 아래 산허리로 난 가는 길로 가는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보인다. 그 모습을 보니 이제야 고산에 들어 온 기분이 들었다.

해는 떴지만 산이 높아 여전히 그늘 속이다. 1시간 운행 후 산기슭 코너 오르막에 올라 쉬고 있는데 프랑스 팀이 도착한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다. 이런 캠핑트레킹은 휴가가 긴 서양 사람들이 아니면 젊은 사람이 오기 힘들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트레킹 시즌인 10월과 11월에 3주간의 긴 시간을 내기 어렵다.

10여 분 동안 같이 가는데 앞에 가던 프랑스 팀이 멈추어 서서 건너편 기슭을 가리키며 웅성거린다. 멀어서 잘 안보이지만 자세히 보니 한 무리의 원숭이들이 바위 위에서 놀고 있다. 히말라야에 서식하고 랑구르(Langur) 원숭이로 은갈색 털에 검은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원숭이들은 랑탕 지역에서도 몇 번 보았다. 힌두교도들은 이 원숭이를 원숭이의 신인 하누만의 현현으로 보고 숭배하고 있다.

길은 강에서 점점 높아지고 산사태로 무너진 것을 복구한 곳도 나왔다. 잠시 후 오른쪽으로 샤르(shar) 콜라의 물이 내려오는 춤(Tsum) 계곡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왔다. 춤이란 이 계곡 전체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1956년 9월 하순, 스넬그로브는 팡싱을 거쳐 시드리바스까지 내려와 필림으로 건너온 후 다시 춤 계곡으로 올라가 여러 마을과 곰빠를 방문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900년 전 벌거벗은 티베트 성자 밀라레빠(Milarapa, 1052-1135)가 이 계곡에서 수행했다고 한다.

이 계곡은 티베트 국경을 넘어 키이롱(Kyirong)과 연결된다. 랑탕의 샤브루베시 북쪽 국경을 넘으면 나오는 티베트 마을이 바로 키이롱이다. 그 마을은 온천이 좋은 아늑한 마을이라 하인리히 하러는 말년에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그의 책 <티베트에서의 7년>에서 쓰고 있는데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두 계곡이 합수되는 지점을 조금 지나 다리를 건너 오늘 처음으로 서쪽 사면으로 넘어갔다. 이제부터 오르는 부리 간다키 상류 계곡은 현지인들은 쿠탕(Kutang)으로 부르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중산간 지방의 구릉족이 사는 마을이 아니라 티베트족들이 사는 마을이다. 재배하는 작물도 쌀은 더 이상 나지 않고 보리, 옥수수, 메밀만 나며 가옥 형태도 티베트 양식으로 바뀐다.

아침에 지도를 보고 오늘 점심은 냑(Nyak)에서 먹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을이 길가에 표시되어 있기 대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리를 건너 조금 가면 나오는 서쪽 사면의 출룽(Chhulung) 콜라로 1시간 올라가야 한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가 지적했듯이 마나슬루 트레킹 지도는 정확하지 않다. 서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도 춤 계곡 아래로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춤 계곡을 지난 후에 나온다.

출룽 계곡을 따라 오르면 고르카로 가는 길이 있다. 그 길은 계곡을 따라 히말출리(7893m)를 향해 남서쪽으로 계속 오르다가 히말출리 아래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간다. 그리고 보우다 히말(6672m) 아래에 있는 루피나 라( Rupina La, 4720m)를 넘어 고르카까지 내려간다. 루피나 라에서 베시사하르까지도 산길이 있으나 트레커들은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지도참조)

마나슬루 트레킹의 시작 마을인 고르카에서 아루갓바자르로 가지 않고 바로 북진하여 루피나 라를 거쳐 출룽 계곡으로 내려오는 트레킹은 히말출리와 보우다 히말의 환상적인 풍광을 즐길 수 있어  모험적인 그룹이 시도하는 코스지만 일반적으로 많이 이용하는 코스는 아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한 트레커 팀은 루피나 라에 눈이 쌓여 넘지 못하고 따또빠니 쪽 계곡을 타고 내려왔다고 한다.

큰 소나무가 많이 있는 비탈길을 간다. 한적한 오솔길이다. 9시가 넘어선 뒤에야 햇볕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허름한 다리를 건너 오른쪽 사면으로 건너가더니 곧 다시 왼쪽 사면으로 건너는 다리가 나왔다. 이 다리가 가관이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 철망은 떨어진 것을 대충 보수해 두었다. 틈 사이는 나무로 막았다. 원래 나무로 된 바닥도 한쪽이 떨어져 나갔는지 판자로 막아두었다. 아마 낙석이 떨어진 모양이다.

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이 다리가 바로 안드레스가 말한 '잠 다 깼니?' 다리인데 2년 전 안드레스의 사진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 통행을 하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대체로 겁이 많은 여성동포들은 떨며 건넜다. 길은 산사태가 난 험한 길과 강 옆 절벽을 보수한 길을 지난 후 강에서 조금 떨어진 산길로 접어들더니 다시 절벽 옆으로 돌고 있다. 시간은 이미 11시가 넘어 힘도 들고 배도 고프다.

지금까지는 11시 이전에 운행을 멈추었는데 오늘은 중간에 점심 먹을 마을이 없다. 무조건 오늘의 목적지인 뎅(Deng)까지 가야 한다. 11시 15분 뎅 마을을 알리는 돌로 만든 카니가 반겨주었다. 문을 통과하자 멀리 마을 초르텐과 몇 채의 집이 보였다. 마을로 가려면 왼편 산기슭을 돌아가 작은 지류를 건너야 한다. 이 지류는 여기서 보이지는 않는 히말출리에서 내려오는 물이라고 한다.

뎅에 도착하니 11시 30분이다. 마을 길가에 있는 수도에 아낙네들이 있고 벌거벗은 아이 하나가 땅바닥에서 놀고 있다. 복장은 전형적인 티베트 복장이다. 아이들은 대부분 추바(chuba)를 입고 있다. 무스탕을 방문한 페셀은 현지인들과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추바를 입었다. 그러나 무스탕에서도 이제 추바를 입고 있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이곳 사람들의 복장을 안드레스의 여행사진에서 이미 여러 번 보았지만 직접 보니 이곳이 무스탕보다 더 오지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논스톱(비록 중간에 여러 번 쉬기는 했지만) 4시간 30분의 운행으로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마당에 깔아 둔 깔개에 앉아 주방팀이 내 온 차부터 마셨다. 그리고 오늘은 운행 끝이라는 내 말에 한시름 놓는 표정이다. 원래의 계획도 여기까지다. 그래도 너무 일찍 끝나는 것 같아 점심 먹고 다음 마을인 라나(Rana)까지 갈 생각을 하고 타시에게 말하니 타시와 밍마 셰르파가 고개를 젖는다. 그곳은 캠프사이트가 한 곳밖에 없는데 이미 프랑스 팀이 그곳으로 갔다고 한다. 그 다음 마을인 비히(Bihi)까지 또 한 시간을 가야 하니 너무 멀다. 그렇게 무리할 필요는 없다.

점심을 기다리고 있으니 한 서양 커플이 도착한다. 이곳은 유난히 커플 팀이 많이 보인다. 지금까지 세 팀을 보았는데 트레킹 12일 째인 삼도에 이를 때까지 일곱 팀을 보았다. 나이도 노부부에서 젊은 사람까지 다양했다. 부부가 같이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우리는 티베트 빵과 소시지 그리고 야채를 곁들인 푸짐한 점심 식사를 하는데 그들은 간단하게 식판 하나씩 받는다. 그들의 가이드가 주방에서 가져왔다. 두 사람이라도 식당텐트를 가져오지만 보통 점심은 그렇게 먹는 모양이다.

이곳 캠프사이트가 겁나는 곳이다. 바로 뒤로는 절벽이다. 맨드라미처럼 생긴 식물은 관상용이 아니라 식용 작물이란다. 그 뒤는 까마득한 절벽이다. 식사를 마친 커플은 다음 마을로 떠나고 우리는 남은 오후를 한가하게 보냈다. 곧 다른 팀이 도착해 아랫집에 캠프를 쳤다. 이곳은 고도가 2000m 가까이 된다. 좌우로 높은 산이 있어 해가 빨리 진다. 멀리 북쪽 계곡 사이로 시링기 히말(7187m)이 개끗하게 잘 보인다.

시링기는 부리 간다키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어제까지 정북 방향에 있었지만 지금은 동북쪽으로 비켜 있다. 우리는 시링기의 왼편 계곡으로 빠져 서쪽을 향할 것이다. 레이놀즈의 가이드북에는 여기서 남쪽 계곡 사이로  가네시 4봉(7102m)이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늦은 오후의 뿌연 햇살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식당텐트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데 타시가 포터 아이 한 명을 데리고 왔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달밧도 잘 못먹어 하산한다고 한다. 이 아이는 아루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 중 한 명이다. 4일만 일하고 하산하는 셈이다. 아닌게 아니라 눈이 충혈되어 있는 모습이 좋지 않아보인다. 식량이 점점 줄어들므로 나머지 아르갓바자르에서 구한 포터들도 3일 후에 도착할 사마가온에서 모두 돌아간다고 한다.

직원의 채용과 해고는 전적으로 서다인 타시의 고유권한이다. 그럼에도 굳이 데리고 온 것은 팁을 주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500루삐를 주고 돌아가 몸조리 잘 하라고 했다. 18일 동안 짐을 지는 포터들과 주방 보조요원들에게 줄 팁으로 1인당 1000루삐를 책정해두었다. 여행사 소속 포터들의 일당은 보통 350~400루삐 사이다. 1000루삐면 전체 임금의 15% 정도로 3일치 일당에 가깝다.

이들은 여행사로부터 조금 박한 임금을 받지만 계속 일을 할 수 있어 좋고 덤으로 트레킹 그룹으로부터 팁을 두둑하게 받아 좋다. 그룹으로 오는 팀은 비교적 경비를 여유 있게 가지고 오기 때문에 팁이 후한 편이다. 또 고객에게 헌신하는 그들은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4일 일한 사람에게 500루삐의 팁은 좀 많은 편이지만 몸도 좋지 않으니 그냥 주었다(잔돈도 없다).

백산스님은 나중에 이 친구가 혹 지갑을 가져가지 않았을까 의심이 된다고 했다. 어제 분실사고 후 오늘 갑자기 떠나는 것이 수상하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증거가 없으니 그냥 잊어 버리는 좋다. 우선은 빨리 신용카드부터 정지시키는 것이 급선무다. 전화가 있다는 남룽까지는 앞으로 이틀 더 걸어야 한다.    

<참고> 루피나 라 경유를 시도한 팀이 찍은 사진

고르카에서 본 마나슬루 산군(왼편은 안나푸르나)
루피나 라 아래에서 본 동쪽 가네시 히말 산군
루피나 라를 눈 때문에 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뒤돌아 본 북서쪽 풍경
                                        
(
http://www.bergdias.de 자료)

 Manaslu_trekmap_06.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298.jpg

필림을 나와 코너를 돌기 전 돌아보다. 멀리 긴 다리가 보인다. 해가 서쪽 산을 비치기 시작했다.
 

Manaslu_0300.jpg

좁은 협곡에 떨어지는 폭포를 위에서 보고 걸었다.
 

Manaslu_0301.jpg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의 설봉이 삐죽 솟아 있다.

 

Manaslu_0304.jpg

30분 후 에클레 바티 도착. 뒤로 보이는 폭포가 심상치 않다.

Manaslu_0306.jpg

아직 해가 비치지 않아 쌀쌀한데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이 나와 놀고 있다.

Manaslu_0307.jpg

에클레 바티 지나 언덕에서 본 부리 간다키 협곡과 마나슬루에서 가장 인상적인 폭포. 가는 산허리길과 지나가는 포터의 모습이 점으로 보인다.

Manaslu_0311.jpg

작은 다리를 건너 포터들을 앞세운 우리 팀들이 가고 있다.

 

Manaslu_0314.jpg

폭포를 지난 후 계속 산허리를 따라 구부러진 길을 오르내린다.
 

Manaslu_0315.jpg

곧 프랑스 팀이 따라와 우리가 쉬고 있는 곳에서 쉰다. 대부분 젊은 커플들이다.
 

Manaslu_0316.jpg

그곳에서 10여 분 걷자 계곡 건너편으로 히말라야에 많이 서식하는 랑구르 원숭이 무리가 보였다.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이다.
 

Manaslu_0319.jpg

이제 트레일은 계곡에서 높이 올라와  산허리를 계속 돌고 도는 길이다.
 

Manaslu_0321.jpg

춤 계곡의 물이 합수되는 지점. 춤 계곡 위에 놓여 있는 다리에서 찍었다. 오른쪽이 부리 간다키 강의 상류인 쿠탕 계곡이다.
 

Manaslu_0326.jpg

강을 건너 서쪽 사면으로 넘어오다. 아직 해는 비치지 않아 쌀쌀했다.

 

Manaslu_0328.jpg

코너를 돌자 해가 비쳐 따뜻했다. 큰 소나무가 많은 멋진 산허리길이다.

 

Manaslu_0329.jpg

곧 오른쪽 동쪽 사면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나왔다.
 

Manaslu_0332.jpg

허술해 보이는 이 다리는 그래도 똑바로 서 있어 양반이다.
 

Manaslu_0334.jpg

다리를 건너 거친 절벽길을 조금 지나자,

 

Manaslu_0335.jpg

마나슬루 지역에서 가장 스릴 있는 다리가 나왔다. 2005년 이곳을 지나간 안드레스는 이 다리를 "안녕, 잠 다 깼니(Good morning, are you well awake)?" 다리로 불렀는데 그럴 듯 하다.

Manaslu_0336.jpg

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난간엔 너뭇가지로 막아놓았다. 바닥에도 보조 널빤지를 덧댔다.

Manaslu_0343.jpg

무사히 한 사람식 다리를 건넌 후 산사태 길을 지났다.
 

Manaslu_0346.jpg

마을 주민의 정성이 깃든 절벽길 돌다리길도 지났다.
 

Manaslu_0347.jpg

곧 제법 넓은 산길이 나왔다. 그곳에 있는 나무 열매는 식용이라고 하는데 보기와는 달리 맛은 별로였다.
 

Manaslu_0348.jpg

다시 고도를 올린다. 멀리 시링기 히말(7187m)의 모습이 보였다.


 

Manaslu_0352.jpg

계속 오르막과 내리막의 연속이다. 수목한계선은 아직 멀었다.
 

Manaslu_0353.jpg

반가운 카니(Kani)가 나타났다. 카니가 있다는 것은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카니는 마을 전체의 출입문이다. 무스탕 지역에서는 카니 대신 초르텐이 있다.

Manaslu_0355.jpg

카니를 지나자 오늘의 목적지 뎅(Deng) 마을이 보였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왼쪽 산허리로 나 있다.
 

Manaslu_0356.jpg

 뎅 마을 초입 길가 언덕의 소박한 초르텐

 

Manaslu_0359.jpg

마을 수돗가에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있다. 벌거벗은 저 녀석은 춥지도 않은가 보다. 집 앞에 주방팀이 있다. 그곳 마당이 오늘 우리의 야영지이다.

CIMG0841.jpg

점심으로 나온 티베트 빵. 꿀을 발라 먹으면 맛이 좋다. 오이, 소시지, 콩 등을 먹었다. 한국팀을 위해 삼툭은 젓가락을 준비했다. 그래서 가지고 간 젓가락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송남형 사진)

Manaslu_0361.jpg

우리의 야영지. 왼쪽 맨드라미처럼 생긴 작물 뒤는 깊은 낭떠러지다. 나중에 온 한 팀이 아랫집 마당에 캠프를 쳤다.

Manaslu_0362.jpg

북쪽으로 보이는 시링기 히말(7187m). 티베트 국경 가까이 있는 시링기 히말은 부리 간다키 계곡 북쪽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오후 4시 경 찍은 사진인데 해는 이미 서쪽의 높은 산 뒤로 넘어갔다. 

trek 5. 도반 -  자갓 - 필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2007. 10. 17(수)

아침을 먹고 7시 10분 출발했다. 프랑스 팀은 이제야 식사 중이다. 우리는 텐트를 치지 않았으므로 포터들은 어제 내려놓은 짐 그대로 다시 지고 출발하니 스태프들의 일이 훨씬 단순하다. 그렇지만 다시 또 도미토리 방을 쓰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으므로 앞으로는 더 이상 비가 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마을 바로 뒤에 있는 다리를 건너 1시간 동안의 운행은 별 재미가 없는 단조로운 길이다. 30분 더 가자 제법 넓은 경작지 공간이 나오고 계곡 사이에 마이산처럼 생긴 거대한 바위 하나가 떡 가로막고 있는 곳 조금 못미처 집이 세 채 있는 마을이 있다. 샤울리 바티(Shyuli Bhatti) 마을이다. 바티는 찻집이라는 뜻인 줄 알지만 샤울리는 무쓴 뜻인지 모르겠다. ABC트레킹에서 비레탄티와 간드룩 사이의 샤울리(Syauli) 바자르의 샤울리와 같은 뜻일 것이다(통일된 영어 표기가 없으므로 철자 한 두자 다른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샤울리 바티에서 30분 쯤 쉬었다. 물도 마시고 가지고 간 사탕을 나누어 먹었다. 집 주인과 우리 셰르파들 등 눈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나누어 주었다. 어제 늦게 지난 간 팀은 이곳에 캠프를 차렸을 것이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좁은 길을 30분 오르내리니 9시 10분 경 갑자기 툭 터진 강바닥이 나타났다.

숲 속을 걷다가 이렇게 개방된 공간을 보니 속이 후련하다. 이곳 풍경은 마치 안나푸르나 서키트 트레킹 코스에 나오는 딸(Tal)과 비슷한 분위기다. 그러나 번잡한 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흐르는 강물 소리만 제외하면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다. 마나슬루나 마칼루 등 캠핑트레킹 코스의 좋은 점은 이런 한적함이다.

네팔에 트레킹을 하기 위해 오는 사람은 대략 1년에 8만명이다. 그 중 60%(48,000명)는 안나푸르나 지역으로 가고 17%(13,000명)는 에베레스트 지역으로, 13%(10,400명)는 랑탕 지역으로 간다. 그리고 위 3대 메이저 트레킹 코스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으로 전체의 10%(8,000명)가 간다.(Steve Razzetti, <Trekking and Climbing in NEPAL-25 Adventure Treks in the Might Himalaya>)

나머지 지역이란 마나슬루, 나르 -푸, 다울라기리, 캉첸중가, 마칼루, 무스탕, 돌포의 일곱 지역이 대표적인 곳인데, 단순하게 계산해서 8천 명을 7로 나누면 한 곳 당 1년에 1,100명 조금 넘는 수만 방문하는 셈이니 얼마나 한적할 지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이 수치는 몇 년 전의 통계지만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이란 물론 다른 여행자들과 어울리는 재미도 있다. 그러나 모처럼 차분한 마음을 가지려고 히말라야를 찾았는데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 때문에 기분이 상할 때가 많다. 바글거리는 식당의 풍경도 처음엔 신기하고 즐겁다. 그러나 여러 해 겪다보면 소란스러움을 피해 점점 여행자가 적은 롯지를 찾게 된다. 3대 트레킹 코스를 다 마친 트레커이 좀 더 한적함을 즐길 수 있는 깊은 오지의 히말라야로 향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곳 넓은 강바닥, '마이산' 바로 아래에 바티가 하나 있다. 야영하기 좋은 곳이다. 2005년 마나슬루 트레킹을 했던 안드레스는 우리처럼 마차콜라에서 출발하여 따또빠니에서 점심을 먹고 도반을 지나 이곳에서 야영을 했다. 도반에서 이곳까지 두 시간 거리니 우리 역시 어제 비가 오지 않았다면 오후 3시 경에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마나슬루 일정을 짤 때는 소요시간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어제 일정은 일단 도반으로 정했다. 지도상으로 자갓은 너무 멀었다. 이렇게 중간에 멋진 곳이 있는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일정을 이곳으로 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어제 날씨가 좋았다면 도반에서 멈추지 않고 조금 더 갔을 것이다. 12시 45분은 운행을 마치긴 너무 이르기 때문이다. 도반의 캠프사이트보다 이곳이 백 배 낫다. 누구든 다음에 올 사람들은 이곳을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이런 멋진 강변의 캠프사이트는 마나슬루에서도 유일하지만 아마 네팔 트레킹의 모든 코스에서 흔치 않을 것같다.

강바닥 옆을 가던 길은 물길 때문에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오른쪽 산비탈의 울퉁불퉁한 길로 바뀌었다. 그리고 잠 시 후 다시 계곡 바닥으로 내려섰다. 넓은 강바닥은 점점 좁은 협곡으로 변해갔다. 주변의 풍광은 여전히 절벽이 압도하고 있다. 코너를 돌아 오른쪽 사면으로 올라서서 조금 가다가 지류계곡인 야라콜라를 건너는 현수교를 건너니  다시 계속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교차된다. 그리고 얼마 후 다리를 건너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왼쪽 사면으로 넘어 갔다.

길은 이제 단정한 돌계단의 오르내림이다. 그런데 주변 풍광이 엄청나다. 거대한 절벽 사이에 난 길은 마치 무릉도원으로 가는 비밀의 문처럼 보인다. 코너를 돌 때마다 변하는 풍경은 발걸음을 자주 멈춘게 한다. 고도는 1200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풍경은 아주 드라마틱하다. 도반에서 자갓 사이의 이길은 마나슬루 트레킹 중 저지대에서는 가장 멋진 풍경을 지니고 있어 떠나기가 주저될 정도였다.

그 풍경의 중심에 있는 작은 마을 야루판트(Yaruphant)에 도착했다. 샤울리 바티에 서 있는 이정표를 보면 그곳에서 1시간 30분 거리로 나와 있다. 우리는 1시간 20분 걸렸다. 거대한 절벽을 마주하고 따뜻한 햇볕 아래 서너 채의 집이 조용히 모여 있다. 마치 세상에서 벗어나 조용히 은거하고 있는 은자들의 집 같다. 문득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 779-843)가 지은 '은자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尋隱者不遇)'라는 시가 생각났다.  

尋隱者不遇

 

松下問童子 (쏭 시아 원 통쯔)

소나무 아래서 동자에게 물으니,

言師採藥去 (이엔 쉬 차이 야오 취)

스승님은 약초를 캐러 가셨다고 대답한다.

只在此山中 (즈 짜이 츠 샨 쭝)

다만 이 산 속에 있을 터인데,

雲深不知處 (윈 션 뿌 즈 추)

구름이 깊어서 있는 곳을 모르겠네.


예전에 한시를 공부할 때 즐겨 읊던 5언절구다(그러고 보니 벌써 20여 년 전이다). 당시 어학연수를 명분으로 잠시 대만을 다녀오면서 노래 테이프를 몇 개 사왔는데 그 중 <兒童唱唐詩(上,下>) 테이프는 아이들이 당시(唐詩)를 노래로 부르는 내용으로 특히 좋아하여 지금도 가끔 듣곤 한다. 노래가 끝나고 해설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통해 시끄럽게 들리기만 하던 중국어가 조용히 잘 말하면 음악 못지않게 아름다운 선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알 게 되었다.

정말 이곳은 가도의 시에 나오는 그런 은자가 살고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길은 계속 산허리 코너를 돌고 있다. 멋진 풍광을 벗어나는 마지막 오르막 코너에서 아쉬움에 뒤를 돌아보았다. 점심 먹을 마을인 자갓(1415m)에는 10시 35분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 전부터 판석이 잘 깔려 있다. 마을 입구 팻말에는 <당신은 마나슬루 보존지역에 들어서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네팔어와 영어로 쓰여 있다. 마을 광장 끝에 있는 돌 초르텐을 보니 비로소 히말라야로 들어 온 기분이 들었다.

자갓이란 '톨게이트(tollgate)'라는 뜻이다. 즉, 통행세를 받는 곳이다. 예전 티베트와 무역을 할 때 이곳에서 통행세를 받았다. 안나푸르나 서키트 지역에도 자갓이 있다. 그곳 역시 마찬가지 기능을 했던 마을이다. 그래서 이 마을에는 경찰 체크포스트와 우체국, 초등학교가 있다.

멋진 캠프사이트에 주방팀이 준비 한 깔개가 놓여 있다. 여성동포들이 강한 햇볕을 피하기 위해 깔개를 그늘 쪽으로 옮긴다. 마당에는 어미닭과 병아리들이 한가롭게 돌아다니고 있다. 히말라야에는 족제비 같은 동물이 없는 모양이다. 모든 닭은 방목을 하고 있다. 제일 윗 마을인 삼도에서도 그랬다. 얼마 후 프랑스 팀이 도착했다. 그들은 서양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거침없이 뜨거운 햇볕을 즐긴다.

잠시 타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40세인 그는 고향 무스탕 남돌을 떠나 포카라에 와 가이드 일을 한 지 10년 되었고 정식 라이센스는 3년 전에 취득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했으나 수입이 형편없어 나왔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다 돌아가셨으니 특별히 고향에 미련이 없었을 것이다. 12살 아들과 9살 딸이 있다. 타시를 보니 마치 5년 전의 삼툭을 보는 것 같다. 영어를 잘 하니 그도 열심히 일하면 나중에 여행사를 하나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삼툭의 여행사에 소속된 지금은 한국어도 열심히 독학하는 중이라고 한다.

발목이 아무래도 심싱찮다. 이틀 동안 샌들을 신고 운행한 탓에 발목이 시큰거린다. 아침에 보명화 보살님이 가지고 온 발목보호대를 양말 안에 신었으니 조금 도움은 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한다. 특히 오른쪽 발목이 더 아팠다. 설상가상으로 오늘 아침에 눈을 뜨니 목이 따가웠다. 목감기가 시작될 때의 증상과 같았다. 순간 마차콜라에서 한 목욕이 떠올랐다.

결국 신주단지처럼 배낭에 넣어 지고 온 등산화를 꺼냈다. 가능하면 라르키아 라 가까이 가서 신으려고 했는데 이런 상태라면 그곳까지 가기도 전에 발목이 망가질 지경이다. 비상용 끈으로 밑창을 잘 묶은 후 오후 운행부터 신기로 했다. 제발 오래 버텨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점심으로 나온 티베트 빵에 꿀을 찍어 먹으니 맛이 좋다. 열이 많은 체질이라 평소 꿀을 잘 먹지 않는데 네팔 꿀은 잘 먹힌다. 꿀병은 엉성하지만 모두를 이구동성으로 맛이 좋다고 한다. 점심 먹은 후 12시 15분 출발했다. 마을을 벗어나니 바로 내리막길이 나오고 곧 왼편으로 두 개의 계곡(팡구콜라와 바루콜라)이 합수되는 강바닥으로 내려왔다. 여기서 길이 두 개로 갈린다. 하나는 계속 왼쪽 산기슭쪽을 타고 가다가 현수교를 건너는 높은길이고 다른 하나는 강바닥쪽으로 내려가는 낮은길이다.

우리가 타시보다 먼저 출발했는데 갈림길이 나오자 앞에 가던 사람이 망설이고 있다. 내가 앞장 서 윗길로 올랐다. 아무래도 큰 길이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였다. 곧 타시가 따라와 돌아오라고 한다. 윗길은 여름길로 몬순 때 물이 불어나면 사용하는 길이다. 지금은 겨울길인 강바닥길을 갈 수 있으며 강에는 작은 통나무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 강바닥을 잠시 걸은 후 왼쪽 사면으로 올라 여름길과 만났다. 그곳부터는 다시 계단길이다.

중간에 쉬기도 하면서 계단길을 45분 오르내리니 작은 마을 살레리(Salleri, 1340m)가 나왔다. 이 마을도 판석으로 잘 포장되어 있다. 길 옆 담장에는 이 길에 대한 연혁을 써 놓았다. 총 길이는 317m고 비용은 73,810 루삐 들었으며 살레리 마을부녀회(Mother's Group)에서 30%를 부담했다고 하는 내용이다. 완공연도는 네팔력 2055년 12월 27일이다. 금년이 2064년이니 11년 전이다.

여기서 다음 마을인 시드리바스(Sidribas)까지는 45분 거리다.  마을을 벗어나니 멀리 앞쪽으로 시링기 히말(Shringi HImal, 7187m)이 보인다. 티베트 국경 가까이 있는 산이다. 왼편 산기슭으로는 우리가 가야 할 산허리길이 실날처럼 있다. 그 길을 올라 코너를 돌았다. 오솔길 같은 내리막길이고 그 아래쪽으로 시드리바스가 있다. 멀리 건너편 산 중턱에 오늘의 목적지 필림이 보인다. 극적인 절벽길은 더 이상 없고 다만 한적하고 걷기 좋은 산길이다.

시드리바스(1420m)에서 처음으로 마니월을 보았다.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아이들과 엄마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풍경이 한가롭다. 개도 길바닥에 늘어져 있고 오리도 새끼들을 모아놓고 뭔가를 훈시(?) 중이다. 곧 부리 간다키 강을 가로지른 긴 다리가 보였다. 필림으로 가는 길이다. 계속 산기슭을 따라 가는 작은 길도 하나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팡싱(Pangsing)을 거쳐 나중에 냑(Nyak)에서 주 트레일과 만난다. 그러나 캠핑할 곳도 없고 현지인들만 이용하는 거친 길이라 모험적인 트레커 외에는 거의 이용하지 않는다.

필림으로 가는 이 다리는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긴 다리다. 어림짐작으로도 150m는 될 것 같다. 다리를 건너 필림까지는 200m 정도의 고도를 오르는 지그재그 오르막이 다. 하루의 일정을 마칠 때 쯤은 모두들 힘들어 하는데 오늘은 더욱 화끈하게 운행을 마감하고 있다.

오후 2시 40분, 필림(Philim, 1550m)에 도착했다. 마을 입구에 세워 놓은 관문인 카니(Kani)에는 마오이스트 깃발이 많이 꽂혀 있다. 필림은 두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캠프사이트는 아랫마을에 있다. 필림도 마나슬루에서는 비교적 큰 마을이다. 스넬그로브에 의하면 필림은 부리 간다키 계곡에서 티베트 곰빠가 있는 마을 중 제일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고 한다.

여장을 풀고 좀 씻어볼까 하고 마을 수돗가를 가니 마을 사람들이 많아 포기했다. 저 아래쪽으로 가면 또 수도가 하나 있다고 한 영감님이 몸짓으로 말했지만 내려가기가 귀찮아 그냥 수건에 물을 적셔 몸을 닦는 것으로 만족했다. 닷새만에 겨우 1500 고지에 올랐다. 그래도 해가 지자 쌀쌀한 것이 고산지역에 가까이 온 것을 실감한다. 주방팀이 내 온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하루의 운행을 정리했다. 식당텐트에서 뜨거운 차를 마시는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Manaslu_trekmap_05.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198.jpg

도반콜라를 건너 돌아본 도반 풍경. 어제 지나왔던 멋진 폭포가 보인다.

 

Manaslu_0200.jpg

제법 넓은 경작지에 있는 샤울리 바티 마을. 마이산 처럼 생긴 바위 절벽이 보인다. 잠시 후 우리는 그 절벽 아래를 지나갈 것이다.

 

Manaslu_0204.jpg

샤울리 바티에서 휴식. 아직 고도가 얼마 도지 않는데 혜명화 보살은 벌써부터 붓기가 보인다.
 

Manaslu_0206.jpg

곧  안나푸르나 지역의 딸(Tal)과 비슷한 분위기의 풍경이 나타났다. 그러나 전체적인 느낌은 비교를 불허한다.
 

Manaslu_0207.jpg

강바닥 길가에 바티(찻집) 하나가 있다. 도반보다 이곳에서 야영하면 더욱 멋진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Manaslu_0219.jpg

찻집에서는 반드시 쉬어 간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사탕이나 초코바를 먹어 에너자를 보충한다. 보명화 보살님이 초코바를 많이 가져와 쉴 때마다 나누어 주었다.  

Manaslu_0210.jpg

강바닥 길을 한참 간 후 길은 오른쪽 기슭으로 오른다. 고개에 올라 내려다 보니 다시 넓은 강바닥, 오른쪽 절벽 아래로 길이 나 있다. 절벽 코너를 돌면 길은 다시 산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동쪽 지류에 걸쳐진 다리를 하나 건넌 후 왼쪽 산기슭을 탄다.

Manaslu_0231.jpg

얼마 후 다시 부리 간다키 강을 건너 서쪽 사면으로 가니 잘 만들어져 있는 돌계단길이 기다리고 있다. 거대한 절벽이 튀어 나와 있는 이곳 주변 풍경이 기가 막히다. 나는 이곳을 <마나슬루 풍경 베스트 5>에 넣었다.
 

Manaslu_0217.jpg

오르막을 오르면 멀리 은자라도 살고 있을 것 같은 작은 마을 야루판트가 보인다. 거대한 절벽은 그곳으로 들어가는 관문처럼 보인다.
 

Manaslu_0218.jpg

강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야루판트 마을. 강 주변 땅은 돌이 많아 경작지로는 별로 좋지 않아 보인다.
 

Manaslu_220-2.jpg

마을을 지나 고개에 올라 뒤를 돌아보다. 다시 보아도 멋진 풍경이다.

 

Manaslu_0224.jpg

10시 조금 넘어 자갓 마을 도착. 마나슬루 보존지역이 시작되는 마을이다.
 

Manaslu_0234.jpg

자갓 마을 광장에 세워진 초르텐. 트레킹 시작 후 처음 보았다. 본격적으로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접근하고 있다는 표시다.

Manaslu_0235.jpg

자갓 돌담에 있는 이정표. 마나슬루 지역에서는 라르케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1956년 가을 이 지역을 방문한 스넬그로브의 책 <히말라야 순례>를 비롯하여 모든 문헌과 지도에는 라르키아(Larkya)로 표기하고 있다.  

Manaslu_0232.jpg

발목이 아파 더 이상 샌달을 신고 운행하는 것은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비상용 끈으로 임시조치를 한 후 점심 먹고 오후 운행 때부터 다시 등산화를 신었다.

Manaslu_0236.jpg

자갓을 벗어나 겨울길에 놓여 있는 소박한 통나무다리. 여름길은 왼편 산기슭으로 나 있고 사진의 물이 흘러 나오는 계곡에 현수교가 놓여 있다.  포터들이 앞에 가고 있다.

Manaslu_0241.jpg

한가한 산골 마을 살레리 풍경
 

Manaslu_0240.jpg

살레리 마을 길 가 돌담에 부착되어 있는 도로포장공사 기록. 1996년 12월 27일 완공되었다고 쓰여 있다. 공사비 73,810루삐는 당시 약 1,000불 정도 된다. 

Manaslu_0243.jpg

살레리를 벗어나자 멀리 북쪽으로 시링기 히말이 보였다. 시링기 히말은 티베트 국경에 가까이 있는 7천 미터급 산이다. 우리가 갈 길이 왼쪽 산허리에 보인다.
 

Manaslu_0249.jpg

트레킹 길은 항상 오르막과 내리막길이 반복된다. 지금까지 아주 심한 오르막이나 내리막은 없었다.
 

Manaslu_0253.jpg

아래 강쪽으로 시드리바스 마을이 있다.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 말이다. 저 정도 쯤이야... 건너편 산중턱에 오늘의 목적지 필림이 보인다.
 

Manaslu_0254.jpg

처음으로 마니월을 만난 시드리바스. 마니월이나 초르텐은 항상 왼편으로 통행해야 한다.

 

Manaslu_0256.jpg

따뜻한 햇볕 아래에서 한가하게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엄마들과 아이들. 검둥개도 길 가운데에 늘어져 있다.
 

Manaslu_0258.jpg

모든 마을에는 이렇게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다음 목적지인 필름까지 45분 거리라고 쓰여 있다.

엄마와 아이들 1

Manaslu_0259.jpg

 엄마와 아이들 2

Manaslu_0262.jpg

시드리바스의 아이들

Manaslu_0265.jpg

곧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긴 다리가 나타났다. 필림으로 가는 15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긴 다리지만 그리 높지는 않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다리 건너는 것을 무서워 한다.  

Manaslu_0266.jpg

다리를 건너 한참 지그재그로 올라 필림에 도착했다. 마지막 운행에 땀께나 흘렸다. 마을 입구에 있는 카니(Kani)에는 마오이스트 깃발들이 색이 바랜 채 걸려 있다.
 

Manaslu_0279.jpg

필림 마을 중심가. 캠프사이트는 아줌마가 보고 있는 오른쪽에 바로 있다(아래사진).

 

Manaslu_0272.jpg

캠프를 치는 스태프들. 셰르파들과 주방팀들이 이 일을 한다.

 

Manaslu_0275.jpg

캠프가 완성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젖은 옷을 줄에 너는 일이다. 캠프사이트에는 대부분 이렇게 빨래줄을 설치해 두고 있다. 식사 전 손을 씻으라고 주방에서 항상 빨간 물통은 준비해 준다.  

Manaslu_0278.jpg

셰르파들을 도와 캠프를 치고 난 주방팀들은 바로 전을 벌이고 우리에게 차를 내 준 후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남자들이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은 이제 전혀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선반 위로 김치그룻이 보인다.

Manaslu_0277.jpg

보통 오후 4시 경 차와 과자가 나온다.  뜨거운 밀크에 홍차티백과 설탕을 넣어 마시며 하루의 피곤을 달랜다.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trek 4. 마차콜라 - 따또빠니 - 도반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비를 만나다

2007. 10. 16(화)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예상했던 일이다. 비나 눈은 항상 예상을 해야 한다. 한 여름에도 눈이 올 수 있고 겨울에도 비가 내릴 수 있다. 히말라야 트레킹은 저지대에서 고지대까지 다양한 고도를 거치기 때문이다. 2000m 이하는 아열대 기후라 비가 자주 내린다. 그리고 비행기로 바로 3000m 가까이 오르는 쿰부나 좀솜, 무스탕 지역도 비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는 우의나 스패츠, 아이젠은 반드시 지참해야 하는 필수품이다.

어제 오후 잠시 널어두었던 빨래는 비닐봉지에 넣었다. 이런 날씨에는 마르기가 쉽지 않다. 땀에 덜 젖는 티셔츠나, 바지는 빨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 트레킹에서 제일 문제는 속옷 빨래다. 하루만 운행해도 땀에 차는 속옷을 매 번 빨기도 어렵고 빨아도 마를 시간이 없다.

그나마 저지대는 나은 편이다. 고산으로 올라가면 아무리 날씨가 좋아도 기온이 낮아 잘 마르지 않는다. 매일 운행이 끝난 후 마른 옷으로 갈아입지만 다음날 운행을 시작할 때는 전날 입었던 옷과 양말을 다시 착용할 수밖에 없는데, 아침마다 온 몸이 으시시했다. 그렇다고 매일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도 없다. 그러려면 열 벌도 모자란다.

사실 하루 3리터 이상의 수분을 섭취하고 열심히 온 몸을 움직이는 트레킹을 이틀 정도만 하면 그동안 문명사회에서 축적되었던 노폐물이 거의 다 빠지낟.그 후에 나오는 땀은 냄새가 거의 없는 맹물 수준이어서 그리 냄새가 나지 않는다.  통기성과 보온성, 투습성이 뛰어난 등산의류는 운행 중에도 빨리 마른다.

양말은 다르다. 양말은 꽉막힌 등산화 속에 갇혀 있어 아무리 좋은 쿨맥스 양말과 고어텍스 등산화를 신어도 한계가 있다. 발냄새는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점심시간에 신발은 물론 양말까지 벋는 이유는 발을 편하게 하려는 뜻이 있지만 양말을 말리기 위한 이유도 있다. 등산양말은 두껍기도 오죽 두꺼운가! 빨아도 말리기가 쉽지 않다. 나는 가지고 간 양말 네 컬레 중 한 컬레는 수면용으로 신고 세 컬레를 교대로 신으며 버텼다. 물론 중간에 빨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는 롯지트레킹이 훨씬 조건이 좋다. 롯지 식당에는 저녁에 난로를 피워놓기 때문에 젖은 빨래나 세탁한 빨래를 널어두면 쉽게 마른다. 밤에는 방 안에 빨래줄을 치고 널면 조금이라도 습기를 제거할 수 있다. 안나푸르나 지역 트레킹의 경우 롯지 식당 탁자 아래 요란한 소리를 내는 석유난로와 탁자를 빙 두르고 있는 담요 속에 빨래줄이 있다. 쿰부나 랑탕 지역은 식당 창가 주변에 빨래줄이 쳐져 있다.

아침을 다 먹을 때까지 비가 그치지 않아 출발을 조금 늦추었다. 타시가 앞장서야 하는데 텐트 걷는 일을 거들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정이 짧아 웬만큼 늦어도 무리가 없다. 다행히 곧 빗줄기가 가늘어져 텐트를 걷을 수 있었고 7시 40분 출발했다.

마을을 빠져나오니 어제 늦게 도착한 프랑스 팀은 마을 끝 캠프사이트에서 이제 아침을 먹고 있다. 14명이나 되니 기동력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다. 식당텐트도 두 동이나 된다. 이 팀은 대체로 젊은 사람들이 많다. 마나슬루 여행기를 보면 프랑스 팀을 만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무스탕 방문자도 프랑스가 단연 압도적으로 많다.

2005년 무스탕 방문자의 나라별 통계를 보면 프랑스가 156명으로 단연 으뜸이다. 2위 이태리는 88명, 3위 미국은 82명, 4위 독일은 80명이니 상위권에 속하는 다른 나라의 두 배에 가까운 수치다. 비단 무스탕 지역 뿐만 아니라 아마도 네팔에서 캠핑트레킹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프랑스일 것 같다.

마을을 벗어나 바로 거센 지류가 흐르는 통나무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 바로 강바닥으로 내려선다. 계곡에 물안개가 자욱하여 마치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길은 절벽길이 아니라 강물 2-3미터 바로 위를 걷는 쉬운 길이다. 빗줄기가 굵어져 우의를 입었다.

포터들은 비가 오면 비닐로 짐을 덮어 가방을 나르지만 비가 많이 오면 다 커버하지 못하므로 가방 안에 든 옷은 하나씩 따로 비닐패킹해야  한다. 배낭커버도 필요하다. 방수용도 되고 평소 운행 때도 커버를 쒸우고 운행하면 배낭을 보호해 준다.

'뜨거운 물'이라는 뜻의 따또빠니에는 10시에 도착했다. 입구에 물탕이 하나 있고 왼편으로는 따뜻한 물이 흘러나오는 홈을 판 돌 꼭지가 세 개 있다. 2005년 11월 이곳을 방문했던 안드레스의 글에는 욕탕에 물이 없는 모습인데 지금은 따뜻한 물이 찰랑찰랑 넘치고 있다. 사진을 비교해 보니 2년 전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 따또빠니에 도착하면 신나는 샤워는 아니더라도 몸을 씻고 빨래도 하며 한가한 오후를 보낼 생각이었다. 지금은 물이 나오는 �지도 세 개나 있으니 복잡하지도 않을 것이다. 생각같아서는 당장 욕탕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그러나 비가 내리는 으슬으슬한 날씨여서 그럴 분위기가 나지 않았고 수온도 생각보다 높지 않고 미지근하다. 그래서 그냥 세수 정도로 끝냈다. 꼭지에서 나오는 물의 수온은 다 다른데 오른쪽 꼭지의 물 온도가 제일 높다. 따또빠니는 역시 안나푸르나 라운딩 중 나오는 따또빠니가 제일 뜨겁고 시설이 좋다.

1956년 이곳을 방문한 다비드 스넬그로브는 <히말라야 순례(Himalaya Pilgramage)>에서 "뜨거운 물이 나오는 작은 물줄기가 바위 아래에서 나와 노호하는 찬 부리 간다키 강으로 흐른다."라고 쓰고 있다. <마나슬루 트레킹 가이드북>을 쓴 레이놀즈가 1992년 마나슬루 개방 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찻집도 없고 물꼭지도 오직 하나뿐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캠핑트레킹이라고 아무데서나 점심을 먹지 않는다. 반드시 주방팀이 전을 펼칠 움막이나 롯지 아궁이가 있어야 하며 그런 곳이라야 식수도 구할 수 있다. ABC 트레킹 중 나오는 캠프사이트가 있는 롯지에는 한쪽에 반드시 그런 움막이 있다.

몇 채의 집이 마주보고 있는 이곳 따또빠니 마을 입구에 가게가 하나 있고 그 앞에 테이블이 하나 있어 일찍 온 우리가 차지했다. 지붕에 차양을 쳐 놓아 골목길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배낭에서 우모자켓을 꺼내 체온을 보존했다. 빠상이 곧 따뜻한 비스킷과 차를 가지고 왔다. 차 마시는 이 시간이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비는 차츰 잦아들었다.

별로 커지 않은 마을인데 아이들이 많다. 욕탕 앞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뭔 일인가 하고 가 보니 꼬마들이 엄마들의 보호 아래 비가 오든말든 즐겁게 물놀이를 하고 있다. 세상 근심걱정을 모르는 아이 때는 언제나 행복하다. 누구든 저런 시절이 있었으리라.

점시 먹고 출발할 때 비가 다시 굵어졌다. 15분 쯤 지나서 나무로 바닥을 깐 고풍스런(?) 현수교를 건너 처음으로 부리 간타키 강 오른쪽 사면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오르지 않아 건너편 절벽에서 엄청난 소리를 내며 공중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나타났다. 얼마나 장관인지 비가 내리는 중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감상했다. 마나슬루 지역은 유난히 수직 절벽이 많아 만나는 폭포마다 장관이다.

길은 울창한 수풀 사이로 나 있다. 야생 대마초가 자주 보인다. 히말라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식물이다. 이 대마초도 여행기에서 빠지지 않는 매뉴 중 하나다. 간혹 히말라야에 온 김에 대마초를 피워보려는 여행자도 있겠지만 트레킹을 망치지 않으려면 삼가는 것이 좋다.

목적지 도반에는  12시 45분에 도착했다. 스태프들은 이미 도착한 상태다. 타시가 이곳 유일의 도미토리 '호텔'에서 자도 괜찮겠냐고 묻는다. 캠프사이트가 젖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젖은 땅에 텐트를 치는 것은 번거롭기도 하지만 자는 사람도 불편하다.

이층 도미토리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니 입구는 옥수수 등 곡물 창고이고 그 옆에 침상이 여덟 개 있는 큰 방 하나가 있다. 2층 전체가 천장을 공유하고 있다. 엉성한 창문으로 바람이 몰아쳐 왔다. '나만의 왕국'인 텐트에 비하면 썰렁하지만 비오는 날엔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 할 일이다.

모두를 땀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어제 빨았던 빨래와 함께 발코니에 널었다. 가지고 온 빨래줄을 총 동원했다. 비가 오고 있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잘 마를 것 같다. 가지고 온 빨래집게 10개가 모자란다. 양말 한 컬레에만 두 개가 필요하니 그렇다. 다음부터는 15개로 상향조정해야겠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으니 여유가 있다. 비는 이제 수그러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 비로 라르키아 라에는 1m 이상의 눈이 내려 3일간 길이 막혔다고 한다. 거기까지 간 이상 3일 기다렸다가 길을 뚫고 넘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보통 라르키아 라 넘기 전 마지막 캠프인 다람살라까지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고소적응일 하루를 포함해 11일이 걸린다(우리는 13일 일정이다). 거기서 라르키라 라를 넘어가면 카트만두까지 5일 걸리지만(뛰어가도 4일 걸린다), 갔던 길로 다시 내려오면 최소한 일주일이 걸린다.

오후 3시 경 프랑스 팀이 도착했다. 그리고 젖은 마당에 텐트를 친다. 이들은 인원이 많고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어서인지 스태프들의 도움을 받아 각자 자기 텐트를 친다. 사전에 그런 약속이 있었는지 아무도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다. 우리라면 그런 식의 트레킹을 기꺼이 감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갑자기 조용한 산골이 사람들로 바글거린다. 트레커 20명에다 스태프 50명이 한꺼번에 몰렸다. 우리는 롯지에 딸린 도미토리 방과 식당 그리고 화장실까지 이용할 수 있어 편하다. 이들은 따로 식당텐트와 화장실 텐트를 세웠다.

그리고 1시간 30분 후인 4시 30분, 한 서양인 노(?)부부가 도착했다. 이곳이 복잡한 것을 보고 더 가려는 그 부부를 가이드가 만류한다. 앞으로 1시간 더 가야 하는데 너무 늦다는 것이다. 결국 그들도 마당에 텐트를 쳤다. 부부라서 한 동만 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5시 경 또 다른 그룹 6명이 나타났다. 도저히 자리가 없는 것을 안 이들은 그대로 통과했다. 다음 마을인 샤울리 바티에 도착하면 날이 저물 것이다.

마나슬루 지역은 캠프사이트가 많지 않고 있는 곳도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넓지 않아 트레커들이 몰리는 10월과 11월에는 캠프사이트 트래픽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오후 3시 이전에 운행을 마치는 여유 있는 일정을 짜는 것이 좋다. 그런 일정을 짠 우리는 한 번도 캠프사이트가 만원이어서 다음 캠프사이트까지 가는 일이 없었다.

여기는 전기가 들어온다. 식당에서 차 마시고 자녁까지 먹은 후 이야기를 나누다가 포터들을 위해 일찍 자리를 떴다. 식당은 우리가 떠나면 포터들의 침실로 사용된다. 식당텐트도 마찬가지다. 옆에서 기다리던 포터들이 반가운 듯 식탁과 의자를 치우로 잠자리를 마련한다.

도미토리의 높은 천장과 휑한 공간이 영 낯설다. 아직 마르지 않은 빨래는 방 안에 줄을 치고 널었더니 더욱 산만한 모양새다. 그래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가뿐한 마음으로 침낭에 몸을 깊이 묻고 잠을 청했다.   

Manaslu_trek_map_04.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156.jpg

마차콜라 마을을 벗어나면 나오는 통나무 다리.

 

Manaslu_0157.jpg

다리를 건너 돌아 본 마차콜라 마을. 조랑말들이 따라오고 있다. 노란색 텐트는 프랑스 팀의 식당텐트.

 

Manaslu_0158.jpg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곧 계곡 강바닥으로 내려갔다.

 

Manaslu_0162.jpg

다시 작은 지류를 건너다. 통나무 다리 건너기는 보기와는 달리 어렵지 않다.

 

Manaslu_0166.jpg

잠시 계곡 위로 오른다. 돌계단이 비에 젖어 윤기가 흐른다. .
 

Manaslu_0168.jpg

점심 먹을 따또빠니 도착. 사전 정보와는 달리 욕탕에 물이 가득하다. 수온은 그리 높지 않았다.

 

Manaslu_0171.jpg

위 사진 왼쪽에 보이는 벽쪽으로 설치된 온천 꼭지. 오른쪽 물이 제일 뜨겁다.

 

Manaslu_0173.jpg

차를 마시고 쉬는데 아이들이 욕탕 주위에 몰려 있길래 무슨 일인가 하고 가 보았다.

 

Manaslu_0174.jpg

어느새 꼬맹이들이 욕탕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 엄마나 아이 모두 즐거운 표정이다.

 

Manaslu_0178.jpg

도반의 유일한 숙소인 <히말라얀 호텔-롯지>. 캠프사이트가 젖어 있어 우리는 이 숙소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렇지 않다면 뒤숭숭한 분위기의 도미토리 방을 이용할 이유가 없다.  

Manaslu_0179.jpg

이층 왼쪽은 고방이고 오른쪽이 도미토리. 발코니에 넌 우리팀 빨래가 요란하다. 아래층 왼쪽방은 식당이다.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 중 오른쪽은 우리팀의 밍마 셰르파이고 왼쪽은 미리 도착한 프랑스 팀 가이드다.

Manaslu_0181.jpg

오후 3시경 도착한 프랑스 팀은 진 땅에 그대로 텐트를 쳤다. 
 

Manaslu_0182.jpg

프랑스 팀의 식당텐트와스태프들. 

 

Manaslu_0185.jpg

일찍 도착하여 짐을 풀고 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우리팀 사람들은 한결 느긋한 표정이다.

 

Manaslu_0186.jpg

오후  4시 경부터 날이 좋아졌다. 마당에서 본 도반 풍경. 광각인 28.8mm의 렌즈여서 롯지 건물이 왜곡되어 기울어져 보인다.
 

Manaslu_0188.jpg

마을 위로 조금 올라가 내려다 보았다.
 

 

Manaslu_0189.jpg

포터들은 이렇게 한쪽에서 자기들끼리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저 남비 하나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어떨지는 상상이 가고도 남는다. 저런 모습을 보면 더 이상 우리가 먹는 음식의 맛이 있니 없니를 따지는 것은 복감(福減)하는 일이다.

Manaslu_0192.jpg

늦게 도착한 한 서양 부부. 가이드가 더 가면 힘들다는 말을 하고 있다. 반팔 차림의 할매가 주도를 하고 영감님은 딴청이다. 서양인으로서는 이례적이다. 보통은 아내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남편이 모든 일을 처리한다.

Manaslu_0195.jpg

결국 이 부부도 마당 한쪽에 텐트를 쳤다. 늦게 온 사람들은 바빠죽겠는데 일찍 도착하여 짐을 푼 사람들은 한가하게 웃으며 구경하고 있다.

 

trek 3. 소티콜라 - 라푸베시 - 마차콜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마오이스트 통행세, 개울 목욕

2007. 10. 15(월)

아침 5시에 잠이 깼다. 히말라야에 들어오면 잠이 적어진다. 일찍 잠을 자는 탓도 있지만 책을 보느라 늦게 자도 마찬가지다. 피곤하게 몸을 움직였어도 일찍 누니 떠지고 그래도 잠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는 것이 신기하다. 밤에 후레쉬 빛이 텐트밖을 가끔 지나가는 걸 보니 셰르파들이 물건의 분실을 막기 위해 교대로 입초를 선 모양이다.

먼저 화장실부터 다녀 온 후 짐을 싼다. 일단 하루의 운행이 끝나고 짐이 들어오면 갈아 입을 옷가지를 찾느라 다 풀어제쳐 놓는다. 그리고 아침에 다시 잘 싸서 가방에 집어 넣는다. 이미 무스탕 트레킹 때 경험한 매일 반복되는 일과지만 며칠 지나면 숙달되어 어렵지 않다. 6시에 모닝티가 배달되고 10분 후 세숫물이 온다. 세수 후 곧 아침식사가 시작되므로 그때까지 침낭을 과 짐을 다 싸서 자물쇠로 채워놓아야 한다. 아침 먹으러 갈 때는 배낭과 스틱, 카메라 가방 등을 다 가지고 나간다.

밖에는 식당텐트가 이미 철거되어 있다. 야외식탁에서 우리가 아침을 먹을 동안 텐트가 철거된다. 포터들은 이미 출발하고 있다. 제일 늦게 출발하는 포터는 우리의 식사가 다 끝나야 짐을 쌀 수 있는 식탁과 의자 담당 포터다. 아침은 간단하다. 뽀리지 대신 누릉지와 가지고 간 라면을 교대로 끓여달라고 했다. 짜파티와 계란 하나가 따라 나온다. 뜨거운 핫초코릿부터 듬뿍 마신다.

6시 30분에 아침을 먹고 7시에 출발했다. 무성한 숲 길을 걷고 고도도 300m 정도 오르는 오늘도 그리 힘든 일정이 아니다. 건너편 절벽에서 폭포가 자주 나타난다. 규모가 엄청나다. 얼마 가지 않아  마오이스트 검문소가 나타났다. 어제 저녁 작대기 하나 들고 어린 녀석 하나가 나타나 타시와 말을 주고 받을 때 이미 짐작했던 일이다.

사유재산제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타락과 도덕적 부정을 간파하고, 재산의 공동소유를 기초로 하여 더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공동사회를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의 이상은 19세기 후반 마르크스와 레닌이 주창하여 20세기에는 거의 전 세계를 풍미했다. 인류 역사상 현실적인 면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이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20세기가 끝나기도 전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권력욕과 사리사욕 등이 너무 강렬해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래서 고상한 이념은 또 다른 형태의 계급사회를 형성하여 피지배계급층에게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실패한 사상이지만 공산주의는 봉건주의와 제국주의로부터 세상의 인민을 깨우는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네팔에 공산주의가 아직도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네팔의 사회가 낙후되었다는 말과 같다. 흔히 30년 전 우리와 비교하지만 사회적 구조와 그 구조를 이루는 사상적인 면에서는 우리의 50년대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네팔의 마오이스트들을 비난할 생각이 없다. 만일 내가 네팔에서 태어났다면 나도 그 일원이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어쨌든 그들 내부의 일이고 부정부패가 만연한 현 지배층의 행태는 그들에게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해 주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편들고 싶지 않다. 나는 그저 히말라야가 좋아 찾아왔을 뿐이다. 히말라야는 왕족이든 정부군이든 마오이스트든, 외국인이든 상관없이 다 받아들인다. 사람과 제도는 잠시 머물다 가지만 수천 만 년 동안 히말라야는 그대로 있다.

마오이스트들이 통행세를 내라고 한다. 명분은 혁명기금이고 그 돈은 나중에 혁명이 완수되면 다 환불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지만, 혁명이 성공할지도 의문이고 설사 성공한다하더라도  그 돈을 다시 돌려준다고 생각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인당 14일간의 통과비로 1400루삐, 약 23불이다. 트레킹이 허가비로 240불을 네팔정부에 낸 것에 비하면 약소하다. 그나마 지금은 하루 100루삐니 다행이다. 예전에는 1인당 5000루삐를 걷을 때도 있었다.

그 정도는 시비할 것 없이 얼른 주는 것이 좋다. 여기는 그들의 해방구여서 그들이 바로 법이다. 강제징수는 하지 않고 친절하게 싫으면 돌아가라고 한다. 미소를 지으며 그들은 말한다.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여기서 네팔 정부의 무능함을 원망할 필요는 없다. 히말라야를 한 두 번만 들어와 보면 산간오지에서 정부군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 게 된다. 오직 한줄기 절벽에 난 길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온다한들, 다이너마이트 하나에 길이 끊어져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고 만다.

길은 계속 숲길을 오르내린다. 9시부터 한 시간은 계속 절벽길이다. 그리고 트레킹 초반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고산지대에 이르기 전까지는 항상 절벽길을 가야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도 마찬가지다. 마을은 항상 계곡을 끼고 있으니 그 마을을 지나가는 길 역시 항상 계곡 옆 절벽길로 나 있는 것이다.

작은 지류 계곡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남형씨가 그곳에서 물고기를 한 마리 잡았다. 마차콜라라는 이름이 그 계곡에서 물고기(마차)가 많이 잡혀서 생긴 이름인 줄은 짐작했지만 우리나라 계곡 웅덩이처럼 이곳도 작은 물고기가 사는 것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이런 지류 계곡은 무성한 나무에서 나오는 물이라 물고기가 있는 것 같다.

작은 바티(bhatti)가 길가에 가끔 나타난다. 바티란 '찻집'이란 뜻이다. 우리로 치면 주막 이다. 현지인 여행자들이 잠시 쉬며 차를 마시는 작은 오두막이다. '에클로바티'란 지명은 안나푸르나의 좀솜 위쪽에도 있지만 이곳 마나슬루에도 있다. 뜻은 '한 채의 찻집'이다. 이런 곳은 반드시 돌로 만든 초우따라가 있어 짐꾼들이 편하게 짐을 내려 놓을 수 있다.

포터들이 쉬고 있다. 그곳은 또 우리가 쉬어가는 곳이다. 이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교차된다. 어린 나이에 남의 짐을 들어주며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처지가 안쓰럽고, 적은 보수를 받는 이들 덕분으로 그리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히말라야를 방문할 수 있는 것이 고맙다. 레이놀즈의 말대로 우리는 이들을 단지 짐꾼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정을 가능하게 해 주는 '노동전문가'로 생각해야 한다.

샌들을 신고 운행하니 아무래도 불편하다. 그러나 아직은 견딜 만하다. 남형씨도 출발 때부터 샌들을 신고 있으니 위안이 되었다. 잠시 쉬면서 물병의 목을 축인다. 캠핑트레킹이 아니었다면 밀크티 한 잔 사 먹었을 것이다. 캠핑을 하면 밀크티를 자주 마시게 되니 굳이 사 먹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땀을 흘린 후에는 물이 제일 맛있다. 그러나 현지인들의 차를 팔아주지 못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9시 조금 넘어 두 번째 바티를 지나자 이미 사진에서 많이 보았던 절벽길이 나타났다. 멀리서 보기에도 엄청나고 실제로도 부리 같다키 강과 거의 수직으로 나 있는 멋진(?) 절벽길이다. 나무만 없다면 영화 <히말라야>에 나오는 폭순도 호수 절벽길과 같은 분위기일 것이다. 모두들 열심히 올라간다. 현지인 아줌마들도 짐을 지고 가고 있다. 아래에서 장을 보고 올라가는 모양이다.

오르막이 끝나고 잠시 강물과 평행선을 그리며 난 길이 다시 오르막으로 변한다. 그리고 다시 평행선 길이 나오고 곧 계단식 논이 펼져진 마을이 나타났다. 점심 먹을 라푸베시 마을이다. 시계를 보니 10시 20분이다. 오전 운행은 3시간 30분 내외인 이 정도 운행이 좋다. 가볍게 먹은 아침의 칼로리가 거의 다 소비되어 배가 고플 시간이다.

날은 점점 더 흐려지더니 빗방울까지 뿌린다. 현지인 여행자들도 말도 모두 점심을 먹기 위해 짐을 부려놓았다. 시장을 보고 가는 윗 마을 아줌마들과 처녀들도 처마 밑에서 쉬고 있다. 아이들도 동행하고 갓난쟁이까지 도꼬(대바구니)에 싣고 있다. 거친 히말라야는 사람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강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어디에서건 같다.

맛잇는 티베트 빵으로 점심을 먹고 12시에 출발했다. 길은 강에서 조금 떨어진 산길이다. 30분쯤 지나자 마나슬루 지역에서 제일 긴 다리가 나타났다. 100미터는 될 것 같다(당시는 이 기록이 나중에 필림에서 깨질 줄 몰랐다). 한 서양인 커플이 가벼운 차림으로 통과하고 있다. 이 다리는 왼편 절벽에서 떨어지는 큰 폭포가 만든 계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가 없다면 강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수고를 해야 했을 것이다. 다리를 건너면서부터 계곡이 넓어져 툭 터진 시원한 느낌을 준다.

어느새 오후 2시가 되었다. 별로 힘든 길은 아니지만 온 몸이 땀에 젖었다. 길가에 노점이 하나 나타났다. 굵은 오이와 과자를 팔고 있다. 오이를 두 개 사서 깎아 고추장에 찍어 먹으며 쉬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 때 그렇게 먹은 기억이 있다. 그 때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아무래도 그때만 못하다. '도로묵'이 된 것이다.

그곳에서 1시간 동안 산허리길을 더 가니 멀리 오늘의 목적지 마차콜라가 보였다. 3시 15분 마차콜라 도착. 제법 큰 마을이다. 룽다가 보이고 붉은 칸나도 보인다. 소박한 산골 마을의 정취가 풍기는 마을이다. 캠프사이트에는 주방팀이 도착하여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우리 짐을 진 포터들도 도착했다. 스태프들은 텐트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캠프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무진행 보살님이 시원한 개울물에서 머리를 감았다고 해서 바지를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개울로 갔다. 기회가 있을 때 목욕을 하고 싶었다. 고지대로 가면 목욕하기가 어렵다. 지류 개울 쪽은 터가 넓어 말들이 짐을 내려놓고 풀을 뜯고 있다. 말들도 오늘 여기서 야영하는 모양이다. 마부도 있고 동네 아이들도 여러 명 보인다.

그동안 젖은 옷을 모두 가지고 와 간단하게 빨고 약간 춥기는 하나 용감하게 개울물에 몸을 �었다.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잘못이었다. 개운하게 씻은 것은 좋았으나 다음날부터 감기가 걸려 이후 열흘 가까이 고생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저녁 식사 전 식당에서 차를 마시는데 대규모 서양팀이 도착했다. 오후 6시가 다 되었는데 지금 도착했으니 오늘 운행이 제법 길었을 것이다. 알고보니 이들은 첫날 우리와 함께 출발한 프랑스 팀이다. 그들은 아루갓바자르 못미처 야영을 하는 바람에 반나절을 까먹었다. 그것을 오늘까지 이틀 동안 보충하려니 늦어진 것이다. 그들은 개울쪽 공터에 캠프를 친다. 일찍 운행을 마치는 우리팀은 항상 동네에서 제일 좋은 곳에 캠프를 차릴 수 있었다.   

Manaslu_trek_map_03.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091.jpg

운행이 시작되자 건너편 절벽으로 폭포가 자주 나타났다.
 

 

Manaslu_0097.jpg

징검다리를 건너 또 바티가 하나 보인다.

 

 

Manaslu_0098.jpg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남형씨가 잡은 마차 한 마리. 잡는 기술이 놀랍기도 하지만 아마 물고기들이 낯가림을 잘  하지 않는 탓이라 생각된다.   

Manaslu_0101.jpg

바티에서는 웬만하면 쉰다. 길 중간에서는 쉬기가 마땅찮다. 제일 왼쪽의 아낙네는 시장보고 올라가는 중인 것을 등에 밴 땀으로 알겠다. 바티의  아낙네들은 여유만만한 표정이다.  

Manaslu_0102.jpg

땀을 흘린 포터들이 쉬기 편하도록 바티에는 항상 초우따라가 만들어져 있다.  

 

Manaslu_0106.jpg


곧  멋진 절벽길이 나타났다.

 

  

Manaslu_0110.jpg

길이 넓어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수직절벽이라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벽에 딱 붙어 가는 게 좋을 것이다.

 

Manaslu_0112.jpg


절벽길을 올라 와 뒤를 돌아본 풍경. 강물이 한참 아래에 있다.
 

 

Manaslu_0116.jpg

다시 또 절벽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Manaslu_0118.jpg

 

10시 경 절벽길이 끝났다. 어쨌든 이 구간은  스릴 있는 멋진 길이다.
 

 

 라푸베시 입구를 알리는 집 몇 채가 나타났다.
 

Manaslu_0124.jpg

 

라푸베시 마을 입구. 보명화 보살님도 오늘 반 바지를 입었다.
 

 

Manaslu_0126.jpg

라푸베시 롯지. 현지인들을 위한 것이라 외국인이 사용하기엔 너무 열악하다. 우리는 오른쪽 야외 식당에서 점심을 기다렸다.

 

Manaslu_0130.jpg

시장보고 올라가는 윗 마을 아낙네들. 아이들도 대동했다.

 

Manaslu_0132.jpg

동네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혜명화 보살. 빨간모자 쓴 사나이는 우리의 식탁, 의자 담당 포터 아저씨.
 

Manaslu_0136.jpg

라푸베시에서 한 시간 더 가자  긴 현수교나 나왔다. 멋진 출렁다리다. 한 서양인 커플이 건너고 있다.

 

Manaslu_0138.jpg

이 폭포가 위사진 왼편의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다리는 그 골짜기 위에 놓였다.

 

Manaslu_0137.jpg

무진행 보살님이 다리를 거의 다 건넌 후 왼편의 멋진 큰 폭포를 감상하고 있다. 흔들리는 다리 중간에서는 무서워 볼 엄두를 못냈을 것이다.

 

Manaslu_0141.jpg

다리를건너자 계곡이 넓어졌다. 산허리길로 조랑말들이 오고 있다. 말이 지나갈 때는 벽쪽에 바짝 붙어야 한다.
 

Manaslu_0143.jpg

길가 노점상 주인가족. 이곳에 쉬면서 오이 두 개를 사 고추장에 찍어 먹었는데 그런대로 맛이 괜찮았다.
 

Manaslu_0144.jpg

멀리 산허리길이 끝나는 지점 강변의 햇볕 아래 라푸베시가 보인다.  

 

Manaslu_0147.jpg

소박한 산골의 정취가 있는 라푸베시 마을 입구. 

 

Manaslu_0150.jpg

이미 도착한 주방팀은 차 준비로 바쁘고 호기심 많은 동네 아이들이 구경하러 왔다. 

 

Manaslu_0153.jpg

텐트가 쳐지길 기다리는 우리의 짐들. 

 

Manaslu_0154.jpg

마을 끝 지류 개울에서 시원하게 머리를 감은 두 사람. 이곳에서 화끈하게 목욕을 한 나는 그 후 감기로 고생 좀 했다.  

 

trek 2. 아루갓 바자르 - 아르켓 바자르 - 소티콜라

트레킹

출발지

캠핑사이트

고도

소요시간

trek 1

카트만두 - (전세 차량) -  아루갓 바자르

520m

10:20

trek 2

아루갓 바자르

소티 콜라

620m

5:45

trek 3

소티 콜라

마차 콜라

930m

8:10

trek 4

마차 콜라

도반

990m

5

trek 5

도반           

필림

1,550m

7:30

trek 6

필림           

1,895m

4:30

trek 7

뎅               

2,140m

6

trek 8

프록

리히

2,905m

5:45

trek 9

리히

사마가온

3,530m

7

trek 10

사마가온 (휴식일.  빙하호수 방문)

3,680m

5

trek 11

사마가온

삼도

3,850m

3

trek 12

삼도 (고소적응일.  티베트 국경 방문)

4,040m

7

trek 13

삼도

다람살라

4,450m

3:35

trek 14

다람살라 - 라르키아 라(5213m) - 빔탕

3,720m

11

trek 15

빔탕

띨제

2,335m

8:20

trek 16

띨제

자갓

1,314m

9

trek 17

자갓

나디

930m

7

trek 18

나디 - 불불레 - (전세 차량) - 카트만두

1,400m

11


트레킹 시작

 2007. 10. 14(일)

그런대로 잠을 잘 자고 일찍 눈을 떳다. 멋진 롯지도 아니고 포근한 텐트도 아니어서 기분이 좀 찝찝하지만 그래도 계획대로 아루갓 바자르까지 왔으니 다행이다. 처음부터 일정이 어긋나면 전체 일정을 다시 조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날씨를 보니 흐리다. 저지대의 따뜻한 바람이 분다. 마을은 생각보다 작다. 다운타운은 어제 밤에 올라왔던 아래쪽에 있는 모양이다. 여기는 마을이 거의 끝나는 지점이어서 상점도 별로 없다. 아침에 보명화 보살님의 가방이 도착했다. 어제는 두 개의 가방 중 하나만 도착했다. 다른 사람은 하나씩인데 두 개를 가져온 것은 밑반찬과 간식거리 그리고 네팔 아이들에게 줄 선물로 양말 100컬레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이번에 올 때 각자 지참품으로 라면 10개, 누룽지 5봉지, 고추장 500g씩 꼭 가지고 오라고 했다. 한 사람이 다 가져오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그 외 필요한 간식은 취행대로 가지고 오면 된다. 라면과 누릉지는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잘 먹었다. 고추장은 3kg 중 반만 먹고 반인 1.5kg은 남았다. 밑반찬으로는 깻잎, 장아찌, 묵은지 등 몇 가지를 가지고 온 분들이 있어 덩달아 호사를 누렸다.

가장 중요한 김치는 카트만두에서 미리 주문해 가지고 갔다. 이젠 한국에서 가지고 갈 필요가 없다. 지금까지는 조금씩 가지고 갔는데 운반에 애를 먹곤 했다. 무겁기도 하고 포장도 어려웠다. 그러다가 문득 원정대들은 현지에서 미리 담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삼툭에게 연락하니 담을 수는 없어도 살 수는 있다고 한다.

주 1회 운항으로 한국 단체관광객들이 많아진 카트만두에는 한국식당이 더 늘었다. 그런 식당 중 삼툭이 잘 아는 <서울아리랑>에서 김치 10kg을 주문해 두었다고 한다. 가격은 1kg에 350루삐(약 5500원)로 네팔 물가로는 상당히 비싼 편이지만 한국에서 여러 사람이 각자 가지고 가는 번거로움이 없어 좋다. 김치를 안 먹는다면 더 좋겠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18일 동안의 여행에 김치가 없으면 입맛이 떨어져 체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8시 45분 출발. 이제 진짜 두 발로 걷는 마나슬루 트레킹이 시작된 것이다. 저지대라 더울 것 같아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었다. 출발이 늦은 이유는 어제 전세버스에 놓고 온 텐트, 식량, 등의 장비를 아침에 가지고 온 까닭이다. 주방도구도 없어 아침도 롯지에서 시켜 먹었다. 어제 그곳에서 오는데 거의 1시간 걸렸으니 포터들과 주방팀은 아침부터 바빳을 것이다.

한가한 산골 마을 풍경이다. 마을을 벗어나니 넓은 부리 간다키 강이 보이고 멀리 설산 꼭대기가 조금 보인다. 부리 간타키 계곡 오른쪽에 있으니 아마 가네시 히말(Ganeshi Himal)의 한 봉우리일 것이다. 가네시 히말은 4개의 7천미터급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군으로 그 오른쪽에는 랑탕 히말이 있고 두 산군 사이에는 티베트에서 발원한 트리술리 강이 흐르고 있다. 랑탕 트레킹은 보통 트리술리 강의 상류에 있는 샤브루베시에서 시작한다.

샨티 바자르(Shanti Bazar)에 9시 30분 도착하여 잠시 쉬었다. 큰 반얀나무 주변에 초우따라와 작은 가게가 몇 개 있다. 이미 그곳에는  우리 포터들이 쉬고 있다. 카트만두에서 같이 온 포터들의 나이는 19세에서 25세 사이다. 짐이 많아 어제 아루갓 바자르에서도 포터 서너 명 더 구했다는데 어린 친구도 있고 40세가 넘는 노장도 있다.

포터들은 아침에 짐을 꾸려 그날 캠핑사이트까지 나르는 일을 한다. 식량을 가지고 와서 중간에 자기들끼리 밥을 지어 먹는다. 포터에게 맡기는 짐은 하루의 운행이 끝나야만 만날 수 있으므로 필요한 장비는 개인용 배낭에 미리 챙겨두어야 한다. 물통과 휴대용 방석은 꺼내기 쉽게 배낭 좌우 주머니에 넣는다. 간단한 세면도구, 휴지, 물티슈, 비옷, 보온용자켓, 헤드랜턴, 간식, 입술크림, 손톱깎기, 작은 칼, 화장품(여자) 등은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배낭을 보호하기 위한 배낭커버도 필요하다. 자외선 차단제의 경우 나는 아침에 한 번 바르는 것으로 만족했기 때문에 카고백에 넣었다.

샨티바자르를 지나 이제 여물고 있는 녹색의 벼논 사이를 걸었다. 주변 집에는 '바나나 나무'가 많이 보인다. 그리고 곧 강바닥으로 내려섰다. 한가로운 전원 풍경을 즐기며 강을 따라 걷다가 맑은 지류 개울을 하나 건넜다. 다리가 없어 신발을 벗어야했다. 물이 맑아 한국의 산골 계곡을 건너는 기분이다.

곧 점심 먹을 마을인 아르켓 바자르(Arkhet Bazar)에 도착했다. 10시 45분이니 아루갓 바자르에서 2시간 걸렸다. 날이 무척 더워 땀을 많이 흘렸다. 한 식당에 안내되어 점심을 기다렸다. 주방팀은 이미 식당 뒷마당에서 음식준비를 하고 있다. 먼저 비스킷과 뜨거운 레몬티를 빠상이 가지고 왔다. 빠상은 수석 주방보조원이다. 수석 주방보조요원이 맡은 일은 아침마다 모닝티와 세숫물을 텐트 앞으로 갖다주고 식사 전 차와 과자를 내오며 식사 시간에는 테이블을 세팅한다.

바자르란 시장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뒤에 바자르가 붙은 마을은 모두 시장의 기능이 있는 마을이다. 아르켓 바자르는 이 지역에서 제일 위쪽에 있는 시장이다. 그 위로는 시장 기능이 있는 마을은 없다. 시장은커녕 마을다운 마을은 한참 올라가야 하는 남룽, 사마가온, 삼도 정도밖에 없다. 위쪽 마을 사람들은 3-4일 씩 걸어 내려와 이곳이나 아루갓 바자르에서 장을 보고 다시 그만큼 걸어 올라가곤 한다.

시장 마을답게 생필품을 갖춘 가게들이 많이 있다. 원정대와 트레커들을 겨냥한 로프도 보인다. 백산 스님은 이곳에서 반 바지를 하나 샀다. . 더사인 축제 대목장을 보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모여 바글거리는데 한쪽에서는 주사위 노름을 하고 있다. 그런 곳은 특별한 구경거리가 없는 산골 아이들에게 신나는 구경거리다.

주방팀이 만들어 온 첫 점심이 나왔다. 이미 작년 무스탕에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음식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 캠핑트레킹은 서구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일정이나 음식 등이 정립되어 있다. 그래서 네팔에서의 캠핑트레킹은 어떤 여행사를 택하더라도 대동소이하다.

저널리스트이자 트레킹 전문가인 레이놀즈(Kev Reynolds)의 책에는 그 일정이 소개되어 있다. 그는 마나슬루가 개방된 1992년 처음 마나슬루를 방문했고 1996년 마나슬루 트레킹 가이드북을 쓰기 위해 다시 방문한 후 라는 안내서를 썼다. 마나슬루 트레킹 구간별 설명이 되어 있는 가이드북은 현재 그의 책이 유일하다.

그가 쓴 책으로 마나슬루 외에도 그는 캉첸중가, 안나푸르나, 에베레스트, 랑탕 헬라부 & 고사인꾼드 트레킹에 관한 'A Trekker's Guide' 시리즈가 있고, 등 유럽의 여러 산을 트레킹 하는 안내서도 썼다. 그의 책에 나와 있는 캠핑트레킹의 일과는 다음과 같고 우리 역시 대체로 그 일과를 따를 것이다.

6:00 트레커의 텐트로 한 잔의 차가 배달되면서 하루가 시작된다.
6:15 텐트 입구로 따뜻한 물이 담긴 세숫대가 도착한다.
7:00 아침식사. 구릉지역에서는 보통 식당텐트가 이미 철수되기 때문에 야외 에서 먹고 추운 고산지대에서는 식당텐트에서 바쁘게 먹을 것이다. 아침식사는 보통 뽀리지 또는 시리얼, 계란과 짜파티, 홍차, 커피 또는 핫초코릿 티로 구성된다.

7:30 트레킹 출발. 이 시간은 하루 중 가장 멋진 때이다. 공기는 시원하고 빛은 순수하고 새들은 지저귄다. 사진 찍기 아주 좋다. 오전 중 당신은 짐을 내려놓고 길가에서 쉬거나 차를 마시는 포터들을 추월한다. 주방팀은 당신을 추월한다. 만일 그들이 당신을 추월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너무 빨리 걸은 것이다. 당신은 점심을 굶을지 모른다!

11:00 점심을 먹기 위해 멈춘다. 스태프들은 보통 물이 가까이 있고 경치가 좋은 곳을 선택한다. 당신이 그곳에 도착하면 뜨거운 과일음료가 담긴 찻잔을 받는다. 쉬는 동안 책을 읽거나 여행기록을 쓰고 경치를 감상한다. 점심은 종종 두 코스의 음식으로 이루어진다. 예를들면, 참치, 감자볶음, 양배추샐러드와 짜파티, 그리고 디저트로 통조림 과일과 각종 차가 따른다.

13:00 다시 트레킹을 한다. 다시 길가에 쉬고 있는 포터들을 추월하고 주방팀과 셰르파들에게 추월당한다. 만일 그러지 않다면 당신은 길을 잘못 들었거나 너무 빨리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캠프를 지나친다! 그렇지만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좋은 서다는 셰르파 한 사람을 당신 앞에 보내 갈림길에서 기다린다.

16:00 캠프에 도착. 몸을 씻고 빨래하고 차와 비스킷을 먹으며 쉰다. 포터들이 마침내 당신의 가방과 침낭과 텐트를 지고 나타난다. 밤에 텐트 안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헤드랜턴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두라.

18:00 저녁식사를 하며 내일의 일정을 설명하고 의논한다. 저녁은 고정된 세 코스의 음식으로 수프, 닭, 밥과 야채, 과일, 홍차, 커피 또는 핫초콜릿 차가 나온다.

20:00 이를 닦고 잠 자러 간다.

12시 45분, 점심을 먹고 다시 기운을 얻어 출발했다. 강 하류에 위치한 마을이라 계단식 논이 많이 보인다. 아직은 계곡의 경사가 완만하다. 부리 간다키 강도 깔리 간카키 강 못지 않게 검다. 이 강은 얼마 후 트리술리 강과 만나 서쪽 무글링으로 흐르다가 방향을 남쪽으로 바꾸어 치트완 지역을 거쳐 갠지스 강과 합류한다.

길이 넓다. 현지인들과 함께 짐을 실어 나르는 조랑말 무리도 지나간다. 말이 지나갈 때는 쉬는 때이기도 하다. 이미 길은 산기슭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말들이 지나갈 때는 벽쪽으로 붙어야 한다. 강쪽에 있으면  자칫 말에 실은 짐에 밀려 아래로 추락할 수도 있다.

슬슬 협곡이 높아지고 있다. 바로 앞 산꼭대기에서 폭포가 내려와 작은 지류를 만들고 있다. 마나슬루 지역은 '폭포의 나라'로 불릴 정도로 폭포가 많다. 마지막 폭포는 트레킹 6일째 날, 필림에서 뎅 가는 길에서 본 것인데 마지막을 장식하는 폭포답게 엄청나게 길었다.

오후 2시 30분, 오늘의 목적지 소티콜라(Soti khola)에 도착했다. 첫날이라 워밍업을 하는 의미로 오늘 일정은 비교적 짧게 잡았다. 긴 여정이니 처음부터 무리할 것은 없다. 콜라는 네팔어로 '계곡'이란 뜻이니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은 계곡 옆에 위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도반, 데우랄리, 자갓 등 네팔의 마을 이름은 이렇게 지형이나 기능의 이름을 딴 것이 많다. 그래서 같은 이름이 여러 군데 있다.

롯지 뒤 캠프장이 있는 곳에는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이 근처 마을 아이들은 다 모인 것 같다. 여기가 이 지역 축구 전용구장일 것이다. 2000년 마나슬루를 방문한 칼스텐 네밸은 이곳에서 아이들과 축구를 했다고 쓰고 있다.

캠프 동쪽은 부리 간다키 강이고 서쪽은 거대한 절벽이다. 캠프장은 그 절벽 아래에 있다. 그런데 절벽 뒤에서 거센 물소리가 들려왔다. 혹 절벽 뒤쪽에 폭포가 있는가 해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지만 모두 막혀 있다. 결국 그 소리는 부리 간다키 강을 거세게 흐르고 있는 물소리가 절벽에 부딪쳐 반사된 메아리로 판명되었다.

곧 텐트가 도착했다. 캠프를 차릴 동안 우리는 빠상이 내 온 비스킷과 뜨거운 차를 마셨다. 이번에는 뜨거운 밀크에 코코아와 설탕을 듬뿍 타서 많이 마셨다(이것을 영어로는 '핫초코릿'이라 한다). 에너지 축적의 압박 때문이기도 하지만 맛도 아주 좋다. 평소 코코아차를 거의 먹지 않는 나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뜨거운 밀크에 홍차 티백을 넣어 먹어도 맛있는 찌아가 된다.

텐트가 다 설치되자 가져온 꼬리표를 달았다. 텐트가 여섯 동이어서 표시를 하지 않으면 매일 바뀌게 된다. 노란 리본에 1부터 6까지 쓰고 그 아래 각자의 이니셜인 DW, JJ, NH, ME, AA, BS를 써서 가지고 왔다. 그것을 세 개씩 만들어 텐트와 카고백 그리고 침낭집에 달아놓으니 항상 같은 텐트를 쓸 수 있었다. 또한 카고백과 침낭을 배달하는데도 매일 누구네 집으로 가야할 짐인지 몰라 우왕좌왕 하는 일이 생기지 않았다.

이번 트레킹을 위해 <에코 무스탕>에서 텐트 세 동을 새로 구입했다. 새 텐트는 여성동포들에게 양보하고 남자들은 예전 무스탕에서 쓰던 텐트를 사용했는데 약간 허름한 것 외엔 지내기에 문제가 전혀 없었다. 침낭도 새로 두꺼운 것으로 구입하여 모두에게 지급되었다. 그래서 4660m의 추운 다람살라에서도 따뜻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침낭을 가져온 사람도 있어 남는 침낭 중 하나를 베개 대용으로 사용하니 머리가 편했다.

저녁 먹으러 식당텐트에 모였을 때 복습과 예습으로 오늘 보낸 일정과 내일 일정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브리핑이란 미리 가지고 간 프린트물을 읽는 일이다. 당일과 다음날의 칼스텐, 밥, 톰 & 루이사 부부의 기록을 읽으며 오늘 우리가 왔던 코스를 되돌아보고 내일의 운행에 대한 힌트를 얻는다. 칼스텐의 글은 마나슬루 지역의 문화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되고 톰 & 루이사 부부의 글은 실용적이다(이 친구들은 특히 음식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저녁은 식당텐트에서 토마토 수프와 양배투 샐러드에 김치를 곁들인 볶음밥과 수제비로 잘 먹었다. 타시는 밤에 잘 때 물건을 잘 보관하라는 주의를 준다. 다른 여행기에서 장비의 분실에 관한 글을 본 터라 등산화와 스틱을 모두 텐트 안에다 넣으라고 말했다. 무스탕에서는 텐트 플라이 안쪽에 두었다.

도둑질은 나쁜 일이고 순박한 산골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은 저지대로 비교적 사람들이 많이 살며 왕래가 잦은 곳이다. 아이들도 많다. 도둑질을 부추킨 것은 결국 외국인 관광객들이다. 이곳과는 전혀 다른 화려한 의상과 장비를 가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으니 부러움과 욕심이 함께 생겨나는 것은 인지상정의 일. 견물생심이라는 말도 그래서 생겼을 것이다. 우리가 조심하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일이다.

스태프들에게 보명화 보살님이 가지고 와 내게 맡긴 양말을 한 컬레씩 나누어 주었다. 오지의 아이들에게 주려고 한 것이지만 나누어 주는 일도 보통일이 아니다.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고 인원수도 문제가 된다. 여유분이 있으니 우리를 위해 수고하는 스태프들에게 먼저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생겼다. 무심코 벗어 둔 등산화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둘 다 밑창 중간이 부식된 것처럼 헤어져 있다. 하루 걸은 상태가 이렇다면 얼마 가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랬다면 당연히 다른 등산화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이것은 심각한 일이다. 이제 막 시작하는 참인데 등산화가 고장났으니 어찌할 것인가. 궁여지책으로 우선 등산화는 정말 필요할 때를 대비해 '모셔두고' 가지고 온 샌들을 신기로 했다. 포터들은 슬리퍼를 신고 짐을 나르니 샌들은 그에 비하면 양반이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그러나 걱정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나슬루 트레킹은 초반부터 그렇게 걱정으로 시작되었다.  

Manaslu_trek_map_02.jpg

manaslu_map_T.jpg

google_earth_manaslu_treck_unterer_teil_03.jpg

 

Manaslu_0049.jpg

아루갓 바자르에서 트레킹을 시작하다. 날씨는 처음엔 흐렸으나 출발할 때는 청명해졌다.
 

Manaslu_0055.jpg

부리 간다키 강 저 넘어로 보이는 가네시 히말. 갈 길이 까마득하다.
 

Manaslu_0058.jpg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벼논 사이로 상쾌하게 걷다. 저지대 더운 지방이라 '바나나 나무'가 많이 있다.  

Manaslu_0060.jpg

강 바닥으로 내려가다. 예전 어릴 때 놀던 여름철 강변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물살은 항상 급하다.  

Manaslu_0062.jpg

맑은 계류를 발 벗고 건넌 후 다시 신발을 신다.
 

Manaslu_0065.jpg

아르켓 바자르에서 점심 먹기 위해 운행을 멈추었다. 시장답게 물건이 많이 쌓여 있다.
 

Manaslu_0067.jpg

우리가 점심 먹을 장소로 빌린 식당 주인의 아들내미.
 

Manaslu_0068.jpg

시장통에서 주사위 노름을 하는 아이들.

 

Manaslu_0071.jpg

계단식 논과 부리 간다키 강. 강변 주위가 완만한 경사라 경작지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

Manaslu_0074.jpg

길은 항상 계곡 옆으로 나 있게 마련이다.

 

Manaslu_0077.jpg

처음 만난 길고 긴 폭포.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Manaslu_0081.jpg

곧 오늘의 목적지인 소티콜라가 나타났다. 마을이라 하지만 집은 두 채밖에 없다.
 

Manaslu_0084.jpg

캠프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 대부분 맨발 이다.
 

Manaslu_0088.jpg

캠프를 설치하는 스태프들

 

Manaslu_0089.jpg

캠프가 설치되는 동안 우리는 차와 간식을 먹었다. 트레킹 내내 에너지 확보 차원에서 핫초코릿을 많이 마셨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