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찰랑파티-둔체 “ 랑탕히말의 풍경 소리에 잠이 깨다”

 

오늘 새벽 어디선가 들려오는 은은한 풍경 소리에 잠이 깬 나는 뜻 모를 생각에 잠기게 되었다. 밖에는 가는 눈 바람이 부는데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이 모두 남의 덕이었음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식사 한 끼 돌아다닐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며 내 몸 전체가 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이 내게 부여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오만방자하고 얼마나 무지몽매한 인간이었던가?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나만 알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이었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가? 바람에 흔들리는 새벽 풍경 소리는 들리는 듯 끊기고 끊기는 듯 다시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그 소리는 ‘야! 이놈아 잠만 자빠져 자지 말고 너의 내면을 살펴라’라는 소리로 들렸다. 무어라 말 할 수 없는 벅찬 가슴에 두 눈엔 이유 없이 눈물이 흘러 내렸다. 50여년 가까운 세월이 일순 스쳐 갔다. 아주 빠르게. 나는 침낭을 빠져나와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여명의 히말라야는 아무 말 없이 그냥 그렇게 있었다. 어슴프레함 속에서 그냥 그렇게.... 밖으로 나오다 보니 유리창만으로 한기를 가린 다이닝 룸에서 침낭을 뒤집어쓰고 포터들이 추위에 그냥 잠들어 있었다. 나는 따뜻한 오리털 파카를 입고 있었다. 그들이 안쓰럽게 보였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구석 주방에서는 키친 보이들이 모포를 뒤집어  쓰고 자고 있었고, 두 명은 석유곤로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아침 차를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다. ‘Good morning’하고 인사를 했다. 그들은 나를 따스하고 반갑게 포옹했다. ‘순수’라는 말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피우고 햇살이 나오기 직전의 히말라야와 바람에 휘날리는 솟대의 만장을 바라보았다. 장창락 기자가 나왔다. 사진을 찍으러 나온 모양이다. 역시 기자로서의 프로 정신이구나. 괜스레 눈물이 다시 나왔다. ‘이 선생님 왜 그래요?’ 별로 할 말이 없었고, 장기자는 그런 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롯지로 돌아온 나는 어제 우리가 너무 시끄럽게 한 것 같아 죄송하기도 하고 정성스레 우리를 돌보아 준 롯지 주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고별사를 써서 같이 낭독해 보았다. 언제나 우리 옆에는 유능한 통역사 핀조가 있다. 부끄럽지만 고별사를 게재해 본다.

 

“고별사”

먼저 선배님들과 김하돈 시인님이 계시는데 글이라고 써서 발표하게 됨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 가지 느낌이 있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고향에 마음씨 착한 아내와 사려 깊고 총명한 두 아들이 있고, 아침에 일어나면 열심히 일할 직장이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뜻 모를 눈물이 사정없이 흘러나왔습니다. 먼저 2박을 하는 동안 우리를 따뜻하게 보호해 준 집주인과 어느 영화에서 본 듯한 빠삐용 같은 두꺼운 안경에 무뚝뚝해 보이나 사려 깊은 안주인, 영롱한 맑은 눈에 티 없이 예쁜 딸, 난로를 덥히며 말없이 우리를 추위로부터 감싸준 집주인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조용하고 자연 그대로인 이곳에 이방인이 와서 버릇없이 소란스럽게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고 자신의 일에 충실한 한 사회인일 뿐입니다. 우리는 교사, 신문기자, 시인, 화가, 농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집주인님이 보시기에 비싼 술을 마구 마시고 돈을 마구 쓰는 것 같지만, 우리는 각자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이 여행을 위해 나름대로 돈을 아끼고 몇 년 동안 모아서 이 귀중한 여행을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자연과 세상에 대한 사고방식이 당신들과 다르지만 가슴이 따뜻하고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찌되었건 당신들의 문화와 생각을 무시하고 우리들의 생각대로 행동하고 즐긴 것 같아 죄송합니다. 오늘 새벽 나는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풍경 소리에 잠이 깼고 그 소리가 “이놈아! 삶을 정직하게, 감사하며 똑바로 살아라” 라는 소리로 들렸고 뜻 모를 눈물이 마구 솟구쳤습니다. 사람은 오만하고 방자하지만 자연은 그냥 보고만 있었습니다. 자연이 사람을 야단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남ㆍ남아시아의 쓰나미로 그것을 정확히 보았습니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습니다. 지금 떠나지만 정직하고, 따뜻하고 사려 깊은 여러분의 깊은 정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 다음에 언제 당신들을 다시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히말라야의 신이 언제나 당신들을 축복해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도 남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의 삶에 충실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돈네밧.


아침 준비와 짐 꾸리는 소리로 사방이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눈 덮인 히말라야를 햇살이 어느새 감싸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둔체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둔체로 내려오는 길은 경사가 매우 급했다. 눈길을 조심조심 내려오면서 고산 지대에서 기온이 고도마다 다름을 눈으로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가끔 만나는 이곳 사람들은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그들은 야크가 풀을 잘 뜯는 것으로 만족하며 욕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다. 채워도 채워도 더 채울려고 하는 한없는 욕심을 가진 여느 나라 사람들 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다. 오후에는 둔체 장거리를 구경했다. 우리가 그네들을 신기하게 보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가 신기한 모양이다. 재기 차는 녀석들, 구슬치기하는 녀석들 아이들은 어디서나 늘 즐겁구나. 이 곳은 경비가 삼엄하다. 반군이 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인에게는 관대하다. 그들의 커다란 수입원이 되는 까닭이다. 둔체 주변의 음식점에서 만두도 사 먹어 보았다. 우리네 만두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작은 술집에서 네팔 위스키도 마셔본다. 집 주인은 33살이라고 하는데 아이가 6명이나 된다. 그러나 두 내외는 마냥 즐거운 표정이다. 나와 박종익 선생은 네팔 촌 동네에서 머리를 직접 깎는 체험을 했다. 우리 돈으로 500원 쯤 받는다. 아주 어릴적 꾀죄죄한 동네 이발소에서 이발을 했던 그 기분이다.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그런지 이발사는 자기 밑에서 이발을 배우는 초보자 앞에서 자랑스럽게, 그리고 아주 정성스레 머리를 다듬어 준다. 머리를 감겨 주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매우 좋았다.

 

 

 

*1/17 툴루샤브르-신콤파-찰랑파티   

 

  트레킹의 피크를 향하여 우리는 또 걷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고산지대에서 비를 맞으면 체온 저하가 우려된다. 각자 준비한 우산과 우비를 쓰고 출발한다. 나는 비닐을 이용하여 즉석 우비를 만들어 입었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기 시작한다. 숨이 차다. 200-300m정도 올라가자 비는 진눈개비에서 눈으로 변했다. 사실 겨울은 여기에서 건기에 해당된다. 비교적 비나 눈을 만나기 어려운 기후 환경인데, 드물게 많은 눈이 내린다. 히말라야에서 눈을 맞으며 걸으니 색다르고 눈구름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경치도 장관이다. 수 백 년은 묵은 듯한 고목들도 장관이다. 포터들에게 물으니 덤(dum tree)나무라고 했다. 침엽수도 아닌 것이 활엽수도 아닌 것이 아열대의 고산 나무 같이 보였다. 오늘 점심은 찐 감자로 해결했다. 이곳의 감자는 알이 작다. 그러나 감자는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식량자원이다. 굵은 설탕이나 으깬 고추에 찍어 먹으면 맛도 좋은 아주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된다. 3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이곳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추우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도 상 아열대 기후대에 속하여 대륙성 기후의 추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의 혹독한 겨울 날씨와는 전혀 다르다. 단지 고도가 높아지면서 추워지지만 해가 나오는 낮은 그리 춥지 않다. 밤낮의 일교차가 아주 큰 편이다. 엄청난 원시림을 보면 알 수 있다. 전나무와 덤 나무가 혼합된 이곳은 어마어마한 원시림 지대이다. 교통이 아주 불편하여 이 거대한 목재를 운반할 길이 없다. 또한 주변에 연료도 비교적 풍부하고 사는 사람의 숫자도 적고, 이곳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공경심이 원시림의 존재를 가능하게 한 것 같다. 14시경에 찰랑파티에 도착한 우리는 눈도 내리고 내일의 코샤인쿤드의 절정을 위하여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네팔 당구도 즐기면서. 아주 재미있는 게임이다. 저녁에는 최광옥 선생님의 생일 파티가 있었다. 우리의 요리사 덴지가 만든 즉석 케익과 촛불, 그리고 퉁바의 원초적 술 맛이 운치를 더한다. 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렸다. 깊은 히말라야 고산에서 더없이 경건하고 아름다운 밤이 깊어간다.


1/18 찰랑파티 “코샤인쿤드를 허락하지 않은 히말라야의 신”

 

히말라야의 대 파노라마를 보면서 트레킹의 마지막을 장식하려던 우리의 계획을 히말라야의 신은 허락하지 않았다. 술도 마음껏 마시고 희희낙락한 내가 죄인 이었나보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새벽에 잠을 깨어보니 밤새 눈이 많이 쌓였다. 계속 내리는 눈 때문에 우리는 두 그룹으로 나누어 1그룹은 아침 일찍 출발하여 라우레비나와역을 지나 이번 트레킹의 최대 하이라이트이고 힌두교의 발상지인 코샤인쿤드까지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오고(코샤인쿤드가 4400m의 고지라서 그곳에서 숙박하는 것은 무리라고 김영식 대장은 말함) 2그룹은 주변 경치가 가장 좋은 라우레비나와역까지만 가서 히말라야 파노라마를 감상하기로 했다. 평소와는 달리 아침 6시 30분 여명에 일찍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 시점부터 눈은 폭설로 변해가고 있었다. 1진은 박연수 부대장과 트레킹 가이드 파샹이 지휘하고, 2진은 김영식 대장이 지휘하기로 했다. 눈보라를 무릅쓰고 출발했다. 약간 어두운 상태였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눈이 너무 많이 내린다. 내 생애에 이렇게 눈보라가 심한 것은 처음이다. 1시간 반 쯤 갔을 때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했다. 어찌 히말라야의 폭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연수 부대장, 파샹, 최창원, 최광옥, 임성주, 김하돈, 그리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 전원은 롯지로 되돌아가고 7명은 아루레비아역까지 간 다음에 상황을 보아 판단하기로 했다. 눈보라는 점점 더 거세어졌다. 이미 발목을 훨씬 넘고 있었다. 등산화도 약간 젖고 있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2시간 정도를 더 간 다음에야 우리는 라우레비아역에 도착하였다. 16세의 소녀와 그 동생이 롯지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따끈한 차를 건넸다. 해맑은 웃음이었다. 부모님은 둔체에 계신다고 했다. 4000m의 고지에서 폭설을 피해 만난 롯지의 난로불은 우리를 감동시켰다. 어찌 인간이 대자연에 감히 도전한다고 말하겠는가? 눈보라를 막는 작은 롯지와 장작불, 그리고 어린 소녀의 정성에 우리는 한파를 녹일 수 있었고, 이내 그들의 작고 순수한 마음에 추위에 얼었던 내 마음도 모두 녹아내리고 있었다. 1시간 정도 몸을 녹인 우리는 철수를 결정했다. 더 기다린다는 것이 무모할 수 있다. 이미 눈보라에 길은 없어졌다. 가이드 파샹이 길을 내고 우리는 뒤를 따르며 13시가 조금 넘어서 롯지로 되돌아 왔다. 기다리던 김 대장은 너무 걱정을 한 것 같다. 히말라야 베테랑인 김 대장은 이 눈발 속에서 강행을 선택한 우리를 나무라고 있었다. 무사히 돌아온 자체가 좋았던 모양이나 내심 불편한 심기를 들어냈다. 김 대장의 말로는 상황이 순식간에 돌변하는 히말라야에서 눈이 오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점심으로 먹은 김치 볶음밥이 정말로 꿀맛이었다. 오후에도 눈이 그치지 않아 일부는 잠을 자고 일부는 네팔 당구를 하면서 즐거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안희상 선배님과 럭시를 한 잔 하고 주변의 치즈 공장을 보러 갔다. 직원이 여러 명 있었다. 예의 그 순수한 얼굴로 우리를 기꺼이 반겨주었다. 이곳은 야크 젖으로만 옛날 방식대로 만든다고 했다. 치즈를 약간 사서 먹어보았다. 냄새가 약간 고약하나 고소한 맛이었다. 그들 역시 눈이 오는 오늘은 장작불 난로 가에서 쉬는 수밖에 없다. 그들과의 만남은 참으로 순박한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고 장작불은 너무도 따스했다. 치즈 공장 사장은 아주 정확한 사람이었다. 속이지도 더 주지도 않고 저울이 말하는 대로 친절하면서도 결코 과장하지도 않는 있는 그대로만 적용하는 산속의 멋쟁이였다.

  오후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이 글을 정리하고 있다. 지금 눈은 그쳤지만 여기 랑탕히말의 롯지 주변은 온통 눈 세상이다. 이제 어둠이 다가오고 있다. 히말라야의 신이 멋진 파노라마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내게 인생에서 가장 멋진 눈 세상을 보여주었다. 자연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건방져 있을 뿐이다. 이제 내일은 둔체로 철수하고 모래는 카투만두로 가야 한다. 어렵지만 아쉽다. 내일 철수 길도 만만치 않을 것만 같다. 박원래씨가 저녁을 먹으라고 한다. 저녁을 먹고, 퉁바도 마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내일 날씨가 좋기만 기다릴 뿐이다. 어찌 하늘의 일을 사람이 시시비비 할 것인가. 그런데 2층에서 이광승씨가 몹시 아프다고 손가락 사혈을 하라고 연락이 왔다. 고소 증세가 아주 심한 것 같았다. 달리 방업도 없고 손가락을 땄다. 손에 열이 아주 심하게 났다. 손가락을 땄는데 가는 핏줄기가 솟구쳤다. 이날 밤이 이광승씨에게는 사상 최대의 고통스러운 밤이었던 것 같다. 밤새 토하고 토했지만 무엇이 나오겠는가? 옆의 주덕 동창들이 간호하느라 고생이 많았다. 자고 나니 그 다음날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다행이었다. 아마도 광승씨는 히말라야의 고통스러운 그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16 라마호텔-랜드슬라이드-툴로샤브르 “한국인은 잠이 없는 민족(?)”

 

기분 좋게 아침 체조를 하고 힘차게 출발했다. 흐린 듯 살짝 끼어 있는 안개가 묘한 흥취를 자아낸다. 깊은 계곡이 아열대림과 어울려 또 장관을 이루고 있다. 아마 엄청난 산사태가 있는 지역이라서 지명도 랜드슬라이드(landslide)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지리 용어에서도 산사태나 경사진 지역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토양 이동 현상을 랜드슬라이드라고 한다. 우리는 오는 도중에 엄청난 산사태 지역을 통과하게 된다. 산사태는 계곡을 막아서 일시적으로 호수를 만든다.(지형학에서 산사태나 화산 폭발 등으로 만들어진 호수를 언지호라고 한다) 그리고 이 호수는 어느 정도 물이차면 당연히 자연의 법칙대로 둑을 넘게 되고 최고 정점에 도달하면 호수가 붕괴되고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면서 계곡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고, 호수 하류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자연의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는 지역이다. 랜드슬라이드에서는 삶은 감자와 수제비로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다. 일본인 트레커를 만났다. 김치를 한 쪽 주자 아주 맛이 좋다고 좋아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점심 식사를 막 하려는 순간 우리의 김대장이 오주희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누가 가장 나중에 보았느냐는 등 확인을 했으나 보이지 않았다. 오는 도중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길을 잘 못 든 것 같다. 파샹이 감자 삶은 것을 몇 개 배낭에 넣고 찾으러 오던 길을 되돌아 나섰다. 우리의 예상대로 오 선생님은 두 갈래 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한참을 가다가 일행이 보이지 않자 되돌아오다가 파샹을 만나 우리와 합류했다. 잠시였지만 오 선생님은 별 생각이 다 들더라는 것이었다. 아무튼 오지에서 왜 일행에서 떨어지면 안 되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아마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가 될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게 점심 후 약 1시간은 엄청난 급경사를 걸어서 올라갔고 계단식 경작지를 통과하며 고생 끝에 툴로샤브르에 도착하였다. 롯지도 꽤 많고 사람들도 많이 사는 비교적 큰 곳이었다. 모처럼 여유 있는 오후를 보냈다. 오후 3시경에 도착하여 옥상에서 옥수수 티밥과 짜야(홍차에 야크 젖을 넣고 끓인 차)를 먹으며 설산을 감상하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상점에는 이 집 주인아주머니가 손수 만들었다는 많은 수제품의 뜨개질 제품이 있다. 아내와 아들을 위해서 선물을 준비했다. 모처럼 아내와 아들이 생각났다. 돌아갈 고향이 있음은 또 감사해야하는 대목이다. 참 잔 손이 많이 간 제품이었다. 저녁에는 장창락 기자가 금연 약속을 어긴 탓에 특별 안주를 제공하여 2차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네팔 위스키에 어느 정도 취한 우리는 기장으로 담근 퉁바라는 술을 한 잔 하면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옆에서는 주덕초등학교 동창회를 한다고 야단이다. 30년 만에 만났다나? 술이 약간 얼큰해지자 이제 9일째 끊은 담배 생각이 슬그머니 났다.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금연이 가능할 것 같이 생각되었다. 분위기도 그렇고 해서 내가 큰 소리로 말했다. “내일이 최광옥 선생님의 생일이라 내가 친구로서 닭을 한 마리 사겠다” 그리고 나는 슬그머니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맛이 좋았는데 머리가 핑 도는구나. 약속을 합리적으로 깼다고 생각한 나는 스스로 내 꾀에 속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얘이! 미련한 놈! 스스로 자책한다) 또 롯지의 밤이 깊어간다. 우리가 밤 12시 정도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하자 다음날 주인이 “한국 사람은 자신의 롯지에 처음 받아보는데 한국 민족은 잠을 잘 안자는 민족 같다”고 했다. 전기가 없는 이곳에서 해가 넘어가면 잠을 잘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그러니 밤 12시까지 안 자고 이야기하고 노는 우리를 보고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르겠다. 내가 핀조에게 ‘이곳은 특별한 밤 문화가 없어 연년생 아이들이 참 많은 것 같다’고 하자 핀조가 한참을 웃는다. 비교적 힘든 하루였다.  

 

*1/15 캉친콤파-랑탕-리마호텔 “고향에 가지 못하는 영혼들”

   오늘은 캉친콤파를 출발하여 랑탕의 학교 방문을 마치고 라마호텔까지 가는 긴 여정이다. 역시 다시 보아야 보이는 걸까 랑탕까지 내려오는 길에 올라갈 때는 힘이 들어서 자세히 보지 못했던 티벳 영혼들을 나는 다시 보았다. 길가에는 수많은 티벳 묘지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지형적으로 이곳은 티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물과 목초를 찾아 야크와 양을 몰고 고개를 넘어 이곳으로 들어왔다. 그들도 언젠가 이곳에서 야크를 치며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는 길은 너무 멀다. 자식을 낳고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끝내 고향으로 갈 수 없었고 이곳에 그 후손들이 살게 되었다. 어찌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지 않으리오. 죽은 그들의 묘지는 돌로 만들었고 그 돌에는 티벳 언어로 새긴 불경(마니석-경문을 새긴 돌)의 글귀들이 선명하고 부처님의 모습도 돌에 새겨 놓았다. 산길에서 마니석 옆을 지날 때에는 그 왼쪽으로 걷는 것이 정도라고 한다. 고향을 그리는 그들의 마음은 바람에 휘날리는 만장과 고향을 향한 솟대로나마 망향의 한을 달래고 있었다. 원래 공립학교 방문 시 우리 일행은 학생들을 위하여 간단한 연극을 하기로 했었다. 제목은 “금도끼 은도끼의 나무꾼 이야기”인데 사람들이 배역을 정할 때 만장일치로 나를 나뿐 나무꾼으로 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핀조의 이야기로 그 이야기는 여기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문화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올챙이 송으로 바꾼 것인데 어찌하여 내가 만장일치로 나뿐 나무꾼에 선정되었을까? 사실 나는 나뿐 나무꾼보다 훨씬 더 못한 사람일지 모른다. 사람들의 순간적 안목에 괜스레 부끄러워진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온 마을이 무척 소란하다. 절대적으로 물자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어른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 아이의 학용품이며 옷가지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난리가 났다. 15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로 구성된 이 학교의 열악함을 무엇으로 말하랴. 화가 난 그 학교의 선생님은 학용품을 마구 뿌렸다. 멀리서 온 이방인의 배려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가 못마땅하고 창피하다는 듯 보였다. 그 선생님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그렇고 어찌되었건 아이들은 여전히 순수했고 우리 선생님들의 올챙이 송을 잘 따라했다. 그리고 우리의 태권도 챔피언 최창원 선생님의 시범이 있을 때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 먼 곳까지 아이들에게 시범을 보이기 위해 도복을 준비하고 맨발로 시범을 보인 58세 이 노 교사에게 어찌 박수를 보내지 않으리오. 마당에서는 아이들과 우리의 레쌈삐리리 노래와 함께 어울림의 한 판 춤이 이어졌다. 잠시나마 행복한 시간이었다. 사실상 랑탕에서 라마까지는 정말로 멋진 랑탕트레킹의 하이라이트인데 우리는 올라갈 때 계곡의 진수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 같다. 수 백길 깊은 계곡과 아열대 원시림이 어우러진 이곳은 세월의 깊이와 자연의 위대함을 일깨워주는 진정한 계곡이다.

 

*1/14 랑탕-캉친콤파 3800m “아름다운 설산 파노라마”

 

  고소 증세가 심한 장창락 기자는 랑탕에 남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캉친 콤파로 향했다. 아침 산바람이 거세게 내리 분다. 기온도 많이 내려간 것 같다. 우리는 파카로 중무장을 했다. 상류로 가면서 계곡의 규모는 줄어들었지만 아직 위세가 크다. 융설수는 큰 소리를 내면서 흐른다. 나 역시 약간의 고소 증세가 나타나는 것 같다. 머리가 찡하고 약간 힘이 없다. 안희상 씨 부부가 힘겨워하는 가운데 서로를 위로하며 놀라운 투혼을 보여 주었다. 종미 선생은 어제부터 증세가 있었는데 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보인다. 설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참으로 아름답다. 봄에 왔다면 고산 식물과 고산 꽃들이 어우러져 정말로 아름다울 것 같다. 리룽 빙하와 킴증 빙하가 아름답다. 같이 간 가이드 핀조가 네팔의 정정을 이야기했다.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모이스트들이 반군인데, 그들은 부자들의 재산을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나누어 가질 수 있다고 순수한 골짜기의 유목민과 농민을 선동한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농민들만 괴롭히고 있다고 했다. 핀조의 어머니도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반군이 와서 당신 아들은 외국에 나가서 돈도 잘 벌고 하니 6개월에 200불 정도를 내라고 요구했다는 것이다. 결국 견디지 못하고 카투만두에 와서 식당을 운영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도 교통 통신의 어려움으로 그들의 결속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오늘 점심은 티벳 빵이었는데 종류도 다양하다. 옛날 우리나라의 국수꼬리 구워 먹던 것을 연상되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3개의 코스로 나누어 그룹별로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대장과 광옥, 재학, 영홍, 종익 등과 같이 우리는 바로 눈앞에 보이는 4400m 정도의 산에 올라가 설산을 근접해서 보기로 했다. 캉친이 3800m 정도이니 약 600m 정도 올라가야 한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산인데 숨이 턱까지 찬다. 고소 증세로 인하여 숨이 차 휘파람 소리가 나려고 한다. 어려웠지만 주변의 랑탕히말의 멋진 파노라마를 볼 수 있었다. 너무 아름답고 경이롭다. 힘이 무척 들었지만 어마어마한 빙하의 흔적과 주변은 나를 놀라게 했고, 안 왔으면 후회했을 것이다. 그리고 운 좋게도 나는 오늘 히말라야의 독수리를 보았다. 류시화 시인의 시에 나오는 독수리를 말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독수리를 나는 보았다. 매우 높이 날고 있었다. 그 산이 4400m 정도였으니 그보다 훨씬 높이 날고 있었다. 독수리는 고소증도 없는가보다. 이 황량한 지역에 먹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의 작은 디카로 사진을 찍었는데 잡혀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살펴본 바로는 캉친 콤파는 주변이 아주 넓은 다양한 일종의 복합 선상지이다. 건조 지역에 잘 발달하는 그런 복합선상지로 구성되어 있고, 이 선상지가 개석되면서 서서히 랑탕 계곡을 만드는 것이다. 왜 이 지역을 랑탕 계곡이라고 부르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실질적인 계곡은 이 선상지가 개석 되면서 랑탕에 이르러 깊은 계곡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오랜 트레킹과 고소 증세로 사람들이 조금씩 예민해 지는 것 같다. 여러 사람이 함께 트레킹 할 때 많은 자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나만 피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대장과 박연수 부대장, 말없이 후미의 사람들을 챙기는 박원래, 나정흠 선생은 훌륭한 산악인이다. 그들의 풍부한 경험이 초보들로 가득한 우리 대원들을 잘 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속으로 고마운 생각이 든다. 계곡 트레킹이라 그런지 지금 여기는 아주 조용하다. 롯지도 17개가 있는데 우리가 롯지를 사용하는 유일한 집단이다. 다른 곳은 텅텅 비어 있다. 이곳은 역시 여름트레킹 지역인가보다. 내일은 랑탕 국립 초등학교를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는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우리의 올챙이 송을 가르쳐 주기로 했고, 네팔의 레쌈삐리리를 합창하기로 했다. 핀조의 도움으로 우리는 노래 연습을 즐겁게 했다. 리마와 그 일행이 멋진 네팔 춤을 보여주었다. 아주 흥겹고 즐거운 밤이다.


 

 

오늘은 비교적 코스가 길어서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아침 7시 30분 모두가 모였고 김영식 대장님이 일장 훈시를 했다. 대열에서 뒤에 쳐지지 말 것, 물을 많이 마실 것(고지대라서 큰 호흡에 수분이 많이 증발 한다는 것이다), 천천히 걸을 것, 사탕이나 초코렛을 먹은 후 포장 종이를 버리지 말 것(사실 우리가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상표가 한국 글씨로 되어 있고 그것을 보고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이 마구 버렸다고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상에 서로를 비방하는 글이 많이 올라오는 것이고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원인이 된다. 진짜 문제는 트레킹 도중에 주변 아이들이 실제로 사탕을 달라고 하는 것인데, 참으로 그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서 사탕을 주면 포터나 그네들은 먹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사탕 포장지를 버린다. 그리고 그것은 곧 우리가 버린 것이 되는 것이다. 나는 2002년 안나푸르나 베이스 켐프까지 트레킹을 했고 이번이 두 번째인데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이들에게 사탕을 주는 것이 잘하는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안 주자니 마음이 안쓰럽고, 주자니 얻어먹는 습관을 길러 주는 것 같고.......

  계속된 계곡 트레킹이다. 참으로 깊은 계곡이다. 어느 정도 걷다가 열린 하늘 사이로 멀리 설산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사진 찍기에 열심이다. 계곡을 배경으로 한 설산은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랑탕의 상류가 보이는 이곳 고라타벨라는 비교적 평지가 넓고, 말과 야크와 양도 꽤 많다. 봄에 꽃이 핀다면 이곳은 참으로 아름다울 것 같다. 우연히 전주에서 왔다는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부부 두 명에 포터를 4명 고용했다고 했다. 그 부부를 보면서 지금 우리가 하는 트레킹은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외국인들을 보면 1-2명이 가이드 한 명을 고용해서 현지식을 먹으면서 다니는데 그것이 진정한 트레킹이 아닌가 생각도 되고, 언젠가 나도 그렇게 해 볼 것이다. 오전보다 오후에는 길도 길고 고도를 1000m가량 높여서인지 대원들도 꽤 힘들어한다. 랑탕의 상류로 오를수록 고산족과 야크가 더 많이 눈에 보인다.

 

진정한 걷기가 시작되는 첫날이다. 아침 8시 우리는 “아자아자” 파이팅을 외치고 출발했다. 처음이라 다들 신기해 한다. 아열대림의 숲을 헤치고 좁은 길을 향해서 우리는 걷는다. 꾀 여러 곳의 현수교를 지난다. 이런 신기조산대의 협곡은 아주 위험하기도 하고 골이 깊어서 계곡을 연결하는데 현수교는 아주 적격이다. 출렁거림과 스릴도 만점이다. 주변에 조그만 땅이라도 있으면 개간하여 경지로 이용한다. 워낙 경지가 협소하여 급경사도 계단식으로 모두 이용한다. 계단식 경작 방식은 토양의 유출을 막고 경지를 고정시키는 역할도 하고, 평탄하여 작업하기도 좋다. 이곳에서의 가장 합리적인 토지 이용 방식일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랑탕 계곡이다. 처음 걷는 것이라 그런지 약간 힘도 들고 주변의 아름다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우선 그 계곡의 깊이와 크기에 압도된다. 주변의 울창한 아열대림은 몇 백 년을 묵었는지 모르겠다. 융설수(融雪水)의 큰 울림과 흐름, 곳곳에 있는 산사태의 엄청난 흔적. 물방아를 이용한 마니차는 쉼 없이 돌고 돈다. 성황당과 같은 만장과 힌두식의 많은 종교적 상징들이 이곳이 성역임을 표시한다. 포터들이 힘겨워한다.

  밤부에서 점심을 먹는다. 떡국인데 육수 국물까지 넣어 맛도 좋다. 그릇 바닥에서 약간의 모래가 씹히지만 문제 될 것이 없다. 첫날이라 다들 조금씩 힘들어 하지만 별 문제는 없는데 우리의 장창락 기자가 진땀을 흘린다. 알고 보니 그는 커다란 두 대의 카메라에다가 많은 사진 장비까지 배낭에 지고 오다가 낭패를 본 것이다. 그는 전문 포터가 아니었다. 결국 사진기 한 대는 최광옥 선생님의 몫이 되었고 최 선생님은 이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최 기자가 되어 버렸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날이 어두워졌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포터들이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겨울 내내 놀다가 운행 첫날 무거운 짐에 녹초가 된 것 같다. 이래저래 사는 것이 힘이 드는구나. 저녁에 우리는 운이 좋게도 이웃집에서 라마제 굿을 실제 보게 되었다. 정초에 악귀를 물리치는 우리네 옛날 굿판 같았는데 모두 아주 숙연한 분위기였고 멋졌다. 굿판이 끝나고 그네들의 전통 술인 창을 마셨는데 우리 막걸리와 맛이 비슷하다.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것이라고 했다. 밤하늘에 별이 수없이 쏟아지고 있다. 히말라야   밤하늘의 별은 정말로 아름답다. 머리 위에서 수없이 반짝이던 그 많은 별들을 잊을 수가 없다.


1월 네팔(5)설 ‘로살’(네팔 설 로살에 관한 글을 옮겨보았다.)


네팔에도 설이 있습니다. 새해를 맞으며 가족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모습은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네팔 사람들도 우리만큼 설을 정겹게 보냅니다.

네팔은 태음태양력인 비크람삼버트력을 사용하는 탓에 양력 기준으로 하면 매년 설 날자가 조금씩 변합니다. 네팔의 설 ‘로살’은 보통 양력으로 4월 14~16일 사이에 찾아옵니다. 로살의 ‘로’는 해(year), ‘살’은 새로운(new)의 의미입니다. 네팔의 신년 맞이는 11월경(양력 2월)부터 시작됩니다.

네팔의 11월은 ‘검은 달’입니다. 나쁜 기운이 강하다고 믿기 때문에 11월에는 결혼식 등 축하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11월에 태어난 아이는 불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아이 낳기를 꺼릴 정도입니다. 네팔도 남존여비적인 문화를 갖고 있어 어떤 지방에서는 11월에 태어난 딸은 평생 배필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참으로 끔찍한 일입니다.

 

라마승려(왼쪽)가 구마의식인 또나고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지 않는 오른쪽에서 북을 두드리며 불경(페자)을 읽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려운 11월에 네팔인들은‘또나고숨’이라는 구마(驅魔)의식을 치릅니다. 라마승을 초빙해 집안에서 옥수수와 보리 가루를 섞은 ‘잠바’로 4가지 색깔(동서남북을 의미)의 제웅(除雄)을 만듭니다. 제웅 주변에 작은 촛불을 켜고 악귀를 쫓는 불경(페자)을 읽은 뒤 잠바 가루를 뿌려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악귀가 실린 제웅을 집 주변으로 가지고 나갑니다.

또 나고숨 때 사용하는 제웅. 다양한 크기의 것을 여럿 만들고 촛불을 켜서 신비스런 분위기입니다. 이 의식을 주재하는 라마승이 제웅을 들고 나가는 방향을 정해주거나 사방 4곳으로 모두 들고 나갑니다. 집주인과 이웃 사람들은 제웅을 놓은 뒤 칼을 뽑아들고 강렬한 소리를 질러 악귀를 위협합니다. 힘을 합쳐 다시는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것이지요. 악귀를 이긴 주인과 이웃들은 뺨에 잠바 가루를 발라 승리를 표시하고 창(쌀로 만든 술)이나 럭시(기장과 누룩으로 만든 민속주 둠바를 증류한 독주)를 마시면서 자축합니다.


바닥에 흰 잠바 가루를 뿌린 것이 보이실 겁니다. 악귀가 실린 제웅을 들고 나갈 때 이것을 밟고 나갑니다. 로살 이틀 전 네팔인들은 ‘시마랑구’라는 과자를 만들어 먹습니다. 과자 안에는 한해의 운수를 가늠해볼 수 있는 9가지 상징물이 들어있습니다. 고추, 소금, 숯, 양털, 콩, 밀가루로 만든 해, 달ㆍ별ㆍ네모과자 등은 각각 게으름, 악운, 알뜰함, 수다스러움 등 한해의 운수나 경계해야 할 것들을 의미합니다. 과자 속에서 새해에 스스로를 다스리는 지혜를 찾아내는 것이지요.

우리가 ‘까치설날’로 삼는 그믐날 네팔인들은 집안을 정갈하게 청소합니다. 설날 새벽, 좋은 옷을 골라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마을의 가장 좋은 샘물에서 물을 길어 올리고 여기에 버터로 만든 물고기를 띄워 집에 가져옵니다. 가장 먼저 길어 올리는 이와 가정에 복이 온다고 해서 경쟁이 치열한 편입니다. 여기에 띄운 물고기를 ‘금(金)물고기’라고 부르는 것도 특이합니다. 이 물을 4~5일간 집안에 정갈하게 보관했다가 가족들이 나누어 마십니다.

물을 길어온 초하룻날 아침에 사원에 가서 음식을 바치며 복을 기원하는 것 외에 네팔 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쌀로 빚은 술 창과 ‘갑세’라는 밀가루과자를 만들어 먹으며 쉽니다. 이날 이웃집 방문은 금기입니다.

초이튿날부터 한 달 동안에는 반대로 이웃집을 돌면서 그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흥겹게 춤추며 놉니다. 레삼삐리리 등 네팔의 민요는 단순하면서도 흥겹고 춤을 동반하기에 여러 사람이 어울려 흐르기에 좋은 노래입니다. 우리 민요의 쾌지나칭칭나네와 비슷한 반복 구조를 가지고 있는 노래입니다. 멀리 떠나 부재중인 가족이 있으면 ‘갑세’를 수북이 쌓아 따로 상을 차려 놓은 채 한 달 동안 그를 기억합니다. 떨어져 있으나 마음속에 언제나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지요.

당신의 마음속에는 지금 누가 있습니까. 네팔 인들처럼 따로 상을 차려 기억할 그 누구 말입니다.



 

 


 

*1/11 자연의 신에게 목숨을 맡기다

오늘부터 진정한 트레킹에 접어드는 시간이 시작된다. 7시 30분 호텔에서 버스에 모든 짐을 싣고 트레킹의 출발점인 샤브로베시로 간다. 카투만두 시내를 벗어나면서 시작되는 수많은 검문이 이 나라의 현재 정정을 말해준다. 랑탕으로 가는 길은 포카라로 가는 길보다 정말 험하고 위험한 것 같다. 깎아지른 절벽과 산허리를 깎아 만든 길로 인하여 아찔한 순간이 계속된다. 경사가 심한 이곳은 신기조산대의 특성상 여름의 폭우에 언제나 산사태가 일어날 수 있고, 실재로 곳곳에 산사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사태로 유실된 도로는 지금도 이곳 사람들의 수작업에 의해서 아주 서서히 복구되고 있으나 언제 복구가 끝날지 알 수 없다. 아니 완전한 복구란 없다. 언제나 엄청나게 빠른 지형 변화가 나타나는 곳이니까 말이다. 무너지면 일시 복구하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좌우로 흔들리는 버스는 전복 직전이다. 최소한 500m가 넘는 저 낭떠러지기로 버스가 구른다면?(버스를 탄 사람은 누구나 이런 상상을 할 수 밖에 없는 곳이다) 이 버스 안의 사람은 누구 하나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다. 히말라야의 신에게 목숨을 담보하는 것이 훨씬 속이 편할 것 같다. 8시간 가까이를 달린 후에야(거리는 멀지 않지만) 샤브르베시에 도착했다. 깊은 계곡의 물은 아주 큰 소리를 내며 흐른다. 수천길 계단식 경작지는 역사 이래 이곳 주민들의 조상들이 얼마나 고된 삶을 살아 왔을까 하는 역정을 말해준다. 곳곳에 돌아다니는 버팔로, 양과 닭, 결국 이들도 험한 이곳에서 인간과 공존할 수밖에 없다. 저녁은 이곳의 토종 닭 볶음이다. 덴지의 솜씨가 다시 나를 감격시켰다. 어찌나 맛이 좋던지, 안희상 선배님이 한마디 했다. “덴지 나와 함께 한국 가서 닭볶음 식당이나 하자구!” 이렇게 하루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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