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7월 20일 09시 05분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0시 55분 도야마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이후 중식을 하고 등산장비점에 들러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였다. 잠시후 히라유온천으로 이동하여 발온천 체험을 간단히 갖고 휴식을 취한 다음 목적지인 호다까다케를 향해 출발 숙소인 가미코지에 있는 고나시타이라롯지에 도착하여 석식을 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일본은 자연보호에 철두철미하여 우리나라의 설악동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가급적 개발을 하지 않고 편의 시설을 최소화하여 사람보다 자연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덕분에 주차장에서 숙소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7월 21일 아침 7시 가미고지를 출발 메이신-도쿠사와엔-요코오-혼타니바시를 지나 가라사와산장에 16경 도착하여 짐을 풀고 산장테라스에서 가라사와카르의 설계(雪溪)를 감상하였다.
산을 오르는 도중 만년설에서 녹아내린 물줄기가 거대한 내를 장관을 이루고 있건만 내에 들어가 발을 담구거나 손을 씻는 일본인을 구경하기가 어려울 만큼 일본인은 자연보호 정신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산장에 오르는 도중 군데군데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녹지 않는 만년설이 존재하였고 이제 막 싹을 움트고 있는 나무, 풀포기 등이 신비하게 느껴졌다. 이곳 산장 부근은 한겨울에 약30m가량의 적설량을 보이기도 한다고 한다. 엄청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우리가 묵을 숙소는 9월말이면 철수를 하여 이듬해 5월 쯤 다시 오픈한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축구게임을 관람하면서 일행과 대화를 나누다 잠을 청하였다.
7월 22일 산장에서 아침을 가볍게 먹고 가라사와를 출발 고산병을 염두에 두고 천천히 천천히 등반, 능선 정상부위에 있는 호다카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오쿠호다카다케(3190m)를 향해 너덜길을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일본 북알프스도 히말라야와 마찬가지로 빙하에 침식되고 오랜세월을 거치면서 풍화되고 하여 산 전체가 푸석푸석하였다. 그래서 매우 위험하고, 낙석 등 슬립에 의해서 등반객의 사망사고가 빈번하다고 한다.
일본 등산의 특징은 이정표가 거의 나무판으로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하여 넘어지기 일보 직전에 있는 것이 많이 있고 앞으로 목적지까지 얼마나 가야하는지 Km가 적어있는 곳을 볼 수 없다. 가끔은 몇 시간 정도 걸린다는 표지판을 본적은 있지마는. 또한 아주 위험한 구간만 손을 잡을 수 있게 손잡이와 쇠사슬을 묶어 놓은 것 외에는 난간 같은 이정표나 낙석 방지시설이 거의 전무하다. 본인들이 알아서 잘 다니고 자신 있는 사람만 오르라는 뜻일까. 아니면 자연 사랑을 너무 기울리다보니 자연파괴를 걱정함일까. 그러나 곳곳에 많은 산장들을 만들어 놔 등산객이 위험에 대처 할 수 있게끔 해주고 음식은 잘 해주어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것과 화장실 변기도 따뜻하게 해놔 등산객의 편리를 생각 해주는 것이 대조를 이룬다.
우리 일정상의 정상이라 할 수 있는 오쿠호다카다케에 도착하였을 때는 운무로 가득하여 주변의 경관을 분별하기가 쉽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하산을 서둘러 예정보다 일찍 가미고지에 도착하였다. 히라유 온천으로 이동 숙소인 나카무라칸 호텔에서 짐을 푼 후 일본식 전통 온천에 몸을 담그고 산행의 피로를 풀었다.
7월 23일 아침 식사 후 다카야마로 이동 다카야마 아침시장과 전통거리를 관광하고 나고야 중부국제공항으로 이동 17시 나고야공항을 출발 18시 55분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일본은 한국과 이웃하고 있으면서도 너무 많은 점에서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도야마국제공항 도착 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들른 일본식당의 음식은 푸짐함과는 거리가 먼 한마디로 정갈하였다. 한국사람이 맵고 짜게 먹는데 비해 일본사람은 싱겁고 달짝지근하게 먹는 편이었다. 한국은 공동체문화가 발달하여 찌개 등을 가운데 놓고 여럿이 같이 먹는 반면 일본은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음식상을 따로 차려내고 있었다.
가미코지의 숙소나 히라유의 호텔방이나 일본인들은 짚으로 만든 다다미란 것을 바닥에 깔고 있었다. 아마도 습한 섬나라의 바닥이 짚이 아니면 끈적거리기 때문이리라.
가라사와 산장에서 일본인 여자 두 명과 잠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국사람들은 대개 솔직하고 직선적이어서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는 성격인데 반해, 일본인들은 속에 있는 생각과 말하는 게 전혀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길 대단히 꺼려하고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깍듯이 예의를 지키며 본심을 말하더라도 빙빙 돌려 말하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의 본심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호다까다케 등반후 가미고지에서 버스를 탔을 때나 다카야마에서 나고야 공항을 향해 가다 휴게소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을 때 버스안과 식당이 너무도 조용하였다. 일본인들은 대화를 작은 목소리로 마치 소곤거리듯이 나누고 있었다. 일본은 역사적으로 조화를 중시 여겨 왔다. 조화를 중시여기는 일본인은 분수를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분수를 정확히 지키고 자신이 맡은 일을 완벽히 해내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이를 벗어나는 것은 곧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동이라고 여긴다. 어린이 교육 1장 1절에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한다. 가령 식사 때 한 가지 음식을 여러 사람이 같이 먹지 않고 한 사람 앞에 한 사람 몫을 따로 차려 내오는 것도 남의 몫에 손을 대지 말고 자기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의미가 아닐까? 양이 모자란다고 남의 음식을 넘보는 것은 있을 수 없을뿐더러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우도록 적은 양의 음식이 나오는 이유도 음식을 남기는 것도 자기 몫을 다하지 못하는 행위로 보기 때문이다.
다카야마 아침시장과 전통거리를 관광할 때 본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친절하였다. 조화를 중시여기는 일본인들은 스스로 알아서 상대방을 높여주고 자신을 낮추며 상대방이 편안하고 즐겁도록 항상 신경을 쓰는데, 이것이 상대방에 대한 친절로 나타나 싹싹하고 나긋나긋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도야마국제공항에서 히라유로 이동하는 도중 장비점에 들러 등산용품을 몇 점 구매하였다. 일제티타늄제 제품으로 아주 쓸만하였다. 일본제품이 세계 최고 수준의 품질을 자랑하게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시다바이간(1685~1744)은 당시 심각한 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 자체가 수양이며 일하는 것이 곧 도를 닦는 것과 같으며 근면은 미덕이니, 이익이 없더라도 열심히 일하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은 노는 시간을 줄여 열심히 일을 더하게 되었고, 사람은 남아돌고 경쟁은 치열한데 여기서 살아남자면 남이 만든 물건보다 훨씬 우수한 물건을 만들어야 하니까 온갖 아이디어를 내고 한번 손볼 것을 두 번, 세 번 손보고, 완성된 물건도 여러 번에 걸쳐 품질을 확인, 또 확인하니 완벽한 품질의 제품이 탄생하게 되었다. 일본 제품이 최고의 품질을 갖추게 된 데에는 이런 역사적 배경이 깔려 있다.
나고야 중부공항으로 가는 도중 끝없이 펼쳐진 시가지 어디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십자가가 보이지 않았다. 지진 발생에 대비하여 아파트 보다는 단독주택을 더 선호한다는 일본의 거대 도시 어느 곳에서도 십자가니 불교의 상징물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한국인들은 하나의 종교를 가지면 결혼식, 장례식 등도 각자 자신의 종교방식을 따르는 철저함을 보여주는 반면 일본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든지 말든지 자신의 종교의식에 연연하지 않는다.
일본이 자신의 분수를 너무도 잘 알아 서로가 폐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분명히 지키며 완벽에 가까운 질서와 자유를 누리고 있고 필요할 때는 순식간에 단결하여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데 반해 한국은 각자가 스스로를 왕처럼 여기고 남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부족하고 질서의식이 다소 약해서 국가가 국민의 힘을 필요로 할 때 하나로 모으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왠지 엉성하고 서로 간에 따로따로 노는 듯한 우리 사회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맺어져 있는 정이라는 끈끈한 접착제가 단단히 굳는다면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인 일본사회보다 더 큰 에너지를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